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초 세트 - 전2권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foundation Of Love'이다.

내가 영어 제목을 들먹이는 이유는 우리말 제목 '사랑의 기초'라고 했을때, 그 기초가 basic인지 foundation인지 명확하지 않은 감이 있어서이다. 

basic이라고 했을때는 시작, 초급이라는 느낌이라면, foundation이라고 했을때는 일의 바탕이 되는 토대라는 느낌이 강하다.

(나 혼자만의 주관적 느낌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고~--;)

 

두 권으로 이루어진,

각기 다른 설정의,

두 편의 소설을 통하여,

두 명의 작가 - 그들이 보여주려한 것은 '사랑의 기초;The foundation Of Love'의 제각각 다른 형태들(하지만, 어쩜 결국은 하나가 아닐까 싶은 그 어떤 것?)이다.

 

여기서 '기초'는 '시작'이 아니라 '근간'이고 '토대'다.

사실, 정이현이 쓴 <사랑의 기초, 연인들>편에서는 이 '기초'가 '시작'이어도 좋고 '근간'이나 '토대'여도 상관없는 듯 보이기도 했었다.

정이현은 <달콤한 나의 도시>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그 작품에서,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onthroad(온 더 로드)라는 메일 계정을 쓰던 익명의 남자에게 마음 쓰였었다.

이 작품, <사랑의 기초, 연인들>에서도 같은 이유로 준호에게 마음이 쓰였다.

 

이건 어쩜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어서,

또는 두 작품 사이에 세월이 얼마 흐르지 않아 작가의 가치관이나 개성이 크게 변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지만,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이라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민아와 준호를 보면서, 그들의 사랑의 과정을 보면서 마음 쓰였었다. 

우리가 사실과 진실을 놓고 함부로 가치 판단을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되듯이,

이들의 사랑을 놓고도 함부로 가치판단을 하거나 단정 지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건 '달콤한 나의 도시'의 그남자에게 익명 아니 불명이라는 이유 만으로 돌을 던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여기서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살짝 짚어보면,


내가 창밖을 보니 비가 오는것을 보았다.

(이때까지는, 사실이며 진실이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보니 옥상에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이때는, 비를 보았던것은 사실이며 

           옥상에서 물을 뿌린것은 진실.)

 

그래서 내가 비가 온다고 착각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는, 비를 본것은 거짓이며

           비라고 생각했다는것이 사실이며

           옥상에서 물을 뿌린것이 진실.)

 

이처럼 사실은 과정으로는 명백한것 같으나 결과를 놓고 보니 그것이 아닐수도 있으며,

진실은 항상 명백한 사실이지만 사실은 명백한 진실이 아닐수도 있다.

 

그걸  <사랑의 기초, 연인들>의 처음과 끝에서, 미용사의 목소리로 강조하듯 짚어낸다. 

 

"아휴, 좋을때다. 근데 젊은 아가씨들은 잘 모르겠지만 착한 남자가 최고예요. 언뜻 봐서는 별 매력 없더라도 알수록 진국인 남자, 딱 한 여자밖에 모르는 남자. 요즘 아가씨들 겉으론 똑똑한 거 같아도 그 당연한 걸 잘 놓치더라고요."(19쪽)

 

"내가 겪어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자는 역시 자상하고 다정한 남자가 최고예요. 지 혼자 속으로 진국이면 뭐해. 표현 안 하면 그걸 누가 아나."

 미용사가 언젠가 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았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였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204쪽)

이건 사람이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라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내겐, 사람이 그러하듯 사랑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서...함부로 가치판단을 하거나 단정 지으면 안된다는 의미로 돌출되어 다가왔다.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다.

난  <사랑의 기초, 연인들>의 여주인공 민아처럼 "나는 그냥 착한 사람이면 돼"과는 아니어서, 좀 까칠하고 유별나게 고르는 편이다.

한때는 '글쎄, 남의 얘기 잘 들어주는 사람? 부드러운 성격에 나랑 취향이 비슷하면 더 좋겠지. 음악도 좋아하고 서점 가는 것도 좋아하고.(20쪽)'라고 말하는 민아처럼 나랑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 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에까지 빵빵하게 살이 쩌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그렇기때문에' 골라내는 OX문제나 사지선다형 문제 처럼  쉽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곤란한 상황에서 기꺼이 너그러워질 수 있는 지 마음의 평수를 시험하는 그런 문제로 바뀐 느낌이다.

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78쪽)

말은 언제나 흘러넘쳤다. 그들은 말하고 또 말했다. 사랑할 사람을 찾아 헤매었던 유일한 이유가 마치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였다는 듯.(113쪽)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에, 사람인 당사자와 상대방 말고 왜 다른 것들이 요구되는건지,

왜 '그 사람의 세계'라고 표현되는 '배경'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건지 모르겠다.

저렇게 얘기가 잘 통하는 이들이,

배경이 구차하거나 누추한게 뭐, 그리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어야 할 일이기까지 하며...

용기를 갖고 고백을 하거나 못한게 헤어짐의 원인까지 되어야 하나 싶지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않은지...

다시말해, 나의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에 문제가 있는지,

어제 어느 인터넷 자료를 보니, 배우자 선택시 가장 고려하는 게 '가정환경'이란다.

 

콩깎지가 씌웠을때 장점으로 보이던 것들이, 사랑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한단다.

 

그래서였을까, 이 구절이 더 가슴 아프게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준호의 가슴 속에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꿈이 한 톨 피어 올랐다. 이 사람에게라면, 곧 더 깊은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을지 몰랐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달콤한 케이크 위에 사뿐 올라앉은 체리뿐만 아니라 오븐에서 너무 늦게 꺼낸 식빵의 가장자리처럼 누추한 삶의 모서리까지도 사이좋게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행운아인지도 모른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했다.(117쪽)

 

이들에게 부족한 '사랑의 기초', 다시 말해 '사랑의 근간'은 믿음과 신뢰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사람을 통해 그런 얘기를 듣게 되었을때, 내가 민아였다면 '말못할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는 건 누구에게나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려하는 건 '그 사람이니까' 다시말해, '준호니까' 말못할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하고 믿고 보는거다.

 

하지만, 작가는 민아와 준호에게 아직까지 그런 믿음과 신뢰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그것을, 인연이나 운명으로 몰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그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게,

준호가 어렸을때, 준호 담임선생님의 딸이 점심시간마다 엄마와 점심을 먹으러 오면서,

준호는 민아와 같은 공간에서 '따로'이면서 '같이' 점심을 먹는다.

하지만, 그건 전지적 작가만 알뿐이지, 준호도 민아도 모른다.

그의 담임은 삼십대 후반으로 평소에 늘 기운 없는 눈빛과 웃음기 없는 표정을 하고 다니는 여자였다. 누구를 특히 차별하는 법 없이 반 애들에게 골고루 무심했기 때문에 그는 선생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혹시 내가 자기 반 학생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닐까 가끔 의심스럽기는 했지만.(50쪽)

 

그에 비하면,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한 남자>편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에 성공한 부부인 벤과 엘로이즈를 중심으로,

그들의 가정생활, 자녀양육, 사랑과 섹스 등에 관한 고민을 그린 작품이다.

이때의 '기초'는 '시작'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는 '근간'이나 '토대'정도가 되어야 된다.

 

그는 서양작가답게,

그리고 그동안 철학서인지 소설인지 불간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책을 쓰던 사람답게,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의 시도를 하고...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철학적 교훈을 주려한다.

솔직히 고백컨데, 난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가 쓴 <메이팅마인드>(=연애)라는 책을 읽지 못했다면 겉으론 쿨하게 이해하는 척하면서...속으론 툴툴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표리부동하게 그를 이해할 수도 있을 듯~!

 

우리는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결혼의 일상성과 그 허상을 날카롭게 탐구하는 걸 지켜볼 의사가 있으며,

인간 각자는 떼어놓고 봤을때 불완전한 존재라는걸 인정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연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만이 결혼한 부부로 잘 사는 길이라는 그의 충고도 귀담아 듣겠다.

(여기서도 사랑에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기서도 사랑에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글로 쓸 수 있다는 '알랭드 보통'의 글쓰기 경험 상, 그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인 듯 느껴져 살짝 꺼림칙하긴 하지만, 뭐~--;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긴 하지만, 인류 대다수에게, 특히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라면 가급적 그런 끔찍한 특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충고가 늘 따라 붙는다.(71쪽)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이긴 하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내 자신에게 편할 수 있는 모습이라면 그대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사랑받고자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오래'라는 기간이 중요할 것 같은데...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그 정도 노력도 못하냐고?

