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 스물넷에 장애인이 된 한 남자와 그가 사랑한 노들야학의 뜨거운 희망 메시지
박경석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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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렸을때 제일 이해하기 힘든 말이 '잡은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라'는 말이었다.

잡은 고기를 깔끔하게 손질까지 해서 주면 그보다 더 좋을게 없을것 같은데,

왜 구태여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느라 자신의 고기잡는 비법을 전수한답시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 이중으로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동네에는 새벽이면 신문을 배달하는 나이든 형아가 한명 있었다.

다들 날라 다니는 시간에,

이 형아만은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다는 듯이 자기만의 느긋한 걸음걸이를 고수하였는데,

그게 깔끔한 외모, 단정한 옷차림과 더불어 이 형아를 새벽 골목에서 두드러지게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날 가만히 보니,

이 형아를 꼭 닮은 아저씨가 먼발치에서 시선으로 쫓고 있었는데,

그게 마치 오라(aura)를 형성한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걸 발견하고는 난 가족들한테,

저건 아동학대가 아니라 청소년 학대라고...

저 오빠는 공부하라고 놔두고,

그 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저 아저씨가 감독도 하고 배달도 하면 되겠다고 열을 올렸더니,

그때 가족들이 내게 했던 대답이,

잡은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였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말의 뜻을 이제는 알겠는데,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이 형아를 작년쯤 내가 사는 동네의 지하철역 입구에서 발견하였다.

아저씨가 된 형아는 여전히 외모도 깔끔했고 옷차림도 단정했는데,

하는 일만 신문배달에서 지하철역 입구에 철퍼덕 주저앉은 구걸로 바뀌어 있었다.

 

이 형아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아저씨는 아버지였는데 돌아가시고,

지적장애가 있는 이 형아 혼자 남게 된 것까지는 이 형 아버지의 예측대로였는데,

문제는 동네가 재개발되고 똑같이 성냥갑 모양으로 생긴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간단한 글자나 숫자를 보고 구별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까지는 예측을 못하셨나 보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이 발달되어 종이 신문을 보는 수요가 줄어들면서,

스피드와 정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배달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걸어다녀 스피드도 떨어지는 데다가,

아파트의 동ㆍ호수도 읽을 줄 모르는 신문배달원은 경쟁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장애, 장애인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피부에 와닿는 말이 통신장애가 아닐까 싶다.

남녀노소 거의 모두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요즘,

자신의 핸드폰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핸드폰이 잠시만 먹통이어서 연락이 안되게 되면,

불편을 느끼고 불안해 하는 이른바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많다.

 

장애(障碍, disability)라는 말을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니,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라고 나오고,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의 특수교육학 용어사전에서 다시 한번 찾아봤더니,

'질병이나 사고 등에 의해 지적, 정신적, 청각, 시각, 내장, 골격, 기형적인 면에 결함(impairment)이 생겨, 이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상태이다.
결함은 신체의 특정 부위나 기관의 기능이 손실되었거나 감소한 것을 의미하므로 의료적 지원이 필요하며, 장애는 손상으로 인해 특정 영역(읽기, 보기, 걷기, 듣기 등)에 능력 저하가 생기는 경우 교육ㆍ훈련적 지원이 필요하다'
라고 되어 있었다.

 

어쩜,

장애나 장애인들을 이런 통신장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들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사람이란 몸소 경험하고 체험해 본 것에 대해서만 친밀감을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거리감을 좁히려다 보니, 비교가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다.

 

정작 장애인들은 이런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지 못할 정도의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장애인들의 현실을 무시한 비교인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나의 이런 노력을 어여삐 여겨주지 않고,

나는 스마트폰 등 '통신장비 의존도가 낮다'고 하면서 심드렁해져 버리면 할 말이 없는 것이고,

 

'뭐라는 거냐, 우리가 보는 장애인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정도로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심한 장애인, 소위 중증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우리의 눈에 띄게 출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문제점이기도 한데, '장애인의 이동권'과 직결되어 있다.

이들의 대다수가 이른바 '방구석' 밖으로 자의로 나올 수 없는 이들이다.

자의적으로 나올 수 없으니,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없고,

교육을 받을 수 없으니 직업을 갖기 위해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난 그동안 저상버스를 가끔 편하게 이용하면서도, 장애인의 이동권이라는 측면에서 접근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하철역에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야 하는 타당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리프트가 되었을 경우, 한번에 한대의 휠체어밖에 못 움직이고,

여러명이 같이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추가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휠체어는 타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노약자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이 책의 말미에 나와있는,

'밥 먹었니?'또는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사말과 관련해서였다. 

삶을 산다는 것은 거칠게 말하면 밥을 먹는다는 것인데,

자기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장애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도움 받을 누군가를 구하지 못하면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야학의 처지가 나은 선생님들이나 봉사 요원들은 한번 밥 먹이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장애인들의 식사수발을 들다보면 정작 자신의 밥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야학의 선생님이나 봉사요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한번도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밥을 먹지 못하고 건너뛰거나 숨어서 몰래 먹고하다가 생으로 병을 얻게 되기도 하고 그랬나 보다.

장애인이 사회에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가 베풀어주는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계획하고 사회자원의 분배와 집행을 구체적으로 행사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124쪽)

 

장애인도 사람이고, 의식주는 사람이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이다. 

기본권을 누려야 하는게 사람들의 권리라면,

기본권을 행사하는 주체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행사하는 주체가 '국가'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엄격하게 말하면,

배고픈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어떤 조취를 취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 있는다는 것은,

살인까지는 아니어도 살인방조죄 정도는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얼마전에 읽은 '미 비포 유'도 그렇고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도 그렇고,

소설 속의 그것이라고 밖에 얘기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의 무대가 우리나라가 아닌 것이 완전 슬플 수밖에 없다.

 

좀 과한 비약이고 설정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의의 사고를 만날지 알 수가 없다.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제 기능을 못하면 '장애'라고 보아야 한다는 사전적 정의에 따른다면,

우리가 성인이라는 전제 하에(어린이의 시절을 건너왔으니 '장애아'는 아니지만),
어린이의 그것을 장애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제 기능을 스스로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제 기능을 하는 어른이나 부모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또래에 걸맞는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하나 하나 배우고 익혀가면서,

어른이나 부모의 보살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장애인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제 정신적ㆍ육체적으로 늙고 병들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 이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세상에 태어난 이상, 한번은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이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천년만년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복제양 돌리나 줄기세포 따위 첨단 의학의 힘을 빌리겠다는 사람들 일텐데,

복제양 돌리의 사망 이유는 '조로'였다는 걸 아시는지, ㅋ~.

