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창비시선 369
권혁웅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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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시적 감수성을 가진것도 아니고,

감성적인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만,

함민복 님의 '긍정적인 밥'에 나오는 '시 한편에 삼만원'이라는 소리를 들은 후,

시집을 열심히 사들이고 있다.

 

근데, 권혁웅의 이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를 처음 접했을때,

'권혁웅이 누구지~?@@'하며 한참 말똥을 굴렸었다.

권혁웅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은데,

이상하게 그가 썼다는 시 한편의 제목은 고사하고,

그의 시 한구절도 떠오르지 않는거라~--;

암튼,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독이 아니라,

내 기억력은 원래 소박하고 착했었던 터라...나이듦을 탓할 건덕지는 전혀 없다.

 

한참, 말똥을 굴리다가,

'이영광'의 '홀림, 떨림, 울림'에서 그의 시를 소개했었던 기억이,

그때 그의 시도, 시 해설도 너무 좋았었던 기억이, 났다.

(막막한 세상을 건너는 방법<--링크)

 

호구(糊口)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이 짤막한 시를 통해서, 그를 각인시켜놔서 그런가...

시집 속의 시들을 보니 좀 낯설었다.

그는 이미 '미당 문학상'을 받는 등 시창착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데,

그가 '문학평론가'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런지 참여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완전 참여시라고 하지도 못하겠는 것이,

참여시면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들어야 할텐데,

그렇지는 않은 것이,

우리 주변 사람들의 지난한 일상사를 담고 있는데,

그 고달픈 하루하루를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게 아니고,

시인은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따뜻하고 눈물겨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난, 시이고 수필이고 소설이고를 떠나서 언제부턴가 '화려한 수사'가 싫었다.

화려한 수사는 글을 돋보이게 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반감시킨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취향일뿐,

적재적소에 적절하게 쓰인 수사야말로, 시를 시일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인 것 같다.

그냥 단지 주변 사람들의 지난한 일상사를 곧이곧대로 전달하기만 할거라면,

굳이 '운율이 있는 언어'와 '함축적인 표현'을 취할 필요가 없을테니 말이다.

 

어떤 의미로 봤을때는, '운율이 있는 언어와 함축적인 표현'이야말로 '강한 여운'을 줄 수 있는 임팩트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궁정식 연애에 관하여

 

애인을 애마에 태워 밥 먹으러 갔지

식당을 지키는 풍선인간 하나

호들갑스럽게 우리를 맞네고삐를 맞기고 들어서자

전국에서 모여든 기사들

마상시합 전의 난전처럼 떠들썩하네

애인은 궁정식 연애의 주인공이 된 듯 들떠

우아하게 손을 들어 메뉴를 가리키네

불고기백반, 저건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는 거야

우리는 불의 시련을 통과할 거야

고등어자반, 저건 우리 경쟁자들의 운명이지

토막 난 채 소금에 절여진 패잔병이야

우리는 돌솥밥처럼 끓어올라

기사들 사이에서 사랑을 맹세했네

옆구리를 드러낸 자반 옆에서

달달한 불고기 국물 앞에서

기사들은 이쑤시개를 장창처럼 꼬나들고

혹은 자판기 커피를 성배처럼 받들고

청량리로 군자교로 혹은 장안평으로

너도 나도 흩어졌네

잘 아시겠지만 이 기사담의 결말은 누룽지,

눌어붙은 밥알들이 책임지는

물에 불은 한때의 고소함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이런 걸 중의법이라고 하던가?

이렇게 재미있는 풍자는 오랫만이다, ㅋ~.

돈키호테와 로시난테가 풍차에 맞서 칼을 휘두르는 것만 '궁정식 기사도' 라고 할 수 있나?

때론 애인을 애마에 태운 다소 호들갑스런 그것이어도

기사들 사이에서 사랑을 맹세하면 '궁정식 연애'가 되는 것이다.

잘 아시겠지만...으로 끝나는 결구도 매력적이고 맛깔스럽다.

'궁정식 기사도'와 '궁정식 연애'의 공통점은 그러고 보면 누군가 '책임지는'사람이 있다는 건가 보다.

아, 이런 시도 참 재밌고 좋다~^^

 

'할머니가 익어간다'는 제목의 시도 그렇다.

'ㆍㆍㆍㆍㆍㆍ

아랫목에서 익어가는 청국장 냄새를 할머니 냄새라 말하지 마라

저승, 그 미지의 땅을 정복하러 가는 전사의 비상식량이다'

같은 발상 자체가 기발하기 짝이 없다.

