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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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난 나름대로의 결여와 결핍을 가지고 있고, 그건 때때로 탐욕과 허영으로 표출된다.

 

소싯적 지방 대학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한 시간 강의를 하고 나면,

내 안에서 나를 이루는 것들이 빠져나가고 쭉정이만 남은 듯 허허로워져서,

아무 책이나 펼쳐들고 들이파는 것으로 충족시키려 하였다.

('백조의 비애'<==페이퍼 링크)

강의를 한 학기만에 접은 걸 보면 명약관화하지만, 난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깜냥이 아니었던 셈이다.

 

왠지 '스토아 학파'를 연상시키는 것이 학구적인 냄새가 폴폴 풍기는 이 책 '스토너'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라는 팟 캐스트 방송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읽는 내내 소싯적의 내가 떠올라 아프게 읽었으면서도, 감정 이입을 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작가가 주인공 스토너를 애정한 나머지, 너무 깊게 개입하고 관여 했기 때문이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회자되는건, 이동진의 '빨간 책방'의 성은이지 싶기도 하다.

 

학문에 대한 열정을 두드러지게 하고 싶어서 였겠지만,

스토너의 지난한 삶을 일부분 부모에게, 많은 부분 아내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게 객관적이라기보단 스토너의 개인적인 입장처럼 비춰졌고, 때문에 읽는 내내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관계란 상호적인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한참 전이라고 해도,

아내가 예민하다 못해 히스테릭하게 된 것은 일정 부분 스토너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긴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자기 합리화 시키는 경향이 있고,

나도 그런 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야박하게 툴툴거린다.

 

암튼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겹쳐져서 썩 맘에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워할 수는 없었던 것은,

고지식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인물은 아니었고,

말을 아끼고 표현에 인색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여전히 안락의자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짧게 미소를 지은 뒤 이디스의 작업대로 가서 등받이가 곧은 의자를 가져와 그레이스의 의자 앞에 놓았다.

위를 향해 치켜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338쪽)

 

두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스토너는 그레이스가 직접 말했던처럼 절망을 거의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351쪽)

 

암튼 나의 결여와 결핍을 책을 통하여 보상 받으려 했었다.

그게 과해 탐욕과 허영으로 표풀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

 

친구들이 유머러스한 사람이나 쿨한 사람, 내지는 나쁜 남자 따위가 좋다고 할때,

난 배울 게 있는 사람,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사람이 좋았었다.

 

그 '배울 것'이란걸 학문에 있어서의 지식이나 진리 정도로 축소시켜 생각했었고,

체화하여 자기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할 경우 어설프다고 여기기는 커녕,

책을 꾸준히 많이 읽기만 한다면, 부족한 부분을 쉽게 찾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융통성 없음을 학문이나 진리를 향해 올곧음이라고 착각하고 매력적이라며 껌벅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제...나이를 한살 한살 먹으면서 느끼는 것은,

책을 많이 읽어 간접 경험을 했을지라도,

체화하여 삶에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어설프게 쌓아올린 사상누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의 지식도, 진리도, 책 속에 있는 것은 맞지만,

읽고 적용시키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체화하고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그저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살아있는 생물이어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튈지 알 수 없다.

책 속에 답이 있다고 하여, 책 속에 있는 그대로 전개되고 되풀이 되지는 않는다.

 

스토너는 그런 깨달음의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252쪽)

 

마음만 먹으면 몸에서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묘하게 친숙한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하는 묘하게 친숙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254쪽)

 

생소하게 다가왔던 부분도 있는데,

그해 여름에 두 사람이 배운, 이른바 '기존 관념'의 기이한 점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체험이 먼저 찾아왔으므로, 이 새로운 발견이 오로지 두 사람만의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이처럼 '기존 관념'이 기이하게 달라진 사례들을 모아 보물처럼 간직해두기 시작했다. (280쪽)

라고 하는 부분이었다.

나 또한,

하나를 얻기 위해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만 여겼었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하고 보완시켜 주는 것으로 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이 부분을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찾아온 체험'이라며 근사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되었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주는 게 되었건 간에,

따로 떼어내고 분리할 수 있을때 성립되는 얘기이지,

몸과 마음처럼,

아니 몸과 마음과 정신처럼 경계를 나눌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에선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이다.

 

스토너의 경우,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처 슬론 교수와의 만남 또한 그렇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아처 슬론 교수를 닮고 싶어 한다.

