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소연'이라고 하면 '마음 사전'으로 처음 만나고,

'시옷의 세계'라는 산문집으로 입지를 굳혀셔 그런지,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집을 읽는데, 왠지 낯설었다.

어렵지 않은, 일상의 흔한 낱말들을 시어로 썼는데도,

이상하게 다가오지 못하고 자꾸만 겉돌아서, 읽기가 좀 힘들었다.

 

처음엔 이게 '마음사전'의 그 방식이랄까 형식이 강하게 각인되었던 터라,

익숙한 예전의 산문형식을 구태여 운문 형식에 꿰어맞출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녀가 낯설게하기 기법을 취한 건,

산문과 운문이라는 형식적인 면이 아니라,

단어나 낱말의 고정관념이 주는 선입견 같은 거였나 보다.

 

왜냐하면 요번의 그것도 시집의 형식을 취했지만,

시라기보다는, '정의 내리기'가 특징인 사전 형식으로 씌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 하면,

'자연이나 삶에 대하여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글'이 시라는데,

이 시집의 것들은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라기보다는 대표성을 띤 것이,

살짝 관심을 분산시키면 중언부언 말이 길어지는 것이,

내가 보기엔 산문 형식에 가깝다.

 

오, 바틀비

 

  모두가 천만다행으로 불행해질 때까지 잘 살아보자던 맹세가 흙마당에서 만개해요, 사월의 마지막 날은 한나절이 덤으로 주어진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공평무사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날아보자던 나비들이 날개를 접고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는 봄날이에요, 저것들을 보세요, 금잔화며 양귀비며 데이지까지 모두가, 아니오, 아니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루를 견뎌요,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질 때까지 모두가 눈물겹게 불행해질 때까지, 온 세상 나비들은 꽃들의 필경사예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쉬는 한숨으로 겨우 봄바람이 일어요, 낮달이 허연 구멍처럼 하늘에 걸려요, 구멍의 바깥이 오히려 다정해요, 반나절이 덤으로 배달된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불행해질 때까지 시들지 않겠다며 꽃잎들은 꽃자루를 꼭 붙든 채 조화처럼 냉정하구요, 모두가 완전무결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지는 해는 어금니를 꽉꽉 깨물어요,

 

위 시는 문장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문장이 끝났나 하고 쳐다보면 쉼표가 단정히 박혀 있다.

심지어 문장의 맨 마지막 진짜 마침표가 오지 않을까 기대만발한 그곳까지 쉼표가 들어 앉았다.

 

낮달이라는건 어쩌면 때를 잘못 찾아 하늘에 걸려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달은 항상 떠 있는 것이고,

태양이랑 너무 가깝지만 않으면, 태양빛을 반사해서 비치게 되어있는  것이다.

암튼, 낮달은 푸른 하늘에 하얀 색으로 걸리는 것이고,

가끔 보는 낮달보다

늘 보는 하늘과 하늘빛이 오히려 다정한건 당연지사다.


이 시는 또 어쩔 것인가?

이 시 또한 어렵거나 처음 접하는 단어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정관념과 선입견에서 탈피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주동자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럭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어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장미 꽃이 떨어지는 걸, 투신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걸 보면 시인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그동안 노력을 하면 웬만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문학적, 내지는 예술적 감수성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가 보다.

노력으로 타고난 예술적 감수성과 자질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예술적 감수성을 많이 접하다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난 간혹 어느 만큼 타고난 재능이고,

어느 만큼 노력에 의해서 연마가 가능한 부분인지,

혼란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암튼 부럽다고 퍼질러 앉아 좌절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ㆍㆍ.

주제파악을 하고 나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게 글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 아니던가?

난 노력하는 것 만큼은 자신있으니,

주제파악하는 능력만 키우면 될 듯~^^

 

수학자의 아침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겨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수학자의 삶은 시인이나 수필가의 그것과는 다르리라고 생각하지만, 선입견 되시겠다.

시인의 시어가, 수학자의 기호이다.

나름대로의 규칙과 논리를 가지고 있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쩜...자신의 논리와 가치관의 잣대를 가지고 타인을 평가하려 들지 않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잣대는 자신을 벼리고 다잡는 잣대로서만 효용을 발휘할 수 있다.

들숨과 날숨의 크기를 세어 이항대립구조를 만드는것 또한,

누구의 들숨과 날숨인가 라는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러워 하지도 않을 것이고, 낮추어 조롱하지는 더 더욱 않을 것이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하루에 한 가지씩이라도 과분하게 넘쳐나지는 않는지 말이다.

다독이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간에...

넘치지 않아야 잠재우고 다독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여행자' 부분)

이 시집의 발문은 황현산이 썼다.

'슬프지만 씩씩한 소연이에게'란다.

난 김소연의 시는 왠지 실험적인 것 같아서 불안했지만,

그래도 황현산 님의 발문은 신뢰가 간다.

혼자서

 

상가의 컴컴한 내부가 최대한 컴컴해진다

칼을 대어 틈새를 도려낸 듯 빛이 새어 나와도

 

간절함은 저렇게 표현돼야 한다

최대한 입을 꽉 다문 채

 

뺨에 접착된 핸드폰을 꼭 감싸고

최대한 고개를 숙인 저 사람처럼

 

귀는 아가미가 되었다

물고기가 되었다

흘러 다녔다

 

현수막은 최대한 환해진다

달은 관람차처럼 최대한 가까이 다가온다

 

저 마네킹은 눈동자가 있다

저 조각상은 눈동자가 없다

 

최대한 인간을 닮기 위해서

 

밤은 가장 춥다

분노는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최대한 급진적으로

집은 구겨진다

쓰레기차가 쓰레기봉투를 쓸어 담듯

마지막 아버지를 최대한 쓸어 담고서

 

컴컴한 내일들이 박스처럼 쌓여 있다

오늘이 내일을 벼랑으로 데려간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온다

휙, 내 냄새가 난다

 

반대말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 놓을 뿐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도 반대말은 없다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우편함이 반대말을 떨어뜨린다

나는 컵을 떨어뜨린다

완성의 반대말이 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쓸쓸함의 절정은 고고함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시들이 등장한다.

