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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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이었다.

그녀는 환자가 하도 말을 못 알아듣자,

"보청기를 하셔야 겠네요?"

했더니,

"보이차를 왜 해? 나 보이차 안 해도 돼. 사주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아무 영양가 없는 보이차는 먹으래, 췟."

하고 역정을 내시는 거다.

 

그보다 며칠전엔 다른 환자가 와서,

"내가 부애가 치밀어서 죽는 줄 알았어."

하며 윗옷 단추를 열고 부채질 하는 시늉을 한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왜여?"

하고 겸연쩍은 미소라고 짓는데, 그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영낙없는 울상이다.

"내가 허리 아픈데 먹는 약을 달랬지, 언제 무릎 아픈데 먹는 약 달랬어?"

"네에~ㅇ? @@"

"내가 이래뵈도 눈썰미가 있어서 다 알어. 무릎 아플때 먹는 약이랑 똑 같더구만..., 으흠~!"

그녀는 계지(桂枝)와 계피(桂皮)와 유계(柳桂)와 계심(桂心)의 용처가 다르다는 얘긴 들어봤어도,

대증치료를 하는 양약이 무릎용 진통제와 허리용 진통제가 따로 있는줄은 몰랐다, 끙~--;

 

어젠가는 허리가 아파 돌아가시겠다는 환자가가 와서,

"내가 허리 하나만은 성한 것이 자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안 낫는거요? 혹시 상한 약을 지어준거 아니요?"

"네에? 며칠이나 치료를 받으셨다구요~. 8~9년을 하루같이 다니며 치료받으시는 분들도 많아요."

라고 했더니,

"그게 미친넘이지 성한 사람이우? 왜 성한 나를 미친넘이랑 비교를 하는거야, 내 참~(,.)"

이라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본위로,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건강과 관련하여선 정도가 더 심하다.

그래도 섣불리 이들을 갖고 잘ㆍ 잘못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잘ㆍ잘못의 기준이 되는 가치관이라는 것이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에 따라 이리저리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해서,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어?'하는 일들이 번번이 '사람이니까 저러지, 누가 또 저럴 수 있겠어?'하는 일들로 바뀌어 버려, 제대로된 가치관을 정립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 처음의 시작이기도 하고, '로드 스튜어트'가 부른 노래 가사이기도 한,

'내가 사는 이유는 오직 당신 곁에 눕기 위해서이나, 이렇듯 달빛 비치는 길 위를 헤매기만 한답니다.' 하는 '문 라이트 마일'처럼, 당신 곁에 눕고 싶지만 달빛 비치는 길 위를 헤매기만 하는게 현실일지라도,

어떤 의미로든 '사는 이유'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행복할지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문라이트 마일'은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책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상처와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기 나름이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여러가지인데,

본인의 의지로 극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 예를 들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의 지극 정성으로 극복하는 사람도 있고,

영영 극복하지 못하고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렇기 때문에...우리는 사람을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된다.

상처를 끌어안고, 피 흘리면서도 꿋꿋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보는것만으로 기절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ㆍ악이나 잘ㆍ잘못의 판단 기준 같은 건 얼마든지 가변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행동을 했다고 하면,

그 결과가 '당신 곁에 눕고 싶었으나, 헛다리짚어 달빛 비치는 길 위를 헤매는 그런 것일지라도...

그게 삶의 이유가 될 수 있고,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데니스 루헤인을 좋아하는 게 그런 이유에서이다.

너무 인간적이어서,

인간적인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실수를 끌어안고 뭉개고 앉아 있는것이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고치고 나아지려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각이나 가치관이 유연한 것인데...

이건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듯,

천안삼거리에 걸린 능수버들처럼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축 늘어진거랑은 다른거다.

'나와 남이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이어야만 가능한 태도이다.

 

이 책이 '켄지와 제나로'시리즈의 마지막 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또다시 이들 환상 콤비 플레이어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우면서도,

이들의 앞날을 내다볼때 바른 선택인 듯하여 기꺼이 보내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암튼, 난 '켄지와 제나로'의 사람을, 일을, 그리하여 삶을 향한 이같은 호ㆍ불호가 맘에 드는 것이고,

이것이 이들에게, 또 데니스 루헤인에게, 내가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를 끔직하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다행히 그가 끔찍이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44쪽)

 

솔직히 총을 들고 다니는 건 양배추 먹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이다.(45쪽)

 

아이의 얼굴 가득 엄마와 똑같은 미소가 번졌다. 너무나 따뜻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미소.(96쪽)

 

내가 아는 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친구들 사이의 전제는, 누군가 마이크를 싫어한다면 정작 우리가 싫어하는 건 그가 아니라 말한 당사자가 된다.(228쪽)

 

93번 도로 남쪽으로 달리는 도안, 문득 나를 초조하게 만든 일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커다란 벽돌처럼 내 심장을 짓누르고 처절한 스트레스로 나를 괴롭혔던 일들. 깨어져 회복이 불가능한 일들, 잃어버렸기에 되돌릴 수 없는 일들 사랑한다. 나는 내 짐들을 사랑한다.ㆍㆍㆍㆍㆍㆍ

아버지는 자신의 짐을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어느 것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상처 많은 여인을 사랑하는 상처 많은 남자다.

ㆍㆍㆍㆍㆍㆍ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콜롬비아 로에 접어들었을 때쯤 하루가 자두 빛 하늘 속으로 빠르게 접혀들었다. 가벼운 눈발도 주저하듯 계속 흩날렸다.ㆍㆍㆍㆍㆍㆍ사실 그 모든 것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으나 그건 아니었다.(388~389쪽)

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하나도 없다.

복잡하지도 않고, 군더더기도 없다.

단순명료하다.

 

아무래도 역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자는 '켄지와 제나로'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를 알고,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반영한다.

많은 번역자들이 언급했던 우리말을 벼리는 재주이다.

다시 말해 책상머리에서  사전만 펼치고 앉았지는 않는다.

사전도 안 펴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거기 실려 있는 말은 화석화된 개념이지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다.

그는 살아있는 표현, '이 땅의 켄지와 제나로' 들이 사용하는 '잘 익은 말'들로 갈무리해 낸다.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켄지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제나로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있다.