아니, 은연 중에 닮아 간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고 생각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학창시절 아처 슬론 교수의 질문을 죽음의 순간까지 기억하는 것도 그렇다.

이 부분의 '기대'는 '갈구'정도로 바꿔주는게 어떨까 싶다.

비슷한 의미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저 바라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바라고 행동으로 옮기고 꾸준히 구했으니 말이다.

 

읽으면서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려는걸 참았는데, 결국 끝부분에 가서 폭풍오열하고 말았다.

그의 삶이 불행했을까, 행복했을까?

자신이 갈구하고 원하던 대로 살았으니, 그만 하면 된게 아닐까?

누구나 조금쯤은 외롭고 때때론 쓸쓸한 삶을 살게 마련이니 말이다.

 

또한 난 스토너의 이런 삶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겐 관조적으로 읽히기도 하나 보다.

 

지극히 지루하고 고루한 그래서 심심하기도 한 이 책이 이렇게 아름답게 읽힐 수도 있는 것은,

그의 여정이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두움 속에서 진리라는 한 줄기 빛이기도 하고 별이기도 한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이어서가 아닐까?

 

"학자에게 평생 구축하고자 했던 것을 파괴하라고 해서는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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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8-05 15:44   좋아요 1 | URL
양찰나무꾼님 오늘도 너무 더워요.
더위조심하시고, 시원한 금요일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6-08-06 11:06   좋아요 2 | URL
오늘도 엄청 더울 것 같아요.
더울려면 화끈하게 더웠으면 좋겠어요.
그게 여름의 매력이니까 말예요, ㅋ~.
(말은 이렇게 하지만, 벌써 삐질삐질 땀 흘리고 있는~--;)
 
은하계 최초 잡놈 김어준 평전
김용민 지음, 고성미 사진 / 인터하우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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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이 쓴 '김어준 평전'은 이렇게 끝난다.

 

김어준 평전에서 '세상을 변혁할 기제로써 과연 나꼼수 시즌 2가 나올 것인가'라는 의문을 찾고자 하는 분들이 적잖을 것 같다.(야권 패배의 원흉으로서 이젠 박물관에나 가야 한다는 차원에ㅓ 나꼼수를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대답에 앞서, 나꼼수든 누구든 한국 야당에 염치는 고사하고 의리라도 회복돼야 뭘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의리는 간단하다. 기쁠 때 같이 기뻐하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하는 공감이다. 어느 정파, 어떤 정치인의 승리 그 이전에 추구해야 할, 인간다움이다.(354쪽)

 

언제였던가?

김어준을 양동근의 연장선에서 좋다고 하여,

좀 더 정확하게는 '네멋대로 해라'의 '고복수'역할을 한 양동근의 연장선에서 좋다고 하여,

남편의 질타를 면치 못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런 페이퍼를 올렸었다.==>링크)

요즘 한명이 더 늘었는데, 기안84 되시겠다.

며칠전 '나혼자산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기안84를 보고는,

두눈이 하트 눈으로 바뀌고, 두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좋아도 너무 좋은데 왜 좋은지 모르겠다."고 읊조렸더니,

우리 남편 曰,

"모르긴 뭘 모르냐?

 저 넘도 봐라, 완전 니가 좋다던 양동근 과다.

 넌 참 취향도 소박하다아~."

하는데 그 말이 맞는것도 같아서 닥치고 OTL이었을 따름이고~--;

 

내가 아무리 하트눈에서 레이저 빔을 쏘아 가면서 좋다고 설레발을 치더라도,

남편이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은, 남편과는 정반대의 외모와 성격인지라 가당키나 하냐는 심사인가보다.

대학 신입생 때 만나 6년 연애 후에 결혼을 했으니, 햇수로 27년,

아직도 그대(=남편)는 내 사랑이라고 생각하리라고 착각을 하나본데,

사랑도 변하지만, 취향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자유분망해진다.

 

 

이 책을 쓴 사람 '김용민'도 그랬지만,

'은하계 최초 잡놈 김어준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게다가 머릿말 중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이지 말지어다.(10쪽)' 라는 문구에서 느껴지는 감으로,

처음부터 이 책을 평전으로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그간 내가 '네멋대로 해라' '전경'의 남자, 고복수를 대하던, 양동근과 기안 84에 홀릭하던 그 팬심을 발휘할 요량으로 읽었다.