 

연두가 되는 고통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긍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 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멍,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포개어진 의자

 

앉을래?

의자가 의자에게 말했다

서성일래,

의자가 대답한다

 

나무들이 서 있길래

뉘어주려고 폭풍이 들이닥쳤다

우리는 누운 나무를 보며

재앙을 점쳤다

 

잠든 사람의 조금 벌어진 입술이 기어코 천진해질 시간에

계절이 바뀌었고

틈을 벌린 채 나무는 새에게

가지를 내어 주기 시작한다

 

의자 하나가 그 곁에 있고

나무의 그림자에서 의자가 쉬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의자에 앉는다

 

아주 잠깐 고달픔을 잊기 위해

찻집 창가에 앉아 있는 여자애에게

기어코 한 남자가 다가가듯이

 

의자가 되면 의자에 앉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이 되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의자가 의자에 앉아 본분을 잊는 시간

우리는 재앙을 점치지만

열애처럼 사람은 떨어져버린다

입을 약간 벌린 채로

씩씩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새로운 형식을 취하면서도 당당하고 망설임 없이,

돌아가고 구부러진 곡선이 아니라,

직선의 형태로 시가 쓰여졌음을 일컫는 것 같다.

난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때문에 김소연의 이 시집이 좋은 것은,

나에게 좋은 것은,

나도 노력하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안겨주어서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3-12-03 17:49   좋아요 0 | URL
저는 개인적으로 김소연 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 솔직히 김소연 시인이 별로 시인 같지가 않아요.
시가 주는 긴장감도 없고, 운율도 그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소연 시인은 시보다는 에세이를 잘 쓸 것 같아요.

양철나무꾼 2013-12-05 17:03   좋아요 0 | URL
헤헷~^^
평점에 속으시면 안된다는 말씀.
그래도 이 시집 전 돈 주고 샀고,
읽느라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 만드느라고 베어넘겨진 나무를 생각하면,
평점이 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여, 죄송~(__)

20324010 2019-06-26 10:11   좋아요 0 | URL
두 분 다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가 얼마나 잘 쓴 시인지 모르시고 이런 농을 던지시는 것 같아서 놀랍고도 슬픕니다. 김소연 시인은 기본적으로 시를 잘 쓰는 시인입니다. 못 알아보셨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시를 펼쳐서 읽어보셨으면 싶습니다. 긴장이 없고 지루하다면 그건 소설처럼 에세이처럼 시를 읽으려고 해서 그러신 것 같네요.

양철나무꾼 2019-06-26 14:38   좋아요 0 | URL
님의 댓글 잘 읽었습니다.
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거겠죠.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을 강요받는다고 생각하니 썩 유쾌하진 않습니다만,
그런 의도의 댓글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하죠~^^
 
눈사람 여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4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옛날, 한옛날에...아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였다.

아들을 재워놓고 새벽녁에 밀린 공부를 하다보니 항상 잠이 부족했다.

잠을 쫒는데는 차가운 아이스크림만 한것이 없었고,

그날도 새벽에 냉동실 문을 여니,

내가 사다놓은 기억이 없는데...스티로폼 아이스크림 박스 안에 하얀 아이스크림 두덩이가 들어 있는거였다.

난 쫒아지는 잠을 쫒느라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초코시럽 딸기시럽을 듬뿍 얹어 허겁지겁 먹었었다.

 

사달이 난걸 깨닫게 된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냉동실 문과 냉장실 문을 번갈아 열었다 닫았다 하던 아들이 대성통곡을 하는거다.
“너무 쓸쓸하고 외로워서...눈사람을 동생 삼으려고 했었는데, 냉장고가 고장났었나 봐. 으엉~ㅠ.ㅠ”
그 눈사람이 내 입 속으로 들어갔다는 건 영원한 비밀이고,

그런 사연이 있어서인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 시집의 제목 '눈사람 여관'을 보자 '냉장고 내지는 냉동실?'하는 엉뚱한 연상이 지어졌다.

 

암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 주변에는 입만 열었다 하면... 너무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 뿐이다.

이렇게 나와 내주변의 쓸쓸함과 외로움도 버거운지라,

글 전반적으로 묻어나는 쓸쓸함과 외로움의 정서를 감당하기 힘들어 좀체로 안 읽으려드는,

이병률의 시집을 읽게 된건, 시집의 발문을  내가 애정하는 유희경이 썼기 때문만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톡 까놓고 얘기하자면, 내가 이병률의 글에서 느끼는 정서를 그도 그렇게 느끼는지 궁금했다.

그 또한 그같이 느낀다면,

그에 미루어 감성적으로 한참 무딘 나는 감당해낼 만한 것을, 괜히 엄살 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서둘러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표현방식과 급은 다르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유희경도 비슷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내 무딘 감성을 시인과 비교하여 뭘, 어쩌겠는 거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을 따름이지만,

어쩌겠는가, 비교를 통한 경쟁심으로 전의를 불태우며,

그런 방법으로 여지껏 살아온 불쌍한 영혼인 것을~--;

ㆍ그가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가 앞서다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사라져버렸거나, 아주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내가 돌아보는 감각에서 찾아오는 여러 감정을 지우기 위해 늘 그를 배웅해야 했다. 먼저 가는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때마다, 내 안에 바람이 불어온다. 그래서 구멍이 생기는 것을 안다. 이상한 비유이지만,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엔 이것이 아쉬움이라고 생각했다.ㆍㆍ그 감정은 그가 나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나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한 감정은 더 앞선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언제나 잠시, 있는 사람이었다.(136쪽)

암튼 유희경 발문 속의 이런 구절에 기대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던 나는, 이내 먹먹해지고 말았는데...,

ㆍ그 자리엔 나도 없고 사실상 당신도 없다. 모두 잠시,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게 시인이 지우고 쓰려는 시일 수도 있지 않을까. 비밀인데,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기도 하지만, 시인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듣는 사람이다. 듣고 적는 사람이다. 그렇게 언어의 변방에서 놀라운 속도로(혹은 이동으로) 중심에 닿는 이다.ㆍㆍ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울림통을 가지고 있다.(138쪽)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의 정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하는듯 하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고 적는 사람이니까,

발문을 쓰고 있는 유희경 또한 시인이니까,

독자가 되어 시집을 읽을때는 나와 같이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거지만,

그 또한 시인이라는 자리로 돌아가면,

쓸쓸함을 흩뿌려야 된다고 얘기하는듯 해서 말이다.

