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러니까 고상하게 말하자면, 싫증을 잘 느끼고,

평상시 나의 언어 습관대로 편하게 얘기하자면, 변덕이 죽 끓듯 한다.

 

언젠가  어떤 책을 읽는데,

'심리학자들은 "아름다운 외모에서 생겨난 사랑의 유통기한은 1~2년"라고 입을 모은다. 길게 잡아 2년이 되면 배우자의 외모보다는 정신세계가 더 중요해져서 외모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2년이상을 견디어 내면 되는건가 하는 마리앙토와네트 같은 생각을 잠깐 했었다.

 

언젠가도 얘기했었지만, 나의 사랑의 선택하는 기준은 좀 독특하여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재력이나 신분도 아니었고,

아름다운 외모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 사람의 글씨체였으니,

글씨체야말로 그사람의 모든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구태여 따지자면, 외모와 정신세계 둘다라고 할 수 있겠다, ㅋ~.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언제였던가, 이명옥의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를 보면서도,

사랑도 공부가 필요하다 말에 공감을 할 수가 없어서 구시렁거리는 날 보고 사람들은 정말 사랑을 해보기나 한거냐면서 놀려댔었다.

난 그때, 사랑을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것 아무런 대책이나 준비가 없이,

무방비 상태에 있다가...맞이하게 되는 그런 것이어서,

본인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는 '어쩔 수 없고, 어쩌지 못하겠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이명옥은 이일호의 글과 그림 '화염경'을 빗대어서 '사랑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견에 살을 입히고 확장시키고 발전시켜 나갔었다.

 

형체가 없는 영혼은 늘 자신의 몸을 그리워한다. 제몸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몸과 포개져야 한다. 사람은 영혼의 빈틈을 메우려는 몸부림이다. 영혼의 빈틈에는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고, 살과 살 사이에서 두려움과 환희가 대립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살과 살 사이의 빈틈을 없애려고 맹렬하게 요동친다. 하늘에서 백만 송이, 천만 송이, 억만 송이의 장엄한 꽃비를 내리게 한다. 내 몸이 네 몸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의 구별조차 할 수 없는, 남녀간의 사랑은 영겁회귀를 노래하는 화엄세계의 춤인 것이다.(이일호의 '화염경' 부분, 183~4쪽)

 

사랑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뜬금없이 웬 공부?'하면서 손사래부터 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공부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 인격을 완성하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 있는 매 순간이 기적이며 축복임을 절감하는데 사랑 만한 스승은 없을 테니까.(185쪽)

 

그때는 숟가락으로 떠넣어 주어도 몰랐던 걸 좀 알겠는건,

이 책 '사랑의 역사'가 제대로 된 학습서여서 인지,

아니면 그 사이 내가 사랑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ㅋ~.

 

사랑을 만나게 되거나, 빠지게 되는 건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옛날에는 '사건의 우연성'에 초점을 맞추었었고,

그래서 공부 따위로 어쩔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했었다면,

지금은 '사랑을 하다'라는 행위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선 꾸준히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이 사랑을 몸소 경험했느냐는 물음에는...'모르겠다~(,.)'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지만,

한동안 참 많이 아팠고 지금도 아프다.

머리를 옵션으로 들고 다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감성이 풍부하다보니,

이렇게 저렇게 마음 아플 일이 많았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마음'은 항상 죽 끓듯 끓고 있으니 관심을 가졌었지만,

육신 또는 육체라고 표현되는 몸은 쥐죽은듯 고요하니, 나를 이루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임을 간과했었다.

햇빛이 없으면 살 수 없으면서도 해가 떠있을땐 중요성을 잊고 지내듯이,

나의 거죽을 이루는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몸이 아파, 몸의 어느 특정 부위가 아파서,

그 부위가 도드라져서 나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이 들고나서야,

그제서야 날 이루고 있는 부분 중,

항상 이렇게 저렇게 들끓고 있는 마음만이 아닌, 잠잠한 육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돌아보게 되었고,

'그동안 날 잘 다독거리고 데리고 살아줘서 고맙다~'라며 무한 땡큐를 날릴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공부한다는 건 자신의 온몸으로 통과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아프다는 것과 닮았다.

