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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시간 빠르게 가는군요. 어느새 또 이렇게 신간 추천의 시간이 닥쳐오다니...

벌써 7월이란 말입니까? 날짜보고 그새 그렇게 시간이 흐른거야 문득 깨닫게 되네요.

요즘은 그냥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콘베이어 벨트 위에 쉴새없이 들어오는 물건의 나사를 죄던 찰리 채플린 같습니다.

이것 처리하면 저게 들어오고 또 저걸 처리하면 이제는 이게 '메롱~'하듯이 들어오는...

더위 먹은 강아지마냥 헥헥 거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 같은 날들이에요.


무, 어쨌든 푸념은 이 정도에서 각설하고 인문 신간 추천이라는 본 게임에 출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에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6월에 나온 인문 시간을 휘리릭 둘러보는데 반가운 신간이 좀 보이네요.


그 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책은 단연 이것!


 네, 프랑코 모레티의 '공포의 변증법' 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학자입니다. 저는 이 학자를 오래전에 주은우의 글을 통해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교수 되기 전에 문화과학인가 아무튼 어떤 계간지에 발표한 글이었는데 거기서 프랑코 모레티의 드라큘라와 자본론에 대한 것을 쓴 적이 있죠. 처음 그 글을 읽는데 굉장하더군요. 자본의 속성을 흡혈로 파악하고 그것을 드라큘라로 풀어내다니. 세상에 이렇게 참신하게 분석하는 작가도 있구나 진심 감탄했었습니다. 그 때부터 프량코 모레티를 찾아 읽었죠. 그런 점에서 대학 도서관이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원서도 얼마든지 찾아 읽어볼 수 있었으니.

아무튼 그 때 소개된 책이 바로 이 '공포의 변증법'이었죠. 정말 오랜 시간이 흘러 드디어 번역본으로 나왔네요. 참 반갑고 개인적으로 추억이 돋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로서는 단연, 첫 추천을 할 수 밖에 없구요.

프랑코 모레티는 제게 피그말리온을 연상시킵니다. 새로울 것이 없는 고전들을 그만의 독특한 분석으로 피와 살이 도는 생생한 존재로 되살려 주거든요. 그런 경험을 가득 안겨주는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 '공포의 변증법'은 원제가 Signs Taken for Wonders 로 프랑코 모레티의 진가를 알린 대표작이기도 하거든요. 추억의 책이라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네요.^ ^;  


 검색해보니, 지금까지 나와있는 프랑코 모레티의 책은 이것밖에 없군요. 이중 '세상의 이치'는 소설이고 '근대의 서사시'는 절판되었습니다.












 솔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도 새로이 번역되어 나왔네요.

 역시나 반가운 추억 속의 책입니다.

 크립키의 이 책도 빼놓지 말아야 할 책 중의 하나죠.












 얼마전에 윤여일이 쓴 '사상의 번역'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일본의 학자 다케우치 요시미가 바로 루쉰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왕후이일 것입니다. 그 역시 루쉰을 통해 진정한 학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던 존재이니까요. 그런 왕후이의 루쉰에 대한 책이기에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역사와 민족 그리고 상황이 다른 개인들이 루쉰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 비교해 읽어보는 것도 참으로 흥미로울 것 같군요. 그러면서 저의 루쉰은 또 어떠한가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연달아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책이 또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토머스 메츠거의 '곤경의 탈피'

 막스 베버 이후로 굳어진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정면에서 반박하여 유명해진 책.

 그동안 중국의 성장을 외재적 요인으로 설명하던 것에 비해 토머스 메츠거는 거꾸로 성장의 요인은 어디까지나 내부에 있었음을 밝혀 중국 성장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려 했습니다. 그것도 중국 사상의 핵을 이루는 유학을 가지고 말이죠. 현대에 들어와 특히 경제성장과 관련하여서는 유학은 득보다 실을 많이 가져온 학문으로 많이 인식되었는데 이 책은 그 정반대의 인식을 가져다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 우리나라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한 총리 후보가 일본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었죠. 뉴라이트가 내내 내세우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동일한 발언이었습니다. 조선이 문제가 많았는데 일본 덕분에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는.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성리학이었습니다. 잦은 당쟁이 조선의 성장을 가로막은 대표적인 것으로 흔히 꼽기도 했었죠. 과연 저들의 주장대로 외재적 요인이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 성리학이 그렇게나 큰 문제였는지 비록 중국의 케이스지만 제대로 검증해 볼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발전은 어디까지나 내재된 힘, 그렇게 자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오면 닥치고 읽는 피에르 바야르의 새책입니다.