뭐, 그럼...할 말 없는 거고~--;

 

암튼, 정이현에 비하여 알랭 드 보통이 특별히 좋거나 하지는 않지만,

<사랑의 기초-한 남자>편이 내겐 더 개연성 있게 다가왔다.

그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닌,

모든 사랑의 근간에는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내 바램인데,

알랭 드 보통이 그려낸 소설 속의 그들은 어떤 겉모습을 보이더라도,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듯 느껴져서이다.

 

때론 내 자신이지만 왜 그러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왜 그러는지 모르는게 당연한 거다.

남의 마음이니까 내가 모르는게 당연한 거다.

그러니, '뭐 그럴만한...말못할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생각하기 쉬운 일인데,

왜 인색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오늘부터, 지금부터...라도 넉넉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되겠다.

 

Pink Martini는 그걸 남자와 여자의 입장 차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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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6-04 10:39   좋아요 0 | URL
아침 기분이 환기 되는 음악이네요.
정이현은 젊은데도 참 많은 생각이 오고가는 글을 써요.
정이현이 젊은게 아니라 내가 늙었나 싶네요 문득

sslmo 2012-06-04 11:16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좋은 소식 축하드려요.
뭐, 드시고 싶은거 없어요? 헤에~^______^

더 기분이 전환되는 음악, 필요하심 말씀만 하세요.
재깍 대령할게요, ㅋ~.

하늘바람 2012-06-04 12:51   좋아요 0 | URL
저 음악듣고 싶을 때 양철나무꾼님 서재와서 들었어요
좋은 음악이 넘 많아서요

2012-06-04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6-04 20:35   좋아요 0 | URL
사랑에도 연습이...이점 저는 약하게 동의하는 편,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 하므로...^^)
사랑에도 노력이...이건 매우 동감...^^

첫사랑의 실패는 경험이 부족한 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개인 적인 생각이랍니다.
깨달음은 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부분이기도하고
잘 생각해보면 가능한 부분이기도하고..

신뢰, 믿음, 이걸 얻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적극 동감이구요. 물론 그 노력의 일관성이 더 중요...일시적 신뢰는 쩜...^^

많은 생각의 기회를 주는 페이퍼~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2-06-04 21:13   좋아요 0 | URL
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그 정도 노력도 못하냐고?

뭐, 그럼...할 말 없는 거고~--;


에서 빵터졌어요.. ㅋㅋ
첫 음악은 .. 흥겹네요..
오늘 같은 월요일 밤 듣기 참 좋아요.. 양철나무꾼님..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왜 그러는지 모르는게 당연한 거다.

남의 마음이니까 내가 모르는게 당연한 거다.

그러니, '뭐 그럴만한...말못할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생각하기 쉬운 일인데,

왜 인색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네..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더 따져들고 싶고 그래져요..
사랑하는데 넌 왜이래.. ㅠㅠ
암튼 저도 그렇습니다..


blanca 2012-06-05 09:30   좋아요 0 | URL
이 책이 궁금했었는데 나무꾼님 리뷰가 좋아요. <냉정과 열정> 방식이랑은 다르게 그냥 아예 서로 다른 이야기인가요?
 
사랑 아닌 것이 없다 - 사물과 나눈 이야기
이현주 지음 / 샨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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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주 언젠가, 저녁 모임에서 꾸물거리다가 야.자.가 끝날 무렵 아들의 교문 앞으로 갔다.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은 세가지 코스가 있었다.

뭐, 낭만적인 데이트코스를 생각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자 간에 집 밖에서 만나는 건 실로 오랫만의 일이었던지라 두런두런 얘기라도 하며 귀가를 하게 될 줄 알았다.

웬걸~.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A길이 있었지만 산길이어서 밤에는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었고,

B길은 산을 삥 둘러서 있는 대로여서 대중교통편까지 있었지만, 차를 타고 한참을 움직여줘야 하는 길이었다.

C길은 A길과 B길의 중간 정도 거리였지만, 산길만 아니었다 뿐이지 한적하고 외진 정도가 A길에 못지 않았다.

B길을 생각하던 나는 C길을 향하여 앞장 서는 아들을 바쁘게 따라 걸으며 한마디했다.

"한밤중에 꼭 이렇게 위험한 길로 다녀야겠어?"

"엄마, 아님 나?"

"엄마 혼자 여기 올 일이 뭐가 있니? 행여 너 혼자 다닐때 말야."

"엄마, 이 한적한 길에서 누구랑 만나게 되면 내가 위험하다기보다 그에게 위협적이지 않을까?"

 

위험하다기보다, 위협적이지 않을까...에서 요즘 읽은 '사랑 아닌 것이 없다' 이 책이 생각났다.

요번 제목보다 먼젓번 제목 '物과 나눈 이야기(이레,2001)'가 이 책의 취지를 짐작하기 쉬웠는데 말이다.

그걸 '다시 책을 펴내며' 부분에서 '그래서 눈에 띄는 대로 사물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사물과의 대화'까지는 아니어도,

사물을 의인화하고, 사물에 감정 이입하길 좋아하는 나도...이현주 목사님-이분께는 명함을 못 내밀겠다.

 

"앞이 캄캄했고, 내가 길 위에 놓여 있었고, 자네 발이 나를 밟았고, 게다가 내 모양이 퉁겨나기 좋게 되어 있었고, 그래서 자네가 꽈당 하고 넘어졌지만, 그뿐일세. 사람이 밤길에 돌을 밟고 넘어진 것뿐이야.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사실은 자네가 넘어진 것도 아니네. 넘어진 것은 자네가 아니라 자네 몸이거든. 자네 몸이 곧 자네는 아니지 않은가?"

ㆍㆍㆍㆍㆍㆍ

"고맙구먼. 먼저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주시니

ㆍㆍㆍㆍㆍㆍ산다는 게 무엇인가? 나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사람 발에 밟혀도 보고ㆍㆍㆍㆍㆍㆍ그러는 게 사는 것 아니겠나? 자네가 넘어져 상처를 입는 것도 그게 다 자네가 살아있어서 겪는 일일세. 그러니, 그래도 굳이 '너 때문에'라는 말을 쓰고 싶거든 이렇게 한번 해보시게. '너 때문에 사는 맛 한번 봤다. 고마워.' 눈 한번 뜨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善을 이루는 세상이 바로 거기 있다네."(14~15쪽)

 

암튼, 참 독특하시다.

밤길 작은 에 걸려 넘어지고도, 그 속에서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라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내가 아는 이 중에도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있다.

처음엔 '때문에'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덕분에' 투성이인 그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때문에'가 내 기본적인 정서인걸 어쩌란 거야~'하고 툴툴거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긍정적인 마인드'라는 건 바퀴벌레보다 생명력과 전염성이 강한 것인지...

어느새 나도 옮았는지 '때문에' 대신에 '덕분에'라는 말을 되뇌고 있는 거다.

아직 범사에 감사할 정도로 초 긍정 마인드로 거듭나지는 못했지만, 

매사에 감사하고, 좋고, 행복한 마음이 퐁퐁 샘 솟기는 한다.

 

사실은 긍정적인마인드는 그에게 옮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배운 것이다.

영화 '이보다 좋을순 없다'의 대사를 슬쩍 차용하자면,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woman.'이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세상은 불을 피우면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먹기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되고 그런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나무젓가락과 관련하여서 내가 생각해본건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였다.

ㆍㆍㆍㆍㆍㆍ

"나는 나무젓가락이 아니오."

"그럼 무엇이냐?"

"나는 나무요. 당신이 '나무'를 부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런 불가능하지."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는 나무도 아니오."

"ㆍㆍㆍㆍㆍㆍ?"

"구태여 말한다면 나는 땅이오."

"네가 땅이라고?"

"숲의 모든 나무와 풀이 땅에서 나온 땅의 분신인 줄 모른단 말이오?"

"ㆍㆍㆍㆍㆍㆍ"

"그러니 나는 하늘이기도 하지요."

"ㆍㆍㆍㆍㆍㆍ"

"따라서 당신과 나는 본질상 하나인 것이오."

"동의한다. 이왕 입을 열었으니 도움이 될 말 한 마디 들려다오."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서 도움이 될 무엇을 얻어야 직성이 풀리나요?"

"ㆍㆍㆍㆍㆍㆍ"

"그리고 왜 처음부터 나에게 반말입니까?"

"ㆍㆍㆍㆍㆍㆍ"

"내가 당신을 만나서 잠시 젓가락 구실 즐겼듯이, 당신도 좋은 주인 만나서 잠시 사람 구실 즐기시오."

"고맙네. 잘 가시게."

"가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나는 늘 여기 있다네."(34~35쪽)

아래 쓸쓸함과 외로움에 관한 얘기는 참 여러곳에서 여러 변형으로 접했었다.

