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또는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한국어 글쓰기 강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고종석의 문장1, 2'의 부제들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깜박깜박하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글쓴이의 내적 독백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글을 읽게 될 누군가를 고려하여,

또는 내면의 읊조림을 누군가가 읽어주길 바라며, 쓰여지는게 아닐까 싶다.

때문에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라는 것은,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필이 충만하여 쓴 글이거나,

읽는 사람이 전후사정이나 자신의 감정이나 추억을 약간 가감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난 심미안은 아닌지라,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보다는 약간 어긋나고 허술해야 숨통이 트이고 편안해지는,

아름다움보다는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족속이다보니,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라는 말에 혹해서 강좌를 듣거나 책을 읽을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 했었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난 쌍꺼풀 짙고 촉촉하고 큰 낙타눈은 '느끼남'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글에서도 사르륵 사르륵 모래바람이 날리는게 아니라 찐득찐득함이 묻어나는 늪일 것 같아서 고려대상이 아니었는데,

그 넘의 책베개에 홀려 넘어갔다~--;

 



고종석이라고 하면,

글 잘쓰기로는 내로라하는 사람이고,

이 책이 글쓰기 강연을 활자로 풀어 놓은것이기 때문에,

설정이나 마케팅 상, 글쓰기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려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권 겉표지의 

'모든 뛰어남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고나는 겁니다. 음악이나 수학은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수학이나 음악과는 다릅니다. 충분한 훈련이나 연습으로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글이 나아집니다.'

라는 돌출 글이나,

그 내용을 본문 중에 다시 한번 강조한 걸로 보나, 

글쓰기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려 있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ㅋ~.

 

난 세상의 많은 것들이 훈련이나 연습 등 '엉덩이의 뚱뚱함=엉.뚱.함'이 좌우한다는데 긍정적이지만,

이런 예술적인 분야는 '엉.뚱.함'말고도,

오감외에, 예감이나 영감이라고 부르는 육감, 또 다른 말로 '촉'이라고 하는 그것을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후에 '엉.뚱.함'까지 갖추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요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 같은 추세로 미루었을때,

일일이 글로 옮기느니 잘 편집하여 동영상 강의 따위로 만드는게 접근성이나 효용성 면에서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 낸 걸 보면,

책 뒷표지의 그것처럼 고종석이 '당대의 문장가'란 사실을 이용한 마케팅 전략의 승리라고 밖에 할 수가 없겠다.

 

고종석은 이 글쓰기 강연을 통하여 자신이 글쓰기보다 말하기를 더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강연의 완성도나 강연을 들은 이들의 만족도 또한  높았나 보다.

 

난 책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그들을 통해서 내가 모르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걸 즐긴다.

파리 생활이 그의 이력과 사고 방식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독특하게 느껴졌고,

그 낯선 어색함, 글들여지지 않은 날것의 느낌을, 박학다식함으로 착각했었나 보다.  

그의 전작 '자유의 무늬'를 예로 드는데,

앞부분에 많은 것들이 집중 포진되어 있어 몰입이 잘되는 반면, 중반부로 넘어가면서는 여백도 많아지고 내용도 성글어지고,같은 내용이 되풀이된다.

 

강의를 직접 들은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직접 글을 써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고,

첨삭을 하는 등 실제 자신의 글쓰기에 적용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책으로 읽다보니,

초반부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만들었던 그 매력이 감소하고 나니, 그의 강의가 일반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백이 너무 많고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지루하게 늘어지는 책일 수밖에 없다.

 

규칙이나 공식이 있는 것은 그 규칙이나 공식을 나름 적용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 같은것,

언어감각을 키워야 할 것마저 규칙이나 공식으로 만들어서 틀에 넣다보니,

강의를 하고 들을 때는 폼나고 이해도 빠른것 같지만,

글쓰기는 규칙이나 공식으로 해결안되는 부분도 있고,

그리고 규칙이나 공식이 적용되는 그 부분 마저도,

세월이 흐르면서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규칙이나 공식을 쉽게 외우는 방법을 만들어 전수한다 한들,

실제 적용해 보지 않고서는, 언어감각이 향상되거나 할 리가 없다.

 

그러면서 필사가 별로 도움이 안 되니 하지 말라고 하는데,

고종석은 책 내용을 보니 강의 중에, 은연 중에 자기 스타일을 강요하고 있다.