주체가 자신이어야 하고,

비록 아프더라도 자신의 온몸으로 오롯이 통과하고 났을때,

한뼘쯤 성장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사랑의 역사
 남미영 지음 / 김영사 /

 2014년 3월

 

 

 

 

그동안의 난,

이 나이에 창피한 얘기지만,

'남미영'의 <사랑의 역사> '프롤로그'를 빌리지 않더라도,

나또한 공부에 방해가 된다거나 엉덩이에 뿔난다는 생각에...사랑을 지레짐작하였고,

사랑은 위험한 것이라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거나 사랑에 베여 피 흘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랑 없는 삶 속으로 숨어 들지는 않았었나 돌이켜 보다가는,

책속의,

우리가 사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제대로 알지 못해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믿고, 사랑인 것은 사랑이라고 믿은 결과지요. 사랑은 탐구할 가치가 아주 높은 학문이며, 배우고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공부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ㆍㆍㆍㆍㆍㆍ

세상에는 사랑을 이야기한 수많은 소설이 있지만 사랑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탄이나 미화 혹은 한탄으로 균형감각을 잃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런 작품은 사랑을 보는 우리의 판단을 흐려놓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이야기 하되, 비판과 질문과 탐구의 시선을 잃지 않은 작품을 골랐습니다.(6~7쪽) 

라는 구절을 보면서 '그랬었다'로 이런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한가지 더,

피 흘리지 않기 위해 사랑없는 삶으로 숨어들었던 그 선택 때문에,

난 언젠가 사랑이라는 그 위험한 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깨달음과 배움이 그렇듯 너무 늦은 때란 없다, ㅋ~.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소설들은 나에게 다양한 느낌을 주는데,

감히 내가 토를 달 수 있는 건 없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흔히 고전이라는 것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책이 담고 있는, 작가가 전달하려는, 작품세계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고 하여도,

너무 어린 나이에 읽어서는 그게 무엇인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을뿐더러,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서른네 개의 작품 중에는 내가 읽었던 책들도 제법 되는데,

어느 것 하나 이 책에서 얘기하는 그런 의도로 읽었던것 같지는 않다.

작품이란 보는 시점이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관점이 바뀔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그저 편한 상대가 좋다.

서른네 개의 작품 중, 이런 나의 취향에 가장 부합한 책을 꼽으라면 '제인에어'다.

 그 후로 그는 미녀도 아니고 키도 작고 어린애처럼 왜소한 체격이지만 자기 앞에서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 아는 게 많고 자신의 생각을 짧은 문장 안에 담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아가씨, 자신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은 가정교사 제인을 좋아하게 된다.

 

  난 당신을 보면 이상한 기분을 느껴요. 내 왼쪽 늑골 밑의 어딘가에 실이 한 오라기 달려 있어서 그게 당신 작은 몸의 같은 곳에 똑같이 달려 있는 실과 풀리지 않게끔 단단히 묶여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ㆍㆍㆍㆍㆍㆍ. 그래서 당신이 먼 곳으로 떠나버리면 그 실이 끊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 체내에 큰 출혈이 일어날 것 같소.(148쪽)

 

또 한가지,

이 책에 언급된 서른네 개의 작품들과 관련하여,

사랑을 공부하거나 배우는 건 책이나 독서를 통하여서가 아니고,

우리가 몸으로 경험한 것만이 그렇더라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배우는데 있어서, 머리가 아닌 몸의 법칙이 적용되는 몇 안되는 예이다.

하지만, 모든 배움이 그렇듯 너무 늦은 때란 없다, ㅋ~.

  

난 그동안 배움이랑 관련된 사람의 기억력은 머리와 연관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내가 직접 경험해보니,

사랑을 배우는 것과 관련하여선 후각이나, 청각, 촉각, 내지는 공감각 등의 예민한 감각도 아니었고,

사랑을 하는 것과 관련된 몸이었다.

온몸 구석구석이었다.

난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사랑을 배웠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더라.

암튼 사람의 기억력은 머리와 연관된 것만은 아니라는걸 몸소 체험했다.

그러니, 사랑의 유통기한도 기억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싫증을 잘 느끼고,

평상시 언어 습관대로 얘기해서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깜박깜박한다는 것이다.

 

머리로 하는 기억은 몰라도,

몸으로 하는 기억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일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다.

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인지,

아니면 육체적 관계에만 탐닉하면 된다 인지~(,.)

 

근데, 정말 편안한 관계는...

힘들게 다다르게 되는 육체적 합일에서 느끼게 되는게 공감이나 소통에서 오는게 아니라,

그런 관계를 지나고 난 후에 느끼는 충만함 속의 텅빔, 가득참 속의 성김에서 불현듯 느껴지는 허허로움이 아닐런지, ㅋ~.

 

같이 엮일 얘기는 아니어서 망설였는데,

알라딘 서재의 달인이기도 하신 '된장' 님이 책을 내셨나보다.

매번 책을 받기만 하고 게을러 리뷰를 올리지 못해, 마음의 빚이 크다.

부디 판에, 쇄를 더할 수 있도록 대박나시길 빈다, ㅋ~.