여기서는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해서 축하한다'고 하는데,

어딘가에선 '내게온 손님이니 대접하라'고 한다.

 

아무래도 '손님이니 대접하라'보다는 '살아있음의 증거'가 잘 와닿는다.

 

외로움과 관련하여서도,

실재가 아닌 관념이고, 관념에서 오는 착각이라고 얘기한다.

이쯤되어야 세상 모든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것'이 되고,

긍정적 마인드를 옮기고 배우는 것이 설득력 있어 진다.

 

스스로 문을 닫아 걸고 나는 외롭다, 나는 어둡다...한 삶은 아니었는지 돌이키는데...뜨끔하다.

"쓸쓸한 자네 감정에 대하여 나는 책임도 없고 할 말도 없네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는 해주고 싶군."

"쓸쓸한 감정을 축하한다고?"

"아니,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그것을 축하한다는 말일세."

"ㆍㆍㆍㆍㆍㆍ?"

"자네가 쓸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금 자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축하받을 일이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

쓸쓸한 느낌은 그냥 거기 그렇게 두고, 나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나는 나의 비어 있음이요 나 아닌 것들의 차 있음(盈)이다. 이 쓸쓸한 감정도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면서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나그네로 가득한 주인이다. 세상은 얼마나 완벽한 조화인가? 가짜가 없으면 진짜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73~74쪽) 

 

 

"외로움이란 실재實在가 아니라 관념이다. 관념에서 오는 착각이다. 자네들이 말하는 '외로운 사람'이란 자기가 외롭다는 착각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외롭다는 것은 혼자 떨어져 있다는 말인데 神은 만물을 지을 때 아무리 작은 것도 그것만 따로 떼어내어 짓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신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라. '이웃'이 없는 존재가 세상에 있는가? 나무는 흙에 뿌리 내리고 새는 허공에 날개를 띄운다. 특히 인간에게는 여섯 개나 되는 문이 있고 거기에 맞추어 여섯 경계(六界)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눈-色, 귀-聲,코-香, 혀-味, 살갗-觸, 생각-法), 스스로 문을 닫아놓고서 나는 외롭다, 나는 어둡다고 말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연한 엄살이요, 무지에 뿌리 내린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93~194쪽)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날카롭지 않은 부분들은 내 몸의 지극히 작은 부분인 '날카로운 끝'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이 날카로운 끝 한 점에 수렴收斂될진대,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이라고 해도 잘못은 아니겠지."

"아무렴. 끝이 뭉툭한 송곳은 더 이상 송곳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자네의 '뾰족한 끝'은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그것 아니면 자네가 자네일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

"그것 아닌 자네의 모든 부분이 오직 그것으로 수렴되는 그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ㆍㆍㆍㆍㆍㆍ?"

"참고삼아 말해주지. 바울로라는 사람은 일찍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했네."

송곳의 날카로운 끝에 가슴이 찔려 나는 지금 아무 말 못하겠다. 다만, 바라건대 나 또한 바울로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ㆍㆍㆍㆍㆍㆍ그리하여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 내가 곧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ㆍㆍㆍㆍㆍㆍ(78~79쪽)

 

 

"법광 모습의 내가, 부채 모습의 나를, 관옥觀玉 모습의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런즉 내가 나에게 나를 선물한 것이란 말인가?"

"정확한 표현!"

"불가에서 말하는 삼체개공三體皆空(주는 자도 공이요, 받는 자도 공이요, 주고받는 물건 또한 공이다)이 그것 아닌가?"

"맞다."

"그렇다면 내가 나에게 나를 선물하는 까닭이 무언가?"

"선물을 주고받음은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ㆍㆍㆍㆍㆍㆍ

"논리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신비가 여기 있다. 그림자가 그림자로 존재하려면 먼저 빛이 있어야 한다. 그림자는 빛의 다른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명심해 두어라. 이 세상에는 사랑의 표현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ㆍㆍㆍㆍㆍㆍ모든 것이 내가 나에게 드러내는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내 일찍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하지 않았느냐?"(83~85쪽)

위 부분을 읽으면서, 잠시 이현주 목사님의 종교를 의심했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종교나 철학을 막론하고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하나로 연결되고 통하여 넘나드는 경계없는 어떤 상태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현주 목사님이 바로 그 경지인 것 같다.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림자는 빛의 다른 표현'이라는 부분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겉으로 의연한 척하고 쿨한 척 하지만, 속으론 늘상 조바심내고 안달하고 그러면서 사는 일상이었다.

모든 걸 우아한 백조의 물속 발길질로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노력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열심히 하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하였다.

진인사( 盡人事)한 후엔 대천명(待天命)해야 하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조바심과 안달 속에 속이 시끄러웠다.

"누군가 나를 버려도 그가 한짓이지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네. 그의 '버림'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나는 버림받지 않는다네."(92쪽)

모든것이 마음먹기에 달린거란걸, 긍정적인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한 마디만 더 하지. 충고로 들어도 좋아. 누구한테 쓰임을 받으려고,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안달하지 말게. 창 밖에 내리는 비한테 물어보라고. 너는 지금 누구한테 무슨 쓸모가 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냐고. 부디 자네한테 지금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만 사시게. 지금 자네가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히 재미있게 살 수 있어. 그렇게 날마다 그날 하루만 살게나. 무엇보다도 자네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말일세.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네가 말하는 자연법, 그러니까 하느님의 命에 순종하는 삶 아니겠는가?"(101~102쪽)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구절이다.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만 살라...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히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모든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란 말의, '긍정적인 마인드'의 다른 표현이지 싶다.

 

내가 자주 느끼고 어쩌지 못했던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실재가 아니라 관념이었단다.

실체가 없기론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마음은 닦을 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쓸(用) 때 빛난다.

(실체가 없어 닦을 수 없으니까~--;)

제대로 쓸 궁리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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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4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4-06-03 08:3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주 무모했다는 ㅠ.ㅠ
하여 저를 아주 곱아쥐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그 불길한 예감...
빈틈이 보이면 전 융단폭격을 당할 운명에 처해있습니다요 ㅠ.ㅠ

그러나 양철나무꾼님 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는 한 달 전 스텔라님께 욕을 바가지로 먹고(안보이는 댓글로 ㅠ.ㅠ)
스텔라님과는 영영 결별한 상태랍니다.
스텔라님...제게는 안이쁜 분이에요^^
행여 관계의 회복?? 이건 불가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모한 짖을 왜했냐면요...
"한사람을 뺀 모든 인류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한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은,
그 한사람이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화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라는...어디에서 읽은 글 때문입니다 ㅠ.ㅠ

무모한 짖을 한 저를..
이쁘게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에게 이쁨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쿠더덩~^^

고맙습니다 양철 나무꾼님~


2012-05-30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2-06-04 11:27   좋아요 0 | URL
님의 글들을 다시 종종 볼 수 있게 되어 '정. 말.' 기뻐요.

계속 이곳의 사람들로 인하여 맘 상하고 상처 받고 하는데,
가만 돌이켜보면,
또 제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리하여 제게 살아갈 힘을 주고 하는 것도 이곳이더군요~^^

네, 우리 서로의 자리에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면...
'왕의 남자'의 그 버젼,
너 거기있고 나 여기있고~^^
그것만으로도 때론 위안이라는 거,
님이 제게 그런 존재라는 거,
알고 계실까요?^^

글샘 2012-06-01 10:24   좋아요 0 | URL
마음은 닦을 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쓸(用) 때 빛난다...
참 좋은 말이네요~ ^^
그래서 '인연'이 중요하다잖아요.
직접적 원인인 '인'과, 간접 환경인 '연'이 잘 맞으면... 크게 쓰이는 거고 초긍정 마인드도 생기는 거고...
그게 자꾸 꼬이는 인연을 만나면... 속이 상하고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그런 거...

sslmo 2012-06-04 11:33   좋아요 0 | URL
샘은 '인연'따위보다는 노력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주의일 줄 알았는데, ㅋ~.

저기 자꾸 꼬이는 인연이란 '악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흐르는 대로...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하늘바람 2012-06-03 10:56   좋아요 0 | URL
오붓한 데이트를 꿈꾸기엔 아드님이 넘 커버렸나봐요
사실 큰게 아니라 큰 척 하고 픈게지요 빨리 어른이 속박을 벗어버리고 싶을 때일테니까요

sslmo 2012-06-04 11:36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의 댓글은 길지 않아도...
은근 멋스러운 거 알까요?^______^
오늘 이 댓글 참 맘에 들어요.

