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듣는데, '토요일에 만난 사람' 코너에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강신주가 나왔다.

요며칠 심심함이 극에 달했었다.

딱히 마음 둘데가 없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했으며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왜 사는 지를 모르겠는 채로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그렇게 그렇게 지냈었다.

강신주 식으로 얘기하면 타자와의 소통부제로 괴로워했고,

이지누 식으로 설명하자면 지독한 고독을 맛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만난 강신주는 가뭄에 만난 단비였다.

출근 시간 부랴부랴 움직이느라 제대로 못들은 부분을 나중에 다시 듣기로 들었는데, 역시나 '강신주'였다.

다소 '센 발언'도 서슴치 않는 것이 솔직한 성격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고,

철학이라는 어려운 얘기를 하면서도 '박사'랍시고 심각하게 무게잡고 얘기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전에 그가 알튀세르를 좋아하여 이메일 계정을 'contingency'로 한다는 소릴 들었었는데,

오늘도 contingency와 eventuality가 적절히 버무려진 그런 것이었다, 아흑~!

 

오늘 라디오를 듣고 그가 더 좋아 졌는데,

강연에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까 강연이 끝난 후엔 듣고 싶어져서...

보통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잠이 든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어서 였고,

첫 단행본이라는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을 풀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철학자' 강신주가 아니라 '인간' 강신주를 엿본것 같아서 였다.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려면 내가 변해야 되고 내가 변해야 타인과 소통하는 게 동시적인 사건이어가지고 우리가 대개 소통의 문제가 지가 안 변하면서 소통하려고 할 때 폭력이 돼요. 그러니까 타자와의 소통이라고만 얘기하면 이상하고 주체의 변형이라고 하면 지 혼자 수행하는 거고 그런데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진짜 그 사람한테 마음을 열면 내 자신이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경험을 장자가 딱 포착을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는 뭐라고 그러죠. 이거 어렵다, 개념이 너무 철학 개념이 한 4개 정도 들어가니까. 그래도 이걸로 하자, 이 제목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

사실,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손석희'도 '강신주'도 '이지누'도 아닌, 내가 심심하다는 거다.

타인과 제대로 소통을 하려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강신주'를 들으며,

'고독'을 수행처럼 지켜낸 '이지누'를 되풀이해 읽으면서,

심심함이 극에 달해 바닥을 쳤다는 얘기를 하려니,

왠지 라디오를 헛 듣고 책을 헛 읽은것 같지만서도...

모든 깨달음은 그렇게 오더라,

소통과 고독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으려면,

일단 소통과 고독을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관독일기 : 잠명편
 이지누 지음 / 호미 /

 2008년 11월

 

하지만 고독이란 것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또 고독을 견디고 이겨 내며 굳건함을 지키는 것 또한 스스로 해야 할 일일 뿐 누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럿이 함께해야 하는 일이 있는 반면 혼자 이루어야 하는 일도 허다히 많다.(64쪽)

그렇다고 내가 그동안 심심함이나 고독 따위는 전혀 몰랐었냐 하면...그건 또 아니다.

다만 그런 내게, 소통의 즐거움과 더불어 고독의 굳건함을 알려준 친구가 여행중이신 고로,

홀로 남겨진 나는 그전보다 더 심심함과 고독함을 뼈 아프게 느끼고 있고,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널을 뛰어 날 홀로 내버려 둔 친구를 향하여 '직무유기'라며 툴툴거리고만 있다.

 

잠箴은 자신의 허물을 예방하고 반성하며 결점을 보완하려고 짓는 글이고,

명銘은 스스로를 반추하며 새기는 글을 말한단다.

이 책 <관독 일기 :잠명편>에 나오는 조선 시대의 숱한 사상가와 문장가(장유, 신흠, 김집, 이규보, 안정복, 조익, 이식, 윤휴, 허균, 보각 선사, 원랑 대통, 낭혜 무염 등) 의 글들을 이지누의 날 선 해석으로 접했다.

정갈하고 깔끔한 상차림을 '내가' 주체가 되어 고루 누리기 위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선입견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극도의 심심함과 지독한 고독을 맛보았다.

 

이지누는 담담하게 읊조리듯 얘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고독이 자신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오는 것이란걸 느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 고독을 견디고 이겨내는 굳건함을 지키는 것 또한 녹록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지누의 그것들은 너무 날이 선 듯하고 반듯하여 좀 부담스러운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푸른하늘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말이다.

좋아할 순 없어도 존경할 순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몸은 신身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 테고, 거울은 오늘 실레마을에서 바라보며 윤대녕 형에게 마음 속으로 선물한 것과 같은 푸른 하늘일 것이다. 누구라서 그 하늘에 자신을 비추어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생각보다 인정하는 마음이 더 깊어야 한다는 것이다. 깊이 인정하지 못하면 고치는 것 또한 겉일 뿐일 테니까 말이다.(87쪽)

게다가 그의 글이 반듯하고 사실적인 기술이라고 해서, 문체까지 무미건조하고 재미없지는 않다.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기품을 잃지 않아, 미려하고 그리하여 시적 감상에 젖기에 충분하다.

그의 '서정'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른 점은, 직접적인 경험과 체험에서 나온 사실의 기록이라서 한결 애틋하고 살가운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뭇잎 지는 소리는 빗소리와 달라서 자꾸만 두리번 거리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빗소리는 대개 일정하여 오히려 그 소리가 그치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지만 낙엽 지는 소리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순하게 떨어져 내린다고 해도 그는 일정하지가 않다. 또 마른 잎이 바위나 나무 등걸에 부딪치는 소리는 바람 부는 대로 들쑥날쑥하여 제멋대로이다. 더구나 무엇엔가 집중하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누군가가 숲 속을 걸어서 나에게로 오는 것 같은 환청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91쪽)

 

그러나 뒤늦게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면 인생이란 어차피 홀로 가는 길이다. 그 지독한 외로움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버리고 말지 싶다. 비록 고독할지라도 홀로 이루어야 할 것들을 참구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은 절로 진정한 벗이 될 것이다.

서로 동시대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기만 한 진정한 벗이란 한두 명일지라도 족한 것이다. 새로운 벗을 사귀거나 그것을 지키려는 것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혹독할지라도 단절의 고독을 만드는 것이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 고독을 내 안에 지니지 않은 채 도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107쪽)

 

암튼 이지누를 읽으면서,

홀로 고독해지는 것을 지독히 두려워 하면서도 고독을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이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엿보았는데, 이게 수행자의 그것이라서 멋지다기 보다는 왠지 처연해서 눈물이 났다.

게다가 친구가 잠시 잠깐 곁에 없는 것으로도 극도의 심심함과 지독한 고독으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내가,

벗이 동시대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 지독한 고독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걸 강신주는 본인이 더 힘들어봐야 된다는 한마디로 일축하고 있다.

자기가 힘들어봐야 그것보다 적게 힘든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떤 걸로 힘들구나' 하는 것들을 대충 알게 되고,

그래야 자신이 힘들게 고민하고 살아왔던 걸 철학이나 문학이나 이런 걸 통해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된단다.

