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를 읽고나서 필(feel) 충만하여 '1.4킬로그램의 우주, 뇌'를 집어들었다.

'신경 의학에서 뉴로 마케팅까지 융합 뇌과학의 현장'이라는 겉표지의 소 제목을 본 터라 쉬울거라고 생각은 안했었지만,

첫강의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카이스트 명강'이란 타이틀을 달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용, 정재승, 김대수 이 세분들은 강의가 깔끔하기로 유명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강의를 이해 못하면 다른 누가 강의를 해도 마찬가지라는 얘기이다.

 

 

 

 

 



 

 1.4킬로그램의 우주, 뇌
 정재승.정용.김대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7월

   

하물며 소싯적에 해부학이란 걸 들여다본 적이 있는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해부학 용어로 등장하는 의학 용어가 중구난방이어서 못 알아먹는다는 것은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난 그동안 한글을 제법 사랑하고 잘 사용한다고 자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반의 반도 알아먹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시작부터 기가 죽어 책을 덮어버릴 수도 없고, 낭패였다~--;

위 사진 속의 글을 뇌에서 인체 전반으로 의미를 확장시켜 슬쩍 문맥에 맞게 바꿔 본다면,

소싯적에 해부학 책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내가 이렇게 해부학 용어를 두고 잘 몰라서 한참 들여다 보게 된 까닭이,

많은 사람들이 인체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부학계에서 한글단어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글쎄, 정작 한자어로 해부학을 공부했던 세대들이 혼란스러움을 겪는 한글단어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체에 대한 이해는 차치하고라도,

얼마나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그동안 해부학에서 사용되었던 한자어가 대부분 일제의 잔재이고,

그래서 일제 잔재를 한시바삐 청산하기 위하여 한글 이름으로 바꾸는것이라면,

실용성이나 접근성 등의 측면에서 설득력이 없더라도,

우리가 북한처럼 한글을 잘 살려쓰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걸 부끄러워 하며,

한글이 다의어여서 의미전달이 모호하여 불편하더라도,

한글 단어로만 이루어진 해부학 용어 사용에 대한 타당성은 인정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동안 한자어로 쓰여진 해부학적 용어를 사용했던 것은 한글단어가 어떻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글이 다의어여서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 풀어쓰거나 설명을 하게되면 용어가 한없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위해서 한글 단어로 바꾼 것이라면,

설명을 위해 풀어쓰다보니까 길어지는 부분은 간결성이라는 면에서 위배된다.

그렇다면 해부학 용어를 한글단어로 바꿀게 아니라, 한글 사용법을 익히는게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글은 다의어여서,

글이나 말 만으로는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 될 수 없을 때도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래서 글에서는 한자어를 병기하는 걸로 설명을 대신 했었고,

그래서 글이나 말 등의 문자 외에도 음의 고조나 장단 ㆍ 음색ㆍ어조나 어투 ㆍ몸짓 ㆍ얼굴 표정이나 분위기 등 의미의 전달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건,

살아 움직인다는 건(生),

그래서 바뀐다는 의미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노병사'가 삶의 과정이지만,

병은 그냥 병일 뿐이지만, 의학에서는 이를 더 세분해서 질병, 증후군, 질환, 장애 이렇게 네가지로 구분(90쪽)하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어떤 병에 증후군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애기는 원인을 아직 잘 모른다는 뜻이란다~--;)

 

바뀜과 변화는 필요한 걸까?

아니면 늘 한결같아야 할까?

세상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늘 한결 같아야 할 것도 있다.

하지만, 이걸 가르는 데는, 다시말해 구분하는 데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기준과 방향점이 없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면 답보가 되거나 편견 또는 선입견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또는 고집이나 아집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요즘 '신영복'님의 '강의'를 다시 읽고 있는데,

거길 보면 '역易'을 '주역'의 '계사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130쪽)

처음 주역을 읽을때는 역(易), '변화'에 치중을 하였다면,

그다음 읽을때는 구(久), '오래지속된다'에 연연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역이 64괘의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삶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인간의 마음 또한 그렇게 바뀌고 변하는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면 변덕이고 변절인 것처럼 폄하하였다.

 

고인 물은 썪는다고 오래 지속되거나 머무르면 안된다고도 생각했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한결같음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고 답보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발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현실에 안주하고 답보하는 것은 퇴보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쯤에서,

'바뀜과 변화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 겠다.

 

성격이 좋게 말하면 까칠하고 나쁘게 말하면 더러워서,

매사에 흑백 논리가 분명하게 살려고 했던 내게,

역(易)과 구(久)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이 돌아왔다.

역(易), '변화'의 속성에서 본다는 것은 순간순간을 치열하고 가열차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구(久), '오래지속된다'라는 것은 '영원한 도돌이'와도 같은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변하지 않는다가 될 수도 있고,

한발 떨어져서,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변화가 아주 조금씩 천천히 눈곱만큼씩 이루어져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런 것들을,

종교 따위는 없는 내가,

먼 이국 땅의 말도 안통하는 교황의 말한마디에서 깨달았다고 하면 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교황은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때 교황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바뀜과 변화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건,

살아 움직인다는 건(生),

그래서 바뀐다는 의미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이지만,

이 모두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이건, 종교고 과학이고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치이다.

다시말해, 종교고 과학이고, 정치고 이념이고 간에,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은... 없다.