언어규칙과 공식에 관해서라면 그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국어학자나 언어학자의 수만큼 많은 이견이 분분할 것이다.

더 정리가 잘 되고 간결한 글쓰기 책도 많을 것이다.

 

그는 글쓰기 테크닉을 넘어서, 인문교양과 언어학적 이해에 바탕을 둔 기품있는 글쓰기로,

논리가 있는 명확한 아름다움과 수사학적 아름다움, 아울러 한국어 지식을 얘기하고 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자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기품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좋은 글쓰기란,

맞춤법이나 어법의 정오에 연연하기보다는,

글쓰는 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치장하지 않고 간결하게 표현하여,

쉽고 편안해서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거추장스럽지 않고 편안해서

숨쉬듯 읊조리듯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글을 쓰는 사람의 숨결과 개성이 녹아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일상의 잔잔한 재미가 녹아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고 말이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옮아가,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읽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적어도 누군가가 글을 읽어주길 바라며 쓰여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기품이라는 것, 품격이라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과 읽는 사람의 마음이 어느 한곳 만나는 지점에서, 소통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사람과의 사귐과 닮았다.

자신의 스타일을 테크닉이라는 이름으로, 내지는 빨리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하여, 은연중에 강요하는 그런거 말고,

자신의 어느 한부분, 한지점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질과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본질과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고종석의 문장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고종석의 문장 2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9월

 

 



암튼 그렇다고, 고종석의 꿀꿀함을 '라면송'으로 달래겠다는 나는 뭐람~(,.)

뭐긴 속물이지~!

속물이 뭔지 모르겠고,

속풀이엔 라면이 그만이던데,

 

라면송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상에
쉬운것은 하나도 없지

힘이 들고 지쳐갈땐
천국에서 라면으로 속을 달래봐

 

엊저녁 '세상 쉬운 일 하나도 없지.'어쩌구 저쩌구 하며,

'이럴땐 술집에서 안주나 축내는것도 좋은데'라고 어물쩡 넘어갔다.

그런데, 언어적 기품이 다르다보니,

'술집에서 양주나 축내는것도 좋은데...'라고 알아듣고는 '레알?'하며 되묻는것이다.

'라면송', 이 노래를 일찍 떠올렸다면 '레알?'소리를 들어가며 재차 확인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말이다, ㅋ~.

 

 

 

내츄럴 (Natural) - Special Album
 내츄럴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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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장서의 괴로움'을 읽은 후,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장서의 괴로움'을 읽기 한참 전에,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만나고(고르고) 사귀고(사용하고) 관계를 이어갈까(보관하고) 궁금하던 차에 만난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을 넘겨본 것은, 책 제목 중의 한 글자'식'자를 '혜'자로 내 맘대로 바꾸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데,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갖고 있을 저 고민들에 대해 공감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무언가 혜안을 얻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내게, 지름신과 장서를 부추기는 대책없는, 대략난감한 책으로 분류되어 한쪽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었다.

  지식: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지혜: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장서의 괴로움' 이후 책의 소장에 관해서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을때 내 몸을 누일 땅 한 평은 고사하고,('매장'에 호의적이지 않은 쪽이라~--;)

책 한 권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보관할 곳은 (집안 서재는 고상하게 말 한거고) 방 한쪽에 덩치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와 마음 속일테니,

읽은 책을 두번 다시 읽게될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쌓아두지 말고 없애거나 나눠준다는데는 변함이 없는데,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읽지도 않은 책으로 책탑을 쌓아놓고 책을 또 들이는 일은 지양하고 단출해지자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던 터였는데,

이런 책들의 경우, 읽고싶은 책이 곳곳에 포진해 있으니,

지적허영이고 사치라며 아무리 강하고 모질게 세뇌를 시켜도 허사다~ㅠ.ㅠ

 

조국은 시 이외에 진화심리학에도 관심이 많다.

ㆍㆍㆍㆍㆍㆍ

"제가 읽은 책 중에 동물 실험이 있어요. ㆍㆍㆍㆍㆍㆍ이 새로운 먹이환경에 가장 빨리 적응한 침팬지는 젊은 암컷이었어요. 그리고 젊은 수컷, 그 다음에는 늙은 암컷이 차례로 적응했는데 늙은 수컷만은 마지막까지 기존의 방식으로 먹이를 달라는 거예요. 무슨 이유인지 배가 고파도 끝까지 먹지 않았죠. 늙은 수컷의 비애죠. 이런 모습이 우리 인간에게도 있어요."

