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기 -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
김재일 지음 / 책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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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상에서는 호 ㆍ불호가 명확한 거침없는 성격이지만, 실상에서는 그러지 못했었다.

좋으면 좋다, 싫어도 싫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뜨뜻미지근한 성격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내가 넷상에서 호기로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익명성에 기댔기 때문이었지 싶은데,

이 익명성은 대표성이 없는 대신,

가변적이고 유연하여 호 ㆍ불호 어느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느낌보다는 중간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이유에서, 좋은 책을 만나면 좋다고 떠벌릴 수 있었지만, 사람을 향하여선 그럴 수가 없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서 극단적이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웠었다.

그러다보니, 중간이  습관이고 미덕으로 고착되어, 너무 좋을땐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누군가의 4년여 동안의 작업을, 결과물을, 단 며칠만에 후다닥 읽는 것도 그랬지만,

읽고 좋다 어떻다 할 수 있는 깜냥도 아니면서 뭐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책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싶어 한참 망설였다.

 

전에 '장르소설 나부랭이'라는 표현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어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내가 만화책까지 사서 읽는다고 하면 돈이 남아도냐고 하며,

흔히 애들이나 철 없는 어른들의 전유물이라고들 하는데,

이 책은 중국집 배달원들이 드는 철가방이 아니라, 철이 좀 들었거나 들고 싶은 사람들이 읽기에 알맞은,

모처럼 책값이 아깝지 않은 그런 책이다.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도 좋겠고,

아무렇게나 펼쳐서 한꼭지씩 읽어도 좋은 것이,

삶이 지치고 힘든 이들이라면 쉼표를 찍듯,

공감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느낌표를 나눠 갖듯, 무한 위로와 격려가 될 그런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게 있다.

하나는 선하고 착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이 너무 확고한 신념이랄까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289쪽)

 

이건 나와 내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니, 나도 예외일 수는 없는 얘기인데,

'끼리 끼리 어울린다(類類相從)'고 책을 좋아하다보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변 사람들도 책을 좋아한다.

책이 아니어도 내 나이 또래에 이르면,

자아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굳건히 하느라 주변에 무언가 방어막을 치게 되는데,

자아를 구축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책을 통하여 얻은 확고함을 옵션 내지는 덤으로 장착한듯,

웬만해선 끄떡도 않는 것이 신앙이고 신념이라는 방어막이다.

그러니까 책이 신앙이고 신념이 되는 셈이다.

 

책을 통하여 자아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굳건히 한 사람들의 경우, 웬만해선 일상에 굴곡이 없다.

소신과 신념이 하루 아침에 뒤바뀔 일이 없고 자아가 급물살을 타고 변할 일도 없으므로,

맨날 그날이 그날 같은, 한결 같은 사람이라는 소리와 더불어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얘긴 확고부동, 초지일관과 동의어지만, 고집불통, 고정관념, 편견과도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까, 부조리나 불의를 보면 분개하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인듯 보이지만,

선하고 착한 사람이 만들어낸 확고한 가치관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과하여 극단으로 치닫다가는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여야 한다.

힘에 부치다고 칼자루를 상대에게 뺏기거나 다른사람에게 쥐어주어선 안된다.

그러기 위해선 유연해야 한다.

유연해야 자신이 먼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에 대해 그동안 내가 기지고 있던 편견을 여실히 무너뜨려주었다.

난 그동안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내게는 형용사도 , 동사도 아닌, 외계어 정도 였다.

 

그런데, 이 책에선 사랑은 일단은 꿀떡꿀떡 받아먹을 일이란다.

그리고 미리미리 목구멍을 늘려놓아야 한단다.

목구멍이 보통 크지 않고서는 쉽게 삼킬 수 있는 말이 아니란 의미는,

곱절로 더 크게, 기꺼이 돌려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겠다.

사랑은 그래서 직접 해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은 연습도 필요한,

일종의 행동 강령이다.

 

만화책이니까 그림에 대한 얘기도 해야겠지만,

그림만 언급하기엔 만화의 내용들도, 그 옆의 시같기도 하고 산문같기도 한 글귀들도 참 좋았다.