'사실 큰게 아니라 큰 척 하고 픈게지요'
이걸 기억하면...이해 못 할것도 없을텐데,
맨날 툴툴거리는 야박한 엄마예요~--;

jeweleye7 2013-03-03 02:23   좋아요 0 | URL
이 책 읽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어떻게 이해 하셨는지 궁금해요.
p18 "여기 입원한 환자... , 저 사람들도 세상의 온갖 정신적 쓰레기를 자기 몸에 담아서 그만큼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제 생각은 정신병 걸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외부에 의해 복잡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사람이고 그 것을 풀어 줘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이 부분의 의미를 모르겠네요. 왜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있는지... 무슨 뜻 일까요?
 

나이 마흔의 언저리이다.

공자는 '불혹'이라고 하여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난 불혹의 나이에 한참 못 미쳤어야 하거나,

벌써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아야 하는데...이도 저도 아니니, 원~--;

그렇다고 공자도 터득하는데 40년이 걸린 그 불혹의 묘를 하루 아침에 터득할 수도 없는 일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몸소 체화하여 한걸음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싶다.

 

공자와 같은 훌륭한 학자도 40년 동안 전력을 다하여 공부하고 갈고 닦아서 도달한 경지인데,

나같은 범인이 마흔 언저리라고 하여 범접할 수 없음은 어쩜 당연지사인듯 하다.

다시 말해, 나이 마흔 언저리에서 '불혹'에 이르지 못했다고 부끄러워 하고 손 놓고 앉아 있을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내 삶에 적용 익히고 체화하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서랍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이 책 이정록 산문집 <시인의 서랍>은 그런 의미에서 펼쳐들게 되었다.

하긴 이 책 뿐만 아니라, 요즘 내가 펼쳐드는 모든 책은 다 그 연상선 상에 있었다.

 

이 시인은 '불주사'라는 시로 처음 만났다.

시가 수려하다기보다는, 꾸밈이 없고 수더분해서 좋았다.

그도 우리네 사람사는 세상의 일들을 고스란히 겪고있는 듯 느껴져...수선스럽거나 호들갑스럽지 않게,

다시말해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고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문턱이나 경계 따위가 없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번엔, 그런 그의 산문집이다.

산문집은 시보다 형식적인 면만 보더라도 더 자유스럽다.

하지만, '불혹'을 '자유'와 등가(等價)로 놓기에는 기준과 방향이라는 제재가 따른다.

 

암튼, 그의 글은 시면 시, 산문이면 산문...일단 글이 뛰어나다.

하지만, 뭇사람들이(아니, 쟁쟁한 소설가들이) 그에게 소설을 쓰라고 했을 정도로, 이야기는 더 감칠맛이 난다.

소설을 쓰라는 권고에 대한 그의 대답 또한 일품인데,

"시 속에 소설을 뭉뚱그려 품어보겠습니다."

였단다.

 

             불주사

                          - 이 정 록  

 


내 왼 어깨에 있는 절이다

낭떠러지에 지은 절이라서

탑도 불전도 사라지고 없다

눈코 문드러진 마애불뿐이다

귀하지 않은 아들 어디 있겠냐만

어머니는 줄 한 번 더 섰단다

공짜라기에 예방주사를 두 번이나 맞혔단다

그게 덧나서 요 모양 요 꼴이 됐다고

등목 해줄 때마다 혀를 차신다

보건소장이 아주 좋은 거라고 해서

한 번 더 맞히려했는데 세 번째는 들켰단다

부처님도 자라는 흉터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것 때문에 가방 끈도 군대 삼년 소총 멜빵도

흘러내리지 않아 좋았다 말씀 드려도

내가 네 몸 버려놨다고 무식한 어미를 용서하란다

인연이란 게 본래 끈이 아닌가

내 왼 어깨엔 끈이란 끈

잘 건사해주는 불주사라는 절터가 있다

어려서부터 난 누군가의 오른 쪽에서만 잔다

하면 내 인연들은 법당마당 탑신이 아니겠는가

내 왼 어깨엔 어머니가 지어주신

불주사가 있다 손들고 나서려고만 하면

물구나무 서버리는 마애불이 산다

'불주사'말고 내가 아끼는 시는 '더딘 사랑'이라는 시인데,

시인 스스로가 읽고 또 읽어 건진 다섯 문장 중에 들어가는 시라는 걸 알게 되자 더욱 더 애착이 간다.

 

               더딘 사랑
                          - 이 정 록 -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암튼,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여기저기서 어머니가 무게있게 등장한다.

'불주사'란 시에서도 그랬었고,

이 '시인의 서랍'이란 산문집의 첫머리에서도 그렇다.

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 책의 1/3까지는 시인과 어머니의 대화가 선문답 같은것이 너무 재밌어서 책속에 머리를 박고 헤어나지를 못했던 반면, 나머지 2/3는 책장을 설렁설렁 바람을 일으키며 넘겼다.

그러고 보면, 그의 불혹은, 다시 말해, 그가 쓰는 글의 원천은 아무래도 어머니인가 보다.

아니면, 어머니는 모든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의 원천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母語다'라는 부분에서부터 어머니는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간다.

표준어로 구사하여, 모든 사투리는 통역이 필요한 나의 경우에도,

'농사천재'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따옴표 처리가 되어 책에 글자로 들어가 박혀 있는게 아쉬웠다.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오디오 북 같은 것이나 보이스 레코더로 따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리얼버젼으로 듣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진다.

물론 글에서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히 글쓴이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거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 또는 산문 모두 소재의 일정 부분을 어머니가 담당하고 있고,

그런 그의 글들을 읽는 독자라면, 어머니를 향하여 새록새록 솟아나는 관심과 흥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어머니는 '농사천재'일뿐만 아니라, 어찌보면 인생에 도통한 '도사'이시다.

 

가로등에서 빛이란 걸 배웠다고 했다가는 이내,

"인생 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속 그늘! 그 그늘을 잘 경작혀야 풍성한 가을이 온다고 말이여."

라며 그늘 예찬론자로 말을 바꾸지만,

그런 당신을 향하여,

"왜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고 그러세요~?"

하며 툴툴거리게 되지는 않는다.

행여 이리 저리 늘어놓으시던 감칠맛 나던 얘기들이 쏙 들어가지나 않을까 그게 조심스럽다.

조용히 멍석을 내다 펴게 만드신다.

"그늘이 짙으면, 노을도 되고 단풍도 되는 거여. 사과도 홍시도 다 그늘이 고여서 여무는 거여. 뭣도 모르는 것들이 햇살에 익는다고 허지. ㆍㆍㆍㆍㆍㆍ."

이런게 제대로 된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이라고 하겠다.

 

그의 글에선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일정 역할을 담당해 균형(=불혹)을 잡아주고 있다.

아버지의 지팡이에 새겨진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글귀가 아버지의 유언이 되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지팡이를 떠받들고 있는 걸레를 보고,

'그려, 걸레가 돼야지. 걸레는 저렇게 숭엄하지.'하는 것도 그렇고,

그가 쓰는 시는

'지팡이, 걸레, 행주, 발수건이지. 내가 쓰는 시는 이 네가지에다 주소를 둬야지. 그러다보면 시보다도 어렵다는 삶이란 녀석도 지팡이 짚으며 따라오겠지.'

라며 마음을 다잡는것도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에 다름 아니다.

 

난 여기서 지팡이의 종류와 효용에 대해서 잠깐 생각을 했다.

'걸을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짚는 막대기'를 '지팡이'라고 한다.

크게 피켈(pikel)이라고 불리우는 등산용 지팡이와 노인용 지팡이로 나눌 수 있다.

등산용지팡이는 끝이 뾰족하게 되어 있어서, 짚는 용도 외에,

계곡의 물 깊이나 설산의 눈 깊이, 낙엽의 쌓임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고,

무엇보다 설산이나 빙벽을 오를 때 발판을 만들어주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노인용 지팡이는 짚는 게 가장 큰 역할이다.

 

때문에 등산용 지팡이와 노인용 지팡이를 효용에 맞게 골라 드는게 중요하다.

등산객들이 노인용 지팡이를 드는 경우는 흔치 않으나,

개중에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꺾어 짚는 용도로도 보조적 역할만 할뿐이고,

가늠하는 역할도, 작업용 삽 또는 곡괭이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지팡이의 종류와 효용을 들먹인 이유는, 후자때문이다.

노인용 지팡이는 짚는 역할만을 담당한다.

신선이 드는 이리저리 꼬인 지팡이라면 한번쯤 멋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으려나?

미적 기능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노인이 짚는 거니 우선 가벼워야 하겠고 그리고 체중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야 하겠다.

우리나라에선 '청려장'이라고 하여 명아주라는 한해살이 풀을 잘 말려 지팡이의 재료로 사용하곤 한다.

