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고백하자면, 이 책을 시작하기전 난 '논어'를 비롯한 사서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어찌하여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읽을 기회라도 생길라 치면,

책마다 해석이 다르게 되어있는데,

그게 한자는 까막눈이니 그렇다 치고,

한자뒤에 붙어있는, 'OO이고 OO이니,'하는 추임새, '이른바 '현토'라는 것이 책마다 다르게 되어 있고,

이 '현토'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해석도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걸 너무 여러번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 책'좌파 논어'에서도 언뜻 비쳐지고 있는 내용인데,

주자가 달아놓은 주해가 '논어'의 그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지,

그동안은 책을 읽다보면 공자가 찌질이 못난이이거나, 일관성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성백효의 번역에 대한 언급으로 보나,

이권우가 방현주에 나와서 얘기한 '진정성'에 관한 언급으로 볼때,

뭔가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흥미로웠다.

 

그러던 난, 책머리에 노랑으로 밑줄친 부분의 이 구절을 보며 지레 실망을 하였었다.

 

'좌파 논어'라는 제목 자체가 그만의 어떤 독특한 개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좌파'라는 단어에서 '급진적'이고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하였던 나는,

그의 논어 해석(풀이)라는 것이 기존의 논어 해석(풀이)과 비교하여 크게 파격적일 것이리라 생각했었나 보다.

책머리에 '주자의 논어 집주를 완역하신 성백효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는 저 구절을 보는 순간,

주대환의 좌파라는 것이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한게 아닐까 또는 세월이 흐르면서 바랜게 아닌가 싶어,

내지는 논어 해석(번역)이라는 것도 큰 틀에서 보면, 하나의 번역의 세계인데...

성백효라는 큰 조류의 흐름을 어찌할 수 없는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고 씁쓸했다.

 

하지만, 결론을 얘기하자면, 내 기우였다.

주대환 이 분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과장하거나 수사를 사용하지 않고,

본인의 과거 경험에서 우러나온 담담하고 진솔함들로 풀어나가고 있다.

때문에 논조는 다소 약하고 부드러운듯 느껴지지만,

진실은, 곧 진정성은 힘이 세다.

 

그래서였을까?

'책머리에'의 이구절이 그 어느구절보다 강한 울림으로 내게 와닿았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위로와 격려를 얻기를 바란다.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청년들에게 이 책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바란다.(8쪽)


전에 까뮈의 이방인 번역 때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이런 고전 번역이나 고전 해석또는 풀이에서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동안의 케케묵은 학계나 관행의 답습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대환은 한문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기존의 이론이나 해석에서 좀 자유롭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나의 이런 풀이는 학자들의 전통적 해석과 많이 다르다. ㆍㆍㆍㆍㆍㆍ(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35쪽)

 

이런 나의 해석은 주자의 해석과 다르다.(39쪽)

 

遠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멀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와 관계가 멀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61쪽)

 

초나라의 접여라는 광인은 단순히 미친 사람이 아니라, 도가 계통의 사상가로서 일부러 미친 척하는 무정부주의자였던 것 같다.(71쪽)

 

여기서 소인(小人)은 마무와 노예 등 하인을 가리킨다고 주자는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로 읽고 싶다. 여하튼 여기서만은 소인이 군자의 반대말이 아니다.ㆍㆍㆍㆍㆍㆍ사실 타지고 보면 사람이란 누구나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하는"데 말이다.(82쪽)

 

*여기서 五十이란 두 글자는 卒(마칠 졸)자를 누군가 잘못 베껴 쓴 것으로 본다. 加는 假(빌릴 가)의 오기(誤記)로 본다.(130쪽)

여기저기서, 넘나드는 그의 견해는 경계가 없는것이, 그물에 걸리는 않는 바람같이 자유분망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싶은 말은,

학계의 그것이 주류여서 정설이고, 주대환의 그것은 주류에서 벗어난 것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것이다...

뭐, 그런 얘기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자유로운,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이고,

다양한 해석과 접근법은 획일성과 통일성을 지양한다는 면에서,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기존의 그것에 반하는 다양한 해석이나 접근법에서 우리가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기존의 그것이 아닌 '다양한 해석과 접근법'이고,

이것은 곧 학계나 주류의 그것에 대항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삶인 것이다.