지금까지 가브리엘라에게는 흡연의 증거를 들키지 않았으나 세월은 흐르고 아이도 자랄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악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만큼, 대개의 경우 나는 악습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을 견딜 수가 없다. 그들은 자기보존을 위한 자아도취적 본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혼동한다. 더욱이 소속 공동체의 삶을 빨아내기도 한다. 앤지도 내가 금연을 원한다는 사실을 앍고 있다. 그녀도 금연을 하고 싶어 하지만 아직은 담배를 끊지 못했다. (117쪽)

아무나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지만, 성숙한 사람(그의 표현대로라면, 상처 많은 여인을 사랑하는 상처 많은 남자)만이 제대로 된 사랑도 하고 아이도 잘 키울 수 있다.

다시말해, 혼자 있는 것이 외롭고 쓸쓸해서 자신을 사랑해줄 누군가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를 가진 고슴도치처럼,

자신의 가시로 상대방의 가시를 부딪혀 부러뜨리지 않고,

상대의 가시에 제 살이 찔릴 줄 알면서도 옆으로 비껴 서로를 끌어안는 그런 사랑 말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데니스 루헤인의 그것을 그냥 재미나 흥미를 위한 장르소설이나 하드보일드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이런 구절들 때문이다.

항상 눈높이를 낮추어 독자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마냥 부드럽고 넉넉한 어조로 얘기하지는 않는다.

비판도 할 줄 알고, 불의를 향하여 목소리를 높일 줄도 안다.

"이 화려한 도시의 이면을 봐요. 그럼 수많은 균열과 만납니다. 두 자리 수에 이르는 실업률에 고용주의 착취. 사회보장?(웃음) 개뿔도 없어요. 보험? 우리 선조들이 당연히 여겼던 노동에 대한 보상, 사회 안전망, 공정임금은 물론,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금시계도 모두 사라져버린 거요."(106쪽)

 

"ㆍㆍㆍㆍㆍㆍ이봐요, 브라이언, 거론되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166쪽)

 

"의사가 사람 구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결국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매상 문제입니다. 재화와 용역을 예로 들어 최저가에 얼마나 우수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환자들을 처방하고, 내쫒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더 비싼 치료로 유혹하고ㆍㆍㆍㆍㆍㆍ."(184쪽)

나중에 이런 말을 한 자의 진의가 밝혀지지만,

암튼 미국이란 나라는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의료보험 제도 하나만 놓고봤을때도 암울하고 꿀꿀한 것만은 사실이다.

얼마전 오바마 정부는 건강개혁법안과 관련하여 미 연방 정부가 셧다운하는 그런 사태로까지 치달았었으니까 말이다.

 

세상은 변하여, 내가 사는 이유는 오직 당신 곁에 눕는다' 는 희망을 위해서이나,

'이렇듯 달빛 비치는 길 위를 헤매기만' 하는게 현실일지라도,

아직은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따사로운 햇볕은 아닐지라도, 서늘한 달빛일지라도...길을 밝혀주고 안내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모쪼록 켄지와 제나로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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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3-11-21 18:08   좋아요 0 | URL
책 안읽은지 백만년입니다. 아마 문라이트가 제가 근래 마지막으로 본 책일 듯 ㅎ 전 이 커플 이야기로 한 오십권만 더 나왔으면 합니다. 현장에서 글 남겨요. ㅋ 찬 날씨 강건하시길

양철나무꾼 2013-11-21 18:16   좋아요 0 | URL
우와~^^
알케님이다, 부비 부비~, 와락~( )

날씨가 엄청(맘 가난한 사람 얼어죽게) 추워요.
현장이면 작년 어느땐가처럼...맥심 커피 두개를 머그컵에다 타서 드심서 언 몸을 녹일 수도 없으실테고,
옷을 꽁꽁 동여매 입으시고,
팔을 쭉 길게 늘여 팔짱을 껴서 스스로 감싸 안는 수밖에요, ㅋ~.
 
페넘브라의 24시 서점
로빈 슬로언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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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겉표지뿐만 아니라, 속지도 참 예쁘다.

겉날개 안쪽의 저 안내 문구를 보자마자, 난 몇개가 해당될까 하고 체크를 시작한다.

01 심각한 야행성이다

02 책 먼지 알레르기가 없다

03 외출보다는 퍼즐 풀기처럼 가만히 안장서 뭘 하는게 좋다

04 솔직히 마법사가 있다고 믿는다

05 세상 그 무엇보다도 책을 사랑한다

 

저 다섯 개의 항목 중에서 '솔직히 마법사가 있다고 믿는다'만 '때때로 예스'이고,

다른 것들은 '강하게, 심하게 예스'이다.

이걸로 미루어 '페넘브라24시 서점의 손님자격'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내가 책중독환자라는 것만은 판명되었다, ㅋ~.

 

내가 장르소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판타지는 또 별로이다.

그건 꿈이나 낭만, 상상력이 부족하다 못해, 결핍된 인간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지만...뭐, 어쩔 수 없다.~--;

이 책도 광고를 봤을때 너무 재미있었고,

책을 막 시작했을때 흥미진진했었고 했던 것에 미루어,

뒤로 갈수록 좀 황당한것이 판타지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때문이지, 다른 사람들에겐 재밌을 수도 있는 것이라서...이점을 명확이 하고자 한다.

 

이 책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내게 이 책이 별로였던 까닭을 곰곰 생각해보니,

영생, 불멸의 방법으로 선택되어지는 '그것'이 좀 뜬금없었다.

우리나라처럼 지적소유권의 개념이 미미한 나라에선 크게 와닿지 않는 대목이다.

게다가 이 책에 나오는 비밀결사단이라는 것이, 그동안 여러 책에서 보아오던 프리메이슨의 그것과 비슷할 뿐더러...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안드로이드(인조인간내지는 로봇쯤 되려나?)가 나온다는 설정은,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봤던 사람이라면 특별날 것이 없다.

다시 말해, 이런 종류의 책들을 좀 읽은 사람들이라면 얼마든지 구태의연할 수 있는 설정이다.

