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바이러스 쇼크 - 인류 재앙의 실체, 알아야 살아남는다
최강석 지음 / (주)에듀넷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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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대한민국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가?

 

에듀넷에서 출판한 최강석 교수님의 <NEW 바이러스 쇼크>는 팬데믹 시대를 맞이해서 바이러스에 관한 깊이 있는 교양서이다.

 

저자인 최강석 교수님은 동물전염병 국제전문가이자 수의바이러스 학자이고 현재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연구직 공무원으로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 아프리카돼지열병 등 다양한 동물바이러스 연구를, 프랑스 국제농업개발협력센터 등에서 아프리카 바이러스 감염병 연구를, 한국국제협력단 수의전문가로서 몽골 정부의 구제역 방역 기술지원 활동을 수행하는 등 세계동물보건기구 동물 전염병 전문가로서 아시아 지역에서의 동물 전염병의 국제적 확산과 방지를 위하여 다양한 국제협력지원활동을 해왔다.

 

현재 질병관리청 인수공통감염 전문위원회 위원 및 농림축산검역본부 조류 인플루엔자 백신전문가 위원 등 활동을 하고 있다.

 

[ NEW 바이러스 쇼크 책날재 중 ]

 

 

 

팬데믹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 중 한 분인 저자는 인류와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쟁을 통해 코로나바이러스가 발견된 사례에서 다양한 종류의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해 설명한다. 기존에 보고되었던 메르스, 사스 바이러스 사례를 돌아보고 감염병의 역사를 되집어본다.

 

 

바이러스의 정체,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바이러스는 유전체(게놈)와 단백질 껍질구조를 가진 아주 단순한 나노 물질이다. 이것은 바이러스의 구조에 관한 정의이다. 사실 바이러스는 대중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피터 다스작 박사는 지구에 존재하는 육상 척추동물에서만 약 167만 종의 바이러스가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늘의 별처럼 엄청난 종류를 가진 사실상 지구의 지배자로 불리는 것이 바이러스다.

 

 

그럼 바이러스가 없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이러스가 사라져버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미지의 바이러스 99.9%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위협을 주는 바이러스의 존재가 드러나 바이러스가 인간에 해로운 존재로 여겨지지만,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 동종 바이러스로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하는 백신 바이러스도 존재한다.

 

 

 

인류와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쟁

 

 

과학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원을 찾기 위해 과거에 중동 지역에서 연구를 위해 채혈에서 보관 중이던 낙타 혈청을 꺼내어 조사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사우디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낙타뿐만 아니라 북부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낙타에게서도 메르스 항체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은 2012년에 어떤 환경적 변화로 사람에게 감염이 가능한 바이러스고 갑작스러운 변신을 겪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사람 바이러스로의 변신은 원래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자연 숙주 동물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자연 숙주와 사람 간 바이러스를 연결하는 중간 전파 매개체 동물 몸속에서 일어난다. 배우가 있다는 말이다.

 

저자와 많은 전문가가 예상했듯이 어떤 박쥐 종이 메르스 바이러스 기원 동물일 것으로 추정했다. 박쥐에 대한 의심은 메르스 감염자가 확인된 이후 역학조사 과정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최초로 나타난 것은 2002년 사스 코로나바이러스 때이다. 전문가들은 사스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원 동물이 동굴 박쥐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10년이 걸렸다.

 

 

이후 2012년 중동에서 출현한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도 박쥐가 기원 동물로 알려졌다.

 

 

야생 바이러스가 사람의 신종 바이러스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중간 매개 동물의 역할이 필연적이다. 역대 신종 바이러스의 중간 매개 동물은 2019년 코로나19에서는 천산갑이 유력하게 거론되었고, 2012년 메르스에는 낙타, 2009년 신종플루에는 돼지, 2002년 사스에는 사향고양이, 1998년 니파바이러스에는 돼지, 1994년 호주 핸드라 바이러스에는 경주마였다.

 

이 외에도 중간 매개 동물은 많이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신종 바이러스 출현에 중간 매개 동물이 등장할 확률이 높다.

 

 

이런 감염병의 대유행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발생했고, 앞으로 감염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구 증가와 더불어 세계화가 지속하는 가운데, 우리는 지속해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열대우림과 그 안에 살던 야생동물이 서식지를 잃고 바이러스 역시 생존할 곳을 잃어버리고 있다.

 

바이러스는 새로운 숙주를 찾아 끊임없는 기회를 엿보고, 마침내 자신의 세계로 침범하는 인간에게 적응하기 시작한다. 인류는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그에 대한 백신을 만들지만,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바이러스는 수시로 출몰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출현 과정에 대한 미스터리는 2021년 로버트 베이어 교수팀의 박쥐 서식에 변화에 관한 연구 결과를 통해 드러났다.

 

이 연구팀은 세계 여러 지역의 기온, 강수량, 대기 이산화탄소량 등 과거 기록을 바탕으로 100년 전의 세계 초목 지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지도에 박쥐 종의 독특한 식습관 데이터를 다시 추가하여 분석한 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정 지역에서 서식 박쥐 종의 증가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국 윈난성과 베트남, 라오스 북부 지역이었다. 지난 100년간 다른 지역으로부터 40여 종의 박쥐들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박쥐 40종이 가진 바이러스를 상상하면 이들 박쥐가 가진 바이러스는 수백, 수천 종이 될 수도 있다.

