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문장론 -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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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작가의 붓'이란 책을 보다보니,

만능 엔터테이너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럿 등장을 하는 것이고,

'글도 잘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다 잘하면 어쩌자는 거야. 세상은 참 불공평해.'

하면서 툴툴거릴 무렵, 헤세가 나오는데...

거길보면, 융이 헤세에게 치료의 목적으로 그림을 권했다고 되어있다.

다시말해, 헤세는 처음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게 아니고,

나이 마흔에 시작한 그림 그리기가 '정말 놀라운 일'일 정도로,

그림은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더 인내하게 한다고 하며,

심지어 말년에는 글은 안 쓰고 수채화 작업에만 몰두한다.

 

내가 헤세의 문장론, 이책을 읽게 된 것은,

13세때부터 시인 외에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던 그가,

말년에 글을 접고 그림만을 그리게 된 이유를 혹시 알 수 있을까 해서였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아니 나는 너무 풍요로운...그러나 무사안일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때부터 내가 숨쉬고 살아온 세상은 궁하여 누구에게 손벌릴 정도는 아니었고,

머리도 아주 나쁘지는 않아 그런대로 넉넉하게 교육을 받았다.

때맞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의 사업실패로 주춤거리기는 했지만,

뭐, 삶에 악다구니가 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바라보게 되는 세상은 언제나 눈물겨웠고,

책속의 세상은 나에게 다른 말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말들을 읽으면서도,

의미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난,

비껴가고 어긋나기만 했을뿐, 인식을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화려한 수사법이겠거니 했다.

ㆍㆍㆍㆍㆍㆍ

우리에게 혼란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시에서는 명백하고 간단해진다.

꽃은 웃고, 구름은 비를 뿌리며

세상에는 의미가 있고, 침묵하는 것은 말하는 법.

                                (335쪽,『시집』'언어' 중 부분)

 

그동안 내가 어른들과 학교에서 배웠던건 벽을 견고하게 쌓아올리고 나를 무장하는 법이었는데,

어른이 되어 바라본 세상은 벽이 필요없을 정도로 허허로웠고,

의미파악을 할 수 있게된 책에선 중의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을 얘기했다.

기준이나 경계따위는 필요 없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얘기하니,

모양이나 실체가 없는 바람이나 공기 따위에 대해 얘기하니 혼란스러웠다.

 

다시 말해, 내가 읽은 책에서는...

책을 아무리 많이 읽기만 해서는 소용없고,

책을 읽고 행동으로까지 옮겨져야 된다고 계속 외쳐대고 있었는데,

난 그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꼴로,

읽은 책보다 많은 읽을 책들에 대한 욕심으로 책탑을 쌓아갔으니 말이다.

 

그런데 세기를 달리하긴 하지만,

두번의 큰 전쟁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나보다 훨씬 지난한 삶을 겪었을 헤세는,

독서의 양이나 질에 있어서,

문장이나 문학성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데도 불구하고...책욕심이 없고 겸손하다.

헤세는 사람들이 책이나 신문을 지나치게 많이 읽는다고 생각한다. 책은 의존적인 사람을 더 의존적으로 만듦으로써 다독으로 부당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책은 생활력이 없는 사람에게 값싼 기만적이고 대체적인 삶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책은 삶으로 이끌어가고 삶에 도움이 되고 유익할 때에만 하나의 가치를 지닌다. 약간의 힘, 되젊어지는 예감, 새로이 원기가 솟는 느낌이 생기지 않으면 책을 읽는 시간은 모두 낭비되는 셈이다." 양서나 좋은 취향의 진정한 적은 책 경멸가나 문맹자가 아니라 오히려 다독가라는 것이다.ㆍㆍㆍㆍㆍㆍ헤세에게 중요한 것은 최대한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는 좋은 작품들을 자유롭게 골라 틈날 때마다 읽으면서 남들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깊고 넓은 세계를 감지하고, 인류의 삶과 맥, 아니 그 전체와 활발히 공명하는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ㆍㆍㆍㆍㆍㆍ헤세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낯선 사람의 본질과 사고방식을 알게 되고, 저자를 이해하려 하며, 그를 어떻게든 하나의 친구로 삼으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개개인마다 자신에게 친근하고 잘 이해되며, 사랑스럽고 소중한 책의 목록이 있는 법이다. 누구나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기자신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 인생은 짧으므로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리석고 해로운 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독서의 질 자체이다. (9~10쪽)

헤세가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게 놀랍기는 했지만,

다르게 보고 뒤집어보는것,

이건 일종의 '낯설게하기'가 아닐까 싶다.