 

 

 

 

 

 

 

 책빛숲, 아벨서점과 배다리 헌책방거리
 최종규 글.사진 / 숲속여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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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11 11: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랑이 참 좋은 거 같아요.
그게 꼭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의 사랑일 수도록 있지만 정신적인 서로의 소통도 사랑일 수 도 있고 말이에요.
ㅎㅎㅎㅎ 뭐 제가 남녀 간의 사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배워야 한다는 것은 많이 공감하는 글이에요.
아무런 준비 없이 다가가면 놀라는 것이 사랑인 것 같아요.
하~ 사랑이라 ㅋ

sslmo 2014-07-17 18:19   좋아요 0 | URL
여기서 '밑줄 쫙'쳐야할 부분은 '자기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예요.
교주님,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랍니다.
자기 자신도, 타인도, ㅋㅋㅋ~.
 
스님, 계십니까 -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
권중서 지음, 김시훈 그림 / 지식노마드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ㆍㆍㆍㆍㆍㆍ'

하는 누군가의 시를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들 가운데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닌지,

난 늘 사람들과 보대끼면서도 사람들을 그리워 한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건 나만 그런게 아닌가 보다.

이 책<스님, 계십니까>의 부제가 '사람이 그리울때 나는 산으로 간다'인걸 보면 말이다.

생각은 또 널을 뛰어 智者樂水仁者樂山하는 論語 雍也篇의 한 구절이 떠올랐는데,

이 구절을 강신주는 어느 책에선가 이렇게 해석하고 있어서 참 흥미로웠었다.

 

모든 것을 알려는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모든 것을 품어주려는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사람이 그리울때 산으로 가는 대신, 책을 들입다 파는 나로서는,

모든 것을 알려는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책에서 답을 찾으려 하고 있고,

저 둘 중, 굳이 부류를 나누자면 모든 것을 알려는 사람에 가깝고,

모든 것을 알려는 사람은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이 그리울때 나는 산으로 간다'라는 기본 전제 자체가 저 해석과는 상반된다.

 

산이나 물은 아무 소리 없이 그저 그렇게 그곳에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품어주고 있을 뿐인데,

얘길 만들어내고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경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또 생각은 널을 뛰어,

나처럼 산이나 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싫어하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책이나 읽으려는 사람은 그렇다면,

알려는 의욕도, 품어주려는 마음도 없다는 얘기인가?

 

'사람이 그리울때 산으로 간다'라는 저 문구에서 중간 생략을 너무 많이 해버려서 그렇지,

그들이 그리워 하는 사람은 단순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어떤 해답을 들려 주고 제시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지친 어깨를 잠시 쉬었다 갈 수 있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얘기할 수 있도록, 

얘기를 들어주는 대빵 큰 귀와,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  천개의 손,

무한넉넉한 미소로 무장을 한,

신 같고 종교 같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산이 날 에워싸는 것 같이 느껴지는 사람,

산이 모든걸 들어주고 보듬어 안아주는 것 같이 느껴지는 사람, 은 산으로 갈 것이고,

산에 있는 절의 부처의 형상에서 그걸 느끼는 사람, 은 산에 있는 절로 갈 것이며,

산에 있는 절의 스님에게서 그걸 느끼는 사람,은 그 절의 스님을 만나러 가면 되는 것이다.

 

그걸 바다에서 느끼는 사람은 바다로 갈 것이며,

그걸 책에서 느끼는 사람은 책을 후벼 팔 것이고,

나름의 학문에서 느끼는 사람은 그 학문이 남들이 볼때 아무리 고리타분해도 기꺼이 몰두할 수 있는 것이며,

오토바이 배달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데서 그런 걸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손으로 palpation하는 직업이어서 손끝의 감각을 혹사시키면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손끝을 꼼지락거리면서 그걸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걸 저마다 다 다른 이름으로들 부르고 있지만,

자기만의 종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대숲, 카타르시스의 전당인 해우소 등으로 대치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거창하게, 사람이 그리울땐 산으로 가야한다...이거나,

'그리움'이란 감정 따위를 느끼고 너 등 따숩고 배부르구나...따위가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자기만의 종교, 또는 대숲, 또는 해우소를 가진 나름 나약하고 외로운 존재들이다...라는 것이었고,

그걸 느끼고 나니,

외롭지만 더이상 외롭지 않은 이상한 동지 의식에 휩싸이게 되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처음 집어들때만 해도 글을 쓴 '권중서'나 그의 글에 대해서 사전 지식이 없었다.

사전 지식이 없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는데,

이 책을 구입할 때가 한창 '그림 그리기'에 빠져 있어  feel 충만하였을 때라,

단지 책 표지의 그림들을 보고 그림체가 이쁠것 같아서 들였었던 터였다.

 

그런데, 작은 사이즈였을때 이뻐 보였던 그림들은 책 전면을 가득 채우는 크기로 확대되자,

선과 색이 너무 생략되고 단순화되어 단조롭다 못해 심심해보였다.

반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글은 촘촘하다 못해 빽빽해서 갑갑할 지경이었다.

글에서의 과한 넘쳐남을 그림의 여백으로 보완했다고 해야할까?

그런 기획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한쪽으로 많이 치우친듯 느껴졌다.

