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지만, 이곳 서재에서 처음 활동을 할때는 새벽 무렵에 깨어있을 때가 많았다.

아니, 새벽 무렵에 깨어있다 보니, 이곳 서재를 어슬렁거렸다가 인과 관계에 맞는 표현이겠다.

근데, 내가 새벽 무렵에 깨어있는 것은,

잠 없는 할머니의 불면증이랑은 좀 다른 그런것이었는데...

낮동안 육체노동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는 나로써는,

몸은 힘든데 정신은 말똥말똥 말똥을 굴리는 요사스런 것이었다.

 

다시말해, 몸의 상태로는 언제 어디서고 눈만 붙이면 쪽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정신상태로는 늘 깨어있으려고,

아니 늘 'Yes, I can.'의 상태로 스탠바이하고 있으려고 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육체와 정신 사이에 괴리가 생겼고,

가끔 눈에 헛것이 보였으며, 급기야 헛소리도 하기에 이르러,

이러다가 임성한 작가의 '왕꽃선녀님'을 영접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었다.

 

그렇게 된 근원을 나름 분석해 보자면,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어린시절 부모가 아닌, 조부모와 고모들 밑에서 자랐고,

당신들에게 아무리 귀하게 대접받으며 컸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무의식 속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로 각인되었으며,

아빠의 나를 향한 그것은 애정이라고 하기엔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모든 것에서 평범함 - 그 이상이 아니었던 내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다시말해 그들에게마저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든,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고 나서는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모든 일에 오지랖을 떨며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몸은 힘든데 정신은 말똥을 굴리는 각성 상태로까지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간혹,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는 아픔이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었지만,

난 그들을 비겁하게 비껴갔다.

내 자신이 아직 그 담굼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닮아도 너무 닮은 그 친구를 향하여 서슴없이,

영혼의 찜찌름한 냄새까지도 닮았다고 할 수 있겠고,

그 친구를 거울 삼아 날 비추어 보게 되었다.

 

묘하게도 그 친구의 상처에서 내가 본 것은,

상대방의 상처의 깊이가 아니라, 내 자신의 상처의 깊이였다.

내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수 닦아낸 후에야,

옹이가 훈장처럼 담담 또는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얼마전 지인 하나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하면서 내게도 장점과 단점을 얘기해보라는데 딱히 생각나는게 없는거다.

예전 같았으면 '다 잘해요'라든지 의욕이 앞서서 '뭐든지 잘할 수 있어요'라고 했을텐데,

이제는 장점이 하나도 없고 단점으로만 똘똘 뭉쳤어도,

그게 난데 어쩔 것인가, 내지는 나름 찌질한 단점이 매력이라고며 쿨하게 넘어갈 수 있겠다, ㅋ~.

 

암튼,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 세 부터 삼 세까지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그 시기에 엄마가 기르지 않은 아이는 정신병자가 될 확률이 높고 강아지도 새끼 때 어미 품에서 떼어 놓으면 사망률이 구십 퍼센트나 되죠"

라는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 말의 조건에 꼭 부합하는 나는, 그동안 살면서 쉽게 맘을 툭 터놓고 무장 해제를 하지 못했었다.

 

실은 이 책을 몇 년 전에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이 책 속의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의 세진의 얘기는 또 다른 나의 얘기라고 할 정도로 나의 상처를 후벼팠고,

그리하여 감당할 수 없을만큼 아파서 잔뜩 움추러 들었던 것이었다.

"그 슬픈 얘기를 하면서 왜 웃어요?"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지며 가슴 밑바닥으로 슥 칼날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오래된 방식이았다. 나 자신이나 가족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웃으면서 되도록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스스로의 감정에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적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발뒤꿈치를 땅에 붙이고 뻗대는 마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다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아제 와 새삼스럽게 올어요? 이 나이에?"

"어리광을 부려본 적 없어요?"

"없어요."

"한번도?"

"네. 기억하는 한에서는 전혀."

"슬픈 애기를 할 때는 슬퍼해야 하잖아요."

"남 앞에서 울어본 적 없어요. 선생님은 남이잖아요."(1권, 79쪽)

 

나또한 '수도꼭지'나 '집을 팔아 벌금을 내야 하는 여자'라고 하여 '집.파.녀'라고 불리울 정도로 눈물이 헤프지만,

텔레비젼이나 책 속의 일이었지, 내 자신의 일로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전 이곳에서 알게된 친구 하나가 '애착의 변화'라는 설문을 의뢰해 왔다.

