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
김도언 지음 / 이른아침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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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라는 제목을 보고 혹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라는 제목이 주는 뉘앙스와 여운의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잘 웃지 않는 소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모습 말이다.

지금은 잘 웃는 청ㆍ장년이 되어있을 수도 있겠고,

여전히 잘 웃지 않는 청ㆍ장년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산술적인 통계치가 아니라, 한사람의 세월의 흔적을 엿보고 싶었나 보다.

 월요일, 컨디션이 지나치게 좋다. 이럴 때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데, 친절하고 상냥한 것처럼 무서운 것도 없는 거다. 애들처럼 앙앙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어딜 가나 조숙하고 어른스럽다는 이야길 들으며 자랐다. 그런 소릴 듣는 비결은 간단하다. 웃지 않으니까 그런 말들을 하더라. 나는 정말 잘 웃지 않는 아이였고 소년이었다. 웃을 일이 좀체 없었던 거다. 나는 그래서 일찌감치, 행복하길 바라는 꿈이랑 꾸지 말고, 덜 불행하기만을 바라자, 고 생각했다. 나는 당신들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다. 그럴 능력도 욕심도 없다. 그러니, 내 앞에선 그냥 마음 놓고 무장해제하시라. 긴장도 하지 마시라. 긴장은 내가 하겠다.(112쪽)

 

나는 또 다른 자칭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던 사람'을 안다.

항상 '웃는 돼지'과의 눈꼬리가 내려오고 입꼬리가 올라간 근간의 표정으로 미루어,

'잘 웃지 않는 소년'의 흔적을 읽을 수 없었는데...

언젠가 우연하게 엿본 그의 무장해제한 표정이란 것이,

돌아선 사람의 뒷모습처럼 쓸쓸한 그런 것이어서 놀라웠었다.

 

오늘 또 다른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던 그 사람과 사석원의 '서울연가'를 놓고 얘기를 나눴다.

사석원의 호가 뭔지 아냐고 묻길래,

나는,

"몰라여, 날건달? 아님 한량인가?

 나, 요번 책 읽고 이 사람 좀 별로로 바뀌었음~--; "

하고 시큰둥하게 대구했다.

사석원이 누구인가?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좋아 죽겠다고 설레발이었기에, 그는 나의 이런 변화가 의외였나 보다.

"원래 이렇게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들은 잡다해서 농도랄까...그런게 없지.

 먼젓번 '꽃 먹는 당나귀' 참 멋졌는데..."

라며 애써 내게 호응을 구하려 들었다.

실은 난 요번 글의 농도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게 아니었다.

자신이 날건달이고 최고의 한량이고 최대의 수혜자이면서도,

자기가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왠지 밉상이었다.

괜히 주류이면서 아웃사이더인척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강남의 술집이나 딸내미의 옷가게 같은 얘기들은 설렁설렁 풀어놓는 것 같지만 일반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들이니 말이다.

그의 그림을 놓고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 입네, 어쩌네...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툴툴거리고 항변하던 사람들이 그가 아니고, 그의 주변 사람들라고 하니 망정이지 그였다면 좀 민망할 뻔 했다.

내가 여전히 시큰둥하자, 또 다른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던 그 사람은 뭔가 아쉬운듯,

또는 사석원에 대한 그의 호의는 변할 수 없는 것인지 '화가는 그림으로 얘기해야지'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림으로써 화가의 시선을 사실인양 반영시킬 수 있고,

나는 보는 관점을 개입시킴으로써 얼마든지 내 멋대로 해석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선 즉,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 진실의 어느 일부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그림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진실을 반영시키지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그제서야 눈치챘는지, 또 다른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던 사람은 그제서야,

"누구나 폼 잡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속속들이 알고 나면 시들한게 사람이지...

 사람이 한 측면으로 판단하면 다른 면들은 실망 투성이..." 
이런 알쏭달쏭한 말을 건넨다.

 

 

서론이 길었다.

'김도언'의 이 책'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를 읽으면서 느낀 내 느낌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쯤되겠다.

작가는 글로 얘기해야 한다.

암, 그래야 하지. 그래야 하고 말고...

두말하면 잔소리지.

나는 그의 이 책을 통해서 글쓰는 사람들의 진실의 전부를 봤다고 감히 단언한다.

이만하면 됐다.

 

실은 나는 이 책의 김도언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른바 뇌졸중으로 말을 잃었다는 소설가의 씁쓸한 뒷얘기(아니, 퇴락한 젊은 시절의 얘기라고 해야하나?)를 좀 알고 있는지라, 그의 이런 성찰이 와닿는건지도 모르겠다.

뇌졸중 때문에 말을 잃어버린 소설가의 우울에 대한 생각은 되도록 짧게 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위대한 진화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당신들도 알겠지만 진화를 설명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드물다. 차라리 그것은 불가능하다.(78쪽)

그의 다음 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언젠가 읽었던 이정록 시인의 '편애'의 심정과도 일맥상통이다.

이러니 그에게서 '진실 또는 진심의 전부'를 봤다고 할 수밖에~--;

나의 경우, 타인에게 호의를 표시하는 것이 언제인가부터 매우 불편해졌다. 호감의 표현이 어떤 관계의 신호 같은 게 되어 지극히 객관적이었던 감정 선에 변화를 일으킬까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부모와 형제 같은 육친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다만 관습으로서의 예의만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 아무도 주의 깊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메마르고 무정한 사막주의자이며 권태주의자다. 이건 자랑도 아니고 다만 장애일 뿐. 기적적으로 전폭적인 대상이 나타난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인가.(84쪽)

 

 ㆍㆍㆍㆍㆍㆍ가슴속에 피멍이 들었을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방법을 모르기에, 수습은 영영 요원하다. 이 상처를 어쩔 것인가. 이런 사고를 당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훈련 받은 적 없기에 이 가족은 늘 아프다.ㆍㆍㆍㆍㆍㆍ나는 그녀가 믿는 신에게 단 한 번도 머리를 조아리며 갈구한 적이 없다. 잘나지도 않고, 따로 믿는 것도 없으면서 그랬다. 이것이 나의 우매함이며 나의 가련함이다.(119쪽)

그는 또,

플로베르의 대표작 <보바리 부인>에 대해, '여주인공의 눈동자 색깔이 작품 안에서 일치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작품을 비판하는 장면'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줄리안 반즈는 말한다.