대단히 넓고 방대한 대신에 깊이가 없는 것이 시대조류를 반영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넷 상에 떠도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처럼이나, 넓고 방대한 대신...인간적인 깊이가 없다고나 할까?

체온의 따뜻함이 그립다.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즉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의미의 라틴어-옮긴이)(26쪽)

이 말이 도대체 왜 쓰이는지를 모르겠다.

이 얘기의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컴과 모바일,핸드폰 등을 이용해서...엄밀하게 말하면 구글과 아이폰, e-북 리더기인 킨더를 통해서, '페스티나 렌테'를 외쳤던 사람들이 500년에 걸쳐서 완성한 일들을 속전속결로 해치운다.

참, 아이러니컬한게 모든일을 더 빨리 속전속결로 해치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

그것들만 적절히 활용하면 시간을 훨씬 길고 효용있게 쓸 수 있는데도,

옛날의 구태의연한, 어찌보면 고전적인 방법을 쓰면서 시간을 낭비하고는, 그러면서 불멸을 꿈꾸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불멸을 얻게 되면, 뱀파이어의 그것처럼 살아있는게 지옥처럼 생각되지나 않을까?

'희소성의 법칙'처럼 귀해야 그게 소중해지지는 않을까?

 

내가 이 책이 별로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책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클레이라는 인물 성격이 좀 평면적이고 구태의연해서 이다.

시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금보다 훨씬 미래의 일인것 만은 사실이고,

인터넷 홍수에 빠진 그 시대에도 직업의 귀천이라는게 있어서,

중요한 학위 하나를 따고 앞으로 전진할 직장 동료에게,

직장이라고는 하지만 헌책방에서 시간 교대를 해서 같이 있지조차 못하는 그런 직장동료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는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의 투사로 봐야할 것 같다.

그런 올리버를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질투심이 솟구쳤다. 현재 그와 나는 같은 직장에서 동료로서, 똑같은 의자에 앉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올리버는 매우 중요한 학위 하나를 따고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갈 것이다. 그는 한적한 서점에서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기술 말고도 잘하는 것이 있는 까닭에 진짜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33쪽)

 

여자는 불꽃 같은 활기를 지녔다. 남녀를 불문하고 새 친구를 사귈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그거였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칭찬이 바로 그런 활기를 지닌 사람이라는 거였다. 나는 정확히 무엇이 불꽃을 점화하는지 알아내려고 수차례 시도했었다. 어떤 형질들이 모여야 차갑고 어두운 우주에 반짝이는 별을 만드는지. 주로 얼굴 표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알았다. 눈뿐 아니라 이마와 볼, 입, 그리고 이 모든 걸 연결하는 미세근육들.

캣의 미세근육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ㆍㆍㆍㆍㆍㆍ

더없이 흥미로운 얘기로 들렸지만, 그건 캣이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었다.(74쪽)

이렇게 활기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직장 동료가 중요한 학위 하나를 따고 앞으로 전진할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질투심을 느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직장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하는 그런 모습,

그건 생동감 쯤으로 표현해도 좋을 그런 것이고,

생동감은 불꽃 내지는 활기로 대체되어도 좋을 것이다.

'더없이 흥미로운 얘기로 들렸지만, 그건 캣이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었다'는 구절은,

재미있는 얘기인지 아닌지, 의 여부는 내용에 관한 문제라기 보다는,

같이 있는 대상이 얼마나 흥미로운지에 관한 문제라는 걸, 나 또한 경험해봤기에 알겠다, ㅋ~.

 

"도서관의 목적은 책을 보존하는데 있는가, 책을 읽기 위한 곳인가?"-움베르토 에코,《장미의 이름》(167쪽)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난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책의 목적은 정보를 보존하는데 있는가, 책을 읽어 정보를 내것으로 만드는데 있는 것인가?

이렇게 질문을 바꾸고나면, 내가 읽지도 않은 책들로 책탑을 쌓아두고도 또 내가 갖지 못한 책들에 연연해 하고 집착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 책에서 정녕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난 내맘대로 책 속에 등장하는 책을 통하여 이런 것을 깨달았다.

아니라구?

정답은 없다, 내 맘이다, ㅋ~.

 

"트리포의 금빛 나팔은 정교하게 만들어졌군."

텔레마크의 보물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제노도투스가 말했다. "마법은 오직 만드는 방법에 있어. 이해하겠나? 여기엔 주술 같은 게 전혀 사용되지 않았지. 내가 감지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그 말에 펀웬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이 마법의 나팔을 되찾기 위해 무수한 공포와 용감하게 대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제1마법사는 이 나팔에 특별한 힘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건가?

"세상에는 마법 말고 다른 힘도 존재해." 늙은 마법사가 나팔을 왕족인 주인에게 돌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리포는 죽은 이들까지도 그 소리를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너무나 완벽한 악기를 만들었어. 그는 주문이나 용의 노래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만 만들었지. 나도 그처럼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264쪽)

세상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해도,

인터넷이 발달하고,

그리하여 그것들이 부려내는 재주가 마법보다 판타스틱하다고 하여도,

세상에는 마법 말고 다른 힘이 존재한다는 것.

과학의 발달이나 인터넷의 발달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것은 다름아닌, '손수'만든 것이라는 것.

손수 만든 것이라는 말 속에는, 정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그건 마음이라는 말을 또 담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손수'내지는 '정성'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마음'을 능가하는 것은 없나 보다.

난 그렇게 믿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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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15 21:05   좋아요 0 | URL
책은 삶을 가꾸려고 있고,
책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가꾸는 사람이고,
책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사랑스레 가꾸는 사람이겠지요.
저는 이렇게 느낍니다.

다른 분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을 테지만요.

그런데,
책뿐 아니라,
밥을 짓고 먹을 적에도
옷을 빨래하고 입을 적에도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과 놀 적에도,
언제나 이러한 마음 그대로예요.
 
사람 보는 눈 - 손철주의 그림 자랑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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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의 그림 자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사람 보는 눈'은 대단한 책이다.

기자 출신의 미술평론가답게 '그의 그림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번엔 '사람 보는 눈'이란다.

'관상'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형상의학'차원에서의 '망진'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이쯤되면,

'청맹과니가 아닌 다음에야, 겸양이라고는 모르는 자화자찬으로 무장한 생색내기의 달인이라고 퉁쳐버릴텐데,

그를 통하면 독특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것이 간과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으니 말이다.