익숙한 것은 타성이란 이름에 다름아니고, 구태의연과 이음동의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방적'이지, 결코 쌍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을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이지, 단순한 것을 의미심장하게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작가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지, 의미심장한 것을 헤아릴 수 있는 몇몇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헤세는 다르게 보고 생각하는것, 뒤집어보는 것을 중시한다 이른바 가치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작가의 임무는 단순한 것을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것을 단순 한 것을(문맥상 '하게'아닐까?) 말하는 것이다."라는 빌헬름 셰퍼의 문장에 감명을 받는다.(17쪽)

 

ㆍㆍㆍㆍㆍㆍ또 그런 사람은 이 새로운 것, 이 풍요로운 것과 깊은 생각을 얻게 해준 이가 시인인지 철학자인지, 비극작가인지 재기 있는 만담가인지 굳이 구별하지 않을 것이다.ㆍㆍㆍㆍㆍㆍ반드시 읽어야만 하고, 행복과 교양에 필수적인 도서목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각자 나름대로 만족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상당량의 책은 존재한다. 이러한 책들을 서서히 찾아보는 것, 이 책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 되도록 이 책들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늘 소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각 개개인에게 주어진 자신의 개인적 과제다.(45쪽)

다독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고,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더 많이 쌓여 있어야 불안하지 않았으며,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면 언제 읽을지도 모르면서, 단연코 전작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며 책을 꾸역꾸역 사모으던 행태를 반성하게 된다.

과연 내게 있어, 맛볼 수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꼭꼭씹어 소화시켜 자양분이 되게 할 책들은 존재할까?

책을 읽기만 하는데서 끝내지 않고 행동으로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나의 실행력을 자극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만한 은 존재하지 않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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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6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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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4-04-26 11:34   좋아요 0 | URL
헤세는 사람의,
특히 청년의 마음을 너무 잘 꿰뚫는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지요
제게는 가슴을 서늘하게하고 오싹하게 하는 냥반이 헤세였습니다

그리고
꼭꼭씹어 소화시켜 자양분이 되게 할 책들,
실행력을 자극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만한 책
위와 같은 책 만나시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양철나무꾼님


밑줄 쫙~ 그어줄 내용이 많은 리뷰, 고맙습니다

2014-04-26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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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이 나고 성장하고 살아가는 데는 온 우주가 필요하다.

어느 한사람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머니나 아버지, 배우자의 영향력 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흔히 사람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치는 사람을 두고, 부모나 배우자를 얘기한다.

난 부모는 차치해 두고라도,

마주보고 누우면 그만큼 가까운 사이도 없지만,

돌아누우면 온우주를 한바퀴 돌아야 만나질 수 있는 '배우자'가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겼었는데,

근데, 부모나 배우자 말고도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귀울일 줄 안다는 건 참 중요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간혹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pain point에 한참 못 미쳤는데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이들의 경우 눈을 가리고 치료를 하게 되면, 똑같은 조건에서 훨씬 나은 결과를 보인다.

설명을 해주면서, 왜냐고 물어보면 아플까봐 그렇다고 겸연쩍게 대답한다.

 

사람은 간혹 어떤 사안에 대해서,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결과를 예측하고,

상상하여 자신에게 이롭게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흔히 잘하는 말로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결과는 바뀔 수 있는데,

선택의 기로에서 '신포도이론'을 내세우며 자기합리화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사는게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봐줄까, 에 연연하며 인생을 산다.

그러니 사랑받고 싶고,

그러니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워야 한다.

