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 2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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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본 아베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등을 행사하는 안보관련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는데요,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은 87세의 할머니 자이이 아사코씨가 이에 항의해서 아베 총리에게 보낸 손편지에 적힌 말입니다. 자이이 할머니는 70년전 고베 대공습 때 집이 두 차례나 불타고 남편이 부상에 시달리는 등 참혹한 '진짜 전쟁'을 체험한 세대입니다. 자이이 할머니는 "전쟁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슬픔을 지위가 높은 분은 알 수 없는 건가, 전쟁을 겪어본 사람들이 줄어 들면서 평화가 흔들리고 있다"며, '다리가 아파서 반대시위에 참여할 수 없어 대신 손편지를 보내 항의한다'고 밝혔습니다.

아침 신동호의 '시선집중'을 듣는데, '말과 말' 코너에 이런 얘기가 나왔었다.

며칠에 걸쳐 김선우의 '발원1, 2'을 읽었다.

그동안 그녀의 작품들은 내게 들쭉날쭉해서,

시집<나의 무한한 혁명에게>같은 경우에는 무한감동을 받았다고 설레발을 쳤었지만,

수필이나 소설들은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와 불교신문이 공동으로 "세상에 두루 힘이 되는 이야기"라는 기획의도로 요청해,

연재되었던 것을 거듭 퇴고 해서 이 책이 되었다는데,

그동안 광고를 통해 몇 번 만났지만, 비껴갔었다.

그러다가 알라딘 서재 이웃의 페이퍼 글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시작하게 되었다.

 

읽으면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었다.

발원의 뜻이, '어떠한 일을 바라고 원하는 생각을 내는 것'이라는 뜻 말고도,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다짐하는 맹세, 또는 부처나 보살에게 소원을 비는 것을 뜻하는 종교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는데,

내가 그녀가 여자 작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시작해서 그랬는지,

그녀가 요석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요석을 대등하게 내세운 이유를 잡아내지 못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이 책의 작중화자라고 생각하고 감정이입했던, 원효의 그것과 일치되지 않다보니,

글에서 느껴지는 임팩트가 약했다.

 

읽는 내내...뭔가 살짝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는데,

2권 말미에서 '강신주의 해제'를 만나면서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충분히 채워지니,

하나의 좋은, 아니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종교와 정치는 전혀 다른 얘기인듯 보이지만,

어찌보면 같은 얘기이다.

삶과 죽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종교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고도의 복선을 깔아,

개연성과 핍진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음은 물론,

작품 구성면에 있어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에 이르기까지 적절하게 안배하였고,

등장인물에 있어서도, 대칭과 대조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균형과 조화를 맞추려 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일례로,

원효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의 법명이고,

당시 사람들은 새벽(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 원효와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그랬으리라 예상되는데,

원래 아름다울옥'요', 돌 '석'자를 쓴다고 문헌에 나와 있는 '요석(瑤石)'이

이야기 속에서 빛날 '요', 저녁 '석'자를 쓰는 '요석(曜夕)으로 바뀐다.

 

6두품의 원효를 처음 화랑에 뜻을 두었으나 끝내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캐릭터로 만든 것이나,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계율을 들어 전시에 앞장 서서 나라를 지키는 화랑과 대립 각을 세운 것은,

소설의 재미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와 종교는 모두 어떤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 일반 서민을 위한 것이라는 걸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장치쯤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여왕이,

"비두 벌판에서 내가 너를 구해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는 계산이 분명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장면에선,

현실의 누군가가 오버랩 되어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처음에 원효에게 관대하고 넉넉했으며 요석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했던 여왕은,

나중에 원효를 전쟁에 승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요석을 이용하는데,

지독하게 정략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 있는데,

요석을 곁에 두고, 이용하기도 했던 그 여왕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첨성대와 황룡사ㆍ분황사를 만든 것은 선덕 여왕이고,

그런 선덕여왕과 진덕, 진성 여왕을 거쳐,

태종무열왕의 시대에 이르러 원효와 결혼했다더라 라고 알고 있었는데,

게다가 원효가 황룡사에 머물었던 건, 진덕여왕 2년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이,

누구라고 지칭되지 않은 한명의 여왕이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묘사되다가,

바로 요석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으로 넘어가 버리니까 말이다.

 

책력과 천정에 대해서 언급되면서 첨성대가 거론되는데,

첨성대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운행관측의 측면보다는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의 의미가 강했으리라 짐작되고,

또 하나 요석이 길쌈을 장려하는 등 적극적이고 당당한 여인네로 묘사되는데,

길쌈으로 만든 게 광목이고 거기에 천연염료로 염색하는 것까지 나오는데,

우리나라에 문익점이 목화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고려말로 알고 있다.