 

 

지인의 최신 핸드폰 카메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능을 모르길래,

손가락으로 화면을 이렇게 저렇게 좁히고 넓히기만 하면 줌 인, 아웃이 된다고 설명해주었더니,

금세 이런 사진들을 찍어 보내줬다.

뭐, 거창하게 '부분은 전체를 대표한다'는 프랙탈 원리라도 느껴주어야 하겠지만,

내가 느낀 건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따사로움 정도가 고작이었다.

작은 것 하나,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그 시선을 통하여...

일상의 사소한 것에라도 무게가 실리는 그 순간, 누군가에겐 그만의 특별한 작품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는 그 비싸다는 유병언의 여느 사진들보다 값지고 귀하게 느껴졌으니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지만 말이다, ㅋ~.

 

 

'들어가며'의 한 구절을 옮겨 놓는 것으로 리뷰를 맺는다. 이 책의 기획 의도를 짐작하기에 충분하지 싶다.

  어느 날,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돌계단이 석굴암 부처님께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였다. " 우리는 모두 같은 토함산의 바위에서 나왔는데, 인간들은 어째서 나는 짓밟고 부처님은 지극히 공경하는가?" 그러자 석굴암의 돌부처님이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인간의 무수한 정釘을 맞고 참은 결과 존경받는 부처가 되었다. 그런데 너는 나처럼 정을 맞아 본 적이 있는가?"(6쪽) 

 

개인적으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서 넋두리를 하자면,

 

한때 우리나라의 국교는 '불교'였었지만, 절은 도시 한 가운데 있는게 아니라 깊은 산속에 있었다.

그래도 됐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이 바뀌어 절이 깊은 산속에 있다보니,

널리 대중들에게 불법을 펼 수 없는가 보다.

그러다보니, 도시 한가운데로 나와 '포교원'이란 이름을 건 무언가도 생겨난다.

그게 제대로 된 '포교원'이라면 뭐가 아쉬워서 '사족'이겠는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약점을 노린 '떴다방 포교원'이라는 것이 문제다.

이들 '떴다방 포교원'은 기존의 불교나 절, 암자, 포교원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그저 포교원이라는 이름과 스님이라는 호칭만을 차용한 가짜 약 장사이며 사기꾼들인 것이다.

이들은 그전의 다단계 건강보조식품이나 약장사와 같은 이들이지만,

이들에게로 향하는 어르신들을 어쩔 수가 없다.

어르신들은 이들이 다단계 건강보조식품이나 약장사 같은 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또는 눈치 채고서도 드나드신다.

왜냐하면 이들이 노린게, 바로 사람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다단계 건강보조식품이나 약장사 같은 이들을 탓하기만 했지,

누구 하나 이들처럼 어르신들에게 살갑게 대한 적이 있나?

어르신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을 보이며,

어르신들이 잠시 잠깐이라도 웃고 재밌을수 있도록,

어떻게 하면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인가 연구하고 궁리해 본 적이 있는가 하면...할말이 없다.

 

어떤 어르신들은 그들의 불법과 사기 행각을 알지만,

그건 과한 매도이고,

그들의 무형의 서비스와 노력에 대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니 말이다.

인생 백세시대라고 한다.

무조건 생명연장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삶의 질적인 면에 있어서도,

이런 정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하여야 겠다.

그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이렇게 나이먹고 늙어가는 우리들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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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6-29 18:25   좋아요 0 | URL
어느새 유월이 저물고 칠월이 다가와요.
칠월은 참말 무더운 나날.
그렇지만, 칠월은 어쩐지 시원한 소나기와 뭉게구름과 무지개,
또 수박이 익는 멋있는 달이라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느꼈어요.
즐겁게 칠월에 아름다운 이웃들을 만나셔요~

sslmo 2014-07-17 18:20   좋아요 0 | URL
청포도가 아니고 수박이라~?
요즘 냉동수박 넘 비싸여~--;

잘 지내시죠?
헤에~^____^

루쉰P 2014-07-01 18:31   좋아요 0 | URL
흠 양철무적나무꾼님도 저와 같은 멘탈을 지니셨군요 ㅎ
산이나 물에 가서 품어줄 사람을 만나고 알기 위해 간다는 건 좀 이해가 안돼요 ㅋ
저도 나무꾸님처럼 집에서 책 읽다 침대에서 자는 게 제일 좋더라구요 푸하
근데 읽으며 느끼지만 나를 온전히 품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느껴요 ㅎ 요건 저도 생각을 곰곰히 해봤는 데 타인과의 공감 능력은 확대가 가능해도 나를 온전하게 이해할 사람은 매우 찾기가 힘들다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다면 홀로 고독 속에서 쓰려져야 하는 가하면 그렇지도 않더라구요 내 고독은 오로지 나만 알 뿐 그렇담 그 고독을 이해하고 혁파할 내안의 나를 찾아야 되겠더라구요 ㅎ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무거운 돌을 지닌 인생 견디는 자가ㅈ되어야 한다라고 했는 데 음 뭐랄까?
전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고 봐요 ㅋ
다만 나를 이해하고 품어줄 나는 있다고 보구요
요건 이기주의와는 틀려요! 강건한 자신이랄까? 멘탈 갑 프로젝트라 할까? ㅋ
근데 전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죠 ㅋ
암튼 나무꾼님의 글을 보니 또다시 제 사상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ㅋㅋㅋ.
저 무슨 병은 아니겠죠 ㅡ..ㅡ

