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닮은 밥상 -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
이윤서 지음 / 위즈덤스타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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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책을 읽었다고 하면,

날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채식이나 이른바 장수식품이라 불리우는 슈퍼푸드에 관심을 갖게 됐는줄 알테지만,

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콧방귀를 끼며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난 그야말로 음식에 관해서라면 수더분하다 못해, 맛만 있으면 불량식품도 불사하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결코 음식, 소위 입으로 들어가는 것 갖고 유난 떨지 않는데(그렇다고 편식을 안한다는 얘긴 아니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어차피 사는 한평생, 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입이 행복해 하는 걸 먹고 살자는 주의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기저기서 원성이 자자하고, 돌이 날아오겠지만, 뭐~--;

입이 행복해 하는게 몸에 좋은 것에서 크게 비껴가지는 않더라.

(그럼 '먹기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의 '임낙경'님 같은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면 할말 없지만,

 그의 이론은 보편적인 이론은 아니다.)

 

실은 어디선가 마크로비오틱 Macrobiotic이란 단어를 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알아볼 요량으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마크로비오틱이란게, 일본의 장수요법에 뿌리를 두고, 인도의 아유르베다, 중국의 음양오행 등 동서양의 건강한 식문화를 아우르는 철학이란다.

때문에 여기저기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나와있는 책들은 많이 있지만,

설명이 중구난방, 우후죽순으로 흩어져 있다보니,

중심을 제대로 잡지못하면 난해하기 그지 없어진다.

 

마크로비오틱은 '음양조화, 신토불이, 일물전체, 자연생활' 등 4대원칙에 충실한 일종의 섭생법이자 요리법이다. 마크로비오틱은 가급적 식품을 통째로 먹는데, 그래야 식품이 가진 고유의 ' 에너지(氣)'를 그대로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자신의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반영되기 때문에 되도록 인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선한 식품을 먹어야 한다. 주로 유기농 생산농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재료 선택은 물론 조리법ㆍ활용법까지도 자연 친화적일 때 음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마크로비오틱 섭생법의 기본은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며 육식을 자제하고 유기농산물중에서도 곡류를 중심으로 한 채식을 하는 것이다. 발아 현미와 통곡물을 중심으로 제철ㆍ제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유기농 채소와 콩, 김과 같은 해조류, 된장, 절임채소 등과 같은 발효식품을 주식으로 포함하며, 육류, 계란, 유제품의 섭취는 지양한다(19쪽)

 

  채식을 시작했던 초반에는 재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파스타 요리를 즐겨 먹었다. 그러다 마크로비오틱을 만나면서 파스타를 만드는 재료에 대해 좀 더 꼼꼼하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크로비오틱은 기본적으로 토마토, 가지, 감자, 고추 등의 가지과 작물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마크로바틱 과정 중 파스타를 배울 때에도 토마토나 고추, 가지를 써본 적이 없다. 보통의 경우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건강에 좋다는 토마토와가지 같은 채소들을 왜 쓰지 않는 것일까?

  내 경우에는 만성 질환이었던 건선 치유 과정에서 가지과 작물의 섭취를 조심해야 한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가지과 작물에 솔라닌이라는 유독한 성분이 있어 염증 증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자에 싹이 나면 꼭 제거하고 먹어야 하는 이유도 솔라닌 성분의 유독성 때문이다. 마크로비오틱의 섭생은 음양의 조화, 중용의 정신을 강조하는데, 가지과 작물들은 산성식품이어서 잘못 쓰일 경우 음식의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토나 가지를 절대 먹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크로비오틱은 모든 것을 포함하되 건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생활방식이기에, '해서는 안 된다 Have to do not '의 사고방식이 아닌'지양한다 should not '가 어울린다. 때문에 마크로비오틱의 기본과 정석을 가르치던 학교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식재료지만, 경우에 따라서 제철, 제 땅에서 자라난 가지과 작물이라면 섭취할 수 있다고 본다. 산성, 알칼리성 성분의 음식을 균형 있게 먹는 것은, 결국 음과 양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38~39쪽)

 

이렇게 시작한 책이었기 때문에 자연 설렁설렁 넘겨보게 되었고,

또 이렇게 설렁설렁 넘겨보면서 뭔가를 궁구히 할 수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였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아니, 마크로비오틱 요리사 이윤서 님은 영화 얘기를 하면서 '라따뚜이'를 언급할 정도로, 이 영화 속에서 요리평론가로 나왔던 이가 라따뚜이를 먹으면서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던 걸 언급할 정도로, 나와 요리 철학이 비슷했다.