다른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부탁할 수 있는 '질문이 다소 길고 민감'한 것일 수는 있지만,

나의 이런 과거사와 가족사를 잘은 몰라도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케이스스터디가 좋아도 쉽게 설문조사를 의뢰할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사안은 아니었을게다.

 

어떤 종류의 귀뜸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가 설문의 문항들을 보고,

'헉~'한동안 숨쉬기가 힘들었다.

내용이 다소 민감한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이미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면,

그 상처를 벌리고 헤집고 들쑤셔 놓는 꼴이었다.

 

상처를 일단 벌리고 헤집고 들쑤셔 놓아야, 치유책도 생긴다는 자명한 이치가 요번에도 몹시 아팠다.

난 직업적 소명도 내세우고,

병을 오래 앓아왔던 만큼 병의 내구력도 내세워 보고,

그동안 꾸준히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노력을 했던 만큼,

이내...상처의 치유와 봉합을 위해 이 책을 다시 펼쳐 보았고,

요번에는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이책에서 세진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나 또한 치유하고 치유받고자 하였다.

"ㆍㆍㆍㆍㆍㆍ스콧 펙의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찾아봤어요. 혼자 나를 분석할 때는 그 사람 책이 많이 도움이 됐는데 그가 가장 최근에 낸 그 책은 귀신들림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저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학문적 성과가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만한 절박함으로 그 문제를 연구하고 발표하게 되었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었다. 객관적 실체로서 사탄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목사가 집전하는 엑소시즘 현장을 참관하고, 귀신들림의 원인과 증상, 해결책 등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 삶도 결국 그 길로 가는군요."

  "융이 말년에 그쪽으로 갔죠? 어쨌든, 그 책에서 다시 확인한  내용은 사탄이라는 존재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우연히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랫동안 외로웠던 사람들,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에게 깃들인다는 거죠."

  "나는 그 외로움에 한가지 더 첨가하고 싶어요. 적개심. 적개심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죠. 공격성이나 방어 의식."(1권, 196쪽)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의 세진이 나였다면,

이 책의 세진이 치유받은 그 방식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아졌다면,

그러기만 했다면, 그게 끝이었다면, 난 이 페이퍼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거야. 심리적인 공백감, 애정에 대한 허기, 보호받고 보살핌받고 싶다는 소망 같은 거. 물건을 사면서 나는 애정의 대용품을 구하고 있었던 거지. 내가 사는 물건을 내 존재와 등가품으로 여기기도 했을거야. 그랬으니까 동종 품목 중에서는 되도록 고가의 물건을 집어들곤 했겠지."(1권, 255쪽)

 

  "그런 이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야. 강한 의지로 목표를 향해 매진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성실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어. 이런 이들이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구멍들을 하니씩 가지고 있는 거야. 이멜다의 구두나 재클린의 소핑 벽도 그런 예야. 목표 지향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느라고 억압해둔 감정과 무의식 영역의 욕망들이 그런 식으로 이성에게 복수하는 거래."(1권, 267쪽)

왜냐하면,

어려운 심리학 용어로 도배를 하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순 외로운 사람들 천지이고,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인데,

실패하고 마음 아파하니까 말이다.

 

나는 한번도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2권, 52쪽)

나도 남편이랑 6년을 연애하다, 결혼한지 올해로 19년인가 보다.

그런데 아무리 분위기 조성되고, 감성 충만하여도...사랑한다는 말을 해본적이 없었다.

남편이 하는 '사랑해'라는 말에 '동감이야'라든지 '나두'라고 소극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서도 거절당할까봐 두려웠다.

 

이 외로운 세상을 외롭지 않게 사는 방법은 어쩜 아주 간단한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선택하는데는 특별한 기준이 필요할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선택하는데는 특별한 기준 따위는 필요없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흠뻑 담금질하고, 내가 주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 후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언니, 밥 사줅게 나와 하면 거절하는데, 언니 밥 사줘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온다고. 그러니까 저 사람을 불러내려면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해야 한다고. 그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넘겼던 말이 뒤늦게 목에 걸렸다.(2권, 175쪽)

다시말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사랑을 하는 것도 나이고,

사랑을 하지 않는 것도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다.

물건을 취하거나 버리는 것도 나의 자유 의지이다.

하지만,

물건과 달리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취하거나 버리는 것은 나의 자유 의지이지만,

거기에는 꼭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김형경의 이 책까지는 재밌게 읽었다.

근데, 근간 '남자를 위하여'는 모든 걸 다 안다...가 지나쳐 거의 우상화, 신격화 수준이다.

내가 원하는 건...

힘들때,

등짝 한번 툭~하고 두들겨 주고...

