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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자본의 한계'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영국의 공간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는 그런 그가 2012년에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1982년에 나온 '자본의 한계'는 그동안 마르크스주의가 중시하지 않았던 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발굴하고 그것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접합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건 1971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세미나로 읽기 시작하여 무려 10년간 '자본론'을 연구한 끝에 나온 결실이었다. 아무도 돌아다보지 않았던 공간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새로이 구성했기 때문에 책은 당연히 어려웠고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이지만 사실 가장 읽히지 않는 그의 대표작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종의 신념처럼 '자본의 한계'에 투영했던 입장을 내내 관철시켰다. 그런 그에게 있어 도시로 관심이 옮겨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자본의 한계'에 뒤이어 1985년에는 '자본의 도시화'와 '의식과 도시경험'을 내놓았고 결국 그 결정체로서 1989년에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도시의 정치경제학'을 내놓았다. 도시에 관한 그의 책은 2000년에 나온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근대의 핵심이자 파리 혁명을 통한 저항의 도시였던 파리가 어떻게 그 후 반저항의 도시로 탈바꿈하는지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정치경제학적 동인을 파헤쳤던 책이었다. 더구나 그 '파리'는 데이비드 하비 자신에게도 아주 의미있는 곳으로 그가 지금처럼 평생을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에 헌신하게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파리에서 일어난 '68혁명'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론에 머무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실천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원했으며 그가 해 온 모든 이론 작업은 결국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맞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란의 도시'는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온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바탕을 둔 공간의 정치경제학이 집약적으로 들어간 가운데 보다 약탈적이 된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서 어떻게 저항의 동맥을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방향은 처음부터 제시되고 있다. 바로 역시 68혁명을 계기로 앙리 르페브르에 의해 제기된 '도시권'을 되살리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도시권이 애타는 호소인 동시에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도시권은 도시 일상 생활이 쇠퇴하는 위기에서 비롯하는 실존적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호소였다. 또 도시권은 이 위기를 똑똑히 직시해 대안적 도시생활을 창조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구였다.(p. 9)


 이러한 도시권은 단순히 말하자면 내가 살고 싶은 환경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도시 공간의 형성 과정에 행사하는 권력, 즉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만들고 뜯어고치는 방법을 지배하는 권력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p. 28)


 사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정작 우리가 거주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선 수동적이었다. 소수의 입안자들이 선을 긋고 중장비를 가져와 파내기 시작하면 그러나 보다 생각하기 일 쑤였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걸 하나의 권리로 만들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여기에 도시인들이 개입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도시라는 공간의 그 어떤 배치든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잉여 가치가 사회적, 지리적으로 집적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도시화는 언제나 일종의 계급 현상이었다. 잉여가 어디서, 누구에게서 추출되건 그것을 사용할 권한은 소수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다.(p. 28)


 그러므로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소수의 손아귀에만 주어진 작업에 대중들 스스로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착취의 선들을 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왜 도시화는 언제나 소수 자본가의 착취와 약탈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는 계속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해야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해야만 하는 압박에 놓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필연적인 법칙인 '이윤율 저하 경향' 때문이다. 생산의 지속과 확장은 이윤율을 자꾸만 떨어뜨린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이대로 방치하다간 결국 공황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은 너무 생산물이 많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그건 바로 잉여 생산물들을 흡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본가들에겐 이윤율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잉여 생산물을을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도시 공간 형성에는 대규모의 재화가 필요하다. 한 마디로 단번에 잉여 생산물을 써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때문에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화가 진전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 모두가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는 그 실제 사례로써 프랑스 제2 제정기 당시에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파리를 재개발했던 것과 1942년 미국에서 로버트 모제스가 오스만에 영감 받아 뉴욕 주변에 대규모의 거주 공간을 마련했던 것을 든다. 오스만이 당시 파리에 과잉된 자본을 흡수하기 위해 파리를 근대적 도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면 모제스는 뉴욕이라는 도시만이 아닌 그 외곽까지 포함하는 대도시권 전체의 재개발로 변모시켰다고 한다. 모제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각종 대규모의 도시 기반시설로 당시에 과잉된 자본을 흡수했는데 이러한 뉴욕의 재개발은 이후 모든 나라의 도시 재개발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도시화란 다름아닌 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할 수 밖에 없는 잉여 생산물의 흡수를 위한 작업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언제까지나 여기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시화에도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결국엔 공황으로 이어지듯이 이런 식의 도시 공간 형성은 장기적으로는 결국 투기로 변질된다. 의제자본 때문이다. 의제자본은 실제 자본은 아닌데 자본으로 의제되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란 어디까지나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통해 얻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은 획득물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자다. 이자는 어디까지나 돈이 돈을 낳는 것으로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의제자본'이라 한다. 자본이 아닌데 자본인 척 행동하기에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말에 반감이 든다. 이자도 결국 자본이 생산한, 그렇게 자본이 아닌가? 우리는 이걸 당연히 돈의 생산물로 간주하지만 사실 이자는 중세까지만 해도 죄악시 될 정도로 이유없이 뜯어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빌려준 돈이 새끼를 쳐서 그 이자까지 갚아야 한다는 건 유태인말고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소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노동을 매개해서만 인정되었다. 따라서 이자에 대한 지금의 관념이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의제자본이 바로 그렇다. 의제자본은 주로 생산된 것이 또 한 번 만들어낸 2차적 생산물로 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순환하기 위해 발라주는 윤활유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자를 생각하듯이 거기에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어떤 생산적인 활동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의제자본을 물신적 구축물이라 부른다. 외면만 보게 만들어 그것을 창출한 실제 사회적 관계는 은폐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은폐된 사회적 관계는 뭘까? 그게 바로 착취다. 혹은 약탈이다. 의제자본은 잉여가치의 이차적 형태다. 따라서 유통이나 금융 부문도 의제자본이다.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제자본들은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으므로 실제 가치 이상으로 무한히 증가될 수 있다. 서로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한쪽 은행이 다른 쪽 은행에서 돈을 빌려 그 돈을 그대로 그 은행에게 빌려준다. 실제 돈은 그대로이지만 양쪽에서 카운트 되는 자산은 두 배로 늘어나 있다.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도시 공간 형성은 바로 이 의제자본들이 마구 흘러드는 과정이다. 의제자본이 의제자본을 낳는다. 결국 투기 붐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부동산 거품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거품과 그 붕괴 현상은 특이점이 아니라 자본주의 도시에 있어서 상수인 것이다.


