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바로 지금 여기에서, 고유명사로 산다는 것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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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인 친구가 있다.

가만히 있으면 충분히 대박인데,

꼭 자기 입으로 잘난 척을 하여 초를 치고, 쪽박을 깬다.

 

어젠가는 전날 밤 봤던 달이라며 사진 한장을 보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쁜 사진'을 보내주는 그 마음씨에 충분히 감동을 했었다.

그래서 연이어 날아온 이런 메시지가,

 

어제 밤 달임

 

저 위의 별도 신기했음

 

Opsc라는 늙은 별이래

논리적으로 오류가 보인다 싶고, 이상하다 싶었지만,

일부러 사진까지 찍어 보내준 성의가 괘씸하여 '이쁘다'며 호들갑을 떨고 말려고 했었는데,

 

자기가 천체물리를 한다는 걸로도 부족해, 고등학교 선생님들보다 낫다고 하는데서 뚜껑이 열려,

감성과 필 충만한 나는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고,

평상시 옵션으로 달고 다니던 이성을 메인으로 장착해

'Opsc가 뭐의 약자냐, 누구 그러더냐, 저게 몇 시경의 사진이냐...'따위를 꼬치꼬치 캐묻는걸로 부족해,

'그냥 달이랑 별이랑 이쁘다고 하면 될 것을, 꼭 그렇게 잘난 척을 해야 속이 시원하냐'며 말을 뾰족하게 벼렸다.

 

내가 이성을 장착해 주시게 된건, '늙은 별'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는데,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 스스로 폭발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내뿜는데,

 그 순간이 마치 새로 태어난 밝은 별처럼 보여 ‘초신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어디서 주워들었다, ㅋ~.)

늙은 별이라 함은 에너지가 소진되어가는 온도가 낮은 별일텐데,

마지막 순간이 아니고선 저렇게 밝게 보일수가 없지 싶어서 였다. 

혼자 이러고 노는 날 엿보기라도 했는지,

한참 후에 'Omicron Psc'('물고기의 항성')이라며 자료를 보내줬는데,

그 자료를 보고도 내가 툴툴거리며, 의문을 쏟아내자,

이번엔 이런 사진을 보내줬다.

이 사진에선 잘렸지만,
맨 위 사진에서의 조각달과 어우러졌던 별은 '샛별'정도 될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친구를 향하여, 낭중지추(囊中之錐)라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겠지만,

이 책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직이불사 광이불요(直而不肆 光而不耀)-'솔직하되 멋대로 하지 않는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다'가 생각났다.

이 문장은 입장을 해석하기에 따라선 나에게 적용되는 구절일 수도 있다.

 

스승이나 상사의 말에 바로 자기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 솔직하긴 하지만 분명 성숙한 행동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주변의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솔직함 혹은 뒤끝 없음은 종종 유치함을 미화시킨 표현일 때도 있습니다. 솔직하면서 성숙한 모습을 함께 보이기가 쉽지 않아요, 영리하면서 중후하기 어려운 것처럼요.

  영리한 게 뭡니까. 예리한 것이지요. ㆍㆍㆍㆍㆍㆍ"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ㆍㆍㆍ."

그런데 그게 상대를 위하는 게 아닌 경우가 많아요. 예리하지만 찌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고 모른 체하는 게 아니라 기다려주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올 시기를 본다거나, 상대가 자연스럽게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거예요.

  도가에서는 예리함 자체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예리함은 항상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될 때 나오거든요. 대개 가치관이 바른 사람들,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이 예리하고 솔직합니다. 그런데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스스로 가볍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든요.

  반면 하나의 의미에 갇히지 않고 대립면을 살피며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신중합니다. 어떤 '다름'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아요.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편을 가르지 않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 성인은 방정하되 옳고 그름을 가르지 않고, 예리하되 찌르지 않고, 솔직하되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되 눈부시지 않다 [光而不耀]는 겁니다. 대개 빛나고 눈부시길 원하지만 빛나고 눈부시면 오래가지 못하거든요.(220~221쪽)

 

이 책의 띠지를 보면, '바람직한 삶이 아닌 바라는 삶을 살라'고 하고 있고,

노자에 일가견이 있는 강신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살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위 박스 글을 통하여 보게 되면,

가치관이 바른 사람, 즉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은 예리하고 솔직하다고 하는데,

예리하고 솔직하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다름을 구별해 내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걸 얘기한다.

다름을 구별하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건, 편을 가르게 된다는 의미이고,

나누고 편 가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거슬러올라가서 그 근원이 되는 예리함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인데,

언뜻 보기엔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사는 것과 상충되는 듯 보여진다.

 

일례로 효(孝)와 관계되어,

힘들어도 부모를 모셔야 하느냐 하는 류의 질문에 대하여,

강신주는 자신의 앞가림을 먼저하라는 말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살라고 조언하는데,

최진석은 내면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부모를 모시는 대신 그 시간에 자기 개발을 도모하게 되는게 자신이 정말 바라는 일일까,

다른 어떤 가치에 지배되어 그것을 바라고 요구하는 양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되묻고 있다.

 

노자 이전의 천명론이라 불리우던 것들의 속성이 비의성, 임의성, 주관성으로 대두된다면,

자연의 존재형식이나 운행원리를 근거로 한 노자에 이르면 객관성, 보편성, 투명성의 속성으로 옮아가는데,

강신주의 그것과 최진석의 그것은,

임의적이고 개인적이라는 점과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닮은 듯 다르다.

 

이 책이 좋은 것은 제기하는 주장이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억지스럽지 않다.

 

때로 때때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관점이나 가치관으로 그럴듯하게 생각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로 옮아가보면, 터무니없어져 버리는 상황이 있다.

그런데, 최진석의 경우, 그 시대로 옮아가, 그 시대를 이해학고 몰입하게 만든다.