 

암튼 좌파공자를 읽다보면 그동안 알아오던 딱딱한 학문, 유교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그게 저자 주대환의 개인적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란 걸 깨닫는 순간 더 설득력 있어진다.

 

많은 얘기들이 나오는데,

주대환의 개인적인 경험이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독특하고 재밌는 풀이를 몇개 소개해보자면,

 

위정편 21장, '왜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와 관련하여,

누군지 눈치 없는 사람이 참 곤란한 질문을 했다. 난들 왜 정치를 하고 싶지 않겠나?ㆍㆍㆍㆍㆍㆍ내가 벼슬하고 싶어서 무슨 짓을 했는지, 그 부끄럽고 잊어버리고 싶은 행위들을 일일이 다 얘기해줘야 하나?

ㆍㆍㆍㆍㆍㆍ유학자들은 이 구절에 너무 심오한 해설을 달았다. 하지만 딴청을 피우면서 곤란한 질문을 피해가는 말씀일 뿐이다.(194쪽)하는 구절은 진솔해서 매력적이다.

 

그동안 유교와 공자라고 하면, 조선의 완고한 성리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었는데,

그런 유교와 공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것은,

공자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스럽고 완고한 무리들을 싫어했다고 하며,

그동안의 학자들이 공자님의 말씀을 두루뭉술하고 하나마나한 소리로 만들고 있다(44쪽)고 한탄하는 부분에서였다.

 

가장 독특한 깨달음은, '충(忠)'이란 글자가 군신 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나 마음을 다한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덕목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 말고도,

때론 고지식하고 때론 융통성 없는 용어 선택(예를 들면, 필부 따위, )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참고로, 그동안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읽을라치면 잠이 먼저 한달음 달려와 나를 마중했던 그동안의 관행으로 미루어,

언제던가 잠이 안오던 어느날,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시조나 창처럼 외우는 이에게 자장가를 청하였더니,

정태춘,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를 시조나 창처럼 들려주었다.

그 노래를 시조나 창처럼 듣던 난,

시대를 초월하여 '진정성은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발전이 없을 뿐더러...

사물의 본질이나 물자체, 바꾸어 말하면 진정성엔 다다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지식하거나 모르는 것이 순간에 쪽 팔릴지는 모르지만 문제가 될건 없다.

단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아는것을 모르는 척 하는 건,

'기다'를 '아니다'라고 우기거나 '아닌것'을 '기다'라고 우기는 게 반복되는 건,

진정성에 저해되니 문제다.

반성한다.

 

암튼 좋고 재미난 구절 들로 넘쳐난다, 스스로 읽어 깨닫는 기쁨을 누리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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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4-05-22 11:39   좋아요 0 | URL
오늘 주문합니당~!! ㅋ Thanks to 나무꾼님. ^^

양철나무꾼 2014-05-27 11:32   좋아요 0 | URL
땡큐는 제가 외쳐야죠, 북극곰님~^^
잘 지내세요?^^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제목은 '대통령의 글쓰기'이고, 띠지에 적힌 부제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작법서는 아니다.

아니, 작법서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꼭 제목을 정해야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 관한 책 정도라고 해야 할까?

 

 

난 책을 읽을 때 기억해 두고 싶은 구절이나 오탈자가 있으면 포스트 잇을 한줄 너비로 잘라서 붙이는 습관이 있지만,

책을 읽은 후 기록을 하고 바로 떼어내기 때문에,

게다가, 포스트잇을 한줄 너비로 잘라 붙인다는게 여간 수고롭지가 않기 때문에, ㅋ~. 

포스트 잇을 덕지덕지 붙이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용도로 붙였는지는 노코멘트라고 했을때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하트의 전쟁'과 '신들의 봉우리'가 있지만,

이 책 '대통령의 글쓰기'엔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포스트잇을 자르는 수고로움쯤은 이런 책만 있다면, 감지덕지로 여길 수 있겠다.

아흑~, 좋아도 너어무 좋아~^^

내가 이 책을 향하여 이렇게 감정이 헤프면, 책을 제대로 못 읽은게 되는데,

난 글 잘쓰는 법 따위엔 관심이 없고, 사람도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겠다는 욕심따윈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통하여 글쓰는 비법을 전혀 전수받지 못했느냐고 하면, 또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다.