 

노인용 지팡이를 등산용 지팡이처럼 끝을 뾰족하게 하면 짚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보통은 고무캡을 씌워서 지지면을 넓히고 마찰을 최대화하여 잘 짚도록 하는데,

사용하면서 고무캡이 닳아 없어진 것을 방치하였다가 미끄러져 넘어져 다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하겠다.

 

책의 다음 부분에서 한참, 아주 오래 머물렀다.

요즘 내 서재대문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안전거리 확보'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억지스러운지 모르겠지만, '안전거리 확보' 또한 내겐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으로 작용한다.

 물끄러미, 마음속 하늘을 들여다본다.

 누구에게나 눈물 몇 모금의 웅덩이는 있는 것이어서, 언제고 세상의 미꾸라지와 개구리는 내 안에서만 흙탕물을 일으킨다. 가슴속 하늘에는 황사 구름이 사철 부옇게 서려서, 도대체 이놈의 마음에 언제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마친단 말인가.

 하지만, 누추한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대견하고 고즈넉한 일인가. 내 마음에 안치해놓은 풍경 위에 나를 덧대어, 새로운 풍경으로 감싸 읽는 것은 얼마나 위무적인 일인가. 풍경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자에게 부단한 치유의 능력을 보여준다.

 

 오래도록 마음속 왜가리의 목덜미와 진흙 묻은 부리를 어루만질라치면, 못자리에 뜬 하늘처럼 나도 우련히 깊어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부끄러운 지난날들의 흙탕물이 고요히 가라앉는다. 마음의 앙금 안쪽에 실뿌리가 뻗는다. 부유하는 삶은 흐리다. 정처가 없다. 정처가 없으면 뿌리가 내리질 않는다. 뿌리를 기르지 않는 풍경은 힘이 없다. 바닥이 없다.

 오늘 나는 작은 거울에 입김을 불어 넣고 이 말을 쓴다.

 '물끄러미!'

 아, 저녁 같은 이 말의 촉촉함에 나를 비빈다. 내치는 것도 아니고, 와락 껴안는 것도 아니다. '물끄러미'라는 말속에는 적정한 거리가 있다. 대상이 녹아서 나에게 스며들 때까지의 묽은 기다림이 있다. 째려보는 것도 아니고 쏘아보는 것도 아닌, '넌지시'가 있다.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안쓰러운 나를 보리밥에 열무김치처럼 비비는 것. 비빔밥 옆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슴에 들이는 것!

 물끄러미, 오래 젖을 것! 풍경에 나를 덧대고, 내 안에 서려온 그늘이나 설움을 오래 문대며 들여다볼 것!(163~165쪽)

책을 통한 간접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의 그것들이 내게 깨달음을 주는 이유는...앞에서도 얘기했었지만,

그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지지고 볶고 사람사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 사는 세상의 일들을 겪은 그대로 꾸밈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내가 책을 통해 하는건 간접경험이지만,

이 시인이 하고 책에 적어내려간 것은 생생한 날 것, 직접적인 체험이어서...내게 감동적으로 와닿았던 것 같다.

 

공자같은 훌륭한 학자도 불혹이라는 것을 터득하고 체화하는데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모든 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였을때에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결과를 낳더라도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구절은 내게 '불혹'이고 '지팡이'이고,

때문에 'insure safety distance'인 셈이다.

 그러나 손길은 바로 곁에 있을 때만 유효하다. 손길이 닿아야 할 곳이 멀다면 그곳까지 손을 옮길 수 있는 것은 발길이다. 가닿아야 할 손길이 사랑의 편지이거나 책과 옷을 묶은 소포라면, 그 발길은 우표와 우체부가 대신할 것이다. 빨리 뛰어가야 할 손길이 돈이라면, 금융기관의 온라인과 체신부의 우편환이 발길이 되어줄 것이다. 빈손으로 가는 가난한 손길이라면 그 손길의 따뜻함은 다리품만이 온전히 가지고 갈 수 있다.(167쪽)

그런 후에야 '파파로티와 친구들'이나 'live like horses'따위를 들먹이지 않고도, '불혹'과 '지팡이'를 맘껏 얘기할 수 있겠다.

 

 

 

 

 

 

 

 

 

 

 

  4집 For War Child - 1996년 실황 /ABCD006
  유니버설뮤직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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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2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2-05-23 14:32   좋아요 0 | URL
등을 등짝이라고 표현하신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인가요?
좌우대칭의 개념으로 짝이란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부위를 구체적으로 집어주시구요.
아프신 시간대가 있는지요.
또는 그동안 안 드시던 음식을 드시는 건요.

위 내용만으론 집작하기 어려운데, 부자나 초오 쪽으로 과한 약을 드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건 우리나라 동해 해풍을 받아 말린 황태로 끊인 황태국이요~^^

2012-05-23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3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2-05-23 14:35   좋아요 0 | URL
위 댓글로 궁금증을 일갈 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고명, 박후...저도 덤으로 새기겠습니다.고맙습니다~^^

글샘 2012-05-23 08:54   좋아요 0 | URL
공자가 살던 당시에... 인간 수명이 40세쯤 됐을 거예요.
그러니 50이면 벌써 하느님 맙소사~(지천명)가 나오죠. ^^
지금은 100세쯤 됐으니 말입니다. 80세쯤 불혹으로 하죠~
아직 마흔이시면 '물혹'이나 조심하시고~ ㅋ

손길의 따뜻함...을 읽다 보니, 길손,이란 단어가 생각나네요~
물끄러미 보니깐 왠지...
우리가 걷는 길~ 누구나 길손이잖아요. 따뜻한 손길은 길손에게 참 큰 위안이 되겠다는...

2012-05-23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2-05-23 14:3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도, 약(오름)도, 손길의 따뜻함도~
'뭇'과 '최대화' 수정했습니다, 꾸벅(__)

설렘나라 2012-05-23 10:36   좋아요 0 | URL
지은이 이정록입니다.
감지덕지한 찬사와 후춧가루같은 꾸짖음 감사합니다.
이리도 유연하고 멋진 독후감이 있군요.
자신의 이야기와 책의 내용을 잘 비벼서
참기름만 치면,맛난 비빔밥이 되겠네요.
메주에 구슬끈이군요.
저는 님의 독서에 비하면, 쇠꼬리에 마른 소똥, 소똥 위에 쇠파리 정도랄까?

이정록 두손

sslmo 2012-05-23 14:52   좋아요 0 | URL
시인이 직접 왕림하여 주시고, 제가 오히려 설레이는걸요~^^
비빔밥이 될 것을 짐작했었는지,
아무리 되짚어 봐도 후춧가루를 사용한 예는 발견 못했는 걸요.
맛난 비빔밥의 관건은 참기름이 좌우하는건데,
참기름만 치면 이라 하시면...한참을 더 비벼야 할 것 같고,
'막걸리에 마늘꽁에 고추장 척'이 더 가까울 것 같은데...
(마늘꽁이 뭔지 몰라 국어사전을 찾아봤습니다여.)
죄송합니다,마늘꽁을 못 먹는다는~--;

암튼, 무한 영광입니다. 꾸벅(__)

감은빛 2012-05-23 15:30   좋아요 0 | URL
우와! 정말 멋진 시인에, 정말 멋진 글이로군요!
"시 속에 소설을 뭉뚱그려 품어보겠습니다."
저 한마디에 저도 이 책을 꼭 읽고 싶어졌습니다.
바빠서 시도 소설도 못 읽고 사는 요즘.
어디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졸다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인이 직접 칭찬의 댓글까지!
역시 양철님 대단하셔요~! ^^

oren 2012-05-23 23:20   좋아요 0 | URL
지팡이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를 쭈욱 읽다보니 도산서원에서 보았던 퇴계선생님께서 생전에 쓰셨던 (신선 할아버지가 던져준 게 아닌가 싶을만큼 멋진) 명아주 지팡이도 떠오르고, '왼 어깨에 있는' 불주사와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는 돌부처에 관한 시를 읽어보니 어느새『월든』 속의 '쿠우루의 지팡이'에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든든한 지팡이 하나만 있어도 불혹 이전에 이립(而立)이라도 제대로 한번 해볼 수 있을텐데 말이지요...
* * *
쿠우루에 완전을 갈구하던 한 장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지팡이를 만들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한 요소가 되겠으나 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비록 한평생 딴 일은 아무것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완벽한 지팡이를 만들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부적당한 재료를 써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으므로 그는 재목을 구하러 즉시 숲으로 떠났다. 그가 쓸 만한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다가 퇴짜를 놓는 사이에 그의 친구들은 점차로 그의 옆을 떠났으니,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다 늙어서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늙지 않았다.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그의 결심과 숭고한 믿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영원한 젊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은 그의 길에서 비켜나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멀리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그가 모든 점에서 알맞은 재목을 찾아냈을 때는 쿠우루는 폐허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그 폐허의 어느 흙 둔덕에 앉아 지팡이를 깍기 시작했다.