 

그리고 다 읽은 지금,

이 책이 지극히 가벼운 문체여서,

내가 팬심을 발휘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책이란 것의 문턱을 낮춰준 것에 대해 무한 땡큐를 날리고 싶다.

 

위인 전기라는 것은, 자서전이 되었든 평전이 되었든지 간에,

평을 하는게 자신이냐 타인이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평'을 할 거리가 있어야 한다.

평할 것이 있다는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탐구할 것이 있다는 얘기쯤 되겠다.

 

이 책의 저자 김용민은 사석에서 김어준을 '형'이라고 부른다고 밝히고 들어가니,

그가 평하고 탐구하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들어가는 부분을 인지할 필요가 있겠다.

김용민이 아니고 이 책이 아닌 경우라도,

자기 자신이 지극히 객관적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쪽으로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치우치게 마련이지, 완전 공정한 것은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지만 의미가 있다 싶었던 부분은,

그의 유니크한 행동들이 아니라(그의 자유분망함이야 내겐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자본사회와 흉한 권력의 문제점들을 예견했었던 그를,

평전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김어준이 어떤 인간이기에 이런 통찰이 가능했는지를 짚어보려고 했다는 점이다.

 

내가 이 책이 좋다고 설레발치는 것은,

'정형화된 엘리트 교육과 무관했다'는 평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식을 받아들이는 제도권 교육이라는 것만으로는 습득이 불가능한,

배낭여행을 통해 트인 식견이라고 할 수 있는-몸으로 느낀 체험을 강조하고 있고,

아울러 김어준이라는 개인뿐만 아니라, 김어준이라는 개인을 만든 환경과 구조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바꾸어,

전기라는 것은,자서전이 되었건 평전이 되었건 간에,

예능적인 코드로만 읽을 순 없는데,

오늘날의 그를 만든건 부모님, 그 중에서도 어머니 였다는 게 내겐 귀중한 깨달음이었다.

나도 김어준의 엄마처럼 자유방임의 형태로 아들을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런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독력을 높이려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겠지만 너무 가볍게 흘러가는 감이 있고,

다른 매체에서 한번 정도 언급되었던 내용들이라,

그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이라면,

그를 모르거나 싫어하는 이들이라도 우리의 앞날에 조금만 관심을 갖는 이들이라면,

계속 고민해왔던 문제들이라 새로울 게 없을 수도 있겠다.

 

또한 인터넷에서 입말을 통하여 세과 지지 기반을 구축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김용민과 김어준 정도 되는 사람들이 오탈자가 있는 문장을 구사한다는 것은,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으니 생각해볼 여지가 있겠다.

 

호환마마다 더 무섭다고==>호환마마다 더 무섭다고(33쪽)

 

61쪽의, 최내현 논설우원같은 경우 언어유희인지 아님 오타인지 햇갈렸다.

 

위 사진의 빨간 밑줄을 그은 단어도,

저렇게 대소문자가 섞였을때가 아니라,

전부 대문자로 'KIN'이라고 적혔을때 '즐'이라는 의미가 된다.

 

더 적어보려다가 무의미한 것 같아서 접는다.

 

무게 잡지 않았고,

그래서 읽는 내내 가볍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이 책을 읽은 느낌마저 가볍진 않다.

 

다른 자서전이나 평전을 읽는 목적이 '위인들을 본받고 닮아야겠다' 라면,

이 책은 '김어준을 닮아야겠다'가 아니라,

'누구도 닮지 않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너를 만들라' 란다.

 

나는 이제 힘들 것 같고,

김어준 어머니처럼 아들을 향하여 라도 자유방임을 구사하여야 할텐데,

다 큰 아들이 이제와서 엄마에 의해 좌지우지되지도 않겠지만,

상상 속에서라도 방목하려니까,

경계가 있지도 않은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이 앞선다~--;

 

책 뒷표지의,

멋대로 살자. 그래도 안 죽는다. 김어준 봐라.

를 보면서 '푸헤헤~'거리며 웃어 보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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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7-28 10:26   좋아요 1 | URL
고등학교 진학부터 엄마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고 튀어나가려는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면서.. ^^

양철나무꾼 2016-08-05 15:11   좋아요 1 | URL
ㅋㅋㅋ~.
울아들은 고딩때부터가 아니라, 엄마 뱃속에 있을때부터 튀어나갈려고 했었음, ㅋ~.
 