 조국은 이 늙은 수컷 침팬지의 모습에서 '나이든 괴팍한 노인'을 보았다고 했다. 남의 말은 듣지않고,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새로운 정보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지겹도록 반복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사람, 남에게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 숨이 막힌다. 대화를 하고 싶어도 귀를 막고 도무지 들으려고 하질 않으니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이가 들면들수록 자신이 만들어놓은 벽은 높아지고, 자신을 둘러싼 껍질은 두꺼워진다. 그들은 자신의 벽을 낮추고 껍질을 깨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껍질과 벽이 있어요. 이것들을 깰 때에만 소통이 되고 변화가 되며 생존이 가능하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사는 거예요. 나이 들어서 자신의 껍질과 벽을 깨는 건 힘들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능력을 길러야 하죠. 그리고 그런 능력은 독서를 통해서 길러집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글, 자신과 감성이 다른 사람의 글, 자신과 전공이 다른 사람의 글, 즉 책을 볼 때 껍질이 부드러워지죠. 껍질이 부드러워져야 다른 게 들어올 거 아닙니까."(19~20쪽)

 

암튼, 이 책'지식인의 서재'와 '장서의 괴로움' 사이에 나의 책에 관한 습관이 크게는 아니고 미묘하게 바뀌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견고해지는건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아니다, 견고하다는건 강하고 젊었을때나 적절한 표현이고,

나이를 먹으면서는 조국의 말처럼 괴팍해 보일 수도 있으니 경계하여야 하겠다.

 

그동안의 난 좀 치열하게 살았었고, 책도 전투하듯 치열하게 읽었었다면,

이제는 책을 즐기며 기꺼워하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의 책이 치열한 경쟁상대였다면,

지금은 오래된 연인같기도 하고 숨겨둔 정부 같을 때도 있으며, 때론 길동무 같거나 동반자 같을때도 있다.

 

 

실은, 오늘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마찰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위태로웠는데, 그때마다 서로 서로 외면하거나 비껴가 버리고 말았었다.

그런데, 번데가 앞에서 주름잡고,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 한다고,

학사까지 합하면 25년차, 임상만도 19년차인 내 앞에서 매번 모든 통증을 경락으로 연관시키려는것이나 매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묻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주겠는데,

'니가 경락을 아니?'로 시작해서 '니가 경락을 무시하는 듯'으로 이어지길래,

기가 차서 '둘이 아는 경락이 다른건가보다'라면서 '팽~'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언젠가 다른 대형 포털에 써서 이곳에 비밀 글로 돌려놨었던 '그녀의 취향' 이라는 글을 언급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이 타성에 젖어서도 안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일이,

다시 말해서, 내 경우에 치료가 적어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신이 드는건, 환자와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다.

경락을 자극하면 그 경락에 맞는 리액션이, 피드백이 있게 마련이다.

리액션을 보면서, 예후를 판단한다.

그냥 대충하는 대증치료는 아닌 것이다.

그런 내게 '경락을 아느냐'를 되풀이 하여 묻는다는 것은,

물론 그게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많은 것을 내포한 중의적인 의미라고 그 자신을 합리화 한다고 하더라도,

날 책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요즘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이고, 나의 겉모습만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맥락을 같이 하는 분은 북 디자이너 정병규 님이시다.

"책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고, 성장에 도움이 되고,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고, 심지어는 삶의 요령까지 가르쳐준다는 식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이라는 건 그 자체로 근본적인 매력이 있어서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는 안목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책이 삶의 일부로 들어오거든요. 그때 하는 것이 독서입니다. 게다가 책을 읽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얼마나 좋은 삶이겠어요?"(145쪽)

 

그런 의미에서 마음만 연다면 환자와도 교감을 하고 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자극, 액션이란걸 가하면 리액션, 피드백이 있게 마련인데,

그게 자꾸 어긋나거나 비껴가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을 열지 못했다는 얘기이니...반성을 해야 하는 걸까?

 

근데, 난 조국이 말한 '나이 든 괴팍한 노인'이 연상된다.