지팡이의 모양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칸다하르 왕조가 망했다. 그는 지팡이의 끝으로 모래 위에 그 왕조 마지막 왕의 이름을 쓰고는 다시 일을 계속했다. 그가 지팡이를 매끄럽게 다듬어놓았을 때 칼파는 이미 북극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지팡이 끝에 쇠붙이를 달고 보석으로 장식된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을 달았을 때는 브라마 신은 수없이 잠이 들었다 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의 작품에 마지막 손길이 가해지자 지팡이는 깜짝 놀라는 장인의 눈앞에서 브라마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되어갔다. 그는 지팡이를 만드는 가운데 새로운 체계, 충실하고도 균형 잡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옛 도시들과 왕조들은 사라졌지만 그보다도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도시와 왕조들이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발밑에 수북이 샇여 있는 나무 깎은 부스러기를 내려다보았는데, 그것들이 아직도 생생한 것을 보고 이제까지의 시간의 경과는 단지 하나의 환각에 지나지 않았으며, 브라마 신의 두뇌에서 나온 한 섬광이 인간 두뇌의 부싯깃에 떨여져서 불붙은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재료가 순수했고 그의 기술도 순수했으니 그 결과가 경이로운 것 외에 무엇일 수 있겠는가?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월든』 중에서

하늘바람 2012-05-27 11:53   좋아요 0 | URL
범인이라 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어떤 범인이신가 하니 너무 비범한 범인이시잖아요.
시인의 서랍이란 말 자체가 참 이븐 거 같아요

차트랑 2012-05-29 09:32   좋아요 0 | URL
하늘 바람님 놀라시면 안되는데~^^

하늘바람 2012-06-03 10: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친구가 책 몇 권을 보내줬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그랬겠지만,

난 바쁘다는 핑계로 그 중 한권을 제대로 들춰 읽지는 못하고,

'김탁환'의 '열하광인'에 나오는 '명은주' 버젼으로 연모하는 사내 대하듯 책에자신의 감정을 옮겼다. 겉표지에 입 맞추고 손바닥으로 쓸고 글자 하나하나를 검지로 만지며 내려가고 옆구리에 끼거나 젖가슴에 댄 채 잠들고 머리맡에 두었다가 새벽잠에서 깨자마자 냄새 맡고 여백에는 검지로 도장 찍는 흉내를 내며, 이 책과 영원히 함께 머무를게요 맹세만 해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그래도 그럼 안되겠다 싶어 집어든 책이 제일 가벼운 이 시집이었다.

 

 

 

 

 

 

 

 

  다정한 호칭
  이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시인은 명은주를 흠모하는 내 마음을 엿보았나 싶게...아무렇게나 펼쳐든 시집  구석 구석에서 이런저런 시구절로 나를 유혹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바람의 지문' 부분)

책의 주요기능이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보기'이니까,

바람의 '보이지 않는 지문',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 등으로 미루어 잠시 나도 시각적 효과에 집중 했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읽다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로 미루어 다분히 촉각적, 말하자면 감각적인 시가 되어 버렸다.

책 한 권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보았을 뿐인데,

책 한 권 위를 거쳐간 보이지 않는 당신의 손길과 지문을 느낄 수도 있고,

책 위의 보이지 않는 지문 위로 내 뺨을 댄 건데도,

뺨을 간질이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거다.

내 뺨을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어느새 바람의 손길에 내 뺨을 내어 맡기는 게 되어버리고,

그렇게 내맡긴 나와 내 뺨을 어루만지고 간 바람(wind)의 손길을 기억하고 싶은 바람(wish)은 어딘가에 '각인'되게 마련이고 그걸 '지문'이라고 부른다.

 

지문은 '오래된 근황'이라는 시에선 마침표 대신이 되기도 한다.

이건 햇볕이나 바람 등 자연이 주는 선물에 오롯이 자신을 내맡겨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축복이다.

그저 비치는 햇살인데 나를 따사롭게 비춰주는 넉넉한 햇살이 되고,

그저 부는 바람인데 '괜찮다, 괜찮다~' 나를 다독여주는 바람이 된다.

그렇게 보면 햇살이, 바람이, 삶이, 그리하여 당신이 그저 고맙다.

 

나를 발명해야 할까

                

 정말 구름을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걸

까 사람들은 조그쯤 회의주의자일 수도 있겠구나 설령 빙하

를 가르는 범선이 난파를 발명했다고 해도 깨진 이마로 얼

음을 부술 거야 쇄빙선에 올라 항로를 개척할 거야 열차가

달리는 이유를 탈선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사람

들은 궤도를 이탈한 별들에게 눈길을 주는 걸 몹시 염려해

평범한 게 좋은 거라고 주술을 멈추지 않지 누군가 공기보

다 무거운 비행기를 띄운 오만함이 추락을 발명했다고 말

한다면 그럴 수도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든 이동은 늘

매혹적인 걸 나로부터 멀어져 극점에 다다르는 것으로 나

를 발명해야 할까 흐르는 구름을 초대하고 싶은 열망으로

 

'나를 발명해야 할까'라는 시도 좋았다.

이 시는 내게 시점의 전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해주었다.

'시점의 전환'이란 쉬운 말로 하자면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정도 되려나?

입장이란 참 오묘한 것이다.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방향만 바뀌었을 뿐인데도...'나로 인함이냐'와 '나로 말미암음'처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시점을 전환시키는거, 즉 입장 바꿔 생각하는 건 쉽지 않을 뿐더러...게다가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건 더더욱 쉽지 않다.

긍정주의자와 회의주의자,

데려오는 일과 마중가는 일,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과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 것 등...

 

세상일이란 것이 시점의 전환,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것 정도는 가능한 일이라면...

까짓것, 초긍정 자아의 시점으로 전환하고 싶다.

시점만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햇살도, 바람도, 그리하여 삶도 한없이 넉넉해진다는데,

그리하여 구름을 초대할 수도 있다는데,

그 정도 모험을 마다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건 '허밍, 허밍'이라는 시였다.

입을 벌리지 않고 소리를 내기때문에 소리가 크거나 분명하지 않아,

가사를 전달할 수 없지만 기분은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게 '허밍'이다.

이 콧소리, 허밍은 나의 경험에 미루어 기쁘거나 즐거울 때나 나오지...슬플때는 나와 줄 수가 없다.

 

또 일반적인 음악소리보다는 한참 작기 때문에 보통 합창이나 중창곡에서 많이 쓰인단다.

허밍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만히 있다보면 어느새 기분이 흠뻑 담굼질해 물든 것 같이 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허밍, 허밍

                                               

  종종 구름을 눈에 담는 습관, 당신의 폐활량이 천천히 부

풀 때 그날의 공기를 부러워한 적 있다 구름을 가리키며 바

람의 춤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허밍은 입술에 기대는 음악일

까, 기대지 않는 음악일까

 

  바람의 춤이 보인다면 그건 구름의 몸을 빌렸거나 폐활량

이 푸른 여름잎의 소관일 것, 구름은 바람으로 흐르고 바람

은 여름잎으로 들리니까

 

  언젠가 고원의 사라진 호수에 대해 이야기 나눴지 수면을

맴돌던 그때의 구름은 지금 어디 있을까 가장 낮은 하늘을

흐르고있을 호수 저편, 깃털무늬구름이거나 물결무늬 구름

 

  당신은 잠시 구름사전 속 이름들을 덮는다 구름과 노닐기

에 알맞은바람이므로, 구름의 후렴은 음악이다 마지막 소

절이 첫 소절로 흐르는 허밍, 허밍

 

사라진 호수 저편

팔랑, 수면을 깨뜨리는 나비 한 점도 좋을 오후

 

허밍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feel충만하여 듣는 음반 중에 zaz가 있다.

 

 

 

 

 

'제2의 에디트 피아프'라고 불릴 정도로 유럽에서는 이미 유명하다는데,

그녀의 히트곡이라는  'Je Veux(난 원해요)'를 우연히 듣게 된게 시작이었다.



"뭔가를 만든다는 것, 그건 두려운 게 아니다.난 만들고 난 뒤를 생각한다"는 그녀의 소신을 엿보는 일은,

프랑스 대중 음악의 밝은 미래를 예감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노래를 듣다보면 중간 중간에 애드 립(ad lib)이 나오는 데, 난 여기서도 이은규의 시'허밍, 허밍'을 떠올렸다나, 어쨌다나?
하긴 중간의 이 애드립은 '허밍'이라기 보단 스캇에 가까울테지만 말이다, 암튼~.