소설이긴 하지만, 이런 세세한 것들이 자꾸 어긋나 버리면,

개연성을 잃게 되고 재미가 떨어진다.

 

물론 소설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가상의 설정이겠지만,

원효는 워낙 중요한 역사적인물이어서 정확한 연도를 알고 있는데,

소설 속 설정이라지만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되면,

알고 있는 그것에 억지로 꿰어맞추려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소설을 가지고 논리적 오류라고 억지를 쓰게 되고,

그 다음부턴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지고, 개연성도 떨어지는 듯 느껴지지만,

그건 내가 자초한 일이다.

 

내가 처음 저자 김선우가 요석에게 감정이입하여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이 책이 아쉽다고 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원효를 스님인것에 초점을 맞춘게 아니라,

요석을 사랑하고,

요석과 함께 삶을 살아간 인간 원효에게 초점이 맞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러다가 2권 마지막의 '강신주의 해제'와 '작가 후기'를 통하여,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하려 했던 얘기가  "세상에 두루 힘이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실마리가 풀리면서 고개를 주억여가며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니가 그려내려 했던 건 고승 원효나 깨달음을 얻은 큰 스님 원효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 사이로 뛰어들어,

울고 웃으며 같이 살아간 인간 원효를 그리려 했기 때문에,

요석의 일과 삶과 사랑이 맞물려야만 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소 여성적인 문체이고 시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다시 얘기의 처음으로 옮아가,

종교와 정치는 닮은 구석이 있다고 했던 이유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게냐, 너를 바꾸고 싶은게냐?"(1권,334쪽)

라며, 세찬 빗줄기가 되어 원효의 등짝을 후려쳤던 혜공의 목소리가 책을 읽고난 지금까지 각인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왕의 무덤 곁에 백성의 무덤이 있는 것이 이상할 바 없노라. 성군이라면 익히 배워야 할 인(仁)의 정치가 그것을 허한다.ㆍㆍㆍㆍㆍㆍ"(1권,316쪽)

라던 여왕의 의지와 속뜻이 읽혀서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시민들 속으로 뛰어들어 몸소 겪지 않으면,

시민들의 슬픔을 지위가 높은 분은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가장 감동적이었으며, 내 자신에게 가장 큰 깨달음을 준 부분은,

그동안 머리나 마음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던,

내 자신을 자극시킨다고 생각했던 깨우침이 아니라,

"흐응, 그렇지, 깨달음은 좋은거야.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빠져 있으면 깨달음이고 뭐고 다 귀신 밥이지. 흐응, 너도 알겠지? 젤로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이다, 응? 깨달아서 뭣에 쓰게?"(1권,342쪽)

라는 선문답 같은 한마디였는데, 이는,

부처를 사랑하는 것과 부처가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로 현현하고 종내는 서로 통하여 어우러질 것이라는ㆍㆍㆍㆍㆍㆍ(1권,345쪽)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값진 것이었다.

 

"집착의 대상을 모두 없애서 열반에 머물 수 있지만, 커다란 자비의 마음으로 인해 열반마저도 없애 머물지 않는다."

원효의 주저 『금강삼매경론』에 등장하는 말이다. 혼자서 열반에 들었다고 희희낙낙하는 사람이 어떻게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진흙탕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는 온몸에 진흙이 묻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법이다. 옷을 깨끗이 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은 흙투성이의 사람을 만질 수도 없을 것이다.(2권, 281쪽)

강신주의 해제가 아니었으면, 요원했을 수도 있겠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대상이 없으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깨달음ㆍㆍㆍㆍㆍㆍ.

사람만이 힘이고 사람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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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8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8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0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5-07-18 11:40   좋아요 1 | URL
쟁(爭)을 화(和)로 이끌어가려 노력했던 원효는
시대와 종교를 초월하는 생각을 가진 분이었다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무꾼님~!



sslmo 2015-07-19 12:23   좋아요 1 | URL
전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지누를 떠올렸어요. 이지누의 절터 톱아보기랑 너무~다른 듯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짧은 리뷰 속에서 쟁을 화로 이끌어가려 했던 원효를 읽어내신 님, 쫌 멋지신걸요~^^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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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지치거나 힘들때,
정여울이 헤세에게 위로받았던 방식으로, 우리를 치유의 길로 인도하지만,
너무 쉽게 접근하려다보니 헤세의 정신세계에 근접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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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 같은게 필독서여서, 열심히 읽었지만,

독후감을 써서 상도 받았던 거 같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면, 내용도 이해할 수 없는걸 가지고 작문을 하는 수준이어서, 취향이고 말고 할 게 없었다.