그는 앞서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누가 묻는다. "그림에 좋고 나쁜 것이 있습니까?"

나는 답한다. "좋고 나쁜 것이 있다기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지요."

또 묻는다. "그림은 만드는 것이지요?"

또 답한다. "만들어야 그림이 생기지요."

다시 묻는다. "만든 것이 어떻게 감동을 주나요?"

다시 답한다."생긴 듯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람 그림에서는 생김 생김새를 따질 노릇이다.

사람 그림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변덕이 죽끓듯하여,

좋아하는 작가도 때와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답이 달라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손철주'다.

난 그동안 화려한 수사를 쓰는 사람은 별로라고 했었는데,

그의 글을 깊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화려한 수사'를 제일 먼저 떠올릴테고,

"이, 뭥미~?"하고 툴툴거릴 수도 있을테지만,

그의 글은 화려하기만 하지 않다.

화려하고 고혹적인 동시에 깔끔하고 청순하다.

 

난, 그림과 글을 벼려내는 솜씨로 미루어 그의 '사람을 보는 눈'을 살짝 엿보거나 전수받고 싶었나 보다.

 

'일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 꽃을 보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 숲을 걷는 사람과 물에 가는 사람 들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 는 그의 말 속에서,

'사람이 그림 밖에 있는 사람 그림'도 있다...를 읽어낸 내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

다시말해 화폭에 사람이 없는 그림도 있지만, 그런 그림들이라고 하여 사람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화폭에 사람이 없는 그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람을 보는 눈'은 밝히고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 그림들을 죽 펼쳐놓고 보면서 깨단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모자라,

'그림 밖의 사람은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고, 그림 속의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많다. 이럴진대 사람 그림을, 그려진 사람으로만 여기겠는가. 보고 또 볼 일이다.' 라고 눙친다.

 

말 그림 하나를 본 두보가 '살만 있고 뼈가 없다'며 탓했다. 소동파는 정색하고 두보를 나무랐다. '길고 짧은 게 있는데 살진 것만 보는가.' 다들 보이는 것만 본다. 살과 뼈, 길고 짧음, 설혹 모두 다 갖췄다고 명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소매가 길면 춤 잘 춘다지만 장식과 기교는 군더더기가 되기 쉽다. 겉모습을 그려도 설탄처럼 고갱이를 콕 짚어내야 잘된 그림이다. 그게 어디 그림뿐이랴.(19쪽)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식과 기교는 군더더기가 될 수 있으니, 고갱이를 콕 짚어내야 잘된 그림이겠다.

화려하고 고혹적인 동시에 깔끔하고 청순한 그의 글맵시처럼 말이다.

'그게 어디 그림뿐이랴' 뒤에는 '사람을 보는 눈'도 마찬가지라는 의미가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소제목을 뽑아낸 품을 보면,

각양각색, 다채롭고 버라이어티한, 이런 저런사람들 속에서 그가 어떤 사람들을 보고 있는가 하는 그의 '사람보는 눈'을 짐작할 수 있겠다.

김홍도의 '세마도'를 두곤 '저 사내의 느긋함이 부럽다'고 하며,

한시각의 '삿갓 쓴 사람'을 일컬어 '덜 그려도 다 그렸다'라고 한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傳해지는 '미인화장'을 두곤 '꾸민 티와 노는 짓'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유신의 '포동춘지'를 가지곤 '옷자락에 꽃향기 나눌 친구'라는 제목을 뽑아냈다.

 

'꽃사랑도 지나치면 밉보인다' 강렬하게 시작해서 얘기를 어찌 풀어나가나 했는데,

'두보 같은 대시인의 탄식이 그렇다'느니, '왕안석의 토로는 더 안쓰럽다'느니, 하다가는...

이내, '아끼는 마음도 유만부동, 이 정도면 속이 간지러워진다'며 은근슬쩍 구렁이 담을 넘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아흑~--;

이런 문장은 또 어쩔 것인가 말이다.

멀쩡한 사내들이 왜 봄날의 꽃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해댈까. 아무려나, 다 봄이 짧은 탓인데 어쩌겠는가. 봄은 짧아서 황홀하고 황홀해서 훅간다. 꽃인들 다르랴. 열흘 붉기가 어려울 때, 꽃은 서글피 아름답다.ㆍㆍㆍㆍㆍㆍ (59쪽)

책을 읽는 내내 눈만 환해지는게 아니라, 마음까지 밝아지고 환해지진다.

이쯤되면 두루두루 호사다.

하지만, 이런 글 속에서 느끼게 되는 단 하나는,

화려하다 못해 흐드러지는 수식이어도,

그게 자연의 일이고, 또 진심을 담고 있다면...그게 장식과 기교라는 군더더기가 아니라 고갱이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이 지금의 손철주에게 '마침'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젊었더라면 아무리 글이 화려하고 고혹적이더라도 농익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테고,

좀 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깔끔하고 청순하다기보다는 초라하고 궁상맞게 느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던 이런 구절이 한몫을 하는데,

우리는 중늙은이다. 얘기는 연애담으로 올라갔다가 금방 회한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 젊은 여자들의 물 오르는 푸르름을 뒤로하고 우리는 조락한다고 했다. 청춘은 축복이고 여자는 은총인데,축복과 은총을 넘보는 우리의 눈길은 추파라고 했다.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득한 것이 아니라 머쓱한 것이라고 했다.

'마침'하면서 '맞춤'하기까지하다.

 

예를 들면,

'눈동자가 또랑또랑한데다 앵둣빛 입술이 남정네를 안달하게 만들거라며, 이 저녁에 기생이 부릴 수작이 눈에 선하다'는 그림 설명 바로 밑에,

'그 그림에 그 대거리다. 다들 멋들어지게 논다' 라고 첨언하는데,

그의 입을 통해 나오니 풍류가 되고 추임새가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농짓거리나 욕 이상도 이하도 아닐 뻔 했다.