 

 

암튼,

새로운 의학 용어를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해가며 툴툴거리고 구시렁거리며 변명할 생각만 하는 나,

어쩔 것인가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4-08-20 01:38   좋아요 1 | URL
해부학까지 섭렵하시니넘 우러러볼 뿐이어요

양철나무꾼 2014-08-26 18:25   좋아요 1 | URL
섭렵이 아니라 들여다 봤을 뿐이라는~--;
다치셨다는 무릎은 좀 어떠세요?
빨리 나으시라고 제가 '호오~=3'해 드릴게요~^^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 - 뇌과학이 알려준 아이에 대한 새로운 생각
신성욱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전 아침 할 일 없이 텔레비젼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 평사리의 너른 들판을 보게 되었다.

잘 가꾸어진 전통 한옥이 한채 줌 인 되더니,

그 집의 주인과 친구들이라고 하여, 나이 아흔 안팎의 어르신 세 분이 앉아 계셨다.

세분은 한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분들이신데,

오늘날까지 우정을 유지해 오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참는다'였다.

 

근데 그 참는다...라는 말이 울분을 참는다 거나, 눈물을 눌러 삼키는 '억지로'의 그런 느낌이 아니라,

그냥 훨훨 털어버리는 무념무상의 해탈인듯 자연스러웠다.

그동안 참는다는 말은 '참아내다' 따위의 '힘든 과정을 이겨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로서는,

'기꺼이 참는다' 느낌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한번 들인 습관과 버릇이 무서우니 습관과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는 것일까?

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의 주장이 강해진다는 걸, 이른바 괴팍해진다는 걸 경험으로 너무 잘 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부터가 한살 한살 더 먹는게 무서울 정도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야 하는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게 미덕인양,

머리에 넣어둔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무거워지는 것마냥,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신만 들여다 보는 것일까?

그러다보니 에고(ego)가 생겨나게 되고,

후벼파서 상처만 덧나게 만들고,

상처가 옹이가 되어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더라~--;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 보진 않더라도, 시야를 넓게 확장시키지 못하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편견과 선입견에 갇혀,

그동안 내가 봐온 세계만이 전부인 줄 아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런데, 세분이 보여주신 '기꺼이 참는다'는 말은,

나 아닌 다른 사람, 개념을 확장시켜 다른 존재, 자연물 전체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되는 셈인데,

이건 내 안과 내 주변, 내가 봐온 세계가 전부라는,

내가 그동안 쌓아올린 단단한 벽을 허물고 고정관념을 탈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고,

그렇게 봤을때 이건 신선의 경계없음 내지는,

경계가 생기기 이전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라는 말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책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는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자면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뇌과학 신화에 반기를 든 책이다.

이른바 '3세 신화'와 '우뇌 신화' 따위의 잘못된 믿음이 '조기교육'으로 이어졌고,

이런 '조기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이 뇌를 망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현대 뇌과학에 조금만 관심을 갖다보면,

이 스트레스가 인간 아이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뇌발달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발달 단계에 맞는 적절한 자극 대신 과도한 자극, 즉 문자 학습 등에 노출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 분비됩니다. 이 코르티솔이 신경세포의 발달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아이의 뇌에 스트레스는 천적입니다.("41쪽)

 

어떤 단체에서 건강 실태조사를 해서, 언어발달 지체, 정서발달 지체, 호천적 자폐 성향을 보인 아이들의 문제의 원인으로,

아이들에게 전이되는 부모의 과도한 스트레스와 아이들의 과도한 조기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꼽았다.

 

인간의 뇌의 발달 과정을 보게 되면,

파충류의 뇌, 감정의 뇌, 생각의 뇌, 순서로 발달한다.

이중 파충류의 뇌는 아이가 태어날때부터 생명활동을 해야하니 이미 거의 완성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다음 감정의 뇌, 즉 대뇌변연계를 약 12세까지 집중적으로 발달시킨다.

 

건강한 뇌라는 것은 그러니까, 각 나이단계 별로  파충류의 뇌, 감정의 뇌, 생각의 뇌가 조화를 이루는 뇌이다.

그런데 조기교육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감정의 뇌를 (집중적으로 발달시켜야할 그때) 발달시키지 못하고, 생각의 뇌만 발달시키게 되는 부조화를 초래하게 되는 셈이다.

 

이 말은 바꿔 표현하면,

약 12세가 될때까지는 감정의 뇌를 집중적으로 발달시켜주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의 뇌를 제대로 키우고 발달시키는 것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아이의 뇌를 제대로 키우고 발달시키는 것이 아이의 머리가 좋아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아이의 머리가 좋아질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불사할 태세이다.

 

태교나 영재교육에 목숨거는 이들에게,

뇌가 원하는 것은 노는것이고,

맘껏 놀때(free play,190쪽) 뇌가 가장 잘 자란다는 말을 들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린이 놀이 운동가 편해문 선생님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할 세가지라고 하여 다음의 것들을 꼽는다.

마음껏 놀 수 있는 안전한 장소,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 함께 놀 수 있는 친구(191쪽)

여기에 더하여, 미국 국립정신보건원의 제이 기드 박사를 비롯한 뇌과학자, 뇌연구자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라, 아이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라.'(170쪽)같은 우리 할머니들이 들려주셨던 것과 같은 조언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의 뇌가 침팬지의 뇌와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뇌와 침팬지의 뇌에는 모두 언어를 담당한다고 여겨지는 특별한 신경회로가 있단다.

그런데 침팬지는 몇개의 단어를 이어붙일뿐이지만,

인간 아이는 단어와 문장, 무엇보다도 마음이 담긴 인간의 언어를 말한단다.

그러면서 저자의 시선은, 이런 반성과 통찰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는 아이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고 있는지 반성해봐야 한다. 인간의 언어를 깃들게 하는 인간만의 풍부한 언어적 풍경이 과연 아이에게 주어지고 있는가.(215쪽)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있으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 개념을 확장시켜 다른 존재, 자연물 전체에도,

나처럼 마음이 있다는 것을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나 아닌 다른 사람, 개념을 확장시켜 다른 존재, 자연물 전체에 대한 통찰과 이해와 배려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대화에서 말이 차지하는 부분이 15~20%이고 나머지는 태도와 표정이라는 것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개념을 내 삶에 치환시켜보자면,

스트레스는

인간 아이 뿐만 아니라 인간 어른인 나에게 있어서 뇌발달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였다.