이 글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라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하여,

이 사람을 명명하는게 제한이 될까봐 유려가 될 정도이다.

내공이 깊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는게 많고 내공이 깊다고 하여, 그런 언어나 화법, 문체를 구사하는건 반대이다.

오히려 아는게 많고 내공이 깊을수록,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나이와 동의어는 아니다.

요즘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 한 친구가 나온다.

얼굴이 잘 생긴것도 아니고, 목소리가 (내가 듣기에 좋기는 하지만) 옥타브를 넘나드는 신의 헤택을 받은 목소리도 아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물기 먹은 목소리는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듯 했고,

그 사연과 경험들이 자양분이 되어 곡을 자기만의 색깔로 해석해 내는데,

아무리 어려운 노래도 그를 통해서 나오면 더 이상 어렵지 않은 것이,

쉽고 친근하고 가깝게 들리는 게 그의 해석의 매력이다.

 

 

이 책도 그렇다.

불교라는게 종교이고 철학이다 보니, 얼마든지 딱딱하고 어려워질 수 있을텐데,

그림체부터가 동글동글하고 정겹다.

그렇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57쪽의 스님 얼굴은 달마대사의 그것처럼 禪적인데, 그게 보기에 따라선 해학적으로도 보인다.

 

이 정도에서 끝내도 부족하지 않았을텐데,

글의 중간중간에 '홍성지'의 그림이 들어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은 일러스트 또한 좋았다.

일러스트 자체만 놓고 봤을때는 내용과 겉돌지도 않았다.

그런데 만화책 중간 중간에 이런 일러스트를 넣어,

다른 느낌의 그림이 이중으로 들어간것이 좀 과한 느낌이었다.

펴낸이랑 성이 같은 것에서 해답을 찾아보아야 하려나~(,.)

 

'아함경'은 석가모니의 언행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아보이는 부처님과 스님들의 수행법에 대해서 언급한다.

'세상을 전부 물질로만 볼 수 있겠는가?'하는 부처님 말씀은 정신적인 영역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이란다.

이렇게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이 상반되는 대구 관계를 이루며,

우리가 몸을 위하여 입으로 먹는 양식 말고, 마음의 양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마음의 양식'을 언급하면서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중산층 개념을 비교한 내용은 많은 걸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나라는 

30평 이상의 자기 명의 아파트,

통장 잔고가 1억 이상,

월수입이 500만원,

자동차는 2000cc급 이상,

일년에 한번 이상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여유 이상의 것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자.

같은 것들이었다면,

 

프랑스는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는가?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외국어를 1개 이상 할 수 있는가?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는가?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할 줄 아는가?

사회문제에 대한 공적인 문보를 의연히 견딜 수 있는가?

약자를 도유며 꾸준한 봉사활동을 하는가?

같은 것들이었다.

 

4년여에 걸쳐 느끼고 깨달은 걸 응축시켜 표현해 낸 것이기 때문에 나 또한 읽으면서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많은 생각들을 하나로 요약해보자면,

'고정관념과 편견,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자'는 거다.

 

그리고 이 책이 주려는 깨달음과는 다른 깨달음일지도 모르는데,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걸 두려워 하지 말자는 것이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도록 노력을 할 수는 있지만,

날아오는 화살이 두려워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경험을 통해 몸으로 느끼고 깨닫는게 훨씬 나으니까 말이다.

 

'잘못을 하는 건 인간의 몫이고, 용서를 하는 건 신의 몫'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좀 홀가분해지지 않으려나?

아닌가?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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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감옥 - 생각을 통제하는 거대한 힘
니콜라스 카 지음, 이진원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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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을 통제하는 거대한 힘'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 '유리감옥( The Glass cage)'을 보고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감옥'이라고 하면 쇠창살 안에 무언가를 가두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훤히 속이 들여다 일뿐더러, 깨지기 쉬운 유리로 된 그것이 무엇을 가두는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싶은것이,

우리의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가둔다는건가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 얘기되고 있는 것은 사무자동화기기라 일컬어지는 컴퓨터 스크린, 스마트폰의 액정, 구글 글래스 등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등으로 접속하는 매개체의 통로가 되는 화면들로,

그것들이 우리를 진짜 가두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게 아니라,

우리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등 이런 사무자동화기기에 의존하여 일을 빠르고 편리하게 처리하다 보니,

많은 일들을 무의식 중에 이런 사무자동화기기에 맡겨버리게 되어,

정작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을 요하는 부분까지 생각없이 이런 사무자동화기기에 의존하게 되어 버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인것 같다.

