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에티켓 -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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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크나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직접 그 죽음을 마주하지는 못하였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마음의 준비 덕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죽음이 타인이든 내 자신이든.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자체에 깊숙하게 들어가 마주하고, 그토록 외면하고 회피했던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받아 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시작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가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숙제와 같습니다.
요즘은 죽음을 회피하고 부정적으로 보기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더 이상 부정적인 것도, 두려워 할 것도, 피할 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달라진 것이죠.

그동안 그저 죽음과 동떨어져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죽음이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일 바로 나에게 죽음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죽어가고 있음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을 통해 죽음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전과 후의 모습은 어떨까요? 내가 죽은 뒤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보는 죽음이 귀중한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상세한 현실 죽음의 과정에 대한 서사는 차분합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복잡한 과정과 절차가 존재하죠. 죽음에 이른 시신이 한 줌의 재가 되는 순간까지 많은 이들의 결정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신에 나타나는 현상을 과학적 이유와 함께 설명합니다.
남은 이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죽기 전 자신이 어떻게 처리되기 바라는지를 정해 기록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매장 혹은 화장을 선택할 수도 있고 내가 들어갈 관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화장하기로 선택한 시신은 불에 의해 재가 됩니다.  행정학적 처리가 죽은 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죽음의 이후의 일련의 처리과정을 본다는 점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죽음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니 그 사소한 과정까지도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책에서 전문가들은 임종을 앞둔 이에게 죽음이 임박했다고 말해 주는 게 좋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죠. 한 사람의 죽음은 죽음을 직면한 본인과 가족들에게 모두 시간이 필요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자신의 과거가 영화처럼 지나가며 더 일찍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죽음에 대해 제대로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들도 병이나 노환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고 행복한 죽음이 될 수 있게 준비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젠 점점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고 언젠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행복하게 떠날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살아있을 때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음에 대해 한걸음 다가가는 기회를 맞아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내 미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당장의 내 삶이 바뀌지 않지만 마음가짐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조금 바뀐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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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가 말하는 홀가분한 죽음, 그리고 그 이후
정현채 지음 / 비아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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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픔과 슬픔 없이 영원히 이 땅에서 장수하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현실이죠
 '죽음학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죽음에 대한 강의를 한 저자가 10여 년에 걸친 죽음학 강의를 보완하여 풀어쓴 책입니다.
먼저 현대의학의 발달로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음을 언급합니다. 노쇠와 질병을 구분하여 의료 개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의학이 진보하면서 인간의 죽음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적인 색채가 느껴집니다.
윤회, 전생, 환생, 체외이탈, 천국, 저승, 지옥의 세계 등등. 그러면서 죽음 저쪽의 세계에 관한 연구는 엄연히 의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합니다.
심장이 멎은 환자가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나기 전의 근사체험, 임종을 앞둔 환자가 겪는 삶의 종말체험 등의 영적체험은 분명한 실제임을 과학자의 입장에서 확언합니다. 그들은 빛의 세계로 들어가서 먼저 떠난 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아직 때가 안됐으니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어 부패해 가더라도 우리의 의식은 존재합니다.
‘영혼이 불멸한다’고 인지하면 자신에 대해 새로운 이해와 힘이 깃든다고, 죽음은 꽉 막힌 벽이 아니라 열린 문이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사후생에 대한 믿음과 일상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크게 증가합니다. 이처럼 근사체험은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저자 자신도 15년 전만 해도 근사체험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신뢰하지도 않았지만 이후 수많은 객관적인 관찰과 연구 결과를 접하며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고백합니다.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마주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평소에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건강할 때 유언장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라고 조언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문입니다. 죽음에로의 여행을 위한 사전 준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훌륭한 죽음의 주요 요소는 통증 완화와 조절, 명확한 의사 결정, 죽음 준비, 훌륭한 마무리,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여,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등이라고 설명합니다.