 그런데 그 피해는 모조리 보다 덜 가진 쪽에 훨씬 더 가중된다. 도시화는 어디까지나 잉여 생산물 흡수를 통한 계급 착취의 과정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용산 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도시권의 획득을 통해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도시는 모두 같이 살아가는 영역이므로 결국 도시권을 요구함은 공유재를 둘러싼 투쟁으로 나타난다.


 공공 공간 및 공공재의 생산과 접근을 누가, 어떻게, 누구의 이익을 위해 규제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늘 투쟁이 벌어진다. 도시의 공공 공간과 공공재를 공동의 목적을 위해 영유하려는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p. 137)


 그런데 데이비드 하비는 이 공유재를 단순히 재화로 해석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그 보다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관계로 보아달라고 말한다.


 사실 공유재를 만드는 사회적 실천이 존재한다. 이 실천은 특정 사회 집단만 배타적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사회 구성원 전부가 부분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이용하는 공유재와의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확립한다. 공유재를 만드는 실천의 핵심에는 사회집단과 환경의 공유재적 측면 사이의 관계는 집단적이고 비상품적이어야 한다는, 즉 시장교환과 시장평가의 논리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p. 138)


 이런 도시의 경관이 대표적인 공유재다.

 

 유명한 그리스의 산토리니다. 집 하나하나는 저다마 개인의 소유물이지만 집단적으로 연출한 이 경관은 공유재다. 그게 너무도 멋져서 죽기 전에 꼭 가 보아야 한다는 말까지 듣는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 집단은 각각의 일상적 활동과 투쟁을 위해 도시라는 사회적 세계를 창조하고 그럼으로써 그 안에서 거주 가능한 하나의 틀로 공유재를 만들어낸다. 이 문화적으로 창출된 공유재는 아무리 사용해도 파괴당하거나 하지 않지만 과도하게 남용되면 질이 떨어지고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린다.(p. 139)


 사람들이 산토리니로 가는 건 다른 어디에서도 산토리니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그걸 '독점지대'라고 말한다. 다른 어디에도 없어서 그 독특함과 희소성으로 가치를 가지는 공간을 일컫는다. 그 반대엔 '디즈니화'된 공간이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다. 독점지대는 이러한 공유재가 얼마든지 재화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산토리니의 매력 때문에 많은 관광업자들이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공유재를 어떻게 창조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헤이온와이'처럼 독점지대로 이윤을 창출할수도 있고 '디즈니화'되어 그렇고 그런 공간 중의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 하비가 이렇게 공유재와 그것을 통한 독점지대의 창출을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시권을 이 시대에 걸맞는 인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이다.


 그동안의 인권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소유권을 바탕으로 하여 설정되어왔다. 자유가 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소유권을 바탕으로 했듯이 말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제 인권의 개념이 그 개인의 소유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공공으로서의 인권의 대표로서 '도시권'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권'이 그저 가설의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충분히 형성 가능한 인권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공유재로서의 도시'와 그 '독점지대'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의 지자체들은 이 독점지대를 가지기 위해 발버둥이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관광산업 때문에 더욱 불타오르고 있다. 이제 공간은 집합적 상징자본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갈수록 막중한 역할을 한다.


 집합적 상징자본의 힘, 즉 어떤 장소에 특별한 차별성을 부여하는 행동이 갖는 힘이다.(p. 184)


 이는 도시 거주민의 집단적 실천이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들의 노동으로 인한 것이므로 진정한 자본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독점지대를 왜 강조하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착취와 약탈을 수반하는 의제자본으로 넘쳐나는 도시화를 막는 길이기 때문이다. 도시권은 바로 그러한 집합적 상징자본을 만들어내는 참여이며 그 참여를 통해 그 어디에도 없는 자신들만의 독점지대를 만드는 가치의 창출이다. 또한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장 교환을 배제하므로 반자본주의적이다. 즉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권의 요구와 그러한 도시에의 전면적 참여가 결국 반자본주의 운동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니 그 둘은 꼭 함께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 정도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흐름에서 데이비드 하비는 어떤 도시에서 시민들이 보다 나은 삶적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위해 참여하고 투쟁하면 자연적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리라 보고 있다. 더우기 거기에 대한 실제 사례까지 존재한다. 바로 2000년 볼리비아에서 민영화된 식수 때문에 일어났던 엘 알토시의 시민의 저항이다. 거기다 2011년의 런던 봉기와 뉴욕의 월 스트리트 점령 운동도 있다. 이런 사례들을 검토하며 데이비드 하비는 그 역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다.


 즉 반자본주의 투쟁이 결국은 보다 나은(순수한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도시에서의 삶을 결국 가져다 줄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목적을 위한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이 가졌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난다. 결국 그가 '반란의 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대로 반자본주의 운동과 도시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그리 격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어디까지나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게 이 책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한 뒤로 약탈이 더욱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의 도시화는 서울의 아파트가 그러하듯 개인을 더욱 파편화시켜서 저항의 연대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럴수록 약탈은 더욱 전면화되고 노골적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빨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이 드러낸 이빨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분노하지만 그 분노를 넘어 연대를 위한 거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막상 잘 알 수가 없다.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는 바로 그 시작을 위한 공간을 어디에 설정해야 할 지 알려준다. 무엇보다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더이상 지금과 같은 분노와 절망을 겪지 않도록 만드는 투쟁의 현장이라는 것을. 덕분에 도시에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아주 잘 알게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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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2015-03-1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ㅉㅉㅉ
 
재앙의 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정태원 옮김 / 검은숲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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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엘러리 퀸씨, 당신의 성생활에 대해 들려주시죠. 그런 게 있다면."