대통령이 글을 쓰는 이유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그리하여 국민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국민들의 마음, 즉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있다.

그런데, 그 감동이라는 것은, 진심에서 나오지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8년동안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고 다듬은 분이 쓴 것이기 때문에,

두 대통령의 글쓰기 지침 같은게 녹아 같이 버무려져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스타일을 나열하고,

두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다 타당한 얘기이고, 그 속에 글쓰기의 모든 답이 들어 있으니(다시말해, 이보다 나은 작법서는 없을 것이니까),

궁금하신 분 또한 일독하시면 되겠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정치나 대통령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정치나 대통령 따위는 어떤 소수의 특권 계층을 상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관심은 어떤 소수의 특권 계층에게로 집중된다고 착각했었다.

(난, 소수의 약자라고 생각했다, ㅋ~.)

그 중 몇몇 대통령을 향하여 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만의 일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묻었다.

 

하지만, 글쓰기 비법이나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따위가 궁금하지 않다던 내가,

아흑~, 좋아도 너어무 좋아~^^

하며 설레발을 치는 이유는,

이 책 '대통령의 글쓰기'를 통하여,

그것이 나만의 그들을 향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들 또한 국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리하여 진정 감동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목은 '대통령의 글쓰기'라고 되어 있지만,

읽다보면,

당신들이 어떤 방법으로 국민들과 공감하고 소통하였으며 사랑했는지, 가 생생하고 크게 와닿아

지. 못. 미. 의 마음이 되고,

접어두고 묻어두었던 나의 그것을 이렇게나마 한번이라도 표현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어디 말과 글뿐이겠는가. 어린아이와 사진을 찍을 때 다리를 크게 벌려 키를 맞추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속에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답이 있다.(36쪽)

   

대통령이 말과 글로 자국민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건 대통령의 소임이다.

그 말과 글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을때,

다시말해, 말을 하는사람과 듣는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같은 파장에서 만나 공감과 소통으로 이어져서 마음을 움직였을때,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글쓴이 '강원국' 또한, 이권우처럼 '진정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진정성의 조건으로 진짜, 진실한 것(속셈이나 저의가 없는것, 겉과 속이 같은것), 뉘우치는 것(즉, 반성하는것), 행동과 실천을 꼽으며,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자신이 빠지면 안된다고 전제한다.

나를 가장 주억거리게 만든 것은, 

선한 동기를 갖고 한 일이니 진정성을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며,

자기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이 진정성에 이 책을 읽고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추가해 보자면,

대화에 있어서 몸을 기울여 듣는다는 경청(傾聽)과,

내 말을 자제하고 남의 말을 듣고 사람을 격려하는 것,

내 자랑을 안 하는 것,

사람이 낙심했을때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기술적으로 하면 안되고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것,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아침을 먹다보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얘기를 듣게 된다.

요즘은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선거를 앞두고 참 많은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다보면,

자기 잘난척을 하느라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사람부터,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느라 혈안이 된 사람,

누가 궁금하댔나, 고릿적 전혀 상관 없는 일까지 끄집어서 굴비 엮듯 엮는 사람,

에 이르기까지 가관도 아니다.

근데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시간도 아깝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대통령의 글쓰기' 이 책을 읽으라고 귀뜸해 주는 것조차 아까우니까, 됐고,

 

노력을 하는데(...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안타까운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cheer up하라는 의미루다가,

'대통령의 글쓰기', 이 책이 그냥 작법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다시 말해,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비법서라는 걸...귀뜸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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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감기가 들어 맥을 못추는 아들녀석을 북돋워준답시고 온가족(이래봐야 남편, 아들, 나 3명)이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쇼파에 옹기종기 앉아 텔레비젼을 보았다.

아마 선거 홍보용인거 같은데, 개그맨들이 나와서 그 프로그램을 앞으로 10년간 이끌어갈 메인 MC를 뽑는 선거를 하기 위한 유세를 하고 있었다.

근데, 참 이상도 하지, 개그맨들의 그것이었는데, 재밌다거나 웃기기 보다는 안습이어서 난 보다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아침, 방현주의 라디오 북클럽에서 참 좋은 책 한권을 소개받았다.