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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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足履之適也  忘要帶之適也 知忘是非心之適也

                                            -장자, 달생편-

 

 

이 책은  몇 년전 알라딘 서재의 어떤 미모로우신 분이 선물해 주신 책인데,(==>링크)

한동안 잊고 지내다보니,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려 다시 구입하게 되었다.

'자살의 전설'을 보는 동안 내내 떠올라서 내처 읽게 되었는데,

언젠가 읽었던 '페터 회'의 소설들도 생각나는 것이, 역시나 좋았다.

 

이 책의 뒷표를 보면 '죽음과 고통 뿐만 아니라 행복과 '삶의 즐거움'을 아우르는 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렇게 긍정적인 소설은 아닌 것 같고,

삶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는 죽음과 고통을, 너무 슬퍼서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켜 그려내려 한게 아닌가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감정으로 복잡했다.

책 제목이 왜 '이탈리아 구두'일까를 놓고 여러가지 추측을 했었다.

책의 중간 쯤에,

장자라는 사람이 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164쪽)

라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책에서 신발 만드는 장인으로 나오는 '자코넬리'가 이탈리아 로마 출신이라고 한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으로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친구가,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신발을 보면 그 신발의 주인을 정확하게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며,

대단한 것처럼 설레발을 치길래,

나도 그럴 수 있다며 일축한 적이 있었다.

 

난 사람의 필체를 가지고 판단의 준거로 삼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내게 또 한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게, 그 사람이 신은 신발이다.

 

단지 신발은 필체보다는 덜 정확하게 여겨지는데,

그 이유가 신발을 처음 사서 신었을 경우엔, 많은 것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되고,

신발을 선물하는 경우는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랬을 경우 그 사람의 개성이나 습관이 신발에 바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중국의 전족이나 마당발 같은 단어를 봐도 그렇고,

신발이 사람의 개성이나 습관, 성향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만도 없다.

 

신발이 편하면 신발을 신고 있는 발이 편해서 신발을 신었는지 벗었는지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고,

허리띠도 마찬가지로 편하면 허리에 띠를 했는지 안 했는지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살이의 어려움이나, 관계의 허허로움 따위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전제를 하게 되는데,

'아버지가 지금 신은 구두는 발에 대한 모독이에요.' 라는 구절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나는 이 신발을 신을 자격이 있는가, 나는 이 허리띠를 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를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신발에, 허리띠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게 될때, 우리는 자유로워 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책에서 주인공은  어떤 일을 겪고 스스로를 유폐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건 하나의 구실일뿐 주인공은 그 이전부터 홀로 외롭게 살아간 사람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는 그는,

'추우면 외로움도 깊어진다.(7쪽)'고 하는데,

그의 그것은  들어줄 대상이 없는 독백이라서 한층 춥고 외롭게 여겨진다.

 

창문마다 서로 다른 프로그램에서 내보내는 누더기 소음이 이따금 들려왔다. 외로움이란 사람들이 같은 방송을 시청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세대나 가족은 저녁마다 각각 다른 위성이 보내는 서로 다른 세계에 몰두한다.(111쪽)

그는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 방송을 시청하기 위하여 택한 것은 자기 자신으로,

공감과 소통을 거부하고 단절을 택한 건, 다른 방송 프로그램을 택한 본인의 의지이기도 한 셈이다. 

 

나는 배신당할까봐 두려워 내가 먼저 배신했다. 얽매이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감정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종류의 두려움을 가진 남자들이 많았다.(331쪽)

책 뒷표지에서도 이구절을 만났는데,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당신 여전히 몰래 엿들어?"

하리에트가 물었다.

"섬에는 엿들을 대화가 없어."

"내가 전화를 할 때면 당신은 언제나 엿들었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책이나 신문을 넘기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렇게 행동하며 안 듣는 척 하려고 했지. 기억나?"