평론가가 여자 주인공의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찾아내느라 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사이, 오히려 독자들은 작품에 더욱 즐겁게 몰입하면서 작품이 전해주는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학작품과 새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조롱에 가두지 말고 공중에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그 생동하는 존재감의 비밀이 비로소 드러난다는 점에서.(86쪽)

이렇게 문장속의 오탈자를 잡아내느라고, 문학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꼬집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러고 오탈자를 잡아내고 앉아있다.

왜냐고? 책을 통틀어 딱 하나여서 신기하여서..., ㅋ~.

 

우리는 내는(리) 비(80쪽)

 

암튼, 이 책이 좋았던 것은...

글쓰는 사람들이 글 외의 것들을 향하여 데면데면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고,

작가들은 어떤 고민과 고뇌를 가지고 사는지 엿볼 수 있었으며,

그들은 주변에 어떤 이들을 친구로 두고 사는지,

따위의 자잘한 호기심을 해갈할 수 있어서 였으나,

무엇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이것인가 보다.

어이없게도 어떤 작가들은 적막을 빌리기도 한다. 그의 내부에서는 적막이 태어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적막을 어디선가 빌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가짜 적막이다. 그의 곁에는 사람들이 흘러넘친다. 그러면서 그는 끝없이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자신은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스스로 맹렬하게 주문을 건다. 그의 적막은 인사도 잘하고 사회성도 밝은 이상한 적막이다. <백치 아다다>의 소설가 계용묵이 죽었을 때 그의 빈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까탈스러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자를 좋아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옆에 잘 가려고 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는 자.(228~229쪽)

아무리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고 하더라도,

글 외의 것들을 향하여 데면데면한 면모를 보이더라도,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흠뻑 애정해 줄 수 있겠다.

처음 소설을 쓸 때 원고지에 썼지. 좋아하는 펜으로 원고지에 정성껏 소설을 썼지. 문장을 만들고 고통과 쾌락을 얻었지. 원고지는 부드럽고 깊었지. 그런 시절이 있었지. 어떤 날은,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원고지를 찢고 다시 쓰기도 했지.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아니라 글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나는 고집이 셌지. 그래서 아름답고 가난했지. 나는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에 안도했지. 나는 헌책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너의 작은 목소리를 좋아했지. 나는 골목과 그늘이 좋았지. 하지만 그곳에 너를 초대하지는 않았지. 기적이 일어나는 곳으로부터 멀리 도망쳤지. 골목에서 마주치는 노인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묘사했지. 그들의 근육 없는 걱정을 궁금해 했지. 낮에는 방에 엎드려 숨어 있곤 했지. 저녁에는 조금 움직이며 달을 바라보았지. 밤이 깊으면 소설을 썼지. 직업이 없었지. 애인도 없고 살의도 없고 금기도 없었지. 소설을 쓸 땐 착하지 않은 상상을 했지. 내가 사랑하는 악인들의 이름도 만들었지. 그들은 아무데서나 섹스하고 사람을 때렸지. 파란 하늘을 향해 던져진 돌의 곡선을 그려보기도 했지. 나는 원고지의 빈칸을 매우 사랑했지. 하지만 사실 그 사랑은 표현할 수 없는,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었지. 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안 거지.(201쪽)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폼 잡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속속들이 알고 나면 시들한게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어느 한 측면으로 판단하게 되면, 다른 면들은 실망 투성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보여주지 않은 면까지 봤다고 해서 서운해한들 무슨 소용있겠으며,

그렇다고 두 눈 뜨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다.

日新又日新, 날마다 꾸준히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공부하는 자의 그것을 누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거창하게, 삶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예술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고...

심지어는 신변잡기적인 이런 리뷰나 페이퍼 글들도 그렇고...

현실을 외면시키거나 소외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가슴엔 땡큐 카드 같은 따뜻함으로,

누군가의 가슴엔 아련하고 그리운 시나 글 한 줄로,

그렇게 그렇게 위로와 위안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예술이나 문학에 문외한이어서, 작품성을 논할 수 없으니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의 글 한구절처럼,

'목요일엔 나무들이 일제히 합창을 하게 하고 수요일엔 기억 속에 물이 흐르게(138쪽)'하는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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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4-03 22:29   좋아요 1 | URL
플로베르의 통상관념사전을 보고있는데 플로베르가 나와서 그냥 반갑네요. 문학작품도 새처럼 조롱에 가두지 않아야하는군요. 사람도 그럴 것 같아요. 스스로 가두든 타의에 의해 가둬지든 진면목이 나오긴 어렵겠지요. 사월, 잘 보내고 계신거죠~~^^

하늘바람 2013-04-04 16:39   좋아요 1 | URL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맞아하며 눈깜박이고 갑니다
 

파파로티를 보았다.

좀 진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걸 감안하고서도 참 좋았다.

이제훈(장호 역)은 자기의 맞춤 배역이라고 할 정도로,건달과 천재 성악가 역할을,

한석규 역시 음악 선생님 역할을 능청스럽게 소화해 냈다.

개인적으로 조진웅을 좋아하기 때문에 큰 웃음을 줄거라고 기대했었는데,

그와는 달리, 이제훈(장호 역)을 거둬 주는 건달로 분해 화려한 액션과 멋진 대사 몇마디 날려 주신다.

역시나 교장선생님 오달수가 크고 작은 웃음을 선사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다보니 '감동'을 의도적으로 전달하려 해서 좀 진부하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나름 감동을 받았고, 나중엔 눈물과 콧물을 섞어가며 '엉엉'울기까지 한 것이 제대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던 멋진 영화였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장면이 여러군데 있었는데...

조진웅이 자신은 꿈이 없어서 가장 불쌍하다고 하는 장면과,

이제훈이 한석규를 향하여,

"언젠가는 사흘동안 말을 안한 적도 있습니다. 누가 말을 걸어줘야 지껄이지요." 하는 장면,

한석규가 건달 두목을 찾아가서,

"장호 보내주십시오. 손목아지는 피아노라도 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안되고, 발목아지라도 끊으십시오."하는 장면에서 흘린 눈물을 합하면 손수건 하나는 적시고도 남겠다.

 

난, 친구나 동료도 그렇고, 스승도 그렇고, 한참 나이 어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내가 그들로부터 무엇 하나라도 배울게 있는 사람이 좋다.

그렇다고 입장 바꾸어서,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칠만큼의 실력과 내공을 쌓았느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올시다'이다.