그동안, 자신의 소신이나 주장을 한번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던, 이권우가 자신의 그것을 드러낸 것도 멋있었고, 앗싸~^^

책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책을 읽은 사람이,

다시말해 책을 읽고, 책을 통하여 깨달은 사람이 그걸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하여야 하는지,

설득과 감화의 적절한 예를 보여준것 같아서 좋았다.

에효, 나 참 말 어렵게 한다, 이권우의 언변에 엄청 감동받았다. 한마디면 될 것을~ㅠ.ㅠ

 

오늘 소개된 책은 '주대환'의 '좌파논어'였는데, 난 제목을 듣는 순간 '김규항'의 '좌판'을 연상했다.

 

 

 

 

 

 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김규항의 좌판
 김규항 지음 / 알마 /

 2014년 4월

 

저자 '주대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좌파'와 '논어'의 조합이 가당키나 한것이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대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일단은 그를 믿고 닥치고 읽고 볼 것이고,

그런 후에라야, 이 책과 주대환을 이해할 수 있고,

이권우를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설레발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실패와 실수는 용납되지도 용서되지도 않을 것처럼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요즘의 현실을 놓고봤을때,

공자와 논어를 새로운 시선으로 봤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그걸 주대환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고,


공자가 당대 사람들로부터 오로지 존경과 추앙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다가 상처받기도 했다. 비난보다는 경멸이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다. 권력과 힘을 가지면 사람들이 뒤에서 욕할지언정 함부로 대놓고 경멸하지는 못한다. 공자는 잠시 권력과 힘을 가져보았고, 그 효과를 잘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것을 갖기를 간절하게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더 자주 쓸데없는 헛발질을 하고, 정치적 오판(誤判)으로 비웃음을 샀다.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 비난과 비웃음,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 이런 것들을 2천500년 전의 공자도 겪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공간은 지금이나 당시나 비슷하지 않았을까? 나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게 공감을 느끼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위로와 격려를 얻기를 바란다.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청년들에게 이 책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바란다.('알라딘 책소개'인용)

 

그걸 이권우는 다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핵심은 그대로인데, 가는 방법이 진보적이다.

그러자 방현주가 묻는다.

"극과 극은 통해서 일까요?"

이렇게 안물었으면 어쩔뻔 했나? 이토록 귀한 답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방현주 무한 땡큐다.^^

"진정성이겠죠."

 

이쯤에서 끝났다면, 내가 이권우를 향하여 설레발을 치지 않았다.

그는 한국진보주의와 진보정당의 문제점과 대안을, 주대환의 이 책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논어는 연대(連帶)다.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고 격려하는 '연대의 언어'다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잘 하자.

부모에게, 형제에게, 동지에게, 잘하자.

 

그러면서, '우월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덜됐다'라고 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못하면서 연대를 이땅에 뿌리 내리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나 하는,

초로의 한국 진보지식인의 자기반성이라는 말로 맺는다.

 

내가 오늘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되 배려하지는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의식해야 할 주체는 자기자신이고, 배려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되는 것인데,

이게 바뀌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을 사는게 아닐까 하는 것.

가장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틈틈이 스스로를 위해 공부하면서 때를 기다린다는 게...

공자의 가르침이든, 주대환의 해석이든 아니면 이권우의 그것이든 내가 설레발을 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읽은 '살아가겠다'의 '고병권' 같은 경우도 철학자나 인문학자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를 보면, 철학이나 인문학이야말고 무엇보다 삶과 밀접한 실천의 학문인것 같다.

주대환도 경험을 벼리어 글로 써서 그랬지만, 고병권 또한 현장에서의 목소리를 글로 옮겨서 생생하다.

 

 희망이 덧없다는 것. 이는 절망한 이들의 말이 아니라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이들의 말이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 번의 오아시스를 보지만 모두가 신기루다. 희망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품는 것이지만, 미래로 갈수록 덧없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실질적인 것이 된다. 희망은 지금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내 다리에 있다. 이 글을 쓰던 날, 나는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누군가 적어놓은 희망을 보았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11쪽, '책을 내며'중에서, '살아가겠다')

같은 얘기의 반복이다.

몸이 기억하는 것, 날것의 의미에 대해서이다.

날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로 와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를 꾸준히 계발, 적어도 유지할 수 있도록 수혈, 내지는 급수, 내지는 에너지 공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 길지만 같이 되새겨보면 좋을것 같아 옮겨보았다.