화가 났지만 그녀 말이 옳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안하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이래로 나는 언제나 사람들의 말을 엿들었다. 닫힌 문에 기대서서 동료나 환자들의 대화를 엿들었고, 카페나 기차에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대화들 대부분이 거의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사소한 거짓말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원래 그런 건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허위적인 이탈이 반드시 필요한 걸까?(131쪽)

이 구절을 본 후에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연히 듣게 된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안하게 속삭이는 소리'란 것이 '그가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면,

그 후로 그가 엿듣는 버릇을 갖게 된 것을,

자신이 버림 받지 않기 위하여 먼저 상대방을 버리는,

배신당할까봐 두려워 먼저 배신하는, 그 상황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다 읽고나서,

주인공을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는,

버림 받을까봐 두려워 상대방을 먼저 버리고, 배신 당할까봐 두려워 먼저 배신했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정하고 스스로 유폐시키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얼음장에 구멍을 뜷고 들어가며,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얼음 구멍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105쪽)'고 하지만,

이것 외의 방법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이 그렇게 무덤덤하게 살아간다는 얘기도 된다.

 

남의 얘기가 아닌 바로 내 얘기를 하고 있는 듯 여겨져, 이 책을 읽는 내내 쓰리고 아팠다.

그런데 내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바로 그'  느낌 때문에 남들이 간과했을지도 모르는 것도 깨달았다.

"사람들은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는 말의 이면에 있는,

편안 신발을 신을 수 있는 발, 편한 허리 띠를 맬 수 있는 허리 따위와 더불어,

상대방이 나에게 맞는 편안함 만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나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편안한 존재인가 돌이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ㆍㆍㆍㆍㆍㆍ도시에서는 이제 더 이상 별을 볼 수 없잖아요. 난 그래서 여기 살아요. 도시에서 살 때는 어둠과 적막함이 그리웠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별빛이 보고 싶었지요. 무한히 이용할 수 있는 환상적인 자연자원이 이렇게 있다는 생각은 왜 아무도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적막함을 숲이나 광석처럼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150쪽)

 

"독특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어요. 하지만 늙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없지요. 우리는 노인들이 유리처럼 투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노인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하지요. 아버지도 점점 더 투명해질 거예요. 엄마는 이미 투명해졌고."

우리는 말없이 서 있었다.(151쪽)

그렇게 되면, 주인공 딸인 루이제의 이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어린왕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상한 부분도 있었다.

'혈압은 155에 90(9쪽)'이라면 하이퍼의 범주이지 '아무 이상도 없는'게 아니다.

 

군데군데 해석이 껄끄러워서 미루어 짐작해야 했던 구절들이 있었다.

헤닝만켈의 유려한 문장들을 만끽하려면 그가 쓰는 언어를 내가 구사하는게 제일 가까울텐데 싶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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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5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6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6-07-26 02:51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어보라는 권유를 저도 꽤 받았는데 아직 못 읽었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어요.
제목부터 괜히 쓸쓸한 느낌이 들어서. 제목에 구두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그럴까요.
˝그분˝은 지금 잘 지내고 계신지도 문득 궁금해지네요...

양철나무꾼 2016-07-26 09:50   좋아요 0 | URL
hnine님, 강추하고 싶은 책인 건 맞는데,
아버님이 기억날 수도 있으니 한참 후에 읽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동안의 쿠르드 발란더 시리즈와는 정서나 어조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 해요.

저도 그 분 가끔 궁금한데,
전엔 가끔 안부 페이퍼를 올리시더니, 이젠 바쁘신지 그것도 뜸하시더라구요~--;

날 더운데, 님도 잘 지내시죠?^^


마녀고양이 2016-07-26 14:32   좋아요 0 | URL
여전히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주는 사람˝을 그리워하는구나, 아하하, 나도 여전한데.

알라딘에서 유일하게 말을 놓은 동갑내기 친구인데,
지나치게 소홀하여 미안하오. ^^, 누군가에게 소속되고 싶은 마음과 자유롭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나는, 어릴 때의 간섭으로 인한 영향이 너무 강하여 친밀함의 거리 조절을 잘 못 해서.... ㅠ. 나 8월 2일까지 휴가야, 혹시 나는 시간이 있을까? (코알라도 데리고 나오라는 말은 하지 말고, 그 녀석 고딩이라서 나하고도 외출이 어렵당... ^^)

양철나무꾼 2016-07-27 18:28   좋아요 0 | URL
코알라도 없이 아줌마 둘이 만나서 뭐 하나? 심드렁~(,.)
코알라 많이 컸겠다.

내가 코알라 첨 봤을때가 5학년이었나 그랬지?^^
그런 코알라가 벌써 고딩이니 우리가 안 늙겠어?

난 토욜이나 일욜, 주말이 좋은데...ㅋ~.