 

"정말 징그럽게 도덕가 같은 말만 하는군." 그는 톡 쏘는 이 말을 무마하려는 듯 크게 웃었다.(95쪽)

 

아주 예쁘고 착한 아기였다. 예의바르고 얌전한 아이였다.ㆍㆍㆍㆍㆍㆍ상대방이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하는 눈빛 같았다. 자식이 엄마를 그런 식으로 쳐다봐서는 안 되는 눈빛이었다. 결코 사랑스럽지 않았다.ㆍㆍㆍㆍㆍㆍ그래도 아이들은 대체로 아주 매력적이고 바르게 행동했다. 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처럼.(105쪽)

반면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살지는 못해도,

적어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갑자기 로드니의 목소리가 격렬한 감정이 담겼다.

"내 말을 믿어. 에이버릴. 인간은 하고 싶은 일- 타고난 일-을 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분명히 말하마. 네가 루퍼트 카길을 돌려세워 그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사랑하는 남자가 불행하고 성취감도 없이 사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거다. 그는 나이보다 늙고 지치고 낙담한 모습으로 인생을 대충 살아가게 될 거야. 그럴 때 네 사랑이, 아니면 또 다른 여인의 사랑이 그에게 보상이 그에게 보상이 될 거라고 믿는다면, 분명히 말하지만 넌 감상에 빠진 바보 멍청이야."

ㆍㆍㆍㆍㆍㆍ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난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말했고, 그건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이야기다. 지금 난 아빠로서뿐만 아니라 한 남자로서 말하는 거야."(156쪽)

 

 

로드니는 아들이 행복하지 않을 위험에 대한 부담이라고 대답했다.

조앤은 그가 행복 운운하는 것이 가끔씩 못 견디겟다고 말했다. 다른 생각은 안 하느냐고. 삶에 행복만 있느냐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것들도 있다고 말했다.

로드니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를테면 의무감이 있죠." 조앤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로드니는 의무감 때문에 변호사가 될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174쪽)

암튼, 조앤은 사막에 갇혀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만,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한 사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살지도 못할 뿐더러, 적어도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아닌가 보다.

 

기껏 사막에선 남편 로드니와 레슬리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조망하는가 싶었는데,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다 잊어버리고 그동안의 조앤으로 되돌아간다.

 

고통과 가슴 타는 갈망.

두 사람은 1미터 남짓 떨어져 앉았다.

1미터 남짓이었던 건

그보다 가까우면 안전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슬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는 게 분명했다.

혼란스러웠던 로드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사이에는 전기장처럼 갈망이 흐르고 있구나.

그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어.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슬리가 이렇게 한 번 중얼거렸을 뿐.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으리.

쿠션은 색이 바랬다. 레슬리의 얼굴도 그랬다.(255쪽)

그녀의 내면에서는 남편 로드니와 레슬리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시간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나이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거리에 관한 문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의에서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랑하는 사람마저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서,

자식이나 배우자의 삶에 간여하려하지말고,

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연구하자, ㅋ~.

 

어찌보면 조앤과 나는 외톨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하지만, 조앤은 외톨이라는걸 모르고,

난 종종 삶이 번거롭다며 스스로를 따시키는 '스.따.'라는 점이 다르다.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길 바래.

 

자기 자신의 삶에 자기 자신이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다는 사실,

당연한 얘기지만 인식하고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유치환'의 시, '너에게'가 유독 쓸쓸하지만 아름답게 들리는 아침이다.

 

물 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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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6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성향이 있다. (노엘레 노이만)

 

새움 출판사 판 '이방인'과 관련하여 '노이즈 마케팅'운운하는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자가 본명을 사용하였느냐, 필명을 사용하였느냐,

영어판을 사용하였느냐, 불어판을 사용하였느냐,

따위를 가지고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는 것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기득권의 그것 같아서 볼썽사납다.

 

난 '번역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하기 위해선 그보다 번역을 더 잘해야 하거나 그보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번역은 삶을 해석해내는 일과도 닮았다.

내가 안 살아봐서 모르는 타인의 삶을, 더 어려운 말로 내지는 문장의 호응에 맞지 않게 해석을 해놓았을 경우,

그 문장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문장순서 상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나와 아무 관계 없는 이정서의 '이방인'을 얘기하는 것은,

그동안은 죽어도 안 읽히던 책이 쉽게 읽혔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사람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밀도 있는 장르 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싶었기 때문이다.

