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몽환화, 그 뜻은?...


 "하지만 삼촌은 내게 말했어. 어떤 꽃을 피워도 좋지만 노란 나팔꽃만은 쫓지 마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것은 몽환화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몽환화?"

 "몽환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p. 220)


 그동안 온갖 장르를 섭렵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유일하게 미답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던 역사물에 드디어 도전한다며 2002년부터 역사잡지 '역사가도'에 2년간 연재되었지만 막상 한 권의 소설로 나오기까지는 10년이 걸렸던 소설, '몽환화'! 그 제목이 뜻하는 것은 이러했다. '몽환화', 그것은 바로 노란 나팔꽃이었던 것이다.


 소설은 2013년에 나왔다. 거의 전면적인 개고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계기가 있었다. 바로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일본 원전 사태. 통칭하여 3. 11. 그것이 소설에 전면적인 영향을 주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전의 1988년 실제로 일어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에 바탕을 두고 소년범 문제를 다룬 '방황하는 칼날'이나 역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일본 대학 입시를 비판한 '호숫가 살인사건'에서 보듯 원래 동시대의 사회 문제와 연동하는 작가였다. 그런 그가 일본 역사상 미증유의 참사에서 영향받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 징후는 이미 2012년에 나온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 소설이 3.11의 반향이라는 것은 소설이 취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바로 70년대에 일본에 닥쳐온 오일 쇼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엔 그것이 전후 일본 최대의 위기라는 걸 고려해보면 하필이면 이 시점을 택한 것이 똑같이 전후 역사상 최고의 위기라 불리고 있는 3. 11을 환기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해진다. 그러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히 말해 상실감에 대한 치유인데 이로써 이 소설에 드리운 히가시노 게이고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즉, '과거 전후 최대의 위기였던 오일 쇼크를 우리는 무사히 극복했다. 그러니 현재 전후 최대의 위기인 3.11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좌절하지 말고 그 때의 우리를 거울 삼아 서로의 아픔을 배려하고 도와나가자.'란 걸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유는 일본 원전 사태 이후에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일관되게 유포한 구호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오노 미쓰야키는 3.11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던 일본의 풍경을 찢어놓았다고 했다. 1995년에 한신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동안 믿었던 일본이 깡그리 붕괴당한 느낌이었다고 고백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나 '도주론'의 아사다 아키라 그리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들에 따르면 일본에는 지금까지 단일한 풍경 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타자와 변화라는 게 깨끗이 배제된 고인 웅덩이와도 같은 공간. 그것이 '일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일본에게 재난은 외재성의 침입이요 그 고정된 풍경의 틈새를 열어 그동안 일본이 얼마나 편협한 풍경에 사로잡혀 있었는 지를 보게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재난은 변화에의 부름이며 그 부름에 실천적으로 응답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재난 앞에서의 성찰적 태도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지금 일본 정부가 하는 것은 그 풍경의 틈새를 다시 기워 아예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 불과하다. 원전과 현재 일본 시스템의 반성과 전면적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앞에 일본 정부는 '과거의 아픔은 잊고 미래를 바라보자!", "지금이야말로 일본인 모두 하나가 되어 복구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자'고 외칠 뿐이다. 반성은 없다. 변화도 없다. 그저 어둔 과거가 빨리 잊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베 총리가 2020년 동경 올림픽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과거 일본 전성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동경 올림픽을 다시금 재현하여 일본의 영광은 여전히 변함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국민 모두에게 심어주고 싶은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오일 쇼크를 다시금 가져온 것과 비슷한 재현 전략이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한계가 있었다. 참 따스한 이야기인 건 사실이나 외연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조금은 문제가 될 수 있는 태도였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 스스로도 그것을 감지했을 지 모른다. 아니면 지금까지도 3. 11에 대해 아무런 반성은 커녕 제대로 된 대책도 없이 오로지 잊을 것만 강요하는 일본 정부에 대해 한계를 절감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몽환화'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한 '몽환화'에 대한 경고의 말에서 드러난다. 그 뒤를 쫓으면 자신이 멸하게 되는 꽃. 이것은 바로 현재도 일본이 지속하고 있는 원전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2. 나팔꽃의 첫번째 꽃말은 '허무한 사랑'...


 그러고 보면 나팔꽃이 가진 꽃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나팔꽃의 꽃말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무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결속'이다. 여기서 '허무한 사랑'이 바로 원전에 대한 일본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면 원자력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원자력은 그야말로 기피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본은 오히려 원자력에 대한 과한 사랑을 보여왔다. 일례로 우리는 그것을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 캐릭터인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에게서 엿볼 수 있다. 캐릭터의 이름을 '원자'를 뜻하는 영어에서 그대로 따왔을 뿐만 아니라 아톰을 가동시키는 에너지의 원천 또한 원자력이다. 거기다 아톰의 동생 이름도 우라늄을 뜻하는 '우란'이다. 즉 아톰의 활약과 거기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바로 원자력의 긍정과 희망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무엇보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많은 원전의 숫자로도 증명된다.(현재 일본의 원전 수는 48기로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3위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23기로 5위다. 국토 면적에 비해 정말 얼마나 많은 원전이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거기다 잦은 고장을 일으키고 있는 고리 원자력 발전이 이미 설계 수명인 30년을 넘었음을 감안한다면 일본 원전 사태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를 우리 역시 귀담아 들어야 할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런 사랑의 결과가 바로 3.11이었다. 이만큼 허무한 사랑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제대로 된 비유를 쓴 셈이다. 나팔꽃은 그야말로 현재 일본에 대한 상징이니까 말이다. 과연 소설은 처음부터 허무하게 끝나버린 비극적 사랑으로서의 3. 11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소설엔 프롤로그가 2개나 붙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단란한 가정이 아침 출근 길에 느닷없이 참살당하고 한 중학생의 풋풋한 첫사랑이 갑작스럽게 깨어진다. 둘 모두가 아무런 예고가 없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리고 죽음과 이별이라는 상실로 끝났다는 것도. 정확히 3. 11이 일본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과연 뒤이어 허무한 사랑에 맞닥뜨려 버린 인물들이 나온다.  원자력에 대한 일본의 사랑과 똑같이 하나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잃어버린 인물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처음은 아키야마 리노. 그녀는 올림픽 출전까지 예정된 일본의 수영 기대주였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영을 그만둔다. 수영을 좋아하고 좋은 수영 선수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한 길로 달려온 그녀이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수영 불능의 상태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 그 미래가 불안하기만 하다. 불안하기로는 그녀와 단짝이 되어 몽환화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가모 소타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는 현재 원자력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원자력은 촉망받는 학문이라 선택에 아무런 고민이 없었는데 3. 11 이후로 원자력은 일본 사회에서 가장 기피하는 학문이 되었다. 어디가서 원자력을 전공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다들 미래가 없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가노 소타는 고민하고 있다. 이 둘 모두 젊은 세대라는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몽환화'가 3.11에 직면하여 미래가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전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나오는 '답장 편지' 같은 것이라는 걸 분명히 한다. 그렇다. 이 소설에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내는 어떤 조언 같은 것이 있다.



