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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의 중국 문화대혁명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바바 기미히코 지음, 장원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4월
평점 :
오늘 소개할 책은 저자 바바 기미히코 교수와 장월철 교수가 옮긴 <세계사 속의 중국 문화대혁명>이다.
지은이 바바 기미히코는 와세다대학원 아시아태평양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학술박사로서 전문 분야는 동아시아론, 일중 관계론, 미디어론이다.
지금까지 저술한 책들은 <버마의 수금을 둘러싼 전후의 역사>, <전후 일본인의 중국 형상-일본 패전으로부터 문화대혁명, 일중 국교 회복까지>, <현대 일본인의 중국 형상-일중 국교 정상화로부터 톈안먼 사건, 천황 방중까지>등 중국과 동아시아 전문가이다.
이 책은 세계사 속의 중국 문화대혁명 특히 인도네시아 1965년 9.30 사건과 문화대혁명과의 관계를 조명한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의 내용에 빠져들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절친한 친구가 이민을 간 나라이고, 허니문을 그곳으로 다녀온 친구로 인해 늘 내 관심에 있는 나라다.
그러던 중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은 인도네시아 역사에 관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 군은 ‘반공’을 명분으로 10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 지식인, 중국인들을 비밀리에 살해한다. 영웅으로 추앙받는 암살단 주범은 과거 살인을 재연하는 다큐를 만들며 후회하게 된다는 영화이다.
전후 시기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중국에 대해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과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친중국 감정, 그리고 근대 이후에 심해진 멸심감 등이 뒤섞여 남아 있었고,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감과 경계심이 존재하는 등의, 복합적인 대중對中감정을 마음속에 품은 채로 활발한 민간교류를 이어왔던 것이다.
특히 전후 시기 일본인의 이목을 끌었던 동시대 중국의 동향으로는 4가지 사건이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66년 문화대혁명 발발, 1972년 일중 국교 정상화, 그리고 1989년 톈안먼 사건이 그것이다. -4p
중국과 인도네시아의를 나란히 놓고 보아도 언뜻 떠오르는 이미지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에 건국하였고, 인도네시아는 같은 해 12월 27일에 종주국 네덜란드로부터 주권을 이양 받았다. 두 나라 모두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하였고, 국가로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양국의 유대 관계는 의외로 두터운 편이다. -42p
인도네시아에는 인도네시아공산당 PKI이 있었는데, 역사적으로 보자면 1920년대 네덜란드 식민 통치 시대에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창설되었던, 사실상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공산당이었다.
당의 발표에 따르면 350만 명의 당원을 거느린, 인도네시아 최대의 정당이자 비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최대 규모를 과시했던 공산당이었다. -52p
1953년 3월에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 3년이 경과한 56년 2월의 소련공산당 흐루쇼프 서기장이 스탈린의 개인숭배 및 독재 정치와 숙청 등의 사실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그때까지 소련 일변도 입장을 보였던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소련에 대한 불신과 불화가 생겨났고, 점차 양국 간의 대립이 학대,첨예화되었다.
이렇듯 중소 대립이 격화되는 와중에 수카르노는 중국쪽으로 기울어지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54p
상황을 잠시 돌아보면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날로 악화되었고, 나중에는 국격분쟁으로 국지전까지 한다.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은 당시 국내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 보르네오 섬의 말레이시아를 몰아내고 인도네시아가 보르네오 섬을 전부 통치하길 희망한다.
중국과 인도네시아가 화합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AA 아시아 아프리카 반둥회이다.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AA 회의에서 단연 스타는 의장국의 대통령인 수카르노와 회의를 주도하는 중국의 저우언라이이다.
그럼 65년 9.30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당시 인도네시아는 세 세력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싸우던 때이다.
한 세력은 수카르노이다. 두 번째 세력은 군사력을 독점한 군부였고, 세 번째 세력은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 이었다. 공산당은 군사력은 없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잘 조직된 강력한 정당이었다.
수카르노는 군부를 견제하려고 공산당에 동조했다.