하지만, 글에 슬픔과 우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서,

읽으면서 같이 슬퍼지고 했던 기억이 있다.

 

작년인가? <작가의 붓>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화가'헤세'와 작가 '헤세'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에서 슬픔과 우울의 정서가 짙게 느껴졌다면,

그림은 낭만적이고 아름다워서,

늘 명랑하고 해맑은 기운, 삶을 사랑하는 자의 여유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붓
 도널드 프리드먼 지음, 박미성.배은경 옮김 /

 아트북스 / 2014년 3월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아니나 다를까?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는,

글을 쓰면서는 온갖 종류의 강박증에 시달렸지만,

그래서 글에서는 그런 것들이 느껴졌지만,

나이 마흔 넘어, 우울증을 치료할 요량으로 시작한 그림을 그릴 때만은,

'내가 이 세상에서 수채화를 제일 이쁘게 그린다'는 주관적 자부심에 넘쳤다고 한다.(헤세로 가는 길, 112쪽)

 

사실 '정여울'이 쓴 '헤세로 가는 길', 이 책을 여행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헤세가 쓴 책들을,

나에겐 중학교 이래로 게속 어렵다고 인식되어진 책들을,

정여울이라는 문학평론가가 알기 쉽도록 해설해 주는 그런 책이라고 생각하고 여지껏 미뤄 왔었다.

 

그런데, 정여울은 헤르만 헤세는 스스로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였기에 수많은 독자들에게 깊고 따뜻한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었다, 고 하며,

그런 자신이 헤세에게 받은 치유의 에너지를 나누고 싶어서,

자신 또한 상처 입은 치유자, 나아가 상처조차 사랑할 수 있는 강인한 치유자가 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치유자가 되어준 헤세를 그리며'라는 제목의 프롤로그로 시작할 정도로,

작가 정여울에겐 헤세가 치유자였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헤세가 그녀라는 매개자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치유자로 다가오는,

힐링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우리에게 치유자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아파봤고 고민해 봤기 때문에,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날의 우리들이 어떤 문제로 왜 고민하게 될지를 예측할 수 있었으며,

그가 치유받았던 그 방식들을 작품 속에서 우리에게 해법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신앙인도 아니고 무신론자이면서도 '영적인 삶'을 꿈꿨기 때문에,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그가 자기 자신과도 객관성을 유지하고,

한 걸음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아픈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고,

마침내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런 사실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깨닫기까지 오랜시간을 돌아서 온 것 같지만, 후회는 없다.

타인을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직접 온몸으로 관통하며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헤세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 뭐라고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어릴땐,

그의 작품들이 왜 높게 평가받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른이 되면서,

누군가를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라 고민하던 중,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터득하게 되었는데,

'데미안'을 통하여 그 누군가를 사랑하면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와 친하지 않았다. ㆍㆍㆍㆍㆍㆍ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누구의 마음에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할 때 자신을 잃어버린다.(데미안)

 

사랑이란 말은 좀 추상적이고,

난 그 사람이 쓴 글씨나, 그림들을 보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헤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에 편지를 곁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 작품을 소장한 사람은 내가 죽고 나서 큰 돈을 벌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작가의 손글씨로 직접 쓴 다정한 편지를 받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실제로 헤세의 세 번째 부인 니논과 헤세의 인연도 독자의 팬레터와 저자의 다정한 답장으로 시작되었다. 우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이었던 니논은 헤세가 새로운 작품을 출간할 때마다 그 작품을 향한 애정을 듬뿍 담아 지적인 흥취가 물씬 풍기는 팬레터를 띄웠고 외로운 헤세를 감동시켰다. 독자 편지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10년 넘게 이어졌고, 헤세보다 무려 18년이나 어렸던 니논은 마침내 꿈같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헤세로 가는 길, 56쪽)

여기선 18세가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리다는 건 나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냥 18년이라고 하는것보다 명확할 것 같다.

 

내가 헤세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작품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그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을 동경한다. 그는 인생을 즐기는 비밀이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에 달렸음을 알고 있었다. 유쾌한 천성, 끝없는 사랑, 그리고 삶을 즐길 줄 아는 낭만과 서정, 그것이이야말로 삶을 축복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그는 「정원의 친구들」에서 그 자잘하고 소소한 삶의 기쁨을 노래한다.(114쪽)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정원의 친구들」이 책의 제목인지, 책 속 글의 제목인지 모르겠다.