하지만, 위로를 한다든가 하진 않는단다.

때때로 보면 지나치게 어떤 힘든 것도 아닌데 오버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야단도 많이 쳐야 되고 욕도 좀 하고 그래야 돼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안아주세요. 이런 것도 있어요. 위로 받으려고 해요. 무슨 위로를 해요. 위로를 하긴, 다 힘든데 살기가.

그런데 말이다.

내 입장에서 보기에는 엄살을 부리는 사람도 그렇지만, 의연한 사람도 인간다운 매력이 없기는 매 한가지다.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에서...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이 곁에 있어서 더욱 고독하고 쓸쓸해지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심사다.

 

책을 통틀어 이지누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부분은,「대대례大戴禮」의 '무왕천조'편에 나오는 무왕이 반우에 새겼다는 명과 관련해서 인듯하고, 나도 그랬다.

사람에게 빠지려면 차라리 물에 빠지겠다. 못에 빠지면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제할 수 없다(與其溺於人也 寧溺於淵 溺於淵 猶可遊也 溺淤人 不可求也).

글을 읽고 참으로 묘한 마음이 일어나 선뜻 책상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그 울림이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 오늘까지 읽은 글들이 어느 것 하나 허튼 생각으로 대할 것이 없지만 이토록 크게 마음을 흔든 것은 없었다. 글을 읽고 두어 시간이 지난 지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나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무왕은 사람에게 빠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무왕의 그 큰 생각에 빠져 버렸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

여전히 나는 진정되지 않았다.(292~293쪽)

하지만, 이지누는 금방 진정이 되지 않아 이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는데,

나는 물보다는 사람에게 빠지는 쪽을 택하겠다.

물에 빠졌을 경우 헤엄쳐 나올 수 있는 것은 수영을 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고, 수영을 하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다.

사람에게 빠지면 쉽진 않겠지만,

내가 그(녀)를 닮고 배울 수도, 그(녀)가 나를 닮고 배울 수도 있을 것이고,

구할 수 없어도 물들어 닮고 배우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여 나아지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게 강신주의 첫 단행본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에서 얘기한 '자신이 변해야 되고, 자신이 변해야 타인과 소통하는 게 동시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암튼, 이지누가 너무 좋아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던 차에 작은 맞춤법 오류를 발견하였다.

솔직히 다른 책이라면 눈도 꿈쩍하지 않고 넘어갈 일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그것이다 보니 작은 걸 갖고도 호들갑이다.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일테고,(아흑~, 어쩔거야. 인간적이어서 멋지잖아~--;)

나도 인간이니까 호ㆍ불호를 놓고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것이다, ㅋ~.

 

ㆍㆍㆍㆍㆍㆍ박병천 선생의 소리는 애끓는 한을 머금은 채 한 세상 넘어간 곳에서 뱉어 내는 것만 같았다. 비록 천대받던 무가이었을지라도 소리에 기품이 넘쳤고 몸짓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거늘 이제 또다시 그 소리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사람의 일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사람이 내는 소리와 몸짓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절절하게 보여 주던 고인은 자신이 타인을 위해 부르던 소리를 들으며 북망산천 먼 길을 떠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처연한 마음이 생기고 슬픔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애도의 마음을 펼쳐 놓은 채 잠이 들었다.(141쪽)

 

위 문단에서 빨간 글씨 '애끓다'의 용례를 보게 되면,

'애'가 끊어질 만큼 슬플 때는 '애끊다'를, '애'가 부글부글 끓을 만큼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울 때는 '애끓다'를 써야 한단다.

박병천 선생의 소리는 애(창자)가 끊어질 듯이 슬픈 소리였으니, '애끊다'가 적절하겠다. 설혹 부글부글 애가 끓는 통한의 그것으로 들렸다고 해도, 뒤에 나오는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끊어지지 않고' 와 '문맥 상 호응을 이룰 수 있도록 '애끊다'가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또 한군데, 

ㆍㆍㆍㆍㆍㆍ"도에 가까워진 사람은 말수가 적어진다"고 했거늘 그 많은 말들을 밖으로 토해 내지 않고 어디에 새겨 두었을까. 그것은 마음 속일 것이다. 달아나지 못하고 갈라지지 않게 굳게 붙들어 둔 마음 말이다.

번연히 알고 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러나 그 마음 다스리고 보존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이토록 마음에 대해 많은 경계의 글들이 넘쳐나는 것 아니겠는가. 날마다 돌아봐야겠다. 나의 마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맹자」'고자 상 告子 上'에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놓친 그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學文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는 말이 나오지 않던가. 공부를 한다는 것,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본성을 깨닫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지 싶다.(243쪽)

 

 

학문(學問)-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

학문(學文)-≪서경≫, ≪시경≫, ≪주역≫, ≪춘추≫, 예(禮), 악(樂) 따위의 시서ㆍ육예를 배우는 일.

 

따라서, 저 상자 안의 빨간 글씨는 學問이 되어야 맞는다.

 

 

 

 

 

 

 

 

 

 

 

 

 

 

 

 

 

 [수입] Joni Mitchell - The Studio Albums 1968-1979

 [10CD 리마스터 디럭스 박스세트]
 조니 미첼 (Joni Mitchell) 노래 / Warner / 2012년 10월

 

 

Love is touching souls
Surely you touched mine
Cause part of you pours out of me
In these lines from time to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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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2-24 00:07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글들이 많아서, 다시 또 읽고 있어요. 전 타자와의 소통에 문제가 많은편이라, 제가 바뀌지 않고, 상대도 바꾸지 않고, 포기쪽을 선택해요.ㅜㅜ 사람한테 빠져서 미친듯이 살았던 20대도 생각나고,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나는 글이에요.....

다크아이즈 2013-02-24 15:29   좋아요 1 | URL
강신주 목소리를 들으셨군요.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 맞아요. 하지만 인간인지라 그게 맘대로 안 될때면 저도 꿈꾸는 섬님처럼 포기하는 쪽을 택하고 말아요. 사람 사귀기는 힘들지만 놓는 것은 한 순간이더군요. 강신주식 장자를 읽을 때의 그 바람결 냄새가 아직도 선하옵니다. 정통 장자를 학문하는 사람들이 마구 욕하는 그 상황까지 전 재밌게 생각했어요.
심심함을 가장하시는 나무꾼님 언제나 잘 계시리라 믿어요.^^*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충청 편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이지누 지음 / 알마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겉표지의 문자는 '나 아我'의 고古문자란다.

 

내게 이지누는 '관독일기'가 시작이었다.

친구가 권해줘서 읽게 되었는데, 좋기는 해도 불교에 까막눈인 나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어디선가, 종교색을 찾아내기보다는 스스로 알아서 종교색을 지워가며 읽는 것도 좋은 독서법이라는 글귀를 보게 됐고, 그리하여 호기를 부리게 되었다.