이윤서 님께 죄송하다, 내게 어떤 요리 철학 씩이나 되는게 있는 것처럼 표현하게 되어버렸는데ㆍㆍㆍㆍㆍㆍ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사용하되 최소한의 가미'가 내가 추구하는 요리의 기본이다.

대신 과일과 토마토를 제외한 채소는 익혀 먹는다.

그걸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ㆍㆍㆍㆍㆍㆍ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 입속으로 쏙 넣어 한입 먹는 순간,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이 열리고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 듯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에게 이로운 음식이 이런 것이 아닐까? 오랜 아픔, 슬픔을 어루만지고 영적으로, 정신적으로,육체적으로 이롭게 하는 음식.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게 담아내는 조화로(43쪽)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단순히 요리 책에서 삶의 철학이 담긴 책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사랑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관계의 안정과 감정의 충족에서 오는 일종의 헛된 욕망이었다. 그안에는 내 자신이 없었다. 20여년간의 오랜 만성 질환은 나 자신을 깊은 어둠 안에서 방황하게 만들었고, 어둠을 타인과의 사랑 안에서 찾았고, 의존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을 확인받고 또 소유하려 했다. 오직 관계를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던 시절에는, 그 관계가 깨지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큰 아픔을 겪었다.

 

  "아무것도 찾지 않고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할때, 거기엔 중심이 없다. 그러나 거기엔 사랑이 있다."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2010년 여름, 어그러진 관계와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때다. 운명의 종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며 떠났던 자연 치유 과정을 통해 섭생이 바뀌었고, 질병이 치유되어졌고, 몸과 마음이, 그리고 영혼이 치유되었다. 그러면서 비로소 내면의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존재의 여부는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태초부터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 에고를 재쳐내고,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루돌프 슈타이너-

 

 "비가 내려 나뭇잎에서 여러 날 쌓인 먼지가 씻기듯이, 마음은 생각없이, 강제없이, 책 없이, 선생없이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아름다운 황혼을 만느듯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내가 느낀 이 깨달음을 어떻게 해야 잘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그동안의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타인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그에 맞추어 나의 위치도 설정된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타인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사랑을 받아야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타인한테 사랑받지 않아도 나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의 마음 속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고 없고, 있으면 얼마나 크고...를 따지는 것 자체가 나의 욕심이다.

그냥 비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자연 현상이 그러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 현상은 아무 인과관계가 없는 것처럼,

나의 사랑도 그런 것이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되면, 서로 경쟁할 일도 없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일이 기꺼웁게 된다.

 

자연과 대지의 기운이라는 걸 느끼게 되고,

내 스스로가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기꺼이 담아줄 수 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참 어려운 얘기이다.

음식이나 요리를 통해서 이런 깨달음을 얻기는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 이런 깨달음이 눈물겹게 귀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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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박수밀 지음 / 돌베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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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책을 읽는 관점이 좀 바뀌었다.

그동안은 책을 곧이곧대로만 읽는것으로도 벅차,

책의 숨은 이면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책을 사람마냥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의 변화가 꼭 좋기만 한게 아닌 것이,

어떤 종류의 책들은 그렇게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적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기만 해서,

 

채워가질 수 없는 결여로 허기와 갈증이 깊어져만 갔기 때문이다.

그 어떤 종류의 책들은 주로 우리 고전이었는데,

같은 책 같은 문장을 두고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연암 박지원 같은 경우도...

사상가의 입장에서 봤을때와 문장가의 입장에서 봤을때 얼마든지 다른 견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상가로써의 연암과 문장가로써의 연암이 둘이 아니고,

그 둘을 아우르는 보편성으로 그를 바라보기 위해선,

그의 입장에선 '사상가'와 '문장가'라는 경계의 거품을 빼야 하고,

내 입장에선 관조적이라는 '간격'의 거품을 빼야 한다.

 

아직 내 깜냥으론, 보편성과 관조적이라는 단어를 하나로 아우를 수가 없는데,

그걸 개별성과 독창성으로까지 연결시켜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만든 사람과 책이 있다.

박수밀이 쓴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이 그것인데,

제목은 '글쓰기'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은이는 연암의 그것을 병법과 전략에 비유하는 등,

온갖 것을 아우르는 삶의 총체로 보았다.

게다가 지은이의 문장 또한 수려한 것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예를 들면 이런 대구를 이루는 문장들 말이다, ㅋ~.