 

 

 

팬데믹의 종말을 위하여

 

 

먼저 우리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다.

감염병이 유행할 때 개인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위생이다.

아울러 일반 대중들도 바이러스에 대한 기초 소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이다.

 

팬데믹을 종말을 위해서는 집단면역을 위한 예방 효과가 좋은 백신을 접종받아 면역 장벽을 만드는 것이다.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세상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이상적인 백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승인되고 있는 백신은 걸린 사람이 아프지 않게, 다른 사람이 그 사람과 접촉하더라도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전염병이 우리의 일상을 바꿔버린 지 1년이 넘었다. 이제는 백신 접종이 원활하게 진행돼 이전 일상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NEW 바이러스 쇼크>는 기존의 <바이러스 쇼크>의 개정판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하여 필요성이 인식되었다.

 

바이러스에 관해 모르고 살아도 될 때가 다가와 현재의 코로나19 시기가 얼른 지나버린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NEW바이러스쇼크 #최강석 #에듀넷 #과학 #바이러스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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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 웅진백제 발굴 이야기 공주가 좋다 1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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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보물창고 웅진 백제 발굴 이야기

 

 

시간의 강은 역상의 나이테를 땅에다 새겨왔다.

동서를 막론하고 세계 역사의 실상을 밝히는 데 발굴이 큰 역할을 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오디세이>의 진실을 밝히겠다던 하인리히 슐리만은 발굴을 통해 트로이 전쟁의 실제 역사로 복원했다. (...)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축소된 우리 역사의 실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발굴이 큰 역할을 했다. 한국 고대사의 사료는 삼국사기삼국유사정도에 불과한데, 너무 간략한 내용이고, 또 지금 눈으로 보기엔 뭔가 황당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몇몇 대목에서는 사료로서의 가치에 의심 어린 시선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발굴을 통해 삼국사기삼국유사, 또 중국 역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었던 모습들이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았다.

[ 백제왕도 공주 서문 중 ]

 

공주에 관한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우리의 수학여행은 공주의 무령왕릉을 견학하는 일정이 있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공주는 이상하게 잘 안가는 지역이었다. 서울, 경기, 강원, 전라지역까지 나는 여행을 좋아해 많은 지역을 가보았지만, 정작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는 제대로 여행하지 못해 늘 마음 속에 가고 싶은 곳으로 자리하고 있다.

 

공주를 마음에 담았던 첫 기억은 성인이 되고, 최인호 님의 <잃어버린 왕국>을 읽고 백제에 관한 관심이 생긴이후였다.

 

 

백제 문주왕의 웅진 천도는 공주를 역사의 전면에 기록하게 한 사건이지만, 공주로 내려오게 된 애초의 사연은 암울하다. 북진 정책을 폈던 호방한 개로왕이 강성한 대국이었던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전사하고 한성마저 함락당한 상태에서 왕외 된 문주왕이 47510월에 어쩔 수 없이 내려온 곳이 바로 공주였기 때문이다. (115)

 

공주가 역사에 전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일종의 백제 임시정부 시절이다. 475년에서 538년까지 64년 동안 웅진 백제 시절 백제의 왕권은 늘 불안한 시절이었다.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이 모두 3년의 재위 기간을 넘기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새롭게 왕권을 다진 무령왕 시절을 지나 성왕 재위 기간동안 웅진 백제는 사비 백제로 천도를 단행한다.

 

 

책에서 주로 다루는 발굴과 관련해 주목할 부분은 무령왕릉 발굴과 관련한다. 고고학 유적을 발굴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예측하기 어려운 확률을 놓고 장기간 경주를 벌이는 것이다. 박찬호 선수가 소개한 무령왕릉을 발굴하는 연구팀을 이끄는 박사님도 오랜 기간 한 작업에 사명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만 해도 고고학계는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식민사관이 영향을 미친 탓이다. (17)

 

일제강점기 시절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역사는 한반도에 구석기 역사 유적이 없고 일본이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문명을 전달받아 한반도에 전해주었다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주장이 퍼져있던 시기였다. 그들의 목적은 한반도의 유적보다 일본의 유적이 앞서야 한다는 믿었기에 유적 발굴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공주 석장리에서 발견된 뗀석기는 그간 한반도에서 지워져 있던 구석기시대 역사를 되찾을 가능성을 그 석기를 보며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진짜 뗀석기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수만 년 전부터 시작됐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겠군.” 1964년 늦은 봄, 손보기 교수는 거칠게 날을 세운 돌조각을 살펴보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인 앨버트 모어와 그의 아내 샘플 부부에게서 건네받은 돌조각이었다. (15)

 

장선리 유적발굴은 청동기 시대 마한 사람의 생활을 추측하게 했다.