 그의 전작들을 읽으면서 도대체 얘는 어떻게 자라왔길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했었는데 드디어 알 수 있는 기회가 왔군요. 다른 이의 텍스트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과거를 텍스트로 삼는다니! 읽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발터 벤야민 선집을 읽다보면 가장 궁금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을 기획하고 지속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최성만 교수가 바라보는 발터 벤야민입니다. 과연 그가 그리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초상은 어떠할까 한번쯤 제대로 육성으로 들어보고 싶었는데 정말 좋은 기회가 찾아왔네요.

목차를 보니 발터 벤야민이 거의 전 저작을 다루고 있는 듯 한데 발터 벤야민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아주 좋은 기회가 될 듯 합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걸신들린 듯 달려들어 먹어치우고 싶네요^ ^








 아, 참! 하나를 빠뜨렸네요.

 '축구의 세계사' 서점에서 봤는데 재밌더군요. 아주 두텁긴 했지만...

 축구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아 사족처럼 추천해 봅니다.












 이번엔 이렇게 신간 추천을 합니다. 와, 그런데 너무 무덥네요. 모두들 이 더위에 몸 상하지 마시고 보다 더 시원하고 쾌적하게 잘 보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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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프랑코 모레티를 읽긴 읽었는데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겠던데, 주은우 하니깐 저도 아마 주은우가 번역한 글을 통해 접한 것 같군요. 하여튼... 이분 분석이 매우 독특합니다.그나저나 비야르 책도 이번에 나왔네요?! 허어,, 이거 참....

ICE-9 2014-07-08 20:08   좋아요 0 | URL
와, 저와 프랑코 모레티를 알게 된 경로가 비슷하셨군요. 저도 정말 독특하다고 느꼈고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 꽤나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거기 있어서는 바야르도 비슷한데 함께 나왔더군요.^ ^ 읽을 책이 마구 늘어나는데 읽는 시간은 왜 이리 줄어드는 것인지 ㅠ ㅠ
 
유성의 연인 1 - 제1회 퍼플로맨스 최우수상 수상작
임이슬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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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의 인연'이 아니다 '유성의 연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과 혼동하지 말길. 이 소설은 제1회 퍼플 로맨스 소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니까. 말인즉슨 로맨스 소설이다. 장르라면 가리지 않고 골고루 섭취하는 내가 그래도 인연이 먼 장르가 있다면 그건 단연 '로맨스'다. 혼동해서 읽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궁금증 때문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로맨스 소설 공모전을 보게 되었다. 저번에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에서도 대상 작품이 로맨스 소설인 걸로 알고 있다. 대상만이 아니다. 수상작이나 응모작 중에 로맨스 소설이 꽤 많았다. 어떤 공모전은 아예 로맨스 소설만을 뽑질 않나, 왜 이리도 유독 로맨스 소설인 것인지, 정말 인기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렇다면 왜 인기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나온 김에 읽게 되었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시대적 배경은 조선 광해군 1년 1609년이다. 이렇게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얼마전에 방영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그 때 도민준이 처음으로 UFO를 타고 조선에 온 때가 바로 그 해였다. 날짜는 8월 25일. 실록에 이르기를 그 날엔 강원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이한 물체가 하늘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 소설도 거기에 영감 받아 만들어졌다. 맞다. '별에서 온 그대'처럼 우주인과 지구인의 로맨스다. 설정이 비슷해서 표절인가 싶겠지만 소설이 드라마보다 먼저 나왔다. 1회 퍼플 로맨스 대회가 열렸던 것은 2012년이니까. 뭐, 어쨌든. 여기서 우주인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여성 우주인과 조선의 남성 선비의 연애담이다. 그들이 만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출중한 외모에 걸맞는 출중한 능력까지 겸비한 선비 정휘지는 뜻하지 않은 모함에 휘말려 강원도 양양에서 귀양 살이를 하고 있다. 어느날 모범생 선비답게 책방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행패를 당하고 있는 여자 무당을 도와주게 된다. 여자는 결초보은의 심정으로 그 도움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면서 점을 보라고 한다. 정휘지는 처음엔 사양하다가 너무나 간곡히 부탁하는지라 점을 보게 되는데 그 여무당은 정휘지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귀인'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당부를 덧붙인다.


