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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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상에서 난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유니크한 존재이고 싶을때도 있지만,

남들과 별반 다를바 없는 똑같은 생각을 하는 보편적인 사람이란 사실이 커다란 위안이기도 하다.

이 다름과 닮음을,

이 따로 또 같이를,

일상에 적용시키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 비슷 비슷하다는 것이지만,

비슷비슷해도 똑같지는 않다.

설사 똑같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하거나 느낄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잘ㆍ잘못을 얘기하거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한때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생각했었던 적이 있다.

이론상으론 공동생산, 공동 분배를 통해서 똑같이 모든게 이루어지는 평등한 사회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사람이 개개인마다 개성과 능력을 달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존재일때나 가능한 설정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한 사회는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성과나 결과가 차이가 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개개인의 사유재산이 성립될 수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이 되고 만다.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낀다'는 말이 있고,

'부부도 오래 살다보면 닮는다'는 말이 있다.

한날 한시에 태어났더라도,

생김새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개성과 성격이 똑같을 수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반면,

부부로 같이 살면서 개성과 성격을 보고 자연스레 닮아가다보면,

다시 말해, 한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으며 같은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생김새나 분위기도 자연스레 닮아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심전심' 나와 닮은 사람을 꿈꾸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며 좋아했었지만,

이 책에서처럼 피부색이나 언어 따위로 인한 차별이 없는 평등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부부관계라는 것도 없이 배우자는 신청을 하면 골라주고,

아이도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배급에 의해,

음식도 맛이 없더라도 정성과 애정이 담긴 그런것이 아니라,

온동네사람들이 배분된 같은 음식을 먹고 한다면,

생긴것은 조금씩 달라도 누구에게서도 다른점을 찾아볼 수 없는 '늘같은상태'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

 

" ㆍㆍㆍㆍㆍㆍ사람들 역시 한때 모든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너나 나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한때 긍지, 슬픔, 그리고ㆍㆍㆍㆍㆍㆍ."

"그리고 사랑."

조너스는 말을 이으면서 자신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던 그 가족 풍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고통."

조너스는 다시 병사를 떠올렸다.

"기억을 품는게 힘든 가장 큰 이유는 고통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그러니까 기억은 함께 나눌 필요가 있어."(262쪽)

 

살다보면 오래 기억하고 싶은 기분 좋은 기억도 있지만, 너무 슬프고 아파 빨리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한때 난 기억력이 비상하다고 좋아했었다.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것은 기분 좋은 추억 뿐만 아니라 슬픈 추억을 향하여서도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하는 것이어서,

선별하여 적용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기분 좋은 한때, 이 책에서 사랑이라고 나오는 그 한때는, 슬픈 한때와 대구를 이루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어우러져 '기억'이 된다.

이를테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서 배가 되고 반이 되는 그런 경험 말이다.

 

반대로 '늘 같음 상태'라는 것은 그것이 기분 좋은 추억으로만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늘 기분 좋은 상태의 연속이면,

각인되는 것이 없을 것이고,

때문에 기억력이 좋고 나쁘고, 를 떠나서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옷을 입고, 머리모양을 해서, 개인의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똑같이 배분된 음식을 먹어서 맛이란걸 구별할 수 없다면,

저마다의 특기할만한, 독특한 기억이란것도 존재하지 않을테고 그렇다면 추억도 없을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구별은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두고 비교에 의해서 발생한다.

기준을 두고 비교를 통해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구별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비교를 통한 구별을 통해서,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 '차별'도 발생한다.

거기서 나 또한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나에게 어느 쪽을 택하겠냐고 묻는다면,

고질적인 병폐인 '차별'이 발생하더라도,

지방색에 따라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독창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그런 쪽을 택하겠다.

 

정답은 없다.

아니 나는 정답을 모른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고,

그 중 한가지 방법을 다만 'try to'해볼 뿐이다.

 

누군가의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 ㆍㆍㆍㆍㆍㆍ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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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4-10-08 08:53   좋아요 0 | URL
꽃들도 여러 꽃이 모여야 더 예쁘죠. 나이가 들수록 和而不同이란 말의 뜻이 새로워요. 잘 지내시죠?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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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이 편안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거기서 탈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걸 두고 점잖은 말로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편견이나 선입견 따위를 극복하라고 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먹어 자아(ego)라는 것이 성립된 연후라면 그런 말 따위는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너나 할것없이 다 그런 습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고,

변화를, 오히려 변절이나 변덕이라고 하면서 하면서 폄하하고 두려워들 한다.

하지만 '느리게 또는 빠르게'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세상은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다.

 

언젠가도 얘기한 적이 있는 듯 한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 하루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오늘이지만,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다고 하여 '어제'는 아닌 것다.

 

똑같은 패턴의 무수한 반복인듯 하면서도,

미세하고 미미한 변화의 순간들이 존재하는,

이 순환을 한 발자국 떨어져 관조적으로 바라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슬쩍 맞물리는 듯도 하지만,

속도의 느리고 빠르기차이에 따라,

점점 크거나 점점 작은 포물선이 그려지기도 할 것이며,

너무 느리거나 빨라서 솟구치거나 누운 직선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러고보면,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에 아무리 느리고 더디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 들일지라도,

신들의 그것을 기준으로 봤을때는 눈깜짝할 새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우리에겐 짧게만 여겨지는 하루살이의 일생이,

(원래 하루살이의 수명은 일주일 정도란다, ㅋ~.)

