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를 써서 먹고 살았으니 내게 글은 쌀이고 카피는 밥이다. 그러나 글을 씻어 카피 짓기를 멈추고 말하기, 가르치기 같은 천렵과 낚시에 넋을 판 지 오래, 아궁이 느리게 치우고 옛 기억 더듬어 불 피우고 거친 글을 씻어 책을 지었다. 밑이 보이는 쌀독을 기울여서 무딘 손이나마 계속 먹거리를 지으라고 다그쳐주는 인생이 고맙다.

ㆍㆍㆍㆍㆍㆍ

책을 마무리하는 지금, 깨닫는다. 밥의 맛은 씹어서 입안에 퍼지는 것만이 아니라 오래 지켜온 아궁이의 온기, 열망이 세월의 장작과 어우려져 타올라 뿜어내는 부엌의 훈내 그것이 모여 만든다고. 쟁여놓은 쌀독 다 털어 여한 없이 지었으니 열심히 살아 마음곳간 채워야겠다. 모른다는 말이 편안해지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

                                                                  - 윤수정의 '한 줄로 사랑했다'의 '나오는 말'중에서 -

 

 

 

 

 

 

 

 

 

 

 

 

 


'맹난자'의 '주역에게 길을 묻다'를 집어들었는데 그만,

주역에게 잠을 물었는지 침을 질질 흘리고 졸다가 안되겠다 싶어 집어든 책이,

카피라이터 윤수정의 '한 줄로 사랑했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유를 하면 어떤 책에게 미안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맹난자는 너무 어려웠고, 윤수정은 겉도는 느낌이었다.

맹난자는 서너 번째 읽기를 시도하는데,

번번히 길을 구하려다가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 뭐라고 할 말이 없어주시고,

윤수정의 '한 줄로 사랑했다'는  글은 좋았다.

매 꼭지꼭지 글은 뛰어났고,

감성은 빛났으며,

명 카피라이터답게 제목으로 뽑은 한줄 한줄은 시처럼 반짝였다.

근데, 한데 어우러지지가 않았다.

물론 그간의 카피를 갈무리해놓은거니까 어울리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용만이 아니고, 본문의 그림들도 통일성이 없이 다 따로따로이다보니,

책이 산만하게 느껴지고, 그러다보니 글마저 산만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표지 디자인, 본문 디자인, 그리고 본문에 들어간 그림이 다 다른 사람의 작품 같은데,

영화 한편 만큼의 짤막한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니까,

적어도 본문의 디자인과 거기 들어간 그림이라도 어떤 통일성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하나 하나 떼어놓고 봤을때는 다 훌륭해서 빼어날 것 같은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들쑥날쑥 어째 좀 이상해져 버렸다.

모두가 나같이 생각하지는 않겠지 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누군가가 삼겹살 굽는 법도 가지가지라며,

그걸로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며 한참 설명을 하였다.

손하나 까딱 안하는 공주형, 왕자형은 차치하고,

고기가 익든 말든 수수방관하는 타입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단다.

그리고 고기가 익을까 무섭게 뒤집는 사람은 다른사람을 배려해서 그런게 아니고 재 성질을 못 이겨서 그런거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기를 열맞춰 가지런히 올리고 자르고 뒤집고 하는 사람은 편집증이 있는 사람이고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첫번째와 세번째가 해당한단다.

 

그러고 보면, 같은 Fact를 놓구서도 사람마다 반응하는 방법, 해석하는 방식, 대처하는 행동 양식이 다 가지가지이다.

저 러브스토리의 명대사 "Love i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만 하더라도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것'이라고 해석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원 뜻은 미안하다고 말할 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의미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교과서처럼 꼽는 영화<러브스토리>의 유명한 대사 "Love i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처럼 미안하다고 말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즉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지언정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흔히 말하는 사랑의 교본인데 <물고기자리>의 사랑은 미안함을 넘어서 잔인하기까지 한 사랑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넘어서는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을 가지기 위해 모든 파괴를 서슴지 않는다.

그런 감정이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문득 흔히 사랑이라 부르는 것들은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 '사랑해'라고 말해놓고 '아니야'라는 말을 들으면 '아 그래?'하고 털어낼 수 있는 사랑, '엄마 나 그 사람을 사랑해요' '안 된다'라는 말을 들으면 '예'하고 잘라낼 수 있는 사랑, 이런 것들은 사랑이 아닌 게 아닐까. 그렇게 카피가 출발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의 사랑이 특이한 게 아니라 너희들의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게야. 정말 사랑이라는 건 이 영화 같은 게야,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카피가 '멈출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니다'였다.(52~53쪽)

주역이란 책에게 길을 물으려 했으나, 뜻하지 않게 잠에 빠져들게 될 수도 있고,

좀 산만하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명문장이 적힌 책에 반응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가지각색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것보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사람에 따라 스스로 통제할 수 없어지기도 하는 그것,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그것이 어쩜 제대로 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르는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난 사랑에 서툴다.