1년여에 걸쳐 그의 전작들을 주르륵 따라 읽다보니 어느새 그에게 흠뻑 빠져 들게 되어, 

글이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은 비단 유려한 문체나 어휘력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세련된 미문이 아니고 투박하더라도 그가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 분명한 아취를 풍기는 것 아니겠는가.(18쪽)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기준까지 따라쟁이가 되었음은 물론, 나라면 이 사람의 글을 제일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사실 이지누의 글은 개인주의적인 ego가 아닌, '나 아我'를 담고 있다.

예전에는 세상과 타인을 상대로 싸움을 했었고,

그후 한동안은 그러한 허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내가 날마다 피 흘리는 다툼을 벌이곤 했었단다.

그리하여, 이제는 자기자신을 적나라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 하나를 갖게 됐다는데,

내가 보기에 그건 거울이라기 보다는 햇빛조차도 투과시키는 유리이지 싶다.

객관적이라는 것조차도 시점이 개입하는 것이니,

그마저도 개입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느낌의 투영이나 투과.

 

근데, 그게 우리가 흔히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된것은 아니고 '지독한 자기 내면과의 싸움의 결과'이다.

우린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동안은 그동안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내가 날마다 피 흘리는 다툼을 벌이곤 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만 범인凡人인 우리는 그걸 닮으려 하다가는 피 흘리는 싸움에서 살아나는게 장렬히도 아니고 어이없이 전사해 버릴 수도 있으니 명심해야겠다, 할~!

 

'이지누'를 권해준 친구가 얼마전에 이런 얘기도 함께 해주었다.

독수리는 가장 오래 사는 새로 알려져 70년까지 살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독수리의 평균수명은 40년.

70년을 살기위해서는 40에 이르렀을때 신중하고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나이쯤 되면 발톱이 안으로 굽어진 채로 굳어지고 휘어진 부리는 가슴쪽으로 구부러지기 때문에 먹이를 잡기 어려워지고, 날개는 약해지고 무거워지며 깃털들은 두꺼워져 나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큰 짐이 되기 때문이다.

이 40에 독수리는 '더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절벽끝에 둥지를 튼다.

자신의 휘어진 발톱을 부리로 하나씩 뽑아내고, 낡은 날개의 깃털을 뽑아내며, 제 부리를 바위에 찍어 없애며, 새로운 발톱과 깃털과 부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150여일을 보낸다.

이렇게 5개월을 잘 견뎌낸 독수리는 새로운 삶을 얻어 30년을 더 날 수 있단다.

 

이 친구는 지금 나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의미가 다르고 새롭기 때문에,

나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의 그간의 고통 따위는 'out of 안중'이고,

발톱과 깃털과 부리를 갈고 새로 날아오르는 느낌이라는 얘기도 함께 해 주었다.

ㆍㆍㆍㆍㆍㆍ몸은 잔뜩 웅크렸을지언정 마음만은 환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얼굴로 들이닥치는 눈에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ㆍㆍㆍㆍㆍㆍ살면서 어느 순간, 누군가가 내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수차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서로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를 만나고 나면 그의 존재보다 나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제 버릇이 되어버렸다.

  오늘 또한 마찬가지다. 탑이 없었다면, 곧 부처님이 없었다면 내가 눈보라 모진 절터를 이렇듯 헤매고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 급한 것은 부처님이 아니었다. 설사 내가 그에게 급하다고 해도 그는 언제나 시간을 요구했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여여如如하게 있지만 그에게로 가는 동안 나는 언제나 뒤뚱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뒤뚱거리다가 세상에 미혹되어 사람에게 흔들리기 일쑤였고, 너덧 차례 그렇게 흔들리고 나면 떨어져나가는 것은 불거진 욕심만이 아니었다. 그것과 함께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것들은 뭐라 형용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나만 아프고 마는 것에서 그치면 천만다행이었다. 문득 나 지신을 바라보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까닭 모를 분을 이기지 못해 나도 모르는 어느새 내가 피폐한 가해자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렇듯 혹독한 날씨 속에서 부처를 만나고 싶었다. 그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앞세워 모진 눈보라 속을 걸으며 참회하고 나를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24~26쪽)

내가 그랬었다.

항상 외롭다, 외롭다...노래를 부르고 다녔지만,

정작 누군가 다가와서 손 내밀면 그 손을 마주 잡아 주기보다는 짐짓 뒤로 물러나 버리곤 하였다.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야 할 것 같고,

경계는 밟거나 넘어서면 안되는 줄 알고,

누군가 내 앞에서 든든히 비바람을 가리워주는 존재는 말할 수 없는 신들이나 부모님이 고작이었고,

책이 유일한 위안이고 친구였다.

근데 내가 외롭다, 외롭다...하는 동안 이 세상 어느 누군가는 내가 뿜어내는 쌩한 바람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고,

손을 마주잡지 못한 이는 내게서 시린 거절을 읽었을지도 모르고,

내 손끝으로 떨어내는 동작에서 냉정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라고 하여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말은 비겁하다.

  거기에 더해 그는 앞에서도 말한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한다. "저 사람이 마시는 것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는 없으니, 어찌 스스로 노력하여 마시고 먹지 않겠는가"라고 말이다.

ㆍㆍㆍㆍㆍㆍ부처를 찾아가는 길, 그 길은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길이 아니던가.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독을 두려워한다면 한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는 길, 그 길에서 내가 구하려는 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이다. 전체라는 것은 부분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부분의 집합이 곧 전체이며, 전체는 부분을 평등하게 아우르는 것일 뿐 그 어느 것이 다른 것에 대해 우선하며 상하를 나누는 수직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속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분별을 넘어 선 전체, 그곳은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인식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禪의 깊숙한 곳일 테니까 말이다.(38쪽)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부러웠던 부분은 목은 이색과 환암 스님의 우정을 얘기한 부분이었다.

이 부분이 이토록 부럽고 멋있게 보인 것은, 글을 빚어낸 이지누의 내공이 한몫한다.

일단 이지누 본인이 '나 아我'에 집중을 해서 자신을 낮추고 비워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었을테고,

이지누 본인도 경주언저리에 사는 삼십 년 지기 그런 친구가 있다고 <관독일기>에서 밝히고 있었느니 말이다.

 

근데, 이쯤에서 한가지 궁금한게 생겼다.

남녀간의 우정은 색안경을 끼고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차치하고라도,

남자들의 우정을 일컫는 사자성어는 많은데,

여자들의 우정을 일컫는 사자성어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자들의 우정은 없는 것일까?