같이 술잔을 부딪히며

아무말없이 술병을 기울여주는 사람이지,

모든 걸 다 알아주는 신이 아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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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4-02 06:56   좋아요 1 | URL
상처를 들춰내고 들쑤시고 헤집어내야 그걸 치유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요. 자꾸 감추려고 할수록 상처는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수도꼭지에요ㅜㅜ
그리고 그 설문ㅜㅜ 저도 참 힘들게 답했어요. 그게 참 그렇더라구요.
사랑을 선택하는~ 이 책 오래전에 읽으며 많은 공감했던 기억이나요. 다시 꺼내 읽어봐야겠어요.
오늘 하루 좋은 일 행복한 일 많은 하루되시길~~

하늘바람 2014-04-02 13:1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가슴아픈기억이 살아나더라고요 근데 아닌척하며 해버렸다는
 

남들이 다 좋다는 책이 내게는 별로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안봐도 불을 보듯 명약관화한 경우가 일본 소설이다.

일본 소설이라면 정서가 우리와 비슷해서, 보통 쉽게들 감정이입을 하곤 하나본데,

난 어쩐 일에선지 영 불편하고 마뜩잖다.

 

 

 

 

 

 

 

 

그렇다고 일본 작가라고 하여 마냥 간과할 수만은 없는게,

내가 엄청 감동 받았던 '신들의 봉우리'를 썼던 '유메 마쿠라바쿠'의 경우,

'음양사' 라는 책은 어떨까 하였는데,

그야말로 귀신과 혼령이 블루스를 추는, 나로써는 감당 불가인 기괴한 소설이었다.

 

가만보면, 일본소설에는 혼령이랄까 영혼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그게 내게는 낯설고 거부감이 생기는 거다.

 

SF소설에 등장하는 science fiction이나 social fantasy적 요소를 수긍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혼령이나 영혼이 시도 때도 없이, 어떤 기준이나 경계도 없이 등장하는게,

개연성을 방해함은 물론, 억지다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코널리'의 '모든 죽은 것' 정도가 되면 낫다.

혼령이나 영혼의 중간자로서의, 영매가 등장하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일본은 혼령이나 영혼을 하나의 전통이나 민간신앙 차원에서 흔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한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의 경우,

내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

수도꼭지 끝에 맺힌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울리는 것처럼, 외로워, 외로워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59쪽)

라는 표현 따위로 미루어볼때, 이사람의 감수성과 필력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하긴 내가 이 사람의 다른 것들을 평가할 깜냥은 아닌 고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사람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겠는데,

나와 코드가 안 맞을 뿐이다.

 

어차피 애도라는 것은 죽은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부고가 난 이후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들의 편의와 마음대로 꿰어맞추고 각색하고 해석하려든다.

 

왜냐하면 애도라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면,

"ㆍㆍㆍㆍㆍㆍ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551쪽)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인생의 본질이라는 허울 좋은 살아 있는 동안에 대해서, 가 아니라,

죽어서 어떤가 따위를 얘기해야 할텐데...

살아있을 때의 그(그녀)와 죽어서의 그(그녀)가 마치 별개인양 얘기하고 있다.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살아있는 나날들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강령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자신과 타인의 죽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거야.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죽은 사람과 자신을 같이 생각하는 건 달라.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일이 감정을 이입해서는 안 돼.ㆍㆍㆍㆍㆍㆍ(264쪽)"

이렇게 산자의 삶 위주로 얘기하고 있다.

내가 생략해버린 저 말 줄임표 부분에는,

우리식으로 따지면 죽은자는 죽은자고, 어찌되었건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는 뉘앙스가 담기게 마련이다.

어차피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거라면 죽은자를 위한 애도보다는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얘기하는게 낫지 않을까?

지지고 볶고 싸우고 다투더라도, 그게 삶의 온기가 바탕이 되어 비롯되는 그것 말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느라 왕방울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고마워할까?

눈물 흘리는 내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닐까?

애도의 목적이 내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니라,

진짜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면,

살아있는 동안 하루를 살아도 매순간순간을 가열차게 살 수 있도록,

사람의 단점보다는 작은 장점이라도 찾아내어 북돋워 주고 발휘할 수 있도록,

그러려고 애쓰느라고 흘린 작은 땀방울을 같이 나누는게 오히려 값지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니까 의미가 좀 애매모호한데,

사고사를 제외하고,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고,

자신의 명대로 다산 다음,

자신의 죽음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혜경 외 지음, KBS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 엮음 /

 애플북스 / 2014년 3월

 

죽을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면,

죽은 다음에 자신이 애도받고 못받고는 차후의 문제가 될 것 같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의 여부가 우선이 될 거 같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다양한 집단과 연령대의 국민들 총 16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단다.