 

암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 가능성을 다방면으로 발휘하는 그녀가 참 멋지다.

zaz를 통하여 재발견하게 된 곡이 있는데, All of me라는 곡이다.

이 곡도 중간에 나오는 애드립이 압권이다.

 

 

zaz 버젼의 이 노래를 듣다가, 이 영화가 생각났다. 

다소 황당하지만, 유쾌했던 이 영화...나른한 이 봄날 오후에 딱인 그런 영화였다. 

 

 

 

영화 (all of me)두영혼의 남자 -첫장면

 

영화 (all of me)두영혼의 남자 -ending cr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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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8 16:01   좋아요 0 | URL
나 머리 아파, 나 목 아파, 나 어깨 아파, 나 몸 아파,
코알라도 머리 아파, 코알라도 목 아파, 코알라도 몸 아파,

둘이 멀 했는지, 오늘 정신차리니, 봄이 훅 날아갔더라.... ㅠㅠ

파란놀 2012-05-19 04:41   좋아요 0 | URL
즐겁게 부르는 노래는
온누리를 따사롭게 보듬으리라 생각해요

2012-05-19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땅의 5월은 노동절과 함께 시작된다.

때문에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라도 읽으며,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따위를 꿈꾸어야 하겠지만,

1년 열두달 연예계의 소식이나 소문 따위엔 별무관심인 나도,

노총각의 대명사인 김제동은 '이 봄 과연 결혼을 할 수는 있을까?' 따위가 궁금해도 좋을 만큼,

청춘남녀의 핑크빛 얘기가 만발한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 번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의 인세는 기부를 했다는데,

요번 <김제동이 어깨동무합니다>의 인세는 결혼자금으로 쓰겠단다.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2년 4월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1년 4월

 

 

그래서 책 한권을 읽고 제대로 속물 노릇을 하기로 했다.

'어깨동무'라든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따위를 김제동이 얘기하려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내 맘대로 해석해 버리는 우를 범하기로 했다.

뭐, 아무렴 어떤가?

똑같은 물을 먹고도 뱀은 독을, 소는 우유를 만든다는데...

책 한권을 인문학서로 읽든, 연애지침서로 읽든...

김제동을 어떻게 올 봄 노총각 신세를 면하게 하는데 심정적으로 일조를 하는데 의의를 두고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님, 말고~--;

 

보통 이런 인터뷰집을 읽게 되면 인터뷰이의 이야기에 주목을 하게 되지,

김제동 같이 인터뷰어의 목소리에 주목을 하게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차근차근 되짚어 읽고 천천히 곱씹어가며 읽느라고 자꾸 속도가 늦어졌는데,

그렇게 그렇게 한박자 쉬어가며 읽다보면 어느새 그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 들어,

왜 우리가 그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는지,

그의 한마디 말이나 행보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지, 를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이를 축복이라고 하는 거야. 서로 땡기는 것도 축복이지만 서로 전혀 안 땡기는 것도 축복이야.(136쪽)

김제동이 상대를 향하여 농담처럼 눙치는 이는 이효리이다.

그냥 농담처럼 뱉어내지만, 이 부분에 아주 심오하고 중요한 철학이 담겨 있다.

아무리 절절하고 좋은 감정이라도 상대와 같아야 축복일 수 있는 것이지, 서로 어긋날땐 그렇지 않다는 거다.

전혀 안 땡겨서 서로 밀어내는 감정이어도 상대의 것과 내 것이 같다면 오히려 축복일수도 있겠다.

 

*ㆍㆍㆍㆍㆍㆍ봉사하러 모인 사람들끼리의 만남은 정말 행복하더라.

->나도 그래. 봉사하면서 만난 친구와 예전에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와는 유대감이 완전히 달라. 의지하는 마음도 생기고, 동지 같다는 느낌도 있어.ㆍㆍㆍㆍㆍㆍ그냥 나와서 웃겨주고 즐거움을 주던 연예인이 안 보여서 서운하다가 아니라, 나와 뭔가를 함께 하던 동지를 잃은 안타까움을 주는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느끼는 희열은 달라. 게다가 그 목표나 신념이 내 자신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것일 때 내 마음속에 채워지는 보람, 그 느낌이 너무 좋아.(139~140쪽)

*ㆍㆍㆍㆍㆍㆍ그래. 원망이나 미움이 고마움으로 바뀌는 순간 네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낀 거네? 사랑받을 때가 행복하니, 사랑할 때가 행복하니?

->당연히 줄 때가 행복하고 좋지. 내가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뭔가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피해를 감수하면서 희생했던 기억이 없었거든. 그래서 지금 행복해.(141쪽)

 

이부분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김제동과 이효리의 유대관계만은 아니었다.

김제동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재주를 가졌다.

이런 저런 인터뷰이들이 다수 등장해서 산만해질 우려가 있음을 인식해서 였는지 모르겠지만,

인터뷰어로써 인터뷰이들에게 얻고자하는 대답의 포인트를 제대로 집어서 묻는다.

이미 질문이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고, 질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어떤 대답들이 등장할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인터뷰집을 읽게 될 다른사람들에게 적어도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삶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자처한다.

봉사에서 함께하는 동지라는 개념을 끄집어내고,

그런 것들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는 신념을 끄집어내고,

신념의 밑바닥에는 '공유'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이끌어낸다.

 

내자신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것일때 내 마음 속에 채워지는 보람을 '봉사'라고 한다는 것과,

원망이나 미움이 고마움으로 바뀌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

사랑을 받을때보다 사랑을 할때가 행복하다는 것 따위를 강요가 아닌,대화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끄집어 낸다.

 

'밑줄 쫙, 별표 다섯개, 돼지꼬리 꽁약' 해서 김제동 앞에 놔주고 싶었던 부분도 있었다.

김제동이 아직까지 결혼을 못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인터뷰이가 하정우라서 더 그럴듯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전 저쪽에서 아니다 하면 '찌질'해지기 싫고, 한편으론 저쪽의 확신이 없는데 내가 표현하는 건 이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면 편하게 해줘야 한다 싶고 ㆍㆍㆍㆍㆍㆍ.

->그러면 안 되는데ㆍㆍㆍㆍㆍㆍ. 생각을 바꿔야 해요. 일단 결실을 맺고 편하게 해 줘야지, 그 전에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206쪽)

 

또 하나 깨달았다.

일단 결실을 맺고 편하게 해줘야 한단다.

그전에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단다.

이건 언젠가 도인이라 불리우는 이와 나누었던 깊은 속과 넓은 맘, 이 얘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싶다.

속이 깊다는 것은 한가지 사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고,

마음이 넓다는 것은 넉넉하게 둘러 감싸안아 그 안에서 맘껏 펼치고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 모두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기준을 갖고 경계를 나누었을 때 의미가 있겠다.

경계를 나누기 전에, 결실을 맺기 전에 편하게 해주는 건 무관심이지 배려가 아니다.

어쩜 너무 편안해서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해주는 분도 흔치 않죠. 어쨌든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정우 씨가 가진 그릇의 크기이자 복이죠.(210쪽)

하정우를 향하여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김제동이 멋져보이는 순간이다.

김제동이라는 그릇의 크기도, 그가 가진 복의 크기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이런 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가 빚어낸 그릇의 크기이고, 그가 지은 복의 크기만큼 되돌려 받고 있는 것임을 알겠기에 더더욱 그렇다.

하정우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식물이 되는 느낌이란다. 자신을 달구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존재, 모든 것이 휩쓸리듯 속도감 있게 들고 나는 현실에서 자신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가 그림이란다. 처음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남들이 볼까 창피해 하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 그 자체의 가치와 매력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단점에 연연하지 않고 장점을 통해 자신감을 찾는 에너지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212쪽)

 

이 구절은 하정우와의 대화후 느낌을 다시 옮겨적은 부분인가 보다.

하정우의 말을 그대로 옮겨적은건지, 김제동이 약간 가감하여 적은건지 모르겠지만...

내겐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부분이었다.

 

살면서 누구나...바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결여를 느끼게 마련이고...

그런 현실에서 자신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그리하여 자신을 달구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매개로써의 무엇인가를 갈구하게 되는데,

그게 하정우의 경우 그림이었단다.

사람에 따라서는 음악이나 책이, 또는 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시선을 타자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옮아가는 순간,

다시말해 자기 자신이나 남의 단점을 찾기보다는,

가치와 매력과 장점을 찾고 계발하는데 에너지를 집중하는게, 긍정적이고 발전적이고 건설적이라는 얘기인 것 같다.