그의 시는 아무래도 콩이 그렇듯,

달리지 않아도 이미 숨이 가쁜,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노랗게 굳은 요구르트가 그렇듯,

발효를 거쳐 장수를 누릴 기미가 보인다.

 

'첫사랑', '짝사랑',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환절기'...다 좋았지만,

무슨 뜻인지 내용은 이해불가여도,

이상하게 분위기가 적당히 애잔한 것이 '서해에서'가 오래 내마음을 잡아 끌었다.

 

서해에서

 

인간이 버린 것들을 천천히 되밀어오는 해안

나의 해안선은 늑막염처럼 쓰리다

모래에 묻어둔 병은 담장에 박아둔 병과 똑같이

경계를 넘는 이들의 발을 베어버린다

나는 오래 일몰에 길들여졌다

필라멘트 끊어지기 전의 한순간

물에 던져 넣은 백열등 하나, 항응고제처럼 잦아든다

그러니, 그런 것이다, 누가 손을 넣어

가슴의 불을 끄는 때가 있는 것이다

상한 우유처럼 철벅이는 파도 앞에

드문드문 귀신들이 서 있다

자꾸 쓸려가는 자신의 그림자가 위태로워 못 떠나는가?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다

파도는 스팸 전화처럼 자꾸 와서는

여보세요, 말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킨다

말도 안돼, 자백을 강요하는 장사꾼이라니

하지만 가당치 찮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얼토와 당토야말로 귀신의 영토다

지워질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강역이다

상한 우유처럼 나는 누설해야 한다

이곳은 너무 눅눅하다고

내일이 되어도 일출은 볼 수 없을 거라고

서성이던 귀신 하나가 다가와

아저씨, 불 좀 빌립시다, 말을 건다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란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추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가 귀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일 수 있겠다.

모래 위에 그린 그림처럼 파도가 한번 휩쓸고가면 지워질 수 있는,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흔적이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ㆍㆍㆍㆍㆍㆍ자신의 그림자가 위태로워 못떠나는가?'는 자기애라기보다는 미련쯤 되겠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가슴의 유리병 속의 불빛은,

누군가 와서,

안되면 세찬 바닷바람이라도 불어와서,

또는 누군가가 가슴속에 손을 넣어 전원을 차단시키듯,

불을 끌 수 있도록 가슴을 내어놓는게 오히려 현명할 수도 있겠다.

 

'불 좀 빌립시다'가 결코 자신의 가슴 속 유리병 속 타오르는 그 불은 아닐것이므로,

아니, 아니어야 하므로...

 

무릇 서정시의 탈을 쓰고 말만 앞세우는 시들이 남발하는 시대에,

권혁웅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몸소 경험한 체험의 산물인듯 하여,

애착이 가고 미련이 남든다.

하지만,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란다.

귀신 잡는 해병대가 될 것도 아닌 다음에야,

과거에, 흔적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현재를 가열차게 사는게 우선일 게다.

 

사는 건 현재를 가열차게 살아야겠지만,

난 그래도 이 시인의 앞날이, 장래가 참 궁금하다, ㅋ~.

 

언제던가, 누가 써는걸 사주겠다고 하고는...날 어디 유명한 순대골목으로 데려갔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순대를 써는 아주머니를 향하여,

"순대 썰지 말고 그냥 길게 통째로 주시구요. 포크랑 나이프 하나만 주시겠어요?"

라고 했었다.

그래서인가?

난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라는 제목을 자꾸 내맘대로 '애인은 순대를 토막내고 운다'로 바꾸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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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0-29 16:08   좋아요 1 | URL
언제나 시와 노래 즐겁게 누리시면서
하루하루 아름답게 일구셔요~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
류근 지음 / 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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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난 소싯적에 고 김광성의 마직막 공연이었을지도 모를 뉴욕공연을 보았었다.

그게 아마 낯선 곳에서 한참 외롭고 고독해서 힘들었던 내 자신에게 주는 연말연시 선물 같은것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땐 공부에 치일 때여서 막상 외롭고 고독함 따위에 제대로 침잠하지도 못하고 시늉만 했을 때였었다. 