 3. 나팔꽃의 두번째 꽃말은 '결속'...


 그것이 바로 '나팔꽃'이 가진 또 하나의 꽃말, '결속'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전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달라지고 분명 한 발 더 나아갔다고 생각되는 지점이다. 여기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정부의 외침과는 다르게 분명 '책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의 모습은 작중 인물의 다음과 같은 말로 분명히 선언된다.


 "세상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군." 다카미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는 거라면 그대로 두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이어받아야 하잖아? (....)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 감시를 계속해야만 해. 마성의 식물을 확산시켜 버린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해. 도망칠 수 없지.(p. 409)


 여기서 '마성의 식물'이 바로 원전을 뜻한다는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지 않는다'와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의무'라는 말은 그대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현재 일본 정부에게 보내는 날선(사람의 도리로까지 격상시키고 있기 때문에) 비판이다. 그리고 일본 대중에 대해서는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아키야마 리노와 가모 소타가 대표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물론 이 조언은 젊은 세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같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하야세가 대표하는 일본 기성세대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충고이다. 생각해보면 하야세 역시 리노와 소타의 처지와 비슷하다. 그는 한 때의 불장난 같은 바람으로 가정을 잃었다. 리노와 소타는 미래의 불안에 대해 아무런 자신의 잘못이 없었지만 하야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걸 날려버렸다. 이런 하야세가 기성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핸드폰의 사진 전송 기술에 대해 놀라워하거나 노래방에서의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다는 식의 자잘한 고백을 통해 그가 전형적인 기성 세대임을 독자들에게 부각시킨다. 그런 그가 오롯이 자신의 잘못으로 일본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한 가정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에겐 중학생 아들 유타가 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으로 인해 아들 유타가 받았을 커다란 상처를 걱정한다. 이 모든 설정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3. 11에 직면하여 일본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일침이다. 오늘의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을 곧장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도성장이라는 환영과 안전에 대한 맹신에 불륜이 그렇듯이 그만 무분별하게 도취된 나머지 스스로 자정할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바람에 유타와 같은 젊은 세대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뼈아프게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하야세가 유타의 부탁으로 몽환화에 얽인 살인 미스터리를 개인적으로 추적한다. 바로 이 모습이 일본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제안이다. 역시나 도망치지 말라는 것. 부모로써 자녀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책임의 각성을 통한 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가 외치는 외양만인 결속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바로 그런 진정한 결속, 또는 그래서 더욱 단단한 결속을 위한 구체적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지향점일 수도 있다.


 그 점이 바로 참여의 촉구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는 왜 이렇게 모두에게 도망치지 말고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오노 미쓰아키의 글에서 인용된 재일 한국인 학자 정영혜의 말을 다시금 인용해 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특권이라고 해도 뒤집어보면 가장 많은 것을 빼앗긴 상태이기도 합니다. '매저리티(majority)'의 경우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될만큼 아무런 문제도 없는 상태이기는 커녕 온통 문제 투성이잖아요. 그런데도 '생각하지 않게끔' 이빨을 빼버리는 거니까요. "당신들은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됩니다." "투표일에는 잠이나 자주면 고맙겠다." 이런 말인 셈이잖아요. (...) 그들 자신이 깨닫기 위한 계기를 하나씩 하나씩 싹을 제거하듯 빼앗긴 것이고, 그게 '매저리티'라 불리는 사람들이 가진 '특권'의 실태입니다.


 '매저리티'는 일본의 정치적 지형에서 일본 국민이 취하고 있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즉 '말없는 다수'이다. 일본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유명하다. 투표율도 늘 낮았고 일본 정부가 무슨 정책을 펴든 가타부타 말없이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 저변에는 일본의 정치가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태도가 깔려 있었다. 그걸 핑계로 그들은 일본 정치 현실에서 도망쳤다. 현재의 일본은 사실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말없는 다수', '행동하지 않는 다수'에게 더이상 도망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방관이 가져오는 것은 불안이요 비극 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런 이유로 몽환화의 미스터리 추적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리노와 소타는 경찰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반인이다. 중요한 것은 형사 하야세인데, 그조차 개인적으로 사건을 뒤쫓는다. 아예 소설에서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유로 뒤쫓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소타의 형 요스케도 마찬가지다. 경찰청의 관료이지만 홀로 뒤쫓는다. 추적하는 모두가 그렇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소설에서 철저하리만치 조직의 움직임을 깨끗이 배제하고 있다. 이 설정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젊은 세대든, 기성 세대든 주고자 하는 조언의 구체적 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더이상 매저리티, 즉 말없는 다수에 속하지 말 것. 그것을 핑계대고 도망치지 말 것. 그러기 보다는 '마이너리티(minority)가 될 것. 일본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 문제가 바로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더이상 일본이 잠자는 다수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몽환화'는 그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소설이다.