하루살이의 삶에서는 '평생이고 영원히'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때,

이 책 장서의 괴로움은 백해무익百害無益까지는 아니어도 백해소익百害少益한 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여기서 장서는 '책을 소장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는데, 

독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이분의 라디오 방송에서 얻는다고 할 수 있는 이권우 님의 말씀에 따르면,

자기가 소장한 책을 다 읽을 순 없고 소장한 책의 1/10을 읽으면 많이 읽는것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동안 난 이분 방송을 들으며 기죽지않고 위안을 받으며 많은 책을 쟁여올 수 있었다.

많이 쟁여두면 쟁여둘수록, 비례하여 읽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한권이라도 늘어난다는 생각으로 뿌듯했었지만,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같이 사용하는 남편과 아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급기야 얼마전부터 남편은 책장에 꽂히지 않은 내 책들을 어디론가 내다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다른 가구는 찾을수도 없고 사방 팔방 벽이란 벽은 빈 공간만 있으면 책장이 들어서는 우리집의 속성상,

책장에 꽂히지 못하고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책들은 다 읽었으리라 생각했나 보다.

읽은 책은 다른 사람들과 나눠 읽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을테고 말이다.

 

넘쳐나는 장서를 줄이기 위한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지은이는 '올바른 독서'를 권한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처럼은 못하지만, 500여 권 정도로 책을 엄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시도야말로 독서가나 장서가가 염원하는 이상일 것이다. 지식도 수집도 질이지 양은 아닌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양서란 대체 어떤 것이냐'라는 논의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는 워낙 간단치 않기도 하거니와, 발문을 쓰기로 수락하면서 '이런 논의는 피해가야지'하고 마음먹었던 나 같은 작자에게 답이 있을 리도 없다.

  ㆍ ㆍㆍ ㆍ ㆍ ㆍ500여 권 혹은 100여 권의 조촐한 장서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 그게 양서가 된다! 책은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얘기요, 무작정 많이 읽는다고 지혜가 늘지는 않는다는 당연한 결론이다.(13쪽)

위 글은 '장정일'이 쓴  이 책의 발문 중 일부이다.

난 그동안 장서가냐 독서가냐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책욕심이 많은 것으로 묶어 말하곤 하였다.

어차피 우리나라 출판시장의 여건 상 장서가와 독서가를 구분할 만큼의 수요가 충족되긴 힘들거라고 생각하였었고,

무엇보다도 나부터가 책을 어떤 목표나 기준을 갖고 들이는게 아니었다.

 

책에 관해선 팔랑귀라고 할만큼 남의 말에 잘 현혹되었고,

관심 분야도 어떤 특별한 분야가 있는게 아니라 완전 잡식성이다 보니,

그때그때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 충동구매를 했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서평집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아무 책이나 고르는 실수를 할 확률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책을 들이는 속도에 읽는 속도가 한참 못 미친다.

 

책 중에는 시노다 하지메'5백 권의 가치'를 빌어,

세상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150쪽)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 내용대로라면 난 독서가엔 한참 못 미칠 뿐더러,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권이라도 가졌는가 자문해 보자면 글쎄올시다~(,.)이다.

난 하루에 세 권은 고사하고,

일주일에 세 권쯤 읽던 것도 지금은 더 더뎌졌다.

뭐 예전에 비해, 유독 어려운 책을 읽는 것도 아닌데, 책을 곱씹어 읽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지는 않더라도 소가 되새김질 하듯,

군데군데 무작위로 반복하다보면 물리가 트이듯, 자연스럽게 깨닫는 부분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다읽은 책을 좋다는 이유로 보관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넓고 책들은 많다고 좋은 책들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만일 좋은 책들이라면,

내가 소장하고 있지 않더라도

세월이 가면 또 다른 기획과 편집으로 출간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처분하고 정리한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내가 읽은 후, 누군가에게 가기전에 잠시 동안과,

아직 읽기 전의 책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니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많이 소유하였다고 하여, 없애거나 팔아버리거나 처분하기가 쉽지 않다. 

ㆍㆍㆍㆍㆍㆍ책마다 제각각 추억도 있다. 결코 고서 목록에 죽 나열된 책을 남아도는 돈으로 한꺼번에 주문한게 아니다. 텅빈 책장이 그대로 내 마음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듯하여 쓸쓸함이 자근자근 밀려왔다. ㆍㆍㆍㆍㆍㆍ '장서의 괴로움'은 처분하고 난 뒤에도 느껴지나 보다.ㆍㆍㆍㆍㆍㆍ 바로 전날 겨우 1천2백 권을 처분한 주제에 여기저기 마음이 이끌려 헌 책을 열일곱 권이나 사버렸다.ㆍㆍㆍㆍㆍㆍ 열일곱권의 책 무게로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 되니 그제야 우울한 마음이 가라앉았다.ㆍㆍㆍㆍㆍㆍ 나머지는 생각날 때 또 사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누그러졌다.(35~37쪽)

 하지만 아직 안 읽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안 읽게 될 책이라면,

과감하게 처분해 버리는 장서술이 필요하다.