 

내가 'ㆍㆍㆍ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울림통을 가지고 있다.(138쪽)'라는 문장에 집중해 있는 사이,

유희경은 이렇듯 나에게 다가오는 듯 비껴가 버리고 말았고,

난 태연을 가장하며 관심을 딴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책 뒷표지에 나오는

'아픈 데는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는 구절을 읽다가 '김선우시인'이 쓴 수필집 제목'어디 아픈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가 떠올랐고,

이 시집 바로 전에 읽었던 이영광의 시집 속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구절을 발견했었다.

적어도 이 세 시인들은 비슷하게 시작하는 발제를 가지고,

각자 자기만의 울림통을 가지고 수필로, 시로, 시집의 헌사 대신으로...만들어내는 것이 색다른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가장 쓸쓸하고 외롭기로 따지면, 이영광 시 속의 '아직도 만나니?'하는, 내게는 절규로 들린 그 문장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유희경은 시집의 헌사라는 형식을 빌어,

시인들이란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쓸쓸함을 흩뿌리는 존재들이고,

그걸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느냐는 읽는 독자의 몫이다, 라고 얘기하는 듯 하다.

하지만, '추측이 깨달음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난 그의 이런 시들을 읽으면서,

한없이 쓸쓸하고 그리하여 씁쓸 또는 쌀쌀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혼자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백 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 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를 당다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나비를 그리는데 나비가 왔다/시를 쓰는데 시가 오지 않는 것과 다르다'하는 '시는'을 읽다가는,

다락방 님, 이유경의 책'독서공감, 사람을 읽다'의 한구절이 생각났다.

그녀는 '바람의 잔해를 줍다'를 읽다가,

'내 가슴 속에 있던 고치가 찢어져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려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는 표현을 보고

소설가가 되는 걸 포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읽으며 감탄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걸 기록으로 남겼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책으로도 냈다.

그녀라면 '누에고치를 잘 키워 번데기를 탈피하고 한마리 나비가 되어 날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쓸쓸하기로 따지면, 몇몇 사람의 시가 쓸쓸한 것이고,

시가 아니고도 얼마든지 글이 쓸쓸해질 수는 있는것이지만,

모든 이의 글이 다 쓸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꿈이나 희망 따위를 노래하는 글이었음 좋겠다.

 

실은 '다락방'님이 생각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는데,

그녀의 책 속에서 발견한 '결혼은 나의 선택이다'라는 문장을,

이 시인에게 슬쩍 바꾸어 적용하고 싶은 시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하기 힘들겠다~--;'

 

면면

 

손바닥으로 쓸면 소리가 약한 것이

손등으로 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삶의 이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먹을 것 같지 않은 당신

자리를 비운 사이 슬쩍 열어본 당신의 가방에서

많은 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을 삶의 입체라고 생각한다

 

기억하지 못했던 간밤 꿈이

다 늦은 저녁에 생각나면서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그것을 삶의 아랫도리라 생각한다

 

달의 저면에는 누군가 존재한다고 한다

아무도 그것을 알 수는 없고

대면한 적 없다고 한다

 

사람이라고 글자를 치면

자꾸 삶이라는오타가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삶의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다 똑같다.

먹고 싸고 지지고 볶고...그러고 살아가는거다.

먹지를 않으면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를 비울 일도 없을거고 말이다.

먹고 싸고 지지고 볶지 않는 것은, '꿈 속의 그대'일 뿐이다.

평생 꿈같은 연애나 하고 사는 수밖에, ㅋ~.

 

낙화

 

그대가 일하는 곳 멀리 자전거를 세우고

그대를 훔쳐보는 일처럼

 

반쪽의 반쪽밖에 안 되는 나는

비겁이라는 꽃 이파리 머리에 꽂고

시시덕 시시덕 오늘도 얼마나 비겁했던가요

 

당신이 자전거 쪽으로 다가와

우산을 버리고 돌아설 때에도

나는 비겁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당신 그늘이 생깁니다

 

천 년에 한 번 사랑을 해서 그런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그토록 많은 꽃술이 매달릴 수가

천 년에 한 번 죽게 될 테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아니면 그토록 한사람의 독으로 서서히 죽어갈 수야

 

혼자인 것은 비겁하지 않은데

당신을 훔쳐보는 일은

당신 하는 일 앞에서 비겁한 일이어서

 

십 년을 백 년처럼

당신을 보러 이곳에 오고

당신은 어느 바다로 흘러가지도 않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주차할 수 없는 구역에

단독 주차하는 나를 위해

마냥 봄처럼 십 년을 당신이 있습니다

위 시는 해석은 불가능하지만, 왠지 좋았던 시다.

시의 행간에 뭔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읽으면서 자꾸 목구멍으로 울음이 차올랐다.

침을 꼴깍하고 눌러삼키면서,

목구멍으로 치미는 울음도 같이 눌러삼켰다.

그는 '눈사람 여관'에서,

'나흘이면 되겠네요/영원을 압축하기에는/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이라고 했고,

어느 시인은 달이 한번 눈 질끈 감았다 뜨는 걸 한달이라고 하던데,

이 시의 화자도 바라만 보다 말 것이 아니라면,

부디 아련한 시간도 바삐 지나 갔으면 좋겠다.

