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장서의 괴로움'을 읽은 후,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장서의 괴로움'을 읽기 한참 전에,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만나고(고르고) 사귀고(사용하고) 관계를 이어갈까(보관하고) 궁금하던 차에 만난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을 넘겨본 것은, 책 제목 중의 한 글자'식'자를 '혜'자로 내 맘대로 바꾸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데,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갖고 있을 저 고민들에 대해 공감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무언가 혜안을 얻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내게, 지름신과 장서를 부추기는 대책없는, 대략난감한 책으로 분류되어 한쪽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었다.

  지식: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지혜: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장서의 괴로움' 이후 책의 소장에 관해서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을때 내 몸을 누일 땅 한 평은 고사하고,('매장'에 호의적이지 않은 쪽이라~--;)

책 한 권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보관할 곳은 (집안 서재는 고상하게 말 한거고) 방 한쪽에 덩치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와 마음 속일테니,

읽은 책을 두번 다시 읽게될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쌓아두지 말고 없애거나 나눠준다는데는 변함이 없는데,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읽지도 않은 책으로 책탑을 쌓아놓고 책을 또 들이는 일은 지양하고 단출해지자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던 터였는데,

이런 책들의 경우, 읽고싶은 책이 곳곳에 포진해 있으니,

지적허영이고 사치라며 아무리 강하고 모질게 세뇌를 시켜도 허사다~ㅠ.ㅠ

 

조국은 시 이외에 진화심리학에도 관심이 많다.

ㆍㆍㆍㆍㆍㆍ

"제가 읽은 책 중에 동물 실험이 있어요. ㆍㆍㆍㆍㆍㆍ이 새로운 먹이환경에 가장 빨리 적응한 침팬지는 젊은 암컷이었어요. 그리고 젊은 수컷, 그 다음에는 늙은 암컷이 차례로 적응했는데 늙은 수컷만은 마지막까지 기존의 방식으로 먹이를 달라는 거예요. 무슨 이유인지 배가 고파도 끝까지 먹지 않았죠. 늙은 수컷의 비애죠. 이런 모습이 우리 인간에게도 있어요."

 조국은 이 늙은 수컷 침팬지의 모습에서 '나이든 괴팍한 노인'을 보았다고 했다. 남의 말은 듣지않고,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새로운 정보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지겹도록 반복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사람, 남에게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 숨이 막힌다. 대화를 하고 싶어도 귀를 막고 도무지 들으려고 하질 않으니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이가 들면들수록 자신이 만들어놓은 벽은 높아지고, 자신을 둘러싼 껍질은 두꺼워진다. 그들은 자신의 벽을 낮추고 껍질을 깨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껍질과 벽이 있어요. 이것들을 깰 때에만 소통이 되고 변화가 되며 생존이 가능하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사는 거예요. 나이 들어서 자신의 껍질과 벽을 깨는 건 힘들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능력을 길러야 하죠. 그리고 그런 능력은 독서를 통해서 길러집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글, 자신과 감성이 다른 사람의 글, 자신과 전공이 다른 사람의 글, 즉 책을 볼 때 껍질이 부드러워지죠. 껍질이 부드러워져야 다른 게 들어올 거 아닙니까."(19~20쪽)

 

암튼, 이 책'지식인의 서재'와 '장서의 괴로움' 사이에 나의 책에 관한 습관이 크게는 아니고 미묘하게 바뀌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견고해지는건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아니다, 견고하다는건 강하고 젊었을때나 적절한 표현이고,

나이를 먹으면서는 조국의 말처럼 괴팍해 보일 수도 있으니 경계하여야 하겠다.

 

그동안의 난 좀 치열하게 살았었고, 책도 전투하듯 치열하게 읽었었다면,

이제는 책을 즐기며 기꺼워하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의 책이 치열한 경쟁상대였다면,

지금은 오래된 연인같기도 하고 숨겨둔 정부 같을 때도 있으며, 때론 길동무 같거나 동반자 같을때도 있다.

 

 

실은, 오늘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마찰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위태로웠는데, 그때마다 서로 서로 외면하거나 비껴가 버리고 말았었다.

그런데, 번데가 앞에서 주름잡고,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 한다고,

학사까지 합하면 25년차, 임상만도 19년차인 내 앞에서 매번 모든 통증을 경락으로 연관시키려는것이나 매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묻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주겠는데,

'니가 경락을 아니?'로 시작해서 '니가 경락을 무시하는 듯'으로 이어지길래,

기가 차서 '둘이 아는 경락이 다른건가보다'라면서 '팽~'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언젠가 다른 대형 포털에 써서 이곳에 비밀 글로 돌려놨었던 '그녀의 취향' 이라는 글을 언급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이 타성에 젖어서도 안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일이,

다시 말해서, 내 경우에 치료가 적어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신이 드는건, 환자와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다.