 이는 5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으로 보았을 때 전혀 상관있을 것 같지 않은 비극이 바로 한 개인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설정과 무엇보다도 록밴드를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후자가 특히 의미심장한데, 왜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필이면 록밴드를 넣은 것일까? 이 역시 '매저리티'를 깨기 위한 개인적 저항의 촉발로써 집어넣은 것이라면 너무 앞으로 나가버린 해석인 걸까? 그런데 사실 3. 11 이후와 록 사이를 헤아려보면 꽤나 의미있는 지점이 나온다. 바로 3. 11 한 달 후에 나온 록가수 사이토 가즈요시의 '다 거짓말이었어'란 노래다. 3. 11로 일본이 말한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고 일본이 다 시궁창이었다는 게 들통났다고 외치는 이 노래는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이 국민들에게 자숙을 강요하며 오로지 인내와 화합의 노래만이 펼쳐지고 있을 때 그 순응의 분위기를 깨어버린 첫 외침이었다. 일본 국민에게 강요하는 순응 아래에서 들끓고 있었던 저항심을 표출하게 만든 이 노래는 곧 일본 전역의 시위 현장에서 합창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아마도 일본 독자라면 소설의 록밴드에서 곧바로 이것을 환기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매저리티'를 뒤흔들던 노래를 말이다.


 그 정도로 치밀하게 읽는 이를 뒤흔드는 소설. 그것이 바로 이 '몽환화'다. 최근까지 읽은 3.11 이후의 일본 대중 소설에서 가장 선명하고도 강력한 외침이 아닌가 한다. 전작 '나미야 잡화점에서의 기적'에서 느꼈던 한계를 이 작품은 후련하게 날려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그의 작품에서 사회적 문제 의식을 잘 볼 수 없어 아쉬웠던 참이었는데 '몽환화'는 그나마도 넘치게 채워주었다. 여전히 가독성도 뛰어나고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지만 특히나 앞서 괄호 부분에서 말한 바와도 같이 일본의 오늘이 바로 우리의 내일이 될 수 있기에 추운 날 꽁꽁 언 몸을 녹이려 계속 곁불을 쬐듯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재밌는 것은 이 책 자체는 '몽환화'가 가진 위험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각성의 소설이요 결기를 돋우는 소설이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든 말든, 미스터리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 역시 더 이상 '잠자는 다수'가 되지 않기 위해...


그냥 참고로...


사진은 몽환화로 불린 실제 노란 나팔꽃의 모습. 이게 히가시노 게이고가 말한 몽환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에도 시대에는 있었던 노란 나팔꽃이 어느 순간 멸종해버린 것에 착안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사실 이 노란 나팔꽃은 희귀종이 맞다. 유럽의 희귀 식물 종자를 거래하는 사이트에서 이 노란 나팔꽃의 씨앗을 팔고 있던 것을 봤다.


 미국 아마존에서도 이렇게 일본의 나팔꽃으로 희귀하다며 그 씨앗을 팔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니 호기심에 한 번 구입해볼까 하는 강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이유는 소설을 읽어보면 아실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한가지 좋지 않은 점은 여행 중에도 갑자기 이렇게 기한이 생각나 새벽에 느닷없이 이렇게 신간 추천을 쓰게 되는 일인 것 같다.


 


 아무튼 5월에 나온 인문 신간중 가장 눈에 번쩍 뜨인 책 중의 하나는 존 힐의 '켄 로치'였다.

 페이지가 무려 560 페이지인데다 부제가 '영화와 텔레비젼의 정치학'인 것을 보면 켄 로치의 감독 경력 전부를 소개하고 있는 듯 하다. 더구나 켄 로치하면 영국국영방송에서 텔레비젼 감독을 하던 초창기부터 영화를 정치적 문법으로 만들어온 감독으로서 감독들 중 가장 정치적인 감독이라고 하여도 무방한데 영화를 통해 아일랜드 정치 문제를 심도있게 분석한 존 힐이라면 켄 로치의 뿌리라 할만한 이런 정치 문제를 잘 다룰 듯도 보인다. 예전 '케스'를 아주 감동 깊게 보았고 아주 최근에 나온 것과 텔레비젼 시절의 몇몇 작품들을 빼고는 거의 다 본 감독으로써 그의 감독 경력을 모두 망라하여 조망하는 이런 책은 아무래도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에이젠쉬타인 이후로 그림자처럼 강하게 결부되었던 영화와 정치에 대해서 한 감독을 통해서 차분히 엿볼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 같다.    





 여행을 와서 그런가 음식에 대한 책이 눈에 들어오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여행이 가진 매력 중 하나는 그 지방의 향토 음식을 경험하는 것일텐데 그런 음식들을 접하다보면 거기에 담겨진 그 지방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음식 또한 문화적 풍토의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음식 분야가 아닌 영국의 미디어 연구자들이 공저했다. 그만큼 음식을 문화를 매개하는 미디어의 한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5장 이후이다. 음식에 담겨진 국가정체성과 음식의 지구화. 한 번쯤 깊게 읽어보기를 기대했던 내용이다. 이 책이 문화로서의 음식에 대해 보다 풍부하게 들려주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저자 김성도는 우리나라에 기호학이라는 것을 가장 처음 알렸던 학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도 그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로 기호학을 처음 접했던 것 같다. 데리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그레마톨로지'도 그가 번역했다.