 

플라톤이 '철학하는 왕' 프로젝트에 실패하고 노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내 저술은 있지도,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학문들처럼 말로 옮길 수 있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철학의 지혜, 철학적 앎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비유를 남겼다.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고.

철학의 지헤란 홀로 득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함께 살다 보면 온갖 마찰이 생긴다. 그 마찰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돌멩이를 부딪치면 그렇듯, 우리의 부대낌은 열을 만들어내고 때로 불꽃을 튀게 한다. 그 불꽃이 영혼의 램프에 옮겨 타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지혜가 아닌가. 나는 노년의 플라톤이 쓴 이 비유가 참 좋다. 서로 다투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때로 열이 나고 불꽃이 튀는 곳에서 우리는 영혼의 램프를 밝힐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불을 우리는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마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위대한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나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몸에서 계속 기름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불은 금세 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쉼없이 가꾸어감으로써만 우리 영혼의 램프를 밝힐 수 있다. 그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참 멋진 학문이 아닌가.(29쪽, '살아가겠다')

 

 

  “살아가겠다”
 고병권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1월

 언더그라운드 니체
 고병권 지음, 노순택 사진 / 천년의상상 /

 2014년 2월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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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기간동안 서해안 고속도로가 도로 위 주차장이 된 걸 본 누군가는 나들이 차량이 아닌 효에 방점을 찍었다가 빙점을 찍은 꼴이 되었다고 자평을 했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는 5월이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석가탄신일, 그리고 스승의 날 등을 소소하게 챙기는 그런 '동방예의지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23장)

영화 '역린'을 보았다.

영화 '역린'은 '중용'23장으로 시작해서 중용 23장으로 끝난다.

 

'중용'을 도올의 그것으로 읽을라치면,

 저 23장 한장만 비교해 보더라도 내용은 차치하고, 해설을 볼것 같으면,

일본의 20세기 사상사를 연구했는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사람과 헤겔이 등장해 주시고,

중국역사의 답보 상태가 어쩌구, 주자학의 해체가 어쩌구, 하는 얘기를 한참하다가,

성실하다는 뜻이 보수적인 중용이 아니라 끊임없이 화化를 이룩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게 엉뚱하기가 짬뽕공이나 메뚜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던터라,

저렇게 근사한 구절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역린'의 내용을 '네이버 지식백과'를 통하여 검색해 보니,

"용은 성질이 유순하므로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거꾸로 솟은 비늘[逆鱗(역린)]’이 있으니, 용을 길들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약 이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를 죽인다. 군주한테도 역린이 있은즉, 군주를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역린을 건드리지 않아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영화를 이해하기가 좀 부족하다.

아니, 나는 좀 부족했다.

지난주엔가 '라디오 북클럽, 방현주입니다' 에서,

영화 '역린'의 모티브가 됐다는 소설 '역린'의 작가 '최성현'이 나왔었다.

그런데 방현주 아나운서가 게스트의 긴장을 풀기 위하여 '방송전에 이렇게 많은 물을 마시고 시작하시는 분은 처음입니다'라고 하는데,

난 최성현을 이현세의 '버디버디'의 스토리작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유명작가도 긴장을 하다니, '신선한걸, 오홀~^^'하면서 흘려 듣고 말았다.

아직 2권은 출간 전이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뒷힘이 부족한 스타일인가 보다.

난 영화는 충분히 재밌게 보았다, 부디 건투를 빈다.

 

[세트] 역린 세트 - 전2권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역적의 아들, 정조
설민석 지음 / 휴먼큐브 /

2014년 5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완간 세트 -

 전21권 (본책 20권 + 조조록 사전 + 가계도 + 브로마이드)
 박시백 글.그림 / 휴머니스트 / 2013년 7월

 

 

난 영화의 이해를 위하여,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빵빵하게 전질로 갖추어 놓았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해 주시고,

설민석의 '역적의 아들 정조'를 훑어 보았는데,

쉽고 재밌게, 설명과 요점 정리가 되어 있어서,

나처럼 국사, 역사에 기초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난, 설민석의 '역적의 아들 정조'를 읽기 전까지는,

정조를 조선시대 성군의 한명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지,

그가 그렇게 불우한 유년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매사는 겉보기와는 같지 않다고,

겉으로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학문에 힘쓰는 문예부흥에 앞장선 인물처럼 보였었다.