 

수촌리 유적발굴은 무령왕릉 발견 이후 최대의 성과라고 고고학계는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덤을 하나하나 열 때마다 이전까지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백제 최고 지배층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화려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41)

 

이런 감동적인 발굴 작업도 소개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역시 송산리 고분군 발굴과 관련한 가루베 지온의 도굴이다.

 

그는 당시 공주고등보통학교에 재직하던 일본어 교사였다. 그는 공주와 그 인근인 대전, 논산 등지에서 19년간 거주하며 개인적으로 백제의 유구와 유물을 다양하게 조사 연구했다. (131)

 

가루베 지온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시행한 송산리 고분군의 정식 조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몰래 배수구를 파내고 6호분에 먼저 들어가 안쪽에 들어가 유물을 전부 챙겨갔을 뿐만 아니라 청소까지 해서 증거 인멸을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본에 돌아간 뒤 출판한 책에 자신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공주는 과거 웅진이라는 이름을 잘 알려져 있다. 아주 먼 옛날, 금강의 물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연미산에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나무를 하러 온 나무꾼을 해치지 않고 암곰은 그를 잡아와 남편으로 삼고 동굴에 가둔 채 함께 살았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면서 둘 사이에 자식이 생겼고, 연달아 둘째까지 태어났다. 어느 날 암곰이 사냥을 나갈 때 입구를 막아두었던 돌을 제대로 닫지 않자 나무꾼은 강을 건너 도망가고 이를 확인한 암곰은 애타게 남편을 불렀지만,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큰 슬픔에 빠진 곰은 두 아이를 안고 무심히 흐르는 금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암곰을 기리기 위해 고마나루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를 유래로 웅진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백제왕도 공주>의 마지막 장면은 백제의 의자왕이 백제멸망 직전, 공산성에 머물렀던 시기이다.

 

660710, 계백이 이끄는 주력 백제군이 황산벌에서 패하면서 수도 사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에 의자왕은 전력을 재정비하고자 웅진 공산성으로 피신했으나 예식진에 의해 묶여 소정방에게 끌려오고, 이에 부소산성에서 항전하던 둘째 왕자도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예식진은 당시 반격을 준비하던 왕이 웅진의 수비 대장으로 임명한 장군이다. 백제멸망 후, 그는 당으로 건너가 입신에 성공한다.

 

공산성은 성 안에 왕궁이 있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포함될 수 있었다.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에도 산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왕궁이 들어섰던 공산성처럼 매력적인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83)

 

웅진 백제 발굴 이야기의 절정은 무령왕릉의 발굴 당시 현장 이야기와 삼국 유사에 등장하는 한 줄에 적힌 대통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극적인 한편의 드라마를 따라가는 현장이다.

 

 

<백제왕도 공주>는 공주시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가 저술하고 메디치에서 출판했다.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은은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수집·조사·발굴하는 연구기관으로 2004년에 만들어졌다. 충남과 옛 호서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연구서 충청남도지25, 백제문화사대계, 내포문화총서등 충남의 정체성을 밝힌 연구서를 비롯해 청소년을 위한 지역문화 소개 책자 등 다양한 종류의 연구 및 출간 사업을 진행했으며, 문화재 발굴과 정비 복원,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의 역사 대중화 작업도 꾸준히 해왔다.

[ 백제왕도 공주 책날개 중 ]

 

공주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역사문화 교양 시리즈, 공주가 좋다는 <백제왕도 공주>를 시작으로 공주에 새겨진 조선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2권으로 20213, 4권이 출간될 예정이다.

 

조선 제 16대 임금 인조는 16242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공산성에 와서 6일 동안을 머물며 여러 자취를 남겼다. 이에 관한 기록과 개화기 우금티(우금치)전투와 관련한 박제순의 일화를 다루는 2권 역시 기대된다.

 

코로나 19 정국이 안정되면, 가족여행으로 공주를 꼭 한번 다녀오고 싶다. 공주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가 쌓이고 쌓인 지역이다. 과거의 유적을 발굴하는 발굴단의 노고와 역사를 전달하려는 역사문화연구원의 노고에 감사를 전한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백제왕도공주 #공주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메디치미디어 #역사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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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 - 공주에 새겨진 조선 역사 이야기 공주가 좋다 2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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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에 새겨진 조선 역사 이야기

 

공주는 유서 깊은 호서의 중심이다. 석장리에 구석기인들이 자리 잡은 이후, 선사시대를 지나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공주는 한층 더 역사의 본류에 다가섰다. 위기에 처한 백제가 수도를 옮겨 갱위강국(다시금 강국이 된다)’의 꿈을 이룬 터전이 이곳 공주이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공주는 한결같은 호서의 중심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충청감영이 들어선 뒤 300여 년 동안 명실상부한 호서의 수부도시이자 유서 깊은 역사도시였다.

[ 청청감영 공주 책표지 중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알려진 조선 정조 때의 문인 유한준의 글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한 도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그 도시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고마나루, 곰나루, 웅진 등으로 불린 공주는 한반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 중 하나다.