이게 확률과 통계를 필요로 하는 역학조사라면, 165명이라면 대상이 좀 작은 감이 있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니 충분하다고 본다.

 

이 자료를 보니, 품위 있는 죽음의 조건으로 응답자가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이었고,

‘주변 정리’,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음’, ‘통증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그 뒤를 이었단다.

 

이걸 누구의 문제로 돌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걸 외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언제부턴가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이 인사치레가 되어버렸다.

건강함이란 몸과 마음, 심신이 균형과 조화되어야 한다.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것은, 균형과 조화가 어긋나는 것이니...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겠다.

 

그러니, 곱게 나이먹는다 내지는 나이값하고 산다는 게 제대로 된 덕담이다.

  

암튼,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다.

알지도 못하는 사돈의 팔촌, 조문을 가고 인사치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나와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거다.

태어나는건 내가 어쩌지 못했지만,
나의 죽음은 예비하는 순간 많은 것들을 내 의지대로 처리하고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죽음마저도 스스로 예비할 수 있다면 바랄 게없는 어른일게다.

동안을 부러워하지말고,

나이값하고 사는걸 부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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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3-07 23:33   좋아요 0 | URL
나이가 넘 빨 리 들어서 그 값하기도 허걱되네요 저도 반성해요

Ralph 2014-04-03 10:15   좋아요 0 | URL
죽음을 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매우 힘든것처럼 생각됨니다. 대부분 자신이 죽는 지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 이나 주위 사람이 안다해도 가르쳐주거나 도와주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면 누구도 가르쳐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어차피 자신이 알아야하고, 자신이 준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인생을 사는 것과 같겠지요.
 
늦은 일곱 시, 나를 만나는 시간
최아룡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보대끼며 살아가기 마련이고,

그 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기도 하고, 때로 다른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받기도 한다.

 

유약한 성격 탓인지, 또는 소심한 성격 탓인지 자잘한 일에도 상처를 받고 눈물 흘리고 하지만,

그건 텔레비젼이나 책 속의 사정일 경우이고,

잔뜩 움추러들고 그리하여 더 단단하고 높게 벽을 쌓아 올릴 뿐, 누군가에게 얘기해본 적도 그러니 위로받고 치유받은 기억도 없다.

직업 상,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면서 누구를 치료하느냐고 할까봐 두려워서 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가정 교육을 그렇게 받아왔었던 것이고,

내 자신을 말끄러미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택한 것이 익명의 글쓰기였다.

 

책을 읽고 읽은 느낌이나, 거기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글로 옮겨 쓰는 행위를 통하여,

나를 돌아보고 나 자신도 몰랐던 나를 찾고,

무엇보다 배설해낸다는 행위를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었다. 나를 위한 해우소.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글쓰기가 누구에게 보이거나 말을 걸거나 소통을 위한게 아니었다.

만약 그런 기능이 있다면, 그건 파생적이다.

 

언젠가, 여자들의 관계는 수다에 의해서, 남자들의 관계는 네트워킹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10여년전 기사이고 지금은 모든 관계가 네트워킹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상호적인데 반해 네트위킹이라는 것은 선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여지껏의 관계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네트워킹에 의해 형성되는 관계는 피상적이고 표면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의 관계도 일종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관계에 집중하다 보면 쉬이 공허해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즐찾 수나, 공감 수, 댓글 수 따위에 연연하다 보면,

내가 쓰는 글이나 내가 토해내는 고민, 들은 미미하게 느껴지는데,

빵빵한 즐찾 수나, 공감 수, 댓글 수, 들을 자랑하는 이들의 댓글과 덧글을 읽다보면,

전혀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는 피드백도 있게 마련이다.

시인컨대, 나도 뜬금없기론 둘째가라면 서럽다.

나름 과도기를 겪었지만,

이젠 글쓰기는 행위 자체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무심할 수 있고, 그리하여 홀가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책 한권을 읽었다.

장금이 버전으로 좋은 걸 좋다고 하는데 왜 좋냐고 물으시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다.

부제에 '요가'라는 단어가 들어가 지루할까 걱정할건 전혀 없어 주신다.

그렇게 따지면, 요즘 대세인 강신주도 '철학'을 매개로 '힐링'을 가장 싫어한다면서 힐링하지 않았던가?