 

그런데, 내가 팔이 안으로 굽어서 인간에 대해 과신이나 맹신을 해서가 아니라,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런 디지털 기기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때문에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디지털 기기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그런 영역을 적절하게 예상하고 대비하고 보완하는 것만이 해결책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 어떤 것들은, 가치판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특정 영역의 사무를 잘 시행하도록 고안된 디지털기기 덕분에,

사무능력 외에도 복잡다단한 감정을 지닌 인간은,

업무능력의 어느 한 부분에서 일을 빠르고 편리하게 처리하게 되었지만,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능력인 복합적인 행동과 감정이 어우러진 동시다발적인 그런 것들은 수위와 기준을 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디지털기기의 적정 수준은, 인간이 재해나 사고 등으로 기능을 상실했을 경우, 

상실한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면 적절할 것 같다.

그 디지털기기를 조작하는 인간의 능력을 앞서나가지 않는 범위 내로 제한 했으면 좋겠다.

 

교통사고로 거동을 할 수 없는 어른의 경우,

인지기능이 정상이라면 말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괜찮을 수 있겠지만,

 

거동이 비슷하게 불편한 지적장애아동의 경우,

교통신호도 읽을 줄 모르고, 주변 교통상황에 대한 인식과 판단 능력이 없는데,

말로 움직이는 자동차는 '글쎄~' 적절하지 못한것 같다.

 

예전의 나였으면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이고 어쩌고 따위의 말을 했겠지만,

이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인간임을 안다.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보다 어느 특정 부분에서,

인간이 프로그램한대로 적용되다보니,

행동이면 행동, 지능이면 지능, 더 높은 능력을 보유하도록 프로그램되었을수도 있음을 알겠고,

개 중 어느 것들은 복합적인 그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리고 어느 수위나 기준에 도달한 후에는,

더 이상 인간이 프로그램을 주입할 필요가 없이,

자체적으로 진화하여 다방면으로 발전과 변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을 보면 그렇게 고안되어진 인간 병기 '드론'이 나오고,

얼마전 읽은 '기억전달자'에서도 그런 미래 인간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일례로,

소싯적에 걸어다니는 네비게이션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리 뿐만 아니라, 도로 위 교통 사정에도 빠삭하였던 남편 님이 계셨다.

명절에 시골에 내려갈때면, 지도책을 펴놓고 한참 도로 운용의 道를 연구하였고,

덕분에 편안하고 안전한 귀성길과 귀경길이 되었었다.

 

그런 남편이 언제부턴가 자동차에 장착된 네비게이션에 의지하더니,

급기야 지난 명절 시골 내려갈때는 어지간히 막히지 않아서는 불가능하다는 도로 위 주차장을 실현하고 있었다.

어디 안 막히는 국도라도 이용하자고 하니까,

차에 장착된 네비게이션을 한 번씩 업그레이드를 받아줘야 하는데, 그걸 받지 않아서 오류가 발생한다더라.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지도만 '쓱~' 쳐다 보는 것만으로도 도로 위 교통상황을 알아채던 예지력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고물 기계를 따라 우회전 , 좌회전을 반복하며 주변을 뱅뱅 맴도는데,

기가 막힌것도 잠시, 이내 안습이었다~--;

 

디지털기기가 아무리 자체적으로 진화할 수 있게 되어,

다방면으로 발전과 변이를 거듭하더라도,

가내수공업이라고 해야 할까, 달인의 손길을 요구하는 것들, 또는 촉이나 육감에 의지해야 하는 것들,

내지는 어떤 인간의 통합적인 공감각을 요구하는 프로그램들은 디지털 기기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다.

 

또 한가지 예로,

병원에서 사용하는 환자 차트 프로그램 중에 전자 차트가 있다.