[ 청청감영 공주 서문 중 ]

 

 

공주에 관한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우리의 수학여행은 공주의 무령왕릉을 견학하는 일정이 있었다. 여행지에 관한 경험은 도시에 대한 역사와 배경지식, 관련한 경험을 얼마나 가졌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공주는 늘 나에게 아련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도시였다.

 

근래 들어 경부선이 철도가 그려질 당시, 한밭(대전)으로 노선이 정해져 반대로 공주의 위상은 과거보다 떨어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세종특별자치 구가 지정됨으로써 공주는 다시 한번 인구 유출을 우려하고 위성 도시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공주는 과거 웅진이라는 이름을 잘 알려져 있다. 아주 먼 옛날, 금강의 물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연미산에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나무를 하러 온 나무꾼을 해치지 않고 암곰은 그를 잡아 와 남편으로 삼고 동굴에 가둔 채 함께 살았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면서 둘 사이에 자식이 생겼고, 연달아 둘째까지 태어났다. 어느 날 암곰이 사냥을 나갈 때 입구를 막아두었던 돌을 제대로 닫지 않자 나무꾼은 강을 건너 도망가고 이를 확인한 암곰은 애타게 남편을 불렀지만,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큰 슬픔에 빠진 곰은 두 아이를 안고 무심히 흐르는 금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암곰을 기리기 위해 고마나루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를 유래로 웅진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백제 문주왕의 웅진 천도는 공주를 역사의 전면에 기록하게 한 사건이지만, 공주로 내려오게 된 애초의 사연은 암울하다. 북진 정책을 폈던 호방한 개로왕이 강성한 대국이었던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전사하고 한성마저 함락당한 상태에서 왕이 된 문주왕이 47510월에 어쩔 수 없이 내려온 곳이 바로 공주였기 때문이다.

 

삼근왕의 뒤를 이어 문주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자 일본 오사카 지역에서 백제계 사람들을 다스렸던 동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신라 왕족과 혼인하여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했으며, 위나라의 침략을 무찔러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에도 기록을 남겼다. (18)

 

동성왕의 뒤를 이은 이가 갱위강국의 주인공 무령왕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곧장 군사를 이끌고 동성왕을 살해한 백가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어서 고구려를 침공하여 맞서고 말갈의 침략을 막는 등 백제의 국경을 굳건히 지켰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선왕인 무령왕이 이룬 부흥에 힘입어 성왕은 538년에 다시 백제의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남부여로 바꾸었다.

 

그러나 백제의 부흥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라 진흥왕이 배신하며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자 신라와 전쟁을 벌이게 됐다. 이 전쟁에서 성왕은 참패했다. 이런 가운데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백제를 공격했다.

계백 장군의 5,000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군에 패하고, 금강을 통해 밀고 들어오는 당나라 군사도 막지 못했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란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의 기회를 노렸으나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의자왕은 나라를 잃은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전설처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세가 되었다.

 

고려 시대 8대 왕인 현종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했다. 귀주대첩에서 이름을 날린 강감찬의 제안으로 현종은 남쪽의 나주를 향해 피란길에 올랐다.

 

피란길에서 만난 백성들은 왕실의 행렬에 등을 돌렸다. 지나는 고을의 수령이나 아전도 외면할 정도였다.

 

공주는 나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차령산맥을 넘어 공주 입구에 이른 현종은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넜다. 이때 몽진에 지친 현종 일행을 극진한 예우를 갖추며 맞이한 이가 공주 절도사 김은부였다. 그는 옷가지와 토산품을 바치며 왕을 모셨고, 현종은 모처럼 큰 위로와 힘을 얻고 나주로 떠났다.

 

거란이 물러간 후,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공주에 들러 6일간 머물렀다. 김은부는 맏딸을 시켜 의복을 지어 현종에게 바치도록 했다. 현종은 그녀를 왕비로 삼았고, 다른 두 동생 또한 왕비로 맞아들였다.

 

세 자매가 각각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왕후가 되었으며, 원성왕후와 원혜왕후가 낳은 아들들이 현종의 뒤를 이어 차례로 왕위에 올라 덕종, 정종, 문종이 되었다.

 

얼마 전, 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이준기, 이지은 배우님의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는 광종의 왕권강화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고려 왕조의 후대를 이어가는 사람은 드라마에서 태조의 13왕자로 나오는 남주혁 배우가 열연한 안종()의 아들이 현종이다. 안종()의 어머니가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 신성왕후 김씨이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표시하자 왕건을 사신을 보내고, 이에 경순왕은 자신의 사촌누이 김씨를 고려로 시집보낸다.

 

요즘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우는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양위하는 선택이 올바른지에 관한 대화를 놓고 생각하면, 고려왕조에 신라 왕족이 대를 이어가게 하는 것을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조선 시대에도 공주는 호서의 요지로 꼽혔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공주는 호서와 호남을 방어하는 사령부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제일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차지하고 막기위한 요충지가 공주였다. 왜란 당시 항전을 독려했던 광해군이 공주를 근거지 삼아 조정을 나누는 분조를 꾸렸으며,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의 군대도 공주에 머물렀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를 새롭게 정비하는 가운데 각 도의 감영을 재배치했는데, 이때 충청감영을 공주로 옮겼다.