 오래도록 기호학을 연구해온 그가 본격적으로 도시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저번 달엔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바라본 도시를 한 번 경험해 본 터다. 그래서인지 기호학적으로 바라본 도시의 의미는 또 어떻게 다가올지 호기심이 동한다. 인문학적 측면에서 도시가 가진 거의 모든 의미들을 방대하게 다루고 있는 듯 하다. 인문학적 지평으로써의 도시에 대해 제대로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이상으로 6월의 새벽에 느닷없이 호출되듯 박차고 나와 써야했던 5월의 신간추천을 마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비틀스 솔로 - 전4권
맷 스노 지음, 정미우.정지현 옮김 / 시그마북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세기말.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록 잡지 '롤링스톤스지'는 그동안의 록 역사를 정리하면서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많은 아티스트들을 선정한 적이 있다. 거기서 비틀즈는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락 앨범 100편도 선정했는데 거기서도 비틀즈의 앨범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가 1위에 올랐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들의 '리볼버'는 3위에, '러버소울'은 5위에 그리고 '비틀즈'는 10위에 올랐다. 20세기 최고의 10개 락 앨범에 무려 네 개나 포함된 것이다. 이는 평론가들이 선정한 것인데 재밌는 것은 독자들이 선정한 것도 앨범이 다를뿐 동일하게 10위 안에 네 개가 올랐다.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선정한 것을 합한다면 비틀즈의 스튜디오 앨범 대부분이 10위 안에 들어 있는 셈이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에서도 1위에 올랐고 존 레논은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라는 명예를 거머쥐었다. 이 모든 리스트가 보여주듯이 록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는 그대로 비틀즈의 시대였다. 비틀즈를 빼놓고는 록이든 팝이든 대중 음악을 논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사진은 비틀즈 솔로 중 폴 매카트니 책의 가장 첫 부분, 비틀즈의 영화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 개봉 당시에 BBC와 인터뷰하는 폴 매카트니 모습이다. -


 하지만 비틀즈는 해체 전에도 전설이었지만 해체 후에도 전설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슈퍼 밴드를 만들어낸 그들의 능력은 밴드 해체 후 솔로가 되었어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THE PLASTIC ONO BAND' 앨범으로 솔로 활동의 포문을 연 존 레논은 비틀즈보다 더욱 사회적 발언을 첨언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티스트의 경지로 나아갔으며 늘 레논의 라이벌인 폴 매카트니는 비록 솔로 활동은 레논 보다 빨랐으나 평가에 있어서는 레논에게 뒤쳐지고 말았는데 결국 밴드 WING을 결성하고서는 재빠르게 비틀즈 전성기 때 자신의 실력을 회복해 '역시 매카트니!'라는 인정을 얻는데 성공한다. 밴드 해체후 더욱 성장한 아티스트는 단연 조지 해리슨이다. 물론 비틀즈 시절에도 '애비 로드'의 'SOMETHING'처럼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앨범에 실어 비틀즈에서 실력 있는 이가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만은 아니다라는 걸 증명했지만 솔로가 된 뒤에 그의 활약은 더욱 눈부셨다. 공교롭게도 매카트니의 첫 앨범과 같은 해에 나와 더욱 비교가 되었던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 앨범은 매카트니보다 더욱 평단과 대중 양쪽으로 성공을 거두어 다들 조지 해리슨에게 있어서만큼은 비틀즈 해체가 약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그래서일까?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가 공식적으로 해체 되었을 때,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비틀즈의 드러머 링고 스타는 밴드 활동 시절에도 스스로 어쩐지 왕따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사실은 좀 위축된 감이 없지 않았는데('비틀즈' 시절 그가 작곡해서 앨범에 실린 노래는 딱 하나다.) 그 역시 솔로가 되고 나서 마음껏 자신의 실력을 발휘한 축에 속한다. 많은 유명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링고'는 비틀즈 시절 가려졌던 그의 실력을 한껏 드러낸 걸작 앨범이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가리워져 있었던 그의 실력을 보다 빨리 알아보지 못했음을 한탄하게 만들었다.


 - 그들의 솔로 활동은 세간의 우려와 달리 이렇게 기쁨에 겨운 활동이 되었다. 폴 매카트니도 그동안 슬럼프가 찾아왔으나 결국은 훌륭히 극복했다. 사진은 9.11 테러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열린 콘서트에서 연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다. -

 - 이 책을 읽다보면 삶이 그렇듯이 음악도 홀로 가는 고독한 여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난이 오고 절망이 와도 누가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 결국엔 홀로 맞서 한걸음 한 걸음 이어가야 한다. 음악이 이어지기 위해 한음 한음 계속 연주해야 하듯이 -

- '혼자여도 빛나다' 존 레논에 있어서만큼은 더 없이 진실이다. 그는 비틀즈 밴드 때보다 혼자였을 때 더욱 찬란히 빛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솔로 활동은 비틀즈로서의 존 레논이 아니라 존 레논이라는 아티스트 자체를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여정이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는 비틀즈 앨범 보다 존 레논의 앨범에 손이 더 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플라스틱 오노 밴드'는 지금도 위안 삼아 자주 듣는 앨범이다.- 

-비틀즈 밴드의 도화선이 되었던 오노 요코와 거리를 걷고 있는 존 레논. 사랑과 예술적 동지로서의 연대가 가장 강고하던 시절의 사진이다. 존 레논은 아마 이 때가 절정이었을 것이다. -