sslmo 2014-07-17 18:24   좋아요 0 | URL
왠지 교주님의 댓글에서 '홍길동'의 정취가 느껴지는 거 있죠.
도꾸가와 이에야스에서 길동이라 너무 튀었나?
근데, 말이죠~.
세상이 하도 어처구니 없이 돌아가서 이건 뭐, 원~(,.)

'이상국가'따위는 꿈도 꾸지 않으니,
어느 맘 맞는 사람끼리 조용히 살 땅 한평은 없는걸까요?ㅠ.ㅠ
 
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고백하자면, 이 책을 시작하기전 난 '논어'를 비롯한 사서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어찌하여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읽을 기회라도 생길라 치면,

책마다 해석이 다르게 되어있는데,

그게 한자는 까막눈이니 그렇다 치고,

한자뒤에 붙어있는, 'OO이고 OO이니,'하는 추임새, '이른바 '현토'라는 것이 책마다 다르게 되어 있고,

이 '현토'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해석도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걸 너무 여러번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 책'좌파 논어'에서도 언뜻 비쳐지고 있는 내용인데,

주자가 달아놓은 주해가 '논어'의 그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지,

그동안은 책을 읽다보면 공자가 찌질이 못난이이거나, 일관성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성백효의 번역에 대한 언급으로 보나,

이권우가 방현주에 나와서 얘기한 '진정성'에 관한 언급으로 볼때,

뭔가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흥미로웠다.

 

그러던 난, 책머리에 노랑으로 밑줄친 부분의 이 구절을 보며 지레 실망을 하였었다.

 

'좌파 논어'라는 제목 자체가 그만의 어떤 독특한 개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좌파'라는 단어에서 '급진적'이고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하였던 나는,

그의 논어 해석(풀이)라는 것이 기존의 논어 해석(풀이)과 비교하여 크게 파격적일 것이리라 생각했었나 보다.

책머리에 '주자의 논어 집주를 완역하신 성백효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는 저 구절을 보는 순간,

주대환의 좌파라는 것이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한게 아닐까 또는 세월이 흐르면서 바랜게 아닌가 싶어,

내지는 논어 해석(번역)이라는 것도 큰 틀에서 보면, 하나의 번역의 세계인데...

성백효라는 큰 조류의 흐름을 어찌할 수 없는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고 씁쓸했다.

 

하지만, 결론을 얘기하자면, 내 기우였다.

주대환 이 분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과장하거나 수사를 사용하지 않고,

본인의 과거 경험에서 우러나온 담담하고 진솔함들로 풀어나가고 있다.

때문에 논조는 다소 약하고 부드러운듯 느껴지지만,

진실은, 곧 진정성은 힘이 세다.

 

그래서였을까?

'책머리에'의 이구절이 그 어느구절보다 강한 울림으로 내게 와닿았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위로와 격려를 얻기를 바란다.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청년들에게 이 책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바란다.(8쪽)


전에 까뮈의 이방인 번역 때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이런 고전 번역이나 고전 해석또는 풀이에서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동안의 케케묵은 학계나 관행의 답습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대환은 한문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기존의 이론이나 해석에서 좀 자유롭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나의 이런 풀이는 학자들의 전통적 해석과 많이 다르다. ㆍㆍㆍㆍㆍㆍ(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35쪽)

 

이런 나의 해석은 주자의 해석과 다르다.(39쪽)

 

遠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멀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와 관계가 멀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61쪽)

 

초나라의 접여라는 광인은 단순히 미친 사람이 아니라, 도가 계통의 사상가로서 일부러 미친 척하는 무정부주의자였던 것 같다.(71쪽)

 

여기서 소인(小人)은 마무와 노예 등 하인을 가리킨다고 주자는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로 읽고 싶다. 여하튼 여기서만은 소인이 군자의 반대말이 아니다.ㆍㆍㆍㆍㆍㆍ사실 타지고 보면 사람이란 누구나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하는"데 말이다.(82쪽)

 

*여기서 五十이란 두 글자는 卒(마칠 졸)자를 누군가 잘못 베껴 쓴 것으로 본다. 加는 假(빌릴 가)의 오기(誤記)로 본다.(130쪽)

여기저기서, 넘나드는 그의 견해는 경계가 없는것이, 그물에 걸리는 않는 바람같이 자유분망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싶은 말은,

학계의 그것이 주류여서 정설이고, 주대환의 그것은 주류에서 벗어난 것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것이다...