전자차트가 없었을 때는 몇날 며칠을 수기로 차트를 하여 보험에 적용, 청구하는 직원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온라인을 통하여 바로바로 연결이 되어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에 적용되어 편리하지만,

모든걸 규격화하여 틀 안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삭감이 두려우면 근접한 상병 명을 찾아 적용시켜야 한다.

그래도 사각지대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걸 이 책에선 이렇게 얘기한다.

 

ㆍㆍㆍㆍㆍㆍ의사가 읽고 겪어본 경험으로부터 얻은 일반적 퍠턴과 개연성의 추론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는 점검표와 기타 의사 결정 지침들이 큰 도우미 될 수 있다. 그들은 복잡하고, 또 가끔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질서를 부여한다.

ㆍㆍㆍㆍㆍㆍ

컴퓨터 자동화는 의사에게 노예처럼 템플릿과 프롬프트만을 따르게 요구함으로써 의사와 환자 사이의 역학관계를 왜곡시킬 수 있다. 로운이 주장했듯이 자동화는 환자의 방문을 간소화하고 유용한 정보를 저장해놓을 수 있지만, "조급하게 질문의 범위를 축소해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의사들에게 환자보다 컴퓨터 스크린을 더 중시하는 자동화 편향을 초래함으로써 오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160쪽)

 

이 책의 끝부분에는,

적나라하게 묘사되지는 않았지만,(히피 느낌이 나게, ㅋ~.)

"당신이 살고, 배우고, 사랑하기 위해서 기술은 방해가 안 돼야 한다"라고 이 책의 요지를 정리하고 있지만,

'인간을 위해서'라든지, '인간만을'이라든지, '오직 인간만이' 따위도, 인간 중심의 독선적인 편협한 시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인조인간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ㅋ~.)

다시 말해,

디지털 기기가 사람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줄지는 몰라도, 사람 삶의 질까지 향상시켜 주지는 않는다는거다.

개인의 감각이나 생각 또는 주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그리하여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는 지의 문제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살아있음의 표현이자, 살아있음의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일일이 몸을 부딪히며 움직이고 땀흘리고 아파하고 멍들고 하면서 '내가' 경험해야 하는 거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킨들이 나와도,

내가 직접 책장을 침발라 가며 넘기며 읽는 이유이고,

달콤한 낱말과 빠다 바른 문장으로  장착한 이메일이 와도 삐뚤빼뚤 손으로 눌러쓴 손편지에 환장을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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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또는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한국어 글쓰기 강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고종석의 문장1, 2'의 부제들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깜박깜박하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글쓴이의 내적 독백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글을 읽게 될 누군가를 고려하여,

또는 내면의 읊조림을 누군가가 읽어주길 바라며, 쓰여지는게 아닐까 싶다.

때문에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라는 것은,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필이 충만하여 쓴 글이거나,

읽는 사람이 전후사정이나 자신의 감정이나 추억을 약간 가감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난 심미안은 아닌지라,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보다는 약간 어긋나고 허술해야 숨통이 트이고 편안해지는,

아름다움보다는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족속이다보니,

'아름답고 정확하거나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라는 말에 혹해서 강좌를 듣거나 책을 읽을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 했었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난 쌍꺼풀 짙고 촉촉하고 큰 낙타눈은 '느끼남'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글에서도 사르륵 사르륵 모래바람이 날리는게 아니라 찐득찐득함이 묻어나는 늪일 것 같아서 고려대상이 아니었는데,

그 넘의 책베개에 홀려 넘어갔다~--;

 



고종석이라고 하면,

글 잘쓰기로는 내로라하는 사람이고,

이 책이 글쓰기 강연을 활자로 풀어 놓은것이기 때문에,

설정이나 마케팅 상, 글쓰기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려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권 겉표지의 

'모든 뛰어남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고나는 겁니다. 음악이나 수학은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수학이나 음악과는 다릅니다. 충분한 훈련이나 연습으로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글이 나아집니다.'

라는 돌출 글이나,

그 내용을 본문 중에 다시 한번 강조한 걸로 보나, 

글쓰기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려 있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ㅋ~.