경락을 자극하면 그 경락에 맞는 리액션이, 피드백이 있게 마련이다.

리액션을 보면서, 예후를 판단한다.

그냥 대충하는 대증치료는 아닌 것이다.

그런 내게 '경락을 아느냐'를 되풀이 하여 묻는다는 것은,

물론 그게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많은 것을 내포한 중의적인 의미라고 그 자신을 합리화 한다고 하더라도,

날 책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요즘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이고, 나의 겉모습만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맥락을 같이 하는 분은 북 디자이너 정병규 님이시다.

"책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고, 성장에 도움이 되고,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고, 심지어는 삶의 요령까지 가르쳐준다는 식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이라는 건 그 자체로 근본적인 매력이 있어서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는 안목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책이 삶의 일부로 들어오거든요. 그때 하는 것이 독서입니다. 게다가 책을 읽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얼마나 좋은 삶이겠어요?"(145쪽)

 

그런 의미에서 마음만 연다면 환자와도 교감을 하고 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자극, 액션이란걸 가하면 리액션, 피드백이 있게 마련인데,

그게 자꾸 어긋나거나 비껴가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을 열지 못했다는 얘기이니...반성을 해야 하는 걸까?

 

근데, 난 조국이 말한 '나이 든 괴팍한 노인'이 연상된다.

자신의 껍질과 벽을 깼는데도,  상대방의 껍질과 벽이 장애물로 여겨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 전까지의 난,

'벽은 넘으라고 있는거야, 폴짝~!'

그랬겠지만,

이젠 껍질과 벽을 깬 연후라, 웅크리고 뒤로 물러날 일만 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은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애정에 마지않던 신형철 님이 품절남이 되는 날이란다.

이 글은 그러니까 축하하는 의미루다가 적는 리뷰가 되시겠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 하고싶은 말이 좀 많지만 생략하고,

이들의 닭살돋는 애정행각에 눈 흘기고 흉보고 싶지만 그것도 생략하고,

결혼을 축하해주는 의미루다가 부조했다 생각하고 땡치려고 한다.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면, 이 책의 제목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다.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연재된 글을 묶어서 낸 것이라는데,

연재당시, 문학평론가라는 추신을 늘 달았다고 엄살을 부린다.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영화평론을 쓸 수는 없다. 영화를 일종의 활동서사로 간주하고 문학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물어보려 한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고."

 

내가 여기서 딴지를 거는 부분은 '제목'되시겠다.

실험이라는것은,

실제로 해보는 것이라는 얘기라고 해도 그렇고,

과학 실험이라고 해도 그렇고,

어떤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시도해 보는 것이어도 그렇고,

해본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지, 정확해야 한다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고귀한 감정이기는 하지만,

항상 정확해야 하거나, 참이어야 하는 가치 명제는 아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했을때,

'변하니까 사랑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게 사람이 성숙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나의 견해일뿐이다.

사랑이 '참 또는 거짓', '맞다 또는 틀리다' 따위의 정오를 구분지을 수 있는 가치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정확한'이나 '부정확한' 따위의 수식어로 수식을 하려 들면 안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

영민한 마케터의 돌출 효과를 노린 일종의 마케팅 전략인줄 알았다.

그런데 네개로 나눈 주제 중에서 한 꼭지 전체를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할 정도인걸 보면...

돌출효과나 마케팅 전략으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겠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近似'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문예중앙,2012)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최근에 본 두 편의 영화는 사랑받기 위해 삶과 타협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헌사처럼 보였다.(27쪽)

 

       말

            - 장 승 리 -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 봐
안길까 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본문의 내용은 더 구체적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장승리의 시 '말'의 전문도 옮겼다.

 

간혹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보통 더이상 더할 것이 없는 상태를 완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더이상 뺄 것이 없을 정도로 응축이키고 줄인 것을 '본질'이라고 봐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결국, 더하거나 뺄게 없는, 군더더기가 없는 상태가 본질이 되는 것이고,

그게 사람의 마음에 적용됐을땐 '본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장승리의 시와 저 상자안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은 결국 '정확한'이 아니라,

본심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이면,

그 연꽃을 보고 부처를 향해 미소로 화답해 주는 누군가를 '아무나'가 아닌,

자기 입맛에 맞는 그(또는 그녀)로 골라갖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이다.

책이야 공부하듯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그냥 보고싶다는 거다. 

영화를 공부하듯, 아트하듯, 내지는 평론하듯 볼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거다.

