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보는 눈 - 손철주의 그림 자랑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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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의 그림 자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사람 보는 눈'은 대단한 책이다.

기자 출신의 미술평론가답게 '그의 그림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번엔 '사람 보는 눈'이란다.

'관상'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형상의학'차원에서의 '망진'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이쯤되면,

'청맹과니가 아닌 다음에야, 겸양이라고는 모르는 자화자찬으로 무장한 생색내기의 달인이라고 퉁쳐버릴텐데,

그를 통하면 독특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것이 간과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으니 말이다.

그는 앞서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누가 묻는다. "그림에 좋고 나쁜 것이 있습니까?"

나는 답한다. "좋고 나쁜 것이 있다기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지요."

또 묻는다. "그림은 만드는 것이지요?"

또 답한다. "만들어야 그림이 생기지요."

다시 묻는다. "만든 것이 어떻게 감동을 주나요?"

다시 답한다."생긴 듯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람 그림에서는 생김 생김새를 따질 노릇이다.

사람 그림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변덕이 죽끓듯하여,

좋아하는 작가도 때와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답이 달라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손철주'다.

난 그동안 화려한 수사를 쓰는 사람은 별로라고 했었는데,

그의 글을 깊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화려한 수사'를 제일 먼저 떠올릴테고,

"이, 뭥미~?"하고 툴툴거릴 수도 있을테지만,

그의 글은 화려하기만 하지 않다.

화려하고 고혹적인 동시에 깔끔하고 청순하다.

 

난, 그림과 글을 벼려내는 솜씨로 미루어 그의 '사람을 보는 눈'을 살짝 엿보거나 전수받고 싶었나 보다.

 

'일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 꽃을 보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 숲을 걷는 사람과 물에 가는 사람 들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 는 그의 말 속에서,

'사람이 그림 밖에 있는 사람 그림'도 있다...를 읽어낸 내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

다시말해 화폭에 사람이 없는 그림도 있지만, 그런 그림들이라고 하여 사람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화폭에 사람이 없는 그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람을 보는 눈'은 밝히고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 그림들을 죽 펼쳐놓고 보면서 깨단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모자라,

'그림 밖의 사람은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고, 그림 속의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많다. 이럴진대 사람 그림을, 그려진 사람으로만 여기겠는가. 보고 또 볼 일이다.' 라고 눙친다.

 

말 그림 하나를 본 두보가 '살만 있고 뼈가 없다'며 탓했다. 소동파는 정색하고 두보를 나무랐다. '길고 짧은 게 있는데 살진 것만 보는가.' 다들 보이는 것만 본다. 살과 뼈, 길고 짧음, 설혹 모두 다 갖췄다고 명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소매가 길면 춤 잘 춘다지만 장식과 기교는 군더더기가 되기 쉽다. 겉모습을 그려도 설탄처럼 고갱이를 콕 짚어내야 잘된 그림이다. 그게 어디 그림뿐이랴.(19쪽)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식과 기교는 군더더기가 될 수 있으니, 고갱이를 콕 짚어내야 잘된 그림이겠다.

화려하고 고혹적인 동시에 깔끔하고 청순한 그의 글맵시처럼 말이다.

'그게 어디 그림뿐이랴' 뒤에는 '사람을 보는 눈'도 마찬가지라는 의미가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소제목을 뽑아낸 품을 보면,

각양각색, 다채롭고 버라이어티한, 이런 저런사람들 속에서 그가 어떤 사람들을 보고 있는가 하는 그의 '사람보는 눈'을 짐작할 수 있겠다.

김홍도의 '세마도'를 두곤 '저 사내의 느긋함이 부럽다'고 하며,

한시각의 '삿갓 쓴 사람'을 일컬어 '덜 그려도 다 그렸다'라고 한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傳해지는 '미인화장'을 두곤 '꾸민 티와 노는 짓'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유신의 '포동춘지'를 가지곤 '옷자락에 꽃향기 나눌 친구'라는 제목을 뽑아냈다.

 

'꽃사랑도 지나치면 밉보인다' 강렬하게 시작해서 얘기를 어찌 풀어나가나 했는데,

'두보 같은 대시인의 탄식이 그렇다'느니, '왕안석의 토로는 더 안쓰럽다'느니, 하다가는...

이내, '아끼는 마음도 유만부동, 이 정도면 속이 간지러워진다'며 은근슬쩍 구렁이 담을 넘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아흑~--;

이런 문장은 또 어쩔 것인가 말이다.

멀쩡한 사내들이 왜 봄날의 꽃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해댈까. 아무려나, 다 봄이 짧은 탓인데 어쩌겠는가. 봄은 짧아서 황홀하고 황홀해서 훅간다. 꽃인들 다르랴. 열흘 붉기가 어려울 때, 꽃은 서글피 아름답다.ㆍㆍㆍㆍㆍㆍ (59쪽)

책을 읽는 내내 눈만 환해지는게 아니라, 마음까지 밝아지고 환해지진다.

이쯤되면 두루두루 호사다.

하지만, 이런 글 속에서 느끼게 되는 단 하나는,

화려하다 못해 흐드러지는 수식이어도,

그게 자연의 일이고, 또 진심을 담고 있다면...그게 장식과 기교라는 군더더기가 아니라 고갱이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이 지금의 손철주에게 '마침'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젊었더라면 아무리 글이 화려하고 고혹적이더라도 농익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테고,

좀 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깔끔하고 청순하다기보다는 초라하고 궁상맞게 느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던 이런 구절이 한몫을 하는데,

우리는 중늙은이다. 얘기는 연애담으로 올라갔다가 금방 회한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 젊은 여자들의 물 오르는 푸르름을 뒤로하고 우리는 조락한다고 했다. 청춘은 축복이고 여자는 은총인데,축복과 은총을 넘보는 우리의 눈길은 추파라고 했다.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득한 것이 아니라 머쓱한 것이라고 했다.

'마침'하면서 '맞춤'하기까지하다.