 

난 세상의 많은 것들이 훈련이나 연습 등 '엉덩이의 뚱뚱함=엉.뚱.함'이 좌우한다는데 긍정적이지만,

이런 예술적인 분야는 '엉.뚱.함'말고도,

오감외에, 예감이나 영감이라고 부르는 육감, 또 다른 말로 '촉'이라고 하는 그것을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후에 '엉.뚱.함'까지 갖추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요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 같은 추세로 미루었을때,

일일이 글로 옮기느니 잘 편집하여 동영상 강의 따위로 만드는게 접근성이나 효용성 면에서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 낸 걸 보면,

책 뒷표지의 그것처럼 고종석이 '당대의 문장가'란 사실을 이용한 마케팅 전략의 승리라고 밖에 할 수가 없겠다.

 

고종석은 이 글쓰기 강연을 통하여 자신이 글쓰기보다 말하기를 더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강연의 완성도나 강연을 들은 이들의 만족도 또한  높았나 보다.

 

난 책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그들을 통해서 내가 모르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걸 즐긴다.

파리 생활이 그의 이력과 사고 방식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독특하게 느껴졌고,

그 낯선 어색함, 글들여지지 않은 날것의 느낌을, 박학다식함으로 착각했었나 보다.  

그의 전작 '자유의 무늬'를 예로 드는데,

앞부분에 많은 것들이 집중 포진되어 있어 몰입이 잘되는 반면, 중반부로 넘어가면서는 여백도 많아지고 내용도 성글어지고,같은 내용이 되풀이된다.

 

강의를 직접 들은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직접 글을 써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고,

첨삭을 하는 등 실제 자신의 글쓰기에 적용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책으로 읽다보니,

초반부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만들었던 그 매력이 감소하고 나니, 그의 강의가 일반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백이 너무 많고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지루하게 늘어지는 책일 수밖에 없다.

 

규칙이나 공식이 있는 것은 그 규칙이나 공식을 나름 적용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 같은것,

언어감각을 키워야 할 것마저 규칙이나 공식으로 만들어서 틀에 넣다보니,

강의를 하고 들을 때는 폼나고 이해도 빠른것 같지만,

글쓰기는 규칙이나 공식으로 해결안되는 부분도 있고,

그리고 규칙이나 공식이 적용되는 그 부분 마저도,

세월이 흐르면서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규칙이나 공식을 쉽게 외우는 방법을 만들어 전수한다 한들,

실제 적용해 보지 않고서는, 언어감각이 향상되거나 할 리가 없다.

 

그러면서 필사가 별로 도움이 안 되니 하지 말라고 하는데,

고종석은 책 내용을 보니 강의 중에, 은연 중에 자기 스타일을 강요하고 있다.

언어규칙과 공식에 관해서라면 그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국어학자나 언어학자의 수만큼 많은 이견이 분분할 것이다.

더 정리가 잘 되고 간결한 글쓰기 책도 많을 것이다.

 

그는 글쓰기 테크닉을 넘어서, 인문교양과 언어학적 이해에 바탕을 둔 기품있는 글쓰기로,

논리가 있는 명확한 아름다움과 수사학적 아름다움, 아울러 한국어 지식을 얘기하고 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자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기품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좋은 글쓰기란,

맞춤법이나 어법의 정오에 연연하기보다는,

글쓰는 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치장하지 않고 간결하게 표현하여,

쉽고 편안해서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거추장스럽지 않고 편안해서

숨쉬듯 읊조리듯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글을 쓰는 사람의 숨결과 개성이 녹아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일상의 잔잔한 재미가 녹아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고 말이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옮아가,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읽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적어도 누군가가 글을 읽어주길 바라며 쓰여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기품이라는 것, 품격이라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과 읽는 사람의 마음이 어느 한곳 만나는 지점에서, 소통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사람과의 사귐과 닮았다.

자신의 스타일을 테크닉이라는 이름으로, 내지는 빨리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하여, 은연중에 강요하는 그런거 말고,

자신의 어느 한부분, 한지점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질과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본질과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고종석의 문장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고종석의 문장 2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9월

 

 



암튼 그렇다고, 고종석의 꿀꿀함을 '라면송'으로 달래겠다는 나는 뭐람~(,.)

뭐긴 속물이지~!