  시의 제목을 <환암을 받들어 생각하다>라고 짓는 것은 물론 환암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에도 진정 기뻐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겸양의 모습이리라.ㆍㆍㆍㆍㆍㆍ그런 절간이 청룡사에서 놀다가 목은을 찾아와 환암이 보낸 편지 한 통을 전해주었다. 이에 목은이 기쁜 마음으로 시를 지었으니 제목이 <절간 윤 공이 청룡사에서 노닐다가 돌아와서는 항아리에 순채를 담아 건네주면서 환암의 서신을 또 전해주었다. 이에 너무도 기쁜 나머지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이며,

ㆍㆍㆍㆍㆍㆍ

  목은이 환암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뿐 아니다. 서로가 의당 그랬을 것이지만 서로에게 불쑥 찾아가 곤혹스럽게 하는 일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상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며 서로의 수행에 몰두하며 조심하는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다고 할 정도다.

ㆍㆍㆍㆍㆍㆍ
 이렇듯 목은이 환암에게 보내거나 그를 생각하며 쓴 시들은 대개 진한 그리움이 묻어 있으며, 한 줄 문장들이 모두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주눅이 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근신일 뿐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이야말로 佛과 儒를 가리지 않는 큰 사람의 모습을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96~299쪽)

 

 그때 깨달았다. 사랑이 깊으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 무엇을 한들 그가 드러나기보다 나 스스로가 드러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일 뿐 결코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이 글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환암스님과 목은의 우정은 마음속에 침잠해 있는 것일 뿐 결코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목은은 환암의 겉모습에 대해 한 줄도 쓰지 않으면서 오히려 화상 찬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목은이 환암을 생각하거나 환암이 목은을 생각하는 마음이 발효되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자연스러운 글쓰기였던 셈이다.(315쪽)

나는 내공이 부족해서, 이지누처럼 스스로를 맑게 비추는 거울일수는 없고,

나 자신을 보는 듯 닮은 친구를 갖게 된 것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그 친구를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서로를 거울 삼아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거라 믿기에 더 고맙다.

배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고, 친구 또한 마찬가지란다.

친구가 많으면 '나 아我'를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니, 몇 명으로 족하단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 개인주의적인 ego와 '나 아我'를 구분해 내지 못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되고 싶다.

 

분위기를 바꾸어,

내가 종교에 까막눈이어서 종교색을 지워가며 읽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이 글을 쓴 이지누의 내공이 출중하다 보니 감명받는 구절이 있었다.

그 부분은 다름 아닌,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인데...

이제껏 노자를 편저자를 바꾸어 가며 수십번 읽은 내가 보기에도 멋지고 근사한 해석이다.

좀 길지만 두고 두고 음미하고 싶어,옮겨본다.

시간이 있으면 두고두고 필사하며 외고 싶은 문장이고 작가이다.

 

그러니 판전이라는 글씨를 쓸 무렵 완당은 불가에 귀의한 불자였다. 그런데 그가 쓴 글씨를 두고 현세의 선비들이 교졸巧拙의 미학을 논한다. 위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교졸은 <노자>에서 말하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다. 그런데 이 졸拙이 문제다. 졸은 교巧를 이루거나 이미 넘어선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이 동양미학 일반이다. 그렇게 내로라하는 미학자들이 판전 글씨를 두고 앞다퉈 교졸을 말하고 또 그 글씨체를 무구동진체無垢童眞體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교졸로 설명될 수 잇는 글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적 입장, 곧 유교나 도교의 입장이 아니라 불교적 시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판전 글씨는 한 인간이 베풀어놓은 연화장세계이자 지극한 인간의 마음으로 이러낸 화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ㆍㆍㆍㆍㆍㆍ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완당은 그 어떤 때보다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판전이라는 글씨를 쓰지 않앗을까. 그 무렵의 완당은 이미 경계를 넘어선 곳에 있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아 깨달음을 이룬 많은 스님들  중 천진무구하지 않은 스님들이 있던가. 경계를 넘어선 스님 모두 어린 동자승과 같은 천진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모습은 화엄을 이룬 모습들이었다. 완당이라고 달랐을까. 그의 필법은 한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고 평생 갈고 닦은 것이 아닌가. 곧 깨달음을 이룬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글씨로 정각을 이룬 경지에서 구족계를 받고 마지막 붓을 들어 획을 그었으니 그 글씨의 완성이 곧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판전이라는 글씨를 통해 문자반야文字般若를 이루었다. 그 순간 그가 다다른 곳은 말로써 다할 수 없는 화엄, 그 환희로운 곳이었지 않을까. 그는 글씨를 쓰면서 글자, 그 속을 본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글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것은 편액의 겉모습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그 글씨를 논하려면 그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 편액 너머를 봐야 한다. 보라, 그 작은 편액의 무변광대한 넓이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말이다. 그것을 어찌 글과 말로 다할 수 있단 말인가. (346~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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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2-17 23:32   좋아요 0 | URL
70년을 살기위해서는 40에 이르렀을때 신중하고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저 이 말이 콕 와서 박혔어요.

파란놀 2013-02-18 06:27   좋아요 0 | URL
사자성어는 '남자 권력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은 중국말이니, 여기에 '가시내 사이 우정'을 가리키는 낱말은 안 생길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사자성어, 곧 한문을 쓰던 사내들은 가시내를 몽땅 '집안일'에 붙들어 매었으니, 가시내들이 집밖으로 나돌며 이웃하고 우정을 나누기란 어려웠겠지요.

그래도 굳이 '네 글자'를 바라신다면, 한겨레는 '이웃사랑'이라는 말을 썼어요. 이웃사랑은, 집 바깥을 떠돌던 사내 아닌, 집안에서 집안일을 하던 가시내들이 이웃집을 아끼고 돌보는 따스한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니, 이런 말로 조금은 생각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리라 느껴요.

그리고, 사자성어 아닌 한국말은 예부터 '남녀 가르기'가 없어요. 길동무, 소꿉동무, 어깨동무, 놀이동무, 씨동무, 해동무, 별동무, 달동무...... 이런 낱말들은 모두 '서로 나누는 깊은 마음'을 나타내요. 또, 네 글자짜리 한국말을 살펴보면 '너나들이' 같은 낱말이 있어요. <사자성어 한국말로 번역하기>라는 책에도 썼는데, 한국사람 누구나 스스로 조금만 생각을 기울이면, 스스로 아름다운 말과 슬기로운 글과 맑은 마음과 고운 사랑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2013-02-18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2-18 06:47   좋아요 0 | URL
손을 맡잡지 못한 이는 내게서 시린 거절을 읽었을지도 모르고,
내 손끝으로 떨어내는 동작에서 냉정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라고 하여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말은 비겁하다.

- 어쩜, 이런 구절들은 저도 쓰고 싶은 얘기지만 떠오르지 않는데, 역시 내공 깊은 양철님^^*

하늘바람 2013-02-18 10:00   좋아요 0 | URL
이지누
저도 님따라 읽어봐야겠어요
님따라 공부할 책들이 서점을 만들겠어요
읽다보면 참 제가 님을 많이 닮은 듯한데
왜케 게으른지는~
서로 아무말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그런 벗과 함께 나무 그림자 비추는 연못이나 강가에 한참 아주 한참 앉아 있다 오고 싶네요

2013-02-18 15:34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말씀대로 양철님 권하는 책마다 다 읽고 싶네요.^^ 독수리 이야기 정말 인상적이에요! / 옛사람들 우정은 진짜 깊어서 부럽더군요. 전에 읽은 <삶을 바꾼 만남>에서도 느꼈지만..