 

예를 들면,

'눈동자가 또랑또랑한데다 앵둣빛 입술이 남정네를 안달하게 만들거라며, 이 저녁에 기생이 부릴 수작이 눈에 선하다'는 그림 설명 바로 밑에,

'그 그림에 그 대거리다. 다들 멋들어지게 논다' 라고 첨언하는데,

그의 입을 통해 나오니 풍류가 되고 추임새가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농짓거리나 욕 이상도 이하도 아닐 뻔 했다.

 

초상화에서는 터럭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만큼 외양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의 초상화는 '傳神기법'을 큰 자랑으로 삼는다. '정신을 전달한다'는 얘기다. 모델의 정신까지 화면에 살려내는 이 기법은 눈동자 묘사에 성패가 달려 있다. '눈은 정신을 빛내고 입은 감정을 말한다'고 했다. 송인명 초상의 백미는 입이다. 입은 '口心'이라 했다. ㆍㆍㆍㆍㆍㆍ 사람 좋아뵈는 이 인상은 저항하기 힘든 포용력으로 비친다. 그의 품성이 손에 잡힐 듯하다. 초상화는 서양 것이 눈에 쏙 든다는 사람이 많다. 인물을 닮게 그리는 솜씨, 휘황찬란한 복색, 자르르한 유화의 기름기는 보는 이의 눈을 현혹한다. 우리 초상화는 어떤가. 색은 칠한 둥 만 둥, 붓질은 듬성듬성, 게다가 작은 종이나 천에 그려 압도하는 위용이 없다. 그렇다면 비교우위가 어디에 있는가. 앞서 말한 '전신', 곧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얼굴을 통해 정신을 그리는' 방식이다. 겉을 꾸미느라 속을 놓치는 초상화는 허깨비 인물상에 머문다. (63~65쪽)

 

수묵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물의 거죽보다 사물의 뜻을 그리는 방도로 각광받았다.(70쪽)

 

결국 그림이라는 것은 사물의 거죽을 통해 사물의 뜻을 그려야 하는 거라고 얘기하고 있다. 사람 그림은 얼굴을 통해 정신을 그려내고 또 전달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 보는 눈'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거죽'이나 '사람의 얼굴'을 미루어 '사물의 뜻'과 '사람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윤두서의 <자화상>에는 이런 평이 달렸다.

처음에는 옷도 귀도 다 그려진 상태였지만 세월이 가면서 닳아버렸다.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데, 그게 묘한 아우라를 빚는다. 공재의 됨됨이가 궁금하면 자화상을 보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기보다 실존이 본질이다.(99쪽)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기보다 실존이 본질이다'는 말은...

사물의 거죽이 사물의 뜻을 이미 담고 있다는 뜻이겠고, 사람의 얼굴이 사람의 정신을 이미 담고 있다는 뜻이니,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아주 멋지지만, 멋지다고 하고 퉁쳐 버리기엔 너무 큰 뜻을 담고 있다.

처음 옷도 귀도 다 그려진 상태였을때도 '실존'이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닳아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 상태인 지금도 '본질'은 훼손되지 않았다.

그러니 실존이 곧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의 옷이나 귀가 장식이나 기교 따위의 군더더기가 아니라, 고갱이인것은 명명백백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다 닳아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 지금도 고갱이가 흐려지거나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실존이 본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것은 답을 찾아가는 길이 된다. 옛것에서 얻은 앎이이 되지못하는 것은 옛것의 결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자의 결핍일 뿐이다.(152쪽)

손철주의 글을 읽노라면 산해진미,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같아서 황홀하다.

함포고복하고 배 두들기기에 충분하다.

맞춤법이나 어법 내지는 오ㆍ탈자를 가지고 거슬렸던 적도 없기 때문에, 위의 문장은 한참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함'이라는 낱말이 '힘'을 잘못 적은게 아닌가 싶었다.

왜냐하면 '결함(缺陷-이지러지고 빠지다)과 대구가 되려면 '함'은 결함과는 반대 의미여야 되는데,

자꾸 결함의 '陷(빠질 함)'만을 떠올렸다.

앞의 함은 '다,모두'의 뜻을 가진 咸이었다.

이런 문장의 진의까지 깨닫게 되고나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비밀 댓글로 저 '함'은 지행일치의 그 '함'인 것 같다고 해주신 분이 계셨다.

그러고 보니, 말된다.

알다와 행동하다, 앎과 함~

 

이 책이 지금의 손철주에게 '딱'이라고 했던 또 하나의 '예'다.

봄날 풍정을 그렸는데 맛문한 여름의 꿀잠과도 맞다. 할 일 없어서 낮잠 자는 게 아니다. 마음이 편해서 잔다. 눈이 바깥을 보면 마음도 바깥으로 간다. 마음을 거두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여름날의 낮잠은 엉킨 시름을 풀어준다. 잠시 눈을 감아보라. 바쁘면 하루가 짧고 고요하면 하루가 길다.(170쪽)

김홍도의 '낮잠'을 설명한 그림이다.

난 닉네임이 '또 자니?'의 'jani'일 만큼 잠에 일가견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하나, 둘, 셋, 레드썬~!'처럼 잠들 수 있다.

그래도 염치라는건 있어서, 

벌건 대낮에 낮잠나는 제자를 보고 공자가 화를 냈다더라...하는 문장을 만나면 마냥 허허로울 수만은 없는데...

김홍도를 편들고 나선 손철주의 저 문장이 내게도 힘이 된다.

하지만, 좀더 이르거나 늦은 나이의 그를 통해서 나왔다면...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못하고 허물어진 담장은 회칠을 못한다는 공자의 지청구를 들었어여 했을 것이다.

 

또 이런 문장은 어떤가?