내게 적어도 영화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보고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고,

보다가 쓰러져 잠이 들 수도 있고,

아무 것도 못 느끼고 잠이 들 수도 있다.

꼭 뭔가를 느껴야 영화를 제대로 못 것은 아니며,

더 더욱 영화에서 얘기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방과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글로 적힌 책이 이런 기능이 제한적이라면,

영화는 글이 말로 변하고, 시각이 공감각으로 변하면서,

개인의 주관이 자유자재로 가감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밤하늘의 별만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보고도 저마다 다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와 느낌이 일치하기도 쉽지 않지만,

일치했다고 하여, 그 누군가가 '정확하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애기했듯 그 누군가마저도 '기준'이 되는 가치는 아니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어느 누구는 야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고,

어느 누군 남자의 찌질함을 잘 표현해 내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고,

어느 누군 삶의 본질을 파고들려는 영화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다 다른 얘기를 한다고 하여,

이 영화가 다른 감독의 작품이겠는가?

아니면, 이들의 얘기 중에 영화를 잘못 본 오답 케이스가 있겠는가?

 

삶이란,

사랑이란,

어쩜 정확하게 실험 내지는 실행하는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삶 또는 사랑은,

몇마디 뭉뚱그린 말과 애매한 미소,

그리고 손짓, 몸짓의 성의 없는 허공에의 시도,

그 뒤에 오는 무수한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못갖춘 마디처럼,

생각지도 않았는데 문득 떠오른것마냥,

하지만 차오르는 것을,

슬픔 또는 눈물을 눌러삼키듯, 그렇게 꼭꼭 눌러삼켜야 할 날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각자 개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고,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을 하고,

이해를 구하고 공감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비껴가기도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랑한다고 하여,

진심이 오해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진심이 오랫동안 오해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은,

말 그대로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니까 말이다.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을,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독선이다.

 

그리고 적어도 영화는 각자 취향껏 보고 싶은 영화를 보면 되는 것이다.

책을 취향껏 골라 보면 되는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적어도 독재국가 내지는 독재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눈멀고 귀먹어 결혼이라는 구렁텅이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선남선녀들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ㅋ~.

 

근데 정확한게 마냥 좋기만 한가?

내겐 어째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런 의미에서 난 비어있다는 말이 좋다, 채워가질 수 있다는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상에서 난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유니크한 존재이고 싶을때도 있지만,

남들과 별반 다를바 없는 똑같은 생각을 하는 보편적인 사람이란 사실이 커다란 위안이기도 하다.

이 다름과 닮음을,

이 따로 또 같이를,

일상에 적용시키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 비슷 비슷하다는 것이지만,

비슷비슷해도 똑같지는 않다.

설사 똑같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하거나 느낄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잘ㆍ잘못을 얘기하거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한때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생각했었던 적이 있다.

이론상으론 공동생산, 공동 분배를 통해서 똑같이 모든게 이루어지는 평등한 사회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사람이 개개인마다 개성과 능력을 달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존재일때나 가능한 설정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한 사회는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성과나 결과가 차이가 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개개인의 사유재산이 성립될 수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이 되고 만다.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낀다'는 말이 있고,

'부부도 오래 살다보면 닮는다'는 말이 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났더라도,

생김새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개성과 성격이 똑같을 수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반면,

부부로 같이 살면서 개성과 성격을 보고 자연스레 닮아가다보면,

다시 말해, 한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으며 같은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생김새나 분위기도 자연스레 닮아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심전심' 나와 닮은 사람을 꿈꾸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며 좋아했었지만,

이 책에서처럼 피부색이나 언어 따위로 인한 차별이 없는 평등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부부관계라는 것도 없이 배우자는 신청을 하면 골라주고,

아이도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배급에 의해,

음식도 맛이 없더라도 정성과 애정이 담긴 그런것이 아니라,

온동네사람들이 배분된 같은 음식을 먹고 한다면,

생긴것은 조금씩 달라도 누구에게서도 다른점을 찾아볼 수 없는 '늘같은상태'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

 

" ㆍㆍㆍㆍㆍㆍ사람들 역시 한때 모든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너나 나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한때 긍지, 슬픔, 그리고ㆍㆍㆍㆍㆍㆍ."

"그리고 사랑."

조너스는 말을 이으면서 자신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던 그 가족 풍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고통."

조너스는 다시 병사를 떠올렸다.

"기억을 품는게 힘든 가장 큰 이유는 고통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그러니까 기억은 함께 나눌 필요가 있어."(262쪽)

 

살다보면 오래 기억하고 싶은 기분 좋은 기억도 있지만, 너무 슬프고 아파 빨리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한때 난 기억력이 비상하다고 좋아했었다.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것은 기분 좋은 추억 뿐만 아니라 슬픈 추억을 향하여서도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하는 것이어서,

선별하여 적용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기분 좋은 한때, 이 책에서 사랑이라고 나오는 그 한때는, 슬픈 한때와 대구를 이루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어우러져 '기억'이 된다.