뭐, 그런 얘기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자유로운,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이고,

다양한 해석과 접근법은 획일성과 통일성을 지양한다는 면에서,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기존의 그것에 반하는 다양한 해석이나 접근법에서 우리가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기존의 그것이 아닌 '다양한 해석과 접근법'이고,

이것은 곧 학계나 주류의 그것에 대항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삶인 것이다.

 

암튼 좌파공자를 읽다보면 그동안 알아오던 딱딱한 학문, 유교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그게 저자 주대환의 개인적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란 걸 깨닫는 순간 더 설득력 있어진다.

 

많은 얘기들이 나오는데,

주대환의 개인적인 경험이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독특하고 재밌는 풀이를 몇개 소개해보자면,

 

위정편 21장, '왜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와 관련하여,

누군지 눈치 없는 사람이 참 곤란한 질문을 했다. 난들 왜 정치를 하고 싶지 않겠나?ㆍㆍㆍㆍㆍㆍ내가 벼슬하고 싶어서 무슨 짓을 했는지, 그 부끄럽고 잊어버리고 싶은 행위들을 일일이 다 얘기해줘야 하나?

ㆍㆍㆍㆍㆍㆍ유학자들은 이 구절에 너무 심오한 해설을 달았다. 하지만 딴청을 피우면서 곤란한 질문을 피해가는 말씀일 뿐이다.(194쪽)하는 구절은 진솔해서 매력적이다.

 

그동안 유교와 공자라고 하면, 조선의 완고한 성리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었는데,

그런 유교와 공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것은,

공자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스럽고 완고한 무리들을 싫어했다고 하며,

그동안의 학자들이 공자님의 말씀을 두루뭉술하고 하나마나한 소리로 만들고 있다(44쪽)고 한탄하는 부분에서였다.

 

가장 독특한 깨달음은, '충(忠)'이란 글자가 군신 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나 마음을 다한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덕목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 말고도,

때론 고지식하고 때론 융통성 없는 용어 선택(예를 들면, 필부 따위, )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참고로, 그동안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읽을라치면 잠이 먼저 한달음 달려와 나를 마중했던 그동안의 관행으로 미루어,

언제던가 잠이 안오던 어느날,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시조나 창처럼 외우는 이에게 자장가를 청하였더니,

정태춘,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를 시조나 창처럼 들려주었다.

그 노래를 시조나 창처럼 듣던 난,

시대를 초월하여 '진정성은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발전이 없을 뿐더러...

사물의 본질이나 물자체, 바꾸어 말하면 진정성엔 다다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지식하거나 모르는 것이 순간에 쪽 팔릴지는 모르지만 문제가 될건 없다.

단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아는것을 모르는 척 하는 건,

'기다'를 '아니다'라고 우기거나 '아닌것'을 '기다'라고 우기는 게 반복되는 건,

진정성에 저해되니 문제다.

반성한다.

 

암튼 좋고 재미난 구절 들로 넘쳐난다, 스스로 읽어 깨닫는 기쁨을 누리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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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4-05-22 11:39   좋아요 0 | URL
오늘 주문합니당~!! ㅋ Thanks to 나무꾼님. ^^

sslmo 2014-05-27 11:32   좋아요 0 | URL
땡큐는 제가 외쳐야죠, 북극곰님~^^
잘 지내세요?^^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제목은 '대통령의 글쓰기'이고, 띠지에 적힌 부제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작법서는 아니다.

아니, 작법서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꼭 제목을 정해야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 관한 책 정도라고 해야 할까?

 

 

난 책을 읽을 때 기억해 두고 싶은 구절이나 오탈자가 있으면 포스트 잇을 한줄 너비로 잘라서 붙이는 습관이 있지만,

책을 읽은 후 기록을 하고 바로 떼어내기 때문에,

게다가, 포스트잇을 한줄 너비로 잘라 붙인다는게 여간 수고롭지가 않기 때문에, ㅋ~. 

포스트 잇을 덕지덕지 붙이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용도로 붙였는지는 노코멘트라고 했을때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하트의 전쟁'과 '신들의 봉우리'가 있지만,

이 책 '대통령의 글쓰기'엔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포스트잇을 자르는 수고로움쯤은 이런 책만 있다면, 감지덕지로 여길 수 있겠다.

아흑~, 좋아도 너어무 좋아~^^

내가 이 책을 향하여 이렇게 감정이 헤프면, 책을 제대로 못 읽은게 되는데,

난 글 잘쓰는 법 따위엔 관심이 없고, 사람도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겠다는 욕심따윈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통하여 글쓰는 비법을 전혀 전수받지 못했느냐고 하면, 또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다.