 '말타의 매'로 하드보일드를 탄생시키며 문학이 무엇보다 현실적이어야 함을 강조했던 더쉴 해밋이 엘러리 퀸을 두고 한 말이다. 엘러리 퀸이 등장하는 소설에 많은 여자들이 등장하지만 늘 매력적인 독신남으로 나오는 엘러리 퀸이 그녀들중 누구와도 특별한 관계를 가지지 않음을 비꼬며 한 말이다. 한 마디로, 엘러리 퀸은 비인간적이며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다.


 사실 그건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만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만 것이다. 전쟁은 탐정의 무기력을 입증하는 거대한 증거였다. 탐정은 아무리 어려운 범죄도 관찰과 논리의 힘으로 해결했다. 탐정의 눈부신 이성의 빛 아래에서 해결되지 않는 범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없었다. 그건 탐정 소설을 즐겨 벗했던 대중들에게 근대에 의해 태동한 이성의 힘을 신뢰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 이성이 바탕이 되어 움직일 역사의 진보도 믿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뢰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독일의 민중이 거세게 나치즘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성의 파괴'라 불렀다. 그렇게 돌연 거대한 광기가 세계를 뒤덮어버렸다. 그토록 눈부셨던 이성의 빛은 삽시간에 꺼져 버렸다. 그건 탐정들이 더 이상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의 뼈저린 확인이기도 하였다. 탐정들은 자신들의 무기력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쟁은 셜록 홈즈의 후예들도 모조리 아우슈비츠로 끌고 가 버렸다.


 이러한 탐정의 선두에 엘러리 퀸이 있었다. 관찰은 셜록 홈즈에게 한 수 접어야 할지 모르나 치밀한 논리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그만큼 그는 찬란한 이성의 빛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전쟁 앞에서 누구보다 자신의 무기력을 절감해야했다. 그 어떤 탐정들보다 역사의 둔중한 주먹을 많이 맞은 그는 그동안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믿음은 그저 착각이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달라져야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다시는 이와 같은 광기의 전쟁을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는 길을.


 엘러리 퀸의 제3기라고 흔히들 말하는 '라이츠빌 시리즈'는 그렇게 태어났다. 말하자면 이는 엘러리 퀸의 뼈아픈 반성의 산물이다. 당연히 라이츠빌 시리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엘러리 퀸은 뒤늦게 사건에 뛰어드는 존재가 아니다. 사건의 처음부터 함께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해결사 보다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더욱 많이 한다는 것이다. 사건의 처음부터 그는 보고 쓴다. 더이상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의 모습은 그에게 없다. 심장이 없는 듯 보였던 차가운 논리만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공감을 한다. 인간적인 공감을. 타인들이 왜 그러는지 현상 보다 그 동기를 더 헤아리려 한다. '라이츠빌'에서 엘러리 퀸은 무엇보다 따뜻한 심장을 지는 인간으로 나타난다. 더이상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을 찾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되도록 사건이 일으킨 아픔에서 치유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자신이 아는 진실을 묻어 둘 수도, 밝힐 수도 있는 인물, 그것이 바로 엘러리 퀸이다. 놀랍게도 그는 사랑도 한다.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초식남의 모습은 '라이츠빌'에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엘러리 퀸은 더쉴 해밋의 저 비아냥 거리는 질문에 이 작품을 통하여 제대로 대답한 것이다. 나도 성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것이 '라이츠빌'이다. 진정 성숙한 어른이 된 엘러리 퀸을 만날 수 있는 시리즈. 그 첫 작품이 되는 '재앙의 거리'는 '라이츠빌'이 간직한 모든 것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완전히 달라진 엘러리 퀸을 보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모두가 평가하듯이 '재앙의 거리'가 그 많은 엘러리 퀸이 등장하는 작품 중에서 세 개의 베스트 안에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터닝 포인트'를 너무도 선명히 드러낸데다 마치 얼마나 반성을 많이 했는 지를 보여주려는 듯 완성도와 깊이까지 나무랄 데가 없기 때문이다.


1942년에 나온 '재앙의 거리'의 미국 초판본 표지.

엘러리 퀸이 라이츠빌에서 임대한 주택이자 사건의 주된 배경이 되는 '재앙의 집'이 그려져 있다.


 소설 '재앙의 거리'를 처음 여는 챕터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엘러리 퀸, 미국을 발견하다.'다. 2차대전의 와중에서 엘러리 퀸은 마치 이제야 미국을 발견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아예 그 스스로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라이츠빌은 시골이다. 그는 지금까지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에 있었다. 드보르작은 미국 여행에서 도시를 체험하고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활력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만큼 미국의 도시는 이성이 열어젖힌 '신세계'였다. 이성이 가져다 줄 진보의 표상이었다. 그 도시들 중 뉴욕은 가장 선두에 있었다. 엘러리 퀸은 그렇게 이성이 가장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었던 뉴욕에서 한적하고 다소 고립된 시골 '라이츠빌'로 온 것이다. 그 곳은 건국 초기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것 같은 그렇게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다. 바로 이러한 라이츠빌을 두고 엘러리 퀸이 '미국을 발견하다'라고 한 것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미국이라는 것을 재음미 해보겠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이성에 대한 맹신과는 다른 관점에서... 


 왜 그가 라이츠빌로 온 것일까? 그 이유는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는 여기서 장기간 머무르면서 소설 같은 걸 쓰기로 작정한 듯 하다. 부동산에 들러 장기 임대할 주택을 알아본다. 페티그루라는 중개업자가 한 집을 소개한다. 이 마을을 세운 라이츠빌 가문이 곧 결혼할 신혼 부부를 위해 만든 집이라 한다. 집을 둘러보고 마음에 들었던 엘러리 퀸은 계약하기로 한다. 한데 퀸이 소설가라는 걸 듣자마자 혹시 소설 쓰는 데 도움될 지 모르겠다면서 집에 얽힌 비밀을 말해준다. 그 집은 라이츠빌 마을에서 '재앙의 집'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집에 살려고 했었던 이들에게 하나같이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살려고 했던 신혼부부는 남편이 갑자기 사라져 그러지 못했고 그 뒤에 이 집을 임대하려던 사람은 갑자기 죽었다.