 

심신이 손실되거나 감소하는 결함일때는 의료적 지원을 해주면 되지만,

장애는 손상으로 인한 능력저하가 생기는 것이므로 의료적 지원에 더하여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노인들을 향하여 제대로된 의료적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의료민영화를 얘기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들보다 수적으로든 처우로든 헐씬 열세에 있는 장애인들의 당연한 권리인 의료, 교육, 훈련에 관한 지원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나?

 
앞에서 통신 장애를 예로 들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것이 장애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과 공감이 단절되면 그것이 장애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달장애, 공황장애, 뇌병변 장애, 성기능 장애 등등...'장애'란 말이 접미사로 붙은 수많은 단어들을 보면,

적어도 소통과 공감을 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의 정의는 바뀌어야 할텐데,

다른 게 장애가 아니라,

공감과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으면 '장애'로 봐주어야 한다는게 나의 견해이다, ㅋ~.

 

그래서인지, 노들야학의 교장이시며, 이 책의 저자이신 박경석 님께서는...

다른 어떤 이론을 차치해두고, '함께하자'라는 실천적 구호를 함께 하고 계시다. 

그러면서, '함께한다는 것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며,

노들에 오는 교사들에게  멕시코 사파티스타 원주민 여성의 말을 들려 주고 싶아 하신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97쪽)

 

다시말해, 장애, 장애인, 이딴 것을 책으로만 읽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들이 고착되어 있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난 다른걸 장애라고 하고 싶지 않고,

소통과 공감이 부재되었다면 모두 다 장애라고 하고 싶다.

자신의 삶만 쳐다보며 사는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빠르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포개려는 그 속도는 점점 느려져 간다.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 앞에서 제발 발길 멈춰주길 바란다.

그 발길 멈추고 내 삶만이 아닌 세상을 함께 바라볼 때, 함께 살 수 있는 그 방법의 첫 시작이 되지 않을까?

아직 보이지 않았던 당신, 살아남아 주길 ㆍㆍㆍ(276쪽)

 

같은 얘기의 반복이지만,

상처받기 두려워서라는 이유만으로 벽이나 담을 높게 쌓아 소통을 거부하고 틀 안에 머무리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잠재적 장애인이 아니라, 자의적 장애인이 되는 것이니 명심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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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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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를 언급하고 지나가야 겠다.

 

 

 

새책을 구입하였는데 책배에서 이런 자국을 발견하게 되면 기분이 나쁘다.

그동안 책의 표지 일부가 부분 부분 찢어져 있거나,

띠지가 파손 훼손된 책을 받더라도,

책을 구입하고 한참 후에 읽게 되는 경우라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책의 띠지 또한 책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원형의 그것과 다르면 좋을리 없다.

그리고 이 책은 교정을 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탈자가 많다.

문법이나 맞춤법의 오류를 말하는게 아니라,

기본적인 오탈자의 문제는 책의 질을 떨어뜨린다.

 

누군가는 이런 날 보고 까탈스럽다고 하겠고,

또 누군가는 그러니까 친구가 없고 외로운거라고 하겠지만,

이게 40년 넘게 고수해온 나만의 스타일인걸 어쩌겠는가~--;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난 외톨이였다.

그렇다고 외톨이라는 사실에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일찍이 혼자라는 사실에 길들여지고 적응해서,

나름 혼자인 것을 즐기는,

급기야 혼자놀기의 달인에 이르렀던 것 같다.

 

다시말해, 혼자인것을 청승맞게 방치하지 않고,

나름 고고한 전위 예술 내지는 행위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은, 

(사회성을 유지하며) 삶을 산다는 것은,

매순간순간을 내가 주도적으로 얼마나 잘 운용하여 즐기며 노는지에 관한 문제이지,

그 순간 그곳에서 혼자인지 함께인지, 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버지는 외톨이였고 사람들이 유명인사의 변호사에게 흔히 갖는 이미지와도 정반대였다. 어쩌면 그런 점이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를 인기 있는 협상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침착하고 온화했으며 잘난 체 하지도 않았고 다소 순진해 보일 정도로 실리에 어두웠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따금 아버지의 직장 동료라든지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아버지는 기억력이 비상하고, 묘하리만치 사람 보는 감식안이 있었다. 한번 힐끗 보기만 해도 무엇이든지 기억했다. 과거에 쓴 메모와 편지도 그야말로 줄줄 읊었다. 대화할 때면 마치 노래에 빠져들듯 눈을 감고 상대의 목소리에 집중했고, 그래서 상대방의 생각이 무엇이며, 그 말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진실인지 허세인지 정확히 꿰뚫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어디선가 배울 수 있는 기술일 테지만 아버지는 내가 아무리 졸라도 언제 누구한테 배웠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속이지 않았다.(37쪽)

이 박스 글의 아버지로 묘사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틴 윈처럼 나도 외톨이다 보니,

여럿이 함께 나누어서 하면 수월한 일들을,  

버겁게 혼자서 온갖 공감각을 활용하여 하면서 호젓하고 홀가분하니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는 감식안까지는 아니어도, 선무당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보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온갖 공감각을 두루두루 활용하여 죽을똥 살똥 노력하였기 때문이지,

틴 윈의 딸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억력이 비상했거나 집중을 잘했거나 머리가 월등히 좋아서 터득한 것은 아니고,

틴 윈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독일 작가에 의해서 쓰여지긴 했지만, 미얀마가 배경인 만큼, 미얀마의 정서가 짙은 소설이고,

미얀마라고 하면 대다수의 국민이 불교를 믿는 불교 국가이지만,

과거로 가면 갈수록 점성술, 산파술과 같은 미신적이고 비과학적 신앙에 대한 의존도가 더 심했으리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그당시에는 삶의 시련에 굴복해야 마땅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으면 별자리가 나빠서였으며,

운명은 본인의 노력 여하와는 상관없이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요즘의 나처럼 '외롭지만 혼자 걸을 수 있어'라고 하며 나름 즐기고 살았다면,

독특한 생사관을 가진 까다로운 사람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ㅋ~.

 

 

미얀마의 불교가 독특한 것인지, 아니면 옛날의 미얀마의 그것이어서 그렇게 독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술적이다.