김탁환 소설 '열하광인'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백탑파가 등장하던 소설을 보게 되면 정조는 서얼들을 차별하지 않고 실력에 따라 등용하는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사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참신한 문체는 문체반정이라고 하여 탄압하는 것이 아이러니컬 했었다.

 

분노가 가장 참기 어렵나니

사람이 드러내기는 쉽고 억제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분노가 가장 심하다. 이를테면 분노가 막 치밀어오를때, 사리를 살피지 않고 먼저 소리를 지르고 성질을 부리면, 분노가 더욱 치밀어 일을 도리어 그르치고 마니, 분노가 사그라진 이후에는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비록 깊이 성찰하는 공부는 없지만, 늘 이것을 경계하고 있다. 어쩌다가 분노가 치밀어오르면, 반드시 분노를 삭이고 사리를 살필 방도를 생각하여, 하룻밤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일을 처리하니, 마음을 다스리는 데 일조가 되었다.

                                                                                     (『홍재전서』중에서, 설민석의 역적의 아들 '정조')

 

우리는 가문이나 혈통이나 출신 성분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한다.

난 이런 얘기가 나올때마다 광분하는데,

우리가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아무리 죽을 똥 살 똥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의 부모를, 가문이나 혈통이나 출신 성분 따위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을 해서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모두,

팔자나 운명으로 돌려 버리고 퍼질러 앉아 버린다면,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것 없이 그냥 주저 앉아서,

금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날 수 있도록 그 누군가에게 팔자나 운명 따위를 점지해 달라고 기원만 하면 되는 것이지,

죽을똥 살똥 열심히 살려고 노력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흔히, 관점 차이나 입장 차이라는 말을 한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

또 비교를 할때는, 기준이나 조건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말도 한다.

 

그동안 난 영조, 사도세자, 정조에 이르는 죽음과 왕위 계승의 과정을,

보통 부자간의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평민으로 살다가 왕이 된 영조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그 사건의 전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가만히 있으면 넌 별일 없을 것이다.'의 그 말뜻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정조의 암살 계획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게 아닐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살수집단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게 아닐 것이다.

정조를 암살할 살수는 정조의 주변 곳곳에 오랫동안 쭈욱 포진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23장을 다시한번 떠올려줄 필요가 있겠다.

 

오랫동안 사람 주변에서 사람의 저런 사람됨을 겪게 된다면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게 한나라의 임금이라면 어떠할까?

작은 일은 더 사소한 일로 여겨질 것이고,

그렇게 사소한 작은 일에까지 최선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게 한두번이 아니라 오랜동안 지속된다면,

그런 감동이 살수라는 사람을, 삶을, 그리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책은 조선시대 서책을 담당하고 관리하는 내시를 일컫는 호칭이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대책을 얘기하기도 한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할 정도의 인물이고, 조선시대 문예부흥기에 우뚝 선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장용영이라는 군대를 설치하고 무예도보통지를 완성할 정도로 군사력도 소홀히 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문과 무의 조화, 말과 행동의 조화, 즉 '중용'의 묘를 알았던 성군이 아니었나 싶다.

 

가만 보니, 오늘 우리의 그분께도 적용되어야 할 논리가 아닐까 싶다.

 

부디, 당신께서도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하여 감화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공부가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까지 이어져야 하는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테고,

그리하여 중용이 학문으로 그치지 않고, 통치 이념이자 덕목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난 큰 인물이나 큰 그릇이 될 위인이 아니어서 그런가,

작은 일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중용 23장의 첫구절을 그대로 따를려고 꾸준히 노력은 하건만,

그 다음 구절로 단계를 밟아 넘어가지 못하고,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김수영'마냥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고 옹졸해져 가는 삶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하는 것인지, 원~--;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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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4-05-09 14:54   좋아요 0 | URL
제목이
참으로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
하여 중용을 誠論이라 하는가 봅니다...

말씀만 들어도 감동적이니, 이를 어쩝니까...

양철나무꾼 2014-05-10 02:39   좋아요 0 | URL
댓글도 잘 안달고 방치해 두는 게으른 서재에 왕림하셔서,
이리 말씀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영화를 보시고, 책으로 읽으시면 그 감동이 배가 되실듯~^^
 
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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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섬나라인데다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해서 지진이나 해일 등 자연 재해가 많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수많은 전쟁에 개입했던 나라인데다가,

과학과 공업이 발달하면서 선진국의 폐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재해도 만만치 않다.