예전에 지방 대학에서 한학기 강의를 한적이 있었다.

물론 자질을 놓고 봤을 때도 많이 부족해서 강의를 듣는 입장에서도 내가 못마땅했었겠지만,

무엇보다 내 안의 것을 끄집어내어 놓고 나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한시간 떠들고 나면 허기가 져 음식을 주워 삼키듯 부족한 밑천을 보충할 요량으로 책이고 자료를 들입다 팠다. 

 

음악 선생님 상진(한석규)은 제자를 위하여 건달 두목을 찾아가서 발목아지를 내놓는다고 하는데,

영화를 보면서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진부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인터넷을 찾아 실상을 읽으면서는,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싶어, 뒤늦게 목이 메었다.

 

나에게 힘들고 불가능하게 보인다고, 세상 모두가 나 같으란 법은 없다.

새학년 새학기가 되어 다 새롭겠지만,

대입을 준비하는 인문계 고등학생은 새로움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중된다.

한 학교에서 얼마 전에 모의고사를 보고 성적이 나오자,

시험을 망친 한 학생이 좌절하여 선생님을 찾아가서는 철퍼덕 넘어져 눈물바람을 하였단다.

선생님은 울고 있는 학생에게,

"내가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있는 날, 니가 와줘서 다행이다, 고맙다."

하며 달랬단다.

 

어쩜, 요즘 울 아들의 장래를 놓고 고민 중이어서 이 영화가 남달랐는지도 모르겠다.

울아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동안 무엇 하나 특별하게 빼어나게 잘하지는 못할지라도, 두루뭉술하게 잘하며 큰 말썽없이 지내왔다.

그리하여 자율고라는 곳을 단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는 이유 때문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주변 아이들이 다 자기만큼은 공부를 하더란다.

게다가 아들은 그 엄마의 오지랖을 닮았는지,

이것저것 두루두루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관심과 호기심도 많았다.

중3 무렵엔 맛을 탁월하게 구별해내서 그게 '맛 감별' 쪽으로 반짝하더니,

지금은 나이 또래의 '악동뮤지션'을 보고, 그애들처럼 기타 치고 작곡을 하고 싶으시단다.

문제는 자기 아들에 대해서 가장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엄마의 입장에서 봤을때,

그런 콩깎지가 씐 엄마의 눈으로 봤을 때도, 아들이 기타치고 작곡을 해서 대학을 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것들을 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데, 외동이어서 경쟁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녀석은...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경쟁자가 되어야 하는 그 상황이 싫으시단다.

 

적어도 밥은 굶지 않는 직업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는 엄마의 성화에도,

밥 몇끼 굶는게 낫지, 평생 하고 싶은 걸 못하고 불행하게 사는게 낫겠냐며...

한없이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에효~--;

 

 

 파파로티 O.S.T.
 한석규 외 노래, 강요셉 테너 /

 열린음악 / 2013년 3월

 

 파파로티
 유영아 원작, 김현정 소설 /

 탐 / 2013년 3월

 

그리고 오늘 유시민의 '어떻게 살것인가'를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정치인 유시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너무 가볍게 시류에 움직이는, 말과 행동이 다른 그가 보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정치색을 최대한 배격한 그의 글은 너무 괜찮다.

아니 그는 지식소매상이라고 표현하지만, 난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나서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그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지음 / 아포리아 /

 2013년 3월

 

 

 

결론을 말하자면,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오래 덮어두었던 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기회를 가졌고 그것을 드러낼 용기를 냈다.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감추거나 꾸미는 습관과 결별했다. 내 자신의 욕망을 더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삶을 얽어맸던 관념의 속박을 풀어버렸다. 원래의 , 내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나답게 살기로 마음먹었다.(10쪽)

  ㆍㆍㆍㆍㆍㆍ어떻게 살 것인가? 크라잉넛은 자기네 생각을 이야기했다. '좋아한다면 부딪쳐, 까짓 거 부딪쳐!' 훌륭한 대답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좋아하는 펑크록 음악을 들고 세상과 부딪쳐 나름 성공했다.인생에서 성공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소신껏 인생을 사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산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포기하고 산다면, 그 인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다.(23쪽)

ㆍㆍㆍㆍㆍㆍ그러나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행복한 삶을 스스로 설계했다. 그리고 그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밀고나갔다. 주눅 들지 않고 세상과 부딪쳤다. 인생이 성공했으며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그들은 좋아하는 놀이를 직업으로 삼았다. 이것만으로도 '절반'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인생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일과 놀이가 인생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과 연대solidarity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크라잉넛 멤버들이 이 나머지 '절반'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절반' 성공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크라잉넛의 책을 읽으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크게 빚졌다고 생각한다. 그 빚을 갚고 싶다. 그래서 그들도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인생의 나머지 절반도 소신대로 하기를 기대한다.(27~28쪽)

이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그는 힐링에 관해서 강신주와 같은 의견을 펼친다.

그리고, 이렇게 돌려서 얘기한다.

그런데 이 얘기가 그가 하는 말들이어서 설득력이 있고 아름답다.

미사여구보다 아름다운 말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신의 소신이 담긴 말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가슴이 살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ㆍㆍㆍ.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그는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이렇게 담담하게 적고 있다.

'지금' 바로 '여기'를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꿈'을 얘기하는 것이고,

이것들이야 말로, 가장 소박하면서도 소신이 담긴, 설렘과 황홀과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방법이 아닐까?

 

그러면서, 카뮈의 스승 '루이 제르맹'을 언급한다.

그러고 보면, 유시민 그도 지식소매상 어쩌고 하지만, 선생님(즉, 교사가)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알고 있는 듯하며,

이제 그가 그러한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그가 여지껏 해오던 정치와는 가치를 비교할 수조차 없는 멋지고 위대한 직업일 것임에 틀림이 없고,

그라면 훌륭한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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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5 23:26   좋아요 0 | URL
응, 저도 유시민 읽어볼래요, 라고 쓰고 양철나무꾼님 안녕, 오랜만, 이라고 인사도 하고.
보고싶었어요. 진짜진짜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글은 잘 읽고 있었고요. 댓글 없어서 서운했어요? 안서운했어요?

파란놀 2013-03-26 05:32   좋아요 0 | URL
오늘도 좋은 하루 마음껏 누리셔요.
저는 지난 한 주 서울 인천 떠돌며 강의하고 뭐 하느라
시골마을 봄꽃을 '한 주치 놓쳤'더니
아주아주 서운하더라고요.
참말 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시골에서만 지내야지 싶어요.