ㆍㆍㆍㆍㆍㆍ그의 글은 가벼운 듯 진지하고, 유쾌하다가 불쾌하며, 통쾌하지만 슬프고, 상식에 맞는가 싶더니 새롭다. 그의 글은 능글맞되 삼엄하다.ㆍㆍㆍㆍㆍㆍ('책머리에'부분 발췌)

 

이 책에는 '생태 글쓰기'라는 새로운 용어의 정의가 나오는데,

그 정의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에서 '연암'에 대한 이해는 출발한다.

 

옛 문장가들은 늘 자연을 얘기했는데, 대개 인간과의 일치를 추구하거나 혹은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노래했다면,

연암은 자연을 변화와 창조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자연 사물의 원리를 들어 인간과 사회가 병들었으며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비판했다고 한다.

즉 사물의 생태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인간 사회를 고발하고 교정하는데 활요해서 '생태 글쓰기'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은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이지만, 연암의 삶을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있다고 한 이유는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진짜 글과 가짜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의 언어를 쓰는가, 남의 언어를 쓰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연암 생각에 옛말을 모방해서 주어진 틀에 맞추는 글은 가짜 글이다. 고전 시대 글쓰기의 기준은 옛것을 본받으라는 것이었다. 옛글을 닮아라, 옛글과 비슷해지라는 것이 전통적인 글쓰기 규범이었다. 과거 시험은 정해진 경전을 달달달 암송하고 정해진 문체에 맞추어 썼다. 그런데 연암은 도리어 옛 언어를 표절하지 말고 나의 언어를 쓰라고 말한다. 비슷함을 좇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비슷하다는 말에는 이미 다르다, 거짓되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곧 연암은 중세 시대 보편적 지향인 '닮음의 미학'을 거부한다. 그는 작가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글을 써야 한다고 요청한다.(28쪽)

여기서 개념을 확장시켜 보면,

주자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유가의 자연관과 연암의 자연관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주자성리학이 성행하던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실제의 산수가 아니라 푸른산, 흰구름 등 이상적인 공간이다. 

반면, 연암은 자연 사물에 애정을 갖고 자연 사물과 대화적 관계를 형성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사물과 인간을 평등한 관계로 만든다.자연 사물도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라 여기고 사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한다.

얼마전 읽은 '우주생명 오디세이'라는 책에 보면...우리가 이제는 많이 알고있는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9%일치하며,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아보이는 바나나와 인간도거의 비슷한 성분으로 이루어진 멀지 않은 친척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조선시대의 연암이 선견지명이 있어서,

현대에 쓰여진 '우주생명 오디세이'의 내용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닐테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용후생이라는 것은 인간 우월주의나 문명의 利己에서 비롯된게 아니라,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방도로 제기된 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물과 타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 중심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깨우치거나 배타적인 우월의식을 허무는 글쓰기에서 잘 활용된다.(40쪽)

 

눈으로 볼 수 있는 코끼리도 그 이치를 알 수 없을진대 코끼리보다 훨씬 큰 세상의 이치를 어찌 일일이 규정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사물의 관계는 상대적임을 말한다.(47쪽)

암튼, 그를 '사상가'나 '문장가'로 국한시킬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것은,

어떤 현상을 놓고 봤을때 현상만 보지 않고 이편과 저편의 '사이'까지 꼼꼼하게 관찰하라고 한 '발승암 기문'과 그 해석을 보고 나서였다. 

이편과 저편의 '사이'가 됐을때 그 '사이'는 미미하게 작을지도 모른다.

사물과 사물의 '사이'가 됐을때 그 '사이'는 작아질 수도, 커질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됐을때는 서로간의 친밀도나 정서적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가감이 가능하겠다.

때문에, 이 '사이'를

'쉼표'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틈'으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가운데'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으로 생각할 것이냐,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은 가능하게 되고,

 

그 때문에, 난 '사이'를 '쉼'으로 해석하고 싶지만,

어느 누군가는 '사이'를 '차이'로 해석하기도 할 것이다.

 

그걸 이 책에선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연암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주목함으로써 기존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변에 주목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것, 버림받은 존재도 조건에 따라 모두 소중한 개체가 될 수 있으며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임을 보여 주고자 했다.(60쪽)

암튼, 연암 박지원을 통해,
박수밀의 해석을 통해,
또다른 독서법, 또다른 삶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근데 혼란스러운 것이,
그동안의 난,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지 말자, 다름을 인정하자...그랬었는데,
오늘은 나와 상대가 다를것이 없다, 다 똑같은 존재이다...라고 한다.

이럴때 어려운 말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라고 했던거 같은데...
아닌가? 아님, 말고~(,.)