 

초상화에서는 터럭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만큼 외양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의 초상화는 '傳神기법'을 큰 자랑으로 삼는다. '정신을 전달한다'는 얘기다. 모델의 정신까지 화면에 살려내는 이 기법은 눈동자 묘사에 성패가 달려 있다. '눈은 정신을 빛내고 입은 감정을 말한다'고 했다. 송인명 초상의 백미는 입이다. 입은 '口心'이라 했다. ㆍㆍㆍㆍㆍㆍ 사람 좋아뵈는 이 인상은 저항하기 힘든 포용력으로 비친다. 그의 품성이 손에 잡힐 듯하다. 초상화는 서양 것이 눈에 쏙 든다는 사람이 많다. 인물을 닮게 그리는 솜씨, 휘황찬란한 복색, 자르르한 유화의 기름기는 보는 이의 눈을 현혹한다. 우리 초상화는 어떤가. 색은 칠한 둥 만 둥, 붓질은 듬성듬성, 게다가 작은 종이나 천에 그려 압도하는 위용이 없다. 그렇다면 비교우위가 어디에 있는가. 앞서 말한 '전신', 곧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얼굴을 통해 정신을 그리는' 방식이다. 겉을 꾸미느라 속을 놓치는 초상화는 허깨비 인물상에 머문다. (63~65쪽)

 

수묵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물의 거죽보다 사물의 뜻을 그리는 방도로 각광받았다.(70쪽)

 

결국 그림이라는 것은 사물의 거죽을 통해 사물의 뜻을 그려야 하는 거라고 얘기하고 있다. 사람 그림은 얼굴을 통해 정신을 그려내고 또 전달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 보는 눈'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거죽'이나 '사람의 얼굴'을 미루어 '사물의 뜻'과 '사람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윤두서의 <자화상>에는 이런 평이 달렸다.

처음에는 옷도 귀도 다 그려진 상태였지만 세월이 가면서 닳아버렸다.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데, 그게 묘한 아우라를 빚는다. 공재의 됨됨이가 궁금하면 자화상을 보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기보다 실존이 본질이다.(99쪽)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기보다 실존이 본질이다'는 말은...

사물의 거죽이 사물의 뜻을 이미 담고 있다는 뜻이겠고, 사람의 얼굴이 사람의 정신을 이미 담고 있다는 뜻이니,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아주 멋지지만, 멋지다고 하고 퉁쳐 버리기엔 너무 큰 뜻을 담고 있다.

처음 옷도 귀도 다 그려진 상태였을때도 '실존'이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닳아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 상태인 지금도 '본질'은 훼손되지 않았다.

그러니 실존이 곧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의 옷이나 귀가 장식이나 기교 따위의 군더더기가 아니라, 고갱이인것은 명명백백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다 닳아 얼굴만 허공에 붕 떠 있는 지금도 고갱이가 흐려지거나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실존이 본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것은 답을 찾아가는 길이 된다. 옛것에서 얻은 앎이이 되지못하는 것은 옛것의 결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자의 결핍일 뿐이다.(152쪽)

손철주의 글을 읽노라면 산해진미,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같아서 황홀하다.

함포고복하고 배 두들기기에 충분하다.

맞춤법이나 어법 내지는 오ㆍ탈자를 가지고 거슬렸던 적도 없기 때문에, 위의 문장은 한참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함'이라는 낱말이 '힘'을 잘못 적은게 아닌가 싶었다.

왜냐하면 '결함(缺陷-이지러지고 빠지다)과 대구가 되려면 '함'은 결함과는 반대 의미여야 되는데,

자꾸 결함의 '陷(빠질 함)'만을 떠올렸다.

앞의 함은 '다,모두'의 뜻을 가진 咸이었다.

이런 문장의 진의까지 깨닫게 되고나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비밀 댓글로 저 '함'은 지행일치의 그 '함'인 것 같다고 해주신 분이 계셨다.

그러고 보니, 말된다.

알다와 행동하다, 앎과 함~

 

이 책이 지금의 손철주에게 '딱'이라고 했던 또 하나의 '예'다.

봄날 풍정을 그렸는데 맛문한 여름의 꿀잠과도 맞다. 할 일 없어서 낮잠 자는 게 아니다. 마음이 편해서 잔다. 눈이 바깥을 보면 마음도 바깥으로 간다. 마음을 거두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여름날의 낮잠은 엉킨 시름을 풀어준다. 잠시 눈을 감아보라. 바쁘면 하루가 짧고 고요하면 하루가 길다.(170쪽)

김홍도의 '낮잠'을 설명한 그림이다.

난 닉네임이 '또 자니?'의 'jani'일 만큼 잠에 일가견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하나, 둘, 셋, 레드썬~!'처럼 잠들 수 있다.

그래도 염치라는건 있어서, 

벌건 대낮에 낮잠나는 제자를 보고 공자가 화를 냈다더라...하는 문장을 만나면 마냥 허허로울 수만은 없는데...

김홍도를 편들고 나선 손철주의 저 문장이 내게도 힘이 된다.

하지만, 좀더 이르거나 늦은 나이의 그를 통해서 나왔다면...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못하고 허물어진 담장은 회칠을 못한다는 공자의 지청구를 들었어여 했을 것이다.

 

또 이런 문장은 어떤가?

신윤복의 남녀 통정에는 관계의 금칙을 벗어나려는 모종의 심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트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관계인데, 관계를 넘어서야 이뤄지는 사랑. 그 사이에서 도리는 갈등한다. 도리가 감시하기에 사랑이 뜨거워지는 그 얄궂은 심리와 정황을 신윤복은 늘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206쪽)

내가 언젠가 읽었다던,

 '우리는 중늙은이다. 얘기는 연애담으로 올라갔다가 금방 회한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 젊은 여자들의 물 오르는 푸르름을 뒤로하고 우리는 조락한다고 했다. 청춘은 축복이고 여자는 은총인데,축복과 은총을 넘보는 우리의 눈길은 추파라고 했다.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득한 것이 아니라 머쓱한 것이라고 했다'

는 자중자애하는 문장을 통하여 그의 속내를 이미 들여다봤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래야 단원과 혜원을 향한 그의 이랬다 저랬다 하는 찬사가 변심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가 되는 구절이다.