그는 공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를 부르며, 아니 노래를 채 부르지도 못할 정도로 울었었는데,

그의 노래를 통해서 외롭고 고독한 감정의 위로를 받고자 했었던 나었었지만,

그의 진한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혼자서(같이 할래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 같이 얘기할 수도 없었다~--;)

그를 그토록 아프게 만든 노래에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거라는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그리고 김광석의 죽음 소식을 아주 나중에 접했고,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가 김광석의 자작곡이 아닌 '류근'이란 시인의 작품이란건 더 나중에 김도언의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를 읽다가 류근이란 시인의 존재감을 발견하고 난 뒤였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붙들고는,

책 뒷표지에 아무리 그럴듯한 이들('이어령'과 '이외수')의 추천사가 폼나게 들어있었다고 해도,

책을 읽으면서 좀 실망스러웠던게 사실이다.

책의 부제는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인데,

책 속의 내용들은 시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걸러지지 않았고,

('조낸'과 '시바' 어느게 더 많이 쓰였는지 비교해 보는게 무의미 할 정도다~--;)

술과 애인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으며,

'백수래 백수거'라고 공공연하게 외쳐댈 정도로,

젊고 건장한 남자가 백수로 지낸다.

 

시인들은 죄다 허여멀건하고,

그리하여 시래깃국만 먹고 사는지라...

아무리 젊고 건장해보여도 육체노동 따위는 할 수 없는,

실연의 아픔만을 '상처적 체질'로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일요일이면 방바닥에 궁둥이 딱 붙이고 누워 입만 동동 거리며 사는 나처럼, 거의 대부분의 날들을 그렇게 탕진해버리는 그런 존재들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허구헌날,

'결론적으로 나는 내일 오전중으로 방을 빼야 한다', '일주일 안에 독립하시오', '유씨 나이가 몇이유?' 따위의 소리나 듣는단 말인가?

 

내가,

우리나라 시인들의 삶이 열악하고,

그들은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발휘하는 특별한 감수성을 우리가 한번씩 감상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도록 시집도 열심히 사주어야 한다...

는 생각을 평소에 하는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렇게 자칭 '무한 백수'가 이렇게 시시껄렁한 글이나 쓰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멋지게 봤던 '김도언'도 '이, 뭥미?'하고 다시 보게 됐으며,

책 뒷표지의 '이어령'과 '이외수'의 추천사를 두고도 '뻥이 대단히 심하다, 이 정도 되면 대국민 사기극 수준이다.'라고 생각할 즈음,

 

사실, 이때까지는 시인들의 일상이 꾸밈없이 '레알'로 찬조출연한 덕에 집어던지지 않고 읽어온 것이었다.

예를 들면 안동의 안상학 시인께서 천기를 누설하시는 바람에...라든지,

익히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이정록 시인의 단독 리사이틀...이라든지, 따위 말이다.

 

주인집 아저씨가 등장해 주신다, 짜자~ㄴ♬.

주인집 아저씨가 등장하면서부터,

(산문은 시와는 또 다른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글들은 탄력이 붙고 쫄깃해진다.

그러니 이 책의 일등 공신은 '주인집 아저씨'이다.

이 책의 앞부분 만을 읽고 괜찮다 싶은 사람들은 이 시인과 코드가 잘 맞는것이니 상관할 필요가 없고,

나처럼, 애먼 '김도언'이나 '이어령'또는 '이외수'에게까지 화살을 날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여기까지만 참고 견디면 된다는 팁을 친절하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ㅋ~.

 

ㆍㆍㆍㆍㆍㆍ이봐유, 유 씨! 유 씨 시방 나이를 얼마나 잡쉈수?

 

나        그건 왜요?

아저씨  보아하니 국민핵교 다닐 나이는 한참 지난 거 같은데 허구한 날 헛구역질이나 하고 앉았으니 한심해서 그러지유.
           유 씨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세계를 알어유?

나        내. 면. 의. 아. 름. 다. 움ㆍㆍㆍㆍㆍㆍ이요?

아저씨  그 나이쯤 잡쉈으면 인제 내면의 아름다움 정도는 저절로 알고 가꿔야 하지 않겠슈?

나        (조낸 어이없다)

아저씨  뭐 원래 유 씨는 몰르는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없는 양반이란 거 내가 애저녁에 다 알아봤지만서두

           인제는 내면의 아름다움 정도는 알아야지유.

나        (시바, 가뜩이나 속도 아픈데)

아저씨  내면의 아름다움을 몰르느까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도 몰르지유?

나        그게 어디서 오는 건데요?

아저씨  강. 인. 한. 체. 력!