 

감영을 옮기는 일은 오늘날로 말하면 도청소재지를 옮기는 것과 같은데, 경기도청 소재지를 수원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반대 여론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다.

충청감영을 공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지역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필요성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공주는 충청도관찰사가 머물며 충청도 전역의 수령들을 관할하는 중심지로 다시 떠올랐다. 그로부터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갈 때까지 공주는 역사 깊은 중부권의 거점도시였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충남의 중심지가 옮겨간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공주는 지금도 수많은 지자체와 경계를 맞대고 있고, 육로와 수로가 교차한 덕에 18세기 공주에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시만 무려 14개에 달했다.

 

경창이 한강 가에 있어 나라 곳곳에서 걷은 세곡은 세곡선을 통해 신속하고 안전하게 경창으로 운송할 수 있었다. 당시 공주를 지나는 금강 물길은 상상 이상으로 중요할 수 있는 이유이다.

 

국가의 조세 정책은 나라의 국운을 결정하는 중요한 정책이다. 조선 후기 대동법 시행은 충청도관찰사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빛을 발했으며 조세 제도를 개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동법 시행에 앞장서 노력한 주역이 바로 1638(인조16) 6월 충청관찰사로 부임한 김육이다.

 

충청감영에서는 수많은 도서를 편찬했고, 충청감영 아래 있는 사찰은 공주 문화의 또 다른 축이 되었다.

 

그중 백범 김구 선생이 1896년 스치다 조스케라는 자를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라 생각해 살해한 죄로 인천형무소에 갇혔는데 탈옥하여 피신한 곳이 마곡사이다.

 

오늘날 마곡사는 그림을 잘 그리는 화승을 길러 배출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새로운 도읍지로 공주 계룡산 일대를 염두에 두었다. 태조의 의지로 신도 건설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기 좌우도 도관찰사 하륜이 계룡산 일대가 도읍지로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올렸고, 새로운 도읍지로 선정된 곳이 서울이다.

 

당시 하륜의 상소와 태조의 의지가 조금 더 굳었더라면 공주가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공주와 서울의 위상을 비교해보면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지만, 공주도 많은 역량을 가지고 있는 도시라 생각한다.

 

공주는 대구시와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약령시도 운영하고 있으며, 호서의 중심이 되어 조선 말기 동학농민혁명군과 일본이 전쟁을 치르게 된 곳이 공주 우금티이다.

 

공주에는 참으로 훌륭한 관찰사가 많이 배출했는데, 하필 이때 당시 충청도 관찰사가 훗날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박제순이다.

 

그는 척왜의 깃발을 들고 봉기한 동학농민혁명군을 도륙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을사늑약 이후 친일 내각의 주요 요직을 거친 그는 1910년 조선의 경찰권을 일본에 넘기고, 그해 8월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했다. 일본 정부로투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의 고문을 역임했다.

 

을사늑약의 체결 책임자가 박제순이다.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2345087137

 

조선 귀족 일본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유람하고 일왕의 생일연회에 참석하여 그를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집안 내 유지인 자작어른이 박제순의 아들이고, 작가님의 할아버지 집이 광복 후, 동네 사람들에게 풍비박산이 났을 때, 그녀의 오빠는 비로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갚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부끄러워해 독립운동에 전념했다고 한다.

농학동민혁명군을 이끌었던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에서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한 점쟁이가 경천을 조심하라고 들었던 예언에 따라 진군 도중 경천역을 피해 경로를 틀었던 농민군의 지도자는 김경천의 배신으로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공주는 의병 운동의 주요한 지역으로 수많은 의병장과 오강표 열사와 같이 한일늑약 시 자결로 의지를 표명한 분이 있다.

 

 

<충청감영 공주>는 공주시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가 저술하고 메디치에서 출판했다.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은은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수집·조사·발굴하는 연구기관으로 2004년에 만들어졌다. 충남과 옛 호서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연구서 충청남도지25, 백제문화사대계, 내포문화총서등 충남의 정체성을 밝힌 연구서를 비롯해 청소년을 위한 지역문화 소개 책자 등 다양한 종류의 연구 및 출간 사업을 진행했으며, 문화재 발굴과 정비 복원,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의 역사 대중화 작업도 꾸준히 해왔다.

[ 충청감영 공주 책날개 중 ]

 

공주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역사문화 교양 시리즈, 공주가 좋다는 <백제왕도 공주>를 시작으로 공주에 새겨진 조선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2권으로 20213, 4권이 출간될 예정이다.

 

 

코로나 19 정국이 안정되면, 가족여행으로 공주를 꼭 한번 다녀오고 싶다. 공주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가 쌓이고 쌓인 지역이다. 공주 지역의 역사를 전달하려는 역사문화연구원의 노고에 감사를 전한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충청감영공주 #공주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메디치미디어 #역사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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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련 - 선지식과 역사를 만나는 절집 여행
제운 옮김, 양근모 사진 / 청년정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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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련을 통해 선지식과 역사에 관한 지혜와 깨달음을 가져오는 절집 여행

 

어제가 부처님 오신날인데, 평소 이날을 기려 절에 가자고 하시는 어른이 올해는 아무 연락이 없다. 전염병이 가져온 일상의 변화라 생각하고 내년에는 같이 절에 가자고 연락을 하실지 궁금하다.