이 얘긴 곧, 그만큼 많은 개인이나 집단적 내상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는데,

개인적 상처가 됐든 집단적 상처가 됐든,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남다른 힘과 단결력을 보여주는 일본이,

같은 아시아권, 바로 옆에 위치한 우리로서는 여간 부럽고 본받을 점이 아니다.

 

전후 독일에서 정신의학과 온갖 대체의학이 발달한 것,

일본 문학을 접하다 보면 등장하는 미신이나 주술 영매 따위의 것,

들은 어쩜 그들을 독특하게 구분짓는 상처치유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들을 '남다르게 응집시키고 단결시키는 힘'을 그냥 국민성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

 

부모를 사고로 잃고, 이리저리 친척집을 떠돌던 도토리 자매는,

괴팍하기로 소문난 친할아버지지의 말년을 병간호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곳에서 도토리 자매와 할아버지는 서로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실의에 빠진 도토리 자매의 동생을 위하여 처음 고안된 일이었지만, 언니가 동생에게 얘기하는 품은 거창하다.

"사람은, 뭐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일이든 괜찮은데, 뭐랄까, 그런 일을 하는 편이 건전할 것 같아.ㆍㆍㆍㆍㆍㆍ돈이나 집 그런 거 말고 말이야. 그러니까 사랑을. 그걸 큰 부담없이 하느님에게 돌려줄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생각해 봤어. 우리 둘의 재능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43쪽)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말만 거창하게 했지,

실행하는 과정은 두서없으며, 내용은 별볼일 없다고 오해하였다.

다시말해, 세상은 홀로 사는 곳이고,

아무도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쓰는것만큼...

아니, 그 반의 반만큼, 1/10만큼도 신경써주지 않는데 괜한 일을 벌이고 있군...하고 생각하였다.

ㆍㆍㆍㆍㆍㆍ이렇게 두서없는 답장을 보내다 보면 상대 쪽의 답장도 점차 두서없어진다.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그 사람들의 생활에 부족한 두서없는 대화를 메울 뿐인 역할.

 다들 두서없이 부담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혼자 살기에 그럴 수 없거나, 가족의 생활시간대가 저마다 다르거나, 의미 있는 얘기만 하려다 지쳤거나 그런 거다. 사람들은 두서없는 대화가 사람의 삶을 얼마나 지지해 주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49~50쪽)

책 뒷표지를 보면,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날

이라는 문장이 돌출되어 다가온다.

처음, 이 문장을 보고 위와 같은 맥락에서 오해를 했었다.

 

친한 사이라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라면,

어떤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런데, 생각의 방향을 살짝 비틀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방에 걸맞는 격식(예를 들면, 호칭이나 존대, 속한 집단에 따른 축약어나 은어의 사용 등)은 필요하게 마련인데,

때로는 무장해제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의식화 되지 않아서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런 무의식속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누구라고 정해지는 순간, 그에 맞게 격식이라는게 정해지게 된다.

이건 내가 그를 얼마큼 가까운 관계로 생각하느냐, 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나의 사회적 관계가 주는 일종의 자리매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계급장 떼고 아무 얘기도 아닌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날엔,

그건 가상에서의 그것이 되는 것이고,

사회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순간, 또다시 관계가 정립되어야 하고,

그게 현실이고 삶일테니까 말이다.

 

그럴바엔 상대에 걸맞게 나를 무장해제하고 재규정할 필요가 없는,

그런 누군지 모르는 타인이 홀가분 할 수도 있겠다...는 설정은 그럴 듯 하고 설득력 있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익명성은 무장해제를 위한 것이지,

위장이나 가식이나 상상에 의한 재배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맞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마음 안의 것을 깎아 내다 보면 사람은 병이 드는 거로구나. 그렇게 깨닫고 나서는 인간의 강함과 약함에 놀랐다.

