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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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이었다.

허리가 아프다는 30대 남자에게 치료 후 스트레칭을 가르쳐주는데,

허리를 젖히는 동작은 잘 따라하다가 구부리는 동작에서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유명한 의사가 나와서 젖히는 동작은 하되, 구부리는 동작은 안 좋으니 하지말라고 했다는 거다.

그것은 물건을 들다가 과격한 운동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을 경우, 급성기 때의 얘기라고, 기전을 알아듣게 설명해줬는데도 불구하고 망설이길래, 그럼 그 의사한테 가지 왜 나한테 왔냐고 째려봐 줬다.

 

또 한명, 중부지방이 유독 발달하여 선채론 자기 발목을 내려다보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30대 여자가 발목을 겹질려서 왔다.
치료 후 많이 움직이지 말고 집에 가서 쉬라며 보냈더니, 다음날 발목이 퉁퉁 부어서 왔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운동부족이라고 해서, 그 다리를 질질 끌고 개천길을 두어시간 걸었단다.

 

보통 '권리'라고 하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힘'을 얘기하지만, 그 권리에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가 전제되어 있다.

권리나 의무라고 하니까 법적인 구속력을 가질 것 같지만,

'마땅히 해야 하는'과 '마땅히 누릴 수 있는'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도덕적 당위성'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 '공부할 권리'도 마찬가지이다.

책의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를 보면, 

언젠가 어릴 때 살던 동네를 걷다가 20년 만에 이웃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아주머니는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너는 우리 동네의 희망이야. 우리 아들은 그렇게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내가 형편이 안 돼서 못 시켰거든. 너는 축복받은 사람이니까 그걸 잊지 말고 더 열심히 공부해."하셨습니다. 덕담이기도 하고 넋두리기도 한 그 말씀을 들으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계속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계속 배움의 길 가르침의 길 위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그 아픈 깨달음으로 먹먹해지던 순간이었지요.

  이 책에는 제가 지난 10여 년 동안 시간표도 선생님도 없는 나만의 작은 마음의 학교에서 스스로 배우고 익힌 배움의 기술이 담겨 있습니다.ㆍㆍㆍㆍㆍㆍ (348쪽)

라는 구절이 나온다.

20년 만에 만난 이웃 아주머니가 말씀하신 그 '공부'라는 것을,

이 책에서 저자 정여울은 자기 편할대로 해석하고 적용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차치하고, 

권리라는건 법적 구속력이나 도덕적 당위성보다는,

의무를 전제로 해야 하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심사숙고하게 된 부분이 있는데,

"우리 아들은 그렇게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내가 형편이 안 돼서 못 시켰거든."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씀 때문이었다.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 하고 또 본인이 계속 하고 싶어하는 개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부를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전제되어야 하는게 당연지사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품위있는 삶'을 위해 '인문학'적인 그것이 필요한 것도 맞고,

자신의 전공과 직업을 연결시켜, 책읽기와 글쓰기, 가르침을 전제로 한 배움을 '공부'라고 하는 저자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의 제목이 '공부할 권리'로 정해진 그 순간,

저자가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품위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을 지향하기보다는,

그동안의 주입식 교육관에 순응하는 '문제풀이의 기술'인 공부인듯 여겨지는 것을 피하기 힘들다.

'품위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이라는 소제목은 차치하고라도, 

공부의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을 자세히 풀어서 '많이 읽고, 많이 쓰고, 곰곰이 생각하고, 삶에 적용 또는 실천하기'...정도로 바꾸는게 낫겠다.

 

'공부'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숨쉴 권리만큼이나 소중한 자존감의 근거...라지만,

말만 들어도 머리에 쥐가 나고 경기를 일으키는 나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공부나 인문학 따위 거창한 이름으로 명명하지 않더라도,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따로 공부하거나 책 읽을 시간을 낼 순 없지만,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하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때문에 그게 공부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인문학이 아닌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제한하거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되니까,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자유롭게 사고하기 위한 과정쯤으로 생각하는게 좋겠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어서 어울려 사는 존재이다.

인간이 홀로 외롭게 늙어갈 수 있는 존재라면 인문학 따위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개별적인 인간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더불어, 어울려,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학문으로 보고 접근하는게 맞겠다.

 

며칠전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정, 나의 종교'를 읽고, 이런 느낌을 올렸었다.

 

친구와 다퉜다.

다퉜다고 하여, 애들처럼 티격태격한건 아니고,

'우정, 나의 종교'를 읽으며,

나의 우정이란 것의 무게가 너무나 하찮고 가벼움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허허로움을 아는지,

사실은 자신도 가짜라고 하며, 자신도 부질없다고 하는데... 서러움이 복받쳤다.

 

내 글을 읽은 친구는 아직 애기라며 웃었다.

서러움이 복받칠 정도로 사랑받고 싶은 맘이 큰 거라며,

어린 시절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거라고 하는데, 수긍할 수 없어 또 툴툴거렸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오히려 늘 환영받는 아이로 자란 사람들이 인생의 장애물 앞에서 어쩔 줄 모릅니다. 고통에 대한 예방주사가 접종되어 있지 않은 것이죠. 저는 인생의 멧집을 키우고 고통의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동화의 힘이라고 믿습니다.(26쪽)

라고 한다.

이 책을 읽은 다음이었다면 '동화의 힘'을 들먹이으면서 막강 대응을 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ㅋ~.