책 제목이라면 『』를 사용했어야 했을 것 같고,

시중에 『정원일의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번역본이 있으니 그걸 따르든지 원제목을 원어로 병기하는게 좋았겠고,

책 속 글의 제목이라면, 책의 제목을 따로 밝혀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행기라서 그런지, 책 속 사진들 하나 하나 다 느낌을 갖고 있고,

나에게 소근거리는 것 같아 멋진 프로포즈처럼 생각되었다.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어렵기만 했던 헤세에 한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헤세가 어렵다는 인식을 극복할 수는 있었지만,

너무 체화하여 정여울의 것으로 만든 얘기를 하고 있어서,

막상 헤세의 작품들을 트라이 투 했을때,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헤세를 너무 가볍게 만들어 버린게 아닌가 아쉽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부럽고 갖고 싶었던건, 책상의 상판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저 책상과 걸상이었다.

저 책상에 앉아서 나도 글이 쓰고 싶으면 글을 쓰고,

꽃과 나무가 그리울때는 정원을 가꾸고,

날씨 좋은 날에는 풍경을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이 책의 긍정적인 면을 꼽자면, 방콕족인 내가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는 거다.

헤세가 걸어간길, 살아간 길을 그렇게 그렇게 따라 걸어보고 싶어졌다.

난 무신론자이지만,

어떤 영적인 깨달음은 언감생심이어도,

삶이 힘겹게 느껴질때면 그렇게,

'나는 그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을 동경한다. 그는 인생을 즐기는 비밀이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에 달렸음을 알고 있었다' 던 정여울이 말한 그 방식대로 치유받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는게 먼저여야 할텐데,

'이다'의 '끄적끄적 길드로잉'같은 걸 보면서 시동을 걸어야 겠다.방식대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치유받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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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7-15 17:48   좋아요 0 | URL
평생 우울증에 시달린 헤세라지만 글과 그림에 재능있는 그가 부러운걸요^^
이다의 작게 작게 읽고 싶어서 구입했지요.
제게도 힐링이 필요해요!!

sslmo 2015-07-17 18:16   좋아요 0 | URL
그쵸?
우울증을 적절하게 다스릴 수만 있다면,
그걸 할 수 있다는 건 보통 내공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니,
거의 구도자의 수준이겠지만,
가끔은 부럽기도 하죠.

그러니까 `공평하신~`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걸거예요~^^

cyrus 2015-07-15 18:22   좋아요 0 | URL
저 사진 속 책상, 제가 다녔던 대학 강의실 책상과 비슷해요. 책상과 의자가 연결된 형태. 정말 앉기가 무척 불편했습니다.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길 수 없거든요.

sslmo 2015-07-17 18:17   좋아요 0 | URL
실은 저도 저 강의실 책상 썼었어요, 좀 불편하죠?
하지만 나를 위한 맞춤이라면,
거기다가 저 원목느낌은 소박하고 왠지 젠틱하게 느껴져서 말이죠~^^
 

친구 중에 한명은 책을 고르는 기준이 500쪽 이상의 두꺼운 책이다.

나름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읽다가 재미없으면 책베개로 사용을 하려는 것이라고 혼자 상상을 하고 낄낄거린다.

두꺼운 책을 싫어하는 내 입장에선, 차라리 분권이 낫다.

두꺼운 책들은 대부분 내용이 어렵고 그러다보니 진도가 안나가는데,

그걸 출퇴근할때 들고다니면 어깨나 손목 어디 한군데는 고장나기 십상이다, ㅋ~.

 

내가 두꺼운 책을 안 좋아한다고 하여, 장편이나 대하 따위를 싫어하느냐 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니어주신다.

난 장편과 대하 물을 완전 즐긴다.

무더운 여름 날이나 긴긴 겨울 밤, 이런 책들을 읽으며 지새우는 재미는,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어~♬" 수준이다.

 

호킹지수라는 것이 있다.

책이 얼마나 재미 있어 술술 읽히는지, 완독률을 알려주는 지수인데,

미국의 수학과 교수가 만든 것이라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스티븐 호킹' 박사에서 따온 것이 맞다.

전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 팔린 저서 <시간의 역사>때문에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것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는데, 호킹지수는 6.6%였다.

100페이지짜리 책이라면 6.6페이지에서 '책베개'가 됐다는 의미이다.

더 심한 책들도 있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2.4%, 힐러리 클린턴의 <힘든 선택들>은 1.9%였다.

호킹지수가 높은 책으로 등장한게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인데, 호킹지수가 무려 98.5%란다.