 

오행상생설에 의하면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는다. 곧 나무는 불의 어미가 되고 불은 나무의 자식이 된다. 그러나 그(연암)에게 오행상생은 어미가 자식을 낳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비추어 주는, 서로가 주고받는 공생의 관계다. 물질과 세계를 바라보는 연암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힘입어 살아간다는 것이다.(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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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3-10-29 17:07   좋아요 0 | URL
오행상생설에 의하면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는다. 곧 나무는 불의 어미가 되고 불은 나무의 자식이 된다. 그러나 그에게 오행상생은 어미가 자식을 낳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비추어 주는, 서로가 주고받는 공생의 관계다. 물질과 세계를 바라보는 연암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힘입어 살아간다는 것이다.(275쪽)

2013-10-30 00:02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안녕하셨어요?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즈믄밤의꿈이라는... 글방을 열었다가 오래도록 자리를 비운 玄입니다. 선생님 글방에 들어와 풍요로운 독서의 성찬을 맛봅니다. 열정적인 독서와 글쓰기에 자극을 받고 힘을 얻습니다. 그럼 건강하시고요,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양철나무꾼 2013-10-30 13:59   좋아요 0 | URL
돌아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와락~( )
저도 그리 열정적인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 같이 분발하도록 하죠, ㅋ~.

숲노래 2013-10-30 04:52   좋아요 0 | URL
동양에서는 오행을 말하고 서양에서는 사원소를 말하곤 하는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해(불+빛), 바람(공기), 물(비+내+바다), 흙(들+논밭), 풀(풀+나무)이에요.
동양에서는 '풀(나무)'까지 넣지만, 서양에서는 '풀(나무)'을 안 넣곤 해요.
'쇠'가 어디 갔느냐 할 수 있지만, '쇠'는 '돌'에 들며 '흙' 사이에 끼겠지요.

해, 바람, 물, 흙, 풀,
이렇게 생각하면
지구와 사람과 모든 목숨 이루는 바탕이 무엇인가를
한결 잘 읽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양철나무꾼 2013-10-30 14:08   좋아요 0 | URL
제가 저'오행상생설'을 '본문'에 빼먹어서 '댓글'에 적었었던건요~^^
제가, 저란 인간이 오행하면 상생과 상극, 보와 사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오행 상생이라는 것을, 모자관계가 아닌 상호공생의 관계로 본 시선이 낯설었고,
그렇지만,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님이 댓글 달아주신 오행, 사원소 개념이랑은 약간 거리가 있어보여서요, 헤에~^^

암튼, 늦었지만, 또 다른 오해가 생길까 싶어, 본문으로 올리겠습니다, 죄송(__)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창비시선 369
권혁웅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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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시적 감수성을 가진것도 아니고,

감성적인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만,

함민복 님의 '긍정적인 밥'에 나오는 '시 한편에 삼만원'이라는 소리를 들은 후,

시집을 열심히 사들이고 있다.

 

근데, 권혁웅의 이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를 처음 접했을때,

'권혁웅이 누구지~?@@'하며 한참 말똥을 굴렸었다.

권혁웅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은데,

이상하게 그가 썼다는 시 한편의 제목은 고사하고,

그의 시 한구절도 떠오르지 않는거라~--;

암튼,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독이 아니라,

내 기억력은 원래 소박하고 착했었던 터라...나이듦을 탓할 건덕지는 전혀 없다.

 

한참, 말똥을 굴리다가,

'이영광'의 '홀림, 떨림, 울림'에서 그의 시를 소개했었던 기억이,

그때 그의 시도, 시 해설도 너무 좋았었던 기억이, 났다.

(막막한 세상을 건너는 방법<--링크)

 

호구(糊口)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이 짤막한 시를 통해서, 그를 각인시켜놔서 그런가...

시집 속의 시들을 보니 좀 낯설었다.

그는 이미 '미당 문학상'을 받는 등 시창착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데,

그가 '문학평론가'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런지 참여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완전 참여시라고 하지도 못하겠는 것이,

참여시면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들어야 할텐데,

그렇지는 않은 것이,

우리 주변 사람들의 지난한 일상사를 담고 있는데,

그 고달픈 하루하루를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게 아니고,

시인은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따뜻하고 눈물겨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난, 시이고 수필이고 소설이고를 떠나서 언제부턴가 '화려한 수사'가 싫었다.

화려한 수사는 글을 돋보이게 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반감시킨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취향일뿐,

적재적소에 적절하게 쓰인 수사야말로, 시를 시일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인 것 같다.

그냥 단지 주변 사람들의 지난한 일상사를 곧이곧대로 전달하기만 할거라면,

굳이 '운율이 있는 언어'와 '함축적인 표현'을 취할 필요가 없을테니 말이다.