그러고 보면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얘기하고 있는 '공부할 권리'라는 것은,

저자가 문학평론가이면서 작가라는것 때문에 '공부'에 방점을 찍으려고 해서 그렇지,

'인간답게 살 권리'정도로 바꾸면 무난할 것 같고,

이 책의 에필로그에 가면 그마저도,

자격증이나 점수를 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미치게 좋았다며, 공부가 가장 소중한 마음챙김의 기술이었다(345쪽)

며 마음챙김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비슷한 감정처럼 보이는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외로움은 혼자 있을때 느끼는 슬픔이지만, 고독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혼자 있음'의 자각입니다.(104쪽)

라고 설명하는 방식도 명쾌하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 만의 고독과 마주하는 법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데,

심리학자 융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독과 마주하는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시간, 무의식의 상처를 대변하는 시간, 이어서이다.

차마 인정하기 싫은 습관과 아픈 상처, 숨기고 싶은 과거들이 나자신의 일부임을 긍정하는 데서 자기치유는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고독할 수 있는 자유라고 표현되고 있으며,

우리의 잠재된 창조성이 만개하는 시간이며 잃어버린 가능성이 아름다운 날개를 펴는 시간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런 류의 책과 영화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나이들면 누구에게나 이런 외로움이나 고독이 찾아오기 마련이니,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난감해하지 말고 잘 구별하고 기꺼이 대비하라고 일러주는듯 하다.

 

약한 것들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힘을 제멋대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힘을 비축할 줄 압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비축해 둔 힘이 진정으로 필요할 때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나눠 줍니다. 그 마음 또한 '나는 약하다. 그러므로 힘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겸허함에서 비롯되지요. 계속 강하고 대단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현대인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요.

  물론 나약함이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약한 척하여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것 또한 약한 자들이 '약함의 권력'을 행사하는 편법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섣불리 만용을 부리지 않지요. 스스로의 소중한 힘을 아끼고 다듬어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합니다. 타인의 아픔에 위로가 필요할 때, 벼랑 끝에 몰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원할 때 쓸 줄 아는 것이지요. 때로 우리의 진정한 무기는 타인을 통제하는 '강인함'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나약함'입니다.(148~149쪽)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이 책이 멋진 것은 위 구절 때문이다.

약자와 강자, 부족한 인간과 완벽한 신과의 대비를 통하여 내가 보고 느낀 것은,

힘의 세기에 따라 어느 쪽이 좋고 나쁘거나, 낫고 부족하거나, 잘하고 못하거나, 가 판가름 나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전능해서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신들과는 달리,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지만, 때론 혼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비워낼 줄 알아야 하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채워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신보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이 책을 막 읽기 시작하였을땐, 좁은 의미의 '공부'만을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읽기의 확장에서의 쓰기, 그 확장에서의 곰곰이 생각하기,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포함하는 삶에 적용 또는 실천'까지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접근법을 '공부'라고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동안의 편견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지는 않았었다.

낯선 이들 앞에서 강의를 할때마다 아직도 저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읽은 대해 수줍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낯선 이들의 눈빛에 조금씩 온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낍니다. 각자 다른 공간에서 똑같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멋진 친구가 됩니다. 가끔 책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고 몸서리를 치곤 합니다. 책없는 세상은 곧 낯선 사람의 운명을 내 삶 속으로 초대할 기회를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세월이 아닐까요. 독서는 단지 지식을 흡수하는 두뇌운동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몸의 실천이고, 새로운 인연의 네트워크를 창조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제 책을 '사는(buy)' 것을 넘어 책의 내용을 '살아 내는(live)'실천이 필요합니다.(322쪽)

그러다가 '각자 다른 공간에서 똑같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멋진 친구'가 되는 걸,

알라딘 서재 , 이곳에서 문득문득 경험하게 됐었고,

책에 관해서 까다롭고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와 비슷한 취향들을 만나는 순간,

멀리 있던 우주가, 우주의 별들과 햇살이 내게로 달려오는 느낌이랄까?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더불어, 대교약졸이라는 말 따위랑은 어울리지도 않게,

그동안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을 읽다보면 너무 수사가 화려해서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어디까지가 문장의 주요성분이고 어디까지가 수식어들인지 모르겠었다.

이제 그런 수식어들을 하나 하나 차근차근 지워내고 나니까,

문장의 주성분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 골자가 보이고,

그러고 나니, 고전이 얘기하려는 바가 뭔지를 알겠고,

그러니 본질이 보인다.

고전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다.

 

수식어로 꾸며 화려하게 치장하고 살지,

수식어를 제외하고 주성분만으로 간결하게 살지,

정답은 없다, 선택은 각자의몫이다.

 

 

알듯 모를 듯, 나도 잘 모르겠는 내 마음 대변하듯, 이성복 님은 시 '금기'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詩. 이성복 '금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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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4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6-07 14:04   좋아요 1 | URL
암튼 신안군의 그 사건을 보면 말이죠, 우리나라가 아닌 딴 세상의 일 같아요.
거기다가 남자선생님이 한 분 실종된지 며칠째라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말이죠.
전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렇지만,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때 사건을 수사할 생각도 않고,
무조건 덮으려고만 했다는게 더 미스테리였습니다.

옛날엔 나이들어서 그런 낙도나 오지에서의 봉사도 긍정적으로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낙도나 오지는 고사하고,
제가 사는 이곳도 물론이거니와, 타지방 마저도 만만하게 볼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씁쓸합니다~ㅠ.ㅠ

루쉰P 2016-06-04 22:40   좋아요 1 | URL
`공부`라는 의미가 지금은 저에게 어떤 문을 통과하기 위한 하나의 자격증처럼 여겨지네요 ㅋㅋㅋ 시험 공부를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인가 봅니다. 그치만 책을 좋아하고 읽는 것이 `공부`라고 한다면 거기에 맞게 그래도 나름데로 꾸역꾸역 잘 밀고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정말이지 고시촌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재미를 충족시키고, 확 무언가 오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맨날 짜장면만 먹으면 지겹잖아요. 그러나 먹을 수 있는 건 짜장면 밖에 없기에 계속해서 이를 악물고 먹어야 하는 그런 처지와 비슷합니다. ㅋ 맛잇게 잘 먹으면 합격이구요. ㅎ