우선순위에서 매번 밀려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관심도와 신선도에서 밀려난다는 의미이다.

지금 당장 꼭(here right now) 필요한 책들이라도 양조절에 실패하게 되면,

순위에서 밀려나게 될것이고,

그 밀려난게 쌓이다 보면,

순환이 이루어지지 못해 정체와 적체가 반복되어 과부하가 걸리고 말것이다.

 

우리는 책을 많이 소장하는 것만으로 지식 또한 쌓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책을 소장하기만 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읽고 체득하여 내것으로 만들어야 지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올바른 책읽기는 독서도 장서도 아니다.

독서와 장서의 적절한 조화가 근간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보다 우선하여, 책에서 배운 것을 머리로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는 깨달음과 실행력이 병행하여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난 책을 읽었다는 행위만으로 만족하는 독서가는 아니었나?

책을 소장하고 쌓아놓는 것으로 뿌듯해 하는 보여주기 위한 소장가는 아니었나?

책은 물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소산을 표현해 내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깨달음이 있고난 연후래야 행동에 변화가 생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행동의 변화를 가지고 깨달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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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9-26 11:54   좋아요 0 | URL
전 늘 님의 독서기록에 팔랑귀 됩니다

하늘바람 2014-09-26 12:04   좋아요 0 | URL
표지도 참 예쁩니다
 
다시, 나무에게 배운다 - 몸의 기억을 물리며 사람됨을 길러 온 장인들의 교육법, 그 어제와 오늘 나무에게 배운다 2
오가와 미쓰오 & 이카루카코샤의 제자들 구술, 시오노 요네마쓰 엮음, 정영희 옮김 / 상추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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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 관계의 기본은...

공감, 눈 높이를 맞추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늘 귀에 딱지가 앉도록,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뼈에 사무치도록 내뱉고 듣는 얘기이지만,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내 경우엔 아니더라~--;

 

며칠전 자칭 교양 있다는 아줌 두분이 내가 환자를 보고 있는 건너편 방에서 대화를 나누셨다.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교양'이라고 한단다.)

두분의 얘기는 대화를 넘어 고성방가에 가까웠고,

덕분에 두분이 장착하셨다는 '교양'이라는 것의 척도를,

목소리의 크기나 은행 잔고 내지는 보유 주식의 액면가로  가늠해야 하는 건가...헷갈려 하며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더니,

볼륨통이 고장 난 라디오 마냥 주파수, 화제만 은근슬쩍 바꾸셨다.

그런데, 묘한 것이,

토막난 주식이며, 불경기, 국정파행, 민심불안, 심지어 남부지방의 호우나 폭우 등 자연재해에 이르기까지 천가지, 만가지 사건과 사고가,

즉 교양녀 두분의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관심사가 죄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대충 합의보면 될 것을 가지고 질질 물고 늘어진 탓으로 수렴되는가 싶었는데,

그 과정이 여기 옮겨 적을수도 없는 육두문자와 욕설을 섞어 난분분이다가는,

'님하 잊지마소'하는 '용비어천가'도 아니면서,

때문에 대통령님께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로 정리가 되는가 싶더니,

그렇게 '그네 언니포에버'로 귀결을 보는 것이었다.

 

내가 이바닥 생활을 한게 한두 해가 아니고, 지방 방송을 듣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지라, 

웬만하면 못들은척 하고 넘어가는데,

한쪽을 치켜세우기 위해 다른 한쪽을 깎아내리는것도 정도가 있다고,

치밀어오르는 그 무언가를 눌러 참는데,

어느 순간 숨을 쉴 수 없는 것이 피가 바짝비짝 마르고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이러다가 폭발하겠는거라,

치료비를 내주어 돌려보내 버렸고,

그로 인해서 할부지에게 '모자란 놈'이란 소릴 들었다.

 

서로 사마하는 사이라고 생각되는 이 몇몇에게 하소연 하였다.

나름 개성을 가진 독특한 이들이기에 다양한 반응을 예상하였었지만,

서로 사마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미련한 넘'이라는 반응만은 의외였다.

이 친구는 '무시할건 무시하고 살아야지,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발끈할건 뭐냐?'며,

심지어 미친개라고 생각하라길래, 내가 수의사냐고 툴툴거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맛다'라고 할 때 '사마하다'는 순우리말로 '사무치게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란다.

절실하고 사마하는 소통,

반드시 소통은 일방적인게 아니라 서로 간의 것이다.

 

내가 모자란 것인지, 또는 미련한 것인지, 는 모르겠으나,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공감과 소통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건 친구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예를 들어 누군가 '수박은 초록색에 검은 줄무늬가 있다'라고 했을때,

나와 상관이 없거나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안만을 놓고 중립을 지키거나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게 아니다.

하지만, 그 수박을 잘라 빨갛고 잘 익은 속을 먹어봤고,

서로 사마하는 사이라면, 그걸 알려 주고 싶을 것이다.

이건 말이나 글로 아무리 자세하고 조곤조곤 설명한다고 한들,

수박을 칼로 뚝 하고 쪼개서 나눠 먹어 보는 것만큼 공감과 소통을 하긴,

즉, 설득력이 있긴 힘들 것이다.