아닌가? 아님 말고~--;

 

그중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사람은 도현이 형이죠. 그리고 이승엽의 홈런 한 방이고요. 제 목표가 도현이 형이나 승엽이 같은 사람을 자꾸 확대해 나가는 것이죠. 친해지는 것을 확대해 나간다기보다 저 사람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아마 나만큼 기쁘지 않을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승엽이가 홈런 치면 잘은 모르겠지만 나만큼 기쁘지 않을 걸, 도현이 형('나는 가수다'에서) 1등 했을 때 그 속에 안 들어가 봐서 모르겠지만 아마 나처럼 기쁘지 않았을 걸, 이런 범위가 확대돼 나가는게 바로 제 행복이 확대돼 나가는 거니까요. 자아가 느끼는 기쁨을 자꾸 확대해 나가고 싶은 거죠.(249쪽)

김제동의 이 말은 은연 중에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기쁘면 그 (또는 그녀도) 기쁘고,

내가 행복하면 그 (또는 그녀도) 행복하다는...

아기가 잘 먹는 걸 보면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엄마마냥 포만감을 느낀다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 며칠 아빠와 같이 움직일 일이 있었다.

아빠가 너무 행복해 하시니까, 나로선 별로 흥미롭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행복이 내게까지 배어 물드는 느낌이었다.

행복이 배어 물들 수 있으려면 매질이라는 조건이나 환경이 같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었는데,

뭐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슬프고 안타까웠던 건, 이땅의 많은 대학생들이 학자금대출에 신경을 쓰느라고 대학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업, 아르바이트, 과외, 집...을 되풀이 하는 것으로도 빡빡한 그들에게 동아리 생활이나 연애는 요원하다 싶었다.

*그럼 이번 학기 마치면?

호산) 또 휴학해야겠죠. 그렇게 휴학해도 학자금은 대출로 해결해요.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하니까. 한 달 하숙비가 40만 원이고 학자금 대출이자 10만 원에 휴대폰 요금 내고 용돈 쓰면 한 달에 100만 원 가까이 들거든요. 등록금은 졸업하고 어떻게 되겠지 생각해요.

소현) 학교에 종종 선배들이나 유명한 분들이 특강을 오세요. 그분들 말씀이 열심히 공부하면서 열심히 놀라고 해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취미생활도 하고, 많은 경험을 쌓으라고. 그런데 진짜 말도 안 되죠. 전 동아리 생활도 못해요. 수업, 아르바이트, 과외, 집. 이게 끝이거든요. 다른 건 상상도 할 수 없어요. 곧 방학인데, 방학 때도 잠자는 것 빼고는 빡빡하게 계획 다 세워놓고 살아야 해요.

 

 웃음의 기본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웃고 새로운 발상을 해냈을 때 웃습니다. 혁명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누구도 봄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이렇게 꽃을 땅 위로 밀어 올립니다. 꽃이 땅을 뚫고 나온 게 아니라 땅의 깊숙한 기운이 꽃을 밀어 올려주는 것이죠. 그래 아이고 내 새끼들 세상에 나올 때가 됐다, 이게 혁명 아닙니까. 꽃잎이 떨어지는 것도 혁명이고 낙엽이 지는 것도 혁명이죠. 그렇게 보면 웃음은 늘 혁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습니까. 고정돼 있는 것은 절대로 웃음을 줄 수 없습니다. 끝없이 변해야 되는 것입니다.

                                                                                                  <김제동 심층 인터뷰 중에서>

 

끝부분에 김제동이 인터뷰이가 된 <심층 인터뷰>도 읽을만 하다.

암튼,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 땅의 결혼 적령기의 모든 여자들은 김제동 같은 남자를 놔두고 뭐하나 모르겠다는 것이고...

반대로 김제동은 눈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닌가,

또는 결혼이나 여자에 대해서 직접 부딪혀 보지 않고,

책에서만 읽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요번 <김제동이 어깨동무합니다>도 대박이 나서, 결혼자금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을 듯 하니,

빨리 결혼상대자나 찾았으면 좋겠다.

 

또 하나, 내가 참 좋아하는 정인이 조정치와 연인사이라는 것을...

그래서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걸 얼마전 알게 됐다.

아, 좋다~^^

 

 조정치 - 미성년 연애사
 조정치 / Beatball(비트볼뮤직) /

 2010년 7월

 

 신치림 - episode 01 旅行
 신치림 노래 / 미러볼뮤직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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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0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김제동곤련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글로 보건데 그 역시 '우환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환의식을 가진 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영역을 넘어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바른 우환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존경받을 만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sslmo 2012-05-09 14:07   좋아요 0 | URL
아, 우환의식 도올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어요.
암튼, 편안할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는 거 평범한 사람으로선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 의미로 본다면,
차트랑공님도 충분히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꾸준히 노력, 발전을 꾀한다는 의미에서
거안사위(居安思危-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한다)의 자세가 엿보이시고,
그런 의미에서 우환의식을 가지고 계신듯 사료되며,
그런 의미에서 존경 받을 만한~^^

김제동, 읽어보세요~^^

차트랑 2012-05-10 01:33   좋아요 0 | URL
어구구....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이 되다니요 ㅠ.ㅠ

김제동에 대해서 저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중입니다.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

하늘바람 2012-05-08 0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물보고 사람 판단하던 철없는 시기.
그래서 김제동처럼 멋진 사람을 당연히 놓쳤을 시기
지금 와서 보니 김제동 참 멋지네요
소통이 되는 그리고 마음이 울리는 대화를 할 줄 아니까요

sslmo 2012-05-09 14:16   좋아요 0 | URL
전 인물 보고 사람 판단하던 그 시기에도 김제동 마시마로 그 눈이 참 좋았다는~^^

지금은 김제동 보단 양동근이 더 멋지지만,
그래도 김제동도 그럭저럭이요~^^

어느 책에서 그러는데, 소통이 되는 대화보다 중요한 것은 끊이지 않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래요~^^

순오기 2012-05-08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지난 중에 김제동과 꼭 닮은 -목소리는 진짜 한 목소리 같은- 분의 강의 들었어요.
바로 김제동의 스승이라는 방우정씨~ 말을 빌면 김제동 엄청 고생했더라고요.
빨리 장가가서 김제동을 키운 어머니께 손주 안겨드렸으면 좋겠어요~~~~ ^^

sslmo 2012-05-09 14:26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 되는데...ㅎ,ㅎ.

저도 방우정 이 분 뵌 적 있어요.
전 지역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 지역 사투리 쓰면 다 목소리가 비슷비슷하게 들린다는~--;

암튼, 저도 김제동이 빨리 장가 갔음 좋겠어요, ㅋ~.

북극곰 2012-05-0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
인터뷰이의 제각각의 색깔을 잘 살렸더라구요. 내용에서도, 어투에서도.
김제동만의 '듣는 재주'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읽는데, 이효리가 너무 이뿌더라구요.
더불어 김제동이하고 친구 먹고 싶어졌어요. 힛! ^^

sslmo 2012-05-09 14:31   좋아요 0 | URL
아하~
북극곰님은 그러니까, 김제동이하고 이효리 하고 동갑~?^^

그쵸~?
김제동의 소신이야 뭐, 여기저기서 주워 들었었고,
이효리의 베지테리언 발언도 참 예쁘고 소신있게 들렸었어요~!

북극곰 2012-05-10 10:03   좋아요 0 | URL
에이~~ 제동이한텐 누나고 효리한텐 언니죠.
그래도 친구할래요. ㅋㅋ

제가 페이퍼 기타 등등 정황을 참고해서
나무꾼님 나이를 추측해봤는데요
저보다 한 살 정도 많으실걸요?? ㅋㅋ
(아니믄 어카지.막.. 동생이면.... ㅠ.ㅠ)

글샘 2012-05-0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김제동을 이제서야 알아 주시다니...
제가 2004년에 김제동 페이퍼를 만든 걸 링크해 드릴게요.
한번 읽어 보세요.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걸요?

http://blog.aladin.co.kr/silkroad/529458

http://blog.aladin.co.kr/silkroad/529457

http://blog.aladin.co.kr/silkroad/529456

sslmo 2012-05-09 14:37   좋아요 0 | URL
샘, 이건 링크라고 하지않고 나열 또는 열거라고 해야하거든요.
암튼 땡큐요~^^

이 곡도 참 예쁘거든요.
왈츠 포 글샘~?
쿵짝짝 쿵 짜~ㄱ



세실 2012-05-09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제동은 참 겸손한 사람이죠. 그의 강연 듣고나니 더 좋아지더라구요. 하정우도 참 멋지군요^*^

sslmo 2012-05-09 14:40   좋아요 0 | URL
우와,세실님이다~^^
잘 지내시죠?
엄청 바쁘시죠?

김제동 강연을 가까이서 들으셨나 봐요, 왕 부럽--;
하정우는 책으로도 읽었는데, 쫌 멋지더라구요~^^

2012-05-16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