본인의 삶을 '운명예정론'이라는 미명하에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그것에 의존하던 그런 시대에,

자신의 삶과 사랑과 죽음 마저도 자신의 뜻대로 운용하고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다.

 

이 책이 보는 관점에 따라 로맨스 소설로도 분류가 될 수 있겠지만, 한 남녀의 성장소설로 보고 싶은 이유이다.

 

모든 불신과,

모든 편견과,

모든 선입견의 벽을 허물어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이,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

이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그걸 난 다른 말로 '로맨스'라기 보단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은 까닭이다.

 

30여년을 같이 살던 처자식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하루 아침에 증발해 버린 틴윈을 두고,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인 점을 감안해야 하겠고,

40여 년동안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해 오다 보니(나만의 에고에 갖혀 있다 보니),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는 없어서,

진짜 내 자신이 원하는게 뭔지조차 모르고 있는 나와 비교하여 볼때,

몸이나 마음이 어떤 신호에 반응할라치면 낯설고 두려워 뒷걸음질 치기 바쁜 나와 비교하여 볼때,

오히려 응원하고 박수쳐 주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죠?"

ㆍㆍㆍㆍㆍㆍ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렸다고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사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졌어요."

"왜 사랑이 그렇게 어려워야 하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 악이든 선이든 - 이미 갖고 잇는 개념에 비취 다른 사람을 판단하죠. 사랑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에 부합하는 것만 사랑이라고 인정해요.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죠. 다른 모습은 불편해하고, 그래서 의심하고 의혹을 품죠. 신호를 잘못 해석하기도 하고. 언어를 잘못 이해하기도 하고. 그래서 상대를 비난하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죠.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이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일 뿐이에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에요."(296~297쪽)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선무당 노릇을 해도, 그걸 이용하여 맹신하게 된다.

나의 경운, 환자가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는 부위를 듣지 않는다.

환자가 하는 말은 참고만 하고,

여러가지 정황과 상태를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하여 판단한다.

그 과정에서 의사소통, 즉 공감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내가 워낙 말이 짧은데다가,

어떻게 해서든 이해를 시키려고 하지않고('내가 뭐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야?'이런 생각을 하는것 같다~--;)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들을거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생략을 하고 지나가니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과정에서의 환자 입장에서는, 날 상대방의 의견도 귀담아 듣지 않는 돌팔이나 선무당 취급을 하게 된다.

그는 목소리를 귀로 듣지 않았다. 두 손처럼 피부로 느꼈다. 틴 윈은 그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영혼 또한 그러고 싶었다. ㆍㆍㆍㆍㆍㆍ다시 말해 틴 윈은 소리를 보았다.(140쪽)

 

"사물의 참된 본질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법이란다." 긴 침묵 끝에 우 메이가 말했다. "우리는 오히려 감각 기관 때문에 길을 잃지. 그 중에서도 특히 눈은 우리를 잘 속인다. 우리는 지나치게 눈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거든.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세상을 믿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껍데기일 뿐이란다. 사물의 참된 성질, 사물의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해. 그런 점에서 눈은 도움이 되기는 커녕 방해만 된다. 눈은 우리를 교란시키거든. 우리는 쉽게 현혹된단다. 게다가 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은 다른 감각을 무시하지. 청각이나 후각말고 그 이상의 감각 말이다. 내가 말하는 그 감각은 아직 이름이 없는데, 뭐라고 부를까. 그래 마음의 나침반이라고 부르자꾸나."

스님이 틴 윈에게 손을 내밀었다. 놀랄 만큼 따뜻한 손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동작 하나 하나, 숨소리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해. 내 경우에는 산만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우면 감각이 나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든단다.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말썽꾸러기 녀석처럼 나를 골탕먹인다. 예를 들어 마음이 조급해지면 나는 모든 일을 빨리 해치우려고 하지. 그러다 보면 빨리 움직여서 차를 쏟거나 국그릇을 엎지르게 되지. 남이 하는 말도 제대로 듣지 않지. 왜냐, 내 생각이 이미 딴 데 가 있거든. 마음속에서 분노가 아우성칠 때도 그렇단다. ㆍㆍㆍㆍㆍㆍ그 점은 우리뿐만 아니라 눈이 보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지. 그러니 인내해야 한다."(149~150쪽)

"두려움보다 강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152쪽)

그런 의미에서, 스님 우메이와 틴 윈과의 대화는 많은 깨달음을 줄 뿐더러,

더 몸을 낮추고 아래로 겸손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놀랍게도 틴윈은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심장박동 소리 또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66쪽)

암튼 이 책은 사람의 목소리가 각자 다른 것처럼, 사람의 심장 박동소리도 다르다고 얘기하고 있다.

목소리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니,

심장 박동 소리로 신원을 확인하는 그런 시대도 와야 할텐데 아직까지 그런 건 없는걸로 알고 있다.

지문은 이제 구식이 되었고,

눈동자, 홍채를 가지고 신원을 확인할 수도 있고 병도 읽어낼 수 있다.

지문은 그 손가락만 잘라 범죄에 악용되기도 하는 고로,

요즘은 손등의 혈관분포를 가지고 신원 확인하는 방법도 사용하는 걸 봤다.

그리고 임상에 적용하는 예로는 CST라고 하여 두개천골 요법, 수진(手診), 전신조정술, 동종요법 등 여러가지가 있다.

 

사람의 심장소리를 임상에 적용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성의 문제일 것 같다.

심장 박동소리말고도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와 병인을 구분해 내는 많은 편리한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게 아닐까?

요즘은 심전도검사에서만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윽고 미밍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미밍의 심장 소리를 듣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는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녀의 심장은 다른 사람들의 심장과 달랐다. 더 자주, 더 음악소리처럼 고동쳤다.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불렀다.(174쪽)

 

 

다만 이 문장은 작가의 필력과 내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이 심장 뛰는 소리는 한때 볼 수 없었던 틴윈만이 구사할 수 있는 유용한 진단법이고,

미밍의 심장소리 또한 틴윈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치료약인 것이다.

 

이쯤에서 좀 무거운 얘기를 해야겠다.