<헝거게임> 43.4%, <위대한 유산> 28.3%과 비교하여 봤을때, 현저히 높다.

 

그런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를 오늘 알라딘 서재 마실을 다니다가 발견했다.

그동안 이 책의 광고를 보기는 했으나,

<비밀의 계절>을 쓴 그 '도나 타트'와 연관시키지 못했었는데,

오늘 <비밀의 계절>광고를 보다보니까,

그녀라는 게 떠올랐다.

 

<비밀의 계절>을 읽을 때 느꼈던 것인데,

유려한 수사와 강박적일 정도로 세밀한 설정으로 천재 작가라는 수식이 과장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이번 작품도 기대된다, 이제 발견한게 아쉬울 정도다.

 

 

 

 

 

 

 

 

난 <비밀의 계절>을 2008년, 2월에 읽고 8일에 이런 독서 기록을 남겼었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은 한마디로 묘하다.

책의 내용이나 구성 등은 스물아홉의 나이에 씌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지만,

인생에 대한,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에 입이 쩍 벌어지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이윤기 님의 번역이어서 시작한 책인데,

당신은 '번역이 어찌어찌 음역하고 의역했지만 자신이 좀 없었다'라고 역자서문에서 밝히고 계시기도 하지만,

역자가 작가에게 끌려다닌다는 느낌에서 오는 개운하지 못함과,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우는 대학생들의 행태라는 것이 남의 나라 일이고 픽션이니 차치하고 백번양보하자 하여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은 그리스 고전을 배우고 가르치는 여섯 학생과 지도교수 중에서 '3척동자(있는 척, 센척, 쿨한 척)' 리처드가 작중화자로 얘기를 이끌어가는 게 맘에 들지 않았는 지도 모르겠다.

대학도, 과도, 막연한 동경에 의해서 택하게 되고,

그 과에서 거절당하자 그 주위를 맴돌다가,

과의 나머지 구성원들의 눈에 띄어 간택되어지는 소극적인 인물로 나온다.

 

내가 여기서 '리처드'에게 궁금한 것은,

막연한 동경이었던 과의 다섯 학생과 지도 교수가, 적어도 리처드를 자극하고 깨어있게 하는 사람이었나 하는 거다.

리처드 본인의 영혼이 어떤 의미로든 깨어있지 못하다면,

이제부터 얘기되어지는 '육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 하나의 죽음과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하지만, 난 이 책의 뒷 표지를 열심히 읽어, '...그리고 두개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터라, 책을 마칠때까지 긴장감은 여전했다.

'리처드'라는 소극적인 작중 화자는 이런 팽팽한 긴장감을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했고,

때문에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노래의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하는 가사처럼,

다섯명에 대한 리처드 자신의 개인적인 호ㆍ불호에 따라 같은 추억을 두고 책임의 경중을 달리 얘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이책은 원제 'The secret history'처럼,

죽음과 누가 왜 죽였는지를 파헤쳐갔다기 보다는...

대학 생활에서 감성과 이성을 어떻게 안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 삶이라는 역사가 어떻게 달라질 수도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아폴론의 이성적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헨리쯤이고,

디오니소스의 광기에 찬 세계, 감성적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헨리쯤 되는 것 같다.

나머지는 감성과 이성을 적절히 더하고 덜어내어 버무려진 인물들인데, 나름 매력적이다.

 

리처드는 소극적인 인물인 동시에, 부정적인 인물이다.

"...아모르 윈키드 옴니아(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라는 말을 상기시키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짧고 서글픈 인생을 통해 내가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옛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이기지는 못한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이기가 쉽다."

라는 구절은 슬프기까지 하다.

물론 리처드의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캐릭터가...범인을 알면서도 경찰에 신고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들을 친구를 받아들일 수도 그들의 친구로 본인이 흡수되지도 못하여...

이 얘기를 2권씩이나 길게, 까딱하면 책베개가 될 정도의 두께로 끌어 나가는 원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착오인지, 번역상의 오류인지 혼란스러웠던 부분이 있다.

기질이나 심술이라고 해 놓고,體液, 脾臟이라는 한자를 사용한 부분이 있다.

양방으로 생각하여도, 한방으로 생각하여도 연관성이 없는 부분이다.

 

문맥상보자면,

*의학이나 교감신경의 조화에 무지한 사람들              →나에게

*미개인                                                               →주술사에게 그러듯 나에게

*헨리(많이 아파봐서 다른 사람에 비해 나은 편이지만

                                 기질이나 심술에 관한 질문을)→나에게   고통을 호소하고는 한다.