나        강인한 체력ㆍㆍㆍㆍㆍㆍ이요?

아저씨  물론이쥬. 강인한 체력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이 싹트는 거유. 유 씨는 강인한 체력이 준비 안 돼 있으니까

           내면의 아름다움도 몰르고 그러는 거잖유. 택도 없는 술 작작 마시고 인제부터 우유나 들어유.

           그러다 뼈 삭겠슈.

 

정말 재밌어진다, 장난이 아니다.

방심하다간 빠진 배꼽을 찾으러 다녀야 할 정도이다, ㅋ~.

 

하긴, 시인에겐...

산문집 중후반 뿐만 아니라,

전반 1/3의 정조가 또한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암튼 건투를 빈다.

 

그리고 주인집 아자씨에 이 말 한마디 전해주기 바란다.

우유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많은 성분의 칼슘이 함유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사람에 따라서는 우유의 칼슘을 제대로 흡수해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지 않나?

같은 술을 먹어도 헛구역질이나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사람들에겐 모두다 잊어버리는 좋은 처방약이기도 하다.


사람이 외롭고 슬프고 고단하더라도 내내 외롭고 슬프고 고단하게만 살 수는 없다.

상처적 체질이라도 상처를 끌어안고만 살아갈 수는 없다.

상처는 언젠가 아물고 옹이가 생길것이고, 상처가 났던 기억조차 잊혀질 거이다.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온다면,

모든 삶이 그렇듯이,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어제까지의 상처와 상처가 있던 자리쯤은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잊어버리고,

훌훌 떨고 그렇게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너무 아팠던 사랑의 상처 따위,

삶의 질곡 따위, 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연연해 할것이 아니라,

미래를 꿈꿀 희망이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오늘 현재를 치열하게 살면 된다.

그걸로 충분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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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0-28 05:34   좋아요 0 | URL
헌책방 사장님이
가끔 이런 말을 하지요.
책방 일을 하려면
첫째로 책을 좋아해야 하고
둘째로 힘이 좋아야 한다고.

예부터 아침에 일하고 저녁에 책 읽는다 했듯이
몸으로 일하고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빛이 이야기로 태어나리라 느껴요.
 
그리운 나무 창비시선 368
정희성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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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내년이면 나이 70이다.

예전에는 '고래로 드물다'고 해서 고희(古稀)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요즘은 인생은 60부터다, 아니다 70부터다, 설왕설래할 정도로 흔하
다.

그런 의미에서, '논어'에 나온다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從心所慾不踰矩)'를 줄인 종심(從心)이 내겐 조금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암튼, 내년에 나이 70인, 종심(從心)인 시인은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에서 '시가 어지간히 짧아졌다.ㆍㆍㆍㆍㆍㆍ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겠는가. 그저 손을 들어 소리의 높이를 가늠할 따름이다.'라며, 사람은 나이가 들면 단출해져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듯 하다.

몇년전 불혹을 지난 난, 아직도 세상에 미혹하기만 할뿐이고...

그동안 없었던 말들이, 참았던 하고 싶은 말들을...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다 하고 살자는 주의로 바뀌었다.

한의학적 진단명 중에, 매실의 씨가 목에 걸려 있는것처럼 목에 걸려 뱉어지지도 삼켜지지도 않아 가슴이 답답한 '매핵기'라는 게 있는데, 그것만은 막아보자는 심사에서이다.

 

며칠전 먼곳에 있어 자주 못보는 친구가 술마신 얘기를 했다.

내가 물어보지도 않은 누구 누구 따위의 같이 마신 사람들을 열거하는데,

난 제대로 열받고 빈정이 상해버렸다.

우리 나이가 되면 친구 사이에 성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 모두를 '우리', '내가 이뻐하는', '내가 좋아하는' 따위의 수식어로 꾸며주는 패밀리 의식은 과한 오지랖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난 친구가, 나의 질투심을 부추기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수식어들을 구사하는 줄 알았다.

난 나이가 들면서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욕심을 내려놓겠다고 했었고,

주류가 아니어도 괜찮다, 배경으로 주인공을 빛내줘도 좋겠다...라고 말은 했었지만,

마음을 다 비워내지는 못했었기에...한번씩 나를 시험하는건 줄 알았다.