아이와 함께 봄꽃 봄나무 즐기러
느긋하게 마실해 보셔요.
서로서로 마음에 걱정 아닌 즐거움을 놓아 보셔요.

북극곰 2013-03-26 09:54   좋아요 0 | URL
파파로티, 저도 진부할거라 생각했는데, 절친도 보고나서 한없이 울었다고 하더라구요.
영화 보러 갈 형편은 안 돼서 전 천천히 봐야겠어요.
유시민이 이젠 글쟁이로만 살아갈거라는데, 왠지 짠하고 씁쓸하고... 복잡하더라고요.
독자로서는 반길 일이지만.

그나저나 나무꾼님~ 저도 간만에 댓글 달아요.
봄이 되니 좋네요!

하늘바람 2013-03-26 11:18   좋아요 0 | URL
아 카뮈 질문에 대한 답 어디 적어 놓아야겠어요 멋지네요 님따라쟁이 픈!

알케 2013-03-26 13:50   좋아요 0 | URL
유시민..이번 책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 무엇보다 '훈장질'안해서 좋아요.저는 일주일 째 점심시간에만 읽습니다.
파바로티는 (제가 영화관에서 본 마지막 영화가 '아바타'이니 한 3년을 영화관에 안갔네요.)언제나 볼 수 있을지 ㅎㅎ
우리 아들놈의 장래 희망은 한국야구위원회 (KBO)기록원입니다. ㅎㅎ
 

1.

그동안 이곳, 알라딘 서재에서 책을 처분하는 차원에서,

다시말하면 '책.탑.타.파'차원에서 읽은 책이나 두권 가지고 있는 책, 또는 같이 읽었으면 싶은 책들을...

알라딘 서재 지인들에게 곧잘 선물했었지만,

정작 나는 그들이 읽고 보내주는 책을 쉽게 받아 읽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들이 책을 보내주겠다고 할 때, 거절하느라 참 힘들고 난감했었다.

그러던 차에 한 친구를 알게 됐고,

그 친구가 너무 좋았던 터라 그 친구가 읽으면서 남겨놓은 흔적과 표시가 참 좋아서 쓸어보고 만져보고 보듬어 안아보고 하였다.

그 친구 덕에, 손 때 묻은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 이제는 지인들이 보내주는 책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며칠 전,

이곳에서 모두의 애정을 받는 OO님께서 내게 노란 종이에 눌러쓴 이쁜 손글씨 편지와 함께 책을 한아름 보내주셨다.

어머니가 아프신 뒤라 정신 없으실텐데...

내가 언젠가 이곳에서 '번역가의 꿈을 키운다고 설레발'을 쳤던 걸 기억하고 계신다.

아흑, 창피해라~--;

OO님, 제겐 취미로 설레발을 쳤던 그것들이...누군가에겐 치열한 현실이고 삶이어서...

그리고 그쪽으로 자질이 없는 걸 뒤늦게 깨닫고 접었습니다여~ㅠ.ㅠ

잊지않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여~(__)

 

 

(왼쪽 엄지발가락이 찬조 출연했네, ㅋ~.)

 

 

 

 

2.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을 '농담'이라고 한단다.

이문재의 시<농담>은 한때 좋아 외우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그렇게 잊혀졌었는데, '카피는 거시기다'라는 책(96쪽)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었다.

 

            농      담

                       - 이 문 재 -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로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한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 '농담'의 의미를 놓고 궁금해 했었다.

'카피는 거시기다'라는 책에서 이 시를 인용했을 때는,

이렇게 멋진 시 내용을 읊고나서 쑥스러워서 머리 긁적이며 '농담'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짙지 싶다.

하지만 난 이 시의 '농담'을 반어법으로 해석하고 싶다.

종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종은 지금도 충분히 아픈데,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해 더 아파야 한다는 말은 '반어법'이거나 '농담'이어도 좋겠다.

이건 바꾸어 얘기하면,

아프면 아플수록 지금 더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때문에 지금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사랑하고 있지 않을 확률은 1/2,

사랑하지만 떠올리지 않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거나, 진짜 외로운 사람이거나...

 

진짜 외로운 사람은 차치하고,

여기서 경계하여야 할 것은 정말로 강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제 몸을 더 세게 때려 소리를 더 크게 울려 퍼지게 하거나,

제 자신을 말끔하게 비워내 더 큰 울림을 만들어야 한다.

때리는 것도,

깎고 비워내는 것도,

정말로 강한 사람이 아니면 쉽지 않겠지만... 

그 강한 사람도 어쩌면,

한번 무너지면 연달아 무너지는 도미노마냥 속수무책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농담'으로라도...

치열하게 사랑하고,

진짜 외롭고,

더 아파하고 싶지는 않다.

난 아름답지 않고 사소한 풍경이라도 좋으니,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이 아니라 단사표음이라도 좋으니,

치열하게 사랑하지 않고 그냥 되는대로 살다가도 좋으니,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저런 삶을 꿈꾸는 시인이나 작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런 삶을 살고 싶은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제국호텔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카피는 거시기다
 윤제림 지음 / 난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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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9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3-03-20 07:37   좋아요 1 | URL
오늘 하루도 고운 봄볕과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 누리셔요

2013-03-20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3-03-20 17:09   좋아요 1 | URL
호호호 저두 잘 아는 분이 보내셨군요^^
뭐야 제가 책 선물 한다고 하니 싫다 하시고는 흥흥흥!! ㅎㅎ 벌써 오래전 이야기죠~~~

mira 2013-03-20 17:33   좋아요 1 | URL
공감가는 이야기가 가득한데요. 누가 보내셨는지 저두 어렴풋알겠네요 . ㅎㅎ

cyrus 2013-03-20 19:59   좋아요 1 | URL
2년 전에 나무꾼님이 선물한 책 잘 읽었습니다. 그 해 복학하느라 책에 대한 글 한 토막 못 썼지만...^^;;
저도 선물 보내줄 수 있었는데 답글 안 달아주셔서 기다리다가 그냥 포기했습니다. ㅎㅎㅎ

2013-03-20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석원의 서울연가
사석원 지음 / 샘터사 / 201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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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드셨는데요?"

"아침엔 빵 먹고요, 점심엔 김치찌개 먹었는데요."

'에엥~?@@'  애써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내 허벅지를 꼬집어서 분명 보랏빛 멍이 들었을게다.