자신의 껍질과 벽을 깼는데도,  상대방의 껍질과 벽이 장애물로 여겨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 전까지의 난,

'벽은 넘으라고 있는거야, 폴짝~!'

그랬겠지만,

이젠 껍질과 벽을 깬 연후라, 웅크리고 뒤로 물러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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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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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애정에 마지않던 신형철 님이 품절남이 되는 날이란다.

이 글은 그러니까 축하하는 의미루다가 적는 리뷰가 되시겠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 하고싶은 말이 좀 많지만 생략하고,

이들의 닭살돋는 애정행각에 눈 흘기고 흉보고 싶지만 그것도 생략하고,

결혼을 축하해주는 의미루다가 부조했다 생각하고 땡치려고 한다.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면, 이 책의 제목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다.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연재된 글을 묶어서 낸 것이라는데,

연재당시, 문학평론가라는 추신을 늘 달았다고 엄살을 부린다.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영화평론을 쓸 수는 없다. 영화를 일종의 활동서사로 간주하고 문학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물어보려 한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고."

 

내가 여기서 딴지를 거는 부분은 '제목'되시겠다.

실험이라는것은,

실제로 해보는 것이라는 얘기라고 해도 그렇고,

과학 실험이라고 해도 그렇고,

어떤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시도해 보는 것이어도 그렇고,

해본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지, 정확해야 한다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고귀한 감정이기는 하지만,

항상 정확해야 하거나, 참이어야 하는 가치 명제는 아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했을때,

'변하니까 사랑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게 사람이 성숙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나의 견해일뿐이다.

사랑이 '참 또는 거짓', '맞다 또는 틀리다' 따위의 정오를 구분지을 수 있는 가치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정확한'이나 '부정확한' 따위의 수식어로 수식을 하려 들면 안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

영민한 마케터의 돌출 효과를 노린 일종의 마케팅 전략인줄 알았다.

그런데 네개로 나눈 주제 중에서 한 꼭지 전체를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할 정도인걸 보면...

돌출효과나 마케팅 전략으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겠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近似'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문예중앙,2012)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최근에 본 두 편의 영화는 사랑받기 위해 삶과 타협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헌사처럼 보였다.(27쪽)

 

       말

            - 장 승 리 -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 봐
안길까 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본문의 내용은 더 구체적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장승리의 시 '말'의 전문도 옮겼다.

 

간혹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보통 더이상 더할 것이 없는 상태를 완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더이상 뺄 것이 없을 정도로 응축이키고 줄인 것을 '본질'이라고 봐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결국, 더하거나 뺄게 없는, 군더더기가 없는 상태가 본질이 되는 것이고,

그게 사람의 마음에 적용됐을땐 '본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장승리의 시와 저 상자안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은 결국 '정확한'이 아니라,

본심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이면,

그 연꽃을 보고 부처를 향해 미소로 화답해 주는 누군가를 '아무나'가 아닌,

자기 입맛에 맞는 그(또는 그녀)로 골라갖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이다.

책이야 공부하듯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그냥 보고싶다는 거다. 

영화를 공부하듯, 아트하듯, 내지는 평론하듯 볼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거다.

내게 적어도 영화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보고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고,

보다가 쓰러져 잠이 들 수도 있고,

아무 것도 못 느끼고 잠이 들 수도 있다.

꼭 뭔가를 느껴야 영화를 제대로 못 것은 아니며,

더 더욱 영화에서 얘기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방과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글로 적힌 책이 이런 기능이 제한적이라면,

영화는 글이 말로 변하고, 시각이 공감각으로 변하면서,

개인의 주관이 자유자재로 가감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밤하늘의 별만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보고도 저마다 다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와 느낌이 일치하기도 쉽지 않지만,

일치했다고 하여, 그 누군가가 '정확하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애기했듯 그 누군가마저도 '기준'이 되는 가치는 아니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어느 누구는 야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고,

어느 누군 남자의 찌질함을 잘 표현해 내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고,

어느 누군 삶의 본질을 파고들려는 영화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다 다른 얘기를 한다고 하여,

이 영화가 다른 감독의 작품이겠는가?

아니면, 이들의 얘기 중에 영화를 잘못 본 오답 케이스가 있겠는가?