신윤복의 남녀 통정에는 관계의 금칙을 벗어나려는 모종의 심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트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관계인데, 관계를 넘어서야 이뤄지는 사랑. 그 사이에서 도리는 갈등한다. 도리가 감시하기에 사랑이 뜨거워지는 그 얄궂은 심리와 정황을 신윤복은 늘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206쪽)

내가 언젠가 읽었다던,

 '우리는 중늙은이다. 얘기는 연애담으로 올라갔다가 금방 회한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 젊은 여자들의 물 오르는 푸르름을 뒤로하고 우리는 조락한다고 했다. 청춘은 축복이고 여자는 은총인데,축복과 은총을 넘보는 우리의 눈길은 추파라고 했다.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득한 것이 아니라 머쓱한 것이라고 했다'

는 자중자애하는 문장을 통하여 그의 속내를 이미 들여다봤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래야 단원과 혜원을 향한 그의 이랬다 저랬다 하는 찬사가 변심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가 되는 구절이다.

단원과 혜원의 진면목이 그러하듯이 조선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풍속화는 은근한 에로스가 진국이다. 다소 싱거운 듯해도 자극을 걷어낸 담박한 맛이 일품이다. 봄은 덧없다. 오는 듯 가버린다. 그 찰나적 황홀이 한 줌의 재가 될지언정 봄날의 상사는 누가 말려도 핀다. 그래서 사랑은 가없다. 조선의 풍속화는 봄날의 짧은 황홀과 아찔한 유혹, 남녀의 가녀린 떨림과 끌림을 담는다. 되바라지지 않게 묘사된 사랑의 풍속화, 그것이 남녀의 춘심을 바라보는 우리 조선의 오래된 서정주의다.(211쪽)

인생의 봄이나 여름을 살고 있는 사람이, 봄은 덧없다,오는 듯 가버린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다면...누가 콧방귀나 뀌었겠는가 말이다.

'젊은 여자는 봄을 타고 늙은 남자는 가을을 앓는다. 갈바람에 울적한 백거이는 '취한 내 모습 서리 맞은 단풍/발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하며 한숨지었다. 올 가을 단풍에 또 누구 가슴이 멍들까.(225쪽)'

라는 읊조림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에 읽는 이에게까지 전달되는 여운이 있는것이니까 말이다.

강세황은 산수화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바 있다. '진경은 닮게 그리기 어렵다. 참된 것을 감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참'은 숨겨야 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인적 없는 산수화가 이윽고 그윽해졌다.(216쪽)

내동 같은 얘기이지만,

나같은 사람이 책 한권 읽었다고 '사람 보는 눈'을 하루아침에 전수받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이고,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찾아나서는게 빠르겠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의 제일 끝에라도 가서 줄을 서는게 빠르겠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사람보는 눈'에 관한 비법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쯤 되겠는데,

다시말해 '사물의 거죽'이나 '사람의 얼굴'을 미루어 '사물의 뜻'과 '사람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쯤 되겠는데,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 얘기겠느냐 말이다.

계획되고 계산된 여백과 절제의 미, 극소에서 극대의 효과를 끌어내고...따위는 내겐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계획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냥 마음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데...그것이 자연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음 좋겠다.

다시 말해, 난 죽었다 깨어나도 '사람을 보는 눈'따위는 가질 재간이 없으니,

저런 눈을 가진 사람 근처에서 얼씬거리다가, 간택되어지는게 더 빠를 거라는 얘기이다.

 

고로 이 책을 읽은 감상은, 이쯤으로 정리해야 겠다.

나 같은 凡人들은 그냥 마음 움직이는대로 살아도, 그게 크게 하늘이나 자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보는 눈' 따윈 의식하지 말고,

한번 사는 인생, 지지고 볶고 웃고 다투고 화해하고 토라지고... 하면서 순간 순간을 가열차게 살면 되는 것이다.

신은 내게 따로 '사람 보는 눈'은 주지 않으셨을지 모르지만,

사람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사람 저사람 보고 고르는 유난 떨지않고,

수더분하고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분지족하자,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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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1-10 16:18   좋아요 0 | URL
읽을 마음이 있으니 책도 삶도 사람도 읽을 수 있어요.
양철나무꾼 님 스스로 마음이 맑아지고 싶으니
어느 책을 읽더라도 마음이 환하게 맑아지면서 트일 수 있구나 싶어요.

sslmo 2013-11-15 15:48   좋아요 0 | URL
항상 좋고, 긍정적인 말만 남겨주는 함께살기 님.
고맙습니다여, 꾸벅(__)

2013-11-10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3-11-15 15:51   좋아요 0 | URL
흠~~, 책이 무지 좋았습니다여.
저 앎과 함의 귓속말은 쌩유~^^

아무개 2013-11-11 09:10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보내주신 속속들이 옛그림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이 책도 장바구니에 담아 놨는데, 역시나 리뷰 읽고 나니
사야겠습니닷!!

날이 갑자기 추워졌네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sslmo 2013-11-15 15:53   좋아요 1 | URL
네, 손철주는 강신주와 더불어 절 실망시키는 일이 좀처럼 없더라구요, ㅋ~.
님도요~^^

하늘바람 2013-11-11 11:15   좋아요 1 | URL
님 리뷰는 너무 재미나서 읽고 다시 읽고 싶어져요

sslmo 2013-11-15 15:55   좋아요 1 | URL
음메, 기죽어~(,.)
예쁘고 잼난 동화책까지 쓰시는 님이 거럼 안되는거 아시죠???
동화책 참 좋더라구요, 잘 봤어요.^^
 
여행자의 서재 - 길에서도 쉬지 않는 책읽기
이권우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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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뉴스를 들으니,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에서 20여분간 불어로 연설을 한게 이슈더라.

박 대통령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소개되고 있었는데,

이번 불어 연설의 저변으로 40여년전 프랑스 파리로의 6개월 동안의 유학을 들고 있었다.

난 여기서 여러가지 딴지가 걸고 싶어지는데 꾹참고,

'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자국어도 아닌, 현지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것 하나와,

대한 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건 당연한건데,

저렇게 '한국어'까지 꼭 집어넣어서 5개국어가 되어줘야 하는건가...하는 두가지만 언급하겠다.