이런 `기계적 공부` 속에 있다보니 책을 읽는 것 역시 활자를 눈으로 읽어야 한다는 불안감과 뭐랄까? 짜장 아니면 짬뽕 같은 느낌이 들어서 취미로서의 책을 멀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독서가 저에게 하나의 중화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느꼈어요 ㅋ

공부라는 것이 기계적 공부만 한다면 정말 토가 나올 것 같지만, 삶에 있어서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ㅎ

sslmo 2016-06-07 14:16   좋아요 1 | URL
전 인생의 황금기를 공부만 하면서 보낸걸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1인입니다.
공부를 정말 미친 듯 열심히 했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제가 좋아하는 다른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하지도 못했고 말이죠.
전 공부가 뭔지 모르고 했기 때문에 그리 할 수 있었겠지만,
바나나 한송이를 가지고 도서관에 들어가면 그 바나나를 다 먹을때까지 자리에서일어나지 않고 공부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엔 체력이 딸려 청바지를 입고 수업듣고 공부하고 과제하고 하다가, 그 청바지를 입은 채로 잠이 드는 나날들을 보냈었구요.

저도 한때는 책을 읽으면서도 읽을 책을 쟁여놓지 않으면 불안해서 어쩌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책읽기나 글쓰기 말고도...다른 형태의 공부도 있다고 생각하고 말이죠.
시험에 꼭 합격해야만 공부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지만,
이 모두는 나이 먹어 느끼는 깨달음인듯 하고 말이죠~--;

그러고보면, 나이 먹는게 벼슬은 아니어도, 큰 공부이긴 한가 봅니다여~ㅅ!ㅋㅋㅋ

루쉰P 2016-06-08 01:19   좋아요 1 | URL
ㅋㅋㅋ 대단하세요 나무꾼님 ㅋㅋㅋ 아 바나나와 함께한 추억 너무 강렬해요 ㅋ 아무리 그 때 그렇게 해서 뭘 이뤄내지 못 하셨다고 하지만 지금의 글빨은 그 때 고생한 것의 결과 아닌가요? 너무 겸손하심 ㅋ 저도 옷 입은 채 잠들 정도로 공부를 하고 싶네요 ㅋ
정말 부러워요 ㅠ.ㅠ 전 너무 잘자요 ㅋ

sslmo 2016-06-08 10:07   좋아요 1 | URL
글빨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만,
전 문과가 아니고 이과생이었고,
글빨이라고 할만한 무언가를 갖추지 못해서...정말 글빨을 갖춘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할 지경입니다.

암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공부 중에 으뜸은 인생공부라는 것을 나이를 이렇게 먹어 깨닫게 되었는데,
나이를 되돌릴 수도 없고,
인생을 한번 더 살아낼 재간도 없으니,
동네방네 광고하여,
젊었을때 대비하길 바랄밖에요~^^

루쉰P 2016-06-08 14:35   좋아요 1 | URL
ㅋㅋ 더 충격 이과생이시래, 암튼 근데도 이렇게 쓰시는 거면 글빨이 있는거에요 ㅋ

인생공부라, 흠...저도 항상 그 생각을 해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 ㅎ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인데 왜이리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나태함과 권태감에 쩔어 사는 것일까요? 그리고 절망과 자기 비하를 하며 사는 것일까요? 그럴 시간도 부족하다는 것을 머리는 알면서 지금 눈 앞에 당장 보이는 현실에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있는 건 참 바보 같아요.

미래는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고, 오로지 저에게는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는 것인데. 인생 공부란 말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저는 공부 얼른 마치고 인생을 공부를 하러 저 사회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요 ㅋ

덥고 습도가 높습니다. 시비거는 사람 있어도 웃으며 쌩 까시고, 밤에는 빠르고 안전하게 귀가하세요. 사회가 너무 험합니다. 오늘도 무사평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ㅎ

2016-06-07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6-08 10:08   좋아요 2 | URL
이 신안도가 그 소금염전 노예...그곳이랍니다~ㅠ.ㅠ
 
우정, 나의 종교 - 세기말, 츠바이크가 사랑한 벗들의 기록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오지원 옮김 / 유유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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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의 '아비 그리울때 보아라'를 보게 되면,

책의 말미에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인용하고 있는데,

아주 짧은 인용문인데도 불구하고, 내내 읽은 김탁환 만큼이나 강렬하였었다.

 

요번, '세기말, 츠바이크가 사랑한 벗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 '우정, 나의 종교'는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읽게 되었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내 취향이 아니었던 가장 큰 이유를 들라고 한다면, 

이 책의 겉날개 안쪽 프로필을 언급해야 할 것 같은데,

난 전기작가라면 있는 그대로의 전달에 집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탁월한 이야기꾼의 자질은 차후의 문제라고 여겼었나 보다.

 

아니, 어쩌면 인물의 전기를 쓰는데 있어서 탁월한 글솜씨는 인물을 두드러지게 하는데, 인물의 본성을 가리우는 마이너스적인 요소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또 한가지, 난 글이 담백하고 무미건조한 걸 좋아하는 편이다.

일상이 주는 감동이라고 해야할까?

산다는 건, 그것이 아무리 위인전에 등장할 정도의 훌륭한 인물이라도,

실상은 그렇게 화려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란걸,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몸으로 느꼈다고나 할까?

때문에 다양한 수사법과 문장 기교를 쓰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냈을 때,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하더라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떠돌며 지내다가 우울증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부인과의 동반 자살은,

(내가 그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없는 고로, 섣부르게 판단할 사안은 아니지만,)

좀 비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그가 좋았던 것은, '어제의 세계'가 자전적 삶의 기록이었기 때문인가 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정, 나의 종교'는,

로맹 롤랑이 츠바이크에 대해 언젠가 언급한 내용을 취한 것이라고 하는데,

츠바이크는 말만 하는게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이것이 그가 많은 사람과 교류할 수 있었던 근원이었다.