체력이 약하면 강하게 만들면 되지 굳이 '저질체력'이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다. 저질체력이라는 표현은 건강하고 활동적이고자 하는 마음을 반어적으로 보여준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 (19쪽)

요가가 연관된 내용은 딱 요기까지이고, 힐링 에세이라고 해야 한다.

글 자체로 치유의 힘을 지녔다.

 

이 책의 저자는 최아룡이다.

최아룡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치유의 힘을 지녔음을 아는 사람은 알것이다.

 

 

 

얘기는 다시 카타르시스, 해우소, 또는 대숲으로 돌아간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면 그 옛날에 대숲에 가서 구덩이를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를 외친 이발사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타인에게 털어놓지 못하겠으면 나처럼 이렇게 글쓰기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겠다.

네트워킹이 좋은것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고,

다 털어놓을 필요 없이, 선별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중요한건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혼한스럽거나 정리가 안된 마음을 정리하거나 가다듬는 그 과정이다.

그러니까, 내 글을 읽을수도 있고 안 읽을수도 있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얘기하면 된다.

 

마음(, 다시말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고 가다듬는 과정을 글쓰기를 통해서 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람을 상대로 할 수도 있게 된다.

 

나는 이제 사람은 독립적인 객체이면서, 상대적인 존재라는 걸 안다.

부부나 연인 또는 부모나 자녀 와의 사이에서 통용되는 진리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알때, 내게 맞는 상대를 택할 수 있는 것이고,

(어쩜 이건 거울에 비친 나의 또다른 상의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의 위치와 영역이 있을때, 상대방의 위치와 영역을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전에 읽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 고전인 이유는,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건데, 이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치유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이는 나의 위치를 자리매김 할 수 없고,

상대가 있어야 나의 위치를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 그게 정체성이다.

 

치료를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에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은 이거다.

사람 마음 속에 여러가지 감정이 있는데, 그 여러가지 감정 중에는 상처도 있다.

사람의 상처를 보고 맞닥뜨리는데는 힘이 필요하다.

자기자신을 객관화하는게 중요한 이유는,

자기 자신의 힘이나 상처의 크기를 알아야 상대의 그것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틸 수 있는 힘보다 상처가 클때는 맞닥뜨리기가 힘들고 위험하다.

그러니까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는, 번짓수를 잘못 찾거나 오지랖을 부리지 말고 볼 일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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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4-02-25 15:35   좋아요 1 | URL
작년에 어느 요가 영상을 보고, 내년에는 요가를 한번 배워볼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핸드스탠드 즉 물구나무서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상이었는데,
단번에 매료되었습니다.
언젠가는 꼭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네요.
 

 

 

여자의 솜씨라고 해도 좋다 싶은 이건 울아들의 작품되시겠다.

얼마전 날 추웠던 어느날 더이상 책은 보기 싫고 할일은 없어 심심해서 만들었단다.

난생 처음 만든거라는데, '마음씨, 맵씨, 솜씨' 3씨를 자랑하는 날 닮지 않았다고 할까봐 손끝이 야무지다.

 

이게 정체성이란 말로 대치 되어도 좋을까 싶지만,

어렸을때 난 이 야무진 솜씨를 자랑하는 무언가를 직업으로 갖게 될 줄 알았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고, 아직도 그게 회한으로 남는다.

 

 

책을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대충 골라 읽는 타입이기 때문에,

보통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영국 남자와 중국 여자의 러브 라인을 그린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을 읽은 다음엔,

영국 조각가 남자가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런던 디자인 산책'을 읽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독서는 말 그대로 내 기분 내키는 대로이기 때문에, 선택을 할때 신중하지도 않지만,

읽다가 별로이면 집어던지면 그만이었다.

 

근데, 근래에 읽은 책 두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것이,

끝까지 읽느라 인내심을 발휘하는 수고를 하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게,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게 일반적인 검증을 거친작품인 것은 맞지만,

다른 사람이 큰 감동을 느낀 책이라고 해서,

나도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것이다.

 

 

 

 

 

 

 

우선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같은 경우,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 만으로도 결의를 다지기 충분한데,

강신주의 감정수업, '자긍심'편에서 언급되어 읽어봐야 겠다 싶었었다.

강신주는 '자긍심'을 일컬어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이라고 한다.

 

솔직히  '정체성'의 개념조차 모호했던 난,

책을 읽고나니까 선명해지는게 아니라 더 모르겠었고,

그리하여 네이버를 찾아보니,
'어린이가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차별화되고 사회에서 취득하는 과정을 발전시키게 되는 '자아'의 의미를 말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도 애매모호해서,

강신주가 언급한 자긍심이란 단어와 연결시켜 생각해보았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본인만의 고유한 개성을 얘기하는듯 한데,

그중 지속되어 자신의 것으로 습관화 돼고,

긍정적이어서 본인이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겠다.