 미국 초기의 모습을 간직한 듯 보이는 라이츠빌에서 거주할 집은 이제 안전하지 못하다. 집은 재앙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건 어쩌면 엘러리 퀸이 바라보는 현대의 미국인지도 모른다. 초창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그들이 바랐던 것은 무엇보다 자유와 가족의 안전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러리 퀸은 '재앙의 집'을 통해 넌지시 반문한다. 결국 미국이 해왔던 것은 안전해야 할 집을 재앙의 공간으로 만든 것 뿐이지 않느냐고.


 그럼 처음부터 문제는 이 집에 있었던 거였구나. 엘러리는 생각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사건은 어디서든지 집과 연결되어 있다. 재앙의 집... 앨러리는 맨 처음 이 말을 만들어 낸 신문기자가 혹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p. 177)


 엘러리 퀸은 이제 왜 지켜져야 할 집이 도리어 재앙의 공간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탐색한다. 이전과는 달리 따스한 심장을 지닌 관찰자로서...


 마치 역사를 복기하기라도 하듯, 3년 전 미스터리하게 실종되었던 남편이 돌아오고 내내 그를 기다렸던 애인 노라와 다시 결혼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원래 그들의 신혼집이었으므로 엘러리 퀸은 주저없이 양보하고는 라이츠빌 저택에 기거한다. 그러다 막내딸과 친해지고 우연히 그 막내딸을 통해 로라의 남편 짐이 썼으리라 추정되는 음모의 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에는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 도움을 여동생에게 요청하고 있었다. '라이츠빌'은 이런저런 소문들이 금방 확산되는 곳이기에(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있던 마을과 비슷하다. 이 역시 전후 탐정 소설의 한 특징이 아닐까 싶다.) 엘러리 퀸은 집안의 명예를 위해 일단 덮어두자고 말한다. 타자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엘러리 퀸의 모습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편지에는 할로윈,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에 비소를 아내에게 먹이겠다고 되어 있는데 크리스마스까지 그대로 노라가 비소를 먹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다 드디어 새해. 엘러리 퀸이 빈틈없이 짐을 감시하고 있는 와중에 짐이 노라에게 건네준 칵테일을 당시 이미 와서 함께 기거하고 있었던 짐의 누이동생이 대신 마시고는 그만 죽는다. 그리하여 수사는 시작되고 그동안의 짐이 보여준 수상쩍은 행동들과 결국 비밀로 묻어두었던 짐이 쓴 음모의 편지마저 드러나면서 그는 주요 용의자로 체포된다.


 '재앙의 거리'의 또다른 페이퍼백 표지. 중요한 인물들이 나와있기에 인용해 본다.

 위의 두 여자가 바로 노라와 짐의 여동생이다. 안경을 쓴 검은 머리의 여성이 짐의 아내 노라이고 칵테일 잔을 가져가려는 금발의 여인이 바로 죽은 짐의 누이동생이다. 그림은 새해에 있었던 그 사건의 결정적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아래 철창게 갇힌 남자가 '짐'이다. 


 이게 '재앙의 거리'의 주된 사건이다. 이것만 읽으면 엘러리 퀸이 그다지 활약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일단 범행이 예고된 데다 그 범인이 주된 용의자로 지목되고 또한 정작 엘러리 퀸 자신이 범행 당일 그 범인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결말의 해결은 '역시 엘러리 퀸이로군!' 할만한 것을 마련해두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정작 추구하는 건 그 해결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보다는 이 소설의 작중 인물이 말했듯이 '광기의 40년대를 사는' 미국인들의 초상을 바로 가까이에서 보게 하는 데 더 주력하는 작품이다. 이는 막내딸 퍼트리샤의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요? 엄마 친구들은 누구 하나 전화 한통 걸어주지 않고 뒤에서 험담만 해요. 엄마가 나가던 모임 두 곳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구요. 마틴 아주머니까지도 전화를 안 해요."

 "판사님의 부인 말이군요." 앨러리는 중얼거렸다.(p. 193)


 '재앙의 거리'는 그토록 눈부신 이성의 신세계라 여겼던 미국이 사실은 바로 가까이에서 통제할 수 없는 광기가 도처에서 거세게 숨쉬고 있는 곳이었음을 드러낸다. 집조차 안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재앙은 거기에 있었다. 이는 라이츠빌 마을을 건립한 라이츠빌 가문마저도 그 광기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렇게 미국 초기에 그들을 지탱해주었던 이성이 이제 더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재앙의 거리'에서 엘러리 퀸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래서 이전과 달라졌고 그만큼 대안을 구현시킨 존재가 되었다. 그의 이성은 이제 범죄와 싸우지 않고 진실과 상관없이 부풀어 오르는 소문과 싸운다. 불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도 같은 소문들. 소설에서 소문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인상이나 정보들임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제대로 관찰하지도 않고,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덮어놓고 '믿어' 버린다. 하지만 앨러리 퀸은 누구보다 많이 관찰하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소문의 주체들은 자신들 입장만 생각하는 데 비해서 앨러리 퀸은 관찰과 헤아림 모두 어디까지나 타자를 중심에 두고 하려고 든다. 그렇게 이 소설엔 소설에 표현된 그대로 '두 세계의 전쟁'이 있다.