 

어떤 의미로 봤을때는, '운율이 있는 언어와 함축적인 표현'이야말로 '강한 여운'을 줄 수 있는 임팩트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궁정식 연애에 관하여

 

애인을 애마에 태워 밥 먹으러 갔지

식당을 지키는 풍선인간 하나

호들갑스럽게 우리를 맞네고삐를 맞기고 들어서자

전국에서 모여든 기사들

마상시합 전의 난전처럼 떠들썩하네

애인은 궁정식 연애의 주인공이 된 듯 들떠

우아하게 손을 들어 메뉴를 가리키네

불고기백반, 저건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는 거야

우리는 불의 시련을 통과할 거야

고등어자반, 저건 우리 경쟁자들의 운명이지

토막 난 채 소금에 절여진 패잔병이야

우리는 돌솥밥처럼 끓어올라

기사들 사이에서 사랑을 맹세했네

옆구리를 드러낸 자반 옆에서

달달한 불고기 국물 앞에서

기사들은 이쑤시개를 장창처럼 꼬나들고

혹은 자판기 커피를 성배처럼 받들고

청량리로 군자교로 혹은 장안평으로

너도 나도 흩어졌네

잘 아시겠지만 이 기사담의 결말은 누룽지,

눌어붙은 밥알들이 책임지는

물에 불은 한때의 고소함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이런 걸 중의법이라고 하던가?

이렇게 재미있는 풍자는 오랫만이다, ㅋ~.

돈키호테와 로시난테가 풍차에 맞서 칼을 휘두르는 것만 '궁정식 기사도' 라고 할 수 있나?

때론 애인을 애마에 태운 다소 호들갑스런 그것이어도

기사들 사이에서 사랑을 맹세하면 '궁정식 연애'가 되는 것이다.

잘 아시겠지만...으로 끝나는 결구도 매력적이고 맛깔스럽다.

'궁정식 기사도'와 '궁정식 연애'의 공통점은 그러고 보면 누군가 '책임지는'사람이 있다는 건가 보다.

아, 이런 시도 참 재밌고 좋다~^^

 

'할머니가 익어간다'는 제목의 시도 그렇다.

'ㆍㆍㆍㆍㆍㆍ

아랫목에서 익어가는 청국장 냄새를 할머니 냄새라 말하지 마라

저승, 그 미지의 땅을 정복하러 가는 전사의 비상식량이다'

같은 발상 자체가 기발하기 짝이 없다.

그의 시는 아무래도 콩이 그렇듯,

달리지 않아도 이미 숨이 가쁜,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노랗게 굳은 요구르트가 그렇듯,

발효를 거쳐 장수를 누릴 기미가 보인다.

 

'첫사랑', '짝사랑',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환절기'...다 좋았지만,

무슨 뜻인지 내용은 이해불가여도,

이상하게 분위기가 적당히 애잔한 것이 '서해에서'가 오래 내마음을 잡아 끌었다.

 

서해에서

 

인간이 버린 것들을 천천히 되밀어오는 해안

나의 해안선은 늑막염처럼 쓰리다

모래에 묻어둔 병은 담장에 박아둔 병과 똑같이

경계를 넘는 이들의 발을 베어버린다

나는 오래 일몰에 길들여졌다

필라멘트 끊어지기 전의 한순간

물에 던져 넣은 백열등 하나, 항응고제처럼 잦아든다

그러니, 그런 것이다, 누가 손을 넣어

가슴의 불을 끄는 때가 있는 것이다

상한 우유처럼 철벅이는 파도 앞에

드문드문 귀신들이 서 있다

자꾸 쓸려가는 자신의 그림자가 위태로워 못 떠나는가?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다

파도는 스팸 전화처럼 자꾸 와서는

여보세요, 말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킨다

말도 안돼, 자백을 강요하는 장사꾼이라니

하지만 가당치 찮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얼토와 당토야말로 귀신의 영토다

지워질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강역이다

상한 우유처럼 나는 누설해야 한다

이곳은 너무 눅눅하다고

내일이 되어도 일출은 볼 수 없을 거라고

서성이던 귀신 하나가 다가와

아저씨, 불 좀 빌립시다, 말을 건다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란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추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가 귀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일 수 있겠다.