 

붉고 찬란한 당신을

 

풀어지게

허공에다 놓아줄까

번지게

물속에다 놓아줄까

이 시의 또 다른 제목은 '낙화'정도 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다지도 붉고 찬란한 당신을,

허공이나 물속에다 풀어지거나 번지게 놓아줄 수 있는가 말이다.

 

차라리, 비좁은 내 마음의 영토안에 가두어버리고 마는 한이 있더라도~--;

 

저녁길

 

문득 스승의 목소리가 악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의 반대 방향으로 자라는

나무였다는 생각을 한다

 

봄 꿈을 데려오시었다가

봄꿈을 다 꾸지 못하고 가시는

 

한 사람 발소리가

홀로 두었던 빈 곽이 터지는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잘 도착하셨나 하여

자꾸 안쪽 먼 데를 들여다보느라

며칠째 문에 머리를 찧는다

 

책을 눌러놓으라시며

내게 돌을 주워 주시던

저녁 강가의 그 손길

 

그 후로 그 무엇이 아니라

몰래 나를 눌러놓고 있음을

이제는 아시는 그 눈길

 

위 시를 읽다가, 언젠가 친구가 준 작은 돌멩이를 꺼내들었다.

원래는 더 크고 뾰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돌멩이였을 것이다.

뾰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쓸쓸하고 외로웠었을 그 돌멩이가 이렇게 작고 동글한 조약돌이 되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을게다.

 

 

친구는 돌멩이를 통하여 우주의 정기를 받아들이고 자연과 소통을 하라, 뭐...그런 어려운 말을 했던것 같은데,

난 이 시의 돌멩이처럼 문진 대용으로, 내 자신을 눌러놓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만지고 주물러댔는지, 돌멩이는 이제 맨들맨들해져 있다.

근데, 돌멩이가 날 눌러놓은 것인지,

아님 내가 돌멩이가 날아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3-11-30 20: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냉장고 문을 열때마다 조심합니다. 혹시 아이들이 먹으려고 아내가 사다둔 것을 먹지나 않을까 싶어서요. 제가 멋모르고 한번 먹었다가 애들이 눈물을 글썽였던 기억이 있어서요.

양철나무꾼 2013-12-05 17:05   좋아요 1 | URL
담배를 안 태우시는군요?
냉장고 문을 열고 군것질 거리를 찾으시는걸 보면, ㅋ~.

전, 무조건 어른이 먼저 먹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왜냐 '늬들은 나중에 더 좋은 거 얼마든지 먹을 수 있잖아~^^'

[그장소] 2015-12-11 01:43   좋아요 0 | URL
좋군요 ㅡ잘 보고 갑니다 ㅡ
돌맹이가 예뻐요~^^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할까, 해서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할까?

그럼, 분명히 잘할 수 있는 일인 동시에, 해서 즐거운 일인걸 찾으라고 하겠지만...

안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세상이 어디 그렇게 내 입맛대로 이던가 말이다.

 

암튼, 난 다락방님이 아주 부럽고 샘나고,

이곳 알라딘서재에서 나와 다락방 님은 댓글도 주고받는 사이라는게, 자랑스럽다.

그런 다락방 님과 공통점을 찾아보라면, 책을 좋아하는 것 정도 되겠다.

 

책의 독서 목록을 보니, 낯익은 게 많아서 뿌듯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락방님의 리뷰나 페이퍼를 보고 잼나 보여 내가 마구 사들여서 이고,

아직 읽지 못하고 책탑을 쌓거나 테트리스를 하면서 보관중인 고로, 실상은 마냥 뿌듯할 수만은 없다~--;

나와 다락방님은 책이라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 요리사마냥,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때로 내가 쌓아올린 책탑을 보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또 수중에 읽을 책이 없으면 마냥 불안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근데 궁금한 것이 무엇이든 정성 들여서 하면 어떤 의미로든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법인데,

책으로 공들여 쌓는 탑은 왜 자꾸 무너지는건지 모르겠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대로라면 내가 책탑을 쌓는데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공을 들이는걸로는 이정도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것 같은데,

쌓는데 내가 모르는 나름대로의 소신과 내공과 철학이 있는 듯 하다.

그러면 무너지는 것이라도 제대로 무너져서,

테트리스를 하듯, 한줄을 빼곡 채우면 없어지는 규칙 따위는 통용되지 않는걸까?

안 읽어도 나름대로의 소신과 내공과 철학이 있다면,

'쓰윽~' 소리 소문도 없이 내지는 '뿅, 뿅, 뿅, 뾰옹~'소리를 내면서 한줄 줄어들어도 좋고 말이다.

 

그러고보면, 난 독서를 하는 행위 자체도 좋아하지만,

내가 책을 읽고 흔적을 남기는 것,

내가 읽었고, 읽을 책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런 과정과 상태를 즐긴다.

독서를 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그 연장선 상이다.

그에 반해 다락방 님은, 독서를 통한 네트워킹을 즐기는 것 같다.

마실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기록들도 찬찬히 읽고,

댓글과 덧글을 달기도 하면서,

독서로 인하여 파생되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하고 또 즐기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좋아하고 독서목록이 겹치는 것 말고는,

다락방님과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걸 뼈 아프게 느꼈지만 말이다.

 

ㆍㆍㆍㆍㆍㆍ외출할 때는 지하철에서 읽을 책을 챙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책은 세상에서 나를 격리한다. 나 역시 간혹 책 속의 세계에 푹 빠져서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갈 길을 돌아왔다 한들, 나에게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그 순간은 결코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고 또 소중하다.

  가끔은 그 작은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읽고 있는 책이 마음에 든다면, 책에서 눈을 떼고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다는 우연에 기대어, 그 안의 누군가에게 그 책을 선물하는 거다. "이거 읽으면서 가세요." 또한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면 무척 반갑다. 그래서일까. 책 읽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기도 하다.(48쪽)

 

암튼, 지하철이나 카페, 도서관처럼 타인이 있는 곳에서 독서가 더 잘된다는 걸 보면,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이거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당당한 영혼인가 보다.