 새롭게 변화된 '라이츠빌 시리즈'는 그 전쟁을 치르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 전쟁의 와중에서 구현된 엘러리 퀸의 모습을 통해 더이상 재앙의 집이 아니라 진정한 집으로 만드는 대안을 찾으려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바라본 '재앙의 거리'의 모습이지만 '라이츠빌 시리즈'가 미국이라는 것 자체를 질문과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백하다. 이같은 변화에 대해 비아냥 거렸던 더쉴 해밋이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알려진 바가 없어 추측밖에는 할 수 없지만 분명 '어느 정도는 그래 퀸 당신도 이제는 제법 인간다워졌군.'하고 만족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여기서 엘러리 퀸은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PS. 원래 새로 발간되는 '재앙의 거리'의 리뷰였는데 책이 검색되지 않아 구간에 남겼더랬습니다. 이제 검색되기에 여기에도 복사해 둡니다.(기본의 리뷰에 추천해 주신 분들이 계셔서 삭제는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중복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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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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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패러다임을 말한 바 있었던 토마스 쿤에 따르면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있게 마련이며 그건 인식의 틀과 진리들을 독점하므로 당대의 사람들은 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즉 패러다임이 허용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패러다임에 맞는 사실만을 자기의 진실로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삶은 스스로 만든 가치관이 아니라 패러다임이 규정한 가치관으로 형성될 때가 많다. 특히나 지금처럼 개인의 삶이 언제든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쉽게 추락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가지는 삶에 대한 근본적 감정이 불안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현대에 이르러 그대로 진리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불안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홀로 남겨졌다고 느꼈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드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한 '소속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불안하기에 현대인들은 어디에든 껌처럼 달라붙으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현대가 소비지상주의에 빠지게 된 것도 사실은 불안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쇼핑 공간은 그저 '소비자'라는 것말고는 다른 정체성이 없는 곳이다. 그렇게 단순히 소비하는 행위 하나로만 거기에 속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 쉽게 소속감을 얻을 수 있기에 사람들은 쇼핑에 빠져든다.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내가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필요해서 쇼핑을 하는 것이다. '지름신의 영접'은 이 순간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만큼 현대는 불안이 넘치며 자기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어쩌면 잠시만 혼자가 되어도 얼른 스마트폰을 통해 누군가에게 연결되려하는 것 역시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이런 사회일수록 패러다임의 힘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개인들에게 소속감을 주기 때문이다. 불안할수록 사회는 보수화된다고 하는데 그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위험하다. 역사적으로도 공황이 가져온 불안이 결국은 2차 대전을 일으킨 파시즘을 낳고 말았으니까. 단순히 어딘가 속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릇된 선택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열망을 양산하는 이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가 파악하는 것이다. 질병은 언제나 그 근원이 되는 요인을 치료해야만 진정으로 완치된다.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불안의 뿌리가 되는 원인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완전한 치유란 없다. 소속감은 그저 잠시의 통증을 없애는 진통제에 불과하다.

 그 불안의 뿌리를 근절하는 것.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인문이다. 원래 인문이라는 말을 낳은 르네상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르네상스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대한 소속감으로 통일했던 중세의 어둠을 몰아내고 그 존재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개인을 건져내었다. 계몽은 빛이 가져온 해방을 뜻하는데 빛은 다름아닌 사물의 개별성을 드러내며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란 개인을 짓누르는 거대한 소속감부터로의 해방이었다. 한 마디로 패러다임을 무너뜨려 그 안에 갇혀있던 개인들을 모조리 다 탈출시킨 것이다. 인문이란 말은 거기서 유래했고 그 힘을 가져온 것 또한 인문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불안을 다스리기 위하여 인문을 찾는 것은 그런 역사적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인문이란 무엇인가? 다르게 보는 것이다. 기존의 틀을 부정하는 것이며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경계 바깥으로 홀연히 넘어갈 수 있는 용기이며 어디든 머무르지 않는 바람이 되는 것이다. 인문은 부정성에 있다. 그 부정을 통해 달리 생각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는 것. 그것이 인문이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그러한 부정으로서의 인문을 잘 보여준다. '투명사회'는 그동안 우리의 열망이었다. 참 많이도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건강과 안전에 직결된 정책들이 그들만의 밀실에서 짬짜미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길 바랐다. 그게 신뢰의 유일한 근거였기에 더욱 그랬다. 믿을 수 없는 이에게 우리가 흔히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 말하듯이.

 하지만 한병철은 그걸 오해라고 말한다. 아니 위험한 생각이라 경고한다. 그건 사실 사회가 보다 손쉬운 지배를 위해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게 만들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것끼리 반응할 때, 동일자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최대 속도에 달한다.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매끄러운 동일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 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p. 14~ 15)

 한병철은 투명하게 된다는 것의 보다 근본적인 모습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가 '세월호 침몰'에서 보듯이 모든 것이 조작 가능한 상황에서 설사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환영에 불과하다. 마술과 같다. 마술도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행해지며 그만큼 투명하지만 정작 그것이 맹점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눈 앞에서 투명하게 드러나는 과정에 집중하는 사이 정작 트릭을 만드는 다른 손은 보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 앞의 '투명성'이란 이만큼만 보여지도록 허용된 것일뿐 진실 그대로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보여준 이들은 그 조작된 투명성을 가지고 이제 그만 우리의 입을 닫으라 강제한다. 투명성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납득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말 잘듣는 청맹과니가 될 수 밖에 없다.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병철의 책은 패러다임을 흔든다. 전작, '피로사회'가 성과주의 패러다임을 흔들었다면 '투명사회'는 '투명성 집착'의 패러다임을 흔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중세의 패러다임을 흔들었던 르네상스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인문이라 할 만하다. 한병철이 이렇게 뒤흔드는 것은 알게 모르게 현대 사회에 만연된 파시즘적 경향을 대중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다. 그건 미세한 테크놀로지로 은밀하게 행해지기에 대중들이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들이 그렇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놉티콘은 전체가 된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벽은 없다. 자유의 공간을 자처하는 구글과 소셜네트워크는 파놉티콘적 형태를 취해간다. 오늘날 감시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P. 101 ~ 102)

 투명성은 그동안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지금의 투명성이란 통제와 감시의 위장일 뿐이다. 기술은 우리의 일상을 투명하게 드러내도록 도와주었지만 그건 어딘가에서 낱낱이 기록되어 감시의 수단이 되고 있고 기술은 또한 우리를 그 어디든 연결시켜주었지만 그만큼 쉽게 통제의 대상으로 노출시켜 버렸다. 이런 은밀하게 일하는 손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보지 못한다. 보여지는 현상에만 너무 집착한 탓이다.