 

츠바이크의 글쓰기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인물의 성격묘사가 정밀한 것을 들 수 있단다.

이게 자신이 연구하던 학문에 조예가 깊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예를 들면 그와 나이 차이가 스물다섯이나 났음에도 '망년지교'를 나누었던 프로이트와 그의 심층 심리학에 대한 연구는,

츠바이크가 인물의 마음과 사건의 핵심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글쓰기를 하는데,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내향적인 성격인데다가, 소심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았지만,

그가 교류했던 몇몇 작가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들과는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소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나온 글들은 그런 그의 폭넓은 교류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장례식에서 한 연설, 만남을 회고하는 회고록의 형태 등,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결 같이 그와 우정을 나누었던 인물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느낄 수 있는 헌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분위기를 바꾸어, 친구와 다퉜다.

다퉜다고 하여, 애들처럼 티격태격한건 아니고,

'우정, 나의 종교'를 읽으며,

나의 우정이란 것의 무게가 너무나 하찮고 가벼움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허허로움을 아는지,

사실은 자신도 가짜라고 하며, 자신도 부질없다고 하는데... 서러움이 복받쳤다.

 

그래,

어쩜 관계는 다 별거 아닐지도 모르고,

가볍게 흐르는것일지도 모르고,

그러다보면 남는건 나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쩜 그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짜, 가짜나 참과 거짓 같은 가치판단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진짜,가짜나 참과 거짓 같은 가치판단이 요구된다면,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구실의,

아니 누구의 삶이든...삶이란 것 자체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수식하는 그런 문장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상대방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나도 내 자신을 잘 몰라서 맨날 시행착오를 겪는데,

어떻게 상대방을, 친구를, 우정을... 종교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 저것 다 차치하고라도,

자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부인과의 동반 자살은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비겁한 일이다.

 

우정, 친구가 종교 마냥 신성한 것이 아닌 이유는,

내 삶이 남루하고 초라할지라도,

이렇게 보대끼며 숨쉬며,

이땅에 발 붙이고 머리로 하늘을 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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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0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5-31 09:16   좋아요 2 | URL
츠바이크의 자살은 나치의 박해가 내면에 깔린 것으로 봐야하기는 하겠지만,
전 자살을 좀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말예요.
아무리 좋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도, 막 구실부터찾고싶어지는 거 있죠.
깊이 들어가면 속상하니까, 문체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며, 자위하는거죠, 뭐~--;

참고로 전 남자가 술도 못 먹고 담배도 못 피우고, 둘다 못해도 재미없을 것 같지만,
줄담배를 피우고,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도...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요즘 세상을 살면서...나름대로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어야 `자살`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
도대체 세상이 요지경이라서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2016-05-31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31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뿔을 가지고 살 권리 - 열 편의 마음 수업
이즈미야 간지 지음, 박재현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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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를 뜨문뜨문 아는 사람들이야 으레 그려려니 하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겉보기와는 많이 다르다고들 한다.
소싯적에는 그말을 내 속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이상한 구석이 있으며, 보통이 아닌 독특한 구석이 있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이고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했었다.

이젠 나이를 먹은건지,
아니면 몸이 지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지면서 마음도 같이 넉넉해져서 그런건지,
그런 말을 들으면 '그래, 그런가 보다'라고 하고 말면 될 일이지,
예민하거나 또는 둔하게 반응할 사안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겉보기와 다르다는 말도 그렇지만,
정상과 이상, 보통과 특별 따위의 단어들조차도 옳고 그름 또는 잘ㆍ잘못 따위의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설혹 그게  옳고 그름 또는 잘ㆍ잘못 따위의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지, 영원불변의 본질이나 진리는 아니었다.

이런 변화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사고방식이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의 경우 더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저자 이즈미야 간지가 나의 취향이어서 였는지, 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이런 류의 책들과 크게 다른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뿔을 가지고 살 권리'라는 우리나라에서의 제목만 놓고 봤을 때는,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라며 제약을 가하는 것처럼 여겨져 다소 호전적인 인상을 준다.
왠지 판에 박히고 틀에 짜여진대로여서,
'이 책을 바라 봐, 그럼 반드시 건강해질거야...'하고 호언장담 하는 분위기랄까.

하지만, 이 책의 원제 '보통이 좋아 라는 병'을 우리말 제목으로 썼었다면, 지금처럼 임팩트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본어 제목을 보고,
보통이 좋은 것이라거나, 보통이 평범하지만 그래서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상과 이상, 보통과 특별 따위 개념의 연장선 상에서,
이 아니라 건강이라고 이름 붙여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딴지를 걸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띠지의 '조르바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심리 특강'이라거나,
'읽다가 몇 번이나 울고 말았다. 내 삶의 빛이 된 책이다.'라는 돌출 광고 무색하지 않을 만큼 내용은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나온 열편의 마음 수업의 내용은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하나 하나 다 마음에 와닿았고,
또 그렇게 쉽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설명을 잘 해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즈미야 간지'는 이런 멋지구리한 말도 한다.