모래 위에 그린 그림처럼 파도가 한번 휩쓸고가면 지워질 수 있는,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흔적이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ㆍㆍㆍㆍㆍㆍ자신의 그림자가 위태로워 못떠나는가?'는 자기애라기보다는 미련쯤 되겠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가슴의 유리병 속의 불빛은,

누군가 와서,

안되면 세찬 바닷바람이라도 불어와서,

또는 누군가가 가슴속에 손을 넣어 전원을 차단시키듯,

불을 끌 수 있도록 가슴을 내어놓는게 오히려 현명할 수도 있겠다.

 

'불 좀 빌립시다'가 결코 자신의 가슴 속 유리병 속 타오르는 그 불은 아닐것이므로,

아니, 아니어야 하므로...

 

무릇 서정시의 탈을 쓰고 말만 앞세우는 시들이 남발하는 시대에,

권혁웅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몸소 경험한 체험의 산물인듯 하여,

애착이 가고 미련이 남든다.

하지만,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란다.

귀신 잡는 해병대가 될 것도 아닌 다음에야,

과거에, 흔적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현재를 가열차게 사는게 우선일 게다.

 

사는 건 현재를 가열차게 살아야겠지만,

난 그래도 이 시인의 앞날이, 장래가 참 궁금하다, ㅋ~.

 

언제던가, 누가 써는걸 사주겠다고 하고는...날 어디 유명한 순대골목으로 데려갔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순대를 써는 아주머니를 향하여,

"순대 썰지 말고 그냥 길게 통째로 주시구요. 포크랑 나이프 하나만 주시겠어요?"

라고 했었다.

그래서인가?

난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라는 제목을 자꾸 내맘대로 '애인은 순대를 토막내고 운다'로 바꾸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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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0-29 16:08   좋아요 1 | URL
언제나 시와 노래 즐겁게 누리시면서
하루하루 아름답게 일구셔요~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
류근 지음 / 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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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백하자면, 난 소싯적에 고 김광성의 마직막 공연이었을지도 모를 뉴욕공연을 보았었다.

그게 아마 낯선 곳에서 한참 외롭고 고독해서 힘들었던 내 자신에게 주는 연말연시 선물 같은것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땐 공부에 치일 때여서 막상 외롭고 고독함 따위에 제대로 침잠하지도 못하고 시늉만 했을 때였었다. 

그는 공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를 부르며, 아니 노래를 채 부르지도 못할 정도로 울었었는데,

그의 노래를 통해서 외롭고 고독한 감정의 위로를 받고자 했었던 나었었지만,

그의 진한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혼자서(같이 할래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 같이 얘기할 수도 없었다~--;)

그를 그토록 아프게 만든 노래에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거라는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그리고 김광석의 죽음 소식을 아주 나중에 접했고,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가 김광석의 자작곡이 아닌 '류근'이란 시인의 작품이란건 더 나중에 김도언의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를 읽다가 류근이란 시인의 존재감을 발견하고 난 뒤였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붙들고는,

책 뒷표지에 아무리 그럴듯한 이들('이어령'과 '이외수')의 추천사가 폼나게 들어있었다고 해도,

책을 읽으면서 좀 실망스러웠던게 사실이다.

책의 부제는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인데,

책 속의 내용들은 시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걸러지지 않았고,

('조낸'과 '시바' 어느게 더 많이 쓰였는지 비교해 보는게 무의미 할 정도다~--;)

술과 애인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으며,

'백수래 백수거'라고 공공연하게 외쳐댈 정도로,

젊고 건장한 남자가 백수로 지낸다.

 

시인들은 죄다 허여멀건하고,

그리하여 시래깃국만 먹고 사는지라...

아무리 젊고 건장해보여도 육체노동 따위는 할 수 없는,

실연의 아픔만을 '상처적 체질'로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일요일이면 방바닥에 궁둥이 딱 붙이고 누워 입만 동동 거리며 사는 나처럼, 거의 대부분의 날들을 그렇게 탕진해버리는 그런 존재들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허구헌날,

'결론적으로 나는 내일 오전중으로 방을 빼야 한다', '일주일 안에 독립하시오', '유씨 나이가 몇이유?' 따위의 소리나 듣는단 말인가?

 

내가,

우리나라 시인들의 삶이 열악하고,

그들은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발휘하는 특별한 감수성을 우리가 한번씩 감상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도록 시집도 열심히 사주어야 한다...

는 생각을 평소에 하는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렇게 자칭 '무한 백수'가 이렇게 시시껄렁한 글이나 쓰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멋지게 봤던 '김도언'도 '이, 뭥미?'하고 다시 보게 됐으며,

책 뒷표지의 '이어령'과 '이외수'의 추천사를 두고도 '뻥이 대단히 심하다, 이 정도 되면 대국민 사기극 수준이다.'라고 생각할 즈음,

 

사실, 이때까지는 시인들의 일상이 꾸밈없이 '레알'로 찬조출연한 덕에 집어던지지 않고 읽어온 것이었다.