대통령이 글을 쓰는 이유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그리하여 국민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국민들의 마음, 즉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있다.

그런데, 그 감동이라는 것은, 진심에서 나오지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8년동안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고 다듬은 분이 쓴 것이기 때문에,

두 대통령의 글쓰기 지침 같은게 녹아 같이 버무려져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스타일을 나열하고,

두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다 타당한 얘기이고, 그 속에 글쓰기의 모든 답이 들어 있으니(다시말해, 이보다 나은 작법서는 없을 것이니까),

궁금하신 분 또한 일독하시면 되겠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정치나 대통령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정치나 대통령 따위는 어떤 소수의 특권 계층을 상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관심은 어떤 소수의 특권 계층에게로 집중된다고 착각했었다.

(난, 소수의 약자라고 생각했다, ㅋ~.)

그 중 몇몇 대통령을 향하여 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만의 일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묻었다.

 

하지만, 글쓰기 비법이나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따위가 궁금하지 않다던 내가,

아흑~, 좋아도 너어무 좋아~^^

하며 설레발을 치는 이유는,

이 책 '대통령의 글쓰기'를 통하여,

그것이 나만의 그들을 향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들 또한 국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리하여 진정 감동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목은 '대통령의 글쓰기'라고 되어 있지만,

읽다보면,

당신들이 어떤 방법으로 국민들과 공감하고 소통하였으며 사랑했는지, 가 생생하고 크게 와닿아

지. 못. 미. 의 마음이 되고,

접어두고 묻어두었던 나의 그것을 이렇게나마 한번이라도 표현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어디 말과 글뿐이겠는가. 어린아이와 사진을 찍을 때 다리를 크게 벌려 키를 맞추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속에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답이 있다.(36쪽)

   

대통령이 말과 글로 자국민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건 대통령의 소임이다.

그 말과 글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을때,

다시말해, 말을 하는사람과 듣는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같은 파장에서 만나 공감과 소통으로 이어져서 마음을 움직였을때,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글쓴이 '강원국' 또한, 이권우처럼 '진정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진정성의 조건으로 진짜, 진실한 것(속셈이나 저의가 없는것, 겉과 속이 같은것), 뉘우치는 것(즉, 반성하는것), 행동과 실천을 꼽으며,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자신이 빠지면 안된다고 전제한다.

나를 가장 주억거리게 만든 것은, 

선한 동기를 갖고 한 일이니 진정성을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며,

자기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이 진정성에 이 책을 읽고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추가해 보자면,

대화에 있어서 몸을 기울여 듣는다는 경청(傾聽)과,

내 말을 자제하고 남의 말을 듣고 사람을 격려하는 것,

내 자랑을 안 하는 것,

사람이 낙심했을때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기술적으로 하면 안되고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것,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아침을 먹다보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얘기를 듣게 된다.

요즘은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선거를 앞두고 참 많은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다보면,

자기 잘난척을 하느라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사람부터,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느라 혈안이 된 사람,

누가 궁금하댔나, 고릿적 전혀 상관 없는 일까지 끄집어서 굴비 엮듯 엮는 사람,

에 이르기까지 가관도 아니다.

근데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시간도 아깝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대통령의 글쓰기' 이 책을 읽으라고 귀뜸해 주는 것조차 아까우니까, 됐고,

 

노력을 하는데(...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안타까운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cheer up하라는 의미루다가,

'대통령의 글쓰기', 이 책이 그냥 작법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다시 말해,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비법서라는 걸...귀뜸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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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감기가 들어 맥을 못추는 아들녀석을 북돋워준답시고 온가족(이래봐야 남편, 아들, 나 3명)이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쇼파에 옹기종기 앉아 텔레비젼을 보았다.

아마 선거 홍보용인거 같은데, 개그맨들이 나와서 그 프로그램을 앞으로 10년간 이끌어갈 메인 MC를 뽑는 선거를 하기 위한 유세를 하고 있었다.

근데, 참 이상도 하지, 개그맨들의 그것이었는데, 재밌다거나 웃기기 보다는 안습이어서 난 보다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아침, 방현주의 라디오 북클럽에서 참 좋은 책 한권을 소개받았다.

그동안, 자신의 소신이나 주장을 한번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던, 이권우가 자신의 그것을 드러낸 것도 멋있었고, 앗싸~^^

책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책을 읽은 사람이,

다시말해 책을 읽고, 책을 통하여 깨달은 사람이 그걸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하여야 하는지,

설득과 감화의 적절한 예를 보여준것 같아서 좋았다.

에효, 나 참 말 어렵게 한다, 이권우의 언변에 엄청 감동받았다. 한마디면 될 것을~ㅠ.ㅠ

 

오늘 소개된 책은 '주대환'의 '좌파논어'였는데, 난 제목을 듣는 순간 '김규항'의 '좌판'을 연상했다.