그동안 사랑에 관하여 나의 오롯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동안의 나는 '사랑해'라고 했다가 '아니야'라고 했으면 '그래, 아님 말구~(,.)'라고 했었을 것이고,

'아빠 나 그 사람을 사랑해요'라고 했다가 '안된다'했다면 '예'하고 며칠 들어앉아 울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남이 하라는 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진실하고 진정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 있다면 그건 마음으로부터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테고,

때문에 이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은 '유명한 건축가'와 '좋은 건축가'의 차이를 말했었다. 좋은 건축이란 사람의 선함과 진실함,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어야 하며, 눈에 띄는 근사한 건물을 만드는 유명한 건축가는 대개 좋은 건축가가 되기 어렵다고.(69쪽)

저 건축가의 자리에 '사람'을 대입시켜도 용케 말이 성립된다.

난 좋은 사람이란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움과 더불어 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집이 편해야 하듯이, 좋은 사람도 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상자의 '물고기자리'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편집증적인, 누군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잘못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불리워선 안된다.

 

난 아무래도 '주역에게 길을 묻다'를 그냥은 읽어내기가 힘들것 같고,

내가 편안해 하는 종류의 책에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책마실을 다니다보니, 이런 책이 나와주셨다.

딱 내 스타일이다, ㅋ~.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고진석 지음 / 웅진서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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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책 한권을 읽고 이렇게 두들겨 맞은 듯 머리가 멍해지고 온몸이 무거워져 보기는 처음이다.

그러고보니 책의 제목이 다분히 중의적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방인영이 먹던 사과 음료도 후르츠 펀치라고 할 수 있고,

권투에서 상대를 훅 가게 만드는 한방도 펀치라고 할 수 있다.

방인영이 먹던 사과 음료는 나중에 모래의 남자가 먹게 되는 음료와도 묘하게 연결이 된다.

그냥 읽어버리고 말면 그뿐인 책이지만,

내 자신의 삶에 대입시켜 읽을라치면 모골이 송연해지는것이...

눈이 퀭해지는게 한뼘은 꺼지고 심장은 저만큼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맨 뒷장을 펼쳐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위로 갈수록 읽은게 많았지만 기억에 남지는 않고,

기억에 남는 것은 대부분 최근 것으로 박일문, 이만교, 김혜나의 '제리'가 있고,

전석순과 최민석은 구해놓고는 아직이다.

때문에 기억에 남는것이라곤 김혜나의 '제리'가 있겠는데,

난 '영 아니올시다'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좋다, 괜찮다...해도,

이 책이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쳐뒀었는데,

좋다.

왜 엄지손가락이 두개밖에 없는지 한탄할 정도는 아니어도,

별 다섯개를 꽉꽉 눌러 채워줄 수는 있겠다.

 

아쉬운 점이라고 해야 할까, 무서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한방에 훅 가는 펀치에 비해, 얘기를 빚어낸 필채는 경쾌하다 못해 좀 가볍다.

개연성의 확보 면에서도 좀 아쉬운 생각이 드는데,

여고생에게, 친부모를 향하여 그렇게 맹렬한 살의를 갖게 만든 이유가 구체적이지가 않다.

실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어쩜 이 책에 나오는 방인영이 나처럼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라면 방인영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아쉽고 무서웠다.

 

 

 

 

 

 

 

 

 

 펀치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책을 읽고 내가 제대로 된 펀치를 맞은 느낌을 받았던 것은,

뒷표지의 "독자들의 윤리관과 도덕관에, 그리고 삶에 남겨 둔 약간의 기대에 펀치를 날린다'는 문구와 난폭한 냉소와 당돌한 폭력으로 무장한  반성하지 않는 10대 소녀라는 표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윤리관과 도덕관이란 무얼 얘기하는 걸까?

과연 그 기준이란 무엇이며,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걸까?

반성하지 않는 10대라고 했는데, 무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 책은 요즘 세상을, 가치관의 부재,혼란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기존의 윤리관과 도덕관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책에서 비중 있게 봐야 할 것은 어쩜 존속살해의 개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존속살해를 하고도 어쩜 반성조차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 아니라,

존속살해라는 건 어디까지나 소설적 장치일 뿐이고,

이를 통하여,

10대 소녀가 어떻게 자아를 찾고,

자존감을 회복하는지,

다시말해, 자립하는지의 과정을 엿보아야 하는것이 아닐까?

깊은 곳에 저장된 자신감이 옛날 옛적에는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 시선 속의 직유가 깊이 침범해

내 자존감을 조금씩 갉아 냈다.

성교육 시간에 본 낙태 동영상에서 태아를 긁어낸 것처럼,

아이가 기계를 피해 도망가듯 내 자존감도 달아나려 안달했다.

이젠 더이상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내 자존감은 내 안에 있는 거지 사람들이 볼 수 있거나

그들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란 걸,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깨달았다.(187쪽)

 

내가 이 책의 방인영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쉽고 무서웠다고 한 것은,

우리집안이 이 책의 방인영의 그것만큼 하이 레벨은 아니었지만,

부모님과 친인척의 관심은 이 책의 방인영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아들이 이 책의 방인영과 얼추 비슷한 또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본위로 생각하려 든다.

내가 어른들의 집요하고 과한 관심에 숨이 턱턱 막혔었으면서도,

지금도 그때의 잔재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우리 아들의 장래에 간섭하려 든다. 

아들이 원하는 직업을 향하여 한번도 신중히 생각해보지 않고,

그걸로는 밥 벌어먹고 살 수 없으니,

일단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간 후에 취미활동으로 하라고 한다.