속물이 뭔지 모르겠고,

속풀이엔 라면이 그만이던데,

 

라면송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상에
쉬운것은 하나도 없지

힘이 들고 지쳐갈땐
천국에서 라면으로 속을 달래봐

 

엊저녁 '세상 쉬운 일 하나도 없지.'어쩌구 저쩌구 하며,

'이럴땐 술집에서 안주나 축내는것도 좋은데'라고 어물쩡 넘어갔다.

그런데, 언어적 기품이 다르다보니,

'술집에서 양주나 축내는것도 좋은데...'라고 알아듣고는 '레알?'하며 되묻는것이다.

'라면송', 이 노래를 일찍 떠올렸다면 '레알?'소리를 들어가며 재차 확인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말이다, ㅋ~.

 

 

 

내츄럴 (Natural) - Special Album
 내츄럴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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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장서의 괴로움'을 읽은 후,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장서의 괴로움'을 읽기 한참 전에,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만나고(고르고) 사귀고(사용하고) 관계를 이어갈까(보관하고) 궁금하던 차에 만난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을 넘겨본 것은, 책 제목 중의 한 글자'식'자를 '혜'자로 내 맘대로 바꾸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데,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갖고 있을 저 고민들에 대해 공감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무언가 혜안을 얻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내게, 지름신과 장서를 부추기는 대책없는, 대략난감한 책으로 분류되어 한쪽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었다.

  지식: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지혜: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장서의 괴로움' 이후 책의 소장에 관해서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을때 내 몸을 누일 땅 한 평은 고사하고,('매장'에 호의적이지 않은 쪽이라~--;)

책 한 권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보관할 곳은 (집안 서재는 고상하게 말 한거고) 방 한쪽에 덩치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와 마음 속일테니,

읽은 책을 두번 다시 읽게될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쌓아두지 말고 없애거나 나눠준다는데는 변함이 없는데,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읽지도 않은 책으로 책탑을 쌓아놓고 책을 또 들이는 일은 지양하고 단출해지자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던 터였는데,

이런 책들의 경우, 읽고싶은 책이 곳곳에 포진해 있으니,

지적허영이고 사치라며 아무리 강하고 모질게 세뇌를 시켜도 허사다~ㅠ.ㅠ

 

조국은 시 이외에 진화심리학에도 관심이 많다.

ㆍㆍㆍㆍㆍㆍ

"제가 읽은 책 중에 동물 실험이 있어요. ㆍㆍㆍㆍㆍㆍ이 새로운 먹이환경에 가장 빨리 적응한 침팬지는 젊은 암컷이었어요. 그리고 젊은 수컷, 그 다음에는 늙은 암컷이 차례로 적응했는데 늙은 수컷만은 마지막까지 기존의 방식으로 먹이를 달라는 거예요. 무슨 이유인지 배가 고파도 끝까지 먹지 않았죠. 늙은 수컷의 비애죠. 이런 모습이 우리 인간에게도 있어요."

 조국은 이 늙은 수컷 침팬지의 모습에서 '나이든 괴팍한 노인'을 보았다고 했다. 남의 말은 듣지않고,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새로운 정보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지겹도록 반복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사람, 남에게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 숨이 막힌다. 대화를 하고 싶어도 귀를 막고 도무지 들으려고 하질 않으니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이가 들면들수록 자신이 만들어놓은 벽은 높아지고, 자신을 둘러싼 껍질은 두꺼워진다. 그들은 자신의 벽을 낮추고 껍질을 깨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껍질과 벽이 있어요. 이것들을 깰 때에만 소통이 되고 변화가 되며 생존이 가능하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사는 거예요. 나이 들어서 자신의 껍질과 벽을 깨는 건 힘들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능력을 길러야 하죠. 그리고 그런 능력은 독서를 통해서 길러집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글, 자신과 감성이 다른 사람의 글, 자신과 전공이 다른 사람의 글, 즉 책을 볼 때 껍질이 부드러워지죠. 껍질이 부드러워져야 다른 게 들어올 거 아닙니까."(19~20쪽)

 

암튼, 이 책'지식인의 서재'와 '장서의 괴로움' 사이에 나의 책에 관한 습관이 크게는 아니고 미묘하게 바뀌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견고해지는건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아니다, 견고하다는건 강하고 젊었을때나 적절한 표현이고,

나이를 먹으면서는 조국의 말처럼 괴팍해 보일 수도 있으니 경계하여야 하겠다.