 "반드지 잊지 마십시오. 가장 먼저 눈에 띈 물건을 몸에 지니고 그 누구에게도 뵈지도 주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비님.(P. 15)


귀양 살이하는 처지에 그런 인연이 어찌 있을꼬 반신반의했던 정휘지였는데 귀양하던 거처에서 하나있던 하인을 심부름 보내는 바람에 직접 장작을 구하러 숲에 들어갔던 정휘지는 하늘에서 갑자기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하얀 살결에 푸른 눈을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정휘지는 선녀를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바로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우리가 너무 잘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을 살짝 변형해서 만들어졌다. 여무당이 사슴이고 정휘지보고 절대 남에게 주지 말라고 했던 것은 선녀의 날개옷이며 정휘지는 나무꾼, 우주인은 선녀인 것이다. 정작 그 우주인은 성년을 맞이하여 비로소 원했던 대로 혼자 우주여행을 할 수 있게 되어 펜팔을 하던 2609년의 한국 친구를 만나러 지구로 온 것이지만 도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그만 천년 전으로 슬립해 여기에 불시착 하고 만 것이다. 그런 그녀의 이름은 '용'을 뜻하는 미르.


 정휘지와 미르는 만나자마자 우리말로 술술 대화를 이어가는데 '이거 가능한 상황이야? '싶지만 미르가 원래 한국인과 펜팔 했다는 설정으로 잘 넘기고 있다. 그런데 미르가 지구의, 그것도 한국의, 거기다 천년전의 조선의 문화에 너무나 무리없이 잘 적응하고 있어 도대체가 우주인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소설 중반에 정휘지가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죽을 고비에 처하고 또 정희지의 친구 수하가 고을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도중 정체불명의 짐승에게 습격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미르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그들을 완벽하게 치유한다. 그 때라야 가끔 '아! 얘. 우주인이었지.' 깨닫는 정도다. 일부러 주인공을 우주인으로 설정했다면 완벽한 타자로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문화적 격차에서 비롯되는 소외감과 갈등을 넣었음직도 한데 그것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그냥 지구인, 조선 여자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왜 굳이 여자 우주인으로 설정했는지 약간 의문이다. 이야기가 단조로웠기에 그런 것들이라도 투영되었으면 이야기가 한결 더 풍성해졌을 것 같아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다.


 로맨스 소설의 공식엔 충실하다. 정휘지를 사모하는 여인인 수연과의 삼각관계도 나오고 미르를 사모하는 도하의 삼각관계도 나온다. 둘 다 주인공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성격인 것도 다른 로맨스 작품에서 흔히 보던 공식이다. 둘 다 사실은 주인공의 질투를 유발하여 더욱 둘이 가깝게 만드는 역할인 것도 마찬가지다. 공식에 충실함은 사실 양날의 검이다. 장르적 충성도를 기대하는 독자에게 만족감을 주기도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지 훤히 내다보게 만들어 식상함을 주기도 한다. 장르의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이야기의 신선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독자의 뇌리에 인상 깊게 새기려면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유성의 연인'은 양양 고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음모를 넣어 신선도를 높이려 했지만 제대로 세공하지 못했고 결말까지 흐지부지된 감이 없지 않아서 병살타에 그치고 말았다. 이왕 위기 상황을 만들었으면 정휘지와 미르가 함께 소동의 와중에 있고 해결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좋았으리라 싶다. 미스터리가 본격적으로 불궈지는 중후반에서 정휘지만 그 수사에 뛰어드는 바람에 정휘지와 미르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더하여 이런 상황으로 미르가 더욱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면서 우주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비한 정체성이 줄 수 있는 매력을 모조리 휘발시켜 버렸다. 여기서 미르는 그냥 조선 여인 같다. 더구나 이런 로맨스 소설은 사랑을 통한 성장을 말하기 마련인데 미르는 아무런 성장이 없다. 해프닝 정도의 사건들만 있고 고난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정휘지도 마찬가지다.


 대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란 이별을 전제로 한 사랑이다. 무엇보다 도래한 그들 모두가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인해서였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지구와 우주인 그리고 천년이라는 세월의 격차만이 아니다. 떠나온 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들, 가족들 때문이다. 포기하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도 영원히. 즉 사랑 때문에 돌아가기를 포기하는 것은 그 세계를 포기하는 것이다. 넘어온 자의 어깨엔 떠나온 세계 전체가 얹혀있는 것이다. 육중하게도.