이성과 지성의 상징인 헨리가 무지한 사람인양 질문을 해, 리처드가 놀라기는 했겠지만...'기겁을 하다'라는 표현은 과하고 어색하다.

 

또 한군데는,

'선의 수련법에 무드라라고 하는 게 있어'라고 하면서 무드라와 면벽을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도, 리처드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동시에...죽은 영혼에 진정한 슬픔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감성을 대변하는 버니가 죽고,

남아있는 인물들 중 (본인은 이성의 편에 서고 싶어했지만),

감성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세수하면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물과 찬물이 뒤섞이는 바람에 울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셈이다. 간헐적으로 북받쳐오르는 흐느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하는 부분에서, 감정적으로 유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동시에,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감성적이었던 리처드는...

버니가 죽고도,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구분되어 독립될 수 있었고,

그들의 이성(지성)을 자신의 것에 배가하여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일 테니까 말이다.

 

"프랜시스를 상대로 하면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었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깊게 들으면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놀라움, 연민, 당혹감 같은 종류의 반응을 적절하게 보였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연달아 질문을 퍼부었다. 그의 질문을 받고 있노라면 내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는 부분은 재미있는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잘 들어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부분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짓게 되는 부분이었다.

 

책 끝부분에,

'아름다운 것에 사랑을 쏟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냐. 그러나 의미있는 것과 맺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피상적인 것이라네.'

하는 부분은 얼마전 '탄허'를 읽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 같다.

 

책의 많은 내용들 중 저자가 직접 체험하여 자기것화하고, 체화하고 쓴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부분은,

총상의 느낌을 '처음으로 취했을 때의 느낌, 처음으로 여자와 함께 잘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라고 표현하는 부분이었다.

느낌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아서,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반면,자기것으로 만들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드는 부분은...

'그리스어 과제가 시간에 쫒기자, 편법을 써 일단 (모국어인)영어로 써놓고 이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방법을 썼다. 그리스어 산문 작법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은 언어를 숙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어를 이용한 사고법이다.'

라고 표현하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대통령인수위원회에서 얘기되어지고 있는 '전과목 영어수업논란'과 관련하여 생각이 복잡해지는 데...

이 책의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영어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영어를 이용한 사고법'이 되는 것이다.

영어를 이용한 사고법으로 우리의 이성과 감정을 얼마나 적절히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고전과 전통이라는 뿌리는 썪어가고 있는데,그 위에서 영어를 이용한 새로운 사고는 잘 자랄 수 있을까?

 

암튼, 이 책이 우리에게 무엇을 느끼게 하려고 씌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은,

대학에서 우리는 이성과 감성을 적당히 안배하여 버무려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학을 졸업한 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현실에선 종종 패잔병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헨리의 말처럼,

너무 마음만으로 살아 내 마음으로는 내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서,

자기 손으로 세상을 다스리면서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것,

이것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했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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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5-07-12 23:35   좋아요 0 | URL
황금방울새 참 많이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냥... 잘 안끌려서 어떤 내용인지 계속 패쓰하고 있어요.
찢어진 책 표지가 마음에 안들어서인것 같아요. ㅎㅎ
아마도 언젠가 이런 글을 쓸지도...

그렇게 읽고 싶지 않았던 책인데, 우연히 책을 읽는순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다 읽었노라고... ^^

sslmo 2015-07-13 11:1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말예요.
`비밀의 계절`도 묘하게 은근 중독이 됐었던 묘한 작품인데,
저 책도 그러면서 읽게 될거 같아요~^^

돌궐 2015-07-13 00:14   좋아요 0 | URL
저는 비밀의 계절을 보고 도나 타트 책은 영어로 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제가 그 정도 영어실력이 된다는 게 아니라 줄거리는 후줄근한데 문장은 기가 막히니까 문장을 볼려면 영어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이 책(the goldfinch)은 영어로 읽어 보려고 벌써 한참 전에 사뒀지만 아직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sslmo 2015-07-13 11:23   좋아요 0 | URL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는 묘한 충동이~, 불끈~!
우리 같이 읽어볼까요?
같이 부추기고 격려하면 좀 수월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님에게 한 수 배워야 겠는걸요, 헤에~^____^.


지금행복하자 2015-07-13 01:03   좋아요 0 | URL
비밀의 계절이 언제 나왔을까요? 나오자 마자 봤던것 같은데~ 이윤기선생님 번역인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황금 방울새를 보기전에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실천이 될지 ㅎㅎ

sslmo 2015-07-13 11:28   좋아요 0 | URL
2007년 12월에 나왔던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그당시만 해도 장르소설이라면 물불 못가렸던 시절인지라, ㅋ~.
이윤기 님의 번역이라고 해도 새로울 것은 없었으나,
워낙 작가가 대단했고, 임팩트 있었던 지라 아직 기억하고 있네요~^^

요번에 그 책들이 새로 나오는데,
이윤기 님 따님이 보완했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따님에 대해선 아는게 없지만서도,
그래도 기대는 해봅니다.