단원과 혜원의 진면목이 그러하듯이 조선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풍속화는 은근한 에로스가 진국이다. 다소 싱거운 듯해도 자극을 걷어낸 담박한 맛이 일품이다. 봄은 덧없다. 오는 듯 가버린다. 그 찰나적 황홀이 한 줌의 재가 될지언정 봄날의 상사는 누가 말려도 핀다. 그래서 사랑은 가없다. 조선의 풍속화는 봄날의 짧은 황홀과 아찔한 유혹, 남녀의 가녀린 떨림과 끌림을 담는다. 되바라지지 않게 묘사된 사랑의 풍속화, 그것이 남녀의 춘심을 바라보는 우리 조선의 오래된 서정주의다.(211쪽)

인생의 봄이나 여름을 살고 있는 사람이, 봄은 덧없다,오는 듯 가버린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다면...누가 콧방귀나 뀌었겠는가 말이다.

'젊은 여자는 봄을 타고 늙은 남자는 가을을 앓는다. 갈바람에 울적한 백거이는 '취한 내 모습 서리 맞은 단풍/발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하며 한숨지었다. 올 가을 단풍에 또 누구 가슴이 멍들까.(225쪽)'

라는 읊조림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에 읽는 이에게까지 전달되는 여운이 있는것이니까 말이다.

강세황은 산수화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바 있다. '진경은 닮게 그리기 어렵다. 참된 것을 감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참'은 숨겨야 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인적 없는 산수화가 이윽고 그윽해졌다.(216쪽)

내동 같은 얘기이지만,

나같은 사람이 책 한권 읽었다고 '사람 보는 눈'을 하루아침에 전수받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이고,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찾아나서는게 빠르겠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의 제일 끝에라도 가서 줄을 서는게 빠르겠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사람보는 눈'에 관한 비법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쯤 되겠는데,

다시말해 '사물의 거죽'이나 '사람의 얼굴'을 미루어 '사물의 뜻'과 '사람의 정신'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쯤 되겠는데,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 얘기겠느냐 말이다.

계획되고 계산된 여백과 절제의 미, 극소에서 극대의 효과를 끌어내고...따위는 내겐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계획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냥 마음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데...그것이 자연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음 좋겠다.

다시 말해, 난 죽었다 깨어나도 '사람을 보는 눈'따위는 가질 재간이 없으니,

저런 눈을 가진 사람 근처에서 얼씬거리다가, 간택되어지는게 더 빠를 거라는 얘기이다.

 

고로 이 책을 읽은 감상은, 이쯤으로 정리해야 겠다.

나 같은 凡人들은 그냥 마음 움직이는대로 살아도, 그게 크게 하늘이나 자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보는 눈' 따윈 의식하지 말고,

한번 사는 인생, 지지고 볶고 웃고 다투고 화해하고 토라지고... 하면서 순간 순간을 가열차게 살면 되는 것이다.

신은 내게 따로 '사람 보는 눈'은 주지 않으셨을지 모르지만,

사람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사람 저사람 보고 고르는 유난 떨지않고,

수더분하고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분지족하자,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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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10 16:18   좋아요 0 | URL
읽을 마음이 있으니 책도 삶도 사람도 읽을 수 있어요.
양철나무꾼 님 스스로 마음이 맑아지고 싶으니
어느 책을 읽더라도 마음이 환하게 맑아지면서 트일 수 있구나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3-11-15 15:48   좋아요 0 | URL
항상 좋고, 긍정적인 말만 남겨주는 함께살기 님.
고맙습니다여, 꾸벅(__)

2013-11-10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3-11-15 15:51   좋아요 0 | URL
흠~~, 책이 무지 좋았습니다여.
저 앎과 함의 귓속말은 쌩유~^^

아무개 2013-11-11 09:10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보내주신 속속들이 옛그림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이 책도 장바구니에 담아 놨는데, 역시나 리뷰 읽고 나니
사야겠습니닷!!

날이 갑자기 추워졌네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양철나무꾼 2013-11-15 15:53   좋아요 1 | URL
네, 손철주는 강신주와 더불어 절 실망시키는 일이 좀처럼 없더라구요, ㅋ~.
님도요~^^

하늘바람 2013-11-11 11:15   좋아요 1 | URL
님 리뷰는 너무 재미나서 읽고 다시 읽고 싶어져요

양철나무꾼 2013-11-15 15:55   좋아요 1 | URL
음메, 기죽어~(,.)
예쁘고 잼난 동화책까지 쓰시는 님이 거럼 안되는거 아시죠???
동화책 참 좋더라구요, 잘 봤어요.^^
 
여행자의 서재 - 길에서도 쉬지 않는 책읽기
이권우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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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뉴스를 들으니,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에서 20여분간 불어로 연설을 한게 이슈더라.

박 대통령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소개되고 있었는데,

이번 불어 연설의 저변으로 40여년전 프랑스 파리로의 6개월 동안의 유학을 들고 있었다.

난 여기서 여러가지 딴지가 걸고 싶어지는데 꾹참고,

'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자국어도 아닌, 현지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것 하나와,

대한 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건 당연한건데,

저렇게 '한국어'까지 꼭 집어넣어서 5개국어가 되어줘야 하는건가...하는 두가지만 언급하겠다.

저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그렇지 않고는...하나도 중요하지 않은것 같은데,

그럼, 바꾸어서...과연 박 대통령은 프랑스 현지인이 불어로 묻는다면, 말귀 알아먹고, 의사소통할 수 있을까?

나 혼자만의 쓸데없는 기우이기를 바란다.

 

난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에 연연해 하는 부류이다.

바꾸어 말하면, 낯선 여행이 번거롭고 서툴다.

'이권우'식으로 얘기하자면, '지적 호기심'이 영 꽝이다.

낯선 장소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안되는 대화를 하고,

그리고 정체 불명, 출처 불명의 이상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게 괴롭다.