 

현대인의 병은 진단을 내리기도 쉽지 않지만,

증상을 봤을 때도 주변 사람이 봤을때는 대단해 보이지 않고,

본인 스스로도 죽을 만큼 아프다던가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블랙아웃되어 쓰러져 보기전까지는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다.

그런데 해주는 처방이라고 해주는 것이 어찌보면 장님 뜬구름 잡는 격인 스트레스받지 않기, 마음 편히 먹기, 규칙적인 생활하기, 운동내지는 산책하기, 햇볕쬐기, 이런 변변치 않은 것들이다 보니까...설렁거리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린다.

 

그러다가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고, 아침 저녁 출퇴근길에 잠깐 햇볕을 쪼여 주고 바람을 맞아주고, 살짝 다리를 움직여 걸어주고, 스트레스를 덜받고 웃으려 노력하고, 하는 마음만으로도...편안해지는 걸 경험하게 되고는 참 놀라워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상에서 지키기가 어려운 게 아니고, 지속시키기가 어렵다.

그러니 방법은 계획을 너무 거창하게 잡지 않고 볼 일이었다.

 

다시말해, 인간아이이고 인간 어른이고 간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 유일한 방법은...'맘껏 놀기'인 셈인데,

이말은 바꾸어 말하면, '기꺼이'이고, '제 멋에 겨운' 것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가 경험이 되어 일상 생활에 녹아 들어 즐기면 될 것이고,

어른들은 즐기며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된다고 하지 않던가?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고,

난 일이 놀이가 될 수 방법은 '마음에 맞는 사람'이더라.

 

최민식이 이순신으로 분한 영화 '명량'에선 이걸,

소박한 흰죽을 앞에 두고, 또는 토란 한알을 손에 쥐고선,

'함께 할 수 있어 참 좋구나' 라고 얘기하더라.

 

세상에는 말이 되지 못한 말도 많고,

말 같지 않은 말도 많다.

하지 않느니만 못한 말도 있고,

아니 들은만 못한 말도 있다.

 

마음에 담아두고 겉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더라도,

그게 뜻이 있고 염원이 담겨있다면 하늘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아~,

이쯤 얘기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놀면서 쉬엄 쉬엄 합시다, 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 스물넷에 장애인이 된 한 남자와 그가 사랑한 노들야학의 뜨거운 희망 메시지
박경석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어렸을때 제일 이해하기 힘든 말이 '잡은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라'는 말이었다.

잡은 고기를 깔끔하게 손질까지 해서 주면 그보다 더 좋을게 없을것 같은데,

왜 구태여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느라 자신의 고기잡는 비법을 전수한답시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 이중으로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동네에는 새벽이면 신문을 배달하는 나이든 형아가 한명 있었다.

다들 날라 다니는 시간에,

이 형아만은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다는 듯이 자기만의 느긋한 걸음걸이를 고수하였는데,

그게 깔끔한 외모, 단정한 옷차림과 더불어 이 형아를 새벽 골목에서 두드러지게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날 가만히 보니,

이 형아를 꼭 닮은 아저씨가 먼발치에서 시선으로 쫓고 있었는데,

그게 마치 오라(aura)를 형성한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걸 발견하고는 난 가족들한테,

저건 아동학대가 아니라 청소년 학대라고...

저 오빠는 공부하라고 놔두고,

그 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저 아저씨가 감독도 하고 배달도 하면 되겠다고 열을 올렸더니,

그때 가족들이 내게 했던 대답이,

잡은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였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말의 뜻을 이제는 알겠는데,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이 형아를 작년쯤 내가 사는 동네의 지하철역 입구에서 발견하였다.

아저씨가 된 형아는 여전히 외모도 깔끔했고 옷차림도 단정했는데,

하는 일만 신문배달에서 지하철역 입구에 철퍼덕 주저앉은 구걸로 바뀌어 있었다.

 

이 형아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아저씨는 아버지였는데 돌아가시고,

지적장애가 있는 이 형아 혼자 남게 된 것까지는 이 형 아버지의 예측대로였는데,

문제는 동네가 재개발되고 똑같이 성냥갑 모양으로 생긴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간단한 글자나 숫자를 보고 구별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까지는 예측을 못하셨나 보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이 발달되어 종이 신문을 보는 수요가 줄어들면서,

스피드와 정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배달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걸어다녀 스피드도 떨어지는 데다가,

아파트의 동ㆍ호수도 읽을 줄 모르는 신문배달원은 경쟁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장애, 장애인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피부에 와닿는 말이 통신장애가 아닐까 싶다.

남녀노소 거의 모두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요즘,

자신의 핸드폰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핸드폰이 잠시만 먹통이어서 연락이 안되게 되면,

불편을 느끼고 불안해 하는 이른바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많다.

 

장애(障碍, disability)라는 말을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니,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라고 나오고,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의 특수교육학 용어사전에서 다시 한번 찾아봤더니,

'질병이나 사고 등에 의해 지적, 정신적, 청각, 시각, 내장, 골격, 기형적인 면에 결함(impairment)이 생겨, 이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상태이다.
결함은 신체의 특정 부위나 기관의 기능이 손실되었거나 감소한 것을 의미하므로 의료적 지원이 필요하며, 장애는 손상으로 인해 특정 영역(읽기, 보기, 걷기, 듣기 등)에 능력 저하가 생기는 경우 교육ㆍ훈련적 지원이 필요하다'
라고 되어 있었다.