이를테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서 배가 되고 반이 되는 그런 경험 말이다.

 

반대로 '늘 같음 상태'라는 것은 그것이 기분 좋은 추억으로만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늘 기분 좋은 상태의 연속이면,

각인되는 것이 없을 것이고,

때문에 기억력이 좋고 나쁘고, 를 떠나서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옷을 입고, 머리모양을 해서, 개인의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똑같이 배분된 음식을 먹어서 맛이란걸 구별할 수 없다면,

저마다의 특기할만한, 독특한 기억이란것도 존재하지 않을테고 그렇다면 추억도 없을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구별은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두고 비교에 의해서 발생한다.

기준을 두고 비교를 통해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구별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비교를 통한 구별을 통해서,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 '차별'도 발생한다.

거기서 나 또한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나에게 어느 쪽을 택하겠냐고 묻는다면,

고질적인 병폐인 '차별'이 발생하더라도,

지방색에 따라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독창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그런 쪽을 택하겠다.

 

정답은 없다.

아니 나는 정답을 모른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고,

그 중 한가지 방법을 다만 'try to'해볼 뿐이다.

 

누군가의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 ㆍㆍㆍㆍㆍㆍ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케 2014-10-08 08:53   좋아요 0 | URL
꽃들도 여러 꽃이 모여야 더 예쁘죠. 나이가 들수록 和而不同이란 말의 뜻이 새로워요. 잘 지내시죠?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이 편안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거기서 탈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걸 두고 점잖은 말로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편견이나 선입견 따위를 극복하라고 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먹어 자아(ego)라는 것이 성립된 연후라면 그런 말 따위는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너나 할것없이 다 그런 습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고,

변화를, 오히려 변절이나 변덕이라고 하면서 하면서 폄하하고 두려워들 한다.

하지만 '느리게 또는 빠르게'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세상은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다.

 

언젠가도 얘기한 적이 있는 듯 한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 하루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오늘이지만,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다고 하여 '어제'는 아닌 것다.

 

똑같은 패턴의 무수한 반복인듯 하면서도,

미세하고 미미한 변화의 순간들이 존재하는,

이 순환을 한 발자국 떨어져 관조적으로 바라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슬쩍 맞물리는 듯도 하지만,

속도의 느리고 빠르기차이에 따라,

점점 크거나 점점 작은 포물선이 그려지기도 할 것이며,

너무 느리거나 빨라서 솟구치거나 누운 직선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러고보면,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에 아무리 느리고 더디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 들일지라도,

신들의 그것을 기준으로 봤을때는 눈깜짝할 새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우리에겐 짧게만 여겨지는 하루살이의 일생이,

(원래 하루살이의 수명은 일주일 정도란다, ㅋ~.)

하루살이의 삶에서는 '평생이고 영원히'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때,

이 책 장서의 괴로움은 백해무익百害無益까지는 아니어도 백해소익百害少益한 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여기서 장서는 '책을 소장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는데, 

독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이분의 라디오 방송에서 얻는다고 할 수 있는 이권우 님의 말씀에 따르면,

자기가 소장한 책을 다 읽을 순 없고 소장한 책의 1/10을 읽으면 많이 읽는것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동안 난 이분 방송을 들으며 기죽지않고 위안을 받으며 많은 책을 쟁여올 수 있었다.

많이 쟁여두면 쟁여둘수록, 비례하여 읽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한권이라도 늘어난다는 생각으로 뿌듯했었지만,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같이 사용하는 남편과 아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급기야 얼마전부터 남편은 책장에 꽂히지 않은 내 책들을 어디론가 내다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다른 가구는 찾을수도 없고 사방 팔방 벽이란 벽은 빈 공간만 있으면 책장이 들어서는 우리집의 속성상,

책장에 꽂히지 못하고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책들은 다 읽었으리라 생각했나 보다.

읽은 책은 다른 사람들과 나눠 읽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을테고 말이다.

 

넘쳐나는 장서를 줄이기 위한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지은이는 '올바른 독서'를 권한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처럼은 못하지만, 500여 권 정도로 책을 엄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시도야말로 독서가나 장서가가 염원하는 이상일 것이다. 지식도 수집도 질이지 양은 아닌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양서란 대체 어떤 것이냐'라는 논의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는 워낙 간단치 않기도 하거니와, 발문을 쓰기로 수락하면서 '이런 논의는 피해가야지'하고 마음먹었던 나 같은 작자에게 답이 있을 리도 없다.