 

장르소설도 그렇지만,

문학작품의 경우, 내 경우엔 그랬었다.

구석구석 다양한 장치들을 해 놓았는데,

여러문장들이 각기 보면 별것 아니지만,

적재 적소에 배치되었을때,

그것이 적절하게 해석되었을 경우,

응집력을 발휘하여 마음에서 일으키는 화학적 반응을 경험하였고,

그게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 카타르시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은,

얼마나 수려하고 매끄럽냐 보다는,

작가가 의도한 이러한 응집력을 독자들에게 제대로 반응할 수 있도록,

다시말해 화학반응이 제대로 일어나도록 불순물이나 이물질을 끼워넣지 않는게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정서의 번역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김화영의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정서의 그것을 두고 '도덕적 해이'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처음 바탕체로 밝힌 이유에서, 이정서가 이런 기득권에 대항할 수 있을만큼의 '도덕적 해이'를 가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세상에는 이만큼 기득권의 그것을 견뎌낼 수 없을만큼 도덕적인 역자들만 존재했었고,

그리하여 난 책이 고프고 목마른 독자였으니까 말이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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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4-16 11:5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양철나무꾸님.
저는 이 번역 논쟁을 흥미롭게 보고 있지만, 저의 판단은 유보한 사람입니다. 그런 저에게 판단에 도움이 될 조언을 구합니다.

'김화영의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셨는데, 누군가가 '김화영의 그것은 틀린 것이다'라고 판단한다면 그 판단의 적용 즉 옳고 그름의 적용은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옳지 않지만 수용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양철나무꾼 2014-04-16 12: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님.
님의 글들 귀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전 번역이란 작업이 얼마나 힘든 작업임을 알겠기에,
문장 하나 하나, 낱말 하나 하나와 싸워서 하나의 번역서를 만들어낸 김화영 님의 업적을 알겠기에, 또 그 반대 이정서 님의 경우도 미루어 짐작하겠기에, 저런 가변적인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우리는 흑과 백, 정오가 분명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는 흑과 백, 정오가 불분명한 논리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논리의 판단이 되는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결과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페어 플레이를 하기 위해선,
판단의 기준이 되는 조건을 똑같이 주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조건이 다른걸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자체가 언페어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논쟁이 붉어지기도 전에 힘 없이 사그러들고 마는걸 너무 여러번 보아왔었기 때문에,
전, 이렇게 논쟁이 될 정도로 '도덕적 해이'를 가진 역자가 고맙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케 2014-04-16 12:24   좋아요 0 | URL
오늘 이정서씨와 새움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비난하는 기사들이 죽 뜨던데 정작 핵심인 '번역의 적확성 또는 뉘앙스의 올바른 해석'에 관한 이야기는 없더군요. 당연히 논쟁의 출발부터 지금까지를 리뷰하는 가이드 기사도 없고... 기사만 보면 김화영의 번역에 반기를 든 익명의 번역자가 출판사 사장이었다는 '도덕성 논쟁 구덩이' 형
국인데 결국 이정서씨 까기 기사의 의심을 지울 수 없네요. 과연 김화영 교수가 문화권력이라 불릴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민음사가 출판권력인건 사실이지요.

두 번역서를 번갈아 읽어보니 가톨릭판 한글성서와 개신교판 한글 성서를 읽는 느낌이더군요. 불문학 전공도 아니고 불어 사용자도 아닌 제 입장에선 이정서 번역에 위화감이 덜하다는 건데 문제는 영어판 중역 시비가 단순히 레퍼런스였는지 아니면 텍스트였는지인데... 좀 추이를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양철나무꾼 2014-04-16 12:4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오늘 페이퍼를 보니, 러시아판을 로쟈님에게 의뢰(?)했었나 보더군요.
그걸로 미루어, 영어판, 독어판, 등 여러가지 판본들을 참고했을 수도 있고, 텍스트로 썼을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원작인, 불어판과 비교를 했느냐, 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 저것을 다 떠나서...기득권과 권력에 가려져,
제 목소리와 의견을 내지 못했던 많은 힘없는 번역자들을 생각할때,
이정서의 그것이 다행이고 참 고맙게 여겨집니다.