정상이라는 것은ㆍㆍㆍㆍㆍㆍ세상의 일반적인 상식 같은 것이다. 거기서 일탈한 자는 병자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이 날카롭게 사물을 꿰뚫어보지 않느냐'고 나카하라 추야는 고발한다.ㆍㆍㆍㆍㆍㆍ'정상'과 '이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오가면서 '이상'세계의 말을 '정상'쪽으로 가져와 전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시 아닐까.ㆍㆍㆍㆍㆍㆍ나는 이처럼 경계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른다. 이 의미에서의 시인이란 반드시 시를 짓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는다.ㆍㆍㆍㆍㆍㆍ여하튼 '정상' '이상'의 경계에 있듯, 사물을 신선하게 보는 시점을 가지고 살아가는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고, 강인하고 생동감 있는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18~19쪽) 

흔히들 병이 '낫는다'는 것을 '개운해져 고민도 없고 틀림없이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민한다는 행위는 살아가는데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므로, '맘껏 고민하는' 상태가 오히려 건강한 것일수도 있는데,
정신 요법이나 카운슬링을 할때 보면, 치료사는 무의식중에 의뢰인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알려주고 싶어한다.

다시말해 '건강한 불안정'을 차단하고 '병적인 안정'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이같은 행동은 의뢰인 스스로가 갈등을 짊어지는 힘을 키우지 못하게 할뿐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는 능력을 퇴화시켜 치료사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으로 경계하여야 한단다.
(나의 경우엔, 교묘한 '환자 유치 작전(?'으로 치환되기도 했었다~--;)

이 책의 장점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용어의 정의'를 명확하게 해주는게 좋았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단어들,
(예를 들면 머리, 가슴, 몸 따위의 단어를 뜻을 몰라서 사전을 찾아보진 않지만,)
너무 일반화되어 있다보니 경계가 모호해져 의미가 뭉뚱그려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기준과 경계를 도식화하여 명확히 밝히고 들어간다.

아래는, 머리와 마음과 몸의 상관 관계를 도식화한 그림인데,
그동안 읽어온 수많은 철학서나 사상서에서 어려운 용어를, 그걸 이해못할 어려운 말들로 풀어서 설명했던 것들을,
간단한 그림으로 아주 쉽게 설명해 놓았다.

머리와 이성의 관계뿐만 아니라 마음과 몸의 관계,
거기서 파생되어지는 머리에 의한 독재와 마음=몸의 지혜에 이르기까지,
머리로 대변되는 '작은 이성'과 마음=몸에 있는 '큰 이성'의 상관관계가 이 간단한 그림 한장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하나의 생물로서 인간의 독자적인 부분은 '마음=몸'인데, 그것을  인간 안에 내재된 자연이라고 보는 견해를 밝힌 두번째 그림은 정말 맘에 들었다.

'마음=몸'은 자신을 만들어주는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 빌린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것을 깨닫게 되니, 내 머리로 내 몸을 어떻게 컨트롤 해 보려는 집착 상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그러고 나니 이 거대한 우주와 자연 속에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어 숙연해졌다고나 할까?

또 하나, 용어나 케이스 스터디를 설명하기 위하여 '책을 인용'하고 있는게 좋았다.,
'적재적소에서 고전을 인용하고 있어서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역으로 이 책의 내용이나 케이스 스터디로 예를 든 것들이 고전으로 스며들어,
그동안 읽고도 이해불가였던 고전에 상황극처럼 작용하여 쉽게 이해가 되었다.

도미노의 말 하나를 건드리면 쪼르륵 말이 연결되어 넘어가는것 마냥, 해결의 실마리를 살짝 건드리는 것 만으로 '쭈르륵~'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희열이 너무 좋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같은 경우,
판과 쇄를 달리 하여, 또 번역자를 달리하여, 여러번 읽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불가였는데,
몇가지 용어의 정의를 새롭게 그리고 명확히 하자, 그동안의 것들이 일순간에 환해졌다.
내겐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기형성 이미지에 대해 설영하기 위해 부조와 소조를 예로 든 것도 좋았으며,
나츠메 소세키의 단편집'몽십야'를 인용하는 것도 좋았다.

감정의 우물 그림 같은 경우,
그림은 간단해 보이지만 논리정연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저자의 고뇌와 연구 업적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다.

그림에서, 윗부분이 '머리'='의식'이며, 아랫부분이 '마음=무의식'인데, 여기 '뚜껑'도 있어서 '머리=의식'에 의해 열리고 닫힌다.
아랫부분에 들어 있는 네 개의 공은 순서대로 들어가 있다.
가장 위에 있는 공이 나오지 않으면 그 아래 있는 공도 나오지 못한다.

그동안 우리는 분노는 드러내지 않는게 좋다든지,
계속 울기만 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봤었지만,
인간의 깊은 감정은 모두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감정임을 드러내기 쉽게 도식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것은,
보통이나 일반적으로 라는 미명하에, 나만의 색깔을 지우고, 모난 부분을 잘라 틀 안에 욱여넣으려 했던,
과거의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어서 이다.

이제 난 과거에서 서서히 걸어 나오고 있다.
대중이라고 불리우는 다수들도, 개별적으로는 혼자인 존재이다.
너나 할것없이, 너무나도 가볍고 외로운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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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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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8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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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6 : 무협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6
좌백.진산 지음 / 북바이북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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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하고 절규하던 유지태의 그것을 빌리지않더라도,

이젠 사랑뿐 아니라 우리네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변한다는 걸 실감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의 그것이 상대방을 향한 것이라면,

이제 하게 되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는 일종의 되뇜이고 자조에 가깝다.

 

한때 장르소설에 미쳐있었다.

좋아했다거나 즐겨 읽었다는 고상한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그땔 생각하면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하며 혼잣말을 하며 배시시해시시 거리기 때문이다.

첫 단추는 장르소설 중 무협소설이 시작이었고,

무협소설깨나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보통소설은 한 권이어도 장편으로 분류되지만, 무협에선 그렇지 않다.

짧아도 서너 권, 길면 스무 권, 서른 권을 넘어가는 초장편이 보통(28쪽)인 장르니까 말이다.