 

어쩜,

장애나 장애인들을 이런 통신장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들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사람이란 몸소 경험하고 체험해 본 것에 대해서만 친밀감을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거리감을 좁히려다 보니, 비교가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다.

 

정작 장애인들은 이런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지 못할 정도의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장애인들의 현실을 무시한 비교인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나의 이런 노력을 어여삐 여겨주지 않고,

나는 스마트폰 등 '통신장비 의존도가 낮다'고 하면서 심드렁해져 버리면 할 말이 없는 것이고,

 

'뭐라는 거냐, 우리가 보는 장애인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정도로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심한 장애인, 소위 중증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우리의 눈에 띄게 출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문제점이기도 한데, '장애인의 이동권'과 직결되어 있다.

이들의 대다수가 이른바 '방구석' 밖으로 자의로 나올 수 없는 이들이다.

자의적으로 나올 수 없으니,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없고,

교육을 받을 수 없으니 직업을 갖기 위해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난 그동안 저상버스를 가끔 편하게 이용하면서도, 장애인의 이동권이라는 측면에서 접근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하철역에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야 하는 타당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리프트가 되었을 경우, 한번에 한대의 휠체어밖에 못 움직이고,

여러명이 같이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추가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휠체어는 타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노약자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이 책의 말미에 나와있는,

'밥 먹었니?'또는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사말과 관련해서였다. 

삶을 산다는 것은 거칠게 말하면 밥을 먹는다는 것인데,

자기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장애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도움 받을 누군가를 구하지 못하면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야학의 처지가 나은 선생님들이나 봉사 요원들은 한번 밥 먹이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장애인들의 식사수발을 들다보면 정작 자신의 밥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야학의 선생님이나 봉사요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한번도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밥을 먹지 못하고 건너뛰거나 숨어서 몰래 먹고하다가 생으로 병을 얻게 되기도 하고 그랬나 보다.

장애인이 사회에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가 베풀어주는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계획하고 사회자원의 분배와 집행을 구체적으로 행사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124쪽)

 

장애인도 사람이고, 의식주는 사람이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이다. 

기본권을 누려야 하는게 사람들의 권리라면,

기본권을 행사하는 주체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행사하는 주체가 '국가'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엄격하게 말하면,

배고픈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어떤 조취를 취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 있는다는 것은,

살인까지는 아니어도 살인방조죄 정도는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얼마전에 읽은 '미 비포 유'도 그렇고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도 그렇고,

소설 속의 그것이라고 밖에 얘기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의 무대가 우리나라가 아닌 것이 완전 슬플 수밖에 없다.

 

좀 과한 비약이고 설정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의의 사고를 만날지 알 수가 없다.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제 기능을 못하면 '장애'라고 보아야 한다는 사전적 정의에 따른다면,

우리가 성인이라는 전제 하에(어린이의 시절을 건너왔으니 '장애아'는 아니지만),
어린이의 그것을 장애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제 기능을 스스로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제 기능을 하는 어른이나 부모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또래에 걸맞는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하나 하나 배우고 익혀가면서,

어른이나 부모의 보살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장애인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제 정신적ㆍ육체적으로 늙고 병들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 이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세상에 태어난 이상, 한번은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이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천년만년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복제양 돌리나 줄기세포 따위 첨단 의학의 힘을 빌리겠다는 사람들 일텐데,

복제양 돌리의 사망 이유는 '조로'였다는 걸 아시는지, ㅋ~.

 

심신이 손실되거나 감소하는 결함일때는 의료적 지원을 해주면 되지만,

장애는 손상으로 인한 능력저하가 생기는 것이므로 의료적 지원에 더하여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노인들을 향하여 제대로된 의료적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의료민영화를 얘기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들보다 수적으로든 처우로든 헐씬 열세에 있는 장애인들의 당연한 권리인 의료, 교육, 훈련에 관한 지원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나?

 
앞에서 통신 장애를 예로 들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것이 장애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과 공감이 단절되면 그것이 장애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달장애, 공황장애, 뇌병변 장애, 성기능 장애 등등...'장애'란 말이 접미사로 붙은 수많은 단어들을 보면,

적어도 소통과 공감을 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의 정의는 바뀌어야 할텐데,

다른 게 장애가 아니라,

공감과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으면 '장애'로 봐주어야 한다는게 나의 견해이다, ㅋ~.

 

그래서인지, 노들야학의 교장이시며, 이 책의 저자이신 박경석 님께서는...

다른 어떤 이론을 차치해두고, '함께하자'라는 실천적 구호를 함께 하고 계시다. 

그러면서, '함께한다는 것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며,

노들에 오는 교사들에게  멕시코 사파티스타 원주민 여성의 말을 들려 주고 싶아 하신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97쪽)

 

다시말해, 장애, 장애인, 이딴 것을 책으로만 읽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들이 고착되어 있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난 다른걸 장애라고 하고 싶지 않고,

소통과 공감이 부재되었다면 모두 다 장애라고 하고 싶다.

자신의 삶만 쳐다보며 사는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빠르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포개려는 그 속도는 점점 느려져 간다.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 앞에서 제발 발길 멈춰주길 바란다.

그 발길 멈추고 내 삶만이 아닌 세상을 함께 바라볼 때, 함께 살 수 있는 그 방법의 첫 시작이 되지 않을까?

아직 보이지 않았던 당신, 살아남아 주길 ㆍㆍㆍ(276쪽)

 

같은 얘기의 반복이지만,

상처받기 두려워서라는 이유만으로 벽이나 담을 높게 쌓아 소통을 거부하고 틀 안에 머무리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잠재적 장애인이 아니라, 자의적 장애인이 되는 것이니 명심하고 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를 언급하고 지나가야 겠다.