저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그렇지 않고는...하나도 중요하지 않은것 같은데,

그럼, 바꾸어서...과연 박 대통령은 프랑스 현지인이 불어로 묻는다면, 말귀 알아먹고, 의사소통할 수 있을까?

나 혼자만의 쓸데없는 기우이기를 바란다.

 

난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에 연연해 하는 부류이다.

바꾸어 말하면, 낯선 여행이 번거롭고 서툴다.

'이권우'식으로 얘기하자면, '지적 호기심'이 영 꽝이다.

낯선 장소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안되는 대화를 하고,

그리고 정체 불명, 출처 불명의 이상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게 괴롭다.

 

차리리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맨날 먹던 음식을 먹고 내 형편과 분수에 맞춰 사는게 낫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여행'을 번거로워 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덜 성숙한 나이에, 공부를 핑계로 외국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나를 제대로 번역'은 커녕 간단한 의사소통도 힘들어 손짓, 발짓을 동원하면서도 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느꼈던 지독한 고독감은 그 무엇으로도 상쇄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외로움은 외부적인 요소이고, 고독감은 내부적인 요소이다...라고 얘기하고,

또 누군가는 외로움은 Loneliness이고, 고독감은 Solitude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전자는 '혼자 있는 고통' 을, 후자는 '혼자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여행'이라는 사실(fact)을 가지고도,

누군가는 '혼자 있는고통'을 느낄 수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혼자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나의 경우는 그게 고통이라는 중압감으로 다가왔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사설이 긴것은,

이 책이 '이권우'님의 책이 아니라면 내가 들춰볼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서둘러 답을 말하자면, 지식인에게 여행은 번역이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행기 곳곳에서 번역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문맥마다 서로 다른 뜻으로 쓰고 있으나, 결국 지적인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해준다 싶었다.

 

행간이 많고 품이 넓은 원작을 번역할 때 좋은 문구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문장을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의미에서 외부의 맥락과 부딪히는 와중에 내가 모어 사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러면 상대의 사회와 비교할 수 있는것처럼 모어 사회의 상황을 내가 대변하듯이 말해도 는지 ㆍㆍㆍㆍㆍㆍ  이때 상대의 사회와 모어 사회 사이에서 외관의 유사함에 의지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접점을 발견하려면 또 다른 번역 능력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쓴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느낀 바를 설명한 대목이지만,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이보다 좋은 여행론이 없을 듯싶다. 안에 있을 적에는 잘 알고 있다 싶으나 바깥에 나가야 비로소 깊이 알지 못했다고 깨닫는 법이다.ㆍㆍㆍㆍㆍㆍ "원작의 생명력을 보존하려면 번역자는 그 원작을 낳은 토양을 지반째 옮겨야 하지만, 결국 번역에서 가필하거나 새로 쓰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번역은 원문이 지니는 가능성의 폭 안에서 그 생명력을 되살려내는 금욕적 실천이다."(35~36쪽)

암튼, 지식인에게 여행이 번역이고 아니고, 의 여부를 떠나서,

번역이라는 말이 '지적인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말이고 아니고, 의 여부를 떠나서,

그동안 내가 출처를 알 수 없었으나, 늘상 마음 속에 새기고 살던 문장의 '원전'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의미가 있었다.

'행간이 많고 품이 넓은 원작을 번역할 때 좋은 문구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문장을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라는 문장 말이다.

원전의 번역가는 얼마나 제대로인지, 훔쳐보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근데, 얼마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을 보면서도 느낀것이지만,

작가가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자랑하고 눌변이라도,

내가 거기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책이 재미없어 지기도 하더라~--;

때문에 이 책도 그렇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된다.

 나는 주목한다. 그는 베이징을 여행하고 나서 그 체험을 중국연구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베이징에서 그는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 혹은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고뇌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의 모습은 지역 연구자인 내게 연구와 아울러 여행의 의미마저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

 

 무릇 지식인에게 여행이란 추상에서 구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식이란 어차피 회색을 띤 이론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푸른 생명의 나무는 없다. 그러니, 박차고 나가 생명의 나무를 찾으려 할 수밖에. 물론 구체성으로서 여행은 다시 추상으로서 여행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두 범주의 충돌에서 우리는 특수성이라는 빛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여행기가 결국 문학의 한 갈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41쪽)

위 단락은 그 연장선 상이기도 한데,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하는 것들,

그것들은 자신의 체험과 경험을 동반하지 않은 ' 것'이었을때는, 이론뿐인 추상에 불과하다.

무릇 책이 그렇다.

책의 내용들을, 책의 이론들을...

이해하고, 체화하여 내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그냥 한낯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과 공식과 지식이라도,

내가 거기 흠뻑 담굴질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내 것'은 아니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문장' 인 동시에 '추으로서의 여행'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이 왜 필요한가?

이 책에서는 '물고기를 잡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모국어의 고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세살의 여행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많은 걸, 깊게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아래 인용된 책의 저자가,

아무리 세상에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문장은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여 훌륭하기 그지없지만,

과연 모국어의 본뜻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세살 아이의 여행은 호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차라리 '세상에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생각이 짧은 사람 정도로 치부해 버리면 됐을테니까 말이다.

 

세상에는 유희가 생략된 유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단다.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단다. 네게는 세 살부터 시작된 이런 여행이, 한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사치가 되는 사람들이 많이 많이 있단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들을 부단히 많이 보아서, 끝없는 속도전에서 비롯되는 초조와 이기심으로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렸을 때마다 스스로 발광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네 마음을 뜨뜻하게 덥힐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을 느끼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나누고, 함께함으로써 더 많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웅숭깊은 사람으로 자라주렴. 네가 살아있는 한 온 세상이 너의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담그고 느끼거라. 그 안에 네가 안아줄, 너를 안아줄 모든 것이 다 한데 어우러져 있단다(115쪽)

 

책을 많이 읽게 되면, 어떤 얘기가 빈말이고 어떤 얘기가 알차고 충실한 얘기인지 체험하지 않아도 용케 알게 된다.