  ㆍ ㆍㆍ ㆍ ㆍ ㆍ500여 권 혹은 100여 권의 조촐한 장서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 그게 양서가 된다! 책은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얘기요, 무작정 많이 읽는다고 지혜가 늘지는 않는다는 당연한 결론이다.(13쪽)

위 글은 '장정일'이 쓴  이 책의 발문 중 일부이다.

난 그동안 장서가냐 독서가냐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책욕심이 많은 것으로 묶어 말하곤 하였다.

어차피 우리나라 출판시장의 여건 상 장서가와 독서가를 구분할 만큼의 수요가 충족되긴 힘들거라고 생각하였었고,

무엇보다도 나부터가 책을 어떤 목표나 기준을 갖고 들이는게 아니었다.

 

책에 관해선 팔랑귀라고 할만큼 남의 말에 잘 현혹되었고,

관심 분야도 어떤 특별한 분야가 있는게 아니라 완전 잡식성이다 보니,

그때그때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 충동구매를 했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서평집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아무 책이나 고르는 실수를 할 확률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책을 들이는 속도에 읽는 속도가 한참 못 미친다.

 

책 중에는 시노다 하지메'5백 권의 가치'를 빌어,

세상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150쪽)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 내용대로라면 난 독서가엔 한참 못 미칠 뿐더러,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권이라도 가졌는가 자문해 보자면 글쎄올시다~(,.)이다.

난 하루에 세 권은 고사하고,

일주일에 세 권쯤 읽던 것도 지금은 더 더뎌졌다.

뭐 예전에 비해, 유독 어려운 책을 읽는 것도 아닌데, 책을 곱씹어 읽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지는 않더라도 소가 되새김질 하듯,

군데군데 무작위로 반복하다보면 물리가 트이듯, 자연스럽게 깨닫는 부분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다읽은 책을 좋다는 이유로 보관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넓고 책들은 많다고 좋은 책들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만일 좋은 책들이라면,

내가 소장하고 있지 않더라도

세월이 가면 또 다른 기획과 편집으로 출간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처분하고 정리한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내가 읽은 후, 누군가에게 가기전에 잠시 동안과,

아직 읽기 전의 책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니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많이 소유하였다고 하여, 없애거나 팔아버리거나 처분하기가 쉽지 않다. 

ㆍㆍㆍㆍㆍㆍ책마다 제각각 추억도 있다. 결코 고서 목록에 죽 나열된 책을 남아도는 돈으로 한꺼번에 주문한게 아니다. 텅빈 책장이 그대로 내 마음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듯하여 쓸쓸함이 자근자근 밀려왔다. ㆍㆍㆍㆍㆍㆍ '장서의 괴로움'은 처분하고 난 뒤에도 느껴지나 보다.ㆍㆍㆍㆍㆍㆍ 바로 전날 겨우 1천2백 권을 처분한 주제에 여기저기 마음이 이끌려 헌 책을 열일곱 권이나 사버렸다.ㆍㆍㆍㆍㆍㆍ 열일곱권의 책 무게로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 되니 그제야 우울한 마음이 가라앉았다.ㆍㆍㆍㆍㆍㆍ 나머지는 생각날 때 또 사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누그러졌다.(35~37쪽)

 하지만 아직 안 읽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안 읽게 될 책이라면,

과감하게 처분해 버리는 장서술이 필요하다.

우선순위에서 매번 밀려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관심도와 신선도에서 밀려난다는 의미이다.

지금 당장 꼭(here right now) 필요한 책들이라도 양조절에 실패하게 되면,

순위에서 밀려나게 될것이고,

그 밀려난게 쌓이다 보면,

순환이 이루어지지 못해 정체와 적체가 반복되어 과부하가 걸리고 말것이다.

 

우리는 책을 많이 소장하는 것만으로 지식 또한 쌓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책을 소장하기만 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읽고 체득하여 내것으로 만들어야 지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올바른 책읽기는 독서도 장서도 아니다.

독서와 장서의 적절한 조화가 근간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보다 우선하여, 책에서 배운 것을 머리로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는 깨달음과 실행력이 병행하여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난 책을 읽었다는 행위만으로 만족하는 독서가는 아니었나?

책을 소장하고 쌓아놓는 것으로 뿌듯해 하는 보여주기 위한 소장가는 아니었나?