그나저나, 여의도의 벚꽃은 흐드러지다 못해 이울었겠네요?

jlovek 2014-04-16 17:18   좋아요 0 | URL
우와, 왠지 멋져 보입니다 양철나무꾼님!
"이런 기득권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의 '도덕적 해이'를 가진 것이 다행"이라는 구절이 뒤통수를 퍽! 하고 때리네요.

위 '알케'님의 궁금증에 답하자면, 제가 지금까지 본 것을 그대로 옮기면,
이정서님은 처음에 불어판보다 영어판이 익숙해서 영어판 중심으로 번역을 하다가, 나중엔 그게 아무 의미가 없어져서(아마도 중역의 폐해를 깨달았다는 의미 같음) 영어판조차 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어판을 보고 한 것이죠.
책을 읽어보면 존댓말 부분에서 영어판과 불어판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까지 한 것을 보면 불어판을 기준으로 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근데 양철나무꾼님은 글을 참 잘 쓰시네요. 뭔가 있는 것처럼, 멋지게... 뭐라고 설명하기가 좀ㅠㅠ
암튼 엊그제도 봤는데...많이 배워야겠습니다.
저는 번역에 관심이 있는데 님처럼 우리말을 멋지게 구사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러니까 외국어를 외국어 티 안 나게 우리말로 산뜻하게 번역해내기가 아주, 몹시, 매우, 대단히 어렵습니다ㅠ


양철나무꾼 2014-04-19 09:04   좋아요 0 | URL
왠지 쑥쓰럽지만, 기분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님의 그 기백 꺾이지 말고 건필하세요,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2014-04-16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4-04-18 19:36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도 그렇지만,
문학작품의 경우, 내 경우엔 그랬었다.
구석구석 다양한 장치들을 해 놓았는데,
여러문장들이 각기 보면 별것 아니지만,
적재 적소에 배치되었을때,
그것이 적절하게 해석되었을 경우,
응집력을 발휘하여 마음에서 일으키는 화학적 반응을 경험하였고,
그게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 카타르시스였다."

특히 이부분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마찬가지의 경우를 만나게됩니다

작품의 전반에 걸쳐있는 전후 상관 관계(흔히 context)와 별개의 것이 되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문맥이 주는 상황성을 적절하게 상호작용하도록, 즉 말씀해주신 "응집력을 발휘",
그 응집력들이 작동하는 순간 완전 새롭고도 아찔한 감동을 준다는데 적극공감합니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현상(응집력 미발휘)은
그야말로 글의 가치를 상당히 훼손하거나 혹은 결정적인 오해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경우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 치명적인 오류가 수백년동안 이어져 왔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표현 불가한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 동양 고전도 머리가 쭈삣서고, 뼈마디가 으스스해지는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ㅠ.ㅠ
(장르 소설도 이러한가요? 여쭈나 마나겠지만...ㅠ.ㅠ)


양철나무꾼 2014-04-19 09:01   좋아요 0 | URL
월레레~~~~~, 이게 누구래요~^___________^
덥썩~(( ))

차트랑 2014-04-20 01:23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뵙습니다 양철나무꾼님,
'월레레~~~'는 반겨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오랫만에 왔더니 알라딘 서재가 무척 낮설게 느껴지는군요
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
서재에 자주 들르겠습니다

좋은 글, 기대할게요~~

마립간 2014-04-21 08:56   좋아요 0 | URL
번역에 관해 양철나무꾼님의 댓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제 서재에 올리려 했는데, 국가적인 사고 있어 안 올렸습니다. 제 글에 양철나무꾼님의 글을 패러디처럼 인용한 부분이 있어 양해를 구하며 내일 올릴 생각입니다. 제 글에 대한 의견도 부탁드립니다.

양철나무꾼 2014-04-21 12:10   좋아요 0 | URL
국가적인 우울증으로 인한, 집단 멘붕 상태라고 해야할까요~--;
이럴때일수록 님이나 저같은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주변으로써 굳건해야 할텐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은 하루하루입니다.