또 하나, 중국어와 우리말의 어순이 다른 경우,

중국어의 어순을 지켜 해석을 하다보니,

의미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그게 맞는다 수긍이 가서 고개를 주억이게 된다.

 

개인적으로, 노자를 해설자를 바꾸어가며 제법 여러권 읽었다.

그런 내게도, 그동안의 견해와는 달라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여러 곳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조곤조곤 자상하게 설명을 해준다.

ㆍㆍㆍㆍㆍㆍ우리가 <도덕경>을 이해하려고 할때는 누구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대개는 왕필의 시각으로 노자를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노자의 시대와 왕필의 시대는 시간적으로 7백 년의 차이가 나요.ㆍㆍㆍㆍㆍㆍ위나라 시대의 당면 문제와 춘추전국시대의 당면 문제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즉 7백 년의 시간차를 간과한 채 왕필의 시각만으로 노자를 보면 노자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159쪽)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깨달은 바가 있다면, 현실에에 적용할 수도 있어야 하겠는데,

그렇다면 현대에 노자의 철학을 토대로 살아간다는 건 어려울까?

만약 최진석이 노자를 '현대의 철학자'라고 명명하면서, 노자의 그것으로만 제한시켰다면 이렇게 좋다고 설레발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어떤 단계에 도달하는데 특정한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훨씬 자유롭고 넉넉하다.

 

공자를 통하기도 하고 노자를 통하기도 하고,

(또 공부를 통해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공부를 통해서만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세상 경험 속에서, 일을 통해서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 중에 아주 맘에 들었던 건, 유가와 도가의 차이 부분이었는데,

유가는 채우고 채우고 채워서 그 높이를 우주의 높이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도가는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우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182쪽)이라고 부분은 너무 멋졌다.

그런데, 여기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첨언하자면,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받아들이는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문이란 들고 나는 일이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논리를 적용하여,

비우고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내주어 우주로 흡수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노자가 얘기하는 건 공감과 소통인데,

나를 비우고 우주(=자연=타인)을 받아내는 것이나,

나를 내주어 우주(=자연=타인)로 흡수되는 것도,

다시말해, 우주에로 번지고 스며 물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비워낸다는 것은 나를 없애고 지우는 것이지만,

나를 내준다는 것은, 번지고 스며 물든다는 것은,

나의 것과 우주의 것이 만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나의 본성을 포기하지 않고,

나라는 고유명사를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는 동시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은 두껍지는 않았지만, 동서양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나를 행복하고 황홀하게 해주었다.

두고두고 관점과 시점을 바꾸어 읽고 생각하고 해야겠다.

관점과 시점을 제한시키거나 조건을 준다는 것은 생각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얘기이고,

이건 편견과 선입견, 내지는 독선에 빠질 수 있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 경계하여야 겠다.

 

 

참 좋은 책인데,

*익이 우임금의 아들인 계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지산 산[箕山]으로 숨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해요.(26쪽 밑에서 둘째줄)

*당시 제후들이 기산으로 피한 익을 따르지 않고,(27쪽 4줄)

 

단어를 통일해줄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얼마 떨어지지 않아 지산, 기산 다르게 쓰이다 보니, 다른 지명인줄 착각할 우려가 있다.

 

290쪽의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하는 노자의 도덕경은 제3장이 아니고, 제13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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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03-25 00:14   좋아요 1 | URL
전에 텔레비전으로 이분의 특강을 조금 들었는데, 어려운 내용이지만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양철나무꾼님이 어쩌면 병원과 관련있는 일을 하실 것 같았는데, 오늘 사진 속의 보니까 약간은 더 그럴 것 같은데요^^ 쓰신 글 빠르게 한 번 읽고 댓글 쓰고, 시간될 때 다시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sslmo 2015-03-25 11:3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은 이분 특강을 들으셨군요?
저는 뒤늦게 이분에게 feel이 꽂혀서 전작주의자가 되기로 했다나, 어쨌다나...ㅋ~.

엉성하고 서툰글을 시간내어 다시 읽어 주시겠다니,
더욱 정성을 들여야겠다고 결심을 해보게 됩니다, 불끈~!

바람은 차갑지만, 그래도 햇살은 따뜻해요, 좋은 하루되세요, 님도~^^


AgalmA 2015-03-25 00:46   좋아요 2 | URL
유투브가 왜이리 길지 하며 쭈욱 내리다가 아, 사진! ^^
요즘 제 생각도 비슷해요. 앎을 익히되, 편견과 오해를 반성하며, (채우고 비우고의 반복) 나다움을 잃지 말자를... 나다운 자유를 잃게 되면 절망은 금방 나타나더라고요.

sslmo 2015-03-25 11:39   좋아요 1 | URL
나이가 들어서 좋은 것은 잘 까먹는다는 거예요.
쓸데있든, 없든 간에 잘 까먹어서 좋은 것은,
그동안의 안달루시아에서 탈피하여, 웬만한 것을 향하여선 넉넉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나를 비워도 넉넉해지지만,
상대방을 채워줘도 넉넉해지는데,
이건 Agalma님 같이 젊은 청춘에겐 한참 나중의 일이겠지요?^^

2015-03-25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25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피북 2015-03-25 08:04   좋아요 0 | URL
저 오늘은 꼭 이런 말씀 드려야겠습니다....너무.....

귀여우세요 꺅♡~♡
양철 나무꾼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몰입되고 생각하게 되고 느끼게 되는 부분이 많아 참 좋습니다 지난번 `나무`라는 책 이야기가 너무 좋아 구입해 아직 읽지 못했지만 요 책도 구입하고 싶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sslmo 2015-03-25 11:41   좋아요 0 | URL
어헛~!
저 귀없지 않고, 귀 있거덩여~^^

전 해피북 님의 독서 속도가 참 부럽다나, 어쨌다나~(,.)