밥을 빌어먹고 살아도 그건 네 운명이라며 쿨하게 넘어갈 수 없으니 말이다.

 

친구 중 하나는, 바른생활과 윤리적인 사고방식으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모범적이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걸 이 친구에게 사주하는 과정에서 이 친구 또한 별천지를 경험하게 되었을테고,

근데 이 친구는 나와는 태생이 다른지 그 과정에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내색을 한다.

바른생활과 윤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니 충분히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경우, 친구도 비슷한 부류이기 쉽다.

누구의 심장은 웬만한 열에는 끄떡 없는 강철로 만들어 졌고,

또 누구의 심장은 아주 작은 체온이나 온기로도 녹일 수 있는 얼음으로 만들어졌겠는가?

게다가, 그게 사람의 감정 따위,

시간이나 세월에 비례하여 쌓여가는 정이나 미움 따위의 문제였을 경우,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도 없고 어쩔 것인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친구를 강신주에게 보내야 겠다.

착해지지 말란 말입니다.

나빠져도 괜찮단 말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강신주 말고 또 누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이 친구에게,

그동안 살던대로 바른생활과 윤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사주라도 하였단 말인가?

매 순간순간을 살면 되는거다.

매 순간순간을 가열차게 살면 되는거다.

 

나는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금 이 순간을 살 것이고,

울아들도, 이 친구도 그럴 수 있도록 자리를 넓게 펴주는 수밖에 없다.

옛날에 '넓은 맘과 깊은 속'의 뉘앙스를 몰라서 한참 고민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친구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터득하였다.

넓은 맘과 깊은 속.

 

 

 

 

 

 

 

 

 강신주의 다상담 3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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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2 16:35   좋아요 0 | URL
책은 언제나 스스로 불러들이기 마련이라고 느껴요.
이 책을 불러들인 삶을 즐겁게 사랑하면서
십이월 추위도 기쁘게 맞아들이는 하루 누리셔요.
펀치는 푸른기와집에서 지내는 분들도 좀 맞으면 좋겠네요~

양철나무꾼 2013-12-17 10:31   좋아요 0 | URL
전 오늘 아침 우리나라 젤 오래된 문학지라는 '현대문학' 사태랑 관련하여 맘이 영 꿀꿀합니다.
아무리 매서운 검열의 시대에도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덩여.
사전 검열의 형태인지,
알아서 기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씁~쓸~해서 더 춥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여~--;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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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구라의 뒤를 잇는 한국의 3대구라에 유홍준이 들어간다는 얘길, 어제 오늘 들은 게아니다.

그의 책을 제법 찾아 읽었지 싶은데, 책을 읽을때마다 드는 생각은 글은 말과는 또 다른 것인가 보다.

이분이 하시는 말씀은 꽤 재밌어서 찾아 들을 정도인데,

글은 좀 지루하다 싶을 정도의 동어 반복에다, 만연체의 느낌까지 들어서 인내심이 필요했다.

개인적으로 난, 일본문화답사기에서 두 손을 들어버렸다.

일본에 대한 어떤 사전 지식이 없는데다가 늘어지니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걸 '아~부~지, 도~올~굴~러~가~셔~유~'꼴로 은근 슬쩍 구렁이 담을 넘듯 만연체로 풀어내니까,

짜증 또한 슬금슬금 밀려왔다.

결정적으로, '명작순례'라는 이 책은 전에 나온'국보순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예로 국보순례에서 이미 언급되었던게 26점이나 된단다.

 

제목은 <명작순례>라고 하여 '옛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머릿말 격인 '책을 펴내며'를 통하여선,

이 책을 통하여 전하려고 한 것이 당신의 작품을 보는 안목이 아니라,

당신의 작품 감상은 되도록 절제하면서,

당신이 사사받았던 고유섭, 최순우, 김원용, 이동주, 안휘준 선생님들의 명작 해설을 길라잡이 삼았다고 하고 있다.

대신...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와 사회적ㆍ예술적 배경, 화가의 예술적 노력과 특징이 그림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옛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을 갖도록 하려고 애썼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의 주특기인 지루한 만연체의 연장선 상이다~--;

감히 말하자면 이를 미술사가의 사회적 실천에 해당한다고 생각한 것이다.ㆍㆍㆍㆍㆍㆍ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 마주친 나무꾼이 "먼저 깨친 사람이 나중 사람에게 배운 것을 나누어주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꾸지람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ㆍㆍㆍㆍㆍㆍ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미술사가로서 내가 배운 지식을 대중과 나누어 갖는 것은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한다. 내가 '순례기'와 '답사기'를 써오고 있는 것은 스스로 세상에 진 빚이라고 생각한 것을 하나씩 갚아가는 과정이다.(6쪽)

 

아무래도 유홍준의 책을 읽다보면, 손철주가 생각나게 마련이다.

문장이 아주 화려하고 빼어나지만 넘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얼마전 방현주가 진행하는 '라디오 북클럽'에 손철주가 나왔었다.