- '혼자여도 빛나가'가 존 레논의 진실이라면 '모두 발산하다'는 조지 해리슨의 진실이라 할 것이다. 그는 정말로 솔로가 되자 그의 모든 것을 발산했다. 그의 'MY SWEET LORD'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두들 놀라워했다. 모두는 비틀즈 때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조지 해리슨을 보고 있었다. 그의 진짜 재능이 해체와 더불어 부화하여 날아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명곡 'MY SWEET LORD'는 결국 조지 해리슨에게 죽음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한 광인이 그 노래를 듣고 조지 해리슨이 악마 숭배자라고 생각하여 총으로 쏘았던 것이다.- 

-사진은 1980년 무렵 LA에서 뜨거운 기자 회견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조지 해리슨의 모습이다. 이 때가 조지 해리슨의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다. 그는 당시 소속되어있던 워너 브라더스에 완성한 앨범을 넘겼지만 퇴짜 맞고 말았다. 변해버린 음악 판도로 인해 조지 해리슨 개인의 음악적 신념은 상업적 성공이라는 벽 앞에서 계속 수정당해야 했다. 사진은 그 힘겨운 현실을 치열하게 헤쳐나가고 있는 조지 해리슨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의 1991년 모습니다.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이야기인데 한 때 둘은 연적이었다. 조지 해리슨이 SOMETHING'이란 노래를 바쳐 연인이 되었던 패티 보이드를 에릭 클랩튼도 좋아했다. 하지만 친구의 여자를 뺏을 수는 없어서 마음을 감추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당시 조지 해리슨은 인도에 빠져 보이드를 혼자 두기 십상이었고 문란한 생활로 상처를 입히는가 하면 종종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런 패티 보이드를 에릭 클랩튼은 곁에서 내내 위로해 주었다. 그러다 결국 마음을 접지 못하고 'LYLA'란 노래로 사랑을 고백한다. 무릎을 꿇고 사랑을 갈구하는 그 노래의 가사는 에릭 클랩튼을 생각하고 들으면 참으로 절절하다. 그 노래에 깃든 클랩튼의 애절함이 결국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인지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 곁은 떠나 에릭 클랩튼에게로 온다. 그런 그녀에게 에릭 클랩튼은 'WONDERFUL TONIGHT'을 선사한다. 당연히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은 사이가 나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감정도 무뎌지는 법. 결국 둘은 사진이 보여주듯 화해한다.- 

- 사진 속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남자가 바로 링고 스타이다. 그는 자주 비틀즈 속에서 자신이 소외당하는 걸 느꼈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가장 약한 존재감에서 오는 소외감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비틀즈 시절 링고 스타는 자신의 기량을 드러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의 진짜 기량은 솔로가 되어서야 비로소 활짝 드러났다.-

- 하지만 그의 관심은 굳이 음악에 국한되지 않고 다방면에 걸쳐 있었고 때문에 한동안 음악 보다는 연기 활동에 매진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 링고 스타는 아이들에게도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토마스와 기차들'을 보면 언제나 처음에 섬의 날씨 이야기와 기차들을 설명하는 마치 친절한 아저씨 같은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링고 스타다.-


 그들은 그렇게 솔로가 되고 나서도 '역시 비틀즈!'라는 평가를 이어나갔다. 아니 어떤 이들은 '진작 뛰쳐 나왔어야 했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성공했다. 비틀즈의 솔로 활동은 비틀즈 시절만큼이나 흥미롭다. '각자도생'의 길로 나아갔던 그들이 모두 자신의 길에서 정점에 설 때까지의 이야기가 실로 파란만장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음악으로 사회 의식을 일깨우고 누구는 거기에 반발하여 순수 음악의 열정을 불사르고 또 누구는 밴드 시절 억눌렸던 자신의 창조성을 마음껏 펼치고 또 누구는 아예 음악에서 떠나 연기의 열정에 몸을 맡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들 모두는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현재의 전설로 살았다. 결국 밴드 중 두 명은 암살 당하여 이제 불멸의 전설마저 되어버렸지만.


 맷 스노의 '더 비틀즈 솔로'는 그러한 현재에서 불멸로 나아가버린 비틀즈 솔로 활동의 전설을 가득 담은 책이다.


 보다시피 책의 판형은 큰 편이다. 비교를 위해서 비틀즈 앨범 LP와 존 레논의 '플라스틱 오노 밴드' CD를 함께 놓고 찍어보았다. 크기가 대충 짐작되실 지 모르겠다. 책은 이렇게 네 권이 하나의 케이스에 담겨 있는 구성이다. 각각의 네 권은 비틀즈 맴버 하나씩을 담고 있다. 보는 방향으로 맨 왼쪽에서부터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다.


  

케이스에 넣으면 이런 모습이다. 사진은 아직 비닐을 뜯지 않았을 때의 것이다. 역시나 책 크기의 비교를 위해서 가장 큰 판형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는, 그리고 비틀즈의 팬이라면 빠뜨리지 말아야할 책들인, 우리나라 저자가 써서 더 소중한 한경식의 '비틀즈 컬렉션'(왼쪽)과 비틀즈 연대기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 마크 루이슨의 '컴플릿 비틀즈 크로니클'(오른쪽)을 나란히 놓고 찍어 보았다. 나름 비틀즈의 노래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빠져서는 안 될 삼총사로 보시면 될 것 같다.


 이건 세워서 찍어 본 것.