 앞서 말했던 대로 인문이란 새로운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곳을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인문이다. 유난히 보여지는 것에 집착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사실 보여지는 것과 가리워진 것의 접합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제대로 본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보여지는 하나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 배후에 가리워진 것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실은 모든 걸 보면서도 청맹과니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배후의 가리워진 것을 보지 못함이다. 허용하고 조작된 현상만 보고 쉽게 전부라 여기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한병철은 제대로 보는 법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배후에 가려진 것도 함께 볼 것을 말했던 메를로 퐁티처럼 그 역시 타자를 함께 볼 것을 강조한다. 그도 말한다. 진정한 시선을 타자를 보는 것에 있다고.


 예전에는 더 많은 시선,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타자의 출현을 알리는 시선이 있었다. 사르트르에게 시선은 인간의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오히려 세계 전체를 시선이 있는 존재로 경험한다. 시선으로서의 타자는 도처에 있다.(P. 147)

 디지컬 커뮤니케이션은 시선이 결핍된 커뮤니케이션이다. (...) 문제는 오히려 시선의 근원적인 부재. 타자의 부재에 있다.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서 점점 더 타자를 빼앗아 간다.(P. 149)

 왜 이렇게 타자가 중요한가? 오로지 타자만이 우리의 고유한 주체성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부재가 전체주의화로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곧 나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성립되지 않는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잘 논증한 것처럼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나를 객체화하면서 반성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자신을 객체화시킬 수 없는 즉자적 존재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대자적 존재라 말했다. 그게 정신이다.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타자의 부정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긍정성은 죽은 존재로 쪼그라든다.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에서 탈출하는 정신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P. 186~187)

  조르주 아감벤도 현대인의 이러한 경험의 빈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감벤은 현대인은 자전적 경험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으므로 현대는 자서전이 불가능한 시대라는 말까지 했다. 철학에서 경험은 자신을 자신답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주체성을 형성하고 보장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경험의 진정한 의미다. 그 경험은 대부분 타자와 대면하여 결국은 나 자신을 깍아내는 것이므로 부정의 경험이요, 고통의 경험이다. 그리하여 헤겔은 '정신은 고통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엔 그런 것이 없다. '좋아요' 버튼만 있는 페이스북처럼 과잉된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부정의 경험이 없는 긍정은 라캉이 말한 자기가 보는 것을 무조건 나와 동일시하는 상상계의 거울과 같아서 거대한 파문이 만든 하나의 동심원에 불과한 나만 있을 뿐 타자는 없다. 그 타자로 인해 비로소 온전한 주체의 나가 될 수 있는데도 타자는 깨끗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선도 없고 경험도 없다. 온갖 정보를 다 습득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디지털커뮤니케이션은 쇼핑과 더불어 현대인들이 소속감으로 자신의 불안을 잊으려 널리 하는 행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한병철은 그것이 위험한 독약임을 경고한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진으로 생각했지만 한병철은 거꾸로 '감시와 통제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적 요소(P.212)'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굳어진 통념을 흔든다. 이면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이것을 그만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투명성'이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시각을 그대로 가질 경우 뒤따를 수 있는 커다란 위험을 경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은 제안이다. 거기에 은밀히 깃든 어둠을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투명성과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복원하자는.

 그래서 이제 이 책은 나의 사유를 요청한다. 정신의 진정한 경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궁극의 목적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싫어요'의 사유를 하게 만드는 것. 그러한 부정성을 통하여 그동안 묻혀졌던 진정한 나 자신을 한 번 도려내어 보는 것. 강요된 전적인 투과를 거부하는 불투명성의 몸짓을 하는 것. 그러한 도려냄과 몸짓을 통해 '타자'를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진정 맞추고 싶은 과녁인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불안은 이것이 전부다라고 생각했을 때 더욱 커졌다. 이번 시험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여기는 수험생이 더 초조한 것처럼.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도 현대에 이르러 죽음이 깨끗이 배제되고 오로지 현세의 삶만이 유일하게 되자 불안 역시도 그만큼 증가했다고 말한 바 있다. 타자를 배제한 채, 지금 있는 여기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나만 절대라고 여길 때 엄습하는 불안의 그림자 역시 더욱 짙어지는 것 같다. 결국 불안이란 외부를 보지 않으려는 눈, 저 너머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마음 자체에서 배태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 타자와 대면할 것을 요청하는 이 책의 말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 같다. 인문이 우리의 불안을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면 그 힘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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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서광원 지음 / 김영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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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허다한 경영서가 있다. 처세서의 수도 그 못지 않다. 거기서 서광원의 '살아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라는 이 책은 다소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공적인 경영과 처세의 방법들을 생물학과 연결하여 찾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나름의 전략으로 살아남은 것들에게서 그 생태계와 비슷한 환경이라 할 수 있는 경영과 현대인의 삶에 있어 유용한 것들을 한 번 취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탄생 배경이고 지향점이다. 그래서 말인데 읽으면서 좀 서글프기도 했다.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자연계나 이성을 사용하여 소위 문명이란 것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계나 모두 같이 생존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경주해야 하는 존재들이라니. 인류는 역사 이래로 참 많이 진보해왔다고 하는데 본질적인 면에선 지금 우리의 삶이나 고대 유인원의 삶이라 별로 차이가 없으니 도대체 그많은 진보의 과실들은 어디로 다 가버린 것일까? 이런 생각에 좀 우울했다. 누구나 말한다. 현대는 성공 지상주의 사회라고. 그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공이라는 결승선을 향해 경마장의 말들처럼 오로지 앞만 보고 뛴다. 하지만 그 성공의 의미는 이제 예전과 달라졌다. 예전에는 보다 나은 삶의 상태 같은 것을 의미했겠지만 지금은 생존의 확실한 보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전보다 삶의 불확실성이 훨씬 높아졌고 그만큼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더라도 생존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가능성 또한 희박해져 버렸다. 개인적으로 서광원의 착안점은 좋다고 본다. 사실 지금 우리의 삶이란 생태계 맨 아랫단에 놓인 작고 약한 초식동물이 무시무시한 맹수들이 날뛴다는 정글을 앞에 둔 것과도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상태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가장 첫 번째 원칙이 아니던가! 이것이 서광원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일점혁신주의'에서의 '일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약한 존재는 주위 상황에 민감하다. 그들은 대기의 조그만 변화도 놓치지 않고 감지하기 위해 귀를 늘이거나 목을 늘인다. 생존을 위해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최대한 모으려는 몸짓이다. 그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책을 읽는 이유도 근본은 보다 많은 정보로써 잘 생존하기 위한 데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런 책들이 오히려 우리 삶의 서글픔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안주는 죽음이니 부단히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계속 채찍질을 멈추지 말아야 하며, 업무 성과는 성과대로 높이고 인간 관계 역시 원만하게 유지하는,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승진을 위해 자기 능력을 개발해야함과 동시에 인간성까지 고양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참으로 성공이란 열매의 단맛을 맛보기 위해 한 개인에게 과중되는 짐이 너무도 많다. 실제 우리의 스트레스는 일이 많고 너무 바빠서가 아니라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오기 때문이 아닐까?