 

이걸 환자에게 적용시켜보면,

허리가 아프다고 할때,

무조건 경락을 적용하여 방광경, 대장경, 삼초경에 처치하면 될텐데, 뭐 그리 복잡하냐는 이가 있을 수 있다.

 

허리가 아프다고 허리에 처치를 하는 것은 대증 요법이다.

 

허리가 아픈 것은 허리 주변 근육의 자체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허리주변의 뼈나 신경 등의 문제 일 수도 있고,

흉ㆍ복부 내장기관의 문제일 수도,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또는 무게중심이 흔들려서 허리가 아플 수도 있으며,

턱관절이 안좋은 경우, 소위 부정교합이라고 불리우는 경우에도 허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며,

여자들의 경우 빈혈과 허혈로 인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환자와의 관계는 이렇게 사사롭고 내밀한 부분까지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무시할건 무시한다는건,

사사롭고 내밀한 부분은 떼어 두고,

허리고 다리고 어디가 아프든 간에 아프다고 하면 진통제를 처방한다는 얘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뒤에 나오는 인터뷰어'시오노 요네마쓰'에 대한 아래 인터뷰 내용은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토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인터뷰를 하기 어려울 겁니다. 상대방과 나를 완벽하게 분리한 채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가 도중에 끊어져 버리기도 하니까요.

시오노 씨의 원고는 당사자가 내보이길 꺼리는 건 싣지 않는다는 느낌이라, 그것이 저하고도 잘 맞는것 같습니다.

ㆍㆍㆍㆍㆍㆍ

시오노 물론입니다. 사람한테 상처주려고 인터뷰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요. 본인이 싫어하는 것을 싣지 않는 대신, 그 사람이 책을 읽고 하는 말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이차 정보 같은 건 전부 걷어 내 버립니다.

이토이  자기 것이 아닌 건 전부 지운다는 거군요.

시오노 그런 건 금방 눈에 띕니다. 본인은 일부러 공부까지 했는데 그 내용이 빠져 있으니 서운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ㆍㆍㆍㆍㆍㆍ. 가령 대장장이라면, '매실장아찌 같은 색', '노을을 닮은 색', '귤 알맹이를 싸고 있는 얇은 껍질을 벗겨낸 듯한 색', 이런 식으로 불의 빛깔로 온도를 얼추 가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고 오면 "칠백팔십오 도쯤 되면 변태점에 도달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속으로는 책에서 본 지식 같은 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변태점에 어떻게 도달하면 됩니까?"라고 다시 물었을때, "딱딱했던 쇠가 부드러운 양초처럼 되지."라든가 "두드리면 형태가 잡혀."처럼, 자신의 말로 이야기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 게 듣고 싶은 이야기죠.

ㆍㆍㆍㆍㆍㆍ

시오노 객관적인 사실이란 없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 줍니다.ㆍㆍㆍㆍㆍㆍ"너희들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나는 절대 못한다. 머릿 속에 지식이 가득 차 있어서 한마디만 듣고서도 이해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너희들은 한마디만 듣고서는 이해 못하는 것이 더 많다. 그만큼 자기 지식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한 질문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돌아오는 대답도 솔직하다. 만약 너희가 만난 할아버지가 십 년 뒤에도 건강하다면 다시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다. 분명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 주실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해 줍니다. 상대에 따라서도 이야기가 달라지니까요.

이토이  그렇죠. 진실이 거짓이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이기도 하니까요.(350쪽)

흔히 우리는 책을 읽었거나 글이나 말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으면 공부하고 배웠다고 하는데,

이 책 전반에 걸쳐서, 그리고 인터뷰어'시오노 요네마쓰'도 마찬가지로, 책에서 읽었다던가, 글이나 말로 기억하는 그것만으로는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으로 체득하는것, 다시말해, 몸에 행동이나 요령이 배는 것만을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ㆍㆍㆍㆍㆍㆍ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 몸에 기술이 배는 건 아니거든요. 말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니까요.ㆍㆍㆍㆍㆍㆍ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모든 것을 말로 배웠고, 말로 기억해 왔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손과 몸으로 배워야만 하는 거니까요.

  예를 들자면, 갑자기 장님이 돼 버린 사람이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모든 걸 눈에 의지해 왔는데 눈이 안 보이게 된 거죠. 앞으로는 모든 걸 손끝의 감각으로 판단해야 해요. 그런 훈련입니다. 지금까지 몸에 밴 것을 죄다 없애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감각이란 것은 닦을 수 없지요.(157쪽)

이말은 바꾸어 말하면, 그동안 몸에 밴 행동이나 요령을  걷어내고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새롭고 정직한 감각을 갈고 닦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동안 자기가 눈으로 봐왔던 세계를 걷어낸다는 것은 자기의 눈을 스스로 감아 닫아걸지 않는 이상,

그동안의 자아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손끝으로 판단하는데, 눈이 개입하게 되면 다른 감각이 개입하게 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부정하고 자기합리화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눈여겨보지 않으면, 평생 보지 못한 채 모르는 채로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곁에서 매일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ㆍㆍㆍㆍㆍㆍ

니시오카 대목장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언가를 모를 때, 모르니까 무조건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질문할 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가르쳐 주셨던 것이지요.ㆍㆍㆍㆍㆍㆍ배운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좋은 스승이 곁에 있고, 거기에서 스스로 배우는 겁니다.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것. 대목장의 말씀은 그런 것이었습니다.(63~65쪽)

호ㆍ불호가 분명한 사람일수록 보지 못한 채로 지나가 버리고 마는게 많다.