그리고, 글은 상업적 목적을 위한 그것이 아닌 다음에는 도용이 되든, 인용이 되든, 패러디가 되든...
좋을대로 하십시오.
제가 게을러서 일일이 댓글 달기가 용이하지 않지만,
마립간 님이 인용하신다면, 오히려 제가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있다는, ㅋ~.
 
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정말 책이 좋다.

문자 중독, 활자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글로 쓰여진 형태를 취했으면 모든걸 다 주워 읽지만,

그런 나도 읽다가 내팽개치는 것들이 있는데,

학창시절 고전이라 불리우는 문고판 책들이 그랬었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건지 알 수 없었는데,

난 그걸 너무 어려서 글쓴이들의 정신세계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라거나,

정서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던것 같다.

 

그런 내가 또 한번 좌절을 겪었었던건, 장르소설 번역가로 알려진 K씨의 작품들을 접하면서였다.

내가 장르소설을 접했을때는 문고판 고전보다는 좀 커서였다.

그가 번역한 장르문학을 읽으며 나이먹어갔다고 할 정도로,

그가 장르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충분히 인정을 하지만,

그의 날림번역은 세월이 흘러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작품에서 날림을 잡아내는 내 눈은 점점 세심해져 갔다.

답답할 때도 있었고 속이 상할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흥분시킨건

그런 그가 깨어있는 척하고 학술지등에 의견을 제시하는 등 활발하게 말만 할뿐,

십여 년동안 번역본을 손보고 탈고하는 과정을 통해서 행동으로 실천하는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어서라면 새로운 번역물도 뜸해야 할텐데,

새로운 번역물은 꾸준히 쏟아내고 있어서,

급기야 그같은 급조된 날림 번역본을 읽을바엔,

'차라리 내가 장르소설 번역을 해보는게 어떨까?' 하는 마리앙토와네트 같은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요번에도 그와 비슷한 경우이다.

사람이니까...번역의 오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오역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번역자가 중간에 자신의 감정을 개입시키는 순간 탄생하는 작품은 더 이상 원작은 아니다.

1987년에 나온 작품을 25년 사이 세번이나 새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다고 김화영은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정서의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김화영이 25년동안 작품을 번역하는 능력,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능력이 전혀 원숙하지 않았거나,

본인은 새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다는 그것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의문이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정서가 그냥 명성과 권위에 대항하기 위하여, 또는 한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런 작업을 감내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세번을 읽어야 한다던 그렇게 어렵다던 까뮈가,

이렇게 쉬이 읽히다니...

어찌된건가 싶다가는,

무릇 노벨 문학상을 받은 대작이란 것들이,

그렇게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었던 적은 없지 싶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으로 공감을 할 수 있는게,

그게 보통의 문학이 아닐까?

명성과 권위가 있는 몇몇 사람들만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어려운 소설이었다면,

전세계 널리 읽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노벨 문학상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요즘 알라딘 서재, 이동네에서 이 책을 놓고 좀 시끄러웠었다.

누군가는 노이즈마케팅이라고 뭐라고 뭐라고 하던데...

난 어찌되었든 '땡큐'다.

이렇게 시끄럽지 않았다면 난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책을 읽지 못했을 것이고,

햇살 때문에 살해를 한줄 알았던 정신이상자 뫼르소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으로 재탄생시켜준,

아니 바로잡아준,

이정서에게 땡큐를 날리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정서의 노고를 칭찬하고 싶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좀 팔려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노이즈 마케팅이든 무엇이든,

충분히 감내할 의사가 있다,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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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4-15 16:18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 ThanksTo~ 양철나무꾼님^^

jlovek 2014-04-15 19:24   좋아요 0 | URL
김화영 교수의 불성실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가 나에게 조의를 표해 주는 쪽이 오히려 마땅할 일이었다."(민음사판)

일단 우리말 문장이 안 됩니다. .... 쪽이 .... 일이었다? 주술이 호응하지 않은 비문입니다.
세 번이나 고쳤다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이 구절의 이정서 번역은 이렇습니다.