 맷 스노는 각종 음악 잡지에 글을 기고했던 저널리스트다. 어쩌면 롤링스톤스지에서 그의 글을 봤을 수도 있고 혹은 '모조'에서 봤을 수도 있다. 특히 '모조'에서라면 자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 잡지의 편집자이기도 했으니까. 그의 글은 신랄하면서도 재밌다. 음악의 리뷰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게 맷 스노의 장점이다. 그런 그가 비틀즈 솔로 활동을 쓴 것이다. 더구나 그는 네 살 때부터 열렬한 비틀즈의 팬이었다. 비틀즈에 대한 애정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그가 마치 그 애정을 책으로 표현하기라도 하듯 솔로 활동에 대해 쓴 것이다. 그러니 맷 스노를 안다면 읽지 않을 수 없고 그가 쓴 비틀즈 솔로 이야기라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대상과 저자가 제대로 만나 이루어진 환상의 조합과도 같다.


 맷 스노는 그의 스타일 그대로 비틀즈 맴버들의 솔로로서의 음악적 여정과 그들의 사생활을 유기적으로 잘 엮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예술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 그러면서 삶과 예술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보게 된다. 음악은 음악만이 아니고 그 음악을 탄생시킨 삶까지 보았을 때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 '비틀즈 솔로'는 솔로로서의 그들의 음악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는지를 통해 우리는 익히 알았던 노래도 다시금 새로이 음미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틀즈를 아는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지 않을까 싶다. 아니 모르는 이들에게도 비틀즈의 맴버 개개인을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은 꼭 비틀즈 팬이 아니더라도 흥미진진하다. 당시 음악 사정에 지식이 있다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사이사이에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어 더욱 눈을 즐겁게 하는 책이다.


 어쨌든 그동안 비틀즈 밴드에 대해선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 많이 나왔지만 솔로 활동에 대해서는 이번이 처음 아닌가 싶다.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틀즈 맴버들의 솔로 활동에 대해 제대로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단언컨대, 비틀즈 솔로 활동에 있어서라면 '결정판'과도 같은 책이다. 읽어도 후회는 별로 들지 않을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상의 번역 -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4
윤여일 지음 / 현암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란 언제나 글을 쓰지 않는 마이너리티와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이너리티를 위해서, 마이너리티를 대변해서, 마이너리티의 뜻대로 책임지고 글을 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서로를 밀고, 자신의 도주선 위로, 서로 결합된 탈영토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우연한 마주침이 있다는 말이지요. 글쓰기는 항상 다른 어떤 것 - 자신의 고유한 생성이 되는 어떤 것과 합류합니다.( 들뢰즈의 '대담' 중에서)


  들뢰즈는 글쓰기를 단적으로 '타자-되기'로 정의한다. 여성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되기'이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동물-되기'이며 흑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흑인-되기'이다. '타자화'라는 점에서는 번역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다. 번역은 무엇보다 타인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타인의 언어를 제대로 번역해내기 위해서는 타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는지 그 타인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번역하려는 타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번역 또한 '타자-되기'라 할만하다. 윤여일의 이 책 제목이 '사상의 번역'으로 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 있지 않을까 싶다. 타인의 사상을 내 것으로 하는 것도 번역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번역은 일종의 대화다. 그런 까닭에 타인의 사상과 만나 나의 것으로 내재화 하는 일도 답습이 아니라 대화라 할만하다.

 

 

 '사상의 번역'은 현암사에서 나오고 있는 우리시대 고전 읽기 총서 중 한 권이다. 이 총서시리즈는 한 권의 책을 텍스트 삼아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특징이다. 총서의 네번째로 발간된 '사상의 번역'은 다소 우리에게 생소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 여류 학자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주된 텍스트로 한다.

 



 저자가 자신의 책을 특히나 '사상의 번역'으로 한 것은 기실로 하나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그러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다.
 
 작품이 진정 작품이라면 그 제약을 딛고 나와 타인에게로 손을 뻗는다. 자신의 진실에 천착했던 유한한 개체의 지난한 사고의 흔적이 타인에게 물음으로 육박해간다. 작품의 문제 의식은 짙은 농도로 말미암아 읽는 자에게로 삼투되고 읽는 자는 작품에 자신의 내면 세계를 투사해 거기서 잠재되어 있던 여러 물음이 모습을 이룬다.그런 작품에는 어떤 번역성이 감돌고 있다. 원문에서 이미 번역이 시작되고 있다.(p. 8)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한 개체의 사상을 번역한 번역서라고 한다. 같은 의미에서 윤여일의 이 책 또한 쑨거가 번역한 다케우치 요시미를 다시금 번역한 번역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번역인 게 단순히 그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기엔 한 가지 의미가 더 결부되어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책이 취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상가는 얼른 파악하기가 힘든 사상가다. 그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유형의 사상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주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공헌이 그의 한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이란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 어렵게 내린 개인적 결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그 결단을 내린 시점의 당사자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다. 따라서 내재적 비판이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내재적 비판이란 이런 것이다.

 내재적 비판이란 상대의 문제의식을 파고들어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상대가 내딛지 못한 다음의 일보를 비판자가 재구성하는 것이다.(p. 19)

쑨거처럼 이 책도 이 방법을 취한다. 윤여일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제의식을 파고 들고 그를 번역한 쑨거의 문제의식으로 파고들어 그들이 봉착한 한계에서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러한 대화이다. 무엇보다 타자-되기의 대화이다. 들뢰즈는 언젠가 자신의 철학은 남의 등에 달라붙어 자라났다고 고백한 적 있는데 이 책이 취하는 내재적 비판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주목했던 이유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타자인 중국과 대면하면서 일본인이라는 입장에서 중국을 보고 그것을 일본적으로 동일화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중국이라는 타자의 중심에 서서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오히려 일본이라는 자기 내부를 지속적으로 허물어 갔음에 있었다. 그 타자 지향성에 쑨거는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건 그대로 서구 중심의 근대에 간직된 한계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