책은 물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소산을 표현해 내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깨달음이 있고난 연후래야 행동에 변화가 생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행동의 변화를 가지고 깨달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4-09-26 11:54   좋아요 0 | URL
전 늘 님의 독서기록에 팔랑귀 됩니다

하늘바람 2014-09-26 12:04   좋아요 0 | URL
표지도 참 예쁩니다
 
다시, 나무에게 배운다 - 몸의 기억을 물리며 사람됨을 길러 온 장인들의 교육법, 그 어제와 오늘 나무에게 배운다 2
오가와 미쓰오 & 이카루카코샤의 제자들 구술, 시오노 요네마쓰 엮음, 정영희 옮김 / 상추쌈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사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 관계의 기본은...

공감, 눈 높이를 맞추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늘 귀에 딱지가 앉도록,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뼈에 사무치도록 내뱉고 듣는 얘기이지만,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내 경우엔 아니더라~--;

 

며칠전 자칭 교양 있다는 아줌 두분이 내가 환자를 보고 있는 건너편 방에서 대화를 나누셨다.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교양'이라고 한단다.)

두분의 얘기는 대화를 넘어 고성방가에 가까웠고,

덕분에 두분이 장착하셨다는 '교양'이라는 것의 척도를,

목소리의 크기나 은행 잔고 내지는 보유 주식의 액면가로  가늠해야 하는 건가...헷갈려 하며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더니,

볼륨통이 고장 난 라디오 마냥 주파수, 화제만 은근슬쩍 바꾸셨다.

그런데, 묘한 것이,

토막난 주식이며, 불경기, 국정파행, 민심불안, 심지어 남부지방의 호우나 폭우 등 자연재해에 이르기까지 천가지, 만가지 사건과 사고가,

즉 교양녀 두분의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관심사가 죄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대충 합의보면 될 것을 가지고 질질 물고 늘어진 탓으로 수렴되는가 싶었는데,

그 과정이 여기 옮겨 적을수도 없는 육두문자와 욕설을 섞어 난분분이다가는,

'님하 잊지마소'하는 '용비어천가'도 아니면서,

때문에 대통령님께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로 정리가 되는가 싶더니,

그렇게 '그네 언니포에버'로 귀결을 보는 것이었다.

 

내가 이바닥 생활을 한게 한두 해가 아니고, 지방 방송을 듣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지라, 

웬만하면 못들은척 하고 넘어가는데,

한쪽을 치켜세우기 위해 다른 한쪽을 깎아내리는것도 정도가 있다고,

치밀어오르는 그 무언가를 눌러 참는데,

어느 순간 숨을 쉴 수 없는 것이 피가 바짝비짝 마르고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이러다가 폭발하겠는거라,

치료비를 내주어 돌려보내 버렸고,

그로 인해서 할부지에게 '모자란 놈'이란 소릴 들었다.

 

서로 사마하는 사이라고 생각되는 이 몇몇에게 하소연 하였다.

나름 개성을 가진 독특한 이들이기에 다양한 반응을 예상하였었지만,

서로 사마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미련한 넘'이라는 반응만은 의외였다.

이 친구는 '무시할건 무시하고 살아야지,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발끈할건 뭐냐?'며,

심지어 미친개라고 생각하라길래, 내가 수의사냐고 툴툴거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맛다'라고 할 때 '사마하다'는 순우리말로 '사무치게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란다.

절실하고 사마하는 소통,

반드시 소통은 일방적인게 아니라 서로 간의 것이다.

 

내가 모자란 것인지, 또는 미련한 것인지, 는 모르겠으나,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공감과 소통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건 친구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예를 들어 누군가 '수박은 초록색에 검은 줄무늬가 있다'라고 했을때,

나와 상관이 없거나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안만을 놓고 중립을 지키거나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게 아니다.

하지만, 그 수박을 잘라 빨갛고 잘 익은 속을 먹어봤고,

서로 사마하는 사이라면, 그걸 알려 주고 싶을 것이다.

이건 말이나 글로 아무리 자세하고 조곤조곤 설명한다고 한들,

수박을 칼로 뚝 하고 쪼개서 나눠 먹어 보는 것만큼 공감과 소통을 하긴,

즉, 설득력이 있긴 힘들 것이다.

 

이걸 환자에게 적용시켜보면,

허리가 아프다고 할때,

무조건 경락을 적용하여 방광경, 대장경, 삼초경에 처치하면 될텐데, 뭐 그리 복잡하냐는 이가 있을 수 있다.

 

허리가 아프다고 허리에 처치를 하는 것은 대증 요법이다.