옆에 있는 이가 내로라 하는 말빨을 자랑하는 아나운서여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오히려 방현주에게 주눅들어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난 이 책이 좀 아쉬운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깜냥이 부족해서 그런거겠지만,

명작이 너무 한꺼번에 쏟아지니까 '희소성의 원칙'에 반하여 어느 작품이 좋은지 잘 모르겠고,

게다가 그가 말하는 명작이라는 것이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분류하고 묶어 소개됐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난초 그림이면,

탄은 이정의 난과 능호관 이인상의 난과 표암 강세황의 난과 수월헌 임희지의 난과 소호 김응환의 난과 운미 민영익의 난과 추사 김정희의 난과 흥선대원군의 난을 차례로 나란히 열거하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암튼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는데,

'우봉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훌륭히 구현한 19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다.' 라는 부분이다.

그 바로 밑에 추사 김정희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초를 치는 법은 역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ㆍㆍㆍㆍㆍㆍ 조희룡 輩(무리)가 나에게서 난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식 한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문자기(氣)가 없는 까닭이다."(142쪽)

라고 하며, 우봉 조희룡의 예술을 낮추어 보았으며,

반면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조희룡은 추사의 부작란(不作蘭)만 하더라도(-세한도 같은 그림) 과장되었다고 조롱하였다.

세살 차이니까 얼마든지 경쟁관계에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라면 쉽지않은 상황 설정이다.

조희룡이 추사와 똑같은 글씨를 썼다것만으로 김정희의 예술적 이상을 훌륭히 구현했다고 할 수 있을까?

둘 중 어느 누구도 스승과 제자라 칭하지 않았을 뿐더러, 상대방의 예술을 엄청 낮추어 보았다.

시서화일치라는 청나라 화법을 도입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오히려 그럴듯 하다.

암튼,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이 둘이 지향하는 바가 한참 달라보이는데 말이다.

 "내가 난초를 그리는 것은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다.(145쪽)

 

암튼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다르듯, 사람마다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은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을테지만,

그렇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조희룡 輩(무리)가 나에게서 난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식 한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문자기(氣)가 없는 까닭이다

라고 하는 사람과

'나에겐 그림 그리는 법이 따로 없다'

라고 하는 사람을 대비시켜 놓고,

'우봉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훌륭히 구현한 19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다.'

라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 느껴진다.

 

'조희룡'의 '매화'(10곡 연결 병풍) 부분

'조희룡'의 '홍매도(대련)'

(암튼, 난 조희룡의 이 매화 그림만으로도 넋이 나가...책을 마냥 쓸고 닦고 어루만지고 하였지만 말이다, ㅋ~.)

 

차라리, 당신은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그림을 보고,

그리고 이런 것을 명작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라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랬을 경우, 여기서 비껴간다고 하더라도 유홍준 개인이 생각하는 기준에서 비껴가는 것이지,

일반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에서 비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책의 맨앞에 내로라 하는 사람들을 나열해 놓으니까,

여기서 비껴가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소외감으로 고독이 몸무림칠 것 같다.

 

암튼 내가 주구장창 주장하는 건 다름을 인정하는 삶이다.

유홍준 같은 사람이 있으면, 손철주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글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말이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처럼 한겨울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를 높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봉 조희룡처럼 그림을 그리는 창작 행위 자체를 통하여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다들 방법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 뿐이지, 생각이나 행동 자체를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좋은 글을 읽고 좋은 작품을 감상하고 하는 안목을 갖고 싶어하고,

그런 안목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명작을 통하여 예술가가 얘기하려고 했던 것을 읽어내고,

그대로 따르진 못하더라도 따를려고 노력하는게 아닐까 싶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흔히 습관이나 버릇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그리고 누군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를 변하시키거나 그에 맞추어 내가 변화는 것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명작이 위대한 이유는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든지 변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킬 수 있고 말이다.

 

12월이 벌써 1/3이나 지나갔다.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아무 해놓은 일도 없이 나이를 먹는 것 같고 멜랑꼬리해지려고 한다.

이럴때일수록 감성을 말랑하게 해놓을 필요가 있다.

말랑해진 감성은 스프링처럼 밑바닥을 치고 튀어 올라, 이내 명랑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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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0 16:12   좋아요 1 | URL
'명작'이라기보다는 '옛그림 읽기'나 '옛글씨 읽기'이지 싶어요.
'명작'이라는 말을 먼저 붙이면,
독자는 모두 '명작'으로만 바라보아야 할 테고,
해설자가 들려주는 대로 따라가야겠지요.

양철나무꾼 님 스스로 옛그림과 옛글씨 즐겁게 누리면서
오늘 우리 삶도 예쁘게 돌아보시리라 생각합니다~

양철나무꾼 2013-12-17 10:21   좋아요 1 | URL
명작이 아니면 어때요?
그리다 맘에 안들면 부욱~ 뜯고 다시 그리고,
쓰다가 틀리면 쓰윽~ 지우고 다시 쓰고,
그냥 제 멋에 겨워 사는거죠.
더디더라도 천천히 가고 싶어요, 헤에~^^

다크아이즈 2013-12-11 11:09   좋아요 1 | URL
우울했는데 갑자기 멜랑꼴리해지네요.
우울에 미소가 곁들여지면 멜랑꼴리 - 제 식 멜랑꼴리 버전인데, 이 글 읽은 제 느낌이 그래요.
유홍준보다는 손철주, 손철주보다는 양철님.
왜냐면 우울 - 멜랑 - 말랑 - 명랑의 순서로 읽는이의 감정이 순화 중 ㅋ

양철나무꾼 2013-12-17 10:26   좋아요 2 | URL
팜므 님표 감정의 4단변환가요?
멜랑꼬리 버전 명명이 참 이쁘잖아요, 췟~(,.)