빈말은 아무리 성찬이어도 공허하고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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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1-06 03:40   좋아요 0 | URL
음... 세 살 아이한테 저런 말을 하면서 여행을 한다면... 좀 재미없지 않을까 싶어요 ^^;;;

세 살 아닌 여섯 살 아이하고 늘 이곳저곳 함께 다니는데,
아이들은 그저 뛰어놀기만 하면 넉넉해요.
스스로 뛰어논 적 없는 아이들은 사회를 읽는 눈도 떨어지리라 느껴요.

그나저나 이권우 님은 스스로 '지식인'이라 여기는군요.
지식인 아닌 '보통 사람'으로 여길 수 있으면
여행이 한결 가볍고 즐거울 텐데.

..

예전에 김대중 님이 대통령이 된 뒤에
미국에 가서 영어로 아주 '유창'하지는 않고 '전라도 사투리 섞은 말씨'로
기나길게 연설을 해서 신문마다 '칭찬'을 한 적 있어요.
아마 1998년이었지 싶어요.
어느 신문도 '한국말 냅두고 영어로, 게다가 통역자 냅두고 영어로 말한' 일을
나무라지 않더군요.

박근혜 님한테도 틀림없이 통역자가 있을 텐데
통역자가 할 일을 왜 그분들이 스스로 하면서
지식 자랑을 하려는지 참으로 안쓰럽지요.

1998년에 한국에 온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사람이라 네덜란드말 하지만,
네덜란드말 통역자가 제대로 통역을 못하니
영어 통역자를 붙여서 영어로 말했어요.

아마, 대통령들께서는 영어 통역자나 프랑스말 통역자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11월이다.

滿山紅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온 산에 단풍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관찰하면 단풍이 꼭 붉게 물들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은행잎은 노랗게, 느티나무는 갈색으로...물든다.

그래도 우리는 '온산에 울긋불긋 단풍들었다'라고 표현한다.

이걸 대표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잘못 학습된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속에 뿌리박힌 생각을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믿음이 너무 강하면 믿음의 원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 그 믿음들이 뒤엉켜 고집이 된다.

이쯤되면, 나이들어 갖게 되는 '올곧음'은  '고집'으로 비취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나보다...생각할 즈음,

이런 구절을 발견했었다.

신앙은 어리석을 수 있으나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한다.

'고집'과 '신앙'의 공통점은 '올곧음'일까, 아님 '융통성 없음'일까?

어찌됐든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다.

부러지거나 꺾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낭패이다.

 

올 가을 마지막 단풍 구경이 될듯하여 주말에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에 가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라 하는 <데이비드 호크니 :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겸사 겸사 다녀오면 좋을 듯 하다.

 

근데, 난 아무래도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가 타입은 아닌듯,

'데이비드 호크니'관련 책으로 모자라서,

단풍도 '강판권'의 '나무열전'을 들추고 앉았다.

 

거기 '바람 타고 열매가 날아가는 단풍나무(楓)'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재밌다.

 

  가을 단풍을 보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상(詩想)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단풍을 노래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최신명(崔信明)도 「풍락오강냉(楓落吳江冷)」, 즉 '단풍이 찬 오강에 떨어지네'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정세익은 이 시를 보고 명성이 높았던 최신명에게 실망했습니다. 정세익은 최신명의 시가 높은 명성과는 달리 보잘것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보는 바가 듣는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고사성어 같은 일이 흔합니다. 단풍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가을에 유명한 곳을 찾아갑니다만, 실제 가보면 실망하기 일쑤입니다. 때론 단풍보다 사람만 구경하고 오지요. 그러니 멀리 가기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단풍을 즐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죠.

                                                                                                                  ('강판권'의 '나무열전'280쪽)

 

암튼, 가을 단풍을 봐서 였는지 어쨌는지...여기 시인이 아닌 시인이 한명 탄생했다, ㅋ~.

친구가 나에게 보내준 시인데(얼쑤~♬),

시어를 고른 품이나 생각의 깊이 따위,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단풍

 

붉을 단 丹, 단풍나무 풍 楓

단풍이라고 다 붉기야 하랴마는

오롯이 우듬지에 홍조띤 잎새 매달고

찬연한 햇살 누리는

가을 한낮

이 한 순간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사랑이 그토록 사무치면

이렇게 붉어질 수도 있음을 끄덕이리라

 

소나무 숲

단풍이 아니올시다

제선충 먹어

제 몸 태운 병마조차도

겉보기엔 화르르 타오르고 남은 재처럼

그리 보인다

 

가을이면 마지막 기운을

모두 모두어서

붉게 물들인 낙엽

가슴에 남기지 않고 뚝뚝 떨구는 우듬지 그 마음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닐수도 있구나

다 벗어버리고도

너에게로 벋어있는 짧은 팔들로도

사랑을 보여줄 수 있구나

 

사랑은

단풍처럼.

 

사진의 단풍은 또 딴 친구에게서 업어 왔다, ㅋ~.

가을 단풍마저도 나 혼자의 힘으론 즐길 수 없는 것인가, 정녕~--;

 

 

 

 

 

 

 

 

 

손철주의 <사람보는 눈>이란 책이 나와주셨다.

당근 설레발을 치며 구입했으나, 11월5일 배송 예정이다.

내가 딴건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지만서도,

'사람보는 눈'은 '쫌' 있는것 같다.

시를 보내주는 친구, 사진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어...