'자긍심','자아존중감' 정도가 되면 뜻이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이렇게 무덤덤한걸,

처음 너무 어려웠거나 내 취향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했다.

'정체성'은 신프로이트주의 이론가인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언급한거라고 하는데,

프로이트 이론도 모르는 내게 신프로이트주의라니 머리에 쥐가 날 수밖에~--;

 

근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 책이 별로였던 이유는 샹탈이라는 여자 때문이었다.

자신이 늙어 간다는 사실에 서글퍼하던 샹탈이라는 여자가, 어느 날 연하의 애인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라고 하소연 하게 되고,

애인 장마르크는 그런 샹탈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시라노'라는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내용인데,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때마다 놀라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점이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라고 한다.

 

어린 아들이 죽은 후 또다시 임신을 하라고 부추기는 시누이와 거기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회의를 느껴 이혼하고,

일 잘하고 돈 잘버는 캐리어우먼이 된다.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와 같이 사는데, 잘은 모르지만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는 변변치 못한것 같다. 

 

나이가 먹고 늙어가는 걸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가지고 서글퍼할 수는 있다.

평생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하여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내가 샹탈이 별로인건 이런 것들 때문이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라면,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이고 실천의 방법이지,

장마르크에게 그렇게 표현한 순간 또 다른 애인이 가능하다는 허용이 되어버리는게 아닌가 말이다.

같은 의미에서 '시라노'라는 익명에게서 받은 편지를 감추는 그 마음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들을 '정체성'으로 제한시켜 버린 작가도 별로가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또 한권, '올리버 키터리지'가 그렇다.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세밀한가.

감정이 느끼는 파동은 얼마나 섬세할 수 있나?

인간과 인간이 내는 파동이 물결처럼 어우러져,

서로 간섭 현상을 일으키는 점이지대도 있겠지만,

어떤 파동에도 휩쓸리지 않는 소외지대도 있는 법.

 

이 책은 'ㄱ'님의 리뷰의 이 구절이 너무 좋아 외우다가, 내 편견이 잊혀질때쯤 되어 집어 들었다.

이 책 같은 경우는,

꽃이 피어 붉기는 잠깐이고 줄기에 이파리를 매단 채 견뎌내는 시간이 더 오래임을 조용히 얘기한다.

우리의 불편하고 추레한 현실 한쪽 자락을 건드려 감성을 자극하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인지는 모르겠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조각조각 단편의 삶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은,

삶은 매순간 우리가 계획하거나 맘 먹은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거나 늙었거나, 나이를 먹었거나 덜 먹었거나, 에 관계없이,

우리가 매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거기 나오는 '샹탈'과 '장 마르크'로 돌아가,

내가 별로라고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이유는,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해서도 아니고,

사랑이 영원할거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순간에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순간조차도 서로를 비껴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현세의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라는 책이 궁금하다.

이 책엔 '해지기전 한걸만 더 걷다보면' 류의 글이 가득할 것 같다.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
 이현세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2월

 

다시 처음의 만두 빚는 울아들로 돌아가서,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고 그것을 발휘하며 살 수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것을 선택한다고 하여 삶도 2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를 할땐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서,

놀땐 노는데서,

만두를 빚을땐 만두를 이쁘게 빚는데서, 울아들은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샹탈은 그순간 뭇 남자들이 아닌 장 마르크가 쳐다봐주지 않는다면 서글퍼하면 그만인 것이고,

장 마르크 또한 샹탈을 여러번 다른 여자와 혼동한 과거를 놓고 그럴게 아니라,

그순간 샹탈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때 놀라면 된다.

 

흔히들, 몸이 나이를 먹지 마음이 나이가 먹지를 않는다는 말을 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게 마련이고 언제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라면,

밥을 꼭꼭 씹어먹듯, 내 발로 한걸음씩 내딛듯,온 몸으로 통과하며 살고 볼 일이다.

이것은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랑은 좀 다른 의미인데,

사람이 항상 전력질주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항상 최선을 다하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는가?

잘하고 못하고, 의 개념이 아니라,

나를 올곧이 내어맡기는 의미라고 해야할까?

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하기 싫어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지만, 그게 다 한 대상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관계가 정리되면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고 밍기적거릴 수도 있고 그런 것.

 

정체성을 난 '자긍심' 내지는 '자아존중감'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다.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거기서 최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두번째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차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이 얘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정도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그게 사람이어도 좋고 사물이어도 좋다.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그 순간에는 대상에 집중하고 볼 일이다.