 하이데거가 말했던 대로 근대는 어디까지나 포식자와 같았다. 즉 자신과 차이 나는 것들을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지 않고 모조리 삼켜서 자기와 똑같이 만들었다. 푸코가 말했던 대로 근대의 이면엔 선택과 배제가 차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닮을 수 있는 것은 선택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가차없이 배제되었다. 그렇게 자기 동일화의 이데올로기가 근대의 본질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게 단일한 전체가 되는 파시즘이 근대에 들어와 태동되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쑨거가 보고 있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은 그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엔 자기 동일화가 없었고 오히려 타자와 대면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해가는 '타자-되기'가 있었다. 근대가 간직하고 있는 해악을 치유할 수도 있는 대안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윤여일은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와 대면하면서 찾아낸 대안의 맹아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먼저 다케우치 요시미가 문학을 바라보는 태도다.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였다. 어떤 태도인가 하면,

  자기부정만이 진정한 부정의 가치를 지니며, 자기부정을 거치지 못한 지식, 바깥에서 주어진 지식은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다. 문학이란 태도며, 자기부정적 태도다. 문학가라면 마땅히 유동적 상태로 자기를 갱신할 수 있어야지 굳어버려서는 안된다.(p. 58)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자기부정의 태도였다. 나와 같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부정하기 위해 중국 문학을 대했고 중국을 대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평생 연구했고 늘 닮고 싶어했던 루쉰의 문학도 대했다. 사실 자기부정으로서의 문학적 태도는 루쉰을 연구하며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루쉰 역시 늘 자기 한계를 긍정하면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 한 결과 나온 것이 그의 문학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스스로를 노예라 여겼다. 그건 현실 중국 사회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으나 다케우치는 그 절망 때문에 루쉰은 저항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저항은 절망의 행동화로 드러난다고.

 구원을 바란다는 사실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노예에서 벗어나려면 가야 할 길 없는 고통스러운 상태지만 깨어나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 공포를 견뎌야 한다. 만약 공포를 견디지 못한 채 구원을 바란다면 그는 노예라는 자각마저 잃는다.(p. 109)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를 다케우치는 '깨어난 노예'라고 부른다. 그는 노예를 거부함과 동시에 해방의 환상 또한 거부한다. 깨어난 노예는 주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착취와 차별의 한 축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근저에 놓여진 구조를 본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한 상황 밖에 보지 못하는 '노예근성'과 구별된다. 그렇게 다케우치는 끊임없이 개인이란 내부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사상가의 내적 모순이 사라지면 사상은 평면화되고 그렇게 되면 타락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통속화를 가장 두려워한다. 자기 모순, 자기 부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를 지향한다. 진정한 사상가는 오로지 거기에 있을 때라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쑨거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태도를 루쉰의 말을 빌러 '쩡짜'라 부른다.

 바로 서두에서 진정한 사상적 만남은 자신을 상대에서 투입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갱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바로 쩡짜의 의미다.(p. 113)

 쑨거는 '쩡짜'가 깨어난 노예의 숙명이라고 한다. 

 주체는 쩡짜로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을 씻어낸다. 동시에 부단히 회심의 축을 향해 돌며 자기를 재형성한다. 이로써 주체가 얻는 것은 유동성이다. 다케우치가 말하는 행위란 바로 이런 의미다.(p. 115)

 즉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것은 흐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디든 고여있지 않고 그 어떤 곳이든 기꺼이 흐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상을 하는 주체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다케우치와 다케우치를 번역한 쑨거가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생각들이 한창 민족주의가 강해지던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의 첫 저작이자 대표작이었던 '루쉰'은 참전 직전에 죽을 것을 염두에 둔 그가 마치 마지막으로 할 말을 다하겠다는 일념으로 쓴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모두에 대해 배타적일 때 다케우치는 타자인 루쉰과 만나면서 주체는 무엇보다 흘러야 한다는 것을 깨쳤다. 쑨거는 그런 다케우치를 1988년에 만났다. 그 한 해 뒤에 중국에서는 현대에 들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만한 '천안문사태'가 벌어졌다. 민주화를 바라는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염원을 탱크로 처참하게 짓뭉개버린 사건이었다. 천안문사태는 80년 후반에 들어와 더욱 거세어지던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민주화 운동의 절정과도 같았다. 그 열망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조금도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무력으로 짓밟으려고만 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모습은 다케우치의 일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시기에 쑨거는 다케우치를 만났고 그의 '쩡짜'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걸어온 다케우치와 쑨거의 사상 편력은 지금 날로 우경화되는 추세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진정한 주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무엇을 주체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 거리를 가져다 준다. 그런 면에서 '사상의 번역' 역시 다케우치와 쑨거처럼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고 하겠다. 날로 동아시아 삼국 서로에 대한 적대의 시선을 키워가는 요즘 이 책을 통해 '쩡짜'로서 타인을 한 번 헤아려 보는 시선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쩡짜'를 한 번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다. 꽤나 좋은 책으로 적극 추천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젠더는 패러디다 -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5
조현준 지음 / 현암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젠더는 패러디다!

 이 말은 젠더트러블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하고자 했던 말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그동안 여성을 바라보는 두 가지 개념적 틀이라 할만한 것이 있었다.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바로 그것이다. 섹슈얼리티는 흔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성을, 젠더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을 뜻했다. 남성도, 여성도 바로 그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혼합된 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도 특히 여성의 경우 젠더는 넘어가야 할 장애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현재 사회는 어디까지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였고 그렇게 여성에게 덧씌워진 젠더란 남성 중심의 사회가 보다 잘 존속하기 위해 길들여진 정체성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가짜 정체성. 그것이 바로 '젠더'였다. 패미니즘은 젠더를 벗어나 생물학적 본연의 섹슈얼리티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라고 보아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하나의 패러다임처럼 굳어졌을 때 여기에 반기를 든 여성학자가 출현했다.