마녀고양이 2016-07-28 10:22   좋아요 0 | URL
심드렁~~~ 쳇! ^^

2016-07-26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07-27 18:32   좋아요 1 | URL
저도 님 댓글보면 기분이 마구 좋아져요.
이 동네에 그런 사람들 몇 잇죠?
제겐 님도 그 중 한명이구요~^^

중복인데 치킨 드시려나 삼게탕 드시려나?
전 점심땐 삼계전복죽 먹었구요.
저녁엔 치킨을 먹어야죠.
전 대학1학년 때까지 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때 명륜동에 있는 KFC를 처음 갔었는데,
그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죠.

이젠 어느 브렌드를 먹어도 그만큼은 맛있어요, ㅋ~.
 
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독서를 통하여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되고, 그것을 간접경험이라고 한다지만,

어떤 책들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뛰어넘는 이렇다 할 것들이  없는데도,

그리하여 흔히 말하는 책을 읽는 묘미라고 할 만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내 가슴이 먹먹한데도,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책들이 있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줄어드는 책의 두께가 아쉽지만, 뒷장이 궁금해 손에서 내려놓을 순 없고,

내처 읽으려니 가슴이 멍든것 같기도 하고 체한 것 같기도 한 것이 먹먹해져와,

숨고르기를 하면서 그렇게 읽게 되는 책들 말이다.

 

이 책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으려나?

재밌다는 표현은 좀 그렇겠고,

좋다고 설레발 치는 것도 행여 누가 될까 싶어 조심스럽지만, 그동안 읽은 책 중에서 손가락 안에 꼽게 되는 책이다.

 

그냥 맹물 같이 아무 맛이 없는 소설이랄까.

평상시 맹물을 먹을 때 맛이 있어서 먹는게 아니지만,

갈증으로 목이 마르게 되면 같은 맹물도 꿀물처럼 달콤하게 여겨지듯,

아무맛도 아닌 '맛'을 지닌 소설이다.

 

그동안 자살에 대해서, 자살의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되게 비겁한 행동이라고만 여겼을 뿐,

그 (또는 그녀)를 자살로 몰아간 상황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할 정도로 깊이있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왜 아파요?

그냥 종양 때문이야. 제거해야 했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ㆍㆍㆍㆍㆍㆍ어쨌든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냥 쉽게 약해지고 슬프고 지치는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도저히 혼자 지낼 수가 없단다.

아버지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당연히 혼자는 아니지. 네가 있으니까. 그런데 나도 너무 외롭다.ㆍㆍㆍㆍㆍㆍ아버지 바로 옆에 있으면서 존재조차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로이는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135쪽)

 

책의 이 부분을 읽다가 ,

난 자신이 종양으로 죽게 될 걸 알고 미리 자살하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잠깐 했었는데,

뒷부분을 보게 되면, 로다라는 여자 생각을 들키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을 아들 로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작가 데이비드 밴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 3년간은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할 정도로,

아버지의 행위를 부끄럽고 추하다고 생각했다고 '작가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우리는 타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추측만 하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고,

자살도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것처럼 어떤 문제나 특별한 원인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단순히 우발적이고 즉흥적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며,

죽은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지만,

살아 남겨진 주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이가 아직 살아 있고 그래서 어디든 데려갈 수 있다면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 로이가 실제로 하고 싶다던 일이고 아버지한테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 정도라면 귀농만큼이나 쉽게 준비할 수 있다. 배를 살 돈도 있었고, 항해술도 익혔고, 시간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가능했다 해도 로이의 말에 귀부터 기울여야 했다.(203쪽)

 

책에서, 로이의 아버지는 이런 깨달음에 이른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조금만 주의깊게 생각해보면 작가 데이비드 밴의 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수콴 섬이란 단편 소설을 이렇게 끝 맺는 것으로,

작가 데이비드 밴은 하고 싶은 얘기를 대신한다.