2015-03-25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25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25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25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5-03-26 10:35   좋아요 0 | URL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은 예리하고 솔직하다,
예리하고 솔직하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다름을 구별해 내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걸 얘기한다

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에서 갸우뚱, 박스 안의 인용글은 그렇게 읽히지 않는걸. ^^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은 올곧고 폐를 끼치지 않으며 참으로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강직성을 지니고 다른 면을 용인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읽혀,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유연성이 부족해, 흐흐흐흐흐흐흐 (결국 내 잘난척. 흐)

좋은 페이퍼야~ 이런 페이퍼를 쓰는 자기가 넘 멋져.
글구 얼굴 비싸게 굴어서 미안~*

sslmo 2015-03-26 17:05   좋아요 0 | URL
`예리하고 솔직하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다름을 구별해 내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걸 얘기한다` 는 말은 내가 한게 아니고 인용구이구여, ㅋ~.

내 친구들은 대부분 유연성이 부족해, ㅋ~.
그말은 결국,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인가?
아님, 한술 더 뜬다?ㅋㅋㅋ

詩21 2015-04-06 04:40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 글 읽고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쓰시나 해서
감동 이라는 걸 먹어서 가슴 팡팡 뛰는데......... 잽싸게 eBook 다운 받고 읽으려던차에
다시 한번 나무꾼 글 읽으니 반은 읽었구나 하며 나중에 틈날때 천천히 읽기로 했습니다.
시간 아깝다는 핑개로 무척이나 독서를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인데 이제부터 서서이 탈바꿈 하려나?

sslmo 2015-04-06 10:47   좋아요 0 | URL
저보다 글을 더 멋지게 잘 쓰시는 분이 절 칭찬해주시니,
쑥쓰럽다 싶었는데,

근데 곰곰 생각해보니,
이런 관계는 분명 상호적이라는거죠.
님이 넉넉하고 여유로우시니까, 절 좋게 봐주실 수 있는 걸거예요.
독서를 싫어하시는 게으른 분이시라면서, 벌써 책을 반이나 읽으셨다는 것도 그렇구요.
모쪼록 건필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ㅅ^^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2
이재무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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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집의 맨 뒷장 '시인의 말'을 빌어 '시를 삼십 년 넘게 써왔지만 나는 여전히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 고 한다.

이건 어찌보면 겸양일 수도 있지만,

시의 세계란 것이 무궁무진하여 아무리 구하려하고 다다르려 해도 다다를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매번 시를 쓸때마다 처음인 듯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고 하지만,

쓸모없는 듯 보여도 그게 더께로 쌓이다보니 내공이 되어 '이제는 그것 때문에 어떤 강박에 휘둘리지 않는다.' 며,

'시와 잘 놀기만 바랄 뿐'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시인를 흉내내어 얘기해보자면,

다시 말해, 삶을 시로 치환시켜 얘기해보자면,

사십 년 넘게 살아왔지만, 나는 여전히 삶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삶이 처음인 듯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하다고 하여, 이제는 그것 때문에 어떤 강박에 휘둘리지 않는다.'

쓸모없는 듯 보이는 그것도 더께로 쌓이다보니 내공이 되어,

내 삶을 지지해 주는 지지대 역할을 거뜬히 한다.

이제는 삶을,

햇살 좋은 날 산책나온마냥 지금 이순간을 감사하며 지나게 된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시집도 천천히 숨을 고르며 읽어야 제맛이라고 생각했었다.

삶에 쫒겨 마음 줄이 팽팽할때는 시집 한권, 시 한편도 사치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런데, 길 위에서 구했다는,

생활인듯 삶인듯한 시를 읽고 있노라니,

이렇게,

이런 방법으로도,

시집이야말로 삶에 쫒겨 마음 줄이 팽팽할때 읽어야하는,

맞춤 처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우기, '삶에 무릎을 꿇는' 다시말해 '슬픔에게 무릎을 꿇는' 그것이 항복의 그것이 아니라,

낮은 자세로 임하는 그것이어서,

고개를 낮추어 눈높이를 맞추는,

소통과 공감의 그것이 되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오가며 흐르는 내(川)가 된다.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닦아본 사람만이,

삶을 시로 치환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겸허하게, 슬픔이 기쁨의 또 다른 이름이고,

그리하여 슬픔이 언젠가는 기쁨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돌멩이와 구두

석 달 전 길을 걷다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귀 기울여보니 영락없이 구두 밑창에서 나는 소리라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았다 언제 뚫렸는지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 보이고 그 속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닌가 어디서 굴러든 것일까 나는 돌멩이를 꺼내 길에 놓아주었다 그 후로도 여럿 돌멩이들은 예의 구멍에 들어와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다가 이내 꺼내지고는 하였다 과연 이들의 동숙은 서로가 서로를 원해 이루어진 것일까 하나의 간절한 염원이 이룬 것일까 아무려나 내 알 바 아니지만 우리네 설운 삶을 다녀가는 무수한 인연들이 혹여 저 돌멩이들과 구두가 맺은 지극히 사소한 우연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오늘도 내 생은 하루만큼 저물어간다

'돌멩이와 구두'를 읽으면서,

우리는 미래를 대비하고 염원하느라고,

지금 이순간 또한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를 간과하고 살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헛된 희망과 간절한 염원을 혼동하느라고,

우리의 무수한 삶이 이루어지는 길을 외면하지는 않았나?

험한 길 위에 놓여진 돌멩이에게서 내 발을 지켜주는건,

내가 오늘 신고 있는 밑창이 엄지손톰만큼 뚫어진 구두 한켤레이다.

밑창이 뚫어진 구두로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오늘 나의 생은 '하루만큼'만 저물어갈 뿐이다.