예를 들면 안동의 안상학 시인께서 천기를 누설하시는 바람에...라든지,

익히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이정록 시인의 단독 리사이틀...이라든지, 따위 말이다.

 

주인집 아저씨가 등장해 주신다, 짜자~ㄴ♬.

주인집 아저씨가 등장하면서부터,

(산문은 시와는 또 다른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글들은 탄력이 붙고 쫄깃해진다.

그러니 이 책의 일등 공신은 '주인집 아저씨'이다.

이 책의 앞부분 만을 읽고 괜찮다 싶은 사람들은 이 시인과 코드가 잘 맞는것이니 상관할 필요가 없고,

나처럼, 애먼 '김도언'이나 '이어령'또는 '이외수'에게까지 화살을 날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여기까지만 참고 견디면 된다는 팁을 친절하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ㅋ~.

 

ㆍㆍㆍㆍㆍㆍ이봐유, 유 씨! 유 씨 시방 나이를 얼마나 잡쉈수?

 

나        그건 왜요?

아저씨  보아하니 국민핵교 다닐 나이는 한참 지난 거 같은데 허구한 날 헛구역질이나 하고 앉았으니 한심해서 그러지유.
           유 씨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세계를 알어유?

나        내. 면. 의. 아. 름. 다. 움ㆍㆍㆍㆍㆍㆍ이요?

아저씨  그 나이쯤 잡쉈으면 인제 내면의 아름다움 정도는 저절로 알고 가꿔야 하지 않겠슈?

나        (조낸 어이없다)

아저씨  뭐 원래 유 씨는 몰르는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없는 양반이란 거 내가 애저녁에 다 알아봤지만서두

           인제는 내면의 아름다움 정도는 알아야지유.

나        (시바, 가뜩이나 속도 아픈데)

아저씨  내면의 아름다움을 몰르느까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도 몰르지유?

나        그게 어디서 오는 건데요?

아저씨  강. 인. 한. 체. 력!

나        강인한 체력ㆍㆍㆍㆍㆍㆍ이요?

아저씨  물론이쥬. 강인한 체력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이 싹트는 거유. 유 씨는 강인한 체력이 준비 안 돼 있으니까

           내면의 아름다움도 몰르고 그러는 거잖유. 택도 없는 술 작작 마시고 인제부터 우유나 들어유.

           그러다 뼈 삭겠슈.

 

정말 재밌어진다, 장난이 아니다.

방심하다간 빠진 배꼽을 찾으러 다녀야 할 정도이다, ㅋ~.

 

하긴, 시인에겐...

산문집 중후반 뿐만 아니라,

전반 1/3의 정조가 또한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암튼 건투를 빈다.

 

그리고 주인집 아자씨에 이 말 한마디 전해주기 바란다.

우유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많은 성분의 칼슘이 함유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사람에 따라서는 우유의 칼슘을 제대로 흡수해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지 않나?

같은 술을 먹어도 헛구역질이나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사람들에겐 모두다 잊어버리는 좋은 처방약이기도 하다.


사람이 외롭고 슬프고 고단하더라도 내내 외롭고 슬프고 고단하게만 살 수는 없다.

상처적 체질이라도 상처를 끌어안고만 살아갈 수는 없다.

상처는 언젠가 아물고 옹이가 생길것이고, 상처가 났던 기억조차 잊혀질 거이다.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온다면,

모든 삶이 그렇듯이,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어제까지의 상처와 상처가 있던 자리쯤은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잊어버리고,

훌훌 떨고 그렇게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너무 아팠던 사랑의 상처 따위,

삶의 질곡 따위, 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연연해 할것이 아니라,

미래를 꿈꿀 희망이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오늘 현재를 치열하게 살면 된다.

그걸로 충분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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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0-28 05:34   좋아요 0 | URL
헌책방 사장님이
가끔 이런 말을 하지요.
책방 일을 하려면
첫째로 책을 좋아해야 하고
둘째로 힘이 좋아야 한다고.

예부터 아침에 일하고 저녁에 책 읽는다 했듯이
몸으로 일하고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빛이 이야기로 태어나리라 느껴요.
 
그리운 나무 창비시선 368
정희성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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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내년이면 나이 70이다.

예전에는 '고래로 드물다'고 해서 고희(古稀)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요즘은 인생은 60부터다, 아니다 70부터다, 설왕설래할 정도로 흔하
다.