 

"ㆍㆍㆍㆍㆍㆍ물에 빠졌을 때 정신이 들었다.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다. 제발 살려줘. 짐은 처크와 네드가 와서 구해주기를 바랐다. 목으로프는 쉽게 풀어냈지만, 옷을 입은 채라 그 무게에 자꾸 가라앉기만 했다. ㆍㆍㆍㆍㆍㆍ이곳이 물속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바다 아래로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한참을 발버둥 쳤건만 그 시간이 영겁인지, 불과 10분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전신의 감각이 사라졌다. 갑자기 피곤하다 싶더니 입속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ㆍㆍㆍㆍㆍㆍ마치 마지막 물이라도 되는 양 허겁지겁 들이켰다. 차고 딱딱하고 불필요한 물. 그리고 로이가 아버지를 사랑했음을 깨달달았다. 그 사랑으로 충분해야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깨달음이란 왜 이렇듯 늘 늦기만 한지. (262~263쪽)

 

 

그동안 읽은 다른 책들보다 문체가 수려한 것도 아니고, 어떤 깊은 깨달음을 준 것도 아닌데,

이 책이 그토록 좋았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적절한 표현이 생각 나지 않아서 망설여지는데, 이런게 아닐까 싶다.

작가 데이비드 밴은 글쓰기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치유를 경험했고,

독서라는 간접 체험을 통하여,

책을 읽은 사람들은 각자 취사 선택하여 나름대로 치유되는 걸 경험한달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취사 선택'을 사용했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이 구미에 맞게 선택을 하는 그런 선택은 아니고,

책을 읽게 되면 어느샌가 자기에게 적절한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맞춤 치유'라고 하겠다.

 

늘 그렇듯이, 책을 읽는 데 정석은 없는 것 같다.

해석이 분분할 수도 있고, 하나의 결말을 놓고도 각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작가 데이비드 밴이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이 치유를 경험했다고 해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감동과 치유를 경험하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인간 영역의 많은 부분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직 인간을 대신 할 수 없는 일정 부분이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마음이랑 연관된 외로움이나 쓸쓸함 등 감정의 영역 '공감'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가 몸이랑 연관된 '치유'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변해도 변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의 이영애를 향한 절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가 아니라, '사랑은 변하는 거다'쯤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

영화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변하는 사랑을 가지고 절규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 하지 못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한 눈을 팔았다면,

그게 직무유기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자, 는 깨달음은,

책을 읽는 사람만이 얻어 가질 수 있는 값지고 귀한 수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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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15 17:19   좋아요 1 | URL
간혹 별거없는데 굉장히 몰입되는 책이 있더군요..그런 책이 아니었을까요.
뭔가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심리적인 코드가 매치되는 그런 책말이죠^^..

양철나무꾼 2016-07-26 09:33   좋아요 1 | URL
데이비드 밴은, 그리고 그의 중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콴섬은,
아마 제 인생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별거 없는 그것이 `별거`인 소설이라 할까요~^^

암튼 그런 좋은 소설을 이제라도 읽게된, 제자신을 대견해하고 있습니다여~^^

서니데이 2016-07-15 18:17   좋아요 1 | URL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님 밖에 비가 오고 있어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6-07-26 09:39   좋아요 2 | URL
오늘은 후끈한 것이...비 예보는 없던데,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는 그런 하루가 될 것 같아요.
이열치열이라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 보다는, 이런 날씨 앗쌀하고 화끈한 것이 낫지 않아요?^^
하긴 까뮈의 이방인에서는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햇살 탓으로 돌리지만 말예요~--;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마주친 모나드
이광수.최희철 지음 / 알렙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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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라는 제목이나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마주친 모나드'라는 소제목이나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진'이라는 '찰나'의 시간의 물음에 대해 '철학'이라는 '삶'의 시간들로 답하다 라는 의미로 해석해 보려 하지만,

이 마저도 영 자신이 없어 쭈뼛거리는 고로, 이 책을 읽고난 후의 느낌은 한마디로 '어렵다' 정도가 되겠다.

 

그동안 나는,

소설가는 소설속에서, 음악가는 음악속에서, 미술가는 미술작품 속에서, 그리고 사진가는 사진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해당 분야의 작품들을 통하여 자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녹여내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에,

자신의 예술을 보게 되는 다른 사람 내지는 자신의 예술 영역 밖의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도 있고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으며,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도 그렇고, 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도 그렇고, 얼마든지 중의적인 표현이나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모든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만 얘기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예술가가 작품 외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야 본인의 자유의지겠지만 썩 좋게 보지 않았던 연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진가는 자신이 찍은 그 사진 행위와 그 결과물에 대해 말을 잘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 든다. 왜 이 사진을 찍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 사진을 찍었는지, 그때의 느낌은 어땠으며, 어떤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는지,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난 뒤의 느낌은 어떠한지, 사진을 보고 든 생각은 어떠한지, 다른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을 가질 것 같은지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냥 이미지만 보면서 좋네, 멋지네, 잘 찍었네, 하는 따위의 별 의미 없는 반응만 보일 뿐,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그것을 가지고 또 다른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더 넓은 삶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고, 이런 거 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7쪽)

 

때문에 이 책의 <들어가는 글>에서 '산다는 것, 본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사진 찍는 인문학자'이신 '이광수' 님이 제기하신 이 문제가 다소 의아했었다.