 

 

 

새책을 구입하였는데 책배에서 이런 자국을 발견하게 되면 기분이 나쁘다.

그동안 책의 표지 일부가 부분 부분 찢어져 있거나,

띠지가 파손 훼손된 책을 받더라도,

책을 구입하고 한참 후에 읽게 되는 경우라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책의 띠지 또한 책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원형의 그것과 다르면 좋을리 없다.

그리고 이 책은 교정을 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탈자가 많다.

문법이나 맞춤법의 오류를 말하는게 아니라,

기본적인 오탈자의 문제는 책의 질을 떨어뜨린다.

 

누군가는 이런 날 보고 까탈스럽다고 하겠고,

또 누군가는 그러니까 친구가 없고 외로운거라고 하겠지만,

이게 40년 넘게 고수해온 나만의 스타일인걸 어쩌겠는가~--;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난 외톨이였다.

그렇다고 외톨이라는 사실에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일찍이 혼자라는 사실에 길들여지고 적응해서,

나름 혼자인 것을 즐기는,

급기야 혼자놀기의 달인에 이르렀던 것 같다.

 

다시말해, 혼자인것을 청승맞게 방치하지 않고,

나름 고고한 전위 예술 내지는 행위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은, 

(사회성을 유지하며) 삶을 산다는 것은,

매순간순간을 내가 주도적으로 얼마나 잘 운용하여 즐기며 노는지에 관한 문제이지,

그 순간 그곳에서 혼자인지 함께인지, 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버지는 외톨이였고 사람들이 유명인사의 변호사에게 흔히 갖는 이미지와도 정반대였다. 어쩌면 그런 점이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를 인기 있는 협상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침착하고 온화했으며 잘난 체 하지도 않았고 다소 순진해 보일 정도로 실리에 어두웠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따금 아버지의 직장 동료라든지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아버지는 기억력이 비상하고, 묘하리만치 사람 보는 감식안이 있었다. 한번 힐끗 보기만 해도 무엇이든지 기억했다. 과거에 쓴 메모와 편지도 그야말로 줄줄 읊었다. 대화할 때면 마치 노래에 빠져들듯 눈을 감고 상대의 목소리에 집중했고, 그래서 상대방의 생각이 무엇이며, 그 말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진실인지 허세인지 정확히 꿰뚫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어디선가 배울 수 있는 기술일 테지만 아버지는 내가 아무리 졸라도 언제 누구한테 배웠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속이지 않았다.(37쪽)

이 박스 글의 아버지로 묘사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틴 윈처럼 나도 외톨이다 보니,

여럿이 함께 나누어서 하면 수월한 일들을,  

버겁게 혼자서 온갖 공감각을 활용하여 하면서 호젓하고 홀가분하니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는 감식안까지는 아니어도, 선무당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보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온갖 공감각을 두루두루 활용하여 죽을똥 살똥 노력하였기 때문이지,

틴 윈의 딸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억력이 비상했거나 집중을 잘했거나 머리가 월등히 좋아서 터득한 것은 아니고,

틴 윈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독일 작가에 의해서 쓰여지긴 했지만, 미얀마가 배경인 만큼, 미얀마의 정서가 짙은 소설이고,

미얀마라고 하면 대다수의 국민이 불교를 믿는 불교 국가이지만,

과거로 가면 갈수록 점성술, 산파술과 같은 미신적이고 비과학적 신앙에 대한 의존도가 더 심했으리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그당시에는 삶의 시련에 굴복해야 마땅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으면 별자리가 나빠서였으며,

운명은 본인의 노력 여하와는 상관없이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요즘의 나처럼 '외롭지만 혼자 걸을 수 있어'라고 하며 나름 즐기고 살았다면,

독특한 생사관을 가진 까다로운 사람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ㅋ~.

 

 

미얀마의 불교가 독특한 것인지, 아니면 옛날의 미얀마의 그것이어서 그렇게 독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술적이다.

본인의 삶을 '운명예정론'이라는 미명하에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그것에 의존하던 그런 시대에,

자신의 삶과 사랑과 죽음 마저도 자신의 뜻대로 운용하고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다.

 

이 책이 보는 관점에 따라 로맨스 소설로도 분류가 될 수 있겠지만, 한 남녀의 성장소설로 보고 싶은 이유이다.

 

모든 불신과,

모든 편견과,

모든 선입견의 벽을 허물어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이,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

이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그걸 난 다른 말로 '로맨스'라기 보단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은 까닭이다.

 

30여년을 같이 살던 처자식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하루 아침에 증발해 버린 틴윈을 두고,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인 점을 감안해야 하겠고,

40여 년동안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해 오다 보니(나만의 에고에 갖혀 있다 보니),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는 없어서,

진짜 내 자신이 원하는게 뭔지조차 모르고 있는 나와 비교하여 볼때,

몸이나 마음이 어떤 신호에 반응할라치면 낯설고 두려워 뒷걸음질 치기 바쁜 나와 비교하여 볼때,

오히려 응원하고 박수쳐 주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죠?"

ㆍㆍㆍㆍㆍㆍ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렸다고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사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졌어요."

"왜 사랑이 그렇게 어려워야 하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 악이든 선이든 - 이미 갖고 잇는 개념에 비취 다른 사람을 판단하죠. 사랑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에 부합하는 것만 사랑이라고 인정해요.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죠. 다른 모습은 불편해하고, 그래서 의심하고 의혹을 품죠. 신호를 잘못 해석하기도 하고. 언어를 잘못 이해하기도 하고. 그래서 상대를 비난하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죠.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이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일 뿐이에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에요."(296~297쪽)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선무당 노릇을 해도, 그걸 이용하여 맹신하게 된다.