 

난 어디 짱 박힐 수 있는 곳,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좋다.

때론 집에서도 책상위에 앉아서 보다는, 의자를 밀어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있을때 집중이 훨씬 잘 된다.

 

게다가 다락방님은 독서를 통한 관계 형성- 네트워크를 즐기는 반면,

나는 독서를 통하여, 영혼과 더불어 독서하는 육체까지 쉬면서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독서는 내게 행위라기 보다는 쉼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또 이를 통하여 숨돌리고 한박자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그녀의 그것이, 독서를 통한 관계 형성- 네트워크라는 걸 알 수 있는 예가,

책을 읽다가 재미있으면, 가끔은 그 작은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48쪽)고 얘기하는 걸로 모자라서,

 '나도 책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한 편 상상해본다'고 하며 직접 쓴 단편소설을 보여주는데, 소설의 생명인 개연성도 확보됐고 실제처럼 리얼하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되기를 꿈꿨었는데,

소설을 읽다보니, 쓰는 것보다 읽는 걸 더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서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게 너스레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암튼, 다락방 님은 책의 '잘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이란 꼭지를 통하여, 그녀의 장점을 잔뜩 드러내는데,

이것 또한 내가 닮고 싶어 하는 바로 그것이다.

ㆍㆍㆍㆍㆍㆍ나는 하나의 전공조차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내게 주어진 능력은 아마도 학습보다는 사소한 순간들에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235쪽)

 

책을 시작하면서는,

책을 좋아하고 독서목록이 겹치는 것 말고는, 다락방님과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게 뼈 아프게 느껴졌지만,

이젠 그녀와 책을 좋아하고 독서목록이 겹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를 읽고,

'독서는 근육과 같고, 자신은 그 근육을 발달시킨 것 같다고' 하는 내가 생각했던 구절을 근사(40쪽)하다면서 인용한 것도 좋고,

'책은 세상에서 나를 격리하는, 보호해주는 벽이다'(48쪽)라는 '해피패밀리'의 한민형과 '책을 읽고 있으면 문득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나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이 든다'(50쪽)는 '한낮의 시선'의 한명재를 인용한 것도 좋다.

그녀가 '나는 그런 이야기와 표현에 감탄하는 것만을 잘하는 사람이다. 쓰는 걸 잘하는 사람과 읽는 걸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세상에는 작가와 독자가 존재하는가 보다'(60쪽)라고 너스레을 떠는 것도 좋고,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상대가 말해주지 않으면 그의 입장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추측하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155쪽)고 말해주는 것도 좋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일기와도 같은 자신의 일상 얘기를 하면서...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에게 미루어 타인을 평가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지사지'라는건 '겉보기만으로 관계가 쉽게 형성되는,

빠른 소통의 시대라고 하지만 어쩜 불통의 시대인것 같은 이 시대에는...감정의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이, 이 책을 쓴 다락방님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를 굳이 대라고 한다면...

난 미사여구로 쓰여진 글이 아니라,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쉬운 글들로 쓰여진 것을 꼽고 싶다.

그녀만의 경쾌하고 유쾌한 성격이, 곳곳에서 언뜻 언뜻 비춰진다.

 

모쪼록 다음 번엔, 그녀가 쓴 소설책으로 만나고 싶다.

건투를 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11-28 15:25   좋아요 0 | URL
책탑을 잘 쌓으려면 책마다 다른 크기와 부피를 잘 가누어야 해요.
사이사이 받침종이를 작게 끼워넣어야
책탑이 높이높이 올라가면서도 튼튼하지요~

양철나무꾼 2013-12-05 17:06   좋아요 1 | URL
이거 이거 괜찮은 팁인걸요.
이래서 책탑이 더 높아지면, 전 책탑에 갇힌 라푼첼이 되는건가여, ㅋ~.

감은빛 2013-11-28 16:15   좋아요 1 | URL
'사소한 순간들에 행복을 느끼는 게' 보통 능력이 아닌데, 부럽네요!
저는 오늘 주문했어요.
내일 받을 거예요. ^^

양철나무꾼 2013-12-05 17:07   좋아요 1 | URL
지금쯤 완독하셨겠네요.
님의 재치발랄한 리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여, ㅋ~.
 
나무는 간다 창비시선 366
이영광 지음 / 창비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턴가 이영광의 시는 힘들었다.

요번에도 여름에 쓰여진 시를 가을이 지나 겨울의 초입에서 읽어냈으니 말이다.

 

이영광이 힘든 것은 시가 어려워서이거나, 읽기 어렵게 쓰여져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인데,

읽다보면 어느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게,

그게 제대로여서...또 다른 날 보고 있는 듯 느껴져서이다.

죽음, 어둠, 슬픔 따위를 그려내고 있는데 이것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시인의 이러한 행태를 '자발적 유폐'라고 명명한다.

때로 나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고 싶어지는데, 그걸 내 '스스로 따시킨다'하여 '스.따.'라고 부른다.

 

이건 내가 감히 시인이랑 영혼의 색깔이나 냄새가 비슷하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벙어리 심정은 벙어리가 안다'고,

그의 심정을 알겠어서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말이다.

 

이 시집은 앞에서부터도 읽고, 중간에 아무곳이나 펼쳐서 거기서부터도 읽고, 뒤에서부터 읽기도 했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문구는 책 맨 뒷장 '시인의 말'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사람은 정말, 질 수 있는 걸까.

 

이 문장을 시인이 어떤 뜻으로 썼는지 모르겠지만, 내 맘대로 중의법, 반어법으로 읽었다.

 

죽음, 어둠, 슬픔 따위가 주된 정서였던 시인은 아마 '꽃이 피고 지다'의 '지다'와 연관하여 '질 수 있는 걸까.'로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피고 지는 걸로 끝나는게 아니라,

또 피어나는 걸로 윤회를 떠올릴 수 있고,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나 절망 속에 피는 꽃처럼,

희망을 함께 얘기해도 좋은게 아닐까?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널을 뛰어,

'등에 와 얹히던 손길'에 무게를 실어 보았고,

'봇짐을 등에 지다'의 연장선 상에서 '등에 짊어지다'로 생각하고 읽어보았다.