 

'사소한 우연'일지라도 그게 두번, 세번 반복되면 '인연'이 되고,

그 '인연'이 씨줄과 날줄을 엮어 어디에선가 중첩되면 '운명'이 되는 것이지,

그게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간절한 염원만으로는 아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나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마음이나 생각이 행동을 변화시킬때 돌멩이와 구두의 만남은,

우연에서 인연이나 운명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이어지면, 지금 이순간이, 오늘 하루가, 내 곁에 있는 그대가 가장 소중하다.

 

 

두부에 대하여

 

두부가 둥그런 원이 아니고

각이 진 네모인 까닭은

네모가 아니라면 형태를 간직할 수 없기 때문

저 흔한 네모들은

물러 터진 속성을 감추기 위한 허세다

언제든 흐물흐물 무너질 수 있는 네모

너무 쉽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네모

가까스로 네모를 유지한 채

행여 깨질까 조심스러운 네모

제가 본래 단단하고 둥근 출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네모

우스꽝스러운, 장난 같은 네모

지가 진짜 네모인 줄 아는 네모

언제든 처참하게 으깨어질 수 있는 네모

둘러보면 그런 두부 같은 네모들이 얼마나 많은가(71쪽)

이 시는 깍두기로도 읽혔다.

우리는 까만 양복을 쫘악 빼입고,

'형님~'하며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그 사람들 말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시골길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걷는다

두근두근 길도 내가 그리웠나 보다

이제사 알겠다

내가 시골길에서 자주 넘어지는 이유(91쪽)

 

암튼 오랜만에 시집 한권을 읽으니, 마음이 순해진다.

나의 시집을 읽는 눈이 순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지만,

시집을 처음 읽는 것도 아닌데,

오늘에서야 마음이 순해지는 것은,

이재무, 그의 시들이 길위에서 길어올린 삶 자체여서이지 싶다.

아들과 베드민턴을 치며 들키지 않게 져주는 것으로 일상에서 사랑을 길어올리는 시인처럼,

일상을, 지금 이순간을, 살고 봐야겠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지극히 숭고한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니까 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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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3-17 18:04   좋아요 0 | URL
저도 옮겨주신 시골길이란 시가 좋더라구요. 능청스럽다고나 할까... ㅎㅎ

sslmo 2015-03-18 09:11   좋아요 0 | URL
`식물성 곱창`과 어우러진 `순대를 사서 먹었다`도 완전 죽음이었죠, ㅋ~.

2015-03-17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8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3-18 06:59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이 시인의 시집 읽고 있는데...^^
어려운 말로 쓰기보다는, 말씀하셨듯이 생활인 듯 삶인 듯, 이 시인의 시들이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나름 시대 비판 정신도 슬쩍 슬쩍 느껴지는데 그걸 드러내놓고 표현하기 보다는 역시 삶 속에 녹아있는 상태로 표현하는 것 같고요. 슬픔을 슬픔으로 무릎 꿇게 하듯이요.

sslmo 2015-03-18 09:28   좋아요 0 | URL
그쵸~?^^
비판정신을 그대로 드러내는게 아니라 삶 속에 녹여내는것,
그게 이 시인의 시 속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느껴지는 `글빨`이고 `연륜`인 것 같습니다.
 
왜 나는 인간의 성격을 연구했는가 - 가까이해도 좋을 사람, 가까이해선 안 될 사람
테오플라스토스 지음, 김욱 옮김 / 행복한마음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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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해도 좋을 사람,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왜 나는 인간의 성격을 연구했는가'라는 이 책은 아마 원제가 '성격론'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책을 난 제목 때문이 아니라 저자 '테오플라스토스'에 혹해서 구입했다.

 

테오플라스토스는 BC371~BC287년 까지의 그리스의 철학자로,

레스보스 섬의 에레소스 출신으로,아르키포스에게 배웠다고 하는데,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다가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활동했다고 하여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답게, 윤리학에서는 행복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다.

 

옛날에 쓰여진 책답게 도덕적이고 고리타분하다.

책을 가만히 읽고 있다보면, 그 시대에 추구했던 이상향이랄까 가치관 따위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테오플라스토스 같은 훌륭한 철학자도,

그리고 백수의 삶을 누리고서 말년에 이르러 쓴 책의 머릿말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 중에 존경해야 할 훌륭한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인간들도 섞여 있었다고 하는 걸 보니 좀 아이러니컬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나누는 기준은 가문이나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타고난 성격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최고의 교육도,

존귀한 신분도,

훌륭한 친구의 진심어린 충고도, 인간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한다.

 

암튼, 그는 인간의 성격에 숨어있는 기질을 얘기하는 것을 통하여,

먼 훗날 아이들이 인간을 좀 더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을 사귐에 있어서 냉철해지기를 바라며,

사귀지 말아야 할 인물들을 가르치는 걸 통하여,

정말 사귀어야 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와 가깝게 지내서 인생을 훨씬 아름답게 만들것이라 믿기 때문이라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광장에 모여 집단 토론을 하던 고대 그리스의 일이고,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걸맞는 처세법이 있을 것이라고 감안을 하고 보더라도,

이 책의 내용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난 사귀어야 할 인물과 사귀지 말아야 할 인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우기 상대의 인격을 자신과 동격으로 놓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자격요건을 갖추었는지, 자격미달인지를 가려내는것 같아서 씁쓸하다.

 

나는 인간관계는 말 그대로 상호적인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귀지 말아야 할~' 속에는 수많은 전제조건과 단서들이 숨어있다.