글샘 2013-02-18 17:11   좋아요 0 | URL
판전 글씨는 한 인간이 베풀어놓은 연화장세계이자 지극한 인간의 마음으로 이러낸 화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네요...
글씨를 글씨로만 봐서, 대교약졸이라며, 졸스럽다고 비웃거나 주관적으로 평가할 게 아니라,
그 세상을 살았던 사람 눈으로 물끄러미 들어다봐야 보이는 경지가 있을 수 있겠네요.

그 글을 부처님의 경지로 보는 눈과, 아무리 봐도 졸한데... 대교가 쓴 글자니 뭐라고 흉보지도 못하는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르겠죠.^^
이지누의 글은... 서정적이면서도 생각이 깊은 구절이 참 많더군요. ^^ 잘 읽고 갑니다~

알케 2013-02-20 19:11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 나무꾼님...종종 들러 포스트 잘 읽고 있습니다.
저야 애옥살림에 속진잡사에 휘둘려가며 여전히 황망하게 살고 있습니다. ㅎ

저도 근래 이지누를 소개 받아 그의 폐사지 답사 연작 세 권을 내처 읽었습니다.
이 양반 '서권기 문자향 書卷氣 文字香'이 대단하더군요.
근래 읽은 책들 중에서 글맛으로는 으뜸. 게다가 본업인 사진도 좋고...
So unfair..ㅎㅎ

2013-02-21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지막 증언 2
존 카첸바크 지음, 김진석 옮김 / 뿔(웅진)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ㆍㆍㆍㆍㆍㆍ매사는 겉보기와는 결코 다르다."(1권, 275쪽)

 

만약에 뒷다리가 저려서 병원에 갔는데 새파랗게 젊어 신뢰가 안가게 생긴 의사가 허리를 건드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요추가 지배하는 신경 분포 영역은 많이 알고들 있으니까, 그럼 다른 것으로 바꿔 물어보자.

악관절이 아프다고 갔는데,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픈 부위는 그곳이 아니라고 하며 툴툴거리거나, 환자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듣는다며 화를 내게 되지않을까?

(의사가 아픈 부위와 치료부위와의 상관 관계를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환자들은 자신이 아프게 느껴지는 부위를 힘주어 얘기하게 마련이지만, 치료 효과를 놓고 봤을때는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ㆍㆍㆍㆍㆍㆍ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 그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문기사와 보도에 관해 주의 깊게, 에둘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명심하렴, 그들이 바라는 건 사실이 아니란다. 진실을 바라지."라는 말을 했다. (1권, 203쪽)

그런 의미에서 봤을때, 이 책의 주제는 "매사는 겉보기와는 결코 다르다."라는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신문 기사와 보도에 관해서, "명심하렴, 그들이 바라는 건 사실이 아니란다. 진실을 바라지."라고 한 저 문단까지 인용하게 되면 좀 복잡해진다.

그럼 이렇게 복잡한 책읽기에서 사실과 진실의 상관관계를 놓고 혼란스러움에 빠져 길을 잃지않는 방법은 딱 하나 내 자신의 소신을 믿는 것이 되겠다,ㅋ~.

 

이 책은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존 카첸바크'의 작품되시겠다.

책의 겉날개에선 그가 스릴러의 대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놓고,

스릴러의 강점인 빠른 전개와 사실감 넘치는 사건 서술의 힘을 놓치지 않는 동시에,

견고한 이야기 구조와 세밀한 심리묘사를 유감없이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난 거기에 시적인 서사의 적절한 배치와 더불어,

인간 심리묘사를 하는데 있어서 양가 감정을 대등하게 배치하는 것을 들고 싶다.

 

그의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겉으로 보고 사실이라고 정의내린 그것들의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며 허를 찌른다.

사실과 진실과 거짓의 관계가 그러하며,

미친 것과 정상의 경계없는 넘나듦이 그러하며,

선과 악이 그러하다.

이 모두는 나로부터냐, 나로 말미암음이냐, 기준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눈에 직접 보이는 객관적 사건의 실체들, 실제 이루어진 일들을 '사실'이라고 한다면,

'진실'은 사실 속에 감추어진 본질적인 것 (거짓이 없는 참)이란다.

누군가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의사라거나,

또는 언론의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기자라면,

눈에 보이는 사실만이 아니라, 사실의 이면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파헤치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짓이나 참'을 가르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다.

'fact'를 바라보는 시선 말이다.

 

쉬운 상황으로 예를 들어보면, '사랑해요'라는 말 속에도 여러가지 의미와 입장이 있겠다.

'당신의 영혼을 사랑해요'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재산이나 돈을 사랑해요'일 수도 있겠고,

'당신의 배경을 사랑해요'일 수도 있겠고,

'당신의 취향을 사랑해요'일 수도 있겠으며,

'당신의 보드를 사랑해요'일 수도 있겠고,

'당신의 외모를 사랑해요'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런 예는 드물겠지만,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요'일 수도 있겠으며,

의미나 입장과는 상관없이 '너'이기만 하면 된다는 집착에 가까운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이 상황을 정리해보면,

내가 바라보는 사실은 '당신을 사랑해요'지만,

극단적인 진실은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는 것이다.

 

퍼거슨은 코워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저에 대해 아시는 게 뭔가요?"

ㆍㆍㆍㆍㆍㆍ"당신이 내게 말해 준 것들. 또 남들이 당신에 대해 말한 것들이죠."

"저를 안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약간은요."

퍼거슨은 코웃음을 쳤다. "틀렸어요." 그는 조금 전 자신의 말을 곱씹는 듯 약간 뜸을 들였다. "기자님은 현재의 저를 보고 있어요. 전 완벽한 사람이 아닐 거예요.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을 했을지도 몰라요.ㆍㆍㆍㆍㆍㆍ"(1권, 150쪽)

 

내게 이 책이 의미있었던 것은,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이며,

진실은 좋은 것이고 거짓은 반드시 나쁜것이고,

우리는 매사에 사실이 아닌 진실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고,

이렇게 이분법적이지가 않아서 였다.

 

스스로가 편견과 선입견에서 탈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 책의 결말을 놓고 허를 찔린 듯 낭패감을 맛볼 수도 있다.

ㆍㆍㆍㆍㆍㆍ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면 모질게 싸워야만 한다는 걸 그때는 깨닫지 못한 거죠. 제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어선 안 된다는 걸요."  (1권, 57쪽)

 

"가장 힘든 건 여기 감방에서 지내면서 내가 죽인 자들이 늘 가장 죽이고 싶어 하던 자들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거야."

"무슨 뜻이죠?"

"살면서 그게 가장 가혹하지 않을까? 기회를 잃는 것. 그게 제일 후회되겠지. 우리가 밤에 잠 못 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1권, 174쪽)

 

생각만으로도 사람이 죽은 듯 느껴질 수도 있고,

그래도 난 죽지 않았어, 하고 생각했다.