나의 경운, 환자가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는 부위를 듣지 않는다.

환자가 하는 말은 참고만 하고,

여러가지 정황과 상태를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하여 판단한다.

그 과정에서 의사소통, 즉 공감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내가 워낙 말이 짧은데다가,

어떻게 해서든 이해를 시키려고 하지않고('내가 뭐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야?'이런 생각을 하는것 같다~--;)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들을거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생략을 하고 지나가니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과정에서의 환자 입장에서는, 날 상대방의 의견도 귀담아 듣지 않는 돌팔이나 선무당 취급을 하게 된다.

그는 목소리를 귀로 듣지 않았다. 두 손처럼 피부로 느꼈다. 틴 윈은 그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영혼 또한 그러고 싶었다. ㆍㆍㆍㆍㆍㆍ다시 말해 틴 윈은 소리를 보았다.(140쪽)

 

"사물의 참된 본질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법이란다." 긴 침묵 끝에 우 메이가 말했다. "우리는 오히려 감각 기관 때문에 길을 잃지. 그 중에서도 특히 눈은 우리를 잘 속인다. 우리는 지나치게 눈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거든.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세상을 믿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껍데기일 뿐이란다. 사물의 참된 성질, 사물의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해. 그런 점에서 눈은 도움이 되기는 커녕 방해만 된다. 눈은 우리를 교란시키거든. 우리는 쉽게 현혹된단다. 게다가 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은 다른 감각을 무시하지. 청각이나 후각말고 그 이상의 감각 말이다. 내가 말하는 그 감각은 아직 이름이 없는데, 뭐라고 부를까. 그래 마음의 나침반이라고 부르자꾸나."

스님이 틴 윈에게 손을 내밀었다. 놀랄 만큼 따뜻한 손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동작 하나 하나, 숨소리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해. 내 경우에는 산만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우면 감각이 나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든단다.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말썽꾸러기 녀석처럼 나를 골탕먹인다. 예를 들어 마음이 조급해지면 나는 모든 일을 빨리 해치우려고 하지. 그러다 보면 빨리 움직여서 차를 쏟거나 국그릇을 엎지르게 되지. 남이 하는 말도 제대로 듣지 않지. 왜냐, 내 생각이 이미 딴 데 가 있거든. 마음속에서 분노가 아우성칠 때도 그렇단다. ㆍㆍㆍㆍㆍㆍ그 점은 우리뿐만 아니라 눈이 보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지. 그러니 인내해야 한다."(149~150쪽)

"두려움보다 강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152쪽)

그런 의미에서, 스님 우메이와 틴 윈과의 대화는 많은 깨달음을 줄 뿐더러,

더 몸을 낮추고 아래로 겸손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놀랍게도 틴윈은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심장박동 소리 또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66쪽)

암튼 이 책은 사람의 목소리가 각자 다른 것처럼, 사람의 심장 박동소리도 다르다고 얘기하고 있다.

목소리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니,

심장 박동 소리로 신원을 확인하는 그런 시대도 와야 할텐데 아직까지 그런 건 없는걸로 알고 있다.

지문은 이제 구식이 되었고,

눈동자, 홍채를 가지고 신원을 확인할 수도 있고 병도 읽어낼 수 있다.

지문은 그 손가락만 잘라 범죄에 악용되기도 하는 고로,

요즘은 손등의 혈관분포를 가지고 신원 확인하는 방법도 사용하는 걸 봤다.

그리고 임상에 적용하는 예로는 CST라고 하여 두개천골 요법, 수진(手診), 전신조정술, 동종요법 등 여러가지가 있다.

 

사람의 심장소리를 임상에 적용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성의 문제일 것 같다.

심장 박동소리말고도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와 병인을 구분해 내는 많은 편리한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게 아닐까?

요즘은 심전도검사에서만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윽고 미밍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미밍의 심장 소리를 듣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는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녀의 심장은 다른 사람들의 심장과 달랐다. 더 자주, 더 음악소리처럼 고동쳤다.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불렀다.(174쪽)

 

 

다만 이 문장은 작가의 필력과 내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이 심장 뛰는 소리는 한때 볼 수 없었던 틴윈만이 구사할 수 있는 유용한 진단법이고,

미밍의 심장소리 또한 틴윈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치료약인 것이다.

 

이쯤에서 좀 무거운 얘기를 해야겠다.

 

우리는 삶을 사는 것과 관련하여서만,

내가 주도적인지를 놓고 얘기하지,

태어나고 죽는 건 나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태어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이것도 전생 운운하며 업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논외로 하고),

죽는건 나의 의지가 개입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줄리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물리적으로 멀고 가까운 것은 정말로 그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난 그녀의 아름다움과 빛나는 표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종종 궁금했어요. 아름다움과 추함을 결정짓는 것은 코의 크기도 아니고 피부색도 아니며, 입술이나 눈 모양도 아니에요.ㆍㆍㆍㆍㆍㆍ

그건 사랑이에요. 사랑은 우리를 아름답게 해요.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 그것도 조건 없이 사랑하는데 추한 사람이 있을까요?ㆍㆍㆍㆍㆍㆍ"(353쪽)

"그래요, 줄리아. 사실이라고 해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설명할 수 없어도 사실일 수 있죠."(387쪽)

다시 말해, 한날 한시에 같이 죽는걸, 사랑의 한 방법이라고 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보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고,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때로는 상대를 시험하기도 하고,

사랑은 가시밭길처럼 험난할 때도 있으며,

때로는 추한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어렵기도 하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 순간 그곳에서 혼자인지 함께인지, 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멀고 가까운 것은 간절히 원한다면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고 나 또한 믿는다.