 

우리는 삶을 사는 것과 관련하여서만,

내가 주도적인지를 놓고 얘기하지,

태어나고 죽는 건 나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태어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이것도 전생 운운하며 업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논외로 하고),

죽는건 나의 의지가 개입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줄리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물리적으로 멀고 가까운 것은 정말로 그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난 그녀의 아름다움과 빛나는 표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종종 궁금했어요. 아름다움과 추함을 결정짓는 것은 코의 크기도 아니고 피부색도 아니며, 입술이나 눈 모양도 아니에요.ㆍㆍㆍㆍㆍㆍ

그건 사랑이에요. 사랑은 우리를 아름답게 해요.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 그것도 조건 없이 사랑하는데 추한 사람이 있을까요?ㆍㆍㆍㆍㆍㆍ"(353쪽)

"그래요, 줄리아. 사실이라고 해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설명할 수 없어도 사실일 수 있죠."(387쪽)

다시 말해, 한날 한시에 같이 죽는걸, 사랑의 한 방법이라고 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보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고,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때로는 상대를 시험하기도 하고,

사랑은 가시밭길처럼 험난할 때도 있으며,

때로는 추한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어렵기도 하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 순간 그곳에서 혼자인지 함께인지, 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멀고 가까운 것은 간절히 원한다면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고 나 또한 믿는다.

하지만, 내가 주도적인지, 는 관건이다.

내가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내고 통과했을때만이,

우린 삶을 살았다 또는 사랑을 했다,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별자리보다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181쪽)' 같은 구절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 책은, 나를 비롯해서...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만 믿는 요즘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종을 울린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 순간 그곳에서 혼자이더라도, 

매순간순간을 내가 주도적으로 운용하여 즐기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강권한다, ㅋ~.

 

끝으로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었던게 있는데,

하트(heart)를 어느부분에선 마음, 어느부분에선 심장, 어느부분에선 가슴 등으로 일관성 없이 사용한다.

몸이라는 의미의 반대로 사용될 때는 심장으로,

감정과 관련하여 사용될때는 마음으로, 

신체를 머리, 가슴, 배와 같이 구획을 나눌때는 가슴으로 사용하는게 적절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이책은 자기 주도적으로 사랑하고 살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으로 죽음을 택하였다는 점에서,

내게는 무시무시한 책이다.

 

근간에 보기드문 수작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동안 내가 읽은 책 중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그런 책이지만,

이 사람의 글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훌륭하더라도,

후속작을 읽겠냐고 묻는다면 '그저 웃지요' 정도로 대답하겠다.

내게는 너무 무시무시한 책이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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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31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31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31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31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4-08-02 09:40   좋아요 0 | URL
책이 저렇게 오다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꾼님 저 책을 보니 저도 속상하네요 ㅡ..ㅡ
까탈스럽다고 하시지만 저런 책을 보고 독서를 하시다니 거의 부처 정도의 위대한 인격이세요 ㅎ

저도 혼자 하는 걸 무척 좋아해요 이 세상 내 멋대로 하는 것이 한계가 얼마나 많은 데 사는 스타일까지 사람들 땜에 바꿔야 한다면 이건 못 참아요 ㅋ
우리는 우리 식데로 살아요 ㅋ 같은 하늘 아래에서요 ㅎ

sslmo 2014-08-02 10:3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책이 말이죠, 저 표지가 저렇게 로맨틱하게 보는 이에 따라 유아틱하게 그려져서 그렇지,
제 저런 투덜거림을 잠재울만큼 괜찮습니다여.

그나저나 교주님, 오늘 칠월칠석이래요.
견우랑 직녀도 일년에 한번씩은 만난다는데,
삼복 더위에 열공하시는 울 교주님 언제 보양식 대접할 기회 함 주시죠, 넷~?^^

루쉰P 2014-08-02 21:33   좋아요 0 | URL
ㅋㅋ 양철나무꾼님을 뵙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도 굴뚝 같지만 교주의 입장에서 아직은 아니에요. 이건 내면적인 약속이에요. ㅋ
저 시험 합격해서 뵈러 갈거에요. ㅎ 진짜에요. 교주 클라스가 있잖아요. 전 아직 번데기에요. 화려하게 날아올라 양철나무꾼님을 뵈러 가야죠!!!!
가서 맛난 거 제가 사드릴거에요. 후후후 전 여자에게 얻어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도 너무 많이 주셨잖아요. 저 그거 너무 감사해요. 읽어야 하는 데 대신 먼지 안 묻도록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닦아요. 그리고 같이 보내주신 편지도 소중하고 간직하고 있어요. ㅋ
제가 이래뵈도 교주입니다. 후후후 한번 제가 실력 보여드려야죠. 합격하는 날은 곧 나무꾼님이 고기 드시게 되는 날이라 마음 먹고 계세요. 후후후후 진짜 쏩니다. ㅋ

sslmo 2014-08-04 15:19   좋아요 0 | URL
다 좋은데여~.
교주님 클라스가 아니고 레벨아닌가여?
글구 전 여자 아니고 아줌인데...ㅋ~.

더운 여름 엉덩이에 땀띠 나지 마시고,
콧바람도 쐬고 하면서 쉬엄쉬엄 하자구요.
헤에~^____________^
 
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살림)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도 각기 다른 가정 환경과 성장 배경, 지방색, 학력 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향하여 '입장 바꿔 생각해본다'는 뜻의 '역지사지'를 생각해 보거나,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이니까 가섭이 웃었다'는 뜻의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어 보이겠다는건,

그 생각이나 미소만으로 가상한 일이지만,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했는지, 를 놓고 보자면 대부분의 대답은 '글쎄올시다'정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과 미소를 수많은 말줄임표가 대신해서 그렇지,

그래서 우리는 입장바꿔 생각하는게 아니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일수도 있고,

가섭이 웃은 그 웃음은 부처님과 연꽃 때문이 아니라 햇살이 눈부셔서 얼굴을 찡그린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글로 풀어쓰거나 말로 뱉어낸게 아닌 이상,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따위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호감을 갖고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얘기이지만,

내가 그(또는 그녀)가 아닌 이상, 속속들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건 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일부 과묵한 사람들이 상대를 향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말줄임표나 기타 등등, 이하 생략으로 대신하고서는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데,

상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하는 '관심법'의 대가 '궁예'가 아니다.

조곤조곤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로 바뀌어야 한다...'情'은, ㅋ~.

 

이 책은 꼭 분류를 하자면 로맨스 소설로 분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간의 로맨스소설이랑 다른점은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과,

인간의 품위있는 죽음에 대해서 그간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선하고 참신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의 설정이 완벽하게 그럴듯 하지는 않다.

가장 어설펐던 것은,

척수손상으로 인한 사지마비인 남자 주인공과의 대비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였겠지만,

여자주인공의 할아버지를 뇌졸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만들어 버리고,

그런 할아버지를 한 집안에서 며느리가 간호를 한다는 설정이다.