 책에서 인상 깊게 다가왔던 부분이 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두 번의 이직으로 억대 연봉을 받게 된 이의 이야기였다. 원했던 만큼의 자리에 이르고 보니 마음이 허전해왔단다. 특히나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더욱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 알던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모두들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마지막에 건 선배 역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배님도 많이 변하셨네요?"
 "그래 변했지 (...) 정말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들어보겠어?"
 "무슨 말인데요?"
 "왜 사람들이 너에게 바쁘다고 하는지 모르지?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잘 나갈 때는 연락 한 번 하지 않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온갖 반가운 척 다 하며 연락하는 사람, 만나기 싫어서 바쁘다고 하면 '너 변했다'고 가시 같은 한 마디를 던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너다. 내가 변했다고? 그래, 변해야지. 네가 그렇게 대하는데 변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변해야지. 그만 끊는다."(p. 84)

 왠지 찔리는 구석이 많았기에 참 많이 와 닿았던 이야기였다. 저자는 정말 자신이 인정받기 원하는 부분으로 방향을 정해 달릴 것을 원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래, 사는 게 다 이렇지. 어떻게 두 가지를 다 이룰 수 있겠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줄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 아니야?' 이런 생각만 들었다. 저자는 뒤에 가서도 한 여자 임원의 이야기를 예화로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 역시 성공 하느라 아래 사람에게 잘 못하여 주위에 사람이 없게 된 경우였다. 물론 나라고 모든 경우를 다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인간 관계도 잘하면서 성과도 좋은 이는 잘보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바에 의하면 주위와 아래 사람에게 잘 했던 상사들이 가장 먼저 도태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애초부터 직장에서의 성공을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그게 더 좋아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보면서 생각했다. '결국 사람이란 자신이 정말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 지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진정 원하는 지 찾는 노력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용기가 아닐까?'라고.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내게 안주하지 말 것을 요구하지만 난 그만 안주하고 싶다. 사실 저자조차 현상유지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호수 위에 떠다니는 백조가 아래로는 쉴 새없이 물갈퀴 달린 발을 휘젖고 있듯이 안주하는 것조차도 실은 꽤나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나의 나됨을 받아들이고 그걸 온전히 긍정하는 것마저도 쉽지가 않다. 세상은 부단히 나에게 그들의 가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니까. 또한 너무나 많은 것이 불확실한 이 세상에선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언가에 예속되기를 바라게 되고 남들과 닮게 되기를 바라는 법이니까. 저자의 말대로 이 세상이 생태계와 똑같이 온갖 위협으로 들끓는 곳이라면 바로 그렇게 나의 나됨을 긍정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위협이라고 하겠다. 나는 저자의 '일점'을 받아들인다. 오롯이 한 곳에 집중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요구하듯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에게 너무 버거운 짐들을 부과하기도 싫다. 사실 굳이 그렇게 살아야 할 까닭을 모르기 때문이다. 난 그저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히 구가하다가 사라지고 싶다. 그렇다. 난 굳이 서식지를 넓히지 않으려는 동물이다. 그저 있는 이 자리에서 최대한 삶에 충실하는 것. 그게 나의 생존전략이다.  저자도 방법 보다는 방식을 먼저 찾아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흔들리지 않을 방식을. 이걸 나의 방식으로 삼겠다. 더 많이 가지려, 더 높이 오르려 안달하지 않겠다.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겠다. 일이든, 사람이든.