하늘바람 2013-12-11 13:30   좋아요 1 | URL
님의 멜랑에 커피 한잔 곁들여야하는데

양철나무꾼 2013-12-17 10:27   좋아요 1 | URL
우리 둘, 둘, 둘 삼합을 이루는 봉지커피로 하죠.
님은 거기서, 난 여기서...cheers~^^
 
오늘, 수고했어요 - 붓으로 전하는 행복, 이수동의 따뜻한 그림 에세이 토닥토닥 그림편지 2
이수동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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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이 넓기로 치면 열두폭치마와 어울려서도 부족하고,

온갖 잡기에 관심을 보인게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야 한다는 옛말대로라면, 난 될 성부르기는 커녕 싹수가 노랗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3씨(마음씨, 솜씨, 맵씨)가 되어주시는 관계루다가,

좀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변덕이 죽 끓듯 한 관계루다가,

나의 잡기에 대한 관심사는 철철이로도 부족해, 달달이 바뀌는 실정이다.

얼마전까지는 헝겁으로 수제 인형을 만들어댔고,

친구가 저 대문에 걸린 그림을 그려 보내준 무렵과

된장님이 이 귀한 그림을 보내주신 후부터,

그림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내가 관심을 보이는 분야는 인물화인데,

연필로만 그려서 흑백과 명암 처리하기도 하고,

수채색연필을 써서 간편하게 채색을 하기도 하는데,

생각보다 어렵거나 번거롭지도 않을 뿐더러, 재미가 쏠쏠하다.

 

근데, 인물화랍시고 그리면서 깨달은게 하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얼굴에 대해서,

다시말해 보여지는 액면 그대로에 대해 기대치가 높다는 거다.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보여주면 만족하지 못하고,

못 그렸다는 둥,

구도가 이상하다는 둥,

노안이 벌써 왔냐는 둥, 해가며 놀려먹으면서,

사실과는 연관이 없이

만화그림이나 많이 보아왔던 일러스트 그림처럼 그려내면 잘 그렸다고 한다.

눈에 많이 익은 친숙한 그림체를 가지고는 이쁘다, 잘 그렸다, 해가며 설레발을 친다.

 

이건 그림을 평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이어도 적용되는 불문율이다.

 

때로 그림에 너무 집중해서,

선을 여러번 겹쳐그려서 주름살을 너무 많이 만들어 내면,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며 못 그렸다고 한다.

또 찰고무나 지우개로 하이라이트를 주어 주름과 올록볼록 엠보싱들을 지워내면 젊어보이는게 이쁘다고 한다.

 

내가 딴 그림까지 얘기할 깜냥은 안 되고,

이제 재미를 붙인 인물화만 갖고 얘기해 본다면,

인물과 닮게 그리는 게 좋은 것일까, 아니면 인물의 캐릭터를 잡아 개성있게 그리는게 좋은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이쁘게만 그리는게 좋을까?

저 '좋을까?' 자리에 '잘 그리는 것일까?'가 들어가면 느낌이 좀 달라진다.

 

옛날에 사석원이 그린 그림을 두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라고 폄하했단다.

근데 난 사석원의 그림들을 보면,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예쁘고 좋고 즐거운 것이,

마음 속에서 하트가 뿅뿅 생겨나고,

그리하여 희망과 행복을 얘기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화가가 또 한명 있는데, 이 책 '오늘 수고했어요'의 이수동이다.

이분 또한 무명시절을 보내다가, 그림이 텔레비젼 드라마를 통하여 알려지게 된 케이스다.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라는 소리는 안 들었을지 몰라도,

이분의 그림 또한 이쁘고 다정하고 정감있는 그림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무한 위로가 된다.

게다가 요번 책엔, 전작에서 보여주던 자작나무나, 하늘과 나무와 꽃 등 이쁘기만한 정물 말고도,

인물에 대한 그림이 여러점 눈에 띈다.

 

요번 그림이라고 하여,

이쁘고 다정하고 정감있는 그림체라는 것에서는 예외가 없지만,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아내서,

그림 만으로 충분이 말을 하고 메세지를 전달해 준다.

 

간혹, 사람들이 이렇게 이쁘고 만화같은 그림체를 가지고 있는 화가는,

사실적인 인물화를, 작품성 있는 그림이라는 말로 혼동하여, 못 그린다고 하던데,

이 그림을 보고 쓸데없고, 부질없이 지어낸 얘기라는걸 알게 됐다.

이 정도면 됐지, 무얼 더 바라겠는가?

 

또 한가지,

사석원도 그렇고 이수동도 그렇고,

글도 좋다는 거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이들의 그림을 이쁘기만 해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림의 깊이, 다시 말하면 이들 그림이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를 읽어내고 좋아하는 것 같다.

 

다시 나의 인물화로 돌아가,

사람들이 나의 그림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건 어쩜,

보이는 그림만을 보고 좋다, 나쁘다 하는게 아니라,

그림이 담고 있는 마음까지를 읽어내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도 좋은 인물화를 그리고 싶다면,

사석원이나 이수동에게 그림 잘 그리는 비법을 사사받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이들이 마음밭을 일구고 가꾸는 걸 엿보고 터득하는게 빠르겠다.