ㆍㆍㆍㆍㆍㆍ사람은 그렇게 알기 쉽게 생겼고, 밥이 아닌 것도 날마다 먹고 산다. 분위기나 사고방식이나, 그런 것까지도.(33~34쪽)

'사람은 그렇게 알기 쉽게 (병이)생겼고, 밥이 아닌 (마음 안의) 것도 날마다 (깎아)먹고 산다.'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일본어에 까막눈인 나로서는, 의미가 모호해서 한참을 생각했던 문장이다.

지금 내가 무슨 그럴듯한 말을 한다면, 조개가 입을 꽉 다물어 버리듯, 자귀나무가 잎사귀를 딱 접어 버리듯 할아버지가 언짢아할 것이라 직감한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방에서 나왔다. 웃는 얼굴조차 덧붙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시간을 두고 조금씩 살갑게 다가오는 야생동물과 살아가는 듯한 감동이 있었다.(36쪽)

길들일 수 없는 그것을 '야생동물'에 비유했다.

야생동물이 살갑게 다가온다는 것은 야성을 버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때문에 길들었다는 뜻이 될 수 있지만,

이건 반대로 길들여졌다는 상호의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관계란 일방적인것일 수 없다, 절대적으로 상호적이다.

물론 과정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듯 보일 수는 있지만,

치우침이 지나치면 힘이 다시 지배하게 되고, 힘이 지배하는 곳은 절대적이지 결코 상호적일 수가 없다.

다시말해 힘이 지배하는 곳엔 폭력과 복종이 있을 따름이지, '살가움'이라고 지칭되는 따뜻함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그런 의미에서 야생동물이 야성을 버렸다는 것은 목숨을 걸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야성을 버리고 용기내어 다가갈때는 쑥쓰럽더라도 손내밀어 맞아주어야지,

뒷걸음질치며 뒤로 물러나버리는게 한번, 두번이면 모르지만,

반복되면 거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야성을 버린 야생동물은 그동안 살던 야생에선 살 수 없으므로,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릴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책을 가지고 툴툴거린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다.

어떻게 중딩때 잠깐 좋아하던 친구가 죽은걸, 꿈으로 알게 되고,

그리고 꿈에서 극적인 해후를 한다는 것인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그것이 만약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그런 것이라면,

이 정도 절절하여 꿈에 나타난다는 건, 미화하여 표현되는 것이고,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건 엄밀하게 따지면,

밤잠 못이루게 하는, 감정적인 범죄이다.

사랑고백보다 훨씬 간절하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다음에 가자." 딱 그 한 마디뿐인데.

 공간이 확 넓어지는 그 느낌을, ㆍㆍㆍㆍㆍㆍ

내일도 학교에 가면 무기를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엄마의 보살핌 속에 있고, 주말에는 바다에 가서 한껏 운동을 하는 무기를 보면 자신이 부모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건강한 삶을 살면서 발랄한 여자애들이 주위에 잔뜩 있는데도, 이렇게 약한 나의 좋은 점을 알아봐 주었어,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이 돌아오는 듯했다.

그때 무기는 내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천사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한다.(62~6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았던 것은...

'다음에 가자'는 말 한마디의 위력을 '공간이 확 넓어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하며,

사랑고백보다 훨씬 간절하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고 표현하는 부분이었다.

언제인지를 기약할 수 없는 모호한 말 한마디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넘나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걸 몸으로 체험한 사람만이 써낼 수 있는 그런 문장이다.

 

그런데, 도토리 자매의 이 동생을 어찌해야 하나~--;

 

여자도 남자도 아닌, 천사 같은 존재였단다.

적어도 사람은 아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고,

이렇게 메일을 쓰는 작업을 통하여,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멍석을 까는 제공자일 뿐이고,

서로 서로가 보듬고 감싸는 무명의 치유자들이라는 걸 알 날이 있겠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별다른게 없다.

누구나 다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잠을 자는,

특별할게 없는 매 순간 순간 들이 모여서 일상이 된다.

그 일상들이 모여서 삶이 된다.

 

정성들여 꾸민 러브레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노력을 기울이면 가능한 일이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얘기를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에 이르게 되는 것은,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다시말해 정성들여 꾸민러브레터와 그럴싸한 얘기들만 있어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관계는, 그 경계가 허물어졌을때,

그 경계 따위가 정말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질때, 다다를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는 천당에 살고, 여신은 신전에 살겠고,

사람은 사람과 보대끼며 땅에 발 붙이고 하늘을 우러르며 지지고 볶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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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