"오히려 그가 내게 조의를 표해야 할 일이었다."(새움판)

그래서 저도 이정서 역자의 편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2014-04-16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창비시선 372
황학주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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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바람결에라도 황학주라는 이름을 접한 적이 없었던 나는,

이 시집 제목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보고 레마르크를 떠올렸다.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다보면,

'죽음의 현장은 도시에서 가장 생기있는 장소였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때는 전쟁통이었으니 그럴듯 하다 싶었지만,

왠지 이 시집의 제목을 접하고 시인과 일면식도 없는 난,

'극과 극은 통한다'는 엉뚱한 말이 하고 싶었으며,

그러고 보니, 시에서 언뜻 이영광 풍의 그것도 비친다.

아무래도 황학주가 시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이영광보다는 연장일테고,

그런 그를 향하여 '이영광이 비친다'는 말을 하는게 조심스럽지만,

난 이영광을 먼저 알게 됐을 뿐이고,

여지껏 이영광보다 삶과 죽음에 관해 치열하게 시를 쓴 사람을 보지못한 터라,

이말은 곧 삶과 죽음을 가열차게, 제대로 그려냈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가열찬'이란 말이 '한껏 힘을 뺀'이란 말로도 대치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영광의 그것이 죽음쪽으로 약간 치우쳤다면,

황학주의 그것은 오히려 삶쪽으로 치우친 것이,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라고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지만

 

누가 있다 방금 자리를 뜨자마자

누가 있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는 순간을 훔치던 마음이었다

또한 당신의 눈부처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

언젠가 빈집에선

일생 녹은 자국이 남긴 빛들만

열리고 닫힐 것이다

 

그때에도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려 올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그 몸 얼음 난간이 되어

 

이 시를 참 아프게 읽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상대를 특별하게 여기는 감정이지만,

상대의 눈 속에서 나를 바라보게 되길 바라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무게로 얹히거나,

눈물로 매달리기는 원치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 상대를,

상대방도 같이 나를 귀히 여겨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만,

그건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껴가거나 번지수를 잘못찾은 어긋나거나 엇갈린 감정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을 갈구하거나 구속하는 순간,

상대의 감정이 나와 같지 않을때,

그건 상대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 안에서 충만하여 넘치거나,

결핍으로 눈물을 흘릴지라도 나에 관한 문제이며,

감정의 주체는 나여야 한다.

 

고드름은 녹아 없어지지 않는 이상,

제 스스로의 무게를 견딜 수 없으면 떨어져 나간다.

그게 고드름의 죽음이다.

 

고드름처럼 매달려오는 사랑이 있다면,

받아들일 것인가, 내칠 것인가?

그로 인하여 아름다운 구속을 경험할 것인가, 허허로운 자유를 누릴 것인가?

매번 고민하게 만드는 우리네 인생사를 닮았다.

 

 

어둑해져 도착한 마음은 붓끝을 꿈결에 두었다

감은사지의 뼈를 묻었는지

낮의 문장과 밤의 문장 사이 오래된 초승달이 떴다

 

가끔은 서로의 문장들 팍삭 깨지기도 하는

동탑과 서탑

심장을 싸맨 채 우는 날도 있겠으나

견딜 의사가 있는 자세로

돌 안에 타인의 악기를 둔 마음으로

 

저마다 감은사를 가진

세상에 나간 적 없는 바깥을 아득한 거리로 펼친

동탑과 서탑을 실로 묶으며 나는 돌았다

 

두개의 탑 사이엔 여전히

한번도 가진적 없는 문장이 놓여 있었다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

문장 이전의 문밖으로

맨발을 조금 보여줄 뿐인

아~,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라는 시구절은,

채워가질 수 없는 충만한 결여를 느끼게 한다.

 

이 아련함과 아스라함 속에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우쳐갈 무렵,

'시인의 말'을 통하여, 이번 시집의 마침표를 찍는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몹시 쓰고 싶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다. 얼마나 왔으며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아무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데, 눈밭을 걷는 당신들이 보인다.

 

비어있다는 것은 채워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림을 그려낼지,

그가 눈밭을 걷는 당신들의 자취를 좇듯,

나보다 한참 연상인 사람에게 이런 말은 안 어울릴지 모르지만,

암튼...그가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지켜보겠다.

부디,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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