 사랑과 온 세계가 지금 맞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르지만 과연 그 세계 전부를 이길 수 있을까? 하여 이별은 예정된 것이라 말하는 거다. 사랑은 이길 수 없다. 선녀는 결국 하늘로 돌아갔다. 그 이후의 모든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결말도 그랬다. 결국 이러한 이야기에서 사랑이란 이별을 제대로 하기 위한 사랑이다. 보내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가 포기해야 할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사랑을 통해 알기에 보내줄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성장이다. 마음의 그릇이 타인을 가득 담고도 넘칠만큼 커지는 것이다. 바로 사랑이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들이 이별할 때 흐르는 눈물 속에서 더 크게 자라난 사랑을 보고는 감동하는 것이다. 성장이 없으면 감동이 없다. 헤어짐도 아프지 않다.


 아쉬운 것은 이것이다. 작가의 주안점이 성장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 성장의 이야기를 독자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끔 세부적으로 세공까지 했다면 더할나위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나도 한 가지 배운다. 사랑이야기가 그저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로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거기엔 뭔가 사랑으로 그 영혼이 더 커지게 만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걸. 그것도 독자들이 감응할 수 있는. 그러고보니 예전에 산드라 블록이 주연했던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생각난다. 그 영화의 원작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원작이 로맨스 소설의 대표적 존재라 할 수 있는 할리퀸 시리즈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동경과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여주인공인 산드라 블록은 처음엔 동경을 사랑으로 알지만 뜻하지 않았던 사건과 이에 결부된 이런 저런 만남들을 통해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된다. 그녀로 하여금 진짜 사랑을 보게 한 것이 바로 성장이었다. 성장이 그녀에게 참된 사랑을 볼 수 있는 개안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선택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관객도 그만큼 덩달아 성장한다. 로맨스 소설이 의미 없지는 않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로맨스 소설이 폄하되고 있는 것(어쩌면 이건 일반화의 오류일지도 모른다.)은 작가들의 책임일수도 있다. 로맨스 소설이 간직하고 있는 광채를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했을 때 그는 다만 원래 대리석 안에 깃들어 있던 것을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어 드러나게 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사랑은 원래 환하고 아름다우며 고귀한 것. 앞으로 로맨스 작가들이 소설이라는 정과 망치를 통해서 그 온전한 모습을 보다 잘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을 느끼는 일이 삶에 플러스가 되면 됐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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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 마음을 움직이는 경제학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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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포니아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행동경제학 교수들인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가 공저한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 경제학 책들과 차이가 난다.


  하나는 현상 보다 그것을 유발한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사회엔 많은 차별이 있다. 인종차별, 성별차별, 계층차별, 학력차별, 연고차별 등등. 살면서 이런 차별을 한 두번 안 당해본 사람이 없을만큼 우리는 차별의 벽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도대체 왜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것일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하게도 천지사방의 참 많은 현자들과 석학들이 사시사철,  불철주야 어떻게 하면 이 차별을 없앨 수 있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들인 그 노력에 비해 누구나 느끼듯이 차별의 한랭전선은 여전히 그대로다. 더러는 이상론에 치우쳤고 더러는 현실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여 차디찬 눈바람은 아직도 차별의 바깥쪽 사람들을 덜덜 떨게 만들고 있다. 언제나 혹독한 겨울이다.


 경제학도 다르지 않았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보았지만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간격만 더욱 넓혀주었을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동학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려 했지만 오용과 남용 끝에 아직까지도 요원하기만한 꿈으로 남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경제학은 이곳을 포기해 버렸다. 차별은 유령의 집처럼 분명히 곁에 존재하지만 보아서도, 다가가서도 안되는 영역이 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의도적 무시'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얼마나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것인가?' 이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달려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다독여 주었다. 자연스럽게 차별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실타래를 뜻하는 '아포리아'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이러한 난제의 낙인은 그 차별의 해결에 책임있는 자들에게 그 짐을 덜어주는 효과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갈수록 차별은 가속화되고 있지만 그 반대의 움직임이 더디기만 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여,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의 작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 아포리아의 영역에 기꺼이 뛰어들었으며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그 실제적 대안까지 아울러 척척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는 그런 책이다.


 'THE WHY AXIS'는 이 책의 원제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행위의 축인 동기에 중점을 둔다.