앉아서 가을을 즐길 수 있는 걸 보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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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1-01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풍이 산마다 들었더라구요! 페이퍼를 보니, 가까운 산에라도 가봐야 할 까봐요. 집에서 도보로 20분만 가면 관악산이라는^^
시를 보내주는 친구, 사진을 보내주는 친구...멋진 친구분들을 두셨네요.^^ 그만큼 양철님의 인덕이 깊어서 인듯합니다~
11월 아름다운 단풍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흠...위 단풍 사진을 보니 갑자기 이효석님의 <낙엽을 태우면서>가 생각납니다. 하하~

sslmo 2013-11-05 18:15   좋아요 1 | URL
관악산 아래 그동네 알아요, ㅋ~.
전 집에서 좀만 움직이면 북한산이고,
집 바로 뒤가 나즈막한 야산(약수터가 있는)인데...
십여 년을 살면서 한두번 올라갔다는...ㅋ~.

이 가을 가기전에, 11월 가기전에 우리 try to해보자구요.

노이에자이트 2013-11-01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산은 온갖 빛깔이 다 모여있으니 울긋불긋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잘못 학습된 표현이 아니니 양철나무꾼 님도 마음껏 사용하셔도 좋은 표현입니다.

sslmo 2013-11-05 18:18   좋아요 1 | URL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파랗게 파랗게 높은 하늘,
가을 길은 비단길~^^

이래도 된다는거죠? 감솨~(__)

프레이야 2013-11-01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놀처럼 다층의 붉은빛 낙엽, 이곳엔 11월 중순까지도 절정이지요^^
이 계절에 걸맞게 이브 몽땅의 노래를 선사해준 양철님 쌩큐~~
참 좋아요^^

sslmo 2013-11-05 18:20   좋아요 1 | URL
엄머머~(버선발로...헐레벌떡) 프레이야님이시당~(부비 부비)
저도 알라딘 서재 활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아서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지만,
그동안 넘, 넘, 넘,
적조하셨던거 아시죠~?^^
 
자연을 닮은 밥상 -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
이윤서 지음 / 위즈덤스타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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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책을 읽었다고 하면,

날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채식이나 이른바 장수식품이라 불리우는 슈퍼푸드에 관심을 갖게 됐는줄 알테지만,

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콧방귀를 끼며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난 그야말로 음식에 관해서라면 수더분하다 못해, 맛만 있으면 불량식품도 불사하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결코 음식, 소위 입으로 들어가는 것 갖고 유난 떨지 않는데(그렇다고 편식을 안한다는 얘긴 아니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어차피 사는 한평생, 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입이 행복해 하는 걸 먹고 살자는 주의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기저기서 원성이 자자하고, 돌이 날아오겠지만, 뭐~--;

입이 행복해 하는게 몸에 좋은 것에서 크게 비껴가지는 않더라.

(그럼 '먹기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의 '임낙경'님 같은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면 할말 없지만,

 그의 이론은 보편적인 이론은 아니다.)

 

실은 어디선가 마크로비오틱 Macrobiotic이란 단어를 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알아볼 요량으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마크로비오틱이란게, 일본의 장수요법에 뿌리를 두고, 인도의 아유르베다, 중국의 음양오행 등 동서양의 건강한 식문화를 아우르는 철학이란다.

때문에 여기저기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나와있는 책들은 많이 있지만,

설명이 중구난방, 우후죽순으로 흩어져 있다보니,

중심을 제대로 잡지못하면 난해하기 그지 없어진다.

 

마크로비오틱은 '음양조화, 신토불이, 일물전체, 자연생활' 등 4대원칙에 충실한 일종의 섭생법이자 요리법이다. 마크로비오틱은 가급적 식품을 통째로 먹는데, 그래야 식품이 가진 고유의 ' 에너지(氣)'를 그대로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자신의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반영되기 때문에 되도록 인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선한 식품을 먹어야 한다. 주로 유기농 생산농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재료 선택은 물론 조리법ㆍ활용법까지도 자연 친화적일 때 음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마크로비오틱 섭생법의 기본은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며 육식을 자제하고 유기농산물중에서도 곡류를 중심으로 한 채식을 하는 것이다. 발아 현미와 통곡물을 중심으로 제철ㆍ제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유기농 채소와 콩, 김과 같은 해조류, 된장, 절임채소 등과 같은 발효식품을 주식으로 포함하며, 육류, 계란, 유제품의 섭취는 지양한다(19쪽)

 

  채식을 시작했던 초반에는 재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파스타 요리를 즐겨 먹었다. 그러다 마크로비오틱을 만나면서 파스타를 만드는 재료에 대해 좀 더 꼼꼼하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크로비오틱은 기본적으로 토마토, 가지, 감자, 고추 등의 가지과 작물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마크로바틱 과정 중 파스타를 배울 때에도 토마토나 고추, 가지를 써본 적이 없다. 보통의 경우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건강에 좋다는 토마토와가지 같은 채소들을 왜 쓰지 않는 것일까?

  내 경우에는 만성 질환이었던 건선 치유 과정에서 가지과 작물의 섭취를 조심해야 한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가지과 작물에 솔라닌이라는 유독한 성분이 있어 염증 증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자에 싹이 나면 꼭 제거하고 먹어야 하는 이유도 솔라닌 성분의 유독성 때문이다. 마크로비오틱의 섭생은 음양의 조화, 중용의 정신을 강조하는데, 가지과 작물들은 산성식품이어서 잘못 쓰일 경우 음식의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토나 가지를 절대 먹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크로비오틱은 모든 것을 포함하되 건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생활방식이기에, '해서는 안 된다 Have to do not '의 사고방식이 아닌'지양한다 should not '가 어울린다. 때문에 마크로비오틱의 기본과 정석을 가르치던 학교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식재료지만, 경우에 따라서 제철, 제 땅에서 자라난 가지과 작물이라면 섭취할 수 있다고 본다. 산성, 알칼리성 성분의 음식을 균형 있게 먹는 것은, 결국 음과 양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38~39쪽)

 

이렇게 시작한 책이었기 때문에 자연 설렁설렁 넘겨보게 되었고,

또 이렇게 설렁설렁 넘겨보면서 뭔가를 궁구히 할 수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였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아니, 마크로비오틱 요리사 이윤서 님은 영화 얘기를 하면서 '라따뚜이'를 언급할 정도로, 이 영화 속에서 요리평론가로 나왔던 이가 라따뚜이를 먹으면서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던 걸 언급할 정도로, 나와 요리 철학이 비슷했다.