 

때문에 얘기를 어떻게 시작했건 간에, 연대기적인 서사가 되게 마련이고,

난 그럼 그에 걸맞게 (이과라서 국사, 세계사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주제에) 인물들을 가지고 족보, 가계도를 그려가며 열독을 해주셨으니 말이다.

나중에는 무협소설의 첫 단추인 독서실 총무 아저씨가 나의 족보 그리는 실력에 반해서,

당신도 안 읽은 책을 먼저 읽으라고 내어주실 정도였다.

 

암튼 그렇게 시작한 무협소설이지만,

중간에 장르소설로 한번 갈아탔고, 이젠 그마저도 잘 안 읽는다.

뭔가 이유가 있나...하고 이번 기회에 돌이켜 보니까,

새로운 작품이라고 해도 제목만 다를 뿐이지 그 얘기가 그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럼 더 이상 장르소설을 읽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웹소설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이 책을 왜 사읽었냐고 한다면,

한때 좋아했던 '좌백'에 대한 오마주 쯤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처럼 얇은 책의 정가가 9800원이라고 해서 한번 툴툴거려 주셨을 뿐이고,

'KT&G 상상마당에서 진행된 웹소설 작가 지망생을 위한 강의'였다니까,

이렇게라도 책으로 나와서 여러 사람이 좋은 강의를 접할 수 있는 것도 괜찮은 기획의도인것 같아서,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동안 좌백을 대단하다고 생각했었고, 보통 내공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요번 책을 읽는 내내...강의로 들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들은 글을 잘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말이나, 말로된 강의를 잘하는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좌백의 경우, 기승전-무협으로 이어지는, ㅋ~.

완전 논리정연한데다가,

요점만을 딱딱 집어내고 있어서,

일목요연하게 내용이 전달되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좌백의 그것들을 좋아한 이유가,

무협소설이란 것이 황당무계한 얘기를 하는 것이기는 하나,

좌백의 경우 논리적으로 탄탄한 위에 쌓아올리다보니,

소설의 기본요소라고 할 수 있는 개연성과 핍진성이 제대로 확보되어 그럴듯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동안 그를, 무협소설을 쓰는 작가로만,

아내인 '진산'과 함께 부부가 무협소설을 쓰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는 철학과 출신인데다가,

청소년을 위한 철학 판타지 소설인 '논리의 미궁을 탈출하라', '소크라테스를 구출하라', '제자백가를 격파하라'등을 쓴 교양물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암튼,

그가 쓰는 무협소설이 내게 재밌었던 이유가,

그가 무협소설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었고,

그중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맞는것을 적절히 골라 버무려 냈기 때문이다.

 

그는 무협을 이루는 키워드를 '무, 협, 중원, 과장'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러나 무협적 병기의 개념에는 제한이 있다. 어디까지나 신체의 연장선상으로서의 병기이며 결국 그 병기를 쓰는 사람의 격투 기술에 방점이 찍힌다. 미사일도 병기지만 누가 더 미사일을 잘 쏘나 하는 이야기는 무협의 영역이 아니고, 무협에도 수많은 보검신검이 등장하지만 만약 순수하게 '마법검'의 능력에 기대는 이야기라면 판타지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16쪽)

라고 하는데,

분석이 명쾌하고 문장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게 떨어진다.

 

하지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엔 제약이 따른다.

그는 박학다식하기까지 하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예로들며, 공간적 배경인 middle Earth를 중간계, 가운데 땅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그걸 국내출판사에서 '중원'이라고 번역해서 화제가 된적이 있다고 한다.(22쪽)

 

궁금한걸 못참는 난, 가지고 있는 책을 찾아보니 '가운데땅'이라고 번역되어 있더라, ㅋ~.

 

그동안 나는 '중원'을 '중화'인민 공화국이라고 할때의 그 '중원'이라고 생각했었다.

반지의 제왕에서의 'middle Earth를 중간계'라고 짐작했음은 물론이다.

 

무협에서 말하는 과장이란 동양적인 정서에서 근거한 것으로 판타지와는 또 다른 허세와 고도의 멋 정도로 표현해 낸다. 그 정도라면 대리만족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그 정도가 아닐까? 완전 멋지다, ㅋ~.

 

기본이 안된 사람들은 사상누각 위에서 글을 쓰다보니 언제 허물어질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경우는 김용을 예로 드는 것으로 중국사를 꿰뚫고 있음을 알수 있고,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 부분을 예로 드는 것으로 볼때, 논란의 중심에서 회자되는 이슈에 대해서도 흐름의 맥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무협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본소용 무협소설이고,

이걸 번역하는 과정에서 편저자라는 말이 사용됐다.

이 과정에서 글보다는 스토리에 재능이 있는 스토리 작가라는 말도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좌백이 기본기가 아무리 탄탄하고,

무협의 현주소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는 그를 향하여 멋지다고 설레발을 치진 않는다.

 

그는 웹소설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무협을 개척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무엇이 무협소설인가'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 '왜 무협소설을 읽는가'와,

더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왜 한국인이 중국을 배경으로 중국인이 활동하는 이야기를 읽고 있는가?' 의문을 제기하고,

해답 또한 스스로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얘기하는데,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한국을 배경으로 했다고 해서 한국인의 무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무협의 틀을 빌어 한국의 얘기를 한다고 해서,

무협의 중심이 중국적인 것이라면 한국의 얘기라고 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어찌보면 무협이 지극히 중국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한국적인 무협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은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할 문제일 것이다.

 

이 책의 끝에서, 좌백은 '무협을 쓰려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작법을 얘기하는데,

대단한 것이 없고 다독, 다작, 다상량이 그것이다. 

다음 이야기를 전개 시키고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숙성시키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파리리뷰의 '작가란 무엇인가'의 3권을 숙지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좌백같은 훌륭한 작가도 그런 책을 읽고 꾸준히 연구하는 것 같아서,

나와 같은 책을 읽고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아서 가슴이 마구 벅차 올랐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을 인용하며 끝을 맺으려 한다.