 사실, 이건 탄식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중에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라는 것이 있다. 한창 핵무장에 강대국들이 열을 올리던 시절, 이렇게 아둥바둥 살아도 어느 순간 핵무기로 세상이 멸망해버릴지 모른다는 절망 속에서 그 소설은 쓰여졌다. 헤아리기 힘든 거대한 광기가 전 세계에 소용돌이 치고 있는데 어떻게 미쳐버리지 않고 태연하게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것을 묻는 소설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어이없이 수면 아래에서 삶을 빼앗겨버린 수백의 생명들. 저마다의 이기적 욕망에 단 한 명조차 구조되지 못하고 그대로 수장된 목숨들을 보면서 어찌 절망에 빠지지 않고 태연하게 이전처럼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방식을, 근본적인 태도를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물들은 모두 닥쳐온 위기에 자신의 삶적 태도를 바꿔온 존재들이었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삶의 가치를 묻고 있다. 나는 거기에 응답하고 싶다. 그런 고로 이 글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게 된 나의 응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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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AR MINI 마이 카, 미니 - 나를 보여 주는 워너비카의 모든 것
최진석 지음 / 이지북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미니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확실히 그런 모양이다. 이렇게 미니에 대한 애정으로 중무장한 책까지 나온 걸 보면. 한국경제신문사 기자로 있는 최진석의 'MY CAR MINI'가 바로 그 책이다. 나 역시 MINI를 좋아했다. 7년 전 즈음에는. 내가 미니를 처음 본 것은 영화 '미스터 빈'에서였다.  주인공 빈이 몰고다니는 차가 바로 사진의 연두색 미니였다. 정확히는 1977년형 미니쿠퍼였다. 대형차를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참 볼 수 없는 소형차인지라 어찌나 앙증맞아 보이던지. '빈'을 연기했던 로완 앳킨슨만큼이나 '호오, 저렇게 귀여운 차도 있구나!' 하고 깊이 인상에 남았다. 미니의 진짜 매력을 알게 된 것도 영화 덕분이었다. 바로 '이탈리안 잡'. 흔히 말하는 강탈 장르의 영화였는데 주인공 일당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운전하던 차가 바로 이 미니였다. 역시나 미니쿠퍼. 골목 사이를 누비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둥. 미니의 장점을 할 수 있는 한 가득 보여주는 영화여서 미니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 책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미니는 역사가 꽤나 깊다. 처음 나온 것이 1959년이다. 우리로서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렇게 작은 차를 만들게 되었을까?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56년 일어난 수에즈 전쟁이다. 그 해, 이집트의 대통령이 바뀐다. 새로 당선된 대통령은 당시까지 이어지던 수에즈 운하에 대한 이집트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공동 경영이라는 기존의 관행을 깨고 이집트만의 국유화를 선언해 버린다. 당시 수에즈 운하는 유럽에 원유를 공급하는 주요 통로였으므로 이같은 이집트의 선언은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반발을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수에즈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으로 원유 공급이 줄어들자 유가는 폭등. 사람들은 기름값에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기름값은 적게 들고 연비는 높은 소형차를 사람들은 원하게 되고 발빠르게 그러한 소비자의 '니즈'를 알아차린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은 주 엔지니어 알렉 이시고니스에게 소형차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그로인해 태어난 것이 바로 '미니'였다. 처음 미니의 길이는 불과 3050MM였다.

 그렇게 작은 차였지만 이시고니스는 성인 네 명이 탈 수 있는데다가 짐까지 실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작게 만들면서 이렇게 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시고니스는 이를 위해 앞 바퀴와 뒷 바퀴를 최대한 바깥으로 가게 했다. 그러면 엔진과의 연결이 어려웠다. 당시의 자동차들은 엔진과 바퀴가 세로로 나란히 연결되는 후륜 구동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시고니스는 당시로서는 꽤나 획기적인 발상을 감행했다. 바퀴와 엔진을 수평으로 나란히 연결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 전륜 구동 방식이다. 오늘날의 자동차들이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이 방식은 바로 이 미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차체만 작아졌을 뿐, 기능은 별로 줄어들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형에 기름값이 적게들면서도 사람도 짐도 웬만큼 실어 나를 수 있는 이 미니에 열광했다. 그 인기와 자동차의 역사를 바꾼 공로를 인정받아 이시고니스는 후일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게 미니는 역사도, 의미도 결코 가볍지 않다. 더구나 이 미니에는 또 하나의 의외의 사실이 존재한다. 바로 미니가 랠리, 즉 자동차 경주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사실 얼른 보기에 생긴 것도 그렇고, 이렇게나 작은 차가 어떻게 자동차 경주를 할 수 있을까 믿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이다. 미니는 자주 자동차 경주에 쓰였다. 이 미니를 최초로 자동차 경주에 썼던 사람이 바로 존 쿠퍼다. 미니 쿠퍼라는 이름은 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존 쿠퍼는 미니가 극히 짧은 오버행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것은 앞바퀴와 뒷바퀴가 모두 차의 범퍼 가까이 있게 된 애초의 설계 때문이었는데, 이같이 오버행이 짧아지면 차체에서 바퀴로 가는 반응 속도가 빠르다. 즉 운전자가 원하는 대로 빠르게 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미니의 특성은 도로 보다는 핸들을 자주 움직이게 되는 비포장 도로나 산길에서 더욱 유용하다. 과연 거친 산길 경주에서 미니는 두각을 나타내었다. 최근까지도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일명 죽음의 경주라 불리는 다카르 랠리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동안 미니는 내리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저 앙증맞은 귀여운 차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러한 와일드한 면모가 있다니. 그런 반전의 매력이 있어 아직도 많은 이들이 미니의 팬을 자처하는 지도 모르겠다. 여기에는 미니스커트를 세계 최초로 만든 메리 퀀트도 있다. 그녀가 애용하던 차가 다름아닌 미니였다. 미니스커트라는 이름 역시 바로 그 미니에서 온 것이다.

 

 

  물론 저자 최진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MY CAR MINI'는 그의 그러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진 책이다. 모두 216 페이지에 이르는 다소 얇은  이 책은 다섯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부분엔 미니의 메인 컨셉인 'FUN & NOT NORMAL'에 대해서 설명하며 두번째 부분에선 미니의 역사를 세번째 부분에서는 미니의 종류를 설명한다. 네번째 부분에선 메인 컨셉 대로 현재 어떻게 미니를 가지고 FUN 하는 지를 국내 각종 미니 동호회까지 소개해가며 보여주고 마지막 부분에선 실제 미니를 가지고 있는 이를 대상으로 한 차 정비하는 법을 소개한다. 미니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가지고 싶은 사람 그리고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를 망라한 구성이다. 이 책의 부제 대로 '미니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책이 분량도 적고 내용도 부담 없기에 특히나 가볍게 미니에 대해 알고자 했던 분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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