 

허리가 아픈 것은 허리 주변 근육의 자체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허리주변의 뼈나 신경 등의 문제 일 수도 있고,

흉ㆍ복부 내장기관의 문제일 수도,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또는 무게중심이 흔들려서 허리가 아플 수도 있으며,

턱관절이 안좋은 경우, 소위 부정교합이라고 불리우는 경우에도 허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며,

여자들의 경우 빈혈과 허혈로 인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환자와의 관계는 이렇게 사사롭고 내밀한 부분까지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무시할건 무시한다는건,

사사롭고 내밀한 부분은 떼어 두고,

허리고 다리고 어디가 아프든 간에 아프다고 하면 진통제를 처방한다는 얘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뒤에 나오는 인터뷰어'시오노 요네마쓰'에 대한 아래 인터뷰 내용은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토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인터뷰를 하기 어려울 겁니다. 상대방과 나를 완벽하게 분리한 채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가 도중에 끊어져 버리기도 하니까요.

시오노 씨의 원고는 당사자가 내보이길 꺼리는 건 싣지 않는다는 느낌이라, 그것이 저하고도 잘 맞는것 같습니다.

ㆍㆍㆍㆍㆍㆍ

시오노 물론입니다. 사람한테 상처주려고 인터뷰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요. 본인이 싫어하는 것을 싣지 않는 대신, 그 사람이 책을 읽고 하는 말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이차 정보 같은 건 전부 걷어 내 버립니다.

이토이  자기 것이 아닌 건 전부 지운다는 거군요.

시오노 그런 건 금방 눈에 띕니다. 본인은 일부러 공부까지 했는데 그 내용이 빠져 있으니 서운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ㆍㆍㆍㆍㆍㆍ. 가령 대장장이라면, '매실장아찌 같은 색', '노을을 닮은 색', '귤 알맹이를 싸고 있는 얇은 껍질을 벗겨낸 듯한 색', 이런 식으로 불의 빛깔로 온도를 얼추 가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고 오면 "칠백팔십오 도쯤 되면 변태점에 도달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속으로는 책에서 본 지식 같은 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변태점에 어떻게 도달하면 됩니까?"라고 다시 물었을때, "딱딱했던 쇠가 부드러운 양초처럼 되지."라든가 "두드리면 형태가 잡혀."처럼, 자신의 말로 이야기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 게 듣고 싶은 이야기죠.

ㆍㆍㆍㆍㆍㆍ

시오노 객관적인 사실이란 없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 줍니다.ㆍㆍㆍㆍㆍㆍ"너희들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나는 절대 못한다. 머릿 속에 지식이 가득 차 있어서 한마디만 듣고서도 이해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너희들은 한마디만 듣고서는 이해 못하는 것이 더 많다. 그만큼 자기 지식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한 질문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돌아오는 대답도 솔직하다. 만약 너희가 만난 할아버지가 십 년 뒤에도 건강하다면 다시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다. 분명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 주실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해 줍니다. 상대에 따라서도 이야기가 달라지니까요.

이토이  그렇죠. 진실이 거짓이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이기도 하니까요.(350쪽)

흔히 우리는 책을 읽었거나 글이나 말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으면 공부하고 배웠다고 하는데,

이 책 전반에 걸쳐서, 그리고 인터뷰어'시오노 요네마쓰'도 마찬가지로, 책에서 읽었다던가, 글이나 말로 기억하는 그것만으로는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으로 체득하는것, 다시말해, 몸에 행동이나 요령이 배는 것만을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ㆍㆍㆍㆍㆍㆍ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 몸에 기술이 배는 건 아니거든요. 말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니까요.ㆍㆍㆍㆍㆍㆍ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모든 것을 말로 배웠고, 말로 기억해 왔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손과 몸으로 배워야만 하는 거니까요.

  예를 들자면, 갑자기 장님이 돼 버린 사람이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모든 걸 눈에 의지해 왔는데 눈이 안 보이게 된 거죠. 앞으로는 모든 걸 손끝의 감각으로 판단해야 해요. 그런 훈련입니다. 지금까지 몸에 밴 것을 죄다 없애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감각이란 것은 닦을 수 없지요.(157쪽)

이말은 바꾸어 말하면, 그동안 몸에 밴 행동이나 요령을  걷어내고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새롭고 정직한 감각을 갈고 닦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동안 자기가 눈으로 봐왔던 세계를 걷어낸다는 것은 자기의 눈을 스스로 감아 닫아걸지 않는 이상,

그동안의 자아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손끝으로 판단하는데, 눈이 개입하게 되면 다른 감각이 개입하게 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부정하고 자기합리화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눈여겨보지 않으면, 평생 보지 못한 채 모르는 채로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곁에서 매일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ㆍㆍㆍㆍㆍㆍ

니시오카 대목장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언가를 모를 때, 모르니까 무조건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질문할 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가르쳐 주셨던 것이지요.ㆍㆍㆍㆍㆍㆍ배운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좋은 스승이 곁에 있고, 거기에서 스스로 배우는 겁니다.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것. 대목장의 말씀은 그런 것이었습니다.(63~65쪽)

호ㆍ불호가 분명한 사람일수록 보지 못한 채로 지나가 버리고 마는게 많다.