 

근데 영국은 의료보험제도가 아주 발달한 나라여서, 외국인에게도 의료보험혜택이 주어지는 나라로 알고 있다.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한명의 일손이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할아버지를 요양시설에 보내고,

나머지 한명의 일손이 생업에 뛰어드는게 더 현실적인 설정이었을 것 같다.

더구나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배변 컨트롤을 하고 하는 것은,

가족이니까 성적인 것을 배제한다는 것은 이성의 일일뿐, 실상이 되면 쉬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영국의 가정 생활이나 풍습 따위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므로 이쯤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픽션이라는 건 재미를 위하여 가감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을 칭찬해주고 싶다.

의학용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자칫하면 이야기의 흐름이 깨질 수도 있었을텐데,

이야기의 흐름을 깨지않고 찬찬하게 잘 번역해 나갔다.

다만 한가지 정강이에 부목을 대고 40킬로미터를 뛰는 일정을 소화해 낼 수는 없다.

'정강이부목'이란 일종의 피로골절과 구분하기 힘든 증후군으로,

마라톤 등의 오래달리기나 점프 등의 높이 뛰기 후에 정강이 부위에 부목을 댄 것처럼 뻣뻣하게 느껴지는 증상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강이에 댄 부목의 최근 상황이 아니라, 정강이 부목 증후군의 차도라고 하는게 적절하겠다.

이 소설 전체를 통하여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듣게 되는 상황을 표현한 부분이었다.

그때 지휘자가 지휘봉을 내리자 갑자기 만물이 순전한 소리가 되었다. 음악이 실체가 있는 사물처럼 느껴졌다. 음악은 내 귀에만 머물지 않았고, 온몸을 타고 나를 에워싸고 흐르며 온 감각이 공명하게 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윌은 이런 체험을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다. 지루할 거라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서 들어본 적이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였다.

  그리고 음악으로 인해 내 상상력이 뜻밖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앉아 있자니 몇 년 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해묵은 감정들이 나를 덮쳤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상이 내 몸에서 술술 뽑아져 나왔다. 마치 나의 지각 능력 자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쭉쭉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멈추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슬며시 윌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자기 자신을 잊은 듯 황홀경에 에워싸여 있었다.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갑자기 그를 보는 게 무서웠다. 그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감정들이 두려워졌다. 심연처럼 깊은 상실. 그 두려움의 바닥이 겁이 났다. 지금까지 살아온 윌 트레이너의 삶은 내 체험을 까마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내가 뭔데 그에게 삶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논할 수 있단 말인가?(233~234쪽)

 

내가 클래식 음악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건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였다.

그때 그 느낌이 꼭 저랬다, 음악으로 온몸을 샤워하는 것 같았다.

음악은 내 귀에만 머물지 않았고, 온몸을 타고 나를 에워싸고 흐르며 온 감각이 공명하게 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암튼,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착각하에,

다른 사람의 삶을 내 입맛에 맞게 바꿔 놓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윈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적절한 예는 아닐 수 있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도록 살아온 나날만큼 습관에 길이 들어서,

그 습관에 의해서 기준을 만들고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상대방의 날개를 꺾고 잘라서 내 좁은 틀 안에 가두려하는 건 하는 건 아닐까 반성해 본다.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다는 것이고,

그건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상대에게 공감시키고 이해시키고 싶다는 얘기이고,

때문에 수다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대가 나에 맞추어 바뀌길 바라지 않고,

내 스스로가 상대에 맞추어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강요하는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저 위 박스의 윌의 간병인 친구의 말처럼,

선택권을 박탈하거나 나를 강요하는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동안 '알겠어(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자주 사용했었다.

상대방의 얘기가 지루하게 늘어진다 싶거나,

상황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싶을 때 사용했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많은 '알겠어요'중에서 진짜 '알았어(요)'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누군가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머리나 가슴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몸의 경험, 체험으로까지 연결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온몸으로 통과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일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역지사지'나 '염화시중'을 놓고 내가 충분히 공감했는지 '미지수'라고 한것은 그런 의미에서이다.

생각이나 미소라는건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이라고 하기엔,

말줄임표 속의 의미가 천가지 만가지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보았던,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인가(?)의 '사랑해요'를 뜻하는 말이라는 'I see you'가 훨씬 설득력인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한 것만 믿는다고 하면...왠지 야박한것 같지만,

공감이나 이해는 그들 사이의 공통 분모가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고,

같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한 것보다 더 실제적이고 실체적인건 없다.

 

난 그동안 나이나 연륜을 내세워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봤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갖혀서 연연해 하는 사람도 봤고,

고집이 쇠고집이어서 빡빡우기다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리 무리 속에서 따돌림을 받는 그런 백조 같은 사람도 봤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나인 것은 맞지만, 세상은 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혼자서 살아가고 싶다면 무인도로 가든지,

아니면, 공주나 왕자...아니 적어도 성의 주인 정도 취급은 받을 수 있는 성주 정도는 되어야 하고,

이도저도 아니면, 신선이 되는 수밖에 없다, ㅋ~.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얘기는 뭐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내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내가 읽기엔 이 소설이 그동안 읽던 장르소설과 비교하여 군데 군데 허점 투성이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로맨스소설에 별반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인 모냥이다,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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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4-07-25 18:02   좋아요 0 | URL
공감 1번, 귀감이되는 글, 공감백배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하는 글이었어요
좋은 글에 감사를...

하늘바람 2014-07-26 07: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생각 많이 해요 특히 함께 웃고 지나갔거나. 침묵일때 우린 동상이몽일거라는 음악 샤워한 느낌 느껴보고 싶네요 많이 더운 요즘 건강 조심 하세요
 
지하철 헌화가 - 번역가 이종인의 책과 인생에 대한 따뜻한 기록
이종인 지음 / 즐거운상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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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욕심이 조금씩 작아지고 줄어드는 것을 느낄 때,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싶어 씁쓸하다.

이건 다시 말하면, 마음을 몸이 못 따라준다는 얘기지만,

언행이 불일치하는것보다는 욕심을 줄이는게 나으니까,

쿨하게 인정하고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한때, 활자화된것이라면 '모조리 읽어주겠어'라고 의욕을 부리며 달려들던 내가,

나오는 책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자 장르소설을 골라 읽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책을 보는 시선이 변해서인지,

내가 좋아하던 장르소설 번역가가 더 이상 새로운 번역물을 내놓지 않으셔서 인지,

난 다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게 되리라 기대했었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난 더 편협하고 협소해졌다.