내 사소한 일부만이 죽었을 뿐이라고.(102~103쪽)

 

사소한 감정에 의해서 상처를 들추기도 하고 고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이 사실과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편가르기를 해야 하는 그런 감정이라고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적어도...

"어려운 취재에 응하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가 말했다.

"아니에요. 감정을 감추기보다는 털어놓는 게 더 나아요." ㆍㆍㆍㆍㆍㆍ"고통은 사라지지 않거든요."

"약간 무뎌지기는 할겁니다. 항상 찔러대니까 그렇게 따끔한 줄 모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사소한 일들 때문에 처음의 고통이 되살아나기도 해요. 가령, 어느 날 의자에 그냥 앉아 있어요. 글 바깥에서 이웃집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러면 잠시 후 전 제 딸아이를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게 상처랍니다, 코워트 씨. 정말 상처를 받죠. ㆍㆍㆍㆍㆍㆍ"(125~126쪽)

 

감히 움직이지는 못하고 눈물만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ㆍㆍㆍㆍㆍㆍ한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이의 엄마가 흐느낄 때마다 가슴이 짓눌렸다. 그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간신히 방 밖으로 돌아섰다. 이 광경을 결코 잊지 않을리라 생각하면서 그는 윌콕스 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지 슈라이버에게 사과하고 고맙다는 말을 건넬까 잠시 생각했지만, 자신의 말은 그들의 괴로운 심정만큼 공허할 것 같았다.(131쪽)

작가는 코워트를 통하여,

의미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칼날이 되어 상처를 내고 피 흘리게 할 수 있음을,

때로는 마음이나 진심을 담을려고 애를 썼더라도 공허한 말이나 행동이 있다는 걸 상기시킨다.

이미 쏳아버린 화살은 되돌릴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더불어, 미국인들의 이런 사고방식에 경종을 울리지만, '옳다 그르다'하지는 않는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들은 내게도 가혹하게 굴 거예요. 미국은 살인범들에게 길들여져 있어요. 그런 종자들에게 익숙하단 말이죠. 하지만 실패에 대헤서는 어떨까요? 우린 누군가의 실패에 유난히 관심을 갖죠. 얼빠진 짓이나 실수는 미국인들의 방식이 아니니까. 살인은 참아줘도 실패는 용서하지 않는다고요. ㆍㆍㆍㆍㆍㆍ당신이 감추려고 한 건 뭐죠? 다른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닌가요? 진실과 거짓이 어떻게 다른지는 압니까?'하고 묻()을거란 말이죠."2권, 202~203쪽)

 

 

번역이 틀린 곳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언급하지 않은)...껄끄러운 곳이 두어군데 더 있었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다는 낌새를 맡았겠죠.(1권, 253쪽)

위 문장의 경우, '낌새'는 '맡다'보다는 '눈치채다, 보이다, 느끼다' 등과 호응 관계에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

영어의 'scent'나 'smell'을 '낌새'라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맡다'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 같은 데, 왠지 껄끄럽다. 

 

"진짜 강하다는 게 뭐죠? 코워트 씨?"

"강하다는 건 시기와 때를 아는 거예요. 자신은 온전히 건강하지만 사회가 구제 불능인 질병을 옮겼다는 걸 알아야죠. 강하다는 건 숨을 내쉴 때마다 마지막 숨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걸 아는 거예요."(2권, 156쪽)

위 대화는 셰퍼가 퍼거슨을 상대로 하는 얘기이다.

그러니 맨뒤의 것이 호칭이면 '퍼거슨'이 잘못된 것이고,

강하다는 게 코워트같은 기자나 펜의 힘을 지칭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면 부연 설명이 좀 있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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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2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3-02-12 20:54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
진짜 내가 미쳐, ㅋ~.
제가 '매사는 겉보기와는 결코 다르다'뒤에 '?'를 붙인 이유를 바로 간파해 내셨어요.
그러니까 말예요.
이 책의 주제어가 문장의 호응관계가 '꽝'이었지 뭐예요.
정말 대략난감이길래,
어떻게 할까 하다가 question mark 하나 찍어 넣었습니다여.

파란놀 2013-02-13 07:51   좋아요 0 | URL
어떤 일이든 겉으로는 알 수 없어요.
겉은 겉일 뿐이니까요.

사람도 얼굴로만 사람을 알 수 없어요.
사람을 알려면 마음을 알아야 할 테니까요.
마음을 모르고, 얼굴만 익혀서, 그 사람을 안다 말한다면,
또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글자락 몇 가지만 살피고, 누군가를 안다 말한다면,
우리들은 무엇을 아는 셈일까요.
아마, '껍데기'만 안다고, 아니 '껍데기만 본 적 있다'고 할 테지요.

sslmo 2013-02-17 17:32   좋아요 0 | URL
오늘 이지누를 읽고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관심을 자기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투명하고 말간 유리처럼 닦아서 안팎으로 같은 걸 내어보이고 있는데,
정작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또 저렇게 보고,
이렇게 저렇게 다르게 말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말예요.

어찌되었건 변하지 않는 '고갱이'는 있을테니까 말예요, ㅋ~.

2013-02-13 12:47   좋아요 0 | URL
"스릴러의 강점인 빠른 전개와 사실감 넘치는 사건 서술의 힘을 놓치지 않는 동시에,
견고한 이야기 구조와 세밀한 심리묘사를 유감없이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난 거기에 시적인 서사의 적절한 배치와 더불어,
인간 심리묘사를 하는데 있어서 양가 감정을 대등하게 배치하는 것을 들고 싶다."

- 이렇게 이야기하시면 정말 안 읽을 수가 없는 책,인 거잖아요.ㅎㅎ

잘 지내시죠? 양철님. 강추위와 추위가 오락가락하는 2월입니다. 건강하세요!

sslmo 2013-02-17 17:35   좋아요 0 | URL
그래도 그 추위와 강추위가 오락가락하는 틈을 비집고 목련이 빼꼼이 봉오리를 내밀었더라구요.
그렇게 그렇게 봄은 오고,
그렇게 그렇게 햇살은 누그러지고 넉넉해지겠죠.

섬님~.
봄이예요, 봄~!!!
 
치명적인 은총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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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참 아프게 읽었다.

전작 '스틸 라이프'의 경우에도 장르소설이고, 가마슈경감이 등장하는 고로...죽음, 즉 살인사건은 존재했었다.

하지만 읽고난 후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그런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마음이 상처입고 피 흘리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고민해오던 선악의 문제-그중에서도 경계가 애매하여 고심하던 절대선이나, 필요악 같은 것들을 일종의 '충격 요법'을 통하여 일부러 경계를 만들고 각인시키려는 느낌이랄까?