동전의 앞면만 보는 사람은 동전의 뒷면을 미처 바라보지 못하기 쉽고,

밝은 곳에만 있는 사람은 어둠에 대비되는 빛의 고마움을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빛의 고마움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어둠도 체감해봐야 하지 않을까?

말이나 글로, 또는 책을 통해서 아무리 자세하고 정확하게 어둠에 대해 묘사를 한다 한들,

직접 몸으로 느끼고 체감한 어둠에 비할 수 있을까?

"촉감, 감이다. 그걸 알 때까지 날을 갈아라."

"ㆍㆍㆍㆍㆍㆍ."

  말로는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습니다. 사물의 원리라는 게 말로 전달되지 않는 것도 있거든요. 다들 말이나 문자로 모든 걸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건 일부에 불과하죠. 냄새나 소리, 손의 감촉 같은 것이 문자로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머리뿐만 아니라 몸도 있습니다. 몸으로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이 목수입니다. 물론 계산을 한다거나 도면을 그린다거나 하는 머리로 하는 일도 있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은 손으로 합니다. 수작업이라는 말이지요. 손으로 연장을 갈고, 나무를 깎고, 얼마나 잘 됐나 손으로 확인합니다. 손끝에 닿는 감촉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물론 익숙해지면 눈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라는 것, 이것이 직감입니다. 결국 목수의 마지막은 이 직감을 키우는 것입니다.

학교나 훈련소에서 이런 감각을 키울 수 있을까요? 뭐든 학교에서 다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직감을 어떻게 배우냐고요? 스승한테서 그대로 베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모두 성격도 다르고 지니고 있는 재능도 달라요. 가르치는 쪽이 제자의 성격이나 재능, 습득하는 속도에 맞게 ‘여기까지 해낸다면 다음에는 저기까지 시켜 보자.’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가르치고 그걸로 끝,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 개성이라는 것이 없다면 누구든지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성질이 서로 다릅니다. 그걸 무시하면 망치게 됩니다. 각각 성질을 잘 살릴 수 있도록, 그 성질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가르치는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니시오카 대목장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천성이란 게 있다. 진정한 교육이란 그 타고난 기질을 살려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가르치는 쪽도 배우는 쪽도 고생을 해야 합니다.ㆍㆍㆍㆍㆍㆍ제자가 되기 전까지, 제자와 스승은 완전한 남입니다. 그런 타인의 성질을 꿰뚫고 그 사람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 제대로 된 장인으로 기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승과 항상 함께해야 합니다.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만 하지요.ㆍㆍㆍㆍㆍㆍ 나무 하나하나와 관계를 맺으면서 생겨나는 저마다의 '호흡'같은 것이지요. 전하려 해도 잘 전해지지 않습니다.ㆍㆍㆍㆍㆍㆍ이러한 것들이 일과 일 사이를 채우게 되고, 이것이 목수의 '직감'을 만들어 갑니다.

  함께 있는 친구와 같은 것을 보고 동시에 웃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대화도 없고 신호를 주고받지도 않았지만 같은것을 느끼고 똑같이 반응할 때가 있지요. 이러한 것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직감'은 자라지 않습니다. 가르치려 해도 다 가르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100~102쪽)

이게 가능한 관계, 대화나 신호 없이도 공감과 소통이 가능한 서로 사마하는 관계라는건 어찌보면,

손끝의 감각이나 몸에 관한 얘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직감에 관한 얘기이고,

 

직감이란 건,

말이나 글을 넘어서는 어떤 것,

손끝이나 몸에 관한 얘기로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극도로 응축시켰을때 남는 어떤 것,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달이고 달이고 달였을때, 졸이고 졸이고 졸였을때' 남는 진액이나 농축물이 아닐까 싶다.

 

인간 개개인으로 따지면 습관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천성이나 본성 같은 것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나 글로 설명해서는 이해시키거나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말이나 글에 관한 것으로나,

손이나 몸에 관한 것으로나,

어느 한쪽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그런 것들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나서 다다르는 어떤 경지쯤으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그런 의미에서, 하고싶은 얘기가,

교양이라는 것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많이 하거나 문화생활 전반에 관한 단순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악세서리처럼 장착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공감과 소통에서 비롯된다, 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많은 설레임과 갈등 후에 도달하는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

그걸 극복하고 났을 때 진짜 편안한 인간 관계에 도달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만을 공감과 소통에서 비롯된 서로 사마하는 사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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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9-16 12:52   좋아요 1 | URL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고성방가하는 사람들 옆에서 환자를 보셨으니 많이 피곤하셨겠어요. 에궁.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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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얘기한적이 있는것 같은데 일본문학을 일부러 찾아 읽는 편은 아니다.

이 책은 우연히 보게 됐는데 그림과 글씨가 너무 예쁜지라, 눈요기를 할 요량으로 집어들었다.