 실제적인 차별의 해결을 위해 그들이 바라보는 건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진짜 동기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익 추구의 존재로 본다. 이기적이라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기심과 이익 추구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착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를 들어보자. 이 행위는 물론 이기적이지 않다. 하지만 착한 일은 대개의 경우 칭찬이나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것과 같은 긍정적 결과에 대한 기대도 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이익 추구다.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뭔가 거기에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긍이 된다. 최근 뇌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착한 일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즉 선한 행동을 '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쾌'를 지향하게 되어있다. 이익추구란 다름아닌 이 '쾌'를 추구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이것을 모든 행위의 동기로 본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행위자가 진정으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를 먼저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차별 현상 자체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면서 진짜 차별을 낳고 있는 동기를 건져 올리는데 중점을 둔다.


 인종차별주의자로 타고났다기 보다는 차별하는 행동의 뒤에 어떤 동기가 숨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차별이 사람들의 삶에 장기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하므로 사람들이 매일 활동하는 실물시장에서 차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차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깊이 자리잡은 편견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P. 26)


 과연 자연스런 편견일까? 그렇다면 차별은 그대로 '아포리아'로 남게 될 것이다. 콘크리트가 되어버린 편견만큼 참 깨기 어려운 것도 없다는 것은 선거할 때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물론 아니다. 그건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어 시간 속에서 집적하여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 편견은 사상누각이다. 낳게 한 동기만 잘 뒤흔들면 우르르 무너지는.


 이는 사실 중대한 관점의 변화를 초래한다. 책을 읽어보면 분명히 느끼게 되는 사실이다. 우리는 편견을 가진 이를 질타한다. 지금 한국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국개론'은 그 단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이해못할 족속이다'라는 이름표요 '대화 불가능이다'라는 항복이다. 즉 '아포리아'였다. 그렇게 하면 쉬워진다. '그들을 바꾸기 위해 내가 뭘했던가?'라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욕만 해도 된다. '그들이 안 변하는데 난들 어쩌겠어?'하면서 양 손바닥을 위로 올리고 어깨짓만 하면 그만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라고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랬다. 난 그들을 계몽의 대상자로만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게 정답이니 너희는 듣기만 해!'라고만 말하고 있었음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더욱 소름이 돋았던 것은 이것이 다름아닌 폭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규정의 폭력. '그들은 생각도 없고 그저 깊은 편견에 사로잡혀 좀비처럼 움직일 뿐이다'라고 내 멋대로 단정지어 버렸던 것이다. 존재를 사물과 같은 비존재로 여겼으니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동기를 중시한다 함은 단적으로 그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제대로 헤아리고 해답을 내렸듯이 그들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음을 상정한다. 다만 출발점이 달랐을 뿐이다. 즉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바꾸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 먼저 헤아려야 할 대상이다. 중요한 관점의 변화란 바로 이것이다. 타인을 내 속으로 내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타인 속으로 내재화 시키는 것. 그들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깃든 속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렇게 이 책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기본이 되어야 할 태도를 내게 깨우쳐 주었다. 이것만 해도 내겐 큰 수확이다. 포기와 무시가 사실은 내 약함을 증거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려 주었으니까.


 진정 그런 것 같다. 아포리아라는 낙인은 내 무력함의 고백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것도 내가 편하자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이제 그만 쉬어도 좋다는 표지가 아니라 내 의지와 지적 근력을 어디까지 트레이닝할 수 있는지 그 도전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는 그렇게 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던 동기로 뛰어들었고 그것을 위해 이 때까지 경제학자들이 잘 하지 않았던 것을 또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가진 두 번째의 차이점이다. 바로 실험이다.

 과거 경제학자들은 통제된 현장 실험에 회의적이었다. 경제계란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과 기업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이는 곧 온갖 돌발 변수가 난무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실험은 많은 변수를 통제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의도적으로 단순화시킨 현실. 하지만 단순함은 복잡함을 반영할 수 없다. 하여 경제학자들은 외면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통제된 현장 실험을 감행한다. 근저에 깔려있는 믿음은 이것이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통계의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통계란 상관관계만 밝혀줄 뿐, 인과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가 대표적이다.