 

재작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시아버지 및 시댁 식구들의 행동과 관련해서 난, 안락사나 품위있는 죽음 따위 들을 놓고 한때 고민했었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다'거나 '죽음 보다 가혹'한 따위의 인간의 실존과 직접 연결시키려면 사람이 얼마나 모질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더 마음이 아팠다.

이것은 이른바 '입장 바꿔 생각해봐'하는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상황이 바뀔 수 있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으로,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쩜 내내 고민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전 그녀가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죽어 마땅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러면 어떤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까요?"

ㆍㆍㆍㆍㆍㆍ

"그녀는 홀로 지내야 마땅해요. 그게 그녀가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상처 입힌 벌이에요." 그녀는 단호하고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썼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눈물만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어요."

ㆍㆍㆍㆍㆍㆍ클라라와 마찬가지로 가마슈 역시 사람들에게서 고립되는 것이 죽음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32~133쪽)

세상에 '...해야 마땅하다'는 걸 정하는 건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이고, 도덕이고, 관습이고...그런 것들을 만들고 정한 것도 결국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수 있을 만큼 하늘에 미루어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까?(그러다 보니 생각은 엉뚱하게 헌법재판소장으로 흘러가는데...생각이 길어지니 각설하고...)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인간의 업보이다.

내 죄의 벌을 내가 받는 것은 업보이고 잉과응보이지만,

부모의 죄를 자식이 대물림하여 벌을 받는 것, 그걸 두고 '업보'라고 하면 안된다는 거다.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있는게 아닐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전생' 어쩌고 저쩌고를 믿어버리면 노력이나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되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은 '치명적 은총(a fatal grace)'이지만 이건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때의 제목이고, 캐나다에서의 원제는 '동사(dead cold)'였단다.

난 '치명적 은총'이라는 제목만을 듣고 책의 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웃기지만, 내가 타고난 재주 내지는 달란트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들은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엄마를 쏙 빼닮았다. 엄마에게 야속한 마음만을 가지고 있는 나 같은 경우에, 나를 꼭 닮은 딸이 태어났더라면 그 딸이 이쁘기만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떠나기 전, 크리가 여전히 여름 원피스와 끈 달린 슬리퍼 차림으로 앉아 있는 거실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담요를 둘러주고 맞은 편에 앉았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잠시 바라본 후 눈을 감았다.

그는 앞으로 괜찮아질 거라고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 그렇게 될거야. 삶은 항상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란다. 세상이 언제까지나 잔인하지만은 않을 테고. 기회를 주렴, 얘야. 삶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니? 기운을 내렴.(162쪽)

오히려 나를 광분하고 흥분하게 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관심과 오지랖이었다.

우리는 선의라는 탈을 쓰고 너무 다른 사람의 삶에 깊이 개입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사람의 삶이란 누구나 다 사무치고 저리도록 고독하고 외롭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그걸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식에게도 시인하고 가르쳐 주는 편이, 공정한 것이 아닐까?

ㆍㆍㆍㆍㆍㆍ아주 충실한 사람이에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단 한 가지에 투영하거든요. 하나의 관심사에, 하나의 취미에, 한 명의 친구에, 한 명의 연인에, 나는 그의 연인이고 그게 얼마나 두려운지 몰라요."ㆍㆍㆍㆍㆍㆍ"그는 모든 사랑을 내게 쏟아부어요. 나는 그의 꽃병이니까요, 하지만 내게 갈라진 틈이 있다면요? 내가 깨져버린다면요? 내가 죽는다면요? 그는 어떻게 할까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시간에 불행을 대비하라는 말은 어쩜 아이러니 하게 들린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한 신이 아닌 불완전한 존재이다. 이 책의 누군가에게 치명적 은총이라고 불리울만한 그런 재주를 주셨을 때는, 그에게서 '가장' 소중하고 절실한 무엇인가 하나를 빼앗아 갔다는 말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속내를 모르고 무조건 부러워 할 것도 아니고, 선의라는 탈을 쓰고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려 들어서도 안될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항상 부러워하고 샘을 내느라 한순간도 너무 너무 행복해본 적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던 적이 없는게...오히려 다행이라며 안도할 일인가? 끙~(,.)

"ㆍㆍㆍㆍㆍㆍ. 열렬하게 비위를 맞추려 하고 관계에 굶주려 있지. 게다가 본성은 착한 것 같아."

"착한 사람은 상처를 받기 마련이야. 착한 마음은 깨지기 마련이고, 아르망. 그렇게 되면 공격적으로 변해. 조심해.ㆍㆍㆍㆍㆍㆍ"(172쪽)

 

살인이란 살해된 사람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얽힌, 굉장히 인간적인 일이다. 살인자를 지나치게 흉물스럽고 기괴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그에게 부당한 이득을 안겨주는 것이다. 아니, 살인자는 인간이고, 매 살인의 기저에는 감정이 깔려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비뚤어져 있고 뒤틀리고 추악하기는 하지만 분명 사람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감정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면 그 감정은 귀신을 만들어내도록 사람을 몰아붙인다.

가마슈의 일은 증거를 모으는 것이었지만 또한 감정을 모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었다.그들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었다.(256~257쪽)

 

내가 루이즈 페니의 전작'스틸 라이프'도 그렇지만, 요번 책 '치명적 은총'을 설레발을 치면서 two thumb up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다소 잔잔해서 장르소설로서의 매력도 떨어지고, 나같은 경우 제목 만으로 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으니 다른 사람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치료약이 등장한다는 거다.

가만히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이 책의 주인공이나 범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이 책 속의 누군가가(오지랖이 아닌)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느낌을 받고,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느낌을 받고, 감정을 그러모아 다독여 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람의 세세한 감정에 맞춤하게 처방되어진 치료약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ㆍㆍㆍㆍㆍㆍ그들을 항상 젊고 아름답게 묘사해 놓은 것을 보는 데 지쳤거든요. 지혜란 나이와 삶의 경험, 고통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거죠."(291쪽)

 

"누군가 당신을 칼로 찔렀다면 당신이 고통을 느끼는 건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297쪽)

 

"그들이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군요."(354쪽)

 

"ㆍㆍㆍㆍㆍㆍ그녀가 얼마나 놀라운 예술가인지 온 세상이 알게 될 거예요.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것들을 보죠. 사람들에게서 가장 큰 장점을 찾아내요."(442쪽)

 

"ㆍㆍㆍㆍㆍㆍ그제서야 나는 단지 말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과 글에서 드러나는 말의 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죠."(453쪽)

 