 

삶이란,

사랑이란,

어쩜 정확하게 실험 내지는 실행하는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삶 또는 사랑은,

몇마디 뭉뚱그린 말과 애매한 미소,

그리고 손짓, 몸짓의 성의 없는 허공에의 시도,

그 뒤에 오는 무수한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못갖춘 마디처럼,

생각지도 않았는데 문득 떠오른것마냥,

하지만 차오르는 것을,

슬픔 또는 눈물을 눌러삼키듯, 그렇게 꼭꼭 눌러삼켜야 할 날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각자 개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고,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을 하고,

이해를 구하고 공감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비껴가기도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랑한다고 하여,

진심이 오해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진심이 오랫동안 오해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은,

말 그대로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니까 말이다.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을,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독선이다.

 

그리고 적어도 영화는 각자 취향껏 보고 싶은 영화를 보면 되는 것이다.

책을 취향껏 골라 보면 되는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적어도 독재국가 내지는 독재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눈멀고 귀먹어 결혼이라는 구렁텅이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선남선녀들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ㅋ~.

 

근데 정확한게 마냥 좋기만 한가?

내겐 어째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런 의미에서 난 비어있다는 말이 좋다, 채워가질 수 있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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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상에서 난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유니크한 존재이고 싶을때도 있지만,

남들과 별반 다를바 없는 똑같은 생각을 하는 보편적인 사람이란 사실이 커다란 위안이기도 하다.

이 다름과 닮음을,

이 따로 또 같이를,

일상에 적용시키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 비슷 비슷하다는 것이지만,

비슷비슷해도 똑같지는 않다.

설사 똑같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하거나 느낄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잘ㆍ잘못을 얘기하거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한때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생각했었던 적이 있다.

이론상으론 공동생산, 공동 분배를 통해서 똑같이 모든게 이루어지는 평등한 사회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사람이 개개인마다 개성과 능력을 달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존재일때나 가능한 설정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한 사회는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성과나 결과가 차이가 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개개인의 사유재산이 성립될 수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이 되고 만다.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낀다'는 말이 있고,

'부부도 오래 살다보면 닮는다'는 말이 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났더라도,

생김새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개성과 성격이 똑같을 수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반면,

부부로 같이 살면서 개성과 성격을 보고 자연스레 닮아가다보면,

다시 말해, 한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으며 같은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생김새나 분위기도 자연스레 닮아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심전심' 나와 닮은 사람을 꿈꾸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며 좋아했었지만,

이 책에서처럼 피부색이나 언어 따위로 인한 차별이 없는 평등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부부관계라는 것도 없이 배우자는 신청을 하면 골라주고,

아이도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배급에 의해,

음식도 맛이 없더라도 정성과 애정이 담긴 그런것이 아니라,

온동네사람들이 배분된 같은 음식을 먹고 한다면,

생긴것은 조금씩 달라도 누구에게서도 다른점을 찾아볼 수 없는 '늘같은상태'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

 

" ㆍㆍㆍㆍㆍㆍ사람들 역시 한때 모든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너나 나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한때 긍지, 슬픔, 그리고ㆍㆍㆍㆍㆍㆍ."

"그리고 사랑."

조너스는 말을 이으면서 자신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던 그 가족 풍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고통."

조너스는 다시 병사를 떠올렸다.

"기억을 품는게 힘든 가장 큰 이유는 고통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그러니까 기억은 함께 나눌 필요가 있어."(262쪽)

 

살다보면 오래 기억하고 싶은 기분 좋은 기억도 있지만, 너무 슬프고 아파 빨리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한때 난 기억력이 비상하다고 좋아했었다.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것은 기분 좋은 추억 뿐만 아니라 슬픈 추억을 향하여서도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하는 것이어서,

선별하여 적용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기분 좋은 한때, 이 책에서 사랑이라고 나오는 그 한때는, 슬픈 한때와 대구를 이루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어우러져 '기억'이 된다.

이를테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서 배가 되고 반이 되는 그런 경험 말이다.

 

반대로 '늘 같음 상태'라는 것은 그것이 기분 좋은 추억으로만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늘 기분 좋은 상태의 연속이면,

각인되는 것이 없을 것이고,

때문에 기억력이 좋고 나쁘고, 를 떠나서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옷을 입고, 머리모양을 해서, 개인의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똑같이 배분된 음식을 먹어서 맛이란걸 구별할 수 없다면,

저마다의 특기할만한, 독특한 기억이란것도 존재하지 않을테고 그렇다면 추억도 없을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구별은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두고 비교에 의해서 발생한다.