 '빅데이터'라는 시류가 있다. 엄청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유형을 관찰하면 흥미 있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빅데이터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엔 커다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인과관계가 아닌 상호연관성을 근거로 자료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료 조직 방법과 비교 대상에 따라 상관관계를 가지는 대상은 수도 없이 많다. 무의미한 상관관계에서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가려내려면 인과 가설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P.21 ~ 22)


문제는 경제학은 해답을 찾는 학문이고 여기서 보듯이 해답은 상관관계로 찾아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인센티브'가 있다.  사실 정부가 차별이 아포리아라고 해서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차별을 줄이기 위하여 실제 움직인다. 그런데 방법은 한정적이다. 대부분이 '인센티브'를 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장애인을 고용하면 세금을 감면해준다든지, 가난한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면 장학금을 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정부만이 아니다. 많은 기업이나 학교 그리고 가정에서조차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인센티브'를 준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다. 사실 '인센티브'는 어디까지나 매개다. 원래는 원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정착되도록 던져주는 당근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목적은 그것이다. 인센티브는 항구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대부분 인센티브가 종료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는 잠깐의 효과는 기대할 수 있어도 원하는만큼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왜 그럴까? 저자들은 말한다. 인센티브 정책이 대부분 실패하는 것은 그 인과관계를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즉 변화시키려는 대상의 진정한 동기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통계는 이걸 줄 수 없다. 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빅 데이터'는 방대한 양에다 너무 온갖 자료들을 수집한 탓에 변수의 흥미로운 조합이 많아 인과관계를 제대로 설정하기조차 어렵다. 결국 실제 현실을 보여준다고 하여 통계에 기반하더라도 뭔가 의미를 건지려면 실험과 똑같이 변수들을 적절하게 잘라내어 임의적으로 만든 가설에 의존해야 한다. 통제된 현장 실험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저자들이 이 때문에 실험을 중요한 방법으로 가져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차피 이들이 천착하는 것은 동기다. '동기'라는 축은 단순한 상황에 있든 복잡한 상황에 있든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단순한 상황에서 깃든 동기는 보다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기 쉽다. 때문에 통제된 현장 실험은 그들에게 꽤나 유용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그들의 방법은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이전과 차이나는 점, 그 두 개의 축을 가지고 그들은 차별이라는 '아포리아'의 우주로 뛰어든다. 여기엔 모두 8개의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 남성보다 적은 여성의 급여 문제, 전혀 좁혀지지 않는 성별의 격차를 해결하는 문제, 가난한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게 만드는 문제, 가난한 아이들과 부자의 아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학업 차이를 좁히는 문제,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차별을 해결하는 문제, 차별을 없애기 위한 공공정책이 왜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지에 대한 문제, 학교폭력과 아동비만 그리고 지구온난화를 줄이는 문제, 마지막으로 기부금을 증진시키는 문제 등이다. 아직 한 장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현장 실험을 행하지 않는 현재의 기업 문화를 타박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를 다 건드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도 과연 이게 해결될 수 있을까 싶었던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장 실험을 거듭하고 근저에 놓여있는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제시한 대안이 실제 효과로 나타났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새삼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버터셔 강해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실은 패배주의랄까, 그런 무기력에 절어 있었다. 요즘 주위에 이민가는 이들이 많은데 실은 나도 동조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이었다. 무시하면 편하다.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지금만큼 좋은 세상도 없다. 그렇게 되려, 닮아지려 했었다. 잊고, 눈감고, 귀막고. 타조처럼.


 타조는 천적이 쫓아오면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땅에다 머리를 쳐박고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는 식이다. 우리들도 흔히 하는 실수. 카오스 이론은 북미의 나비 날개짓 한 번이 아시아에 태풍을 몰고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자연계는 작은 한 부분이 커다란 여파를 낳을만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랑 상관없는 일들은 없다. 세월호의 희생된 아이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모두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무시와 포기는 비극을 반복적으로 양산하고 언젠가는 그 희생자의 명단에 내가 오를 것이다. 변화만이 그걸 막는 길이다. 정말 원한다면 나 편하자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대화하려는 노력을 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한다. 다시금 홍상수의 영화 '극장전'에서 김상경이 했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생각해야 해. 생각만이 날 살릴 수 있어." 예언같다. 포기하지 않는 것.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도 살리는 길 같다. 이 문장을 이 책에 대한 소감의 마침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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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 조심하라, 마음을 놓친 허깨비 인생!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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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하다. 애처롭다. 권력을 쥐려는 자의 모습이란 어째 하나같이 다들 이럴까? 문득 박지원이 '담연정기'에서 도하와 청장이란 새에 관해 한 말이 생각났다.