그리고 이런 '맞춤 치료제'의 근간에는 그들의 배우자의 내조랄까, 사랑이랄까 하는 것들이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피터는 책장으로 다가가, 마구잡이로 밀어 넣어 잔뜩 쌓여 있는 책들을 뒤졌다. 그는 자서전에서 시작하여 소설과 문학 부분 을 지나 역사 분야에 이르기까지 제목을 훑어 보았다. 꽤 많은 추리소설이 있었다. 그리고 시집도. 욕조 안의 클라라를 흥얼거리거나 신음하게 만드는 멋진 시들이었다.  대부분의 시집들은 얇고 젖은 손으로도 잡기 쉬웠기 때문에 욕조야말로 그녀가 시를 읽기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시는 그가 원했던 방식대로 그녀를 애무했다. 그녀 안에 들어가 그녀를 어루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를 신음하게 했다. 그녀의 신음 소리는 모두 그의 것이어야 했다. 피터는 아내에게 그러한 줄거움을 안겨주는 시를 질투했다. 그러나 그녀는 해흐트나 애트우드, 안젤루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에이츠를 읽으면서도 신음했다. 오든과 플레스너를 읽으며 기쁨에 겨워 신음 소리를 내면서 읊조렸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자리를 루스 자도를 위하여 남겨두고 있었다.(160쪽)

 

  "아, 집에 오니 좋네."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코트 사이로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느끼며 키스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살이 올라 있었다. 양쪽 다 결혼식 때 입었던 옷을 더 이상 입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면에서도 역시 성정했고, 가마슈는 살이 붙은 것 정도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사방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마슈는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렌 마리는 그를 다시 안아주었다. 그의 코트는 눈을 맞아서 그녀의 스웨터마저 축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서 커다란 위안을 얻었으니까.(168~169쪽)

 

 

 

 

'스틸라이프'와 '치명적 은총'의 역자가 다른 사람이다. 왜 바뀌었을까?

요번엔 작품에 별을 여섯개, 번역과 교정에서 하나 이상을 깎아 먹었다.

그래서 별 다섯.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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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7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3 12:50   좋아요 0 | URL
저는요, 사람이 죽을 때 점점 연해져서 (물리적으로 말입니다) 흐릿해져서 점차 사라지면 좋겠습니다. -센과 치히로에서 치히로가 그 세계에 처음 가서 몸이 흐릿해질 때처럼 말이죠.
말도 안 되는 얘기 해 봤습니다.

P.S. 이 글은 좀 있다 읽겠슴다. 아직 안 읽고, 댓글로 뻘소리만 한 마디~

antibaal 2015-01-08 06:50   좋아요 0 | URL
궁금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때문에 더 읽고 싶네요

sslmo 2015-01-08 09:22   좋아요 0 | URL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며칠 전이었다.

방학이 없이 학교에 나가는 울 아들이,

공부가 힘들다는 얘기를 못하고...

"엄마는 왜 날 이 학교에 보냈어?"

하고 하소연을 하길래,

"왜, 학교가 어때서?

 너, 몰라서 그렇지...나름 명문이었다...!"라고 붇돋워주려하였더니,

"엄마, 옛날에나 배산임수(背山臨水)라서...풍수지리학적으로 좀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앞에 물이 없어서 전혀 아니거든~"

 

암튼, 난 '박준' 그의 시가 친근하다.

그가 시 속에서 얘기하고 있는 동네들이 하나 같이 내가 아는 동네여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지명들은 하나 같이 '물(水)'을 품고 있고, 그래서 그런지 시가 하나같이 아련하고 눈물겹다.

그래서, 내맘대로 '물'은 치유라고 읽는다.

 

사실 이 시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어쩌면 시인은 '자서전을 써서(지어서) 며칠을 먹고 살았다'라는 의미로 썼을 수도 있을테지만,

난 내 맘대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처방받아 며칠을 먹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며칠 전부터 친구가 아프다고 골골거린다.

난 추운데 옷을 여며입지도 않고 '불.금.'을 즐긴 탓이라고 이래저래 타박을 했지만,

실은 약 한알, 주사 한방 처방해 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나 보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서로의 이름만으로 처방이 되는,

서로의 마음만으로 온기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한 걸까?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용산 가는 길 - 청파동1' 부분)

이 시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흡~'하고 울었다.

이 사내의 마음 씀씀이 때문에 울었다.

이 사내의 시가 '물(水)'을 품고 있어서 눈물이 난것이지 결코 내가 눈물이 헤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가'와 '도'라는 조사가 주는 위력을 실감하기도 하였다.

'그대가 나를 떠난 것'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일때는 떠난 책임의 주체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 될때는,

그대를 떠나게 만든 그 이유로, 다른 이들도 떠나 보냈을 수 있는 것이 되니까...

일말의 책임을 나에게 전가시킬 수 있다.

그렇게 그대를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던 내 자신을 생각하면 아프지만,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은 것이다.

아니, 덜 아플 수 있다면...기꺼이~!

 

광장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애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이런 시를 읽으면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는' 시절에 만나지 못한 걸 서글퍼 해야 하나 싶지만,

그러다가도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내가, 또는 그대가 새가 아닌 것에 '무한 땡큐'를 날리게 된다.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바람은

바람이어서

조금 애매한

 

바람이

바람이 될 때까지

불어서 추운

 

새들이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나는 오늘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 부분)

그런 생각을 한다.

아파 본 사람만이 건강의 고마움을 알 수 있고,

상처에 아파해본 사람만이 사랑의 행복함에 감사할 수 있으리라.

슬픔을, 아픔을, 또는 그리움을 내 것으로 견디고 감당해 본 사람만이...그 뒤에 오는 모든 소박한 것들에 감사할 수 있으리라.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나는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 마냥 툴툴거리며, 꾀병의 마지막 연을 읊조린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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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호흡 사이를 참지 못해 후회하게 되지
    from 그냥 헛짓! 2013-01-30 11:42 
    내 하루는 언제나 다짐으로 시작해 결국 후회로 끝나지. 오늘 당신이 없는 사이, 누군가에게 당신에 대해 이야기할 것만 같았어.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한 호흡만 참을 수 있다면 누군가의 온당한 말은 세상이 먼저 알고 수용하게 되어 있거든. 역시나 당신이 모르게 나는 당신을 아프게 했어. 당신을 아프게 해서 치욕스런 나의 하루가 지났어. 젊은 시인 박준은 이렇게 말하지.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대를 아프게 한 죄로 나는 내
 
 
다크아이즈 2013-01-29 10:42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순간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을 대상이 제게 과연 몇 명일까 되내어 봤다는.
손 안에 꼽히는 걸 보면서 제가 너무 좁게 살았나 싶다가도, 이렇게 생겨 먹은 게 나란 존재구나, 하는
체념을 하게 되지 뭡니까.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을 대상... 하루 종일 박준의 이 구절을 되낼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페이퍼^^*

하늘바람 2013-01-29 13:46   좋아요 0 | URL
저도 따라서 흡하고 울었네요 그대도 나를~
그 '도'라는 조사에 언젠가 외로운건 내 천명이다라고 한 점쟁이 말에 대성통곡했던 생각도 나고
덕분에 오랫만에 좋은 시 많이 감상해요
아파본 사람만이
그래선가요
어디나 다쳐 속상할때 이상하게도 알라딘 들어오게 되고 꼭 님이 있어요

2013-01-30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1 0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3-02-01 20:53   좋아요 0 | URL
이 시집. 한번 훑었는데.. 천천히 다시 읽어내려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