 

친구는 술을 마신 기분에...호기롭게,

그 친구의 우리 OO와 친구가 이뻐하는 OO를 연결시켜 줬다는 걸 자랑하고 칭찬도 받고 싶었다고 하는데,

나는 '우리'가 준'울'이나  '내가 이뻐하는', '내가 좋아하는' 따위의 수식어로 꾸밀 수 있는 패밀리 의식은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만 사용해주길 원했었다.

그 친구는 내가 그리운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비껴간 것이다.

그러고보니, 내내 나도 그친구에게, 그 친구도 내게 '그리운 나무'같은 사람일 수밖에 없을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었다.

 

그리운 나무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그렇다면, 난 '그리움'이 되어야 겠다.

아니, 시인이 되어야 하려나?

더는 말고 한평생 그리움에게나 가 살라니...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있단 말인가, ㅋ~.

 

시인

 

그대에게 가닿고 싶네

그리움 없이는 시도 없으니

시인아, 더는 말고 한평생

그리움에게나 가 살아라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이상국의 시 「그늘」의 첫행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같은 경우는 내겐 서러워서 황홀한 시다.

어쩜 좋아?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한 시인의 마음을,

이 가을 나뭇잎이 마구 땅으로 떨어지고 쓸쓸히 빈 가지만 허공으로 매단 나무들을 보면서,

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겠다.

 

친구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얘기하며 그래도 바꾸고 고쳐서 '나아지게 해서 써야한다'는 건설적인 얘기를 들려줬었는데,

시인은 '묵침의 님'을 읊는다.

서로 다른 곳에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그리하여 다른 삶을 산다고 하여...

그리워조차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 편에 향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 있어 바람 에 실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아코디언

 

이것은 가슴을 여는 소리

설레는 내 마음 들었느냐

오직 너만을 그리워하는

골 깊은 이 가슴 보았느냐

 

 

  어떤 이는 세상에 시인이 나무보담도 흔하다며 너도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시인이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전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중 '일부')

 

교감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 있다
어린아이가 그걸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만
"내려와아, 위험해애"

교감은 나와 새가 다른 종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우선이지만,

그보다는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먼저다.

전짓줄을 올려다 봤으니,

내려와...라고 했겠지?

새들은 거기가 자기 집일 수도 있는데...ㅋ~.

아마, 새들의 입장에서 였다면,

"니가 더 위험하다, 얘~.

 어서 올라와, 폴짝~!"

이랬을지도 모르는 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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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0-27 07:05   좋아요 0 | URL
사람들은 모두 나무와 같은 숨결이요,
나무와 함께 숲에서 태어난 목숨이기에,
나무가 그립고, 나무를 그리며, 나무를 곁에 두고 살아가고픈 마음이 되며
이러한 시들이 태어날 수 있으리라 느껴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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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이었다.

그전에 고된 육체노동을 해주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긴 한 상태였다.

아들이 침대에 누워 컴 모니터로 뭔가를 보고 있길래 잼나보여 꼽사리를 꼈다.

"뭔데~?"
"응당하라일구구칠"

"그게 뭔데?"
"장년에 인기짱였던 드라마 있어."

아들이 하는 말이 유음화되고 연음화 되어 들릴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어야 하는데,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너무 방심했다.

"근데 아들아, 쟤네들 분명 은지원이랑 서인국이랑 신봉선 같은데...

 저 사람들 왜 외국말 하고 있냐? 외국말은 언제 배워 저렇게 잘한대냐?"

울아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엄마, 고마워.

 엄마 칠순때는 해외 여행 멀리 갈거 없이, 부산으로 가면 되겠네.

 어차피 엄마한테는 외국이나 부산이나 꼭 같이 외국말로 들릴텐데,

 뭐 힘들여 돈들여 외국 갈거 있어?"

이러는 것이다.

 

헐~--;

같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사는데,

어쩜 사투리가 그렇게 진하냐?

근데 실은 사투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게 1997년의 상황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말 그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츄에이션 되시겠다.

 

울아들은 드라마를 보는 내내,

자기의 지금 현실을 비관하며...

1997년의 고딩 현실을 엄청 부러워 했는데,

 

아들아, 미안하다.

198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닌 엄마로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란다.

그러니 그 사이에 시대가 살짝 진보와 퇴화와 진보를 거듭했거나,

아니면 부산과 서울의 현실이 달랐다고 밖에 할 수 없겠다.