 

차리리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맨날 먹던 음식을 먹고 내 형편과 분수에 맞춰 사는게 낫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여행'을 번거로워 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덜 성숙한 나이에, 공부를 핑계로 외국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나를 제대로 번역'은 커녕 간단한 의사소통도 힘들어 손짓, 발짓을 동원하면서도 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느꼈던 지독한 고독감은 그 무엇으로도 상쇄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외로움은 외부적인 요소이고, 고독감은 내부적인 요소이다...라고 얘기하고,

또 누군가는 외로움은 Loneliness이고, 고독감은 Solitude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전자는 '혼자 있는 고통' 을, 후자는 '혼자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여행'이라는 사실(fact)을 가지고도,

누군가는 '혼자 있는고통'을 느낄 수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혼자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나의 경우는 그게 고통이라는 중압감으로 다가왔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사설이 긴것은,

이 책이 '이권우'님의 책이 아니라면 내가 들춰볼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서둘러 답을 말하자면, 지식인에게 여행은 번역이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행기 곳곳에서 번역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문맥마다 서로 다른 뜻으로 쓰고 있으나, 결국 지적인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해준다 싶었다.

 

행간이 많고 품이 넓은 원작을 번역할 때 좋은 문구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문장을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의미에서 외부의 맥락과 부딪히는 와중에 내가 모어 사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러면 상대의 사회와 비교할 수 있는것처럼 모어 사회의 상황을 내가 대변하듯이 말해도 는지 ㆍㆍㆍㆍㆍㆍ  이때 상대의 사회와 모어 사회 사이에서 외관의 유사함에 의지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접점을 발견하려면 또 다른 번역 능력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쓴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느낀 바를 설명한 대목이지만,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이보다 좋은 여행론이 없을 듯싶다. 안에 있을 적에는 잘 알고 있다 싶으나 바깥에 나가야 비로소 깊이 알지 못했다고 깨닫는 법이다.ㆍㆍㆍㆍㆍㆍ "원작의 생명력을 보존하려면 번역자는 그 원작을 낳은 토양을 지반째 옮겨야 하지만, 결국 번역에서 가필하거나 새로 쓰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번역은 원문이 지니는 가능성의 폭 안에서 그 생명력을 되살려내는 금욕적 실천이다."(35~36쪽)

암튼, 지식인에게 여행이 번역이고 아니고, 의 여부를 떠나서,

번역이라는 말이 '지적인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말이고 아니고, 의 여부를 떠나서,

그동안 내가 출처를 알 수 없었으나, 늘상 마음 속에 새기고 살던 문장의 '원전'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의미가 있었다.

'행간이 많고 품이 넓은 원작을 번역할 때 좋은 문구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문장을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라는 문장 말이다.

원전의 번역가는 얼마나 제대로인지, 훔쳐보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근데, 얼마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을 보면서도 느낀것이지만,

작가가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자랑하고 눌변이라도,

내가 거기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책이 재미없어 지기도 하더라~--;

때문에 이 책도 그렇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된다.

 나는 주목한다. 그는 베이징을 여행하고 나서 그 체험을 중국연구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베이징에서 그는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 혹은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고뇌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의 모습은 지역 연구자인 내게 연구와 아울러 여행의 의미마저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

 

 무릇 지식인에게 여행이란 추상에서 구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식이란 어차피 회색을 띤 이론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푸른 생명의 나무는 없다. 그러니, 박차고 나가 생명의 나무를 찾으려 할 수밖에. 물론 구체성으로서 여행은 다시 추상으로서 여행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두 범주의 충돌에서 우리는 특수성이라는 빛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여행기가 결국 문학의 한 갈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41쪽)

위 단락은 그 연장선 상이기도 한데,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하는 것들,

그것들은 자신의 체험과 경험을 동반하지 않은 ' 것'이었을때는, 이론뿐인 추상에 불과하다.

무릇 책이 그렇다.

책의 내용들을, 책의 이론들을...

이해하고, 체화하여 내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그냥 한낯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과 공식과 지식이라도,

내가 거기 흠뻑 담굴질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내 것'은 아니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문장' 인 동시에 '추으로서의 여행'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이 왜 필요한가?

이 책에서는 '물고기를 잡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모국어의 고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세살의 여행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많은 걸, 깊게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아래 인용된 책의 저자가,

아무리 세상에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문장은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여 훌륭하기 그지없지만,

과연 모국어의 본뜻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세살 아이의 여행은 호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차라리 '세상에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생각이 짧은 사람 정도로 치부해 버리면 됐을테니까 말이다.

 

세상에는 유희가 생략된 유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단다.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단다. 네게는 세 살부터 시작된 이런 여행이, 한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사치가 되는 사람들이 많이 많이 있단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들을 부단히 많이 보아서, 끝없는 속도전에서 비롯되는 초조와 이기심으로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렸을 때마다 스스로 발광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네 마음을 뜨뜻하게 덥힐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을 느끼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나누고, 함께함으로써 더 많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웅숭깊은 사람으로 자라주렴. 네가 살아있는 한 온 세상이 너의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담그고 느끼거라. 그 안에 네가 안아줄, 너를 안아줄 모든 것이 다 한데 어우러져 있단다(115쪽)

 

책을 많이 읽게 되면, 어떤 얘기가 빈말이고 어떤 얘기가 알차고 충실한 얘기인지 체험하지 않아도 용케 알게 된다.

빈말은 아무리 성찬이어도 공허하고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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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06 03:40   좋아요 0 | URL
음... 세 살 아이한테 저런 말을 하면서 여행을 한다면... 좀 재미없지 않을까 싶어요 ^^;;;

세 살 아닌 여섯 살 아이하고 늘 이곳저곳 함께 다니는데,
아이들은 그저 뛰어놀기만 하면 넉넉해요.
스스로 뛰어논 적 없는 아이들은 사회를 읽는 눈도 떨어지리라 느껴요.

그나저나 이권우 님은 스스로 '지식인'이라 여기는군요.
지식인 아닌 '보통 사람'으로 여길 수 있으면
여행이 한결 가볍고 즐거울 텐데.

..

예전에 김대중 님이 대통령이 된 뒤에
미국에 가서 영어로 아주 '유창'하지는 않고 '전라도 사투리 섞은 말씨'로
기나길게 연설을 해서 신문마다 '칭찬'을 한 적 있어요.
아마 1998년이었지 싶어요.
어느 신문도 '한국말 냅두고 영어로, 게다가 통역자 냅두고 영어로 말한' 일을
나무라지 않더군요.