 둘 다 물가에서 고기를 잡고 사는 새다 . 먹이를 취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도하는 진흙과 뻘을 부리로 헤집고, 부평과 마름 같은 물풀을 뒤섞이며 쉴 새 없이 물고기를 찾아다닌다. 덕분에 깃털과 발톱은 물론, 부리까지 진흙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쓴다. 허둥지둥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헤메나디지만 종일 고기 한 마리 잡지 못 잡고 굶주린다.

 청장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신천옹으로 불린다.  이 새는 맑고 깨끗한 물가에 날개를 접은 채 붙박이로 서 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좀체 옮기는 법이 없다. 게을러 꼼짝도 하기 싫은 모양으로 마냥 서 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희미한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이듯 아련한 표정으로 수문장처럼 꼼짝않고 서 있다. 물고기가 멋모르고 앞을 지나가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날름 잡아먹는다. 도하는 고생을 해도 늘 허기를 면치 못한다. 청장은 한가로우면서도 굶주리는 법이 없다. 연암은 이 두 가지 새에 대해 설명한 후, 이것을 세상에서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태도에 견주었다.


 이번에 나온 정민의 책 '조심' 중 '도하청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암답게 비유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연암은 이덕무에게 이것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덕무는 이 이야기를 듣고 청장이 좋아서 청음관이라고 쓰던 자신의 당호를 '청장관'으로 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부귀와 권력은 진흙과 같아서 쫓으면 쫓을수록 제 몸만 더러워질 뿐이다. 그걸 우리는 오늘날 총리 후보들에게서 명약관화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연암만이 아는 진리는 아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부귀를 쫓을수록 사람은 옹졸해지고 권력을 쫓을수록 사람은 비굴해진다. 초라함만이 늘어갈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리도 다들 경마장의 말마냥 애오라지 그걸 향해 달리는 것일까?


 채찍이 엉덩이를 때리기 때문이다. 불안이라는 채찍. 어디서도 안정을 구가할 수 없는 사회, 그것이 바로 한국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낙오에 대한 공포가 스모그처럼 천지를 뒤덮는다. 그저 빨리 달려 남들보다 얼른 차지하는 게 살길인 것 같다. 그러니 조급증이 날 수 밖에.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삼전도(혹시 삼전도가 무엇인지 모를 분이 있을 지 몰라서 책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잠실 나루 부근으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하여 9번 절한 곳이기도 하다. 훗날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렀다.)를 건너며 지었다는 시다.


 바야흐로 백사장에 있을 적에는

 배 위 사람 뒤처질까 염려하다가,

 배 위에 올라타 앉고 나서는

 백사장의 사람을 안 기다리네.


 막 떠나려는 나룻배를 향해 백사장을 달릴 때는 자기만 떼어놓고 갈까봐 조마조마 애가 탔다. 겨우 배에 올라타 앉고 나자, 저만치 달려오는 사람은 눈에 안 보이고 왜 빨리 출발하지 않느냐며 사공을 닦달한다는 것이다. (p. 164 ~ 165)


 여기에 우리 모습이 있는 것 같다. 나룻배가 나만 떼어놓고 갈까봐 다들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래서 필요도 없는 스펙 쌓느라 열심이고 통장 잔고 늘리려 열심이며 사교육을 왕창 동원하면서까지 아이들 교육에 열심인 게 아닌가? 분명 조급증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탓할 수도 없다. 정말로 떼어버리고 가는 것이 이 사회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이덕무에 따르면 나룻배에 한 번 올라타고 나면 더이상 떼어놓고 갈까봐 조마조마 애타는 마음은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 또한 똑같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배려는 없다. 오히려 지연되는 출발에 짜증만 날 뿐이다.