내가 상대를 '사귀지 말아야 할' 범주에 집어넣는다는 말 속에는,

상대의 인격과 자신의 그것이 동격이라는 전제가 숨어 있고,

바꾸어 말하면, 상대방 또한 나를 '사귀지 말아야 할' 범주에 집어넣었을 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가치관이 바뀐 것도 한 몫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 보면 피해야 할 사람으로,

아첨꾼, 쓸데없이 말이 많은 자, 수다쟁이, 소문을 좋아하는자, 등이 나오는데,

요약해보면, 말이 많은 자를 '사귀지 말아야 할 인물'로 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내 경우에 빗대어 보자면,

말이 없는, 아니 말을 아끼는 남자랑 살다보니,

나도 그리 재잘거리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환경의 영향으로 말이 많아 졌다고 할 수 있으려나?

이쯤되면 말에 관한 것도 상대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꼭 필요한 말을 적절하게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봤을땐 넘쳐나서 '사귀지 말아야 할' 범주에 들어가는건 시간문제니까 말이다.

광장에 사람들이 모인 까닭은 그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낯선 사내 때문에 사람들은 중요한 토론은 해보지도 못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그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인간들을 왜 피해야 하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때가 쓸데없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자들을 피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대의 인생에서 그 값을 따질 수 없는 시간을 좀먹기 때문이다.(30쪽)

그런데, 여기서 광장에 모였다는 것은 민회에 참석했다는 말이 될 수 있는데,

민회에 참석하기 위해선 일정한 금액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돈이 없는 일반 시민들은 민회에 참석하지 못했단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적 신분과 재산, 인물, 교양, 학식, 평판 등으로 가까이해야 할 사람과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 사람의 인생은 사회적 신분과 재산, 인물 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나,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행동양식은 절대적으로 성격에서 기인한다. 어떤 성품이냐에 따라서 그의 행동과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 곁에 두고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을 고를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세간의 평가에 의존하지 말고, 그대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증거들을 분별하여 그의 인격을 판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35쪽)

그래도 어찌 생각하면, 이 시대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기준이나 잣대로 사용했던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평생을 관통하는 행동양식은 절대적으로 성격에서 기인한다고 했던 것을 보면,

열린 가치관의 소유자라고 해야 하겠지만,

게다가 내 곁에 두고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을 고를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세간의 평가에 의존하지 말고,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증거들을 분별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충고를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암튼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가치관이랄까 기준은 변하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것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사귀지 말아야 할' 범주에 집어넣는다는 말 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선입견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가치관이나 기준을 들이대기 전에 먼저,

내가 마음을 열었는지,

편견과 선입견에선 탈피했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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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03-16 18:33   좋아요 0 | URL
그 시기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사는 문제를 두고 고민이 많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문제는 자주 우리를 고민스럽게 해요, 아는데도 잘 되진 않아 처럼 어딘가에서 걸리는 부분도 있을 때 없지 않구요,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님 즐거운 하루 되세요^^

sslmo 2015-03-17 18:01   좋아요 0 | URL
저는 좀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어요, ㅋ~.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내 마음이 천국이어야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는여유가 생긴다,
이러면서요~^^

그렇게 살아도 우리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어긋나거나 비껴가지 않을거예요.
그렇게 하루하루 제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요.
(실은 저도 완전 안달루시아 과 였거든요~`속닥`)

cyrus 2015-03-16 20:10   좋아요 0 | URL
테오플라스토스는 처음 들어보는 철학자입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처세술을 제안한 최초의 학자일 것 같습니다.

sslmo 2015-03-17 18:03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듣는데,
이분이 그러니까 식물의 성분을 밝혀내고 분류체계를 만들고 그런 쪽으로의 업적이 좀 있는 것 같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5-03-16 21:36   좋아요 0 | URL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해줄 것
완전 동감~^^ 나두 이책 봤는데 도덕적 인간 유형이라는 부분에서 반항기가 몰려와서 패수~~~~♡♡

sslmo 2015-03-17 18:04   좋아요 0 | URL
책만 패쓰하지 말고, 일도 대충 패쓰하고,
얼굴 좀 보여주시지~~~~?
 

책을 읽는데 어떤 특별한 규칙은 없다.

책 한권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다주는데,

예를 들자면, '왕의 한의학'에서 비롯되어 '왕의 밥상'으로,

거기서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박시백의 '만화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의 '세종편', '신병주'의 '조선평전'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서 읽으면서 든 생각은, 

역사 책이라는 것은 너무 읽기 어렵고,

역사 책을 읽으면서 나름 소신이나 가치관을 갖는 것은 더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역사적 자료와 유물, 실록 등은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쓰여진 것들을 근거로 했을테니까,

진위여부를 떠나서 역사에 대해서 개인적인 사관이라는게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니,

한가지 관점에서 기록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하나의 사건이나 사안을 두고서,

오늘날에는 책마다 약간씩, 혹은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한걸 보니,

다시말해 개인적인 사관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아가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편향되지 않고 '중도','중용','中'을 지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08년 2월

 

 조선평전
 신병주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4월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의문이 들었던 사람은 '세종'이었는데,

어느 책에서고 그는 성군으로 분류되고 있어서 였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고 '성인'의 기준이 달라졌지만,

그리하여 그처럼 젊은 시절 부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잘 받들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세종에 관해 이렇게 궁금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자료와 유물, 실록 등에서 그에 관한 것이 많이 남아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세종의 경우에도 이런저런 궁금증들이 생기는걸 보면,

다른 왕들의 경우엔 자료가 그나마도 없는 것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세종의 경우, 무엇보다 궁금하였던건,

그의 식습관과 관련하여 육식을 좋아하여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않았다는 말과 관련해서였다.