 

그동안의 난 좀 치열하게 살았었고, 책도 전투하듯 치열하게 읽었었다면,

이제는 책을 즐기며 기꺼워하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의 책이 치열한 경쟁상대였다면,

지금은 오래된 연인같기도 하고 숨겨둔 정부 같을 때도 있으며, 때론 길동무 같거나 동반자 같을때도 있다.

 

 

실은, 오늘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마찰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위태로웠는데, 그때마다 서로 서로 외면하거나 비껴가 버리고 말았었다.

그런데, 번데가 앞에서 주름잡고,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 한다고,

학사까지 합하면 25년차, 임상만도 19년차인 내 앞에서 매번 모든 통증을 경락으로 연관시키려는것이나 매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묻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주겠는데,

'니가 경락을 아니?'로 시작해서 '니가 경락을 무시하는 듯'으로 이어지길래,

기가 차서 '둘이 아는 경락이 다른건가보다'라면서 '팽~'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언젠가 다른 대형 포털에 써서 이곳에 비밀 글로 돌려놨었던 '그녀의 취향' 이라는 글을 언급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이 타성에 젖어서도 안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일이,

다시 말해서, 내 경우에 치료가 적어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신이 드는건, 환자와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다.

경락을 자극하면 그 경락에 맞는 리액션이, 피드백이 있게 마련이다.

리액션을 보면서, 예후를 판단한다.

그냥 대충하는 대증치료는 아닌 것이다.

그런 내게 '경락을 아느냐'를 되풀이 하여 묻는다는 것은,

물론 그게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많은 것을 내포한 중의적인 의미라고 그 자신을 합리화 한다고 하더라도,

날 책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요즘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이고, 나의 겉모습만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맥락을 같이 하는 분은 북 디자이너 정병규 님이시다.

"책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고, 성장에 도움이 되고,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고, 심지어는 삶의 요령까지 가르쳐준다는 식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이라는 건 그 자체로 근본적인 매력이 있어서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는 안목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책이 삶의 일부로 들어오거든요. 그때 하는 것이 독서입니다. 게다가 책을 읽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얼마나 좋은 삶이겠어요?"(145쪽)

 

그런 의미에서 마음만 연다면 환자와도 교감을 하고 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자극, 액션이란걸 가하면 리액션, 피드백이 있게 마련인데,

그게 자꾸 어긋나거나 비껴가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을 열지 못했다는 얘기이니...반성을 해야 하는 걸까?

 

근데, 난 조국이 말한 '나이 든 괴팍한 노인'이 연상된다.

자신의 껍질과 벽을 깼는데도,  상대방의 껍질과 벽이 장애물로 여겨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 전까지의 난,

'벽은 넘으라고 있는거야, 폴짝~!'

그랬겠지만,

이젠 껍질과 벽을 깬 연후라, 웅크리고 뒤로 물러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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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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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애정에 마지않던 신형철 님이 품절남이 되는 날이란다.

이 글은 그러니까 축하하는 의미루다가 적는 리뷰가 되시겠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 하고싶은 말이 좀 많지만 생략하고,

이들의 닭살돋는 애정행각에 눈 흘기고 흉보고 싶지만 그것도 생략하고,

결혼을 축하해주는 의미루다가 부조했다 생각하고 땡치려고 한다.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면, 이 책의 제목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다.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연재된 글을 묶어서 낸 것이라는데,

연재당시, 문학평론가라는 추신을 늘 달았다고 엄살을 부린다.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영화평론을 쓸 수는 없다. 영화를 일종의 활동서사로 간주하고 문학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물어보려 한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고."

 

내가 여기서 딴지를 거는 부분은 '제목'되시겠다.