암튼, 불행이고도 다행인것은...지금 현재는 대한민국을 통틀어 어느곳에서도 그같은 고딩들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겠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 책은 고딩시절 똘똘 뭉쳐 5총사로 지내던 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무리에서 한명이 절교를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제외한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남, 여 쪽수도 맞고 각기 색채도 가지고 있으나 자신만 색채가 없어서 절교를 당한게 아닐까 하고 추측만 한다.

 

항상 사람은 저마다 다른 존재이고, 나의 가치관이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또 등장한다.

내가 이유도 모르고 절교를 당했더라면,

적어도 그 이유는 파헤쳐 보려고 할텐데,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고향 마을을 서둘러 떠나온다.

 

그리고 설정이겠지만, 친구가 이 넷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불가이다.

적어도 나고야 시골마을에서 도시의 대학을 갈 정도라면,

'~카더라'는 식의 풍문이라도 전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말이다.

 

암튼, 자신만 색채가 없다고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는 그 절교사건을 떨고 일어나지 못하고,

극단적인 자살까지도 생각하며 자꾸 안으로 움추러 든다.

건강이 악화되자, 회복할 방법으로 택한 운동인 수영 또한 내가 보기엔 침잠하려 드는 그것의 다름 아니다.

나고야 시절의 네 명만이 쓰쿠루에게 진정한 친구라 할만한 존재였다. 그다음으로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하이다가 거기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고 하는걸 보면 말이다.

 

암튼 고등학교까지의 시기가 지식과 이론을 축적하는 시기라면,

그 이후는 이론과 지식을 토대로 경험과 견문을 넓히고 확장해 가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암튼 대학에서 수영을 하면서 잠깐 만났던 하이다는 그의 아버지가 겪었다는 이상한 피아니스트 얘길 들려주는데,

여기서 '회색'과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綠)가 등장한다.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는 하이다의 아버지에게 '악마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는데,

여기서'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던 '모든 진리는 회색이지만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 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이 문장이 그냥 떠올라주신것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난 그토록 기억력이 좋거나 연상작용이 뛰어나진 못해주시고,

이 책 바로 다음 읽은 '이권우'의 '여행자의 서재' 초입에 이런 문장이 나와 주신다.

무릇 지식인에게 여행이란 추상에서 구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왜 안그렇겠는가. 지식이란 어차피 회색을 띤 이론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푸른 생명의 나무는 없다. 그러니, 박차고 나가 생명의 나무를 찾으려 할 수밖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회색을 흰색과 검정의 조합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어서,

회색의 대치선 상에 녹색을 놓을 생각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책 제목의 '순례'는 '여행'쯤으로 대치될 수 있겠다.

이론과 지식을 토대로 경험과 견문을 확장시켜 나가는 그것을 누구는 '영원한 것'으로, 누구는 '생명의 나무'로 보았다.

 

회색의 대치선 상에 녹색을 놓고나니, 어려웠던 이 책이 조금 이해가 되었는데...

세상은 어쩜 선과 악, 증오, 밝음과 어두움 따위의 흑백논리로만 설명될 수 있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백을 예로 들어보면,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좀더 흰색, 또는 좀더 어두운 색 따위의 희고 검은 정도가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 '색채가 없는'은 '투명한'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어 좀 모호하다.

차라리 '색채가 희미한'이라든지 '색채가 희박한'정도가 되어야 의미의 전달이 좀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투명한'이라는 말은 자기자신을 여과없이 걸러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중앙색을 두드러지게 해주는 배경색이라는 느낌으로 보아야 뜻이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이건 바꾸어 말하면 '주인공'과 '지나가는 사람1,2'의 관계 같은건데...

하루키가 좀더 젊어서 썼더라면,

내가 좀 더 젊어서 읽었더라면,

이 의미가 명확하게 와닿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의 나이를 지나,

그가 지났을 삶을 다 지나봤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들이 지금 5총사로 지내던 다자키 쓰쿠르의 그 나이여서 느낄 수 있는 느낌일 것이다.

 

이젠 주인공이 되는 삶도 멋지지만,
주인공이 돋보이기 위해선,두리뭉실하고 모호하고 희미한 배경들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윤곽을 잡아주는 '경계선'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아무리 지식이나 이론으로 중무장해서는 소용이 없다.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다.