기준을 두고 비교를 통해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구별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비교를 통한 구별을 통해서,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 '차별'도 발생한다.

거기서 나 또한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나에게 어느 쪽을 택하겠냐고 묻는다면,

고질적인 병폐인 '차별'이 발생하더라도,

지방색에 따라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독창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그런 쪽을 택하겠다.

 

정답은 없다.

아니 나는 정답을 모른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고,

그 중 한가지 방법을 다만 'try to'해볼 뿐이다.

 

누군가의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 ㆍㆍㆍㆍㆍㆍ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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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4-10-08 08:53   좋아요 0 | URL
꽃들도 여러 꽃이 모여야 더 예쁘죠. 나이가 들수록 和而不同이란 말의 뜻이 새로워요. 잘 지내시죠?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이 편안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거기서 탈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걸 두고 점잖은 말로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편견이나 선입견 따위를 극복하라고 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먹어 자아(ego)라는 것이 성립된 연후라면 그런 말 따위는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너나 할것없이 다 그런 습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고,

변화를, 오히려 변절이나 변덕이라고 하면서 하면서 폄하하고 두려워들 한다.

하지만 '느리게 또는 빠르게'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세상은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다.

 

언젠가도 얘기한 적이 있는 듯 한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 하루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오늘이지만,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다고 하여 '어제'는 아닌 것다.

 

똑같은 패턴의 무수한 반복인듯 하면서도,

미세하고 미미한 변화의 순간들이 존재하는,

이 순환을 한 발자국 떨어져 관조적으로 바라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슬쩍 맞물리는 듯도 하지만,

속도의 느리고 빠르기차이에 따라,

점점 크거나 점점 작은 포물선이 그려지기도 할 것이며,

너무 느리거나 빨라서 솟구치거나 누운 직선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러고보면,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에 아무리 느리고 더디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 들일지라도,

신들의 그것을 기준으로 봤을때는 눈깜짝할 새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우리에겐 짧게만 여겨지는 하루살이의 일생이,

(원래 하루살이의 수명은 일주일 정도란다, ㅋ~.)

하루살이의 삶에서는 '평생이고 영원히'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때,

이 책 장서의 괴로움은 백해무익百害無益까지는 아니어도 백해소익百害少益한 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여기서 장서는 '책을 소장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는데, 

독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이분의 라디오 방송에서 얻는다고 할 수 있는 이권우 님의 말씀에 따르면,

자기가 소장한 책을 다 읽을 순 없고 소장한 책의 1/10을 읽으면 많이 읽는것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동안 난 이분 방송을 들으며 기죽지않고 위안을 받으며 많은 책을 쟁여올 수 있었다.

많이 쟁여두면 쟁여둘수록, 비례하여 읽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한권이라도 늘어난다는 생각으로 뿌듯했었지만,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같이 사용하는 남편과 아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급기야 얼마전부터 남편은 책장에 꽂히지 않은 내 책들을 어디론가 내다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다른 가구는 찾을수도 없고 사방 팔방 벽이란 벽은 빈 공간만 있으면 책장이 들어서는 우리집의 속성상,

책장에 꽂히지 못하고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책들은 다 읽었으리라 생각했나 보다.

읽은 책은 다른 사람들과 나눠 읽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을테고 말이다.

 

넘쳐나는 장서를 줄이기 위한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지은이는 '올바른 독서'를 권한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처럼은 못하지만, 500여 권 정도로 책을 엄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시도야말로 독서가나 장서가가 염원하는 이상일 것이다. 지식도 수집도 질이지 양은 아닌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양서란 대체 어떤 것이냐'라는 논의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는 워낙 간단치 않기도 하거니와, 발문을 쓰기로 수락하면서 '이런 논의는 피해가야지'하고 마음먹었던 나 같은 작자에게 답이 있을 리도 없다.

  ㆍ ㆍㆍ ㆍ ㆍ ㆍ500여 권 혹은 100여 권의 조촐한 장서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 그게 양서가 된다! 책은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얘기요, 무작정 많이 읽는다고 지혜가 늘지는 않는다는 당연한 결론이다.(13쪽)

위 글은 '장정일'이 쓴  이 책의 발문 중 일부이다.