"아니, 뭘 먹었는지가 아니고요, 뭘 드셔서 허리가 아프시다면서요?"

"아하~? 네에..."

같은 한국어를 쓰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요즘은 어려운 의학용어를 사용하는게 아니라 일상용어를 사용하는데도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경험할 때가 있다.

 

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소위 서울 토박이.

부모님도 서울 분이시고, 친가 ㆍ외가 다 서울이어서 사투리가 섞일래야 섞일 새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쓰는 말이 표준어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하지는 못하는데 '서울 사투리'라는 것도 있다고 해서이다.

암튼 서울 사람이면서도 서울 말씨의 특징이랄까, 속성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사석원은 그걸 이렇게 정리해주는데 제법 명쾌하다.

 50년 전쯤의 한국영화를 보면 배경이 되는 풍경이나 사람들의 옷차림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고 말투도 확연히 달라 매우 생경한 느낌이 든다. 특히 여인들의 말씨가 그렇다.

  원래 서울 여인들은 수더분하기보다는 깔끔하고, 푸짐하기보다는 야무진 느낌이 풍겼다. 꼭 조여진 버선발의 사뿐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잘 씻어서 껍질을 깎아놓은 생밤알 같다고나 할까. 곱고 사근사근한 말씨에 깍듯한 예의범절을 갖춘 서울 여인들. 알뜰하면서도 부지런하고 때론 지나치게 경우가 밝아 다소 차가운 인상을 풍기기도 했던 서울 아낙네들. 그녀들의 말은 졸졸졸 물소리같이 맑고 명랑했다. 서울 여인들은 비교적 말이 많고 빨라 받아 적기가 힘들고 힘을 빼서 발음해 억양에 변화가 적어 타지인들은 구별하기 힘들다고 했다. 또한 도란거려 무슨 재미난 소설 읽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랬던 서울 여인들의 토박이 말투가 지금은 오래된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말투는 전국 팔도가 비슷비슷해졌다. 모두 같은 고향 출신인 듯 엇비슷한 음색으로 말을 한다(260쪽)

그의 이 글을 읽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었는데,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난 목소리가 엄청 컴플렉스이다.

이젠 아들이 제법 커 그런 일은 없지만, 환자를 앞에 두고 어린 아들과 응급 상황일지도 모르는 전화 통화라도 하려고 하면, 대부분의 남자 환자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애인'이랑 통화하냐며 관심을 보인다.

내 말씨가 곱고 사근사근하다 못해, 다정다감해서 애교가 뚝뚝 떨어진단다는 거다.

이런 목소리의 컴플렉스가 내게 주도적으로 나서서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습관을 만들어주어, 그나마 일을 하는데 있어서 플러스로 작용한다고 자위하곤 했었는데...사석원의 글을 읽고보니 나만 그런게 아니고 전반적인 서울 여인들 말씨의 특징인가 보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컴플렉스'로 여길 것까지는 없었을텐데 말이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사석원이 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겐 의의가 있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가 40년이 넘게 몸 담고 살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는 서울을 좀 자세히 알아보자는데에도 의의가 있다.

 

사석원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최북'과 마찬가지로 손철주를 통해서였다.

그 후 사석원의 그림과 글들을 꾸준히 접했다.

그림이야 내가 좋다고 설레발을 치던 그런 풍의 그림인 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글은 조각글로만 접했던게 고작이었기에 그의 문체나 작풍에 대해서 느낄 사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 글을 이렇게 맛깔나게 쓰는 줄 미처 몰랐다.

그림이 단정하고 깔끔하지만, 다정하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그런 여운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인데 반해,

글은 이렇게 저렇게 눙치고 엉너리 치며 수작을 부리는 품이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요번의 것은 그림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뭐랄까, 질펀한 느낌이 드는 것이,

그의 책에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화류계에서 '쫌' 놀아본 한량의 냄새가 풍긴다고 해야 할까, ㅋ~.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이제 옛말인가 보다.

이 책은 처음 맛집 소개로 시작하는 듯 하다가는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듯 패션감각을 자랑하는 듯 하다가, 그림이면 그림, 글이면 글, 음악이면 음악, 두루두루 출중하여 나같은 凡人의 입장에선 마냥 부러워만 하다가 날 새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낱말로 '인복'쯤을 들 수 있겠는데, 그 인복이란 건 이 밑의 글에도 나오지만 상호적인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많이 지어야 나도 복을 많이 받는 것이고, 같은 상황을 놓고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행복하다, 행복하다' 하면서 한번 더 미소 지으면 행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행복이나 불행은 쪼개진 사과처럼 확연히 나눌 수 있는 별개의 것도 아니지만, 혼자서 다니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행복한 순간, 또는 불행의 정점을 치는 순간 방심한 틈을 노린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아마도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나 봐요!" 내 인생이 남들에겐 부러울 정도로 얘깃거리가 많고 재밌게 비쳐진 것 같다.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감히 말하고 싶다. 삶이란 게 뚜렷한 경계가 있어 행복과 불행이 쪼개진 사과처럼 확연히 나누어져 다른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같은 상황이라도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될 수도 있고 추억이 될 수도 있고 회한이 될 수도 있다. 서울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겐 사랑의 도시고 누군가에겐 끔찍한 비정의 도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자의 몫이다.(9쪽, 서문 중에서)

그렇다면...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불행 대신 행복을, 회한 대신 추억을, 비정함 대신 사랑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불끈~! 

 

인복이 상호적인 것이니까 복을 많이 받으려면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말로 시작했는데, 이 사람의 그림 재주야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어렸을때 고흐 도록을 보고 꾸준히 모사를 했을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글도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꾸준히 독서를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종묘'를 언급하면서 최근에 쓰인 소설인 '은교'를 언급하는 것은 단적인 예이다.

음악 또한 중학교때 클래식 연주회를 쫒아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런 모든 감성이 쌓이고 쌓여 오늘 날의 사석원이란 사람이 만들어 지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오감을 열고 열정적으로 공감하려 하는 노력, 물론 본인 나름대로는 치열했겠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충분히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삶은 제대로 즐기는 자의 것이다.