 

요즘 읽는 책들은 동서양의 고전이나 문ㆍ사ㆍ철로 얘기되는 인문, 또는 전공 관련 서적들인데,

종류가 폭넓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속도는 구렁이 담넘어가듯 더뎌졌고,

책을 한권 잡으면 더 꼼꼼히 끼고 앉았는다.

 

그러면서도 책을 들이는 습관은 여전해서,

읽지는 않고 책들로 탑을 쌓아올리면서,

테트리스를 해서 색깔이 맞춰지면 한줄씩 없어지는 그런 환상을 꿈꿀 정도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이 점점 벌어져만 간다, ㅋ~.

 

그런데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읽지도 않은 책을 쌓아두고서도, 또 책을 들이는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심리를 가지고 있나 보다.

 

책 속에서 '적독'이란 단어를 발견하고 위안을 느끼는 것까지 나와 똑같다, ㅋ~.

 

사설이 길었다.

내가 이 책 '지하철 헌화가'를 읽게 된 것은,

바로 전에 읽었던 '노먼 매클린'의 '흐르는 강물처럼'의 번역이 너무 좋아서였다.

난 책을 읽다가 어느 한 사람에게 필이 꽂히면, 그 사람의 전작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전에 '번역은 내운명'을 읽은 다음 장만해 두고는 잊고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의 필력을 자랑하는 번역가라면 내가 진작 알아보고,

열을 올리고 설레발을 쳤어야 하는데,

이상하다 싶어 되짚어 보니까,

 

언젠가 여러명이 같이 번역했었던 '뷰티풀 마인드'라는 책이 좀 아니어서,

 

그렇게 잊혀져 버린 것이었다.

 

솔직히 산문집 한권을 가지고, 리뷰를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볍게 코멘트를 하거나,

여러권을 함께 굴비 듯는 엮어 페이퍼로 쓸 수도 있었지만,

꼭 리뷰로 쓰고 싶었던 이유는,

번역과 일상을 대하는 그의 시선이 따뜻하고, 써내려가는 어조가 정겨워서 이다.

 

그동안 출판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번역을 하거나, 책을 쓰거나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지만,

알라딘서재, 이 동네에도 책을 좋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들 하지만,

이종인처럼 자기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본인은 그저 묵묵히 할일을 할 뿐이어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밌어서, 즐기며 일을 하는 사람은 달라보일 수밖에 없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이 다른 걸 어쩌겠나?

 

이것은 단지 책을 읽거나 보는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책에서 읽거나 본 것을 내것으로 만들려는 사람,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다른 점이다.

 

사람들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책을 무조건 많이 읽는 습관을 기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책 속에 무슨 길이 있나?

책은 우리를 그저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할뿐이다.

어느 책을 읽을 것인가, 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고,

그 책을 읽으면서어떤 관점을 취사 선택할지, 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고,

그냥 선택을 하고 말 것인지,

실생활에 적용시킬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다.

 

예를 들자면,

'그가 사랑하니까 결혼한다'고 했다면,

그를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했겠지만,

책과 글이 곧 삶이어서, 흥에 겨워 기꺼이 번역을 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진 못했을 것 같다.

근데, 그는 '결혼하고 나니까 사랑하게 되더라'가 더 흔하더라, 라는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함으로써,

책과 글을 삶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ㅋ~.

이집트의 고대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최고의 여신 이시스가 자연을 만들고 이어 최초의 남자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자연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자 여신은 최초의 여자를 탄생시켰다. 여자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남자는 그제서야 비로소 인생을 견딜 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ㆍㆍㆍㆍㆍㆍ나는 그런 아름다움과 생의 의욕을 번역에서 느낀다. 활발하게 걸어가는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에로스의 감정이 내 생활 속에서 펑펑 솟구친다. 이렇게 재미나고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을 너무 늦게 시작한 게 후회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진정한 직업이라는 확신이 생겼으니, 기왕 늦게 시작한거 더 오래 더 많이 번역하자는 각오를 다진다.(61쪽)

 

또 한가지, 무조건 많이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간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 분은 번역가니까 제대로 된 번역이랑 관련하여 많이 고민을 하셨을테고,

그리하여 책을 묵혀뒀다가 또 읽고 또 읽고 했다는 얘기가 이 책의 여러 곳에 등장한다.

 

그동안의 난 책을 많이 들이는 '적독'과 싫증을 잘 내는 습관 때문에,

아무리 좋고 재미난 책이어도 두번 다시 읽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같은 책을 백번 읽지 않고 백권의 다른 책을 읽더라도,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뜻을 저절로 알게 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분 같은 훌륭한 번역가도,

도잠같은 대문장가의 '불구심해'(깊이 파고 들지는 않았다)를 讀書百遍義自見의 연장선 상으로 보고 항상 화두로 삼았다고 하니,

읽는데 방점을 두지 말고,

읽고 깨달아 마음을 움직이고 그리하여 실천하는 것까지로 시야를 넓혀야 겠다.

 

또 한가지,

책을 읽으면서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하겠다.

그는 이걸

'사실 나도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할려고 애쓴다. 그리고 기분 좋게 취한 날에는 때때로 사정 같은 눈물을 흘린다.(156쪽)' 라고 얘기한다.

그는 이걸 몰입, 정화 같은 단어로 설명한다.

난 그때마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눈물이 필요한 순간이 언제인지, 사정이 필요한 순간이 언제인지, 는 모르겠다.

하지만, 몰입하였다가 흘리는 눈물 또는 사정을 통하여 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그런 후의 나는 이미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도 악몽에 시달린다.

그는 프로이트 이론을 들먹이며, 자체 치유에 성공한 경험을 얘기한다.

지극히 무미건조하게 얘기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이론을 들먹이고,

'~하더라'하는 '낯설게하기'라는 기법을 써서 그렇지,

그가 악몽으로 얼마나 고민했을지는 악몽으로 고민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다.

 

지금 악몽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프로이트의 이론 따위는 알지 못하는 고로, 들먹일 수 없고,

다시 그 악몽 속으로 들어가야 해결을 할 수 있다는 귀뜸을 나도 해주고 싶다.

혼자 들어가기 무섭다면, 나를 끌고 들어가면 된다.

그 악몽 속으로 들어가 해결을 보면 되는 거다, ㅋ~.