 

얼굴이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도 당근이지만,

그림 또한 사람의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이수동은 여러가지 점에서 나랑 닮은 것 같다.(언감생심~--;)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을 줄 아는것도 그렇고,

무거운 몸과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게

어디 쉽습니까?

하지만 비우지 않고는

새로운 것들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쉰다는 것ㆍ

그것은 앞으로의 멋진 일과 멋진 사람을 맞을,

'아주 즐거운 준비'의 다른 말입니다.

 

그러니, 비우시지요.

 

이춘풍을 닮고 싶어하는 풍류 또한 그렇다.

 

이춘풍

 

이 봄바람을 어찌할 거나?

나름 수양했다는 수양버들도

저리 흔들리는데,

대충 산 나야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지.

 

구름 한점을 선물로 주는 호기로움도 닮고 싶고,

 

선물

 

바람 따라 가는 그대에게

선물 하나 드리겠습니다.

 

구름 한 점.

 

높은 곳에서 자유로우라는

나의 응원입니다.

 

그러나, 난 구름 한 점보다는, 마냥 넉넉한 햇살이고 싶다.

햇살 좋은 날,

나는 당신의 의자입니다

 

 

 

 

 

 

햇살 좋은 날,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을 때,

나는 당신의 의자가 되겠습니다.

값비싼 의자는 아니지만,

늘 당신 곁에 있는 그런 의자

 

암튼, 이 책을 읽고,

어쭙잖게 인물화를 그리고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이 먹는 것이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사람이 보여주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심은...더디더라도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어떻게고 전달되게 마련이고, 전달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행간을...

그림의 이면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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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06 20:16   좋아요 0 | URL
즐겁게 살아가는 빛을 그림으로 환하게 담으시리라 믿습니다~

양철나무꾼 2013-12-10 15:50   좋아요 0 | URL
요즘은 그림삼매에 빠져 독서를 게을리 한다는 웃지 못할 말도 안되는 핑계를~--;

하늘바람 2013-12-08 08:19   좋아요 0 | URL
아 넘부러워요 3씨 토끼인형 귀엽네요 저두 동참하고 파요 근데 정말 나무꾼 언니는 못하시는게 없네요

양철나무꾼 2013-12-10 15:53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은 좋은 책을 쓰시고...
토깽이 같은 남매들도 키우시고...
만약 저한테 토깽이같은 남매가 지금 있다면 토끼인형을 만들면서 소일거리 하고 있지는 않을거라는, ㅋ~.

사람이 행복할땐 행복한 줄 몰라요.
토깽이 보물들, 잘 키우세요, ㅋ~.

그렇게혜윰 2013-12-08 08:39   좋아요 0 | URL
국민은행 달력 그림이 이수동 화백 그림이라길래 두 개나 얻었어요.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이에요.

양철나무꾼 2013-12-10 15:55   좋아요 0 | URL
그렇게혜윰님, 국민은행 우수고객이신가보당~^^
전 근처에 국민은행이 없어서리~.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뱅킹 하다보니까 은행 갈 일이 잘 없어서리~

그 달력 저 하나주면 안되나요?헤에~^^

세실 2013-12-08 11:58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은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 보여요.
전 요즘 재미있는 일 어디 없나하고 기웃거립니다.
그림도 독학하니 늘지 않네요.
이수동 그림 예쁘지요!

양철나무꾼 2013-12-10 15:59   좋아요 0 | URL
저는 세실님이 왕부러운데요~^^(속닥)

제 그림도 당근 독학이구요.
제멋에 겨워 수작이랍니다.

전 오늘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그림을 그린 '이영철'이란 분의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란 책을 보고 있는데,
사석원, 이수동과 더불어 열광할 사람이 한명 더 생겼어요.

이렇게 열광할 사람, 한명씩 찾아내며 살아가는 거죠, 뭐 있겠어요~?^^

yamoo 2013-12-09 22:00   좋아요 0 | URL
우와~ 수제인형 끝내줍니다!
정말 못하시는 게 없습니다그려~^^

양철나무꾼 2013-12-10 16:00   좋아요 0 | URL
저 못하는 거 많아요.
제가 청소도 못하고 그랬더니,
옆에서 운동도 추가하라는데요, ㅋ~.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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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러고보면, 난 그동안 이윤기 님의 작품들을 좀 읽어주셨다.

읽으면서 좋다고 설레발을 친 경우도 있었지만,

어설픈 내눈에도 엉성한 번역들이 들어와서 툴툴거린 적도 있었다. 

내가 번역 오류를 잡아낸 건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었지만,

님의 작가로써, 번역가로써의 삶이 얼마나 가열차고 치열한 것이었는 지를 몰랐던 고로,

'비밀의 계절'개정판을 계기로 그렇게 그렇게 소원해 졌었다.

2010년 8월인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별세하셨을 때까지만 해도,('애도하다'페이퍼 링크)

그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책'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으면서 그의 그런 열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젠 그를 진정한 작가인 동시에, 번역가로써 우러를 수 있게 되었다.