ㆍㆍㆍㆍㆍㆍ사춘기의 지적 욕구 때문인지 아니면 겉멋이 들어서인지 고전음악엔 문외한이었던 중학생의 나는 국립교향악단의 연주회를 6개월간이나 정기권을 끊어 빠짐없이 남산 국립극장에 가서 관람한 경험이 있다. 당시 지휘자는 홍연택이란 분이었고 작은 망원경을 준비해 열심히 연주와 지휘하는 모습을 관찰했었다. 그 덕인지 지금도 틈만 나면 고전음악의 향기에 푹 빠져 지내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222쪽)

('커피, 치명적 유혹'의 '홍연택 커피-블랙 앤 스위트 블랙'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참 재밌는 분이다.)

 

암튼, 사람을 기죽게 하는 그의 내공은 음식으로 시작해, 그림, 글씨, 음악에만 국한 되지 않고 급기야 건축에까지 팔을 뻗친다.

샘터는 본래 서울대 도서관 자리. 그 앞으론 개천도 흘렀고 일명 미라보다리도 있었다. 샘터 사옥은 고 김수근 선생의 작품. 선생의 명성답게 명작이다. 담쟁이가 건물 전체를 덮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현재는 선생의 제자인 승효상 선생이 부분적으로 개축을 하고 있다.(119쪽)

난, 불광동 성당을 보고 자랐다. '기도하는 손'모양의 건물은 김수근이 누군지 모르던 그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나에게 영감과 은총을 주었다. 그러고 보면 좋은 작품은 명성이나 이름으로 얘기하는게 아닌거다.

그가 하려는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의도하는 바가 충분히 나에게 전해졌다고 믿고 싶다.

난 '불광동 성당'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춘천 어린이 회관'을 사랑하여 날 따뜻한 날 걷기를 즐긴다.

 

나는 사석원의 그림들을 애정해 마지 않지만,

혹자들은 그의 그림을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라며...다시말해, 시류나 인기에 너무 편승한다고 폄하한단다.

그 혹자들을 향하여 축하카드가 됐건 땡큐카드가 됐건 마음이 담긴 카드를 보내거나 받고 감동 받아 본적이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마음이 담긴 카드를 보내거나 받고 느끼는 감동이야말로, 이 춥고 모진 세상을 건너갈 수 있는  따뜻한 힘과 위로라는 걸 말로 설명해서는 느끼지 못할테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의 그림에서 따뜻함과 위로를 읽고 two thumb up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그의 그림 자체가 얽매임 없이 자유로워 맘껏 상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광의 그림을 향하여 저속하다며 평가절하하는 이들로부터 그림을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가 제도권미술 같은데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만큼 기초가 탄탄하고 떳떳하며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론, 인연을 바라보는 중광의 시각을 나름 해석한 그의 시선도 재미있다.

ㆍㆍㆍㆍㆍㆍ그의 그림은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다. 경계를 태연하게 넘나드는 경이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무아지경에서 일사천리로 그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제도권 미술계에선 중광의 작품을 저속하다며 평가절하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는 의심이 들었다.

  중광은 2000년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괜히 왔다 간다'였다. 그리고 2년 후 입적했다.

  '인연이 있어 괴롭고, 인연이 없어 괴롭고, 만나도 괴롭고, 헤어져도 괴로우니 인연이란 괴로움이 얽힌 그물인가?'(137쪽)

인복과 노력과 실력과 더불어 그를 남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자유로운 상상력.

며칠전에 일본에 놀러갔다온 친구가 기념품이라며 젓가락을 보내줬길래,

내가 '머리에 비녀 대용으로 꽂고 다니다가, 국수나 라멘을 만나면 후루룩, 찝짭~먹으라고?'해서 웃었었는데,

사석원은 비녀를 이렇게 멋드러지게 해석한다. 비녀를 가지고 함부로 농담을 하면 안되겠다, ㅋ~.

  비녀는 순결과 절제의 상징이랄까, '나는 임자 있는 몸이니 넘보지 말라'는 듯 육체의 문에 빗장을 지른 것이다. 단호하고 애틋한 의미다.(149쪽)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글이 상상력 만으로 쓰여지진 않았다.

기본기 또한 탄탄하며, 시어를 잘 벼리는 여느 시인이 쓴 시보다 더 아름다운 언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더불어 웅숭깊다.

생각이 넓다는 건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 같은 것으로, 멍석을 넓게 깔아 상대가 그 멍석 안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의미하며,

생각이 깊다는 건 자기 안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속 깊음을 얘기하는 거란 얘기를 들었다.

 

그의 실물을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나도 사석원처럼 나이 먹을수록 사물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웅숭깊은 눈을 닮고 싶다.

종로②

종묘

ㆍㆍㆍㆍㆍㆍ이곳은 노인들을 위한 욕망의 공간이다. 박범신이 소설 《은교》에서 말했지. "젊음이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늙음도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맞다! 노인의 욕망은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그냥 자연일 뿐이다. 종묘공원은 어쩌면 젊은이들보다도 더 뜨거운 노인들의 욕망이 몸부림치며 몸살을 앓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많지 않기에. 절망할 정도로 외롭기에.(196~197쪽)

마지막으로, 서울에 40년을 넘게 살았으면서도 서울의 지리를 몰라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할라치면 길을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이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나 해외에서 온 친구들에게 서울 안내를 하기 위해 내가 외운 레파토리는 한 곳이다.

인사동. 장소가 그리운건 그곳의 사람이 그립다는 그의 논리대로라면, 난 누군가 그리울때면 여러곳을 기웃거릴 것 없다. 무조건 인사동 한곳이면 충분하겠다.

  장소가 그리운 건 그곳의 사람이 그립다는 것.ㆍㆍㆍㆍㆍㆍ

ㆍㆍㆍㆍㆍㆍ지금 바람 부는 고은초등학교 담장엔 후배들이 그린 그림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ㆍㆍㆍㆍㆍㆍ학교 앞엔 벽화도 있다.《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타일로 만든 작품이다. 그래 맞다. 진실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지.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지. 지금 서대문도서관 자리는 얼룩 젖소가 풀을 뜯던 목장이었다. 여긴 우리의 영토였는데. 수풀 무성한 언덕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친구들은 없다. 여름이면 무악재에서 아카시아꽃 따 먹던 동무들, 그 순수한 눈망울들, 우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내 우산이 힘없이 젖혀졌다.(212~213쪽)

 

이제 봄이다.

태어나고 40여년을 자란 서울을, 이리저리 산책이라도 다니며 맘껏 즐겨야 겠다.

만끽하여야겠다.