그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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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2-20 10:46   좋아요 0 | URL
아드님이 빚은 만두 정말 이쁘네요. 맛나보여요.
감동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느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여러 사람이 좋다고해도 내겐 읽기 어렵고 별 감동없는 것들도 많더라구요.
정체성에 관한 고민은 어릴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는 것이라 아마도 죽을때까지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알케 2014-02-21 08:43   좋아요 0 | URL
아이고 딸래미를 키우시는군요ㅎㅎ 맵시하고는..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사다놓긴 했는데 저는 어째 시들합니다 ,

하늘바람 2014-02-22 07:45   좋아요 0 | URL
만두 만두 정말 아드님솜씨여요? 것도 첨 만든?와 정말 감탄에 입이 쩍 벌어지네요.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제목만 보고 김소연의 '마음사전' 류의 책일거라고 생각했었던 나는 좀 아쉬웠지만,

설정과 내용은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오너가 누구든지 책은 믿을 수 있는 출판사의 그것이고, 번역도 내공 있는 변용란 되시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가 이런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은것도 아니고,

연애의 고수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니,

이런 로맨스소설을 놓고 개연성을 얘기한다는것 자체가 아주 웃기는 일이니 그저 재밌게 읽으면 된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다짐은 그저 다짐일뿐,

내가  로맨스소설을 즐기기엔 너무 올드하거나,

감정이 메말랐거나 사고가 경직되어 있는지,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딴지를 걸고 혼자 귀신 씨나락 까먹듯 툴툴거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재미있었다.

이런 작품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번역자의 내공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화가 처음에는 높임말로 번역되다가 나중에는 예삿말로 번역된다.

영어에는 높임말이 없다는 얘길 들었다.

1년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들의 관계가 친밀해졌음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라는 생각이 들지만,

차리리 이런 존칭의 구분보다는,

처음엔 격식을 차린 언어, 나중에는 그런 것의 생략 정도가...오히려 그럴듯 하지 않았을까 싶다.

 

로맨스를 로맨스로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만,

스물네 살 먹도록 부모님 밑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혼자 어학연수를 간 중국 여자가,

만난지 일주일 만에 스무살이나 많은 남자랑 같이 사는 게,

게다가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녀의 필요에 의해서 얹혀 사는 것이면서,

전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낯선 이국땅에서 늘 혼자이고 혼잣말을 하는게 싫어,

뭔가 따뜻한 것을 붙잡고 싶어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싶다'고 한다.

 

이 얘기는 소통을 하고 싶다는 것일테고,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인 것에 전제조건이,

그 남자를 나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봤을때, 언어가 달라서도 쉽지않은 그것이, 스무 살이나 연상이 되어버리면 더 요원한 일이 아닐까?

 

그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인한 소통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매개체로 몸짓 언어, 섹스가 언급되는데,

글쎄, 처음엔 어떨지 몰라도,

나이에 따라 신체적 조건과 건강상태, 피로 회복도 등이 다를 수밖에 없을텐데,

사랑과 신뢰에서 비롯되는 상대에 대한 배려 따위가 아니라면,

차이나 다름은 소통의 매개체가 아니라 단절과 불신의 골을 깊어지게 하진 않을까?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은 개방적인데 반해, 사고방식은 폐쇄적이고 유아적이다.

이런 생각으로 이어지니, 로맨스소설이 전혀 로맨틱하지 않게 읽힐 밖에~--;

하지만, 뜨문 뜨문 독백처럼 이어지는 몸에 대한 성찰은 충분히 깊이있고 로맨틱하며 아름답다.

강한 냄새와 강한 영혼. 나는 심지어 그것을 느끼고 만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당신 몸은 어쩌면 역시 아름답다 생각한다. 당신 영혼의 집이니.(79쪽)

 

섹스는 원래 이런것인가? 관통함은 당신이 나의 영혼에 들어오는 방식이다.(151쪽)

 

그녀의 일기장에 더 많은 단어들이 적히고 언어 실력이 늘면서 그와의 다툼은 늘어만 가는게 몹시 안타까웠다.

그녀의 단어들이 늘어가면서, 그녀의 사고방식 또한 넓고 깊어져 간다.

다른 단어는 그녀의 견해로 받아들이겠는데, 비관주의와 낙천주의에 대한 부분은 집고 넘어 가야겠다.

꽃잎은 비관주의자다. 꽃잎은 시들어 버릴 것이다.

노인의 몸은 비관주의자다. 몸은 썪고 무너져 내린다.