 저자는 말기 암 환자 일부는 특별한 안경을 갖고 사물의 참된 모습과 보다 깊은 가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삶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절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즉,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일상을 새롭게 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장기기증서약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유언장 등은 이미 작성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준비했습니다. 아내와 사별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나누고 사전장례의향서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죽으면 끝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의견을 반박하는 사례들을 열거하며, 왜 하루하루 값있게 살아야 하는지,  왜 자살하면 안되는지,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꽤 설득력있게 들려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죽음에 관한 진지한 성찰과 공부가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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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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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가 유명인의 자살을 다룰 때마다, 나라 전체에 자살률이 올라간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흔히 ''베르테르효과'라고 하죠

1774년 이 책이 발간된 직후, 약 40명의 젊은이가 베르테르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이탈리아와 덴마크와 같은 국가에서는 이 책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귀족은 아니나, 지식인으로서 부족함없이 살아옵니다. 그런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진 여인은 안타깝게도 약혼자가 있는 여인이었죠. 더군다나 그 약혼자는 베르테르보다 더 나은, 그 여인에게 있어서도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는 로테를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며 많은 것들을 함께 합니다. 그럴수록 베르테르의 사랑은 깊어가고 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결국 로테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되고, 결국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비관하던 그는 권총으로 자살을 하게 됩니다.  베르테르의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혹자는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선택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안타까움이 남기도 합니다.
 단지 불륜의 상대를 소유하지 못해 죽음을 선택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베르테르의 선명한 자의식은 부조리한 시대와 삶을 노려보고 있었고, 베르테르를 슬프게 한 것은 로테가 아니었죠. 로테가 있는 삶, 로테가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루지 못한 사랑은 실패한 사랑일까요? 젊은 시절을 제법 지나온 지금의 저로서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젊은 베르테르는 자명한 실패가 두려워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아마도 베르테르의 방식으로는 사랑에 성공할 수 없었을테죠 그것이 영원한 청춘을 사는 방법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겠죠.

세밀한 심리묘사가 인상적인 작품. 읽는 내내 베르테르의 감정변화를 눈 앞에서 본 기분이었습니다. 그만큼 슬픈 이야기이고, 두루 읽히는 권장도서로 꼽는 책이기도 한데, 가볍고 술술 읽히지 않았습니다.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처음 접하는 형식의 책이어서 생소하기도 했고, 내용 파악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괴테가 25세 때인 1774년, 불과 14주 만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괴테를 순식간에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 버립니다. 괴테가 유명세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괴테는 작품 속 주인공인 베르테르와 비슷한 경험을 했고 자살하는 친구를 보며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으로 인해 괴테는 14주 만에 엄청난 작품을 써 내려간 것입니다.
 이 작품은 괴테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고전의 반열에 올라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이란 읽는 사람과 읽는시기에 따라 받는 감동이 다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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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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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입에 담아봤을 바로 그 말, '에이, 이놈의 나라에서 더는 못 살아'를 적나라하게 제목에 담아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발간 즉시 화제작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뭉개고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은 대한민국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계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 화자의 입을 통해,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꿈꿨지만, 정말 한국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삶에서의 작은 행복을 찾고 싶어서 한국을 떠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선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하지만 박수를 몇 번 치고 책장을 덮기엔 아쉬움과 의문점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 책을 읽는 내내, 작가는 남자인데, 왜 '한국이 싫어서' 이 나라를 떠나는 1인칭 화자는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굳이 떠나야만 하느냐고 묻는 남자친구에게 계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한국은 한국인들이 사는 나라지만, 그 표준적인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부모 모두 한국인인 남성일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해외 여행을 통해, 한국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낍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남성 대 여성의 평균 임금은 100대 62정도. 여성의 노동은 남자의 그것에 비해 절반을 겨우 넘기는 평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세계 그 어디에도 완벽한 성평등이 구현된 나라는 없지만, 한국은 유독 심하게 여성에게 가혹한 나라인 듯합니다.

여기서 작중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1인칭 서술을 한 장강명의 선택은 양면적 효과를 낳습니다. 일단 그는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냈고,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성형 1인칭 화자의 내면을 서술되어 있는 탓에,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주인공 계나의 판단과 선택은 사회 통념적 비난을 돌파해낼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요즘 젊은이들'을 손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뒤엎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애초부터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죠.