 


 

 그것이 바로 주디스 버틀러였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녀의 성적인 성향이다. 그녀는 레즈비언이다. '젠더트러블'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서의 급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의 주장은 그녀가 레즈비언으로서 한 경험 위에서 빚어졌다. 중세이래로 서양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기독교의 여파도 있고해서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성애의 행태로 규정되었다. 동성애자들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단지 사랑하는 상대만이 달라졌을 뿐인데 하나는 바람직한 것으로 다른 하나는 비난받을만한 것으로 치부되니 말이다. 주디스 버틀러에게 이러한 상황은 그야말로 이성애의 강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회 성원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여야만 하는 사회가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부여한 규범. 사실 기독교가 동성애를 죄악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린 지상명령이었는데 동성애는 번성, 즉 번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디스 버틀러는 이를 강제적 이성애라 부른다. 더구나 이는 대표적으로 기독교가 퍼뜨린 관념이다. 한데 기독교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존재다. 패미니즘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강압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는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기필코 같게 만들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억압하거나 그도 불가능하면 배제한다. 그러니 강제란 무엇보다 남성 중심 사회의 속성이다. 이로써 더욱 강제적 이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명분이 커진다. 그야말로 강제적 이성애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동안 고유한 본성이라고 여겨져왔던 섹슈얼리티조차 달리 보게 만든다. 타고난 몸 그대로의 여성이라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진정한 여성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온전한 정체성이 되려면 어디까지나 순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하다. 이미 태어난 그대로의 여성 신체를 바라보는 눈마저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무언가의 원본을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음을 뜻한다. 어떤 궁극의 일자(the one)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의 전반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디스 버틀러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해야 하고 결국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구분을 폐하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주장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섹슈얼리티로 여겨온 것도 정말은 젠더일 뿐이라고.


 이렇게 주디스 버틀러에 의해 처음으로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이분법은 폐지되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본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여기엔 지향해야 할 목표 같은 것이 없다. 모든 건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지도 않다. 지금 어떤 모습이든지 그 모습이 전부이며 또 지금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진실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주체는 '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행위하면서 그 때 그 때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다. 주체가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면서 주체가 된다. 정체성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 그것도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다. 행위자는 행위 안에서 또 행위를 통해서 가변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된다. 젠더의 표현물 뒤에 젠더 정체성은 없다. 젠더 정체성은 자신의 결과라고 간주되는 바로 그 '표현물들'을 통해서 수행적으로 구성될  뿐이다.(p. 41)


 그런데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수행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흔히 남성, 여성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따라서 수행한다. 르네 지라르도 말했듯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모델에 대한 모방에 불과하다. 한데 우리가 상정하는 여성 혹은 남성 모델이란 진짜의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정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흔히 여성적이다, 남성적이다 하는 것들은 그렇게 진짜가 아닌, 진짜를 모방한(그랬다고 가정하는) 것을 다시금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젠더는 제목처럼 패러디다.


 패러디적 정체성은 원본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원본이라 가정되는 복사본에 대한 모방으로 얻어지는 정체성이기 때문에 원본의 권위를 부정한다. 패러디가 원본의 희화화나 조롱을 목적으로 원본을 모방하는 행위, 혹은 그 결과물이라면 이것은 원본의 권위와 본질을 전제하지 않는 모방을 가능하게 한다.(p. 38)


 모든 게 다 모방인데 어느 것이 진짜 모방인지 알려줄 원본이 없다면 모든 모방이 있는 그대로의 원본이게 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정체성이든 그 누구라도 그것에 대해 가짜다, 옳지 못하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건 행위의 대상에 대한 것이지만 이러한 정체성 인식은 행위하는 당사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즉 내가 진짜 누구인가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원본이 부재하기에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줄 모델도 없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떤 행위를 통해서 형성하는 모든 정체성이 사실은 다 나의 정체성이다. 나의 정체성이란 그 때 그 때의 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며 그렇게 내 정체성은 카멜레온처럼 아니면 엑스맨의 미스틱처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패러디적 정체성은 바로 이 측면이 중요한데 이것은 개인을 획일적 정체성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즉 패러디적 정체성은 내게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주디스 버틀러처럼 동성애든, 이성애든 아니 성을 떠나 그 무엇이든 말이다. 패러디적 정체성은 무한의 잠재된 가능성으로 내게 자유를 준다.


 사실 주디스 버틀러는 존재가 가지는 대부분의 우울증은 바로 이 획일적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믿는다. 또한 타인에 대한 차별 역시 어딘가에 옳다는 것을 알려줄 진짜 원본이 존재하며 정체성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때문에 이러한 수행으로 형성되는 정체성,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는 가변적 정체성은 개인에게도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에도 모두 유익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이 가변적이고 구성되는 정체성의 모습을 때로는 뉴욕 할렘 지구의 드렉퀸들을 소재로 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다큐멘타리를 통해 때로는 프로이트와 크리스테바와 같은 정신분석과 대결하면서 적극적으로 펼쳐나간다. '젠더 트러블'의 이 모든 지적 투쟁을 그 책을 번역하기도 했던 조현준은 '젠더는 패러디다'라는 책에서 빠짐없이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무엇보다 장점인데) 쉽게 그려내고 있다.


 그동안 강제적으로 규정되고 불변하는 정체성이 개인과 사회에 가져다 준 해악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정체성의 새로운 시각은 얼마든지 음미할 필요가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조현준의 이 책은 잘 된 '디켄딩'과도 같다. 정작 원저인 '젠더 트러블'을 읽을 때 느껴지는 텁텁한 난해함을 이 책에서는 디켄딩으로 와인에서 이물질을 분리해내듯이 말끔하게 분리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출발이자 핵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로서 진정 추천드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