MP3에 이런 음악 한곡 정도 담아서 귀에 꽂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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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3-14 04:32   좋아요 0 | URL
서울은 전국에서 재개발 아주 많이 하는 손꼽히는 곳이니
길이 늘 달라져서
길을 헤맬 때가 잦을밖에 없지 싶어요.
그래도 봄마실 즐거이 다니셔요~

mira 2013-03-14 15:37   좋아요 0 | URL
요즘 인사동은 너무 원색적이예요. 예전 인사동이 더 좋았었는데 말이죠 ㅎㅎ
 

내가 최북을 알게 된건 손철주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를 통해서였던것 같다.

 

최북과 반 고흐는 둘 다 '미치광이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반 고흐는 "새로운 화가를 세상은 광인 취급한다. 내가 돌아버릴수록 더욱 진정한ㆍㆍㆍㆍㆍㆍ"라고 했다. 칠칠이 치북도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돈 보따리 싸들고 와 거드름 피우는 고관에게는 엉터리 그림을 던져줘 희롱하고 득의작을 몰라주면 박박 찢었다. 두 화가는 자신의 미친 짓이 곧 "지독하도록 말짱한 세상 때문"이라 했다.

거기서 최북을 조선의 반 고흐라고 설명해 놓았었지만, 고흐에 대한 자료가 넘쳐나는 것에 반해 최북에 대해서는 너무 알려진게 없었고, 이런 저런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심지어 생몰연도 또한 '칠칠은 사십구'해서 사십구 세라고  알려진 곳도 있지만

이 또한 미스테리라고 하였다.

 

 

 <'최북'의 '풍설야귀인도'>

저 그림을 보고는 마음이 묘하게 움직여 그때부터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 이유가 그가 중인 출신이어서 일생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고,

다만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던 문인들의 문집 속에 조금씩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칠칠 최북
 민병삼 지음 / 도서출판 선 /

 2012년 8월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이 책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였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방점을 찍지 않았었다.

소설은 재미로 읽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듯 하기만 하면 그 진위 여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읽는 내내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던 나의 잘못이라면 잘못일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혹시~?'하다가 '흡~!'하고 허를 찔린 기분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내용의 '진위'가 아니라 '개연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시말해 내가 이전에 들춰본 우리나라의 고전 문학 몇 권의 내용이랑 묘하게 겹쳤기 때문 인지, 장르소설을 유난히 좋아하다보니 개연성이 무너진게 유독 내 눈에만 띄어서 인지는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동안 읽었던 이 시대를 배경으로한 작품들, 예를 들면 이옥, 김려, 심노숭, 이광사, 심지어는 연암 박지원을 배경으로 쓰여진 김탁환의 소설들에 나왔던 내용들이 짜깁기 되어 있었다.

개연성이 무너진 예는 아래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개연성이 무너지다 보니, 작가가 아무리 멋진 문체를 구사하고 있거나 중국의 한시, 우리나라의 옛시조들을 인용하는 등 박학다식함을 자랑해도, 내겐 진부하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졌다.

암튼, 난 이 소설의 주제를 모르겠다.

최북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쓰여졌는지 모호하다.

 

자기만의 뚜렷한 개성과 작품 세계를 가졌던 화가이니만큼, 그만의 두드러지고 독특한 무엇인가를 엿보고자 했었던 나로서는, 참 아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2012)에 개관된 '무주 최북 미술관'에서는 최북 탄생 300주년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었다.

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 책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미술관에서는 그의 생몰 연대를 1712년에서 1786년으로 통일하여 적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교집합이 되는 숙종 46년인 1720년부터 1786년까지는 적어도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개연성과 관련해 크게 문제가 되는 곳 몇 군데만 짚어 보겠다.

 

먼저,

여러 해 계속되고 있는 가믐이(132쪽, 밑에서 8th줄)

오랜 가믐과, 가믐(133쪽, 2nd줄)

등 이 소설에 나오는 '가뭄'은 모두 '가믐'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건 '원순모음화' 라는 음운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양순음 ‘ㅂ·ㅃ·ㅍ·ㅁ’ 다음에서 비원순모음 ‘ㅡ(丶)’가 원순모음 ‘ㅜ(ㅗ)’로 바뀌는 음운현상을 뜻한다. 중세국어 ‘믈

[水]·블[火]·플[草]’이 근대국어 특히 17세기 말엽 이후 ‘물·불·풀’로 원순모음화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혼란스럽던 음운현상이 17세기 말엽이후에는 원순모음화가 이루어졌다는 거다.

시대상을 반영하고 싶고, 고어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면 적어도 17세기 이전이 무대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설에서나 가능하겠다.

따라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최북의 일대기 동안은 '가믐'은 모두 '가뭄'으로 적혀야 맞겠다 .

 

또 한군데,

 

 

ㆍㆍㆍㆍㆍㆍ, 전혀 본 적이 없는 중늙은이 둘이 앉아 있었다.

ㆍㆍㆍㆍㆍㆍ

어이 달관이 한진사에게 물었다.

"이 치가 대체 누구요?"

"대감. 이자가 바로 최칠칠이라는 망나니 환쟁이 올습니다."(255쪽)

 

'올습니다'는 '올시다'가 잘못 쓰인 예이다.

'올시다'는

('이다', '아니다'의 어간 뒤에 붙어) 합쇼할 자리에 쓰여, 어떠한 사실을 평범하게 서술하는 종결 어미.

화자가 나이가 꽤 들어야 쓴다.

‘-올시다’의 의미로 ‘-올습니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올시다’만 표준어로 삼는다.

관련조항 : 한글 맞춤법 6장 1절 53항, 표준어규정 2장 4절 17항, 표준어규정 3장 4절 25항

 

 

또 한군데,

이 책에는 금주령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데 금주령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

혜원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같은 그림을 미루어 알 수 있지만, 이 시대에는 우리가 텔레비젼에서 보는 것 같은 주막은 없었다고 한다.

더불어 영조가 워낙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예외도 있었는데,

이 책에 언급된 초상이나 제사때 말고도, 농부나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마저도, 정조는 워낙 술을 좋아하다 보니까 영조 사후 왕이 되자마자 없앴다고 한다.

(조선 왕조 실록 참조)

원교 이광사는 1777년인, 정조 1년에 사망하였는데,

이 책에는 원교 이광사가 죽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금주령 얘기가 또 나온다.

 

거기다가 책의 말미에 이르면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화서 출신의 화공들이 최북 같은 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찾아뵙고 하였을까. 그건 모르겠다.