동전의 앞면만 보는 사람은 동전의 뒷면을 미처 바라보지 못하기 쉽고,

밝은 곳에만 있는 사람은 어둠에 대비되는 빛의 고마움을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빛의 고마움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어둠도 체감해봐야 하지 않을까?

말이나 글로, 또는 책을 통해서 아무리 자세하고 정확하게 어둠에 대해 묘사를 한다 한들,

직접 몸으로 느끼고 체감한 어둠에 비할 수 있을까?

"촉감, 감이다. 그걸 알 때까지 날을 갈아라."

"ㆍㆍㆍㆍㆍㆍ."

  말로는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습니다. 사물의 원리라는 게 말로 전달되지 않는 것도 있거든요. 다들 말이나 문자로 모든 걸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건 일부에 불과하죠. 냄새나 소리, 손의 감촉 같은 것이 문자로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머리뿐만 아니라 몸도 있습니다. 몸으로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이 목수입니다. 물론 계산을 한다거나 도면을 그린다거나 하는 머리로 하는 일도 있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은 손으로 합니다. 수작업이라는 말이지요. 손으로 연장을 갈고, 나무를 깎고, 얼마나 잘 됐나 손으로 확인합니다. 손끝에 닿는 감촉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물론 익숙해지면 눈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라는 것, 이것이 직감입니다. 결국 목수의 마지막은 이 직감을 키우는 것입니다.

학교나 훈련소에서 이런 감각을 키울 수 있을까요? 뭐든 학교에서 다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직감을 어떻게 배우냐고요? 스승한테서 그대로 베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모두 성격도 다르고 지니고 있는 재능도 달라요. 가르치는 쪽이 제자의 성격이나 재능, 습득하는 속도에 맞게 ‘여기까지 해낸다면 다음에는 저기까지 시켜 보자.’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가르치고 그걸로 끝,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 개성이라는 것이 없다면 누구든지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성질이 서로 다릅니다. 그걸 무시하면 망치게 됩니다. 각각 성질을 잘 살릴 수 있도록, 그 성질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가르치는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니시오카 대목장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천성이란 게 있다. 진정한 교육이란 그 타고난 기질을 살려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가르치는 쪽도 배우는 쪽도 고생을 해야 합니다.ㆍㆍㆍㆍㆍㆍ제자가 되기 전까지, 제자와 스승은 완전한 남입니다. 그런 타인의 성질을 꿰뚫고 그 사람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 제대로 된 장인으로 기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승과 항상 함께해야 합니다.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만 하지요.ㆍㆍㆍㆍㆍㆍ 나무 하나하나와 관계를 맺으면서 생겨나는 저마다의 '호흡'같은 것이지요. 전하려 해도 잘 전해지지 않습니다.ㆍㆍㆍㆍㆍㆍ이러한 것들이 일과 일 사이를 채우게 되고, 이것이 목수의 '직감'을 만들어 갑니다.

  함께 있는 친구와 같은 것을 보고 동시에 웃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대화도 없고 신호를 주고받지도 않았지만 같은것을 느끼고 똑같이 반응할 때가 있지요. 이러한 것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직감'은 자라지 않습니다. 가르치려 해도 다 가르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100~102쪽)

이게 가능한 관계, 대화나 신호 없이도 공감과 소통이 가능한 서로 사마하는 관계라는건 어찌보면,

손끝의 감각이나 몸에 관한 얘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직감에 관한 얘기이고,

 

직감이란 건,

말이나 글을 넘어서는 어떤 것,

손끝이나 몸에 관한 얘기로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극도로 응축시켰을때 남는 어떤 것,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달이고 달이고 달였을때, 졸이고 졸이고 졸였을때' 남는 진액이나 농축물이 아닐까 싶다.

 

인간 개개인으로 따지면 습관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천성이나 본성 같은 것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나 글로 설명해서는 이해시키거나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말이나 글에 관한 것으로나,

손이나 몸에 관한 것으로나,

어느 한쪽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그런 것들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나서 다다르는 어떤 경지쯤으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그런 의미에서, 하고싶은 얘기가,

교양이라는 것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많이 하거나 문화생활 전반에 관한 단순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악세서리처럼 장착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공감과 소통에서 비롯된다, 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많은 설레임과 갈등 후에 도달하는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

그걸 극복하고 났을 때 진짜 편안한 인간 관계에 도달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만을 공감과 소통에서 비롯된 서로 사마하는 사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4-09-16 12:52   좋아요 1 | URL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고성방가하는 사람들 옆에서 환자를 보셨으니 많이 피곤하셨겠어요. 에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