박근혜 님한테도 틀림없이 통역자가 있을 텐데
통역자가 할 일을 왜 그분들이 스스로 하면서
지식 자랑을 하려는지 참으로 안쓰럽지요.

1998년에 한국에 온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사람이라 네덜란드말 하지만,
네덜란드말 통역자가 제대로 통역을 못하니
영어 통역자를 붙여서 영어로 말했어요.

아마, 대통령들께서는 영어 통역자나 프랑스말 통역자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11월이다.

滿山紅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온 산에 단풍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관찰하면 단풍이 꼭 붉게 물들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은행잎은 노랗게, 느티나무는 갈색으로...물든다.

그래도 우리는 '온산에 울긋불긋 단풍들었다'라고 표현한다.

이걸 대표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잘못 학습된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속에 뿌리박힌 생각을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믿음이 너무 강하면 믿음의 원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 그 믿음들이 뒤엉켜 고집이 된다.

이쯤되면, 나이들어 갖게 되는 '올곧음'은  '고집'으로 비취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나보다...생각할 즈음,

이런 구절을 발견했었다.

신앙은 어리석을 수 있으나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한다.

'고집'과 '신앙'의 공통점은 '올곧음'일까, 아님 '융통성 없음'일까?

어찌됐든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다.

부러지거나 꺾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낭패이다.

 

올 가을 마지막 단풍 구경이 될듯하여 주말에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에 가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라 하는 <데이비드 호크니 :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겸사 겸사 다녀오면 좋을 듯 하다.

 

근데, 난 아무래도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가 타입은 아닌듯,

'데이비드 호크니'관련 책으로 모자라서,

단풍도 '강판권'의 '나무열전'을 들추고 앉았다.

 

거기 '바람 타고 열매가 날아가는 단풍나무(楓)'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재밌다.

 

  가을 단풍을 보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상(詩想)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단풍을 노래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최신명(崔信明)도 「풍락오강냉(楓落吳江冷)」, 즉 '단풍이 찬 오강에 떨어지네'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정세익은 이 시를 보고 명성이 높았던 최신명에게 실망했습니다. 정세익은 최신명의 시가 높은 명성과는 달리 보잘것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보는 바가 듣는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고사성어 같은 일이 흔합니다. 단풍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가을에 유명한 곳을 찾아갑니다만, 실제 가보면 실망하기 일쑤입니다. 때론 단풍보다 사람만 구경하고 오지요. 그러니 멀리 가기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단풍을 즐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죠.

                                                                                                                  ('강판권'의 '나무열전'280쪽)

 

암튼, 가을 단풍을 봐서 였는지 어쨌는지...여기 시인이 아닌 시인이 한명 탄생했다, ㅋ~.

친구가 나에게 보내준 시인데(얼쑤~♬),

시어를 고른 품이나 생각의 깊이 따위,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단풍

 

붉을 단 丹, 단풍나무 풍 楓

단풍이라고 다 붉기야 하랴마는

오롯이 우듬지에 홍조띤 잎새 매달고

찬연한 햇살 누리는

가을 한낮

이 한 순간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사랑이 그토록 사무치면

이렇게 붉어질 수도 있음을 끄덕이리라

 

소나무 숲

단풍이 아니올시다

제선충 먹어

제 몸 태운 병마조차도

겉보기엔 화르르 타오르고 남은 재처럼

그리 보인다

 

가을이면 마지막 기운을

모두 모두어서

붉게 물들인 낙엽

가슴에 남기지 않고 뚝뚝 떨구는 우듬지 그 마음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닐수도 있구나

다 벗어버리고도

너에게로 벋어있는 짧은 팔들로도

사랑을 보여줄 수 있구나

 

사랑은

단풍처럼.

 

사진의 단풍은 또 딴 친구에게서 업어 왔다, ㅋ~.

가을 단풍마저도 나 혼자의 힘으론 즐길 수 없는 것인가, 정녕~--;

 

 

 

 

 

 

 

 

 

손철주의 <사람보는 눈>이란 책이 나와주셨다.

당근 설레발을 치며 구입했으나, 11월5일 배송 예정이다.

내가 딴건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지만서도,

'사람보는 눈'은 '쫌' 있는것 같다.

시를 보내주는 친구, 사진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어...

앉아서 가을을 즐길 수 있는 걸 보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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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1-01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풍이 산마다 들었더라구요! 페이퍼를 보니, 가까운 산에라도 가봐야 할 까봐요. 집에서 도보로 20분만 가면 관악산이라는^^
시를 보내주는 친구, 사진을 보내주는 친구...멋진 친구분들을 두셨네요.^^ 그만큼 양철님의 인덕이 깊어서 인듯합니다~
11월 아름다운 단풍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흠...위 단풍 사진을 보니 갑자기 이효석님의 <낙엽을 태우면서>가 생각납니다. 하하~

양철나무꾼 2013-11-05 18:15   좋아요 1 | URL
관악산 아래 그동네 알아요, ㅋ~.
전 집에서 좀만 움직이면 북한산이고,
집 바로 뒤가 나즈막한 야산(약수터가 있는)인데...
십여 년을 살면서 한두번 올라갔다는...ㅋ~.

이 가을 가기전에, 11월 가기전에 우리 try to해보자구요.

노이에자이트 2013-11-01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산은 온갖 빛깔이 다 모여있으니 울긋불긋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잘못 학습된 표현이 아니니 양철나무꾼 님도 마음껏 사용하셔도 좋은 표현입니다.

양철나무꾼 2013-11-05 18:18   좋아요 1 | URL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파랗게 파랗게 높은 하늘,
가을 길은 비단길~^^

이래도 된다는거죠? 감솨~(__)

프레이야 2013-11-01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놀처럼 다층의 붉은빛 낙엽, 이곳엔 11월 중순까지도 절정이지요^^
이 계절에 걸맞게 이브 몽땅의 노래를 선사해준 양철님 쌩큐~~
참 좋아요^^

양철나무꾼 2013-11-05 18:20   좋아요 1 | URL
엄머머~(버선발로...헐레벌떡) 프레이야님이시당~(부비 부비)
저도 알라딘 서재 활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아서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지만,
그동안 넘, 넘, 넘,
적조하셨던거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