"ㆍㆍㆍㆍㆍㆍ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어. 다만 한 가지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일단 그런 진실의 정경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무서우리만치 밋밋해 보인다는 거야. 그 정경에는 논리도 비논리도 없어. 선도 악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돼. 자네 자신도 융합의 일부가 되지. 자네는 육체라는 틀에서 벗어나 이른바 형이상학적 존재가 돼.ㆍㆍㆍㆍㆍㆍ"(111쪽)

 

쓰쿠루가 친구라 할 만한 상대는 없었다고 담담하게 얘기하자,

사라는 친구가 없어서 외롭지 않냐고 묻는다.

"어떨까? 모르겠어. 만일 있다해도 이런 거 저런 거 숨김없이 다 털어놓지 않을 것 같지만."

 사라는 웃었다. "여자한테는 그런 게 얼마쯤 필요한 거야. 물론 이런 거 저런 거 다 털어놓는 건 친구의 기능 중 일부일 뿐이어도."(265쪽)

나도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거 저런 거 숨김없이 다 털어놓지 못하고...

외롭다, 외롭다...노래를 부르고 살았었다.

하지만 이런 거 저런 거 다 털어놓는 친구를 갖게 된 지금 '외롭다'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털어놓는 것이 친구의 기능 중 일부여도 좋고, 전부여도 상관 없다.

그리고 그게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리워도 좋고, 다른 호칭으로 불리워도 좋고, 호칭이 없어도 상관없다.

암튼 사사롭고 소소한 것이라도 다 털어놓을 수 있고,

그게 꼭 즐거운 표정이 아니어도 진솔하고 풍부한  감정표현-다시말해 '활짝 열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한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인생이 있다. 쓰쿠루에게는 쓰쿠루의 인생이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좋아하는 상대와 좋아하는 곳으로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할 권리가 있다.

  사라가 그때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녀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얼굴 전체로 크게 웃었다. 그녀는 쓰쿠루와 같이 있을 때, 그렇게 활짝 열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단 한번도 그녀가 쓰쿠루에게 보여 준 표정은 어떤 경우에도 늘 냉정하게 컨트롤되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쓰쿠루의 가슴을 아프고도 애절하게 찢어 놓았다.((288쪽)

 

난 어렵게 얘기했지만, 하루키는 쓰쿠루를 빌려 이렇게 얘기한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엇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지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363쪽)

 

암튼 그동안의 나는 하루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중ㆍ고딩시절 그의 소설 책 몇권을 읽고 난해하다고 생각했다.

나이들어서 읽는 하루키의 소설은 또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약간 미스테리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해석 불가, 이해 불가한 부분이 아직도 있지만...

온 세계 사람들이 왜 하루키에 열광하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대하는지는 알것 같다.

아무런 내공이 없는데 그냥 얻게된 명성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눈높이를 좀 낮추었으면 좋겠다.

이 알듯말듯하고 그래서 쿨해보이는 것이 하루키의 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문학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쓰여져야 하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뭐,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했는데...나만 이해불가...미스테리 운운, 눈높이를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암튼 이 책은 내게 하루키와 화해, 다시 그의 소설들 속으로 초대해준 계기가 된 작품이어서 오래 남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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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0-23 21:15   좋아요 0 | URL
'삐삐' 이야기를 쓴 린드그렌 님이 노벨문학상 받았는지 알 노릇이 없는데,
문학상을 받거나 말거나
즐겁게 읽으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을 수 있으면
사랑스러우리라 느껴요.

세실 2013-10-24 10:10   좋아요 0 | URL
그나마 이 책은 하루키의 소설중 가장 읽기 쉬웠던 책이었어요.
에세이는 쉬운데 소설은 좀 난해하네요^^ 아직도 1Q84를 읽지 못하고 있다는.....
 
나였던 그 발랄한 아가씨는 어디 갔을까
류민해 지음, 임익종 그림 / 한권의책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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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같은 숨은 '즐찾'이 여럿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이이의 글의 숨은 즐찾이었으니 말이다.

굳이 댓글을 달거나 즐찾을 공개로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부터 이곳의 지명도, 호감도라는게...

글이나 책이랑 관련된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발품이랑 관련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댓글을 달거나 덧글을 달거나 공개로 즐찾을 설정하는 등,

열심히 발품을 팔고다니면서 블로그 활동을 하게 되면,

내 서재의 지명도, 호감도, 다시 말해 '인기도'가 올라가게 되고...

그리하여 거품이 형성된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였다.