 

어른과 같이 절에 가게 되면 궁금한 것이 있다면 절을 가는 도중 마주하는 비석, 건물에 붙어 있는 글귀다. 절의 역사를 생각하고 지금 이름을 떨치는 절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절은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증인이기도 하다.

 

수많은 깨달음과 역사에 관한 지식을 글로 새겨둔 것이 주련柱聯인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평소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미에 한자를 찾아 해석해보려고 시도하지만 생각보다 해석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청년정신에서 출판한 주련은 제운 스님의 주련 해석과 양근모 작가님의 글과 사진으로 엮여진 도서이다.

 

사찰에 얽힌 주련에 얽힌 선지식을 알려주는 부분과 사찰에 얽힌 역사적 경험을 전달하는 부분, 마을을 쉬다라는 주제로 하는 마지막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네에 있는 범어사의 불이문에는 다음가 같이 쓰여있다.

 

神光不昧萬古徽猷 신광불매만고휘유

入此門內莫存知解 입차문내막존지해

 

사람의 본성은 만고에 불매하고 아름다운 것

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을 놓아라

[ 범어사 불이문 ]

 

불이문은 우주 만물과 내가 둘이 아님을 일러주는 관문이라는 표시이다. 등산을 가다 자주 마주쳤던 글귀의 뜻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범어사는 한국 현대불교의 초석을 놓은 용성 큰스님의 제자이자, 선의 꽃을 피운 성철스님의 스승인 동산스님의 사리탑과 비석이 있는 절이다.

 

주련을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을 위해 불교 대중화와 생활화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한자 경전의 한글화를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운허스님은 봉선사와 인연이 깊다. 봉선사는 세조의 원찰로 조선시대 교종의 총본산이다.

 

봉선사의 큰법당이라는 대웅전 편액과 한글 주련을 다음과 같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을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로 못하고

[ 봉선사 대웅전 ]

 

세월을 오래 겪어낸 사찰의 주련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 글자씩 떠올려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있는 구절,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생기는 것이다.

 

 

부여 부소산의 고란사는 창건 연대가 백제 말기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백제의 패망과 관련한 일기를 살펴보자.

 

660710, 계백이 이끄는 주력 백제군이 황산벌에서 패하면서 수도 사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에 의자왕은 전력을 재정비하고자 웅진 공산성으로 피신했으나 예식진에 의해 묶여 소정방에게 끌려오고, 이에 부소산성에서 항전하던 둘째 왕자도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전설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의도가 있는 이야기 꾸미기인지 패망한 군주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기 위한 거짓 기록을 위한 것인지 궁금하다.

 

예식진은 당시 반격을 준비하던 왕이 웅진의 수비 대장으로 임명한 장군이다. 백제 멸망 후, 그는 당으로 건너가 입신에 성공한다.

 

사실 백제의 멸망을 의자의 향락이나 폭정에서 찾는 건 설득력이 적다. 실제로는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내부 분열과 그에 따라 김유신의 회유에 넘어간 좌평 임자와 같은 배역자 그리고 당과 고구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당시 신라와 연합하여 군대를 보낼 여유를 갖게 되었던 세력균형의 변화에 찾아야 한다는 게 많은 사학자들의 의견이다. (196)

 

백제에 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차에 주련과 관련한 내용과 사찰에 얽힌 이야기로 살펴보는 백제의 멸망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은 유익했다.

 

 

 

서울 진관사는 고려 현종이 자신을 보호해 준 진관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사라 하였다.

 

근래 지인이 보던 이준기, 이지은 배우님이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를 보고 호족의 도움으로 고려왕조를 개창한 왕건의 후계 구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주인공인 광종의 왕권강화를 이루는 과정을 간략하게 극적인 요소를 추가해서 다루고 있었다. 이전에 채시라 배우님의 <천추태후>를 보지않은 터라 태조부터 후계구도를 유심히 보았다.

 

997, 고려 겨종의 뒤를 이은 6대 임금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종의 황후이자 성종의 누이동생인 헌애황후 낳은 황자 송은 18세였다.

 

송이 제위에 올랐고 이는 목종이다.

아들이 제위에 오르자 천추전에 머무르던 헌애황후는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목종이 후사가 없자 간부 김치양과 밀통하여 낳은 아들을 제위에 앉히기 위해 왕위계승권자인 대량원군을 죽이려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파멸한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없애기 위해 암살자들을 계속 보낸다.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스님들이 적극적으로 보호했기 때문이다. 대량원군이 제위에 오르니 이는 현종이다.

 

현종은 제위에 오르고 난 뒤 진관스님의 은혜를 갚고자 신혈사를 크게 중창하여 진관사를 만든다.

 

 

이 책 <주련>에서 눈에 띄는 점은 양근모 작가님이 촬영한 흑백으로 펼쳐지는 멋진 사찰의 모습이다. 절이 가지는 운치를 여러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뇌리에 자리매김하게 한다.