 

하느님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는 말이 생각 났고,

산은 등에 진 등짐의 무게로 오른다던 누군가의 말도 생각이 났다.

이쯤 되고 보면,

사람은 정말, 등에 거뜬히 질 수 있지 않을까?

 

'저녁은 모든 희망을'이란 시는 제 11회 미당 문학상' 을 받은 작품이다.

이 시집에서 또 만나게 되는데,

위의 두 '지다'와 비슷하면서 다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와의 해후가 반갑다.

 

저녁은 모든 희망을
                 - 이 영 광 -
 
바깥은 문제야 하지만
안이 더 문제야 보이지도 않아
병들지 않으면 낫지도 못해
그는 병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
그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 병이 좋은가
왜 나는 내 품 안에 안겨 있나
그는 버르적댄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다
침이 흐른다
혁명이 필요하다 이 스물네 평에
냉혹하고 파격적인 무갈등의 하루가,
어떤 기적이 필요하다
물론 나에겐 죄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벌 받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묻는다 그것이 벌인 줄도 모르고
변혁에 대한 갈망으로 불탄다
새날이 와야 한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천재지변을 기다린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
짧은 아침이 지나가고,
긴 오후가 기울고
죽일 듯이 저녁이 온다
빛을 다 썼는데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안 된다
저녁은 모든 희망을 치료해준다
그는 힘없이 낫는다
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대홍수가 나지 않아도
메뚜기 떼가 새까맣게 하늘을
덮지 않아도 좋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나는 내가 좋다
그는 돼지머리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소주와 꿈 없는 잠
소주와 꿈 없는 잠

물론 이 시에서는 '죄를 짓다'대신 '죄가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뭐, 동어 반복을 피하기 위한 것쯤으로 생각하면 상관없다.
(사실, 해석이야 어떻든 간에, 내 멋대로, 내 마음대로이지...어떤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 상관없다, ㅋ~.)

전에도 얘기했지만, 죄를 지어 받는 벌마저도 비교 대상이 없을때는 형벌인줄 모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에서 반의법을 읽어내지 않더라도,
'혁명'과 '기적'과 '변혁'과 '천재지변'은
희망의 다른 이름일거다.
그러니,
사람은 정말, 질 수 있는 걸까. 여기에 죄를 대입시켜 봐도 좋겠다.
사람은 정말, 죄를 질 수 있는 걸까.

세한

 

네가 참아버린 말을 나는 찾는다

네가 잊어버린 말을 나는 믿는다

설사하는 몸으로 변비를 견디듯

너를 쓰러뜨린 말들을 꼭 사랑할 것이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병원에

있었다, 다디단 중독들을 버무려

이 병실에서도 약을 짓는다

나으려 하지 않는 병에게,

웃고 있는 형제들에게 전하고 싶다

 

인간답게, 짐승답게 으스러지도록 사는 허망의

하염없이 하염없이 희망에 대해

희망의 꿈 같은 사슬과 채찍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생각되지 않았다

 

추운 날엔 살을 쓰다듬고 뼈를 만진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캄캄한 내장들을 주물러도 본다

몸은 안 좋을 것이다

몸은 안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슬픈 몸은 기쁨의 失禁을 안다

되었다, 헛되었지만 되었다

덜 살고 덜 살고 덜 살아서

슬픈 몸은 숱한 사랑의 말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유독 슬펐는데,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이란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시인은 말이 희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처 입히는 것 또한 말을 통해서...라는 걸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리하여 네가 참아버리고 잊어버린 말들 찾고 믿고 사랑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약을 짓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살을 쓰다듬고 뼈와 내장을 만지고 주무르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그러면서 몸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금지(失禁)하는 걸로 스스로를 유패시킨다.

하지만 유패시키고 유배시키는 걸로 끝나지 않고,

몸과 말의 공존과 화해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게 '헛되지만 되었다'와 '덜 살고 덜 살고 덜 살아서'라는 사실이 슬펐다.

 

이 시에서는
사람은 정말, 질 수 있는 걸까.

로 바꿔 생각해보았다.

 

'구름과 나'라는 시에서는,

배설, 카타르시스를 떠올렸다.

'참고 싶은 것은, 다 참아낼 수 없는 것'이고,

참아냈던 건 참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참아야 했던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눙치는 이 시인을 어쩔 것인가?

부디 그가,

침입한 그곳으로 문 닫고 사라지지 않고,

울고 싶을 때 참지 말고 울기를 기대해본다.

사람은 정말, 사라질 수 있는 걸까.

 

'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에선 '나무는, 오직 나무로 지워진다'고 하였다.

사람은 정말, 지워질 수 있는 걸까.를 대입시켜 보았다.

 

내가 언급한 시들 말고도 여러 시를 가지고 '질 수 있을까'놀이를 해보았다.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부디 '이기다&지다'의 그 '지다'는 적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도들

 

해장국집에 들어가 술을 시켰는데

잔을 두개 가져다준다

저는 소주를 세병 마신

한 사람입니다

이상하다는 듯 남자가 잔 하나를

도로 가져가버린다

나는 내 반쪽이 찢겨나가는 것 같다

한 사람일 수도,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있지만

<모닝와이드>는 삼월 찬바람에 쓸리는

독도를 보여준다 독도만 가면

깃발 흔들고 만세 부르고 사진 찍는

민족 문인들이나 기자들이 있겠지

업소 출신이 업소에 안 가듯

나는 독도엔 안 간다

소주잔에 떠다니는 내 심장을 본다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돌투성이 국토 너머

망망대해를 본다

모든 홀몸은 분쟁 중이고

모든 홀몸은 부유 중인데

독도는 어디에 있는 섬인가

독도는 어디에 없는 섬인가

투사처럼 비쩍 마른 밥집 남자는

소주잔에 담아간 심장을 가져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독도들'이란 시가 제일 좋았다.