그런 의미에서, '논어'에 나온다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從心所慾不踰矩)'를 줄인 종심(從心)이 내겐 조금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암튼, 내년에 나이 70인, 종심(從心)인 시인은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에서 '시가 어지간히 짧아졌다.ㆍㆍㆍㆍㆍㆍ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겠는가. 그저 손을 들어 소리의 높이를 가늠할 따름이다.'라며, 사람은 나이가 들면 단출해져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듯 하다.

몇년전 불혹을 지난 난, 아직도 세상에 미혹하기만 할뿐이고...

그동안 없었던 말들이, 참았던 하고 싶은 말들을...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다 하고 살자는 주의로 바뀌었다.

한의학적 진단명 중에, 매실의 씨가 목에 걸려 있는것처럼 목에 걸려 뱉어지지도 삼켜지지도 않아 가슴이 답답한 '매핵기'라는 게 있는데, 그것만은 막아보자는 심사에서이다.

 

며칠전 먼곳에 있어 자주 못보는 친구가 술마신 얘기를 했다.

내가 물어보지도 않은 누구 누구 따위의 같이 마신 사람들을 열거하는데,

난 제대로 열받고 빈정이 상해버렸다.

우리 나이가 되면 친구 사이에 성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 모두를 '우리', '내가 이뻐하는', '내가 좋아하는' 따위의 수식어로 꾸며주는 패밀리 의식은 과한 오지랖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난 친구가, 나의 질투심을 부추기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수식어들을 구사하는 줄 알았다.

난 나이가 들면서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욕심을 내려놓겠다고 했었고,

주류가 아니어도 괜찮다, 배경으로 주인공을 빛내줘도 좋겠다...라고 말은 했었지만,

마음을 다 비워내지는 못했었기에...한번씩 나를 시험하는건 줄 알았다.

 

친구는 술을 마신 기분에...호기롭게,

그 친구의 우리 OO와 친구가 이뻐하는 OO를 연결시켜 줬다는 걸 자랑하고 칭찬도 받고 싶었다고 하는데,

나는 '우리'가 준'울'이나  '내가 이뻐하는', '내가 좋아하는' 따위의 수식어로 꾸밀 수 있는 패밀리 의식은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만 사용해주길 원했었다.

그 친구는 내가 그리운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비껴간 것이다.

그러고보니, 내내 나도 그친구에게, 그 친구도 내게 '그리운 나무'같은 사람일 수밖에 없을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었다.

 

그리운 나무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그렇다면, 난 '그리움'이 되어야 겠다.

아니, 시인이 되어야 하려나?

더는 말고 한평생 그리움에게나 가 살라니...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있단 말인가, ㅋ~.

 

시인

 

그대에게 가닿고 싶네

그리움 없이는 시도 없으니

시인아, 더는 말고 한평생

그리움에게나 가 살아라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이상국의 시 「그늘」의 첫행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같은 경우는 내겐 서러워서 황홀한 시다.

어쩜 좋아?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한 시인의 마음을,

이 가을 나뭇잎이 마구 땅으로 떨어지고 쓸쓸히 빈 가지만 허공으로 매단 나무들을 보면서,

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겠다.

 

친구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얘기하며 그래도 바꾸고 고쳐서 '나아지게 해서 써야한다'는 건설적인 얘기를 들려줬었는데,

시인은 '묵침의 님'을 읊는다.

서로 다른 곳에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그리하여 다른 삶을 산다고 하여...

그리워조차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 편에 향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 있어 바람 에 실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아코디언

 

이것은 가슴을 여는 소리

설레는 내 마음 들었느냐

오직 너만을 그리워하는

골 깊은 이 가슴 보았느냐

 

 

  어떤 이는 세상에 시인이 나무보담도 흔하다며 너도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시인이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전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중 '일부')

 

교감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 있다
어린아이가 그걸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만
"내려와아, 위험해애"

교감은 나와 새가 다른 종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우선이지만,

그보다는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먼저다.

전짓줄을 올려다 봤으니,

내려와...라고 했겠지?

새들은 거기가 자기 집일 수도 있는데...ㅋ~.

아마, 새들의 입장에서 였다면,

"니가 더 위험하다, 얘~.

 어서 올라와, 폴짝~!"

이랬을지도 모르는 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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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0-27 07:05   좋아요 0 | URL
사람들은 모두 나무와 같은 숨결이요,
나무와 함께 숲에서 태어난 목숨이기에,
나무가 그립고, 나무를 그리며, 나무를 곁에 두고 살아가고픈 마음이 되며
이러한 시들이 태어날 수 있으리라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