 

불교의 부침이나 사찰이 가졌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고 주련에 담긴 글귀가 궁금한 사람에게 <주련>을 소개한다.

 

주련에서 소개하는 사찰은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다. 주변에 있는 사찰이나 평소 가보고 싶었던 사찰이 있다면 주련을 미리 학습하고 간다면 절의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고 올 것이다.

 

 

 

선지식을 만나다

 

ㆍ서산 연암산 천장암 경허, 콧구멍 없는 소를 끌다

ㆍ예산 덕숭산 수덕사 만공, 보름달은 떠오르고

ㆍ서울 삼각산 도선사 청담, 이 길의 끝을 잡고

ㆍ의정부 도봉산 망월사 춘성, 도봉산정에 달은 뜨고

ㆍ남양주 운악산 봉선사 운허, 옛사람의 그림자

ㆍ부안 능가산 내소사 해안, 흰 나비가 춤추던 날

ㆍ부산 금정산 범어사 동산, 산중의 법고 소리

ㆍ평창 오대산 월정사 한암 탄허, 사람이 있어 아름다운 길

ㆍ양산 영축산 통도사 경봉, 학은 늙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ㆍ합천 가야산 해인사 성철, 물은 물, 산은 산

ㆍ순천 조계산 송광사 효봉, 바다 밑 제비집에서 사슴이 알을 품네

ㆍ곡성 동리산 태안사 청화, 고개 숙인 부처

ㆍ장성 백암산 백양사 만암 서옹, 어둠 속에 길 찾기

 

역사를 만나다

 

ㆍ부여 만수산 무량사 김시습, 술 권하는 날들

ㆍ안성 서운산 청룡사 남사당 바우덕이, 첫사랑의 떨림으로

ㆍ해남 두륜산 대흥사 추사와 초의, 남도의 길 끝에 서서

ㆍ부여 부소산 고란사 백제 최후의 날, 꽃은 떨어지고

ㆍ공주 태화산 마곡사 김구, 어느 테러리스트의 이야기

ㆍ서울 삼각산 진관사 현종과 천추태후, 생과 사는 다르지 않나니

ㆍ여주 봉미산 신륵사 목은과 나옹을 만나다

ㆍ안성 칠현산 칠장사 칠 형제 그리고 갖바치 스님

ㆍ포천 명성산 자인사 궁예의 눈물

ㆍ화성 화산 용주사 사도, 지극히 귀한 몸으로 태어나

ㆍ구례 지리산 천은사 붓 한 자루로 화마를 제압하다

ㆍ강진 만덕산 백련사 다산 그리고 뿌리의 힘

ㆍ광주 남한산 장경사 병자년, 봄이 왔어도 봄이 아니라네

ㆍ고성 연화산 옥천사 신돈의 꿈, 연꽃 봉우리 가운데 걸터앉아

ㆍ제주 한라산 관음사 바람 타는 섬에서

ㆍ화순 천불산 운주사 장보고, 천불 천탑의 꿈

ㆍ부안 능가산 개암사 소금 꽃

ㆍ구례 지리산 연곡사 녹천 고광순, 죽음이 서 있는 자리

 

마음을 쉬다

 

ㆍ서산 상왕산 개심사 솔 숲에 마음을 씻고

ㆍ남해 금산 보리암 관음의 곁에 서서 바다를 보다

ㆍ봉화 청량산 청량사 사랑이 뭐길래

ㆍ안동 천등산 봉정사 곱게 늙어가기

ㆍ여수 금오산 향일암 파도 위에 피는 꽃 한송이

ㆍ강화 정족산 전등사 처마밑의 벌거벗은 여인

ㆍ순천 조계산 선암사 뒷간에 앉아 매화에 취하다

ㆍ양양 오봉산 낙산사 발 밑을 돌아보라

ㆍ고창 도솔산 선운사 동백이 먼 이유를 알겠네

ㆍ해남 달마산 미황사 삶의 길 죽음의 길

ㆍ예천 소백산 용문사 청룡이 머무는 곳

ㆍ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작은 것이 아름답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주련 #제운스님 #양근모 #청년정신 #사찰기행 #에세이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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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경제와 공짜 점심 - 네트워크 경제 입문자를 위한 가장 친절한 안내서
강성호 지음 / 미디어숲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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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경제 입문자를 위한 가장 친절한 안내서

 

미디어숲에서 출판한 금융위원회 현직 서기관인 강성호 님의 <플랫폼 경제와 공짜 점심>은 현재 급변하고 있는 네트워크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플랫폼 기업의 역할과 금융을 필두로 미래 경제를 조망한다.

 

저자인 강성호 서기관님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정책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듀크대학교에서 국제개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를 합격해 금융위원회 서기관으로 일하고 있다. (책날개 중)

 

<플랫폼 경제와 공짜 점심>1장은 정보혁명이라는 화두로 출발해 카카오와 네이버 같은 플랫폼 기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살핀다.