요번 황금방울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나타트의 글을 번역할 정도면,
내공이 보통이 아닐거라고 믿습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7-13 20:35   좋아요 0 | URL
더 오래됬다고 생각했어요~ ~ ㅎㅎ

sslmo 2015-07-17 18:18   좋아요 0 | URL
헤에~^^

[그장소] 2015-07-13 05:57   좋아요 0 | URL
비밀의 계절,읽고 딱 삼분정도 사고정지...흠---그러곤 말았죠.
도나 타트˝라는 작가를 머리 속에 확실하게 박아놓긴 했어요.
읽고 오래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런 책을 읽고 싶으면,
이 사람 책을 읽으면 되겠구나...하고!

sslmo 2015-07-13 11:31   좋아요 0 | URL
평범한 저 같은 사람이 도나 타트 같은 천재를 따라가긴 무리였는지,
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졌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일까, 요번 책도 어쩔지 가슴 설레이고,
이제 발견한게 아쉬울 정도에요, ㅋ~.

빨리 읽어보고 싶답니다, ㅋ~.

cyrus 2015-07-13 20:30   좋아요 0 | URL
저는 두 권 이상 넘는 책을 끝까지 못 읽어요. 집중력도 떨어지고, 다른 책으로 눈길이 가거든요. 베르베르의 <개미> 5권은 정말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 다 읽었어요. 그런데 책 좀 읽는 사람들 거의 다 읽어봤다는 이문열 삼국지 열 권짜리도 안 읽었어요.

sslmo 2015-07-17 18:20   좋아요 0 | URL
삼국지는 꼭 읽어주셔야 겠지만, 꼭 이문열일 필요는 없겠죠~^^
이문열에 대해선 호 ㆍ불호가 선명하게 엊갈리더라구요.

아랫목에 배깔고 누워 장편 만화책이나 읽으며 `낄낄~!`거렸으면 좋겠는,
날씨 꿀꿀한 오후입니다여~^^
 
나만의 스위츠숍 커피숍 차리기 - 콘셉트와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우스이 미키 지음, 박문희 옮김 / 스타일조선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난 이런 이쁘고 아기자기한 책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나만의 스위츠숍이나 커피숍을 차릴거냐고 하면, 뭐~(,.) 할말은 없다.

난 딴건 부족해도, 주제 파악은 좀 되어주시는 고로,

내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 직종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요즘은 출근할때 집에다가 간과 쓸개 외에도 인격을 빼놓고 나와야 한다는데,

난 챙겨가질 인격이 없어서인지 빼놓고 자시고 할게 없다.

 

다만, 부러워하고 꿈꾸는 동안만은 행복하니까,

이런 책을 보면서 감정이입하고 대리만족을 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콘셉트와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나만의 스위츠숍 커피숍 차리기>'라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 구입한 사람들은,

책을 펼쳤을때,

저자가 일본 사람이라는 것과,

이 책의 주무대가 가까이 일본도 아니고,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에 위치하는 미쿡, 샌프란시스코라는 사실에 살짝 당황할 수도 있겠으나,

괜찮은 책이었고,

나처럼 눈요기하고 감정이입하고 대리만족을 위한 사람들이라면,

200퍼센트, 아니 300퍼센트 만족해도 좋겠다.

 

그래도 '나만의 스위츠숍 커피숍 차리기'에 관한 책이니까,

내가 맨날 꿈꾸는 공방, 작업실, 북카페 등과 관련된 내 사전 지식을 참고로 숟가락을 얹고 거들어 보자면,

다국적 브렌드 내지는 토종이라고 하는 대형프렌차이즈들이 들끓고 있기는 하지만, 차치해두고, 

'나만의'라는 의미를 부각시킬 수 있는 걸 찾아보자면,

콘셉트와 디자인 외에,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추가하고 싶다.

 

또 한가지,

'나만의 스위츠숍 커피숍'도 일종의 일, 직업이고,

일과 직업은 오래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일단 본인이 좋아서, 기꺼이, 즐기면서 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잘 할 수 있는 거라면 금상첨화지만,

내 경우에 미루어 보면 아무리 잘할 수 있는 거여도,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버리면 그건 생계수단으로 전락할 뿐이지,

더 이상 좋아서, 기꺼이, 즐겁게 하는 이 아니었었다.