그 분의 따님, 이다희가 서문에서 밝힌,

때로는 원칙주의자처럼 말을 대하고,

때로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기도 하고,

길을 따르지만 길에 갇히지 않는 말,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살아 펄떡이는 말에 대한 집착, 을

이렇듯 한자리에 묶어 놓은건 우리같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데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글이란건,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즉 작가와 독자가 있어야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쓴 작품도 비슷할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작가 자신에게 너무 낯익은 풍경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미의식은 편애의 산물일 가능성 조차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글들을 많이 썼다. 그런 글들을 쓰고 나면 몸(존재리고는 하지 않겠다)이 가벼워지고는 했다. 나는 가사 좋은 유행가 부르기를 지금도 좋아한다. 그런 노래 몇 곡 부르고 나면 몸이 많이 가벼워진다.(20쪽)

예를 들어, 글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어쩌지 못해서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글을 읽는 독자가 없다면 그 글은 별반 의미가 없다.

반대로, 읽는 독자가 없는 글이라면, 나무를 베어가며 아깝게 책으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여기서 구분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라면,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라면,

인터넷도 발달하였고 블로그도 활성화되었고,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웬만한 네트워크와 소통도 가능하니까,

책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글을 쓸 수 있고,

글을 매개로 교류와 의사소통도 가능하니까 말이다.

 

프로의 글쓰기는 글을 쓰고나서, 본인의 몸이 가벼워지는 자기만족감 말고도,

글을 읽게 되는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어떤 의미와 방향으로든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의 삶은 나남의 삶에 간섭하면서 끊임없이 그 삶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남의 삶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나는 가정합니다.

  첫 번째는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형'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두 번째는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가 같은 화학적, 연금술적 변화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변성'이라고 불러보기로 합니다. 세 번째는 포도주가 그것을 마신 사람 안에서 성체가 되기도 하고 술주정이 되기도 할 때 일어나는 제3의 초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역變易, 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이 변역의 특징은 끊임없이 변역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이라고 부르는 종교의 가르침이 여러 각도로 달리 해석되는데도 불구하고 연쇄 작용을 통하여 끊임없이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연쇄 작용을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저 사람은 저 사람이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들게 된 화두이자, 나와 남이 지어내는 행위를 평론할 때 자주 써먹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변역의 역사에 가담하는 노릇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69~70쪽)

 

내가 이 곳 알라딘 서재에 둥지를 틀고 글을 올린지도 3년 반 정도 되었다.

이 동네에 있는 숨은 고수들에 비하면 '새발의피'이고, '언발에 오줌누기'정도이지만,

내가 이 곳에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깜박깜박 하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순간의 감동을 잊지않고 기록해 두고 싶어서 였고,

좋아하는게 책이다 보니 책관련 인터넷서점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곳에 글을 쓰면서 지키는 원칙이 몇가지 있는데,

첫째는 지나치게 어렵지 않은 말을 쓰고,

읽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끊어 읽기 단위로 잘라서 문장을 만든다.

 

어법 운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난 책을 낼게 아니고,

그냥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읽기 좋으면 그만이다.

 

또 한가진, 될 수 있으면 평점에 인색하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나는 좋아서 책을 읽는 아마추어이고,

책을 낸 사람들은 적어도 직업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인데,

나의 평점이 인색하다고 하여 책을 읽을 사람들이 안 읽을 것은 아니고,

책이 아무리 별로라고 하여도 이미 책으로 만들어진 것은 나무로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정 후한 평점이 불편하다 싶으면,

개인적인 감상을 본문에 남기거나, 평점을 남기지 않는 페이퍼로 대신한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은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느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가? 유식해보이고 싶어서 폼 나는 어휘를 고르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제 생각을 비틀다 제 글의 생명이리고 할 수 있는 생각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글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그가 구어체 문장을 쓴다는 점이다. 그의 책은 내용이 어려운데도 술술 읽힌다.

ㆍ이런 글을 읽을 때는 속어 비어에 묻어 있는, 쓴 이의 '껍진껍진한 느낌까지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문학동네 바깥사람이었던 조영남 형의 글을 꼼꼼하게 읽는 것은 시종일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는 구어체, 즉 입말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까다로운 문법가들과는 달라서 구어체로 쓰인 문장의 부적절한 표현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어체 문장에 실린 생각이지 글 자체는 아닌 것이다.(81쪽)

 

 

그러나 사전도 맹신할 물건은 못 된다.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그 까닭은 이렇다. 사전에 나오는 설명은 개념 이해의 길라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 속의 말은 박물관의 언어이지 펄펄 살아있는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다. 사전적 해석만 좇아 번역한 문장이 종종 죽은 문장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100쪽)

이 부분이 내가 이윤기 님을 다시 보게 된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문장에 실린 생각이지 글 자체가 아니라는 말.

사전도 맹신할 물건이 못 되고,

사전 속의 말은 박물관의 언어이지 펄펄 살아있는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라는 부분.