'한 사람'의 '한'을 숫자 '1'이 아니라, '어떤'으로 바꿔보면 덜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진다.

'민족 문인나 기자'들 상징성이나 대표성을 부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홀로 의미있어 질 수 있다.

 

나무는 간다

 

  나무는 미친다 바늘귀만큼 눈곱만큼씩 미친다 진드기만큼 산 낙지만큼 미친다 나무는 나무에 묶여 혓바닥 빼물고 간다 누더기 끌고 간다 눈보라에 얻어터진 오징어튀김 같은 종아리로 천제에 가득 죽음에 뚫리며, 가야 한다 세상이 뒤집히는데

  고문받는 몸뚱이로 나무는 간다 뒤틀리고 솟구치며 나무들은 간다 결박에서 결박으로, 독방에서 독방으로, 민달팽이만큼 간다 솔방울만큼 간다 가야 한다 얼음을 헤치고 바람의 포승을 끊고, 터지는 제자리걸음으로, 가야 한다 세상이 녹아 없어지는데

  나무는 미친다 미치면서 간다 육박하고 뒤엉키고 침투하고 뒤섞이는 공중의 決勝線에서, 나무는 문득, 질주를 멈추고 아득히 정신을 잃는다 미친 나무는 푸르다 다 미친 숲은 푸르다 나무는 나무에게로 가버렸다 나무들은 나무에게로 가버렸다 모두 서로에게로, 깊이깊이 사라져버렸다

나무가 나무에게로 가버리고 깊이 사라져버리듯이, 나는 당신에게로 가서 번지고 스며 물들어버리고 싶다.

 

뭐니 뭐니 해도, 이런 단어 바꾸기 놀이의 절정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나무는 간다'에서 '간다'를 가지고 바꾸었을 때이다.

'움직이는 것'도 '간다'지만 '미치는 것'도 '간다'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마음이 움직여서 흠뻑 빠져버리는 것을 가지고 난 훅~ '간다' 라고 한다.

 

옛날에 이런 시인과 시집을 만났으면 '아흑~--; 죽음이야'라고 했을텐데,

이젠 '훅~간다'라고 표현하게 생겼다.

 

새로운 내 스타일대로 이 시집을 평해보자면, '지려가든 가지나 말지~(,.)'쯤이 되겠다.

아니다, '가려거든 지지나 말지~'가 더 '훅~간다, ㅋ~.

 

 

 

 

 

 

 


댓글(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3-11-26 12:21   좋아요 0 | URL
'스따'란 표현 너무 좋은 데요. 저도 그 판국이네요 ㅎ
양철나무꾼님 잘 지내시죠 ㅎㅎㅎ
죄송해요 ^^;;;; 살아 돌아올려고 책 샀어요. 오랜만에 ㅋ

양철나무꾼 2013-11-26 12:27   좋아요 0 | URL
어머머, 이게 누구예요~?
(,.)<----심드렁, 왕삐침의 이모티콘.


책이 생명물?
그렇다면 말씀만하세요.
루쉰P님이 돌아오신다면,
제가 그까잇거 책쯤 얼마든지 제공할 의향있습니다여.

근데, 진짜 반갑다.

감은빛 2013-11-26 13:07   좋아요 0 | URL
사람은 정말 질수 있을까?
저는 매일 지고 삽니다.
아내에게 지고, 사장님께 지고, 거래처 부장님께 지고.......

시를 안 읽은지 제법 되었네요.
집에가서 시집 한번 들춰봐야겠어요.

양철나무꾼 2013-11-28 14:29   좋아요 0 | URL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라잖아요.
매일 지고 산다고 말하시지만,
지는게 이기는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듯~^^

북극곰 2013-11-26 14:56   좋아요 0 | URL
이런 리뷰를 보고는 항상 시집을 한 두권 끼워서 사기는 하는데 잘 안 읽게 되네요. 아직은 저는 뭔가 읽어내는 데에 급급한가봐요.
저는 일단 나무꾼님 이런 글로 대신할래요. ^^

알라딘에서 댓글 달고 있으니 너무 좋아용 핫~!

양철나무꾼 2013-11-28 14:31   좋아요 0 | URL
저는 뭔가를 읽어내는 것보다는,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쉼이고 휴식이예요.

한마디로, 책으로의 도피쯤 되겠죠, ㅋ~.

yamoo 2013-11-26 17:52   좋아요 0 | URL
저는 자신에게 맨날 깨지는 걸요~

전 시는 읽지 않지만, 그냥 뭐...나무꾼님의 글로 대충 때울랍니다~ㅎ
전 그냥 닥치고 추천입니다~^^

양철나무꾼 2013-11-28 14:33   좋아요 0 | URL
저는 맨날 넘어지고 부딪혀 제 자신을 깹니다, ㅋ~.
시를 잘 안 읽는 yamoo님이나,
님이 읽는 어려운 책들을 못 읽는 저나,
각자 취향으로 생각하면 되겠죠~?
 

옛날 옛적, 그러니까 소싯적에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나서는, 도대체 이 책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됐는지를 모르겠었었다.

뭐랄까~,

약간 우울하고 애조띤 것같은 분위기,

하지만 관계에 대해서 그렇게 무게를 두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 가 참 낯설었다.

 

소싯적에 그런 느낌을 받았던 책들도,

나이가 들면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웬만한 책이나 작가들을 향하여서는 고개 끄덕여가며 수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나이를 먹도록 수긍을 할 수 없는 사람 중에 '고은'시인이 속해 있었다.

고은 시인을 두고는,

왜 그의 시가 좋은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지에 대해서,

수긍할 수도, 내 자신을 납득시킬 수도 없었다.

급기야, 문학외적인 무언가가 있을것이라는 생각으로 내 자신을 합리화하려 들었었지만,

한편으론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작품을 통하여 얘기해야 되는 존재라는 이중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지인 중에 고은 시인과 가까운 분이 한번씩 당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실때도,

훌륭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건 작품이랑은 별개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작가에게 있어서 작품이란 것은 삶의 반영이지, 삶과 별개의 어떤 것은 아니지 싶다.