 

 

 

 

 

 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김규항의 좌판
 김규항 지음 / 알마 /

 2014년 4월

 

저자 '주대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좌파'와 '논어'의 조합이 가당키나 한것이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대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일단은 그를 믿고 닥치고 읽고 볼 것이고,

그런 후에라야, 이 책과 주대환을 이해할 수 있고,

이권우를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설레발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실패와 실수는 용납되지도 용서되지도 않을 것처럼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요즘의 현실을 놓고봤을때,

공자와 논어를 새로운 시선으로 봤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그걸 주대환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


공자가 당대 사람들로부터 오로지 존경과 추앙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다가 상처받기도 했다. 비난보다는 경멸이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다. 권력과 힘을 가지면 사람들이 뒤에서 욕할지언정 함부로 대놓고 경멸하지는 못한다. 공자는 잠시 권력과 힘을 가져보았고, 그 효과를 잘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것을 갖기를 간절하게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더 자주 쓸데없는 헛발질을 하고, 정치적 오판(誤判)으로 비웃음을 샀다.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 비난과 비웃음,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 이런 것들을 2천500년 전의 공자도 겪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공간은 지금이나 당시나 비슷하지 않았을까? 나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게 공감을 느끼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위로와 격려를 얻기를 바란다.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청년들에게 이 책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바란다.('알라딘 책소개'인용)

 

그걸 이권우는 다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핵심은 그대로인데, 가는 방법이 진보적이다.

그러자 방현주가 묻는다.

"극과 극은 통해서 일까요?"

이렇게 안물었으면 어쩔뻔 했나? 이토록 귀한 답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방현주 무한 땡큐다.^^

"진정성이겠죠."

 

이쯤에서 끝났다면, 내가 이권우를 향하여 설레발을 치지 않았다.

그는 한국진보주의와 진보정당의 문제점과 대안을, 주대환의 이 책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논어는 연대(連帶)다.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고 격려하는 '연대의 언어'다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잘 하자.

부모에게, 형제에게, 동지에게, 잘하자.

 

그러면서, '우월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덜됐다'라고 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못하면서 연대를 이땅에 뿌리 내리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나 하는,

초로의 한국 진보지식인의 자기반성이라는 말로 맺는다.

 

내가 오늘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되 배려하지는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의식해야 할 주체는 자기자신이고, 배려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되는 것인데,

이게 바뀌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을 사는게 아닐까 하는 것.

가장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틈틈이 스스로를 위해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린다는 게...

공자의 가르침이든, 주대환의 해석이든 아니면 이권우의 그것이든 내가 설레발을 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읽은 '살아가겠다'의 '고병권' 같은 경우도 철학자나 인문학자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를 보면, 철학이나 인문학이야말고 무엇보다 삶과 밀접한 실천의 학문인것 같다.

주대환도 경험을 벼리어 글로 써서 그랬지만, 고병권 또한 현장에서의 목소리를 글로 옮겨서 생생하다.

 

 희망이 덧없다는 것. 이는 절망한 이들의 말이 아니라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이들의 말이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를 보지만 모두가 신기루다. 희망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품는 것이지만, 미래로 갈수록 덧없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실질적인 것이 된다. 희망은 지금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내 다리에 있다. 이 글을 쓰던 날, 나는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누군가 적어놓은 희망을 보았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11쪽, '책을 내며'중에서, '살아가겠다')

같은 얘기의 반복이다.

몸이 기억하는 것, 날것의 의미에 대해서이다.

날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로 와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를 꾸준히 계발, 적어도 유지할 수 있도록 수혈, 내지는 급수, 내지는 에너지 공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 길지만 같이 되새겨보면 좋을것 같아 옮겨보았다.

 

플라톤이 '철학하는 왕' 프로젝트에 실패하고 노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내 저술은 있지도,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학문들처럼 말로 옮길 수 있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철학의 지혜, 철학적 앎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비유를 남겼다.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고.

철학의 지헤란 홀로 득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함께 살다 보면 온갖 마찰이 생긴다. 그 마찰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돌멩이를 부딪치면 그렇듯, 우리의 부대낌은 열을 만들어내고 때로 불꽃을 튀게 한다. 그 불꽃이 영혼의 램프에 옮겨 타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지혜가 아닌가. 나는 노년의 플라톤이 쓴 이 비유가 참 좋다. 서로 다투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때로 열이 나고 불꽃이 튀는 곳에서 우리는 영혼의 램프를 밝힐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불을 우리는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마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위대한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나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몸에서 계속 기름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불은 금세 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쉼없이 가꾸어감으로써만 우리 영혼의 램프를 밝힐 수 있다. 그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참 멋진 학문이 아닌가.(29쪽, '살아가겠다')

 

 

  “살아가겠다”
 고병권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1월

 언더그라운드 니체
 고병권 지음, 노순택 사진 / 천년의상상 /

 2014년 2월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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