난 그동안 장서가냐 독서가냐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책욕심이 많은 것으로 묶어 말하곤 하였다.

어차피 우리나라 출판시장의 여건 상 장서가와 독서가를 구분할 만큼의 수요가 충족되긴 힘들거라고 생각하였었고,

무엇보다도 나부터가 책을 어떤 목표나 기준을 갖고 들이는게 아니었다.

 

책에 관해선 팔랑귀라고 할만큼 남의 말에 잘 현혹되었고,

관심 분야도 어떤 특별한 분야가 있는게 아니라 완전 잡식성이다 보니,

그때그때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 충동구매를 했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서평집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아무 책이나 고르는 실수를 할 확률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책을 들이는 속도에 읽는 속도가 한참 못 미친다.

 

책 중에는 시노다 하지메'5백 권의 가치'를 빌어,

세상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150쪽)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 내용대로라면 난 독서가엔 한참 못 미칠 뿐더러,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권이라도 가졌는가 자문해 보자면 글쎄올시다~(,.)이다.

난 하루에 세 권은 고사하고,

일주일에 세 권쯤 읽던 것도 지금은 더 더뎌졌다.

뭐 예전에 비해, 유독 어려운 책을 읽는 것도 아닌데, 책을 곱씹어 읽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지는 않더라도 소가 되새김질 하듯,

군데군데 무작위로 반복하다보면 물리가 트이듯, 자연스럽게 깨닫는 부분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다읽은 책을 좋다는 이유로 보관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넓고 책들은 많다고 좋은 책들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만일 좋은 책들이라면,

내가 소장하고 있지 않더라도

세월이 가면 또 다른 기획과 편집으로 출간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처분하고 정리한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내가 읽은 후, 누군가에게 가기전에 잠시 동안과,

아직 읽기 전의 책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니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많이 소유하였다고 하여, 없애거나 팔아버리거나 처분하기가 쉽지 않다. 

ㆍㆍㆍㆍㆍㆍ책마다 제각각 추억도 있다. 결코 고서 목록에 죽 나열된 책을 남아도는 돈으로 한꺼번에 주문한게 아니다. 텅빈 책장이 그대로 내 마음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듯하여 쓸쓸함이 자근자근 밀려왔다. ㆍㆍㆍㆍㆍㆍ '장서의 괴로움'은 처분하고 난 뒤에도 느껴지나 보다.ㆍㆍㆍㆍㆍㆍ 바로 전날 겨우 1천2백 권을 처분한 주제에 여기저기 마음이 이끌려 헌 책을 열일곱 권이나 사버렸다.ㆍㆍㆍㆍㆍㆍ 열일곱권의 책 무게로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 되니 그제야 우울한 마음이 가라앉았다.ㆍㆍㆍㆍㆍㆍ 나머지는 생각날 때 또 사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누그러졌다.(35~37쪽)

 하지만 아직 안 읽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안 읽게 될 책이라면,

과감하게 처분해 버리는 장서술이 필요하다.

우선순위에서 매번 밀려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관심도와 신선도에서 밀려난다는 의미이다.

지금 당장 꼭(here right now) 필요한 책들이라도 양조절에 실패하게 되면,

순위에서 밀려나게 될것이고,

그 밀려난게 쌓이다 보면,

순환이 이루어지지 못해 정체와 적체가 반복되어 과부하가 걸리고 말것이다.

 

우리는 책을 많이 소장하는 것만으로 지식 또한 쌓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책을 소장하기만 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읽고 체득하여 내것으로 만들어야 지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올바른 책읽기는 독서도 장서도 아니다.

독서와 장서의 적절한 조화가 근간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보다 우선하여, 책에서 배운 것을 머리로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는 깨달음과 실행력이 병행하여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난 책을 읽었다는 행위만으로 만족하는 독서가는 아니었나?

책을 소장하고 쌓아놓는 것으로 뿌듯해 하는 보여주기 위한 소장가는 아니었나?

책은 물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소산을 표현해 내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깨달음이 있고난 연후래야 행동에 변화가 생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행동의 변화를 가지고 깨달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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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9-26 11:54   좋아요 0 | URL
전 늘 님의 독서기록에 팔랑귀 됩니다

하늘바람 2014-09-26 12:04   좋아요 0 | URL
표지도 참 예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