 

암튼,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좁게는 책에 관해서고,

넓게는 삶이나 인생 전반에 관해서,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고,

또 다시 얘기하자면, 기재필취期在必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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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22 17:24   좋아요 0 | URL
맞어요. 자기가 하는 일에 있어서 재밌어서 해야 해요.
전 양철나무꾼님 서재에 와서 댓글을 다는 게 너무 재밌어요. 푸하
사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시간이 정지된 것인가, 아님 생명이 정지된 것인가 하고 놀랄 때가 많아요.
하루의 시간은 무척 빠르게 지나고 공부할 책들은 쌓여만 가고 푸하하하하
한 10분 정도는 공부해야 책들을 노려보며 대화를 할 때도 있습니다.
흠...전 요즘 한 달 한 권은 리뷰를 쓸 수 있는 책을 읽고, 나머지는 제가 정말 재밌게 할 수 있는 직업을 위한 공부에 열중하고 있어요. 음 하하하
교주라고 한다면 이 정도의 파괴력은 있어야 하겠지요 음 하하하
비 와요. 나무꾼님 당분간 조심히 다니셔요 ㅎ
 
흐르는 강물처럼
노먼 F. 매클린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완벽하다: 결함이 없이 완전하다.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완벽한 책이란 어떤 책일까?

완벽한 책이란, 좋은 책일 수도 있고, 훌륭한 책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책일 수도 있다.

언제부턴가 '완벽함'이란 좋음, 훌륭함, 아름다움, 이딴 것과는 별개로,

무미건조한데다가 아무맛이 없이 맹숭맹숭하기만 한데,

그 맛이 더할 것이 없는게 아니라, 더 이상 뺄것이 없는,

간결하게 응축된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킬 수 있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나의 내공이 부족하여,

다양한 형태의 책들을 접할 기회가 부족한 것이 한몫하였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은 기억에 남는 것이 '애니프루'의 '시핑뉴스'였다.

 

그런 내게,

우리나라에서 근간에 재출간된 이 책의 서문을 애니프루가 썼다고 하니, 혹할 수밖에 없었다.

 

역자의 말과, 애니프루의 서문과, 저자의 감사의 말 등이 장황하게 책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영화로 각색되어 유명해져서 그런지,

그런 외적인 요소들을 쭈욱 연관시켜 읽다 보니까,

무미건조하여 아무맛이 없이 맹숭맹숭하여, 더 이상 뺄것이 없다, 는 그런 맛을 처음엔 느낄 수 없었다.

 

무궁무진한가 하면 흥미진진하기도 한데,

옥토를 흐르는가 하면,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결코 끊기지도 않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꾸준한 수량을 자랑한다.

4대강처럼 녹조, 적조, 부영양화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소진하고 나면 재충전될 시간을 염려할 필요 또한 없으며,

새록새록 샘솟는,

소진하거나 탕진하지도 않고,

범람하거나 고갈되지도 않고,

그렇게 안으로 흐르는 꾸준한 넉넉함에 관하여서 말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종교와 플라이 낚시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39쪽)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을 가만히 읽고 있을라치면, 처음에 삶은 종교나 플라이 낚시의 동의어인가 싶었다가는,

이내 흐르는 세월이나 흐르는 강물의 동의어가 아닐까 싶아진다.

그리고 결국, 흐르는 세월이나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고 변해가는 삶 속에서,

변하되 변하지 않는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깨달아 갈 즈음,

이 책은 '나는 언제나 강물 소리에 사로잡힌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때문에,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아름답다'라는 감동의 여운으로 충만한 것이,

종교와 플라이 낚시에 관한 것인지,

흐르는 세월이나 흐르는 강물에 관한 것인지,

흐르고 변해가는 삶 속에서,

변하되 변하지 않는 '사랑'에 관한 것인지, 를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흘렀다.

 

그런 만큼 언뜻보기에 이 책의 주제는,

종교나 플라이 낚시처럼 보이기도 하고, 

흐르는 세월이나 강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흐르고 변해가는 삶 속에서 변하되 변하지 않는 '사랑'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다보면,

이 책의 진짜 주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걸 깨닫게 된다.

부처를 만나게 되면 내 안에 있는 부처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고,

조사를 만나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조사에 대한 편견을 배제할때만이,

진정한 부처와 조사를 만날 수 있게 되고,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다.

 

다시말해,

기준을 제대로 정할때,

자신의 현재 위치를 예측할 수 있고,

상대사물이나 상대방의 위치를 비교,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이건 무엇을 얘기하냐 하면,

상대사물이나 상대방의 위치를 비교, 가늠하여...

의미를 부여해 주고 이름을 불러주기 이전에는 '한낱'이었던 것들이,

의미를 부여해 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온통'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녀는 언제나 닐을 '버스터'라고 불렀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남자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려면 머리에 쥐가 날 것이다.(121쪽)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 속에는,

내 안에 있는 부처와 조사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지워야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 말은 다른 의미로 하나를 포기하여야만, 다른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손에 모두를 쥐고 있다가 넘어지면, 코가 깨지니 말이다.

힘은 아무 데서나 발휘하라고 있는게 아니고, 진정한 힘이란 그것을 어디다 쓸 것인지 아는 데서 나온다.(46쪽)

 

"그걸 뭐 하러 신경 써?ㆍㆍㆍㆍㆍㆍ플라이 두세 개를 나무에다 갖다 바치지 않고눈 하루 몫만큼의 낚시를 했다고 할 수 없어. 과감하게 물고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낚시는 영 못하는 거야.ㆍㆍㆍㆍㆍㆍ"(103쪽)

 

이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를 명확히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사람이나 사물을 객관화 한다는 의미의기도 하고,

이건 바꾸어 말하면, 삶에서 죽음을 분리해 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동안 공기나 햇살 따위가 없으면 살 수 없으면서도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통해서 형태를 이루고 정형화 되는 것이면서도,

몸의 일부가 아파서 내게서 분리되는 경험을 해보기 전에는,인식하지 못했었다.

 

하루를 살아간다는 얘긴, 그 하루만큼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얘기이다.

삶이 자연에서 비롯되었듯,

죽어 사람은 자연으로 분해되어 흡수되고 스며들고 물들어간다.

때문에 사람이고 사물이고, 에 대하여 알게 되는 방법 중 하나는 탄생을 생각해 보는 것일테고,

또 하나는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것일게다.