보통 책이 힐링이라고 들 얘기 하지만,

비판없이 무조건 읽기만 하면,

다시말해 자신의 느낌이나 감상 없이 무조건 읽기만 한다면,

저자나 역자를 그대로 좇는것이고,

여기까진 간접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책의 주파수와 나의 주파수가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때,

다른 사람들이 봤을땐 아무것도 아닌 듯 사소한 것 같아 보이는 것까지 그대로이지만,

저자나 역자의 생각과 일치할 수도, 어긋나거나, 비껴갈 수도 있는 그 때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 스스로 무언가를 느끼고 깨닫게 되는 그것을, '힐링'이라 부를 만하다.

왜냐하면,

책을 읽고 힐링을 느끼는 그 행위를, 스스로 이어갈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장자에 보면,

달인인 목수에게 나무가 다가온다고 하였는데,

나에게도 책이 그렇게 다가올 날이 있을까?

힘 빼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얘기하고 있어도,

그건 달인도 아니고, 진인이나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니까 꿈도 꾸지 말아야 할까?

 

하이쿠의 언어는 의미보다는 소리, 움직임, 시간, 풍경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단다.

목적이 훌륭히 이루어졌을때 의미는 자연스럽게 전달된단다.

 

그런 의미의 연장에서,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을 꾸미고 있는 외형, 표지와 판형과 그림과 글씨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책을 이렇게도 예쁘게 디자인 할 수도 있구나'

그동안 난 포장을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하여 본모습을 과장시키거나 왜곡시킨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본모습에 긍정적으로 작용을 하는게 아니라,

과장 또는 왜곡, 굴절시킨다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선물을 하거나 누구에게 마음을 전할 일이 있을 때도,

포장이 마음을 왜곡시킨다는 이상한 편견을 갖고서는,

원래 것을 벗겨내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알맹이만 전하는 기행을 하곤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란 이 책은 예쁜 한권의 그림이 있는 시화집처럼 읽혔다.

 

 

 

 

책 날개 안쪽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일컬어지는  하이쿠는 5ㆍ7ㆍ5의 열일곱 자로 한 줄의 정형시 라고 적혀 있으며,

짧기 때문에 함축적이며, 그래서 독자가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말의 홍수 시대에 자발적으로 말의 절제를 추구하는 문학, 생략과 여백으로 다가가려는 시도, 단 한 줄로 사람의 마음에 감동과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하이쿠의 세계를 류시화 시인의 감성과 깊이 있는 해설로 읽는다.

라고 되어 있다.

 

내가 하이쿠가 뭔지 모르는 문외한이라는 단서를 달고,

하이쿠의 매력은 독자가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책 날개에도 적혀 있고,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 '독특한' 하이쿠를 류시화가 해설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시인이라면, 독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열린 상상력을 자극하고 안내해야 하지 않았을까?

시인의 감성과 깊이 있는 해설은,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자기주도적 하이쿠 감상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시인에 대한 신뢰 지수와  독자의 주체적인 하이쿠 감상 지수는 반비례할 수밖에 없었는 지도 모르겠다.

 

가장 안타까운 생각이 든건, 5ㆍ7ㆍ5 열 일곱 자의 고집이었다.

하이쿠가 5ㆍ7ㆍ5의 열 일곱 자의 정형시라고 하여 우리말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도,

지나친 생략으로 뜻이 모호해져 가면서까지  5ㆍ7ㆍ5의 열 일곱 자를 고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고 류시화의 글(해설)이 부족하거나 겉돈다는 건 결코 아니다.

책 뒤의 '한줄하이쿠/출전'과 '참고서적'과 '국내 하이쿠 관련 책들'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그가 자료를 수집하는데만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또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으리라고는 짐작할 수 있다.

하이쿠 시인들과 그 하이쿠 시인의 특징을 잘 집어내 설명하고 있고,

'언어의 정원에서 읽는 열일곱 자의 시-하이쿠의 이해'는 한편의 논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그것만으로도 한권의 책이다.

 

근데 아쉬운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중구난방으로 너무 쫙 펼쳐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그 많은 하이쿠를 어떤 기준으로든 묶고 분류를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비슷한 느낌의 하이쿠는 비슷한 느낌의 하이쿠 끼리 묶어 비교와 대조를 통해,

특징을 두드러지게 한다든지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어떤 것의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없음'처럼 말이다.(602쪽)

그냥 이렇게 저렇게 붓가는대로 쓰다보니까 문득 생각나는 것을 끄집어 내는 식으로 쓰여진데다가,

책의 윗부분엔 하이쿠, 밑부분엔 류시화의 해설이 있는데,

그게 꼭 하이쿠의 내용과 같이 가는 느낌이 들지도 않아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소칸'의 하이쿠가 맘에 들었는데,

소박함, 아니 지지리 궁상을 지지리 궁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류시화는 인생의 고통을 극복하는 노력에서라고 표현하였지만, 내 생각에는)

달관한 자만이 얘기할 수 있는 해학으로 표현해 낸 것이 멋지다.

 

달에 손잡이를 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소칸 (32쪽)

 

근데 난 '산토카'와 호사이'의 자유율 하이쿠가 더 좋은 걸 보면,

하이쿠만의 매력을 모르거나 글자수나 계어에 얽매이는 게 싫은 자유로운 영혼인가 보다, ㅋ~.