왜냐하면, 무신이었고,

무신과 결탁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 사냥 등을 즐겼던 다른 왕들과는 달리,

책만 읽었다던 세종의 성향으로 미루어 고기를 좋아 했다는게 설득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조선평전에도 보게 되면,

고려시대에도 삼국시대를 이어 소가 운반용, 농사용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가 이념으로 채택된 불교의 영향으로 가축살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 하다.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궁이 고려의 풍속을 기록한 『고려도경』은 "그 정치가 심히 어질고 불교를 좋아하여 살생을 경계했다. 고로 국왕이나 높은 신하가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한 도살하는 방법도 능숙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소의 식용이 일부 이뤄지기는 했으나, 농사를 짓는 대표적인 가축이었기 때문에 식용을 위한 소의 양육은 매우 제한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겉으로는 고려와의 단절을 위해 억불 정책을 썼던 그가,

기실은 불교와 무속신앙에 심취했었다는데,

그리하여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학질에 걸렸을때,

학을 떼기위해 그가 종종 사라져 행했다던 방법은 다분히 불교적이고 무속신앙적이다.

나중에 원경왕후를 모실 탑 문제로 아버지인 태종과 마찰이 있었다는걸 보면,

농사를 짓는 대표적인 가축인 소를 식용을 위해서 일부러 살생을 했을 것 같지도 않다.

 

 

위 내용은 '한권으로 읽는 세종실록'에 나오는 내용인데 세종이 스무 살을 갓 넘겼을 때란다.

'주역'으로 점을 치는 것은 유교적으로, 다시말해 학문적으로 접근해야할 문제인데,

나이 스물을 갓 넘긴 세종이 주역에 정통했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깊고 넓었을지 궁금했다.

 

그동안 세종이 유교적 정통성과 사고 방식에 입각한 인물처럼 비춰졌지만,

어머니 원경왕후의 병환을 두고 불교적이고 무속신앙적인 기원을 드린 것과 관련하여,

인간적인 면모라고 하는데,

백번, 천번 양보하여 상왕 태상왕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고,

유교에 입각한 효의 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걸 두고 인간적이라고 한 것과 관련하여서도,

무고한 장인이 목숨을 잃고,처가가 쑥대밭이 되는데도 함구하고 있었고,

나중에 그의 힘으로 복권을 할 수 있었을 때에도 그냥 넘어간 것은,

인간적인게 아니라 비겁하게 비춰져서 말이다.

 

아래 내용은 '한권으로 읽는 세종실록'에 '세종1년'의 일로 표시되는데,

당시 가뭄이 심했으므로 백방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심지어 도롱뇽에게까지 기우제를 지냈으며, 호랑이를 잡아다가 그 머리를 개성의 박연폭포에 담그는 행사도 있었다고 하였는데,

반면 승려들의 기우제는 반대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말이다.

"숱한 사람들이 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한 것을 7명의 중으로 되겠는가? 사정이 딱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으로부터 믿음이 생기지 않는 행동이다."라며 유학에 심취했던 세종은 이렇게 불교적인 기우제는 거부감을 표시했다고 되어있다.(163쪽)

이쯤되면 인간적인게 아니라, 일관성이 없고도 남음이 있지만,

실록이 왕의 사후에 쓰이는 것이니,

둘 중 하나는 희망사항을 기록한 것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암튼 세종을 인간적이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학자로서의 성과나 연구 업적 또한 추앙받아 마땅하겠지만,

왕과 태상왕이 건재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폐위된 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면모로 봤을때는 '글쎄올시다~(,.)'이다.

왕권국가라 할지라도, 왕이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대로 정치를 하는 독재국가는 아니고,

추구하는 목표와 이상향이라는 것이 있을텐데,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일관성이나 공정성, 결단력이라는 면에서 봤을때는 많이 아쉬웠다.

매관매직이나 뇌물을 받고 쫒겨났던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들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의견이 다를때 의견을 수렴하여,

심지어 농부들의 의견까지 수렴하여 듣고 중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도 알고 있었는데,

이것 또한 나이 서른 이전이고,

서른이 넘은 뒤부터는 주장이 강해져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거의 대신들의 의지를 꺾어놓았다(224쪽)고 한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얘기할때 생각나는게 '中'이다.

근데,유교에서 말하는 중(中)의 본래적 의미는 희노애락의 未發,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심불생(一心不生)과 다르지 않다.

 

다름을 주장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근본이 같다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다.

인간의 근본 심성인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그자리는 유교로 말하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이고, 불교로 말하면 무심(無心)이다.

미발과 무심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세종이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으로 불리우는 성군이라는걸 이해할 수 있는데,

세종도 성군이기 이전에 그러고보면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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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11 20:17   좋아요 2 | URL
저는 박시백님 책보구 좀 놀랐어요
세종대왕이 원나라에 공녀로 팔려가는데도 어쩔수 없다는 표현과 백성들은 허덕이는데 통통한 임금의 풍채 그리고 도적들이 많았다는 배경 때문에요 유유부단한 성격도 놀랍고 말씀처럼 역사에 관한 소신을 갖기엔 한 권의 책은 위험하구요... 깊은 공감을 해봅니다

sslmo 2015-03-16 18:13   좋아요 1 | URL
이렇게 나누는게 좋아서,
나눔을 통하여 고민이 나혼자만의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게 좋고,
위안이 되어서 알라딘서재에 글을 쓰게 됩니다.

단발머리 2015-03-12 11:50   좋아요 2 | URL
양철나무꾼님의 페이퍼 읽고 보니, 100번 양보해도 양보 못 했던 세종대왕=성군에 대한 믿음이 조금 흔들리네요.
저도 박시백님 책 보았는데, 위에 해피북님이 말씀하신거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저는 조선사 전반에 대한 박시백님의 평가를 좋게 보는데, 기존의 해석에서 조금 다른 부분을 주장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자료를 근거로 하시는 게 신뢰가 되더라구요. 박영규님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틀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던 것 같구요.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sslmo 2015-03-16 18:17   좋아요 1 | URL
전 박영규님의 해석은 재밌기는 했는데,
글쎄요, 뭐랄까~
왜곡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밌게 써서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한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정사와 야사의 구분이 모호했다고 할까요?^^
 
왕의 밥상 - 밥상으로 본 조선왕조사
함규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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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으로 흔히들 부자라고 하루 다섯 끼 먹을 수는 없다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비교하는 기준이나 단서가 명확하지 않으니 잘못된 말이 되시겠다.