20여 년간 작가 생활을 하면서 글을 못 써서, 혹은 잘 쓰지만 운이 안 맞아서, 또는 끈기가 부족해서 붓을 꺾은 작가는 많이 봤지만 성질이 고약하고 친구가 없어서 그만뒀다는 작가는 본일이 없습니다. 이름을 말할 수는 없지만 성격 개차반인 작가들도 수두룩하지만, 사실 저부터 그렇지만 작가로는 잘 사는 게 보통입니다. 글도 잘 쓰고 성격도 좋아서 대인관계가 원만하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런 작가는 본 일이 드뭅니다.

  무언가 빈 곳이 있거나, 결함이 있거나, 트라우마가 있어서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사회부적격자, 병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오히려 글에 색깔이 있어 읽을 만한 글을 쓴다는 편견도 가지고 있죠. 그리고 그게 사실입니다.

ㆍㆍㆍㆍㆍㆍ그러니 외로움은 작가에게 있어서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필수인 거고, 외롭지 않은 것,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기간이 오히려 작가에겐 독이라고 생각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행복한데 왜 글을 쓰겠어요.(104~105쪽)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작가가 될 구실도 없거니와

만약 작가라고 한다면 그만 둘 구실도 없다.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끈기는 좀 되어주시고,

대신 성질이 고약하고 친구가 없어 '스.스로를 따. 시켜' 혼자놀기의 달인으로 등극할 지경이면서도,

외로움을 오히려 즐기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외로움이 사무칠때도 있지만,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나를 아끼고 사랑해야겠다.

외로움도 아무나 느낄 수 없는 재능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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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5-25 23:46   좋아요 1 | URL
무협지는 김용이지 말입니다..ㅋ^^..

sslmo 2016-05-26 10:41   좋아요 1 | URL
김용은 만인의 필독서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이 연사 주장하는 바입니다~!!!

2016-05-26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5-26 10:46   좋아요 1 | URL
창작을 하는 건 언감생심이고,
한때 번역을 해볼까 했었던 적이 있는데,
번역도 만만하게 볼게 아니더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내로라하는 번역가들도 때로 마리앙또와네트처럼 번역하는걸 보고,
포기했습니다.

이젠 좋은 책들, 건강이 시간이 허락할때 읽자는 주의라서요~^^

2016-05-26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6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6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6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6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5-26 09:19   좋아요 1 | URL
양철나무꾼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영웅문>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것만 보았고 무협지는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무림고수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롭네요.

특히 인용해주신 마지막 문단 좋아요.
행복한데 왜 글을 쓰겠어요....
외로움을 느끼는 재능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아침이예요. 좋아요~~

sslmo 2016-05-26 11:11   좋아요 2 | URL
영웅문을 텔레비전에서 보셨다니,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네요.
우주삼라만상이 책속에 들어있는 느낌이랄까?

전 그중에 김용이 깊이가 있어서 좋았는데,
김용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좌백과 한상운을 들 수 있었는데,
한상운이 요즘 드라마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 같더라구요.

뭐든 개발하고 계발하면 재능이 된다는 거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들려, 근사하잖아요?^^

해피북 2016-05-26 10:55   좋아요 2 | URL
저는 오늘 양철나무꾼님 덕에 좌백이란 분을 알게되었어요 ㅎ 그리고 요즘 우연인지 필연인지 외로움은 결함이 아니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조금씩 생기고 있어요. ㅋ 저두 혼자 있는 시간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sslmo 2016-05-26 11:15   좋아요 1 | URL
혼자있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는 거,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는 시작인것 같아요.

해피북님 인생의 주인공은 해피북님이고,
제 인생의 주인공은 저인 것이고,
우린 지금 현재 이 시간을 사는 것이니까.
지금 이 시간을 사랑하고 즐기면 그만인거죠~^^
 
여자는 허벅지 다나베 세이코 에세이 선집 1
다나베 세이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작년까지만 해도 짧은 반바지를 부담없이 입었었는데,

올 들어 살이 급격하게 찌거나 한건 아닌데도, 

노출이 심하거나 몸에 꼭 끼는 옷을 입으려고 하면 채신머리 없어 보일까봐 불편하다.

 

며칠 전 토요일 한낮,

때이른 불볕더위라서 그런지 더워도 너무 더운날,

퇴근 길 직장 근처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에어컨을 준비하지 못한 채, 창문을 활작 열어놓고 달리고 있었고,

난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버스 안으로 눈길도 못주고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그렇게 서있었다.

그런데, 나와 조금 비껴 앉으신 할머니 한분이 바람에 항아리모양으로 부풀어오르는 내 롱티셔츠를 쳐다 보시고는,

이윽고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서자, 할머니는 일어서시며 내 손을 잡아 끌어 자기 자리에 앉히시는거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을 못 잇는 나를 향하여,

"색시, 임신 했잖수, 나 이래뵈도 강단이 있어서 괜찮아요~^^"

같은 여자끼리 다 안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신다.

 

임신을 한듯 연기를 하며 편하게 앉아서 가는 호사를 누렸어야 했을텐데,

난 그러질 못하고,

"아닌데요~ㅠ.ㅠ"

하며, 손사래와 함께 머리를 강하게 도리질 쳤다.

 

버스 안의 누군가가,

"선생님은 좋겠수. 그 나이에 새댁 소리도 듣고~."

하며 위로의 말을 건냈지만, 술이 불콰해진듯 얼굴이 벌개진 내게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책은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를 쓴 다나베 세이코가 쓴 대표적인 에세이라는데,

일본소설을 즐겨읽지 않는 나는 그니를 몰랐던 터라,

그니의 지명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고,

'환상의 빛'과 '금수'를 쓴 '미야모토 테루'가

'다나베 세이코의 대단함을 가장 많이 느꼈던 작품이 바로 이 책들에 실린 에세이다.'