하지만, 내가 주도적인지, 는 관건이다.

내가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내고 통과했을때만이,

우린 삶을 살았다 또는 사랑을 했다,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별자리보다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181쪽)' 같은 구절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 책은, 나를 비롯해서...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만 믿는 요즘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종을 울린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 순간 그곳에서 혼자이더라도, 

매순간순간을 내가 주도적으로 운용하여 즐기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강권한다, ㅋ~.

 

끝으로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었던게 있는데,

하트(heart)를 어느부분에선 마음, 어느부분에선 심장, 어느부분에선 가슴 등으로 일관성 없이 사용한다.

몸이라는 의미의 반대로 사용될 때는 심장으로,

감정과 관련하여 사용될때는 마음으로, 

신체를 머리, 가슴, 배와 같이 구획을 나눌때는 가슴으로 사용하는게 적절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이책은 자기 주도적으로 사랑하고 살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으로 죽음을 택하였다는 점에서,

내게는 무시무시한 책이다.

 

근간에 보기드문 수작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동안 내가 읽은 책 중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그런 책이지만,

이 사람의 글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훌륭하더라도,

후속작을 읽겠냐고 묻는다면 '그저 웃지요' 정도로 대답하겠다.

내게는 너무 무시무시한 책이어서 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7-31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31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31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31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4-08-02 09:40   좋아요 0 | URL
책이 저렇게 오다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꾼님 저 책을 보니 저도 속상하네요 ㅡ..ㅡ
까탈스럽다고 하시지만 저런 책을 보고 독서를 하시다니 거의 부처 정도의 위대한 인격이세요 ㅎ

저도 혼자 하는 걸 무척 좋아해요 이 세상 내 멋대로 하는 것이 한계가 얼마나 많은 데 사는 스타일까지 사람들 땜에 바꿔야 한다면 이건 못 참아요 ㅋ
우리는 우리 식데로 살아요 ㅋ 같은 하늘 아래에서요 ㅎ

양철나무꾼 2014-08-02 10:3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책이 말이죠, 저 표지가 저렇게 로맨틱하게 보는 이에 따라 유아틱하게 그려져서 그렇지,
제 저런 투덜거림을 잠재울만큼 괜찮습니다여.

그나저나 교주님, 오늘 칠월칠석이래요.
견우랑 직녀도 일년에 한번씩은 만난다는데,
삼복 더위에 열공하시는 울 교주님 언제 보양식 대접할 기회 함 주시죠, 넷~?^^

루쉰P 2014-08-02 21:33   좋아요 0 | URL
ㅋㅋ 양철나무꾼님을 뵙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도 굴뚝 같지만 교주의 입장에서 아직은 아니에요. 이건 내면적인 약속이에요. ㅋ
저 시험 합격해서 뵈러 갈거에요. ㅎ 진짜에요. 교주 클라스가 있잖아요. 전 아직 번데기에요. 화려하게 날아올라 양철나무꾼님을 뵈러 가야죠!!!!
가서 맛난 거 제가 사드릴거에요. 후후후 전 여자에게 얻어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도 너무 많이 주셨잖아요. 저 그거 너무 감사해요. 읽어야 하는 데 대신 먼지 안 묻도록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닦아요. 그리고 같이 보내주신 편지도 소중하고 간직하고 있어요. ㅋ
제가 이래뵈도 교주입니다. 후후후 한번 제가 실력 보여드려야죠. 합격하는 날은 곧 나무꾼님이 고기 드시게 되는 날이라 마음 먹고 계세요. 후후후후 진짜 쏩니다. ㅋ

양철나무꾼 2014-08-04 15:19   좋아요 0 | URL
다 좋은데여~.
교주님 클라스가 아니고 레벨아닌가여?
글구 전 여자 아니고 아줌인데...ㅋ~.

더운 여름 엉덩이에 땀띠 나지 마시고,
콧바람도 쐬고 하면서 쉬엄쉬엄 하자구요.
헤에~^____________^
 
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도 각기 다른 가정 환경과 성장 배경, 지방색, 학력 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향하여 '입장 바꿔 생각해본다'는 뜻의 '역지사지'를 생각해 보거나,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이니까 가섭이 웃었다'는 뜻의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어 보이겠다는건,

그 생각이나 미소만으로 가상한 일이지만,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했는지, 를 놓고 보자면 대부분의 대답은 '글쎄올시다'정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과 미소를 수많은 말줄임표가 대신해서 그렇지,

그래서 우리는 입장바꿔 생각하는게 아니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일수도 있고,

가섭이 웃은 그 웃음은 부처님과 연꽃 때문이 아니라 햇살이 눈부셔서 얼굴을 찡그린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글로 풀어쓰거나 말로 뱉어낸게 아닌 이상,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따위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호감을 갖고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얘기이지만,

내가 그(또는 그녀)가 아닌 이상, 속속들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건 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일부 과묵한 사람들이 상대를 향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말줄임표나 기타 등등, 이하 생략으로 대신하고서는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데,

상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하는 '관심법'의 대가 '궁예'가 아니다.

조곤조곤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로 바뀌어야 한다...'情'은, ㅋ~.

 

이 책은 꼭 분류를 하자면 로맨스 소설로 분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간의 로맨스소설이랑 다른점은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과,

인간의 품위있는 죽음에 대해서 그간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선하고 참신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의 설정이 완벽하게 그럴듯 하지는 않다.

가장 어설펐던 것은,

척수손상으로 인한 사지마비인 남자 주인공과의 대비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였겠지만,

여자주인공의 할아버지를 뇌졸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만들어 버리고,

그런 할아버지를 한 집안에서 며느리가 간호를 한다는 설정이다.