다시말해, 이곳에서 상위에 링크된 서재나 책의 경우,

정말로 그럴만한 경우도 있지만,

그냥 본인이 발품을 많이 팔고 열심히 활동을 한 경우는 제외하고,

대형 서점이나 마케팅 전략이 개입하여 상위에 링크된 경우,

재수없으면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작전세력에 말려드는 것이 된다.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그저 소소한 삶의 기록이고,

깜박깜박하는 기억을 잡아두고 싶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네크워크를 형성하고 싶은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알라딘이라는 업체의 입장에선,

이곳에 올라오는 리뷰와 페이퍼는 책이라는 상품의 상품평의 다름아니다.

이 개개인들의 소소한 삶의 기록의 장에,

대형서점이나 마케팅 전략, 그밖의 영업을 부추기는 행위들이 거품으로 작용하는걸 깨닫게된 그 즈음부터,

알라딘서재에서의 공개 마실 놀이를 자제하게 되었다.

 

'나였던 그 발랄한 아가씨는 어디갔을까'라는 책 제목은 우려이고 오버였다.
발랄한 아가씨는 책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었는데,

경쾌 발랄하면 웅숭깊지를 말아야 하는데, 웅숭깊기까지 하다.

내가 병들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마저 병든 눈으로바라보지 말자. 남편의 의견을 지지하지는 못해도 무시하진 말자. 그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남편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을까? (58쪽)

다시말해, 이땅의 전업주부-그들이 겪는 삶을 삶의 굴곡을, 경쾌 발랄한 문체로 풀어내고 있다.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해서 퍼질러 앉아있지 않고,

그 돌뿌리를 파내고 패인자리를 매운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서인지, 책은 많이 겹쳤다.

눈에 띄는 책은 '고등어를 금하노라'와 '루쉰의 편지' 두권이었다.

'고등어를 금하노라'의 경우 원 책의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이이의 깨달음이 내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면 이런 깊이와 넓이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교육도 있고 이런 가족도 있는데, 친구의 전화 한 통화에 눈이 빨개져서 가나다라를 가르치던 내가 어라나 한심하던지.(119쪽)

'루쉰의 편지'도 너무 멋지다.

갖고 싶어 찾아보니 절판이다.

중고로 한두권 나와있는것 같은데 원 가격보다 더 비싸다.

친구한테 얘기했더니, 자기는 봤다고 입을 '싸악~' 닦는다, 내 원~--;

 

세상 사람들의 질타와 조롱 속에서도 루쉰과 쉬광핑은 생에 단 하나뿐인 사랑을 얻었다. 그들의 사랑이 멋지고 아름답게 마무리되려면 차가운 세상사람들의 비난과 장애물에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외치며 현해탄 푸른 물에라도 풍덩 뛰어들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순간적인 충동에 휩쓸린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라, 목숨을 건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살았다. 자살하지도 죽을병에 걸리지도 않고, 주변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묵묵히 감수하며 구질구질하게 살아남았다. 살면서 함께 삶을 만들었다.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는데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상대를 배려한 충고와 조국에 대한 걱정과 혁명에 대한 신념, 자신의 내밀한 고민이 쓰여 있다. 서로 공감하고 격려하며 나란히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극적인 사랑일수록 장애물이 많아야 하고 그것들을 넘으면서 받는 고통이 클수록 진실한 사랑이 증명된다는 믿음은 얼마나 아침드라마식 사고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나눌 것은, 밀고 당기면서 얻는 감정적 승리나 서프라이즈 이벤트 따위가 아니라 공감하고 격려하고 함께하는 인생 그 자체에 있다. (280~281쪽)

내가 감동을 하게 된것은 루쉰과 쉬광핑의 엄청난 나이차이도, 주변에 이슈가 될만한 사랑 얘기도 아니었다.

이둘은 적어도 사랑을 애들 장난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른들의 사랑을 했다는 것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지지고 볶고 산다는 것이랑 이음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느라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주변의 비난과 손가락질, 그밖의 고난들과 맞서 싸우는데,

서로 공감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그 소통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는 편지'라는 것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난 이런 것이 좋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어렵지 않고 경쾌발랄하되,

상대방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것.

나도 안다. 당장 책 몇 권 읽고 글 몇 줄 끄적인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꺠를 으쓱해 본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 타인의 개입에 연연하거나 내가 만든 상자에 스스로 갇혀 무기력하게 한숨 쉬는 건 이제 그만 . 좋아하는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육아와 글쓰기를 같이 할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어제와 다른 내가 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얘기하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꿈을, 육아와 글쓰기를 같이 할 수 있는 삶을 응원한다.

LET'S CHEER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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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