한참을 읽다가 책날개 안쪽에 적힌 프로필을 되짚어 읽은 후에야,

'사진 찍는 인문학자'가 아니라 '인도사를 전공한 교수이자 사진비평가'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한 나라의 역사를 공부를 공부하다가 사진이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사진을 이론부터 공부했으며 결국 사진비평가라는 직함을 얻은 '이광수' 님이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인식하게 되었다.

 

거칠게 얘기해보자면,

자신이 찍은 사진들의 기법이나 테크닉에 대해 얘기하는게 사진가의 몫이라면,

생각이나 느낌을 '얘기하는건' 겉으로 보기엔 '인문학'이나 '철학'의 몫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사진 찍는 인문학자'이신 이광수 님과 '철학하는 시인'인 최희철 님은 그런 의미에서 중첩된다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이광수 님이 '사진을 가지고 하는 인문학적 '이라고 하셨을 때에서야,

이론과 실제,지식과 경험, 거기에 생각과 느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렇지만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하는 시인'인 '최희철' 님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고 존중해야할 지향점으로 삼고 생각의 놀이를 같이 하고자 한게 참 멋지게 느껴졌다.

최희철 님은 철학하는 시인이시지만,

항해사인 경력이 있으신, 배 타는 일과 닭 잡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고,

녹색과 잡종의 세상을 지향하는,

삶 자체가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이다.

이광수 님은 최희철 님을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다고 하시는데,

난 이말이 어렵거나 현학적인척 하지 않는다 정도로 읽혀서 좋았다. 

 

개인적으론, 

사진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님의 글이 고차원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졌다면,

철학하는 시인 최희철님의 경우 철학적인 걸 시각적으로 형상화시켜서 알기 싶게 설명하려 노력하여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가령 길이가 다른 두 개의 선분이 있다고 해보자. 선분의 길이는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선분은 점들이 모여서 된 것이므로 한 개의 선분에는 길이와 상관없이 무한 개수의 점들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두 선분은 모두 '무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무한 중에 어느 게 더 큰 무한일까? 무한을 비교할 수가를 물은 것이다. 보통은 길이가 긴 선분의 무한이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두 무한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어느 무한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길이가 긴 선분의 무한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무한을 본 게 아니라 그 무한을 함유하고 있는 선분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본 것과 같다.(25쪽)

 

난 앞으로도 사진을 포함한 다른 예술 작품을 향하여서도,

좋네, 멋지네, 잘 찍었네, 따위의 말들만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광수 님처럼이 아니고, 최희철 님처럼 쉽게 쉽게 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존재를 존재자로 보질 않고 존재로 볼 때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최희철 님의 말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상 모든 건 기준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인간을 절대자로 보는 것 또한 인간 중심의 독선이니까 말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세상은 얼마든지 아름다워 질 수 있고,

실패와 패배에 대해서도 보다 넉넉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게 될테니까 말이다.

 

이 책은 이런 의도로 쓰여진 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지식과 깨달음의 깊이가 요 정도인걸~(,.)

안분지족의 묘를 느끼게 해준 책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하던 대사가 생각나는,

그런 요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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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9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6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07-09 20: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읽었는데 리뷰는 차일피일
미루었던터라서..리뷰가 더 와닿네요..^^..ㅎㅎㅎㅎ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기보다는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한 시선의 관념성...

저도 늘 사진을 그렇게 찍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잘봤습니다..^^..^^

양철나무꾼 2016-07-26 09:27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귀중한 댓글에 덧글이 많이 늦어버렸네요.
그렇지 않아도 사진에 관한 책이어서,
님의 코멘트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댓글로라도 만나게 되니, 궁금증이 많이 줄었습니다.

어서 리뷰 올려주세요~ㅅ!^^

2016-07-25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