 

근데 영국은 의료보험제도가 아주 발달한 나라여서, 외국인에게도 의료보험혜택이 주어지는 나라로 알고 있다.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한명의 일손이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할아버지를 요양시설에 보내고,

나머지 한명의 일손이 생업에 뛰어드는게 더 현실적인 설정이었을 것 같다.

더구나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배변 컨트롤을 하고 하는 것은,

가족이니까 성적인 것을 배제한다는 것은 이성의 일일뿐, 실상이 되면 쉬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영국의 가정 생활이나 풍습 따위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므로 이쯤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픽션이라는 건 재미를 위하여 가감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을 칭찬해주고 싶다.

의학용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자칫하면 이야기의 흐름이 깨질 수도 있었을텐데,

이야기의 흐름을 깨지않고 찬찬하게 잘 번역해 나갔다.

다만 한가지 정강이에 부목을 대고 40킬로미터를 뛰는 일정을 소화해 낼 수는 없다.

'정강이부목'이란 일종의 피로골절과 구분하기 힘든 증후군으로,

마라톤 등의 오래달리기나 점프 등의 높이 뛰기 후에 정강이 부위에 부목을 댄 것처럼 뻣뻣하게 느껴지는 증상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강이에 댄 부목의 최근 상황이 아니라, 정강이 부목 증후군의 차도라고 하는게 적절하겠다.

이 소설 전체를 통하여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듣게 되는 상황을 표현한 부분이었다.

그때 지휘자가 지휘봉을 내리자 갑자기 만물이 순전한 소리가 되었다. 음악이 실체가 있는 사물처럼 느껴졌다. 음악은 내 귀에만 머물지 않았고, 온몸을 타고 나를 에워싸고 흐르며 온 감각이 공명하게 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윌은 이런 체험을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다. 지루할 거라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서 들어본 적이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였다.

  그리고 음악으로 인해 내 상상력이 뜻밖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앉아 있자니 몇 년 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해묵은 감정들이 나를 덮쳤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상이 내 몸에서 술술 뽑아져 나왔다. 마치 나의 지각 능력 자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쭉쭉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멈추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슬며시 윌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자기 자신을 잊은 듯 황홀경에 에워싸여 있었다.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갑자기 그를 보는 게 무서웠다. 그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감정들이 두려워졌다. 심연처럼 깊은 상실. 그 두려움의 바닥이 겁이 났다. 지금까지 살아온 윌 트레이너의 삶은 내 체험을 까마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내가 뭔데 그에게 삶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논할 수 있단 말인가?(233~234쪽)

 

내가 클래식 음악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건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였다.

그때 그 느낌이 꼭 저랬다, 음악으로 온몸을 샤워하는 것 같았다.

음악은 내 귀에만 머물지 않았고, 온몸을 타고 나를 에워싸고 흐르며 온 감각이 공명하게 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암튼,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착각하에,

다른 사람의 삶을 내 입맛에 맞게 바꿔 놓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윈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적절한 예는 아닐 수 있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도록 살아온 나날만큼 습관에 길이 들어서,

그 습관에 의해서 기준을 만들고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상대방의 날개를 꺾고 잘라서 내 좁은 틀 안에 가두려하는 건 하는 건 아닐까 반성해 본다.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다는 것이고,

그건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상대에게 공감시키고 이해시키고 싶다는 얘기이고,

때문에 수다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대가 나에 맞추어 바뀌길 바라지 않고,

내 스스로가 상대에 맞추어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강요하는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저 위 박스의 윌의 간병인 친구의 말처럼,

선택권을 박탈하거나 나를 강요하는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동안 '알겠어(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자주 사용했었다.

상대방의 얘기가 지루하게 늘어진다 싶거나,

상황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싶을 때 사용했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많은 '알겠어요'중에서 진짜 '알았어(요)'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누군가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머리나 가슴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몸의 경험, 체험으로까지 연결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온몸으로 통과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일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역지사지'나 '염화시중'을 놓고 내가 충분히 공감했는지 '미지수'라고 한것은 그런 의미에서이다.

생각이나 미소라는건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이라고 하기엔,

말줄임표 속의 의미가 천가지 만가지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보았던,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인가(?)의 '사랑해요'를 뜻하는 말이라는 'I see you'가 훨씬 설득력인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한 것만 믿는다고 하면...왠지 야박한것 같지만,

공감이나 이해는 그들 사이의 공통 분모가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고,

같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한 것보다 더 실제적이고 실체적인건 없다.

 

난 그동안 나이나 연륜을 내세워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봤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갖혀서 연연해 하는 사람도 봤고,

고집이 쇠고집이어서 빡빡우기다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리 무리 속에서 따돌림을 받는 그런 백조 같은 사람도 봤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나인 것은 맞지만, 세상은 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혼자서 살아가고 싶다면 무인도로 가든지,

아니면, 공주나 왕자...아니 적어도 성의 주인 정도 취급은 받을 수 있는 성주 정도는 되어야 하고,

이도저도 아니면, 신선이 되는 수밖에 없다, ㅋ~.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얘기는 뭐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내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내가 읽기엔 이 소설이 그동안 읽던 장르소설과 비교하여 군데 군데 허점 투성이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로맨스소설에 별반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인 모냥이다, 끙~(,.)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트랑 2014-07-25 18:02   좋아요 0 | URL
공감 1번, 귀감이되는 글, 공감백배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하는 글이었어요
좋은 글에 감사를...

하늘바람 2014-07-26 07: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생각 많이 해요 특히 함께 웃고 지나갔거나. 침묵일때 우린 동상이몽일거라는 음악 샤워한 느낌 느껴보고 싶네요 많이 더운 요즘 건강 조심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