 

힘주고 또 힘주어 힘이라고 쓴다/ 산토카(541쪽)

 

기침이 멎지 않는다 등 두드려 줄 손이 없다/산토카(547쪽)

 

이렇게 좋은 달을 혼자서 보고 잔다/호사이(580쪽)

 

책의 외형이 맘에 들어 시작하게 되었으나, 이 책을 읽은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해서,

메일, 문자 메시지, 카카오 톡, 트위터 등 말과 글자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개중에는 읽지도 않고 삭제되는 것도 상당수이지만,

읽는 사람에게 쓸모없는 그런 것이라고 해서,

보낼 때 수고롭지 않고 정보이용료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어서는 곤란하겠으나,

오래 생각하고 극도로 응축시킨다는 것은 말과 글을 아낀다는 것이고,

오지랖이 넓어 흘러넘치는 게 아니라, 가볍고 단출하여 한결 홀쭉해진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우린, 아니 나는 너무 아쉬운 걸 모르고 헤프게 살아왔던것 같다.

고팠던 적도, 아팠던 적도, 보고팠던 적도, 못가져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세뇌이고 최면일수도 있지만,

내 자신에게 비겁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인색하지는 않았다.

 

이 참에 나도 한줄로 된 하이쿠를 쓰듯,

줄이고 가볍게 하고 단출하게 하여, 그리하여 홀쭉하게 살아야 겠다.

 

힘빼고 살다보면,

달인인 목수에게 나무가 다가오듯 그렇게,

나에게도 책이 그렇게 다가올 날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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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며 - 2000년에 1887년을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3
에드워드 벨러미 지음, 김혜진 옮김 / 아고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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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불행하게 사는것 같다'라는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그 연장선 상이 될텐데,

내가 하는 일에, 즉 나의 직업에 회의를 느낄라치면, 

'호강에 겨워 요강에 밥말아 먹는 소리를 한다'고들 한다.

 

행복에 겨운줄 알라는 말일테고,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들 하지만,

어떤 때는 나만큼 직업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그런데 발상을 조금만 전환하면 직업, 즉 자기가 하는 일에서 흥미를 발견하고 느껴가는 것도 못지않은 행복일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일은 바라보거나 생각하기에 따라 양면성을 지닌,

관점에 따라 천국이 되거나 동시에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일테고,

그러므로 이럴때 필요한건 양면 중 어느 한 쪽면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둘다를 취하거나 어느 쪽도 취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학은 원인치료가 아닌 대증치료를 원칙으로 한다.

병의 증상에 대응하여 약이나 주사를 처방하다보니까,

말 그대로,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인 증상이 발현되는 것을 차단하거나 늦추는 고로,

병을 간과하게 된다.

 

뇌졸중 기왕력이 있는 아주머니 한분이 멀리 인천에서부터  다니신지가,

내가 여기서 근무한 기간만큼이니 한 8~9년 되는 것 같다.

워낙 거리가 멀어 오시는데만 한나절이 걸리시는데도 오시는 성의가 괘씸하니까(?) 웬만해선 맞춰드리는데,

언제부턴가 점심시간을 코앞에 두고 오셔서 서둘러 약처방을 받으시거나 주사만 맞고 쏜살같이 내빼시길래,

새로 생긴 의료기 체험장이나 약장사한테 가지는 줄 알았지,

그걸로도 부족해서 이곳저곳 병원 쇼핑까지 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지난 주 금욜날 봤을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오늘 보니까 입이 돌아가고 혀가 굳어 말이 어눌하신 거다.

 

처음에는 이 지경이 되도록 발견을 못한 내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어쩌지 못하다가,

'맨날 이약 저약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는데 왜 이러는거냐?'고 하시는데,

이런 대증처방들이, 어떤 증상이 발현되어 나타나는 걸 차단시켜 버렸으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의료보험제도가 좋은것이기는 하지만,

병원을 이곳저곳, 의료 쇼핑을 하게 만드는 맹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약물의 오남용 내지는 과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의사와 환자 간에 신뢰라는 것은,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 만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쓰여지고, 배경이 된 19세기에 대해,

당시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이가 어떠했는지를, 마차에 비유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굶주림이 마차의 마부였고, 마차를 끄는 속도는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었지만 결코 홀로 처지게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가파른 모래투성이 길로 마차를 끌고 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마차 위에는 길이 아무리 가팔라져도 절대 마차에서 내려오지 않는 승객들이 가득했다. 이 꼭대기 자리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편안했다. 흙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윗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거나 힘들어하는 무리의 공로를 엄정하게 논의하기도 했다. 모두가 마차 자리를 하나 얻어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을 생애 최고의 목표로 삼았으므로, 당연히 이런 자리는 수요가 매우 많앗고 경쟁도 치열했다. 이 마차의 규칙상 자리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물려주어도 됐지만, 좌석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는 사고도 아주 잦았다. 이 자리는 아주 안락햇지만 매우 불안정하기도 했다. 마차가 갑자기 덜컹댈 때면 자리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곧바로 밧줄을 쥐고 자기들이 이제까지 편안히 탔던 마차를 끄는 일에 동참해야 했다.