 

내가 좋아서, 기꺼이, 즐겁게 하는 일이어야,

일이 좀 힘들고,

그당시 눈에 띄는 수입이 변변찮아도, 극복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일본 사람인데,

트렌드에 맞춰서 콘셉트를 명확하게 읽어내는 발빠르고 안목 있는 편집자인가 보다.

 

샌프란시스코라고 하여 미국 길거리의 정크푸드를 연상했었는데, 그건 나의 기우였다.

 

샌프란시스코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독특하고 세련된 음식 문화가 발달하였단다.

첫째는 기후의 헤택을 받아, 그 지역에서 생산한 식재료를 그 지역에서 소비할 수 있는,

싼가격에 다양하고 신선한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두번째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의 행정시스템이다.

젊은 요식업자를 지원할 목적으로 비영리단체에서 운영하는 렌탈 키친 스튜디오가 있는데,

그 심사를 통과했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증명되는 셈이니까 말이다.

 

또 한가지, 아무리 이런 여건이 조성되어도 수요가 없으면 의미가 없을텐데,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가깝다보니 거기서 수요를 창출할 수 있겠고,

IT업계 특유의 참신하고 경쾌한 분위기가 유입되면서 이런 스위츠숍 커피숍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책을 천천히 넘기다 보면,

콘셉트와 디자인은 물론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춘 숍들이 많이 소개된다.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Blue bottle coffee'

투박한 크라프트 봉투에 연 하늘색 글씨,,

이곳의 주인장은 원래 프로 클라리넷 연주자였단다.

커피를 너무 사랑해서, 해외투어를 갈때마다 커피를 싸들고 다녔고,

그래서 이런 커피숍을 내게 되었다는데,

일러스트는 친구의 솜씨란다.

작가는, 옛날 방식의 숍들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란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스타일을 만들고, 그것을 디자인으로 승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가게나 브랜드를 만들어도,

물론 실패할 경우의 수도 있지만, 

이 지역에서는 시도해 보도록 친절하게 등 떠밀고 북돋아주고 응원하는 시스템과 분위기가 잠재해 있다고 한다.

 

주인에게 물으면 철저하게 마케팅 기법을 도입해 콘셉트를 만들어낸 가게도 있지만,

특별한 기법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이나 느낌으로 디자인했다는, '딱히 별것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한단다.

하지만 이 책을 '쓰윽~'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에 소개된 가게들에 무언가 독특한 콘셉트와 디자인이 있다는 느낌을 받은 걸 보면,

무언가 분명히 있고,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그 감각을 발견해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주문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이런 스위츠 숍과 커피숍은 다채롭고 알차며, 착실하게 고객들을 확보하게 된 곳들로,

욕심부리지 않고 고객을 최우선으로 한다.

신선한 커피를 제공할 목적으로 소량씩만 판매하는 곳이 대부분이고,

대부분 단일 품목으로 승부를 걸고,

그래서 생긴 잉여공간을 오히려 고객의 휴식 공간으로 제공한단다.

대신 소규모, 단일 품목으로 승부를 걸기때문에 다양간 개성의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대형 프랜차이즈에 밀리지 않기 위하여 콜라보레이션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 많다.

 

서로 인정하고 함께 협력하는 콜라보레이션의 풍조가, 상암동의 '북 바이 북'과도 닮았다.

샌프란시스코와 상암동은 그런 의미에서 닮았고,

콘셉트와 디자인을 잘 잡았으며,

거기다가 아이디어 또한 통통 튄다.

 

노동력 절감이라는 면에서도 그렇고, 능률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도 그렇고,

특장점을 잘 살려 자기 숍만의 트레이드를 만들고, 나머지는 콜라보레이션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시류라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마음의 여유없이 바득바득 애를 쓰는 그런 것 말고,

가볍게 시류에 몸을 맡기는 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런 것이,

스위츠숍이나 커피숍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고, 배울만한 꿀팁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무한 긍정의 메세지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종업원은 주인의 에너지와 의욕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란다.

주인이 가게에 대한 애정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지면,

그것은 종업원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고,

그런 가게는 얼마 못가 문을 닫게 되더라면서,

이 책의 한쪽 코너를 빌어 작지만 단호하게 충고하고 있다.

 

나처럼 이쁘고 아기자기한 책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맞춰,

컬러링 북도 '북 인 북'의 형태로 들어있어서 소소한 재미를 체험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만의 스위츠숍이나 커피숍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 말고도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책 몇 권쯤은 들춰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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