부의 척도로야 하루 다섯끼 아니라 열끼도 먹을 수 있었을,

조선시대 왕들이 하루에 다섯끼를 먹었던 것은 수라상의 식재료를 살피는 과정을 통하여 나라살림과 백성들의 고뇌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요즘도 농촌이나 공사장 등의 일터에서는 새참을 사이에 두번 더하여 다섯끼를 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걸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봐야지 부자여서 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부자라고 하루 다섯 끼 먹을 수는 없다'는 이 말 앞에, 특정 연령대를 기준이나 단서로 달아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와 남이 다를게 없다는 그럴듯한 얘기가 된다, 앗싸~!

'부자라고 하루 다섯 끼 먹을 수는 없다'는 연령대는 70대로 굳이 이름 붙이자면 부의 평준화쯤 될텐데,

이 연령대가 되면 일반적으로 하루 다섯 끼를 소화시킬 여력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연령대별 평준화를 나열해보면 이렇다.

40대는 미의 평준화.

소싯적 황금비율의 조각같은 몸매를 자랑했었더라도 지금은 나너 없는 이웃집 아줌 되시겠다.

50대에는 학력의 평준화.

두뇌가 비상하고 SKY대 출신이고 빽이 악어가죽이고 다 소용없다.

스마트 세대앞에선 컴맹, 넷맹에다가 인터넷 용어 미숙으로 소통불가이다.

60대는 정력의 평준화.

카사노바도 굴 대신 비아그라가 필요한 시기이다.

80대에는 병약하든 건강하든 다 그만그만하고,

90대에는 집에 있으나 무덤에 있으나 누워있기는 매한가지란다.

100세시대라지만 반짝반짝 빛나게 사는건 순간이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다.

이 책은 '왕의 밥상'-밥상으로 보는 조선왕조사-여서 표면적으로 '밥상'문화에 대해 다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저자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고, 피터싱어의 '죽음의 밥상'을 번역한 이력의 소유자라는 걸 감안할때,

'왕의 밥상'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윤리적 의미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쪽으로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읽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한권의 책 속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다루려 하다보니까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책의 맨뒤 참고문헌의 방대한 양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게 이 책의 장점이자 맹점이 될 수도 있을텐데,

이 책처럼 동서를 종횡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책을 또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의식동원(醫食同源)이라고 하더라도,

밥상머리에서 의학까지 언급하니까 자료가 방대해지게 마련이고, 아무래도 자료가 방대하면 표면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책의 서술에 어떤 규칙도 없는것도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다.

시대순으로 정렬해 나간게 아니고, 5장으로 나누어,

1장에서 왕의 식사장면을 재연했으며,

2장에서는 역대 왕별로 치세와 음식을 연계해 풀이한다.

3장에서는 밥상을 차리기 위해 있었던 제도와 관청, 요리사들과 음식들을 소개하고,

4ㆍ5장에선 이를 더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데,

왕위 계승 과정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도 아니고,

계속 반복하며 덧입히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본인이 쉬웠고, 쉽게 접근했다고 하여,

그것을 읽는 사람도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쉬운 글은 근거가 명확하여야 한다.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타당하여야 하는데,

한문단에서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에 논리적으로 모순이 생기면 글을 해석하기 힘들어 지고, 그러다보면 어렵지 않은 단어로 쓰여진 문장이라도 어려운 글이 되어버린다.

 

이런 사진(92쪽)의 경우 어찌보면 상당히 친절한듯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진만으로는 보시기와 쟁첩, 접시, 종지, 푼주, 합 크기의 차이를 짐작할 수조차 없다.

차라리 한데 어울려 찍는게 나았을 것 같다.

 

인간 세종이 개인적으로 좋아한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고기인데, 주로 소고기였을 것이다. 돼지고기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 거의 먹지 않았으며, 세종 때에는 제사 음식의 형식을 맞추기 위한 돼지를 특별히 중국에서 수입해 쓸 정도였다. 또 세종 12년(1430년)에는 세종의 소갈증을 달래는 藥食으로 흰색 장닭, 노란색 암꿩, 양고기를 올리겠다는 말에 "임금이 되어서 스스로를 그렇게 후하게 봉양할 수는 없다. 특히 양고기는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으니 공연한 일을 벌이지 마라"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51쪽)

위 문단에서 세종이 고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전후 사정을 살피면 설득력이 약하다.

태종이 "주상(세종)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ㆍㆍㆍㆍㆍㆍ"와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들지 못하시니"라고 한 것은,

태종이 사냥을 나가고 싶었는데 신하들이 못하게 하니 한소리였지 고기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없었으며,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들지 못하시니'따위의 말은 아무리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쉽게 할 수 있었던 말은 아닐터,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던 시절, '죽은 이를 위하여 생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교훈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백번 양보하여, 세종이 고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면,

재위 초기에 관을 짤 정도로 그렇게 병이 위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기의 경우, 소갈증이었기 때문에 소고기를 좋아했을것 같지만,

저 위의 문장에선 타당한 근거가 없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당시 조선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 거의 먹지 않았다고 했는데,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은게 아니라,

소는 밭을 갈고 개는 집을 지키지만,

돼지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한다는 인식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아무래도 식량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기에,

돼지를 키울 여력이 없었고,

때문에 돼지고기를 잘 안 먹게 되었다고 해야 이해될 수 있겠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사적인 밥상이 되었지만, 적어도 전기에는 굳이 그런 불편한 방식으로 진어했던 까닭은 왕의 식사가 한 개인의 사적인 활동이라기 보다는 공적이고 엄숙한 행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ㆍ왕의 식사는 한 개인에게는 단순한 끼니 때움이지만, 온 백성들에게는 나라와 조정이 계속해서 운영되어감을 의미했다. 온 백성의 정성으로 마련한 먹을거리를 왕이 듬뿍 섭취하고 한껏 힘을 내서 영명한 정사를 베푸는 것, 그것은 해와 달의 운행과 같은 중대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30쪽)

그 사람이 먹는 걸로 미루어 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왕에게 적용될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먹는 것조차 맘대로 못하는 왕이라 비춰질수도 있지만,

밥상을 통하여 나라 살림과 백성들의 고뇌를 파악하는 어진 왕이었을 수도 있고,

편식에 탐식을 밥 먹듯 한 왕은 아니나 다를까 폭군이었다.