라고 해서, 미야모토 테루의 연장선 상에서 읽게 되었는데,

그 저변에는 책이 나를 비껴가는 나날의 연속이었던 것도 한몫한다.

 

이 책을 읽고 알게 된 것은 '다나베 세이코'가 1928년 생으로 지금은 파파 할머니, 여성이라는 것이고,

이 책의 에세이들은 어딘가에 연재되었던 것인가본데,

그때만해도 아기가 없는 비혼녀였으며, 마흔 근처의 중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니가 아기가 없는 비혼녀, 처녀를 추구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오는데,

전시에 '낳아라, 번식하라'를 외치며 '교배'에 힘쓰고 나온 배를 보란 듯 내밀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던 임산부를 보며 수치심을 느끼고 부끄러워 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수치스럽지 않은 얼굴을 하고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여학생이 바로 나였다.'라고 하고 있었으며,

그 반대급부로 라고 해야 할까,

'요즘 들어서 갑자기 나잇살이 찐 나는 다른 사람이 혹시 "임신하셨어요?"라고 물어오면 큰 소리로 "아니요, 제 배인데요"라고 대답한다. 일반 기성복은 맞지 않아서 임부복 코너를 헤매는가 하면, 때에 따라 일부러 배를 내밀고 전차 안의 노약자석을 감쪽같이 낚아챈다.(161쪽)

라고 하는걸 보고 일종의 위안을 얻었으니, 이런걸 두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니를 연애소설을 쓰는 소설가 내지는 음담패설을 쓰는 에세이스트로 기억한다는데,

내가 그니의 작품들을 안 읽어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었던 게 이 책을 재밌게 읽는데 한몫한 것 같다.

더우기 역자후기에서,

그니가 전쟁과 고도성장을 겪은, 남성 중심 사회를 겪은 일본의 여성작가라는 점을 감안해주면 좋겠다고 하는 걸 보면,

이런 글을 여자가 써낸다는건,(여자가 쓴 글이어서 나는 제대로 감정이입을 하고 몰입을 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일본이고,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여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읽어보니까 알겠는데,

이 얘기가 단지 연애소설도 아니지만,

그냥 얘기하기는 좀 껄끄럽다고 하여 음담패설로 분류될 에세이 들도 아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나만해도 내 자신을 당당하게 주장하고는 싶지만,

내가 어떤걸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조차 모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원하는 걸 주장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다.

추상적이라고 해야할까, 뜬구름 잡기라고 해야할까 그렇다.

그렇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당당한 주장을 넘어서 문란하게 비춰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땅의 중년 여자와 중년 남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청년이고 중년이고, 남자이고 여자이고, 를 떠나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없이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게 되면,

그것은 독선이고 아집이고,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의 엮임은,

정신적이냐 육체적이냐, 의 차이는 있지만 '불륜'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볼 수도 있다.

 

암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평상시에는 그렇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던 국가색 따위가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 대신,

남자와 여자를 구분짓는 문제들에 쉽게 공감을 하겠는걸 보면,

국가보다는 남녀의 성별이,

무언가를 나누고 경계짓는 더 큰 구별 요인인가 보다.

 

솔직히 이 책에 나온 얘기들은 내 의견과 일치하는 것도 있고, 그럭저럭인것도 있고, 아니올시다, 인것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배 나온 남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머리가 벗겨진 남자도 숱이 적은 남자도 싫지 않다. 첫인상부터 싫은 남자는 뭘 해도 싫을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배가 나왔든 머리가 벗겨졌든 옆에 앉아 있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행복해진다. (115쪽)

라는 구절은 내가 쓴 것처럼 정확히 일치한다, ㅋ~.

 

이 책의 제목은 '여자는 허벅지'라고 해서 다소 야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지만,

나라면 이렇게 바꾸고 싶다.

여자고 남자고 종아리는 제2의 심장이다.

건강하게 살려면 그 운동 뿐만 아니고, 종아리를 가꾸고 종아리 운동 열심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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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5-26 09:59   좋아요 1 | URL
그러고보니, `여자는 허벅지`보다 `여자는 종아리`가 더 야하고 화끈한 느낌이 드는 제목인 걸요~^^
저도 요즘 책읽기가 영 신통치않아서,
봄에,
먼산 지천에 깔린 꽃에,
별의별 핑계를 다 댑니다여~^^

님도 좋은 하루요~^^

cyrus 2016-05-24 19:16   좋아요 0 | URL
사람은 무언가를 구분지어서 자신의 소속감을 유지하고 싶어 해요. 그래야 사는 게 편해지잖아요. 구분지어진 것과 반대로 행동하면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히기 쉽습니다. ^^

sslmo 2016-05-26 10:25   좋아요 0 | URL
언제던가 우리아들이 아싸이러고 카.톡을 보냈길래,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했더니,
아웃싸이더의 약자인데 것도 모르냐면서,
그러니까 엄마는 아웃싸이더인게 맞는거라고 해서,
엄마를 놀려먹는 나쁜넘이라고 툴툴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여.

님의 댓글을 읽는데, 왜 그 생각이 나는 걸까요? ㅋ~.

2016-05-24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5-26 10:31   좋아요 0 | URL
전에 그럼 트레드밀 사진은 설정 샷~? ㅋㅋㅋ~.
트레드밀보다는 운동장이,
것도 트렉보다는 흙길이 여로모로 좋죠~^^

임산부는 무조건 우대되어야 마땅하지만,
세계적인 저출산국가라고 해서,
아이들이 귀하다보니 너무 버릇없이 키우는 경향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