실험이라는것은,

실제로 해보는 것이라는 얘기라고 해도 그렇고,

과학 실험이라고 해도 그렇고,

어떤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시도해 보는 것이어도 그렇고,

해본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지, 정확해야 한다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고귀한 감정이기는 하지만,

항상 정확해야 하거나, 참이어야 하는 가치 명제는 아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했을때,

'변하니까 사랑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게 사람이 성숙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나의 견해일뿐이다.

사랑이 '참 또는 거짓', '맞다 또는 틀리다' 따위의 정오를 구분지을 수 있는 가치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정확한'이나 '부정확한' 따위의 수식어로 수식을 하려 들면 안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

영민한 마케터의 돌출 효과를 노린 일종의 마케팅 전략인줄 알았다.

그런데 네개로 나눈 주제 중에서 한 꼭지 전체를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할 정도인걸 보면...

돌출효과나 마케팅 전략으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겠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近似'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문예중앙,2012)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최근에 본 두 편의 영화는 사랑받기 위해 삶과 타협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헌사처럼 보였다.(27쪽)

 

       말

            - 장 승 리 -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 봐
안길까 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본문의 내용은 더 구체적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장승리의 시 '말'의 전문도 옮겼다.

 

간혹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보통 더이상 더할 것이 없는 상태를 완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더이상 뺄 것이 없을 정도로 응축이키고 줄인 것을 '본질'이라고 봐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결국, 더하거나 뺄게 없는, 군더더기가 없는 상태가 본질이 되는 것이고,

그게 사람의 마음에 적용됐을땐 '본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장승리의 시와 저 상자안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은 결국 '정확한'이 아니라,

본심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이면,

그 연꽃을 보고 부처를 향해 미소로 화답해 주는 누군가를 '아무나'가 아닌,

자기 입맛에 맞는 그(또는 그녀)로 골라갖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이다.

책이야 공부하듯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그냥 보고싶다는 거다. 

영화를 공부하듯, 아트하듯, 내지는 평론하듯 볼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거다.

내게 적어도 영화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보고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고,

보다가 쓰러져 잠이 들 수도 있고,

아무 것도 못 느끼고 잠이 들 수도 있다.

꼭 뭔가를 느껴야 영화를 제대로 못 것은 아니며,

더 더욱 영화에서 얘기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방과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글로 적힌 책이 이런 기능이 제한적이라면,

영화는 글이 말로 변하고, 시각이 공감각으로 변하면서,

개인의 주관이 자유자재로 가감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밤하늘의 별만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보고도 저마다 다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와 느낌이 일치하기도 쉽지 않지만,

일치했다고 하여, 그 누군가가 '정확하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애기했듯 그 누군가마저도 '기준'이 되는 가치는 아니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어느 누구는 야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고,

어느 누군 남자의 찌질함을 잘 표현해 내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고,

어느 누군 삶의 본질을 파고들려는 영화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다 다른 얘기를 한다고 하여,

이 영화가 다른 감독의 작품이겠는가?

아니면, 이들의 얘기 중에 영화를 잘못 본 오답 케이스가 있겠는가?

 

삶이란,

사랑이란,

어쩜 정확하게 실험 내지는 실행하는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삶 또는 사랑은,

몇마디 뭉뚱그린 말과 애매한 미소,

그리고 손짓, 몸짓의 성의 없는 허공에의 시도,

그 뒤에 오는 무수한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못갖춘 마디처럼,

생각지도 않았는데 문득 떠오른것마냥,

하지만 차오르는 것을,

슬픔 또는 눈물을 눌러삼키듯, 그렇게 꼭꼭 눌러삼켜야 할 날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각자 개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고,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을 하고,

이해를 구하고 공감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비껴가기도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랑한다고 하여,

진심이 오해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진심이 오랫동안 오해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은,

말 그대로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니까 말이다.

자기방식대로의 사랑을,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독선이다.

 

그리고 적어도 영화는 각자 취향껏 보고 싶은 영화를 보면 되는 것이다.

책을 취향껏 골라 보면 되는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적어도 독재국가 내지는 독재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눈멀고 귀먹어 결혼이라는 구렁텅이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선남선녀들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ㅋ~.

 

근데 정확한게 마냥 좋기만 한가?

내겐 어째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런 의미에서 난 비어있다는 말이 좋다, 채워가질 수 있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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