신하들의 분쟁을 잠재우고 자신앞에 무릎을 꿇리기 위해,

감선과 철선, 감선을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영조 같은 왕도 있었다.

다시말해, 영조는 밥상을 통하여 나라 살림과 백성의 고뇌를 읽으려한 왕이라기보다는,

자기마음대로 신하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자기관리를 했던 왕이었다.

 

하지만, 이걸 부정적으로만 보겠다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사관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어서 신선했다.

예를 들어,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은 자식도 너무 똑똑한 행동을 보이면 표적이 될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ㆍ하지만 그처럼 어릴 때부터 유교적 소양을 주입받지 않은 결과, 새로운 문물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되기도 했다.(162쪽)

하는걸 보면 말이다.

 

어찌되었건 우리나라 왕의 '밥상'은 음식이 되었건 약이 되었건 간에 음양오행을 중심으로 얘기되어진다.

음양은 바꾸어 말하면 자연이다.

세상 모든 것은 둘로 나누어 구분할 수가 있는데, 여기서 음과 양이 비롯된다는 견해다.

음도 더 잘게 둘로 나누어, 더한 음과 덜한 음으로 얘기하고,

양도 더한 양과 덜한 양으로 얘기하며,

어느 쪽으로도 치우쳤다고 하기 어려운 중간도 얘기한다.

상생, 상극, 상충을 얘기하기도 하며,

그러다가 '결국 어느정도 '적당하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260쪽)''중간'처럼 얘기하는데,

음양오행과 음양화합을 확실하게 이룬다는 뜻을 설명하는데 섣부른 감이 있다.

 

이 책에서는 영조, 고종, 숙종 등을 예로 들며 '적당한 스트레스'를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는 장수의 비결로 꼽고 있다.

책의 맺음말 '밥상의 도'에선 '밥상의 윤리'에 대해서 얘기하며,

로컬 푸드, 신토불이,공정무역 등으로 개념을 확산시킨다.

그러면서 음식 윤리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식사 방침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난 개인적으로 MSG가 왕창 들어간 인스턴트 식품이더라도 명확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좋다.

참고 절제하고 아무거나 되는대로 먹겠다는 식의,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니맛도 내맛도 아닌 사람은 영 아니올시다 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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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3-04 16:35   좋아요 0 | URL
저는 좋은 글을 ˝~때문에˝와 ˝그러나˝를 잘썼을 때 빛을 발한다고 봅니다. 때문에와 그러나는 논증적 진술이라 자칫 모순과 반격을 부르기 십상이라서 말이죠. 이런 문장을 적재적소에 쓸 정도가 되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명문이 되더군요!
장문이라도 계속 정리식의 문장 또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시적 문장을 좋아하는 제 취향도 문제가 많지만 말이죠^^;;

sslmo 2015-03-04 20:37   좋아요 1 | URL
저는 좋은 글은 잘 모르겠고 읽기 쉬운 글이 좋아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저도 그렇게 글을 써야 겠다고 생각하고 문법이나 맞춤법따위와 상관없이 호흡을 고려하여 문장을 끊어쓰게 되더라구요.
암튼 그럴더라구요~^^

역쉬~, 시적 문장을 좋아하셔서 운율과 대구가 예술이었군요~^^

cyrus 2015-03-04 17:47   좋아요 1 | URL
볼 만한 자료가 가득한 역사책이라도 내용 정리가 산만하거나 독자가 저자의 글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역사를 더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sslmo 2015-03-04 20:43   좋아요 1 | URL
그런 방대한 자료를 한데 모아놓은 것만으로도 특기할 일이지만,
기준이 모호한 채로 마구 쓸어담다 보니까 만성체증으로 소화불량에 걸릴것 같았어요, 헤에~^______^

쉽싸리 2015-03-05 09:27   좋아요 0 | URL
아, 찌게!
대관절 왕의 밥상을 알아서 뭐하겠다고. 조선시대 왕들이 반찬 종류와 가짓수에서 백성들을 긍휼히 여겼다는 식의 주장은 터무니 없다고 봅니다.
괜히 딴지..

sslmo 2015-03-09 09:41   좋아요 1 | URL
전 얼큰한 찌개도 좋고, 맑은 지리도 좋다는~^^
저도 조선시대 왕들의 반찬종류와 가짓수가 백성들을 궁휼히 여긴거란 생각은 안해요.
다만, 왕만의 파업방식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왜 저희들도 맘에 안 들면 단식투쟁으로 동참 하는 것처럼이요.
그러나 저는 먹는걸 좋아해서, 절대 단식 같은건 엄감생심이라는~--;

만병통치약 2015-03-07 20:38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읽고 나서 ˝사슴꼬리 요리˝먹으러 갈 회원을 모집중입니다. ㅋㅋ 생각있으세요?

sslmo 2015-03-09 09:43   좋아요 0 | URL
만병통치약님이 사슴꼬리요리 먹으러 가기 협회 회장하시는 건가요?
생각뿐이겠습니까? 황공무지로소이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