 

내가 생각이 이렇게 너그러워진건,

지난 수요일날 들은 '시선집중'의 '미니인터뷰' 코너가 결정적이었던듯 하다.

때마침, 고은 시인이 나왔는데,

나이 여든에 55년동안의 작품 생활을 해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벼린 칼날 같은, 말 매무새 또한 깊은 감동을 주었다.

607편의 대작으로 구성된 '무제시편'이라는 시집을 향하여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무제 시편
 고은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큰 감동을 준건,

시인의 작품을 향한 열정이었는데, 시인의 말씀중 기억나는 부분만 대충 옮겨보면 이렇다.

시 한편을 가지고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시 자체로 운명을 개척하기도 한다.

시는 나의 내부에서도 오지만, 우주의 저끝에서 달려오기도 한다.

시를 쓰기위해서 깨는게 아니라, 시심 자체가 잠을 깨우게도 한다.

 

시가 우주 저끝에서부터 나에게로 달려오는 상황을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 내게 주어졌다면,

난 시인처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시를 쓰기 위해서 깨는게 아니라, 시심 자체가 나를 잠깨우고, 깨어있게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채 여물지 않은 생각들을, 글로 옮겨써야 할 때가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도 글의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을때,

머리를 싸매고 치열하게 고민을 한적도,

생각을 묵혀두어 글이 무르익기를 기다린 적도, 없었다.

글이 나의 내부에서 샘솟듯 퐁퐁 솟아날 줄로만 알았었지,

우주의 저 끝에서 글들이 나를 향하여 달려오는 경험을 한 적도, 그런 상상을 한 적도...없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글을 잘 쓰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글이 막 샘 솟을때,

글을 쓰지 않고 묵혀둬 보는 것도 글쓰기의 방법 중 하나일거라며, 떠벌리고 다녔었다.

반성한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13년 10월

 

요즘 이윤기 님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묵혀두고 야금야금 아껴 읽는다.

한장, 한쪽, 한문단, 한문장, 한단어, 한글자...허투루 할 수가 없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이윤기 님은 입말과 글말, 이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신 분이다.

글의 골짜기 골짜기마다, 구비 구비, 그런 고민의 흔적,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나도 따라서, 좋은 글이란,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좋은 글이란, 좋은 책이란...사람을 어떤 방향으로든 변하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 한권 만들어지기 위해 베어넘어지는 나무가 아까운 줄 안다면,

그런 나무를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글이나 책은 사람에게 어떤 빙향으로든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사람을 변화시켜야 하리라.

 

암튼, 나의 이런 생각들을 엿보기라도 한듯,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는 이런 얘기가 등장한다.

 

10월 13일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이 유력한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고은 시인이 수상자가 될 경우 그분과의 개인적 친분과 문학 세계에 관련된 글을 두 신문사에 써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6시부터 잔뜩 긴장한 채 서재와 안방을 오가면서 신문 원고를 메모하거나 TV 화면을 힐끔거리거나 했다.ㆍㆍㆍㆍㆍㆍ고은 시인이 수상할 경우, 밤늦게까지 써야 할 원고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ㆍㆍㆍㆍㆍㆍ고백하거니와, TV 앞에서 일어서면서 내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아이고, 살았구나."

ㆍㆍㆍㆍㆍㆍ이런 의례적인 인사 끝에, 발표 당일 내가 했던 마음고생과, 발표를 듣는 순간 내가 보였던, 이기적인 반응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긴장했다.

ㆍㆍㆍㆍㆍㆍ그러나 아니었다. 고은 시인은 나의 고백을 듣고는 한동안 탁자를 치면서 박장대소하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 안 섭섭해. 이 사람아, 그게 인간이야. 우리는 그런 인간에 대해서 써야 해!"(86쪽)

이리하여, 난 좋은 글쓰기란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누구는 호평을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악평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좋은 글이란 그런 인간에 대해 솔직히 쓰는 글이란다.

솔직히 쓰는 글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니까 말이다.

 

알라딘 서재, 이 동네에서 지금 이시간에도...

내가 아는 누군가가,

또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다.

그 누군가의 글과 책은 내게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시샘의 대상이기도 하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모두의 건투를 빈다.

그리고 부디,

사람에게 어떤 방향으로든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좋은 글과 책에 대한 무게감을, 기억하고 가슴으로 느끼기를 바란다.

 

 

 나는 자랑스러운 이태극입니다
 이상미 지음, 강승원 그림 / 파란정원 /

 2013년 11월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극곰 2013-11-22 17:29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나무꾼님 페이퍼를 보고, 이윤기님의 책 담아갑니다. ^--^

양철나무꾼 2013-11-26 11:49   좋아요 0 | URL
어머머~북극곰님이시다, 와락~( )
아흑~--; 이윤기 님 완전 죽음이예요.

숲노래 2013-11-22 17:35   좋아요 0 | URL
다 다른 사람이지만 다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요. '사랑' 하나를 놓고.
다만, 다 다른 사람이기에 '사랑'을 놓고 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3-11-26 11:55   좋아요 0 | URL
따로 또 같이, 그렇게 그렇게 어울려지내는게 삶이겠지요.
그리고 삶과 사람, 삶과 사랑은...이음 동의어 같아요.

프레이야 2013-11-23 10:51   좋아요 0 | URL
으악! 주욱 읽어내려가다가ᆞᆢ 다락방님 책이잖아요!! 그래서 그랬구나ㅎㅎ 아주많이 축하해요.
양철나무꾼님 서재에서 축하인사를ㅎㅎ

양철나무꾼 2013-11-26 11:5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넘 멋지죠?
전 많이 부럽고, 솔직히 좀 배가 아프기도 해요, ㅋ~.

근데, 프레이야 님은 왜 이리 뜸하신거예엿, 췟~=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