ㆍㆍㆍㆍㆍㆍ

승객들은 줄을 끄는 노동자들을 내려다보며 격려하는 말을 외쳤고, 인내심을 가지라고 설교했고, 이들의 힘든 운명이 아마 다른 세상에서 보상받으리라는 희망을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불구가 되거나 다친 사람들에게 줄 고약과 연고를 사는 데 기부했다.(10~11쪽)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가라는 점을 감안할때,

1888년에 쓰여진 책이 왜 우리나라에 이제서야 번역되어 들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책은 SF소설로 분류되는데,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science fiction이 아니라 ,

최내현의 그것처럼 social fantasy라고 풀이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왜냐하면, 2000년에 1887년을 뒤돌아본다는 설정으로 쓰여진 이책은,

2014년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적인 것보다는 사회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이상향 추구'내지는 '이상 국가 건설'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이상향 추구 '내지는 '이상 국가 건설'은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형태를 띤게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10~11쪽의 마차 애기도 그렇고,

ㆍㆍㆍㆍㆍㆍ노동의 분배가 대단히 급진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으리라고 확고하게 믿었다.ㆍㆍㆍㆍㆍㆍ안타깝지만 어쩔 도리 없는 일이었고, 당시 철학에 따르면 어쩔 수 없는 일에 동정심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ㆍㆍㆍㆍㆍㆍ

자기 같은 사람과 평범한 인간은 본질이 아예 다르다고 아주 확신했다. 이러한 착각 때문에 결국 대다수가 겪는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이 약해져 거리감 있고 철학적인 동정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내가 설명하는 이 시기에는 동시대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 뚜렷했고 나 또한 그런 특징을 보였는데, 이런 무관심은 그나마 이렇게밖에 변할 길이 없다(12쪽)

라는 주인공인 줄리언 웨스트를 통한 언급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이건 어찌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비슷한 것처럼 보여 씁쓸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에는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이나면 이 책이 이제서야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리가 없었겠지.

2000년에 깨어난 줄리언 웨스트가 리트박사와 대화를 통하여 하나씩 교육을 받고 깨달아 가는 과정이,

'미국식 사회주의'라고 불리우는 '공산주의'의 형태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차린 식탁에서 밥을 먹을 권리는 그가 인간이라는 데 있으며, 그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 그의 건강이나 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 규칙은 능력이 있는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그 원칙이 적용된다는 겁니까?"

"그들은 사람 아닌가요?"
"그러면 가장 유능한 사람은 물론이고 불구나 맹인, 병자, 허약자가 모두 수입이 같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죠." 박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엄청난 자선이 있다고 하면." 내가 말했다. "제가 살던 시대에는 아무리 열정적인 박애주의자로 놀라 숨이 막혔을 것 같습니다."(120~121쪽)

위의 문단을 보면서 든 생각이, 바로 내가 고민하던 '대증치료'와 '원인치료'의 적절한 안배였다.

일단 증상이 빠른 시일 안에  '속전속결' 해소되지 않으면 환자들은 나았다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양질의 치료를 하고 싶어도 환자를 병원으로 억지로 잡아들일 순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그들을 향하여,

한번 눈치보고 시간 내서 오기 힘든 그들을 향하여,

기간이 얼마나 소요될지도 모르는 원인 치료만을 고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들이 겪는 통증의 크기와 강도를,

내가 숨막히고 심장이 타들어가는 듯 아파 보기전까지는,

헤아린다고 하면서도 미루어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그랬을 때에나 그런 이들을 향하여 원칙을, '원인치료'의 타당성만을 고집할 수 있었다.

 

내가 아파보고 난 후,

하루하루 몸을 움직여야 벌어먹을 수 있는 노동자들에게,

사용하면 악화되니까 쓰지말라는 말을 더 이상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이 그리 행복한거 같지 않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미국식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지도 않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사람은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그런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평등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우리는 헌법에서 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차린 식탁에서 밥을 먹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여 모든 사람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차등이 적용되는 자유와 평등이다.

 

그렇게 봤을때,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과연 자유민주주의가 맞나?

헌법에만 그렇게 명시되어 있고,

실상은 절대 왕권 국가는 아니었던가?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불행하게 사는것 같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니지만,

그런 관계 맺음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

 

얼마전에 나의 이런 생각을 두고,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면서...

국가가 어쩌지 못하는 걸, 왜 니가 나서서 그러는데...?

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 뒤에는 아줌의 오지랖이 넓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고 배우기 위해서 라고 생각한다.

보고 배우고 느꼈으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관계 맺음 속에서,

마주하고 부딪치고 어긋나고 그러면서,

몸으로 경험을 한다.

그것만이 진짜고 값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식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다르게 자유민주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불행하게 사는것이 됐든 어쨌든, 간에...

정부나 국가나 어떤 힘이 개입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심하고 명심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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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8-28 11:59   좋아요 0 | URL
몸으로 벌어 먹고 사는것 정말 중요한것같아요 몸의 소중함이 절로 저도 자꾸 목이 삐끗하면서. 머리까지 찌릿찌리싸고겨느랑이 임파선 이 통증이 을때가 있어서 병원에 가봐야겠다 합니다 나무꾼 언니 우리 같이 건강해요

양철나무꾼 2014-08-31 10:33   좋아요 0 | URL
몸의 소중함은 건강의 소중함으로 이어지죠.
여기서 다시 노동의 신성함으로 의미가 확장되는 것 같아요.

가봐야겠다...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가보세요~ㅅ^^
하늘바람 님이 건강하셔야 가족들도, 가정도 다 건강하답니다~^^
저도 물론이구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