사실 한국의 문제를 아주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민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외국에 가서도 온갖 시련을 다 겪는 계나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것도 어떤 국가도 최선일 수 없을듯합니다. 그러나 계나가 스스로 삶을 계획하고 기획하고 그려나가는 모습에서 스스로 강하게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본다면 아직까지 한국은 그렇게 지옥은 아니며, 아직은 행복, 희망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목만 보았을 때, 골머리 아픈 사회문제가 담겨있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막상 읽다보면 굉장히 솔직담백해서 재밌습니다. 기자출신의 작가라 그런지 글을 맛깔나게 쓰는 듯합니다. 남의 일일 것 같으나 당장 나와 내 주변의 문제이고, 특히 독자가 여자라면 공감할만한 아주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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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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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목포. 입학식이 막 끝난 한 여자고등학교의 풍경은 그 시절 여느 학교의 그것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god나 조성모에 열광하는 소녀들이 있고, god나 조성모처럼 하고 다니는 소녀들도 있지요. 그런 중에 '열광'쪽 아이들이 '하고 다니는'쪽에 호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단발머리 여고생들이 짧은 머리 언니들에게 러브레터를 쓴다는 상황이랄까요.
주인공 준희가 바라보는 인희는, 말하자면 러브레터를 받는 쪽입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 이미 그녀를 알았던 준희의 눈에는 인희가 허세만 가득한 사람으로 변한 것만 같아 영 마뜩치가 않습니다. 게다가 준희에게는 이미 단짝인 규인이 있어 다른 사람들이야 어쨌든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준희와 규인, 둘은 여러가지를 함께할 수 있지만 그 중에 불이 꺼진 음악실 소파에 누워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을 발견한 선생님은 사색이 되었고, 다음 날 교내에는 '누워 있지 말라'는 공고가 붙었지만 말이죠.
행동거지가 세련된 규인은 친구들과 몰려 다니면서 폼을 잡는 인희를 싫어합니다. 규인에 따르면 인희 같은 사람들이 '진짜 동성애자'에게 피해를 준다고 합니다. 인희 같은 애들은 동성애 역시 칼머리에 힙합 바지처럼 관심을 끌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진짜는 아니라면서 말이죠. 규인과 준희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다른 소녀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바로 성에 관한 이야기 말입니다. 아이돌 이야기, 아이돌을 대상으로 팬픽 쓰기, 그 팬픽에 들어갈 동성애 이야기를 쓰기 등을 하느라 소녀들은 바쁩니다.
2학년이 되어 규인과는 다른 반으로 갈라진 준희 앞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연극반 선배 민선입니다. 민선은 준희에게 '토끼 같다'며 설렘을 안기고, 준희는 그런 민선에게 용기를 내 편지를 쓰지요. 며칠 뒤 민선이 답장을 줍니다. 둘이 주고 받은 편지에는 '반했어요'라든가 '여자지만 선배가 좋아요' 라는 말 같은 것은 쓰여 있지 않지만, 오히려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애틋합니다. 이것은 과연 성적 관념을 초월한 사랑일까요, 아니면 일찌기 규인이 지적했듯이 그저 관심을 끌고 싶은 치기어린 욕구일까요? 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소녀들의 일상은 빠르게만 흘러갑니다.
작가의 말에서 이 이야기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적인 부분이 많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서사의 다이나믹도, 만화 같은 캐릭터도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이 이 소설의 약점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쭉쭉 넘어 갑니다.
비단 아이돌을 흉내내고, 저희끼리 제법 심각한 얼굴로 사랑 이야기를 나누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야설을 써보며 킬킬대고, 선생님을 연모하고, 그 사랑에 좌절하는 경험을 해봤던 모든 이에게, 이 이야기는 '나만의 이야기'로 점철됩니다. '항구'가 단지 저자의 고향인 목포를 가리키는데서 그치지 않고 한 때 우리가 정박했던 어느 곳, 갖가지 소동이 일어났던 어떤 곳을 가리키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네요. 어느샌가 우리가 떠나온,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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