중국은 인도네시아와 외교적 관계를 강화하고, 두 나라는 자체 원자폭탄을 개발하겠다고 선언한다.
PKI는 군부의 약점을 보안하기위해 농민과 노동자의 무장을 제안했고, 수카르노의 지지를 받았다.
군부 내에서도 수카르노 지지파, PKI 지지파도 있었지만 PKI 반대세력인 반공세력이 가장 우세했다. 이들은 확대되는 공산주의자들의 무장 조직을 막기 위해 ‘장군 협의회’를 설립한다.
1965년 10월 1일 새벽3시 군부대의 좌익 지휘관들이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들은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핵심적인 장군 일곱 명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그들의 집으로 보낸다.
그리고 7명의 장군들을 죽인다.
쿠데타는 엉망친창이었다. 수카르노를 찾으려 했지만, 그의 행방을 몰랐고 육군전략사령부를 점령했어야 하는데 그들은 점령을 시도하지 않는다.
육군전략사령부의 사령관은 제2의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바로 수하르토이다.
수하르토는 정권을 잡은 후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간다.
이 사건이 바로 1965년 9.30 사건이다.
이제 문화대혁명으로 알아보자.
중국의 마오쩌둥은 건국의 아버지이고, 인민들의 영원한 아버지로서 천안문 광장 앞에 모셔져 있다.
그는 장제스와의 대결에서 국공합작과 대장정을 통해 마침내 중화민국을 건립한다.
이후 농업과 공업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가 부족하여 그는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을 골자로 하는 ’삼명홍기‘ 정책을 편다.
특히 대약진 운동은 속전속결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0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15년 안에 미국을 이기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가치를 ’많이, 빨리, 잘하고, 절약하자‘에 두고 고속발전을 추구한다.
이 때 나오는 그 유명한 사건들이 ‘참새를 소탕하라‘, ’철강 목표량 달성‘을 위해 농민들은 쟁기와 농기구의 쇠붙이를 모두 당에 바치는 일이 벌어진다.
이 두가지 사건의 대약진 운동은 수천 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실패로 끝나게 되고, 마오쩌둥은 권력의 2선으로 물러난다.
이후 2대 주석인 류샤오치와 총리 덩샤오핑이 획기적인 경제 정책과 더불어 전면에 나선다.
소련과의 불화, 식량 위기로 2선에 물러난 마오쩌둥에게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몰락을 그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든다.
마오쩌둥은 부인인 장칭을 포함하는 4인방이 주도하는 혁명을 준비한다.
대상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다.
“중앙 정부가 하는 일이 옳지 않다면 지방이 반란을 일으켜서 중앙을 공격해야 한다!”
모택동은 1966년 여름에 조반유리(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는 뜻)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에 홍위병을 내세워 부르주아와 자본주의를 공격하게 했다.
마오쩌둥이 동원한 홍위병은 중국 전역을 혼란 상태로 몰아넣었다. 홍위병은 청년 노동자와 소학생에서 대학생에 이르는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다.
마오를 따르던 홍위병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10여회의 모임을 갖는데 이 때 모인 사람이 1100만 명이라고 한다.
특히 칭화대와 베이징대의 홍위병들의 투쟁은 내전으로 발전해 마오쩌둥은 군부의 린뱌오을 통해 홍위병들을 해산시킨다.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을 하방시킨 후 권력을 공고히 하던 린뱌오를 없애기로 하자 린뱌오 역시 마오를 암살하려고 하는 사건이 생긴다.
그는 러시아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비행기 추락사를 하고, 그의 딸이 전하는 인터뷰는 마오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환상을 깨버린다.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하자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하고자 기회를 노린다.
그 기회는 1971년 나고야에서 열린 탁구대회에서 열리고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회담을 핑퐁외교라고 한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모드가 조성되자 일본은 중국과 먼저 1972년 국교정상화를 맺는다.
10년 간의 문화대혁명은 전 세계 혁명세력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세계사 속의 중국 문화대혁명은 이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보여준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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