 살면서 많이 겪는다.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지는 것을. 한 번 올라타면 손을 내밀기 보다 쳐내기 바쁘다는 것을. 우리의 조급증은 그러한 경험의 산물이다. 무정하게 떠나는 나룻배를 보며 백사장에 주저앉은 설움의 산물이다. 그러니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하는 것만이 우리의 조급증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이리라. 가까스로 배에 올라탄 사람들이 뒤쳐 오는 자를 보며 언젠가 자신도 저랬었지 생각하며 그를 위해 손을 먼저 내밀어 주는 것. '우리 다같이 가자!'고 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도하로 만들고, 경마장의 말처럼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리라. 이렇게 보면 완전한 타인이란 없다. 과거 언젠가 지녔던 나의 얼굴이 있을 뿐. 정녕 그 때 나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 과거의 절실했던 도움을 현재의 내가 주려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조심'을 읽고 드는 생각의 한 조각이다. 정민에 따르면 원래 '조심'이란 마음을 잘 붙들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 한다. 그렇게 내 마음을 잘 붙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100개의 사자성어를 이 책에 담았다. 그렇다. 2012년에 나온 전작 '일침'과 비슷한 구성이다. 하나의 사자성어를 중심으로 옛 사람의 글이랑 생각과 정민의 사유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흙갈색 소반 위에 깨끗한 하얀 접시 하나 놓여진 것처럼 정갈하다. 문장은 소담하고 담긴 뜻은 담백하다. 속도는 완만하여 이른 새벽 하늘이 밝아져오는 것이나 저녁에 황혼이 물들어가는 것을 보는 느낌을 준다. 천천히 완상하면 더욱 좋을 책. '일침'이 마음에 들었다면 필시 이 책 역시도 마음에 들 것이다. 읽어보니 옛 사람이 사는 모습이나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별 반 다를 바 없다. 과거의 글이지만 가슴에 콕콕 박히는 말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 번에 후루룩 읽기 보단 천천히 오래 곱씹으며 읽어야 할 것 같다. 장맛은 오래 묵혀야 한다. 이 책도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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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대포' 헌법소원.

 제기했다기에 관심 있었다. 어제 헌재 판결이 나왔는데,

 엥, '각하' ?

 각하는 소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내리는 결정이다. 뭔가 충족되지 않았기에 이런 결정이 나왔나 보았더니

 이럴수가! 소의 이익이 없기 때문이란다.

 물대포 쏘는 행위가 이미 끝나 청구권자들의 기본권이 더이상 침해 당할 여지가 없으므로 소의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소의 이익을 다른 말로는 권리보호의 이익이라고 한다. 즉, 공권력의 행사로 기본권을 침해당한 당사자가 그 공권력의 취소를 통해 침해당한 권리를 구제받을 가능성이 있을 때 이 이익은 인정된다.  이러한 권리보호의 이익은 종국 결정시까지 있어야 하는데 판단 대로 물대포 쏘는 행위는 이미 끝났으므로 구제받을 이익은 더이상 없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외가 있다.


 즉 권리보호 이익이 소멸했다고 하더라도 예외적으로 심판의 이익을 인정하여 본안 판단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헌재는 개인의 기본권 구제도 해야하지만(주관적 기능) 위법한 침해로 부터 헌법 질서를 수호할 사명(객관적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개인의 권리 보호 이익이 소멸했다 하더라도 이 침해 행위가 차후 반복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그건 곧 헌법 질서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므로 그 방지를 위해 본안 판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대포 행위가 앞으로도 반복될 '위험' 곧 가능성이 있다면 예외로 본안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각하 판단한 6인은 물대포가 근거리에서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들었다.


 헐~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한 것일까?  심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앞으로 안 쏠까? 이대로 역사의 유물이 된다면야 대환영이다. 아니면 근거리에서만 쏘지 않으면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근거리일까? 정말 나의 상식으로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 없는 논리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엔 하도 그동안의 상식과 통념을 뛰어넘는 저들의 생각들을 많이 봐와서 조금은 내성이 생겼다.


 어쩌면 이리 무리하게 각하 판단을 내린 게 물대포가 기본권 침해가 최소일 것을 요구하는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되어(청구권자들이 근거리 물대포 사용으로 뇌진탕 등의 상해를 입어 헌법 소원을 청구한 것이기에) 위헌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기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소설 한 번 써 본다.(재판관 중 3인은 예외로 인정하고 본안 판단하여 이것을 이유로 위헌 판단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에 깔린 본심은 앞으로 물대포 계속 쏘겠다는 얘기. 곧 마음에 들지 않는 집회 시위에 대해서는 추호의 여지도 없이 강경 대응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려나~ 시위하려면 각오하고 나오라는... 

아무튼 전교죠 법외노조 통보 적법 판결도 그렇고 또 하나의 씁쓸한 케이스다.



 











 라고 썼는데 바로 다음날 전면 쌀 개방에 반대하는 시위대에게 물대포를 쏘았더라. 역시.

 정말 헌재의 낙관론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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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6-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헐~, 거기다 한숨도 함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쉬게 되네요.

ICE-9 2014-06-30 00:43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정말 내뿜는 한숨이 많아서 어디 산소호흡기라도 따로 마련해두고 싶어요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