나는 무더운 오후 더위 속에서 비버는 잊어버리고 맥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비버를 잊어버리는 김에 처남과 올드 로하이드도 함께 잊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여기 이렇게 오래 앉아서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ㆍㆍㆍㆍㆍㆍ나는 거기 앉아서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렸으며, 마침내 흘러가는 강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만이 남았다. 강물 위에서 더위의 아지랑이들이 서로 춤을 추었고, 이어 서로 관통해 나가더니 다시 서로 손을 잡고서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마침내 강물을 바라보던 자는 사라져버리고 거기에는 오로지 강물만 남았다.

  심지어 강의 모습도 앙상하게 드러났다.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하류에는 한때 물이 흘렀으나 지금은 메마른 강바닥이 있었다. 어떤 사물에 대하여 알게 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사물의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ㆍㆍㆍㆍㆍㆍ나는 또한 강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깨달음으로써 나 자신이 강이 된다.(134~135쪽)

사람이고 사물이고, 간에... 탄생과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감정이입이고,

또 바꾸어 말하면 역지사지겠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그것이 어떤 이해와 깨달음을 주긴 어렵지 싶다.

ㆍㆍㆍㆍㆍㆍ

"누군가를 도와주기에 너는 너무 젋고 나는 너무 늙었어." 아버지가 말했다. "도움이란 초크체리 젤리 를 발라주거나 돈을 주는 것이 아니야."

 "도움이란." 아버지가 말했다.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또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에게 네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거야. (이 부분에서 문장부호의 한쪽이 빠졌다. 예를 들자면 '"'같은 것이.)

ㆍㆍㆍㆍㆍㆍ

"우리는 그 어떤 사람도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어. 우리가 우리의 일부를 내어주기 싫어하거나, 아니면 그 어떤 부분이든 내어주기를 싫어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종종 그 정말로 필요한 부분은 상대가 원하지 않는거야.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필요한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야.

ㆍㆍㆍㆍㆍㆍ"

"아버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도움이 그처럼 거창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165쪽)

그러니, 아버지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이렇게 추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때문에,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에는,

사람의 마음을 상대로 하는 일에는,

너무 젊거나 너무 늙었다거나, 하는 때가 필요없을 뿐더러,

그것이 우리의 일부인지, 어떤 부분인지, 아니면 온통인지, 를 놓고서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형의 말과 같이,

실제로 그처럼 거창해야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들어줄 수 있는, 열린 귀와 열린 마음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건 말이야, 먼저 뭔가 눈에 띄는 것을 주목하는 거야. 그러(고 나)면 주목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돼. 그 결과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주목하게 돼."

ㆍㆍㆍㆍㆍㆍ"이 지구상에서 햇빛과 그늘처럼 분명한게 또 어디에 있겠어? 하지만 여기서는 날도래들이 알을 까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전까지는, 그놈들이 알을 까는 상류의 물구덩이는 대부분 햇빛 속에 있고, 이 물구덩이는 그늘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183쪽)

여기서 말하는 생각한다는 건, 햇빛과 그늘의 경계처럼, 기준을 정하고 나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위 "생각한다는 건~ 주목하게 돼."의 문장은 인과관계보다는 전후관계나 시간관계를 두드러지게 해야 의미가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늘 속이라 지하에 있는 것 같은 강물의 목소리는 저 앞쪽 햇빛 환한 강물의 목소리와는 다르다. 절벽과 맞닿은 그늘 속에서 강물은 깊어지고 또 심오해진다. 강물은 가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굽이치면서 자기 자신의 뜻을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무슨 말을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러나 저 앞쪽의 강은 수다쟁이처럼 햇빛 환한 세계로 나서면서 다정하고 곰살맞게 굴려고 최선을 다한다. 강은 먼저 이쪽 강가에 인사를 하고 그 다음에는 저쪽 강가에 인사하면서 그 어느 쪽도 무시하지 않는다.

  ㆍㆍㆍㆍㆍㆍ"아주 좋은 놈들이에요?" "그래, 아름다운 놈들이지."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는 '아름다운'이라는 말을 자연스러운 일상용어로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분이었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그런 어법을 자연스럽게 배운 것 같다.

ㆍㆍㆍㆍㆍㆍ"아주 좋은 놈들이야?" "그래요, 아름다운 놈들이지요." 나는 아버지 옆에 앉았다.

ㆍㆍㆍㆍㆍㆍ

"내가 읽던 부분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되어 있어. 참 좋은 말이야. 난 예전에, 처음에 물이 있었다고 생각하곤 했어. 하지만 잘 들어보면, 말씀이 그 물밑에 있다는 것을 듣게 돼."

"그건 아버지가 먼저 목사이고, 그 다음에 낚시꾼이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요." 내가 말했다. "만약 폴에게 물어보면 말씀이 물에서 나왔다고 할 걸요."

"아니야, 넌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해. 물이 말씀 위로 흐르는 거야. 폴도 네게 같은 말을 할거다.ㆍㆍㆍㆍㆍㆍ."(186~188쪽)

 

"저 애는 아름답구나." 동생이 아버지가 방금 낚시를 끝낸 물구덩이에서 그 물고기를 잡았는데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194쪽)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다고 했잖습니까. 아버지께서 더 물어오신다면, 전 그저 그 애가 훌륭한 낚시꾼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넌 그보다 더 잘 알아야 해. 그 애는 아름다운 낚시꾼이었지."

"그래요. 아름다운 낚시꾼이었지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누가 가르쳤는데요."(199쪽)

뭐니 뭐니해도, 이 소설의 백미는 이 부분인 것 같다.

기준을 정하고,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를 정하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지,

흐르는 세월이나 흐르는 강물 따위, 자연은 어느 한쪽도 편가르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거.

 

사랑도 마찬가지인거 같다.

눈멀고 귀먹지 않았으나 맹목적이다, 그냥이다.

내게도 사랑은 그런것이고, 그런 것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몸을 돌려 자신의 침실로 갔다. 어머니는 남자들과 낚싯대와 엽총들로 가득한 집에 살면서 그 침실에서 홀로 자신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과 대면해 왔다. 어머니는 가장 사랑했으나 제일 아는 것이 없었던 막내아들에 대하여 내게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동생은 어머니를 품에 안고서 이어 몸을 뒤로 젖히고서 크게 웃던 이 세상 유일한 남자였다.(198쪽)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고,

그런 소설을 읽느라,

덕분에 정말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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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7-18 13:35   좋아요 1 | URL
더운 여름날 잘 지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