이윤서 님께 죄송하다, 내게 어떤 요리 철학 씩이나 되는게 있는 것처럼 표현하게 되어버렸는데ㆍㆍㆍㆍㆍㆍ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사용하되 최소한의 가미'가 내가 추구하는 요리의 기본이다.

대신 과일과 토마토를 제외한 채소는 익혀 먹는다.

그걸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ㆍㆍㆍㆍㆍㆍ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 입속으로 쏙 넣어 한입 먹는 순간,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이 열리고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 듯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에게 이로운 음식이 이런 것이 아닐까? 오랜 아픔, 슬픔을 어루만지고 영적으로, 정신적으로,육체적으로 이롭게 하는 음식.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게 담아내는 조화로(43쪽)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단순히 요리 책에서 삶의 철학이 담긴 책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사랑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관계의 안정과 감정의 충족에서 오는 일종의 헛된 욕망이었다. 그안에는 내 자신이 없었다. 20여년간의 오랜 만성 질환은 나 자신을 깊은 어둠 안에서 방황하게 만들었고, 어둠을 타인과의 사랑 안에서 찾았고, 의존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을 확인받고 또 소유하려 했다. 오직 관계를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던 시절에는, 그 관계가 깨지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큰 아픔을 겪었다.

 

  "아무것도 찾지 않고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할때, 거기엔 중심이 없다. 그러나 거기엔 사랑이 있다."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2010년 여름, 어그러진 관계와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때다. 운명의 종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며 떠났던 자연 치유 과정을 통해 섭생이 바뀌었고, 질병이 치유되어졌고, 몸과 마음이, 그리고 영혼이 치유되었다. 그러면서 비로소 내면의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존재의 여부는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태초부터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 에고를 재쳐내고,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루돌프 슈타이너-

 

 "비가 내려 나뭇잎에서 여러 날 쌓인 먼지가 씻기듯이, 마음은 생각없이, 강제없이, 책 없이, 선생없이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아름다운 황혼을 만느듯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내가 느낀 이 깨달음을 어떻게 해야 잘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그동안의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타인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그에 맞추어 나의 위치도 설정된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타인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사랑을 받아야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타인한테 사랑받지 않아도 나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의 마음 속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고 없고, 있으면 얼마나 크고...를 따지는 것 자체가 나의 욕심이다.

그냥 비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자연 현상이 그러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 현상은 아무 인과관계가 없는 것처럼,

나의 사랑도 그런 것이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되면, 서로 경쟁할 일도 없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일이 기꺼웁게 된다.

 

자연과 대지의 기운이라는 걸 느끼게 되고,

내 스스로가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기꺼이 담아줄 수 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참 어려운 얘기이다.

음식이나 요리를 통해서 이런 깨달음을 얻기는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 이런 깨달음이 눈물겹게 귀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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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박수밀 지음 / 돌베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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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책을 읽는 관점이 좀 바뀌었다.

그동안은 책을 곧이곧대로만 읽는것으로도 벅차,

책의 숨은 이면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책을 사람마냥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의 변화가 꼭 좋기만 한게 아닌 것이,

어떤 종류의 책들은 그렇게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적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기만 해서,

 

채워가질 수 없는 결여로 허기와 갈증이 깊어져만 갔기 때문이다.

그 어떤 종류의 책들은 주로 우리 고전이었는데,

같은 책 같은 문장을 두고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연암 박지원 같은 경우도...

사상가의 입장에서 봤을때와 문장가의 입장에서 봤을때 얼마든지 다른 견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상가로써의 연암과 문장가로써의 연암이 둘이 아니고,

그 둘을 아우르는 보편성으로 그를 바라보기 위해선,

그의 입장에선 '사상가'와 '문장가'라는 경계의 거품을 빼야 하고,

내 입장에선 관조적이라는 '간격'의 거품을 빼야 한다.

 

아직 내 깜냥으론, 보편성과 관조적이라는 단어를 하나로 아우를 수가 없는데,

그걸 개별성과 독창성으로까지 연결시켜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만든 사람과 책이 있다.

박수밀이 쓴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이 그것인데,

제목은 '글쓰기'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은이는 연암의 그것을 병법과 전략에 비유하는 등,

온갖 것을 아우르는 삶의 총체로 보았다.

게다가 지은이의 문장 또한 수려한 것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예를 들면 이런 대구를 이루는 문장들 말이다, ㅋ~.

ㆍㆍㆍㆍㆍㆍ그의 글은 가벼운 듯 진지하고, 유쾌하다가 불쾌하며, 통쾌하지만 슬프고, 상식에 맞는가 싶더니 새롭다. 그의 글은 능글맞되 삼엄하다.ㆍㆍㆍㆍㆍㆍ('책머리에'부분 발췌)

 

이 책에는 '생태 글쓰기'라는 새로운 용어의 정의가 나오는데,

그 정의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에서 '연암'에 대한 이해는 출발한다.

 

옛 문장가들은 늘 자연을 얘기했는데, 대개 인간과의 일치를 추구하거나 혹은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노래했다면,

연암은 자연을 변화와 창조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자연 사물의 원리를 들어 인간과 사회가 병들었으며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비판했다고 한다.