불교신자는 현실에서는 비관주의자이지만, 마지막에 죽음을 대할 때는 죽음의 평화를 환영할 수 있도록 삶 전체를 준비했으므로 낙천주의자다.ㆍㆍㆍㆍㆍㆍ사랑은 참으로 비관적일 수 있고, 사랑은 참 파괴적일 수 있다. 사랑은 한 여자가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이끌 수 있으며, 그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떠나는 것 뿐일 것이다.(316~317쪽)

 

"하지만 당신도 미래에 나와 함께 있기를 바라지 않아?"

당신은 3초간 침묵한다. 이 질문에 3초면 매우 긴 시간이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대답한다. "당신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당신을 위해 결정을 내리는 거야. 당신은 불교 국가 출신이라 당신도 그 정도는 알 거라 생각했어."

"오케이. 지금부터 우리 미래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말자.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야. 우리 중국인들은 기대감으로 살아. 기대감, 그게 미래와 가까운 말인가?

ㆍㆍㆍㆍㆍㆍ

이모든 과정을 겪는 건 그래야만 한 가족이 겨울과 다가오는 봄 축제 때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야. 겨울에는 다음해 재경작을 위해, 땅에 영양분을 주려고 들판에서 뿌리와 풀을 태워. 모든 게 다음 단계를 위한 일이지. 그러니까 이 자연을 봐. 인생은 지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늘이나 오늘 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감에 관한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오늘만을 살 순 없는 거야. 그런 날은 최후의 날이 될 테니까."(347~348쪽)

내세나 천국 따위를 믿는 사람은 현재가 불행한 사람이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이순간 행복에 겨운 사람이 내세나 천국 따위를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힘들고 꿀꿀하지만, 언젠가 더 나아질거라는 믿음과 기대감 따위가 내세를 얘기하도록 하는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중반을 넘어 황혼을 바라보는 남자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여자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다.

다시 한번 나이가 걸림돌이나 하는 걸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몸은 비록 떨어져 있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요.

나는 당장 당신에게 답장을 쓴다. 나는 나 홀로 떠난 여정이 너무도 외롭다고 말한다. 나는 요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답장을 쓴다.

 

서양에서 우리는 외로움에 익숙해요. 나는 당신이 외로움을 경험하고, 당신 혼자 있는 기분이 어떤 느낌인지 탐험해 보는 것이 당신을 위해 좋다고 생각해요. 얼마 지나면, 당신은 고독을 즐기기 시작할 거예요. 당신도 더 이상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거예요.(246쪽)

이 책을 읽고,

관계는 누구나 맺을 수 있지만, 사랑은 어른만이 할 수 있다는걸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보여지는 표면적인 관계맺기에만 익숙한 난,

다시말해 관계가 채 무르익고 않아 성숙하다고 느낄 수 없는 난,

성숙하지 않았으니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어른이 아니니 제대로된 사랑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말이다~--;

 

언어는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 있지만,

사랑과 삶은 내가 주체가 되어 하는 것이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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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2-12 20:21   좋아요 0 | URL
20 살 차이보다 어쩌면 사랑에 대해 성숙하지 못한 , 건강하지 못한 바램 때문이라는 생각이 저도 드네요..양철나무꾼님..~~^^

사랑은 배워질 수 있는거라고 하지만 그건 가르쳐서 얻어지는 건 아닌거같아요...~~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ㅠ

양철나무꾼 2014-02-20 10:22   좋아요 0 | URL
새벽숲길님, 댓글이 늦었네요.
어디 한국에 계신가요?
어쩜 성숙이란건 나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경험에 관한 문제가 아닐까 하고...님을 보면서 해봤습니다.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바람 끝이 매서워요.
건강 조심하시구요~^^

숲노래 2014-02-13 00:08   좋아요 0 | URL
맑은 마음일 때에는 어른이 될 테고,
어른은 밥그릇 아닌
맑은 넋을 고이 건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얻는 이름이리라 느껴요.
그러니, 사랑은 어른만 할 수 있겠지요.

양철나무꾼 2014-02-20 10:25   좋아요 0 | URL
요즘 마실도 못 다니고 댓글도 한없이 늦었네요.
산들보라랑 사금벼리랑 다 잘지내나요?

그런 의미에서,
산들보라랑 사금벼리에게서 맑음을 무한 수혈 받으시는 님은 만년 어른이실 수 있겠다는~^^
부럽~~~~~^^

감은빛 2014-02-13 13:49   좋아요 0 | URL
노래 잘 들었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4-02-20 10:26   좋아요 0 | URL
It's my pleas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