 

평생에 거쳐 연구하고 노력하고,

이제사 그 연구와 노력의 결과물이 하나, 둘 씩 나와줘야 하는데,

그간의 연구와 노력이 아깝고, 안타깝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 남아있는 우리의 생각일뿐,

정작 본인은 학자나 연구가, 또는 문장가로써의 삶을 살고자 한게 아니라,

생각이 살아있는 글쓰기, 삶이 녹아있는 글쓰기를 구사하고자 했던 현역 작가이고 번역자이길 원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정확한 지식과 예리한 눈을 겸비한 분이 감시해주고 있다는 것은 역자로서는 아픈 일이지만 우리 번역 문화에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철학자 강유원 박사께 나는 아직도 고마워한다.(110쪽)

 

'장미의 이름'관련, 이렇게 출판되어 나와 있는 책을 거둬들이고 다시 번역, 만들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번역가가 잘못을 시인하는 일은,

그가 본인의 개인적인 안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나라 번역 문화의 발전을 생각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하겠다.

이런 일은 '장미의 이름' 말고도, '비밀의 계절'또한 본인이 세월이 흐른 후에 재번역하게 되는데,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과정만으로 높이 살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접은 생각이지만,

한때 장르소설을 너무 좋아해서 장르소설 번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원래의 정서와 감각 그대로 접하고 싶어서 꿈꿨었는데,

그 일의 핑크빛 분홍분홍한 부분만을 생각하고,

숨은 고통과 노력은 바라보지 못했었다.

 

근데, 어떤 번역자는 누가 목에 빨대를 꽂고 피를 들이키는것 같이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고 했고,

또 다른 번역자는 평생 번역 생활에 얻어 가진거라곤 치질과 손가락 관절염이라고 했다.

정말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쓴 글을 어디선가, 누군가 열광을 하며 읽어줄 독자도 존재하리라고 믿는다.

  외국어 번역 공부, 나는 참 어렵게 했다.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많이 절망했을 뿐, 한 번도 만족을 경험하지 못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을 많이, 그리고 오래 걸었다. 판화가 이철수는 길을 잃고 오래 걸으면 그게 곧 길이 되는 수도 있다고 위로하고, 시인 강연호는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격려하지만 그 위로와 격려는 들을 때마다 늘 슬프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절망하지 않아도 될 모양이다. 학원이라는 데서 몇 달만 수련하면 '초벌 번역'이라는 것으로 수입이 짭짤해질 모양이다. 하지만, 마무리 번역은 누가 하는데?(116쪽)

이렇게 돈 되는 초벌 번역만 하고 끝내라고 해도,

정말 쓰지 않고 못 배길 사람이라면 글의 마무리가 궁금해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음을 알겠기 때문이다.

 

옛날에 전공이랑 관련하여 지방의 단과대에서 한학기동안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여러가지로 힘이 들었지만, 가장 힘이 들었던건,

수업을 하느라고 말을 쏟아내고 나면,

참을 수 없는 결여로 허덕였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들입다파는 걸로 그 결여를 매울 수 있을거라고 착각하곤 했었다.

 

누군가에게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과 번역의 공통점은,

가르치는 자와 번역자가 중개자가 되어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가르치는 자가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배우는 자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마찬가지로 번역자가 번역하는 언어와 번역되는 언어, 둘다를 잘 알고 있어도 독자들이 제대로 알아 먹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이건 소통하려는 의지의 문제라기 보다는 눈높이에 관한 문제인것 같다.

 

예를 들면, 이윤기는 살아 움직이는 조르바를, 조르바를 춤추게 하기 위하여,

이윤기가 가장 자신 있는 특유의 사투리를 구사하여 번역한다.

조르바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살아나 춤추게는 하였지만,

이윤기가 구사하는 사투리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국의 시골 촌놈으로 재탄생시킨다.

지난해 3월, 가까이 사귀어 모시던 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당신의 소설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당신에게 너무 익숙한 풍경들이 당신의 소설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173쪽)

번역이나 소설일때는

"당신의 글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는 원칙이 통용되지만,

이런 종류의 글일때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윤기의 개성이 잘 살아있는 이런 글들이야 말로 이윤기 님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다.

이윤기는 번역을 하면서 원서를 집어 던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면서 가장 행복해 했다.

 

난 언제 가장 행복한가 돌이켜보니,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책을 읽은 느낌을 그 책을 읽은 또 다른 이들과 공유할때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번역은 내 몫이 아니지만,

적어도 좋은 책을 읽고 그 느낌을 공유할 때 난 행복함을 느낀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게 이윤기의 글쓰기라면,

이윤기의 글을 읽고 행복해 할 수 있는 독자인 것이, 오늘 고맙다.

 

춤을 출 수 없어도, 안분지족 할 수 있으니 이만 하면 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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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3-12-05 19:53   좋아요 0 | URL
'춤을 출 수 없어도, 안분지족 할 수 있으니 이만 하면 됐지 싶다.'
마지막 이 한 줄에 끄덕이며 공감하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3-12-10 15:40   좋아요 0 | URL
근데 영화를 다시보기 하니, 조르바 댄스 왕 멋진걸요~^^
우리 어깨동무하고 "쉘 위 댄스~?" 흉내라도 내야겠어요, ㅋ~.

2013-12-05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3-12-10 15:49   좋아요 0 | URL
저도 나귀님도 알고, ㅋ~.
이윤기 님의 쪼갬번역 사건도 알고요, ㅋ~.

원래 고민은 웬만하면 기억되지 않는 법이고,
그리고 고인은 웬만하면 말이 없는 법이죠.

실은 저 혹시나 싶어 '장미의 이름' 다시 읽어 보려 하고 있는데...
좋은 것들만 기억하고 싶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