즉 사물의 생태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인간 사회를 고발하고 교정하는데 활요해서 '생태 글쓰기'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은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이지만, 연암의 삶을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있다고 한 이유는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진짜 글과 가짜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의 언어를 쓰는가, 남의 언어를 쓰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연암 생각에 옛말을 모방해서 주어진 틀에 맞추는 글은 가짜 글이다. 고전 시대 글쓰기의 기준은 옛것을 본받으라는 것이었다. 옛글을 닮아라, 옛글과 비슷해지라는 것이 전통적인 글쓰기 규범이었다. 과거 시험은 정해진 경전을 달달달 암송하고 정해진 문체에 맞추어 썼다. 그런데 연암은 도리어 옛 언어를 표절하지 말고 나의 언어를 쓰라고 말한다. 비슷함을 좇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비슷하다는 말에는 이미 다르다, 거짓되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곧 연암은 중세 시대 보편적 지향인 '닮음의 미학'을 거부한다. 그는 작가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글을 써야 한다고 요청한다.(28쪽)

여기서 개념을 확장시켜 보면,

주자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유가의 자연관과 연암의 자연관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주자성리학이 성행하던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실제의 산수가 아니라 푸른산, 흰구름 등 이상적인 공간이다. 

반면, 연암은 자연 사물에 애정을 갖고 자연 사물과 대화적 관계를 형성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사물과 인간을 평등한 관계로 만든다.자연 사물도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라 여기고 사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한다.

얼마전 읽은 '우주생명 오디세이'라는 책에 보면...우리가 이제는 많이 알고있는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9%일치하며,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아보이는 바나나와 인간도거의 비슷한 성분으로 이루어진 멀지 않은 친척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조선시대의 연암이 선견지명이 있어서,

현대에 쓰여진 '우주생명 오디세이'의 내용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닐테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용후생이라는 것은 인간 우월주의나 문명의 利己에서 비롯된게 아니라,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방도로 제기된 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물과 타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 중심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깨우치거나 배타적인 우월의식을 허무는 글쓰기에서 잘 활용된다.(40쪽)

 

눈으로 볼 수 있는 코끼리도 그 이치를 알 수 없을진대 코끼리보다 훨씬 큰 세상의 이치를 어찌 일일이 규정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사물의 관계는 상대적임을 말한다.(47쪽)

암튼, 그를 '사상가'나 '문장가'로 국한시킬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것은,

어떤 현상을 놓고 봤을때 현상만 보지 않고 이편과 저편의 '사이'까지 꼼꼼하게 관찰하라고 한 '발승암 기문'과 그 해석을 보고 나서였다. 

이편과 저편의 '사이'가 됐을때 그 '사이'는 미미하게 작을지도 모른다.

사물과 사물의 '사이'가 됐을때 그 '사이'는 작아질 수도, 커질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됐을때는 서로간의 친밀도나 정서적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가감이 가능하겠다.

때문에, 이 '사이'를

'쉼표'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틈'으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가운데'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으로 생각할 것이냐,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은 가능하게 되고,

 

그 때문에, 난 '사이'를 '쉼'으로 해석하고 싶지만,

어느 누군가는 '사이'를 '차이'로 해석하기도 할 것이다.

 

그걸 이 책에선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연암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주목함으로써 기존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변에 주목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것, 버림받은 존재도 조건에 따라 모두 소중한 개체가 될 수 있으며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임을 보여 주고자 했다.(60쪽)

암튼, 연암 박지원을 통해,
박수밀의 해석을 통해,
또다른 독서법, 또다른 삶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근데 혼란스러운 것이,
그동안의 난,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지 말자, 다름을 인정하자...그랬었는데,
오늘은 나와 상대가 다를것이 없다, 다 똑같은 존재이다...라고 한다.

이럴때 어려운 말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라고 했던거 같은데...
아닌가? 아님, 말고~(,.)

 

오행상생설에 의하면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는다. 곧 나무는 불의 어미가 되고 불은 나무의 자식이 된다. 그러나 그(연암)에게 오행상생은 어미가 자식을 낳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비추어 주는, 서로가 주고받는 공생의 관계다. 물질과 세계를 바라보는 연암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힘입어 살아간다는 것이다.(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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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3-10-29 17:07   좋아요 0 | URL
오행상생설에 의하면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는다. 곧 나무는 불의 어미가 되고 불은 나무의 자식이 된다. 그러나 그에게 오행상생은 어미가 자식을 낳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비추어 주는, 서로가 주고받는 공생의 관계다. 물질과 세계를 바라보는 연암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힘입어 살아간다는 것이다.(275쪽)

2013-10-30 00:02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안녕하셨어요?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즈믄밤의꿈이라는... 글방을 열었다가 오래도록 자리를 비운 玄입니다. 선생님 글방에 들어와 풍요로운 독서의 성찬을 맛봅니다. 열정적인 독서와 글쓰기에 자극을 받고 힘을 얻습니다. 그럼 건강하시고요,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sslmo 2013-10-30 13:59   좋아요 0 | URL
돌아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와락~( )
저도 그리 열정적인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 같이 분발하도록 하죠, ㅋ~.

파란놀 2013-10-30 04:52   좋아요 0 | URL
동양에서는 오행을 말하고 서양에서는 사원소를 말하곤 하는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해(불+빛), 바람(공기), 물(비+내+바다), 흙(들+논밭), 풀(풀+나무)이에요.
동양에서는 '풀(나무)'까지 넣지만, 서양에서는 '풀(나무)'을 안 넣곤 해요.
'쇠'가 어디 갔느냐 할 수 있지만, '쇠'는 '돌'에 들며 '흙' 사이에 끼겠지요.

해, 바람, 물, 흙, 풀,
이렇게 생각하면
지구와 사람과 모든 목숨 이루는 바탕이 무엇인가를
한결 잘 읽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sslmo 2013-10-30 14:08   좋아요 0 | URL
제가 저'오행상생설'을 '본문'에 빼먹어서 '댓글'에 적었었던건요~^^
제가, 저란 인간이 오행하면 상생과 상극, 보와 사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오행 상생이라는 것을, 모자관계가 아닌 상호공생의 관계로 본 시선이 낯설었고,
그렇지만,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님이 댓글 달아주신 오행, 사원소 개념이랑은 약간 거리가 있어보여서요, 헤에~^^

암튼, 늦었지만, 또 다른 오해가 생길까 싶어, 본문으로 올리겠습니다, 죄송(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