따라서, 한번 개연성이 무너져 버리면 줄줄이 도미노가 무너져 버리듯이 신뢰를 잃게 되어 소설에서 최북이 이야기와 인물들 속으로 엮여 들어가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지사이다.

 

작가가 아무리 멋진 문체를 구사하고 있거나 중국의 한시, 우리나라의 옛시조들을 인용하는 등 박학다식함을 자랑해도,

작가는 작중 화자나 주인공에게 애정을 갖고 감정이입을 해야 하나 보다.

이 소설에선 그 조절이 제대로 안되다 보니, 생명력이 아예 없거나 괴력이 넘쳐나는 괴물일 수밖에 없다.

 

"신분이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제 편하자고 만든 것 아니겠소. 한비자가 말하기를, 예의가 많은 자는 속마음이 쇠(衰)한다 하였소.예의도 지나치면 아첨이 된다는 말이오. ㆍㆍㆍㆍㆍㆍ"(54쪽)

사실 작가가 작중화자를 통해서라도 이런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작가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얘기지만, 위에서 애기했듯이 개연성이 무너지니 모두가 다 시큰둥이다~--;

어제부터 내린 비가 오늘도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고 있어 성기 마음이 매우 심란했다. 나뭇가지가 마치 춤을 추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가지와 가지, 잎과 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꼭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무도 생명이 있는 것이니 정말 교태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도 남녀가 통정을 하면 잉태를 하듯이, 그래서 나무도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 것일 수도 잇다. 그렇지 않고는 마치 애무하듯이 저토록 부드럽게 비벼댈 수가 없는 것이다.

한낱 나무도 고적할 새가 없구나!

ㆍㆍㆍㆍㆍㆍ"일찍이 고애자가 된데다가 스승마저 타계하신 탓에, 성기가 형영상조에 빠진 것이오. 그러나 학문과 예술을 하는 사람 치고,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특히 예술은 영감(靈感)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 영감이란 것이 고독하지 않을 때 얻어지는 게 아니지 않소."(80~81쪽)

위 문장도 인간의 고독한 심사를 나무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수려하기 그지없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교 이광사야 집안 대대로 양명학을 공부한 유서깊은 집안이니까 한자와 사자성어를 남발했다손 쳐도 최북 또한 아무 개성 없이 저런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독이 꼭 나쁜 것이 아니란 것을, 예술가에게 고독은 필수라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고 해야 할까?

최북의 경우 고독을 즐기며 시서화와 술로 위안을 삼았고,

마찬가지로, 고흐도 고독과 벗하며 그림과 동생에게 쓰는 편지와 커피에서 위안을 삼았다.

참, 가난은 이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렇게 외로운 신세라도 자유가 없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고 못 박고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하고 혼자 사는 것이라고도 했다. 최북이 거기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이다.(319쪽)

암튼, 내가 작가를 향하여 이러쿵 저러쿵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작가를 향한 분홍분홍한 애정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작가의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의 따뜻함, 다시말해 비록 작품 속에서일지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였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고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원동력이니까 말이다.

원교는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고 멀리 산등성에다 눈길을 걸었다. 그윽하게 들어앉은 그의 눈에서 햇살이 무수히 부서져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나이 어느덧 이순(耳順)이 되었다. 눈에서 부서지는 햇살의 양만큼, 그의 인생도 그렇게 부서지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유배생활을 학문에 전념하는 기회로 삼을 각오가 있을지는 몰라도, 유형지의 생활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생활이 이십여 년이나 더 계속된다면, 학문은커녕 심신이 먼저 피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걸 생각하면 최북의 마음이 벌써부터 내려앉는 것이었다.(241쪽)

 

최북이나 고흐 등 예술가를 놓고 볼때 고독이 꼭 고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화가로 만든 바로 그것이 '고독'일지도 모르고, 거기에 최북에게는 술이, 고흐에게는 커피가 옵션으로 더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떤 감정이 다가왔을때, 그감정을 마냥 비껴갈 궁리만 할 것이 아니라...한번쯤 그 감정에 흠뻑 빠져 누려보는 것도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차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술감상 초보자가 가장 알고 싶은 67가지
  김소영 지음 / 소울메이트 / 2013년 2월

 

2013년부터 MBC 주말 뉴스데스크 부장을 맡고 있는 '김소영'김소영 기자가 쓴 이 책이 그런 의미에서 도움이 될 것 같다. '정치는 생활을 바꾸고, 예술은 삶을 바꾼다.'가 취재 신조란다. 너무 멋지구리하다, 이를 어쩔 것인가 말이다, 아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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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3-10 02:36   좋아요 0 | URL
'가뭄'을 그즈음에 '가믐'으로 적었으니 문학에서 그렇게 적을 수도 있을 테지만, '가뭄'을 '가믐'으로 적으려면, 그무렵에 쓰던 다른 말투도 고스란히 살려서 적어야 옳겠지요. 게다가, 옛날 사람들 말투에는 '-에게'가 나올 수 없고, '-고 있다' 꼴이 나올 수도 없으며, 옛날 사람들은 '감히'라는 일본 외마디 한자말을 쓸 턱도 없어요.

문학을 읽을 때에는 문학자가 쓴 말투를 따지는 일은 거의 부질없으리라 느껴요. 그 옛날 시대를 살지 않고서 그 옛날 시대 말투를 되살릴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그저 좋은 이야기, 좋은 줄거리, 좋은 삶을 문학에서 읽으면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sslmo 2013-03-10 03:09   좋아요 0 | URL
최북의 생몰 연대를 1712년에서 1786년으로 통일했으니, 18세기를 살았던 사람이죠.
원순모음화는 17세기 말엽에 이미 정착되었구요, ㅋ~.

뭐, 저도 문학, 아니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외적인 것으로 딴지를 걸 생각 따위는 없는데 말이죠.
저렇게 되면 개연성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얘기가 넘 재미없어져 버리거든요~--;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꾸벅(__)

2013-03-10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10 0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3-03-11 10:49   좋아요 0 | URL
원순 모음화에 종결어미까지
와우 님의 국어 내공이 장난아니네요
깨갱 언제나 깨갱
그나저나 최북이란 인물이 무지 땡겨서 저도 저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갑자기 저 새로운 인물이 저를 두드리게 하는 힘을 가지셨네요
그림속에 작은 인물 둘이 가는 길 스토리가 있는 그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