 

2장은 네트워크 경제의 주인공이자 새로운 경제 권력으로 진화한 플랫폼 기업의 작동원리와 뉴파워의 부상에 대해 다룬다.

 

3장은 플랫폼 기업들이 어떠한 경영전략을 구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4장은 카카오와 네이버가 금융산업에 도전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과, 이들이 미래 금융의 모습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논한다.

 

5장은 미래를 대비해 우리가 고민해 볼만한 새로운 제도를 소개하고, 소유권이라는 개념 위에 서 있는 기존의 자본주의가 존속할 수 있을지 살펴본다.

[플랫폼 경제와 공짜 점심 중]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말은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즐겨 쓰던 격언이다. 이 표현은 서부 개척 시대의 한 술집에서 유래했다. 당시 어느 술집에서는 술을 마시면 점심 식사를 공짜로 제공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집의 술값은 다른 가게보다 비싸다. ,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서는 그마큼 많은 술값을 내야한다는 뜻이다. 즉 어떤 일에는 항상 그만한 대가(기회비용)가 따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어나면 네이버로 날씨를 확인하고 카카오톡을 통해 연락한 지인의 소식이 있는지, 페이스북의 지인이 어떤 소식을 남겼는지 확인한후 하루를 시작한다. 이 모든 행위는 공짜로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사용하는 서비스의 상품은 우리 자신이고 우리가 쏟아붓는 시간이다.

 

일전에 감명 깊게 본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네트워크 시대를 책임지는 플랫폼 기업의 역할을 조망한다. 사용자가 상품으로 여겨지는 산업은 마약산업과 네트워크 산업이다. 우리 자체가 상품이기에 더욱 많은 사람을 모으고 플랫폼 기업에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 시간은 광고로 연결되어 매출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카카오톡을 이용하지만, 이용료를 내는 것은 광고주이고 쿠팡을 통해 편하게 상품을 주문하면 판매자가 비용을 지불한다.

 

상품을 구입하고 서비스를 이용할 때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서비스의 사용료는 신용카드 가맹점이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이다.

 

근래 들어 빅테크 기업으로도 알려진 플랫폼 기업은 자신이 확보한 고객으로 인한 매출과 수익이 증가하며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은 1조 달러를 훨씬 능가하는 회사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네트워크 경제가 문제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핵심 원리인 경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고 고객을 확보한 플랫폼 기업은 독점기업으로 지위를 누린다.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의 원리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카카오를 무료로 이용하는 듯하지만 우리는 카카오에 일종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바로 광고 노출이라는 비금전적 비용이다. 카카오톡의 대화 목록에 나타나는 광고는 항상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이미 카카오가 메신저 시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카카오는 우리가 지불하는 비용(광고 노출의 정도,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독점력을 지닌 셈이다.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사람은 내가 어디선가 검색한 기록을 근거로 끊임없이 광고가 재생되는 것을 목격한다. 나의 관심사와 클릭, 개인 신상과 관련한 광고주를 끊임없이 추천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현재 우리는 경제 권력이 정치 권력을 압도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기업사회라고 하는데 경제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를 말한다.

 

경제 권력은 정치 권력, 언론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법과 제도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치 권력을 설득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법과 제도가 한번 만들어지면, 그 이후에는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원인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의 성과가 부진한 것은 바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상이 더는 통용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은 계속 등장하는데, 자본주의는 과거의 질서에만 머물러 있다. (219)

 

 

저자는 금융전문가로서 금융과 관련한 미래 경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금융의 주도하고 있는 은행은 미래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플랫폼 기업이 등장하고 금융 산업에서 플랫폼 기업과 가장 유사한 것은 카드회사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방대한 소비 데이터를 지닌 집단은 플랫폼 기업이 아니라 카드회사다. 고객의 정보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금융 서비스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카카오와 토스와 같은 플랫폼 기업들이 금융 산업에 뛰어들며 시작된 금융 산업에서의 경쟁은 금융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바젤은행위원에 따르면, 은행의 미래는 5가지로 예측된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진화한 은행이다. 은행은 디지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새로운 은행이다.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토스뱅크와 같이 디지털 환경에 최적화된 은행들이 기존 은행을 대체한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플랫폼 기업관의 역할 분담이다. 은행과 카카오, 네이버가 협업하는 시나리오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뒤로 밀려난 은행이다. 은행과 플랫폼 기업이 제휴하지만, 은행의 브랜드는 소멸되는 시나리오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은행의 소멸이다. 은행과 같은 금융회사가 사라진다.

 

 

구글세가 논란이 되었을 때,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의 데이터 교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플랫폼 기업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우리의 정보와 시간이 상품으로 다루어진다고 언급했을 때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요즘 들어 플랫폼 기업의 폐해에 관한 담론이 이루어지고 플랫폼 기업을 제한하고 과세할 방안을 찾는 모습을 보고 당시 이야기한 내용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플랫폼 경제와 공짜 점심>은 관심을 가진 주제라 그런지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미래의 경제 권력과 우리 생활이 궁금한 독자라면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플랫폼경제와공짜점심 #강성호 #미디어숲 #경제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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