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전도연과 박신양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약속'을 보면서 이런 대사들에 감동 받았었다.

男 - 박신양의 대사 ;

 "당신께서 저한테... '니 죄가 무엇이냐' 고 물으셨을때...

  이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게...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

女 - 전도연의 대사 ;

"다른여자 만나는 것만이 배신이 아니야. 니 맘속에서 날 재껴놓는것도 나한텐 배신이야."

 

그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었고...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는 게 꼭 짬뽕공 같은 나답게, '남자랑 여자랑 사랑을 생각하는 방식도 참 다르구나'하는 생각도 했었다.

남자는 직접적인 만남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홀로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는 걸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하는 반면,

여자(라고 해서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는 직접적인 만남(뿐)이 아니라,

맘속이라고 표현되는 정신적인 것- 이를테면 우선 순위에서 재껴놓음도 사랑에 포함시킨다.

 

나도 여자인지라, 남편이랑 이런 문제로 가끔 의견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곤 하는데...

남편은 내 몸이 자기 시야 사정권 안에 있으면 마음이 어느 하늘 밑의 누군가를 절절하고 진하게 찾아 다녀도 개의치 않는 반면에,

난 남편이 아침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내 남편이 아니라는 마인드로 살아서,

몸은 방치하는 대신(방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관리하기엔 내가 너무 게으르기 때문에) 마음은 한번씩 확인사살하고 단속 들어가 주신다.

유럽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고딩 때의 첫사랑과의 안부메일을 갖고 난리블루스를 췄던 기억이 있다.

 

 

 

 

 

 

 

 

 

 

 

 애도예찬
 왕은철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5월

 

난 그동안의 예찬 시리즈를 김화영님이 번역하셔서 접하게 되었고,

이 책도 그 연장선 상에서 구색맞추기로 갖추게 되었다.

손에 넣고 보니 이번엔 번역본이 아니라 왕은철님이 직접 쓰셨는데,

이 분을 난 '천개의 찬란한 태양','연을 쫒는 아이','위대한 유산'등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번역하신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번역 말고 당신의 필력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나를 이 책 '애도 예찬'으로 이끌었는데,

작가로서의 필력 또한 역자로서의 그것 못지 않아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을 분더러 깊이 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애도(哀悼)'라고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그렇다면 언젠가 때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저자 왕은철님의 경우,

어머니가 조금씩 편찮으시게 되면서,

다른사람들은 어떻게 애도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애도의 관점에서 볼때 문학은 풍요로운 창고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애도하는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양한 문학작품에 형상화된 슬픔과 애도의 방식을 살피는 건 어쩜 당연한 수순이지 싶다.

(물론 이런 분들 덕에, 우리 같은 凡人들은 숟가락 하나만 갖고 달려 들면 되는 거겠지만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성 같은 속성을 지녔지만, 애도 또한 그렇다.

떠나간 사람을 잊고 극복함으로써 새 삶을 사는 것이니까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떠나고 없는 사람을 마음이나 기억 속에서까지 말끔히 비워내는 것이니 어찌보면 '비정한' 것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저자는 은근 애도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낭만주의자가 아닌가 싶다.

 

데리다의  '애도'를 힘주어 인용하는가 하면,

데리다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애도는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고, 그래서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는 것이며 애도는 실패해야, 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의 시작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거기 나오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으로 장식한다.

히스클리프를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캐서린("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늘 내 마음속에 있어. 내 자신이 늘 나를 기쁘게 하지만은 않듯 그가 꼭 기쁨이 되지는 않아도, 그는 나 자신으로서 존재해")에게는 그와 같이 놀지 말라고 하고,ㆍㆍㆍㆍㆍㆍ'정상적인' 연인들이라면 복수심에서 비롯된 죽음으로 서로와 작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용서하는 자못 감상적인 장면이 연출되겠지만, 히스클리프와 개서린이 헤어지는 장면을 보면 마치 서로를 물어뜯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임박한 죽음을 현실로 인정하고 서로가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선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물어뜯어서라도 죽음에 맞서고자 하는 것이다.

데리다와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히스클리프', 모두 애도가 실패해야 성공한다고 하거나, 죽어가는 사람은 애도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애도하기를 거부하는 방법으로 애도를 한 부류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겪은 애도 중 가장 최근의 것은, 시어머니의 그것이었는데 1년이 채 못된 일이고,

내가 애도에 실패할 뻔 하여 좀 고생을 했던 건 친할머니였는데,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 되었다.

 

내가 좀 감성적이란 걸 아는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애도를 겪으면서 내가 애도에 실패할까봐 노심초사했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음, 내가 어느 정도로 감성적이냐 하면...

 어떤 사람은 머리를 옵션으로 들고 다닌다고 했었고,-->그럼 '양철나무꾼'이 아니라 '허수아비'로 닉을 바꿔야 하나?--;

 너무 울어, 일이 진척 안돼...울때마다 벌금을 내기로 했었다.

 우는 걸 자제해 벌금을 줄여야 하는 데,

 더 울어대서 벌금 내려면 집이라도 팔아야 할 지경이어서 '집.파.녀'란 별명을 얻기도 했었다.)

 

근데, 의외로 난 쿨하게 애도에 성공하였다.

이쯤되면 혹자는 사랑의 농도를 의심할 수 있을텐데, 

시어머니고, 할머니고, 내겐 최상급의 수식어로 대치될 수 있는 분들이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슬픔이 끝없이 지속될 것 같았고,

영원히 못잊고 한결같이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겪어보니, 애도에 성공하는게 쉽지는 않았지만 성공을 할 수는 있었다.

 

끝없이 지속될 것 같았던 슬픔도,

영원하고 한결같을 것 같았던 그리움도,

어느샌가 희미해지고 잊혀지게 마련이었다.

기억력은 최고라고 자부하던 내게도 그렇게 되더라.

 

바꾸어 말하면,

끝없이 지속되는 슬픔을 간직한다는 거나,

한결같은 그리움을 간직한다는 것은,

기억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일상적인 삶을 제대로 산다는 애기는 아니다.

데리다의 경우도 그렇고, 히스클리프의 경우도 그렇고 책속에서 걸어나오면 '미치광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애도 예찬>은 '살아있는 사람' 즉,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어찌보면 비정한 것 같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얼마동안이나 애도하면 되느냐 따위를 정리해 놓기 위해...

살아있는, 살아 남아 있는 사람의 안위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그리고 '죽은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이런 것들이 아닐까?

형식이 아닌 '마음의 지극함'을 다한 후에는 쿨하게 훌훌 떨어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단정지어버리기에는 이 페이퍼의 처음에서 얘기했듯이 남자와 여자의 입장 차이가 있긴 하다.

남자와 여자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입장 차이라고 하는게 낫겠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주제를 '이별의 정한'이 아니라, '사별의 한'이라고 한 독특한 해석을 어디선가 봤었다.

그는 이미 이런 애도의 경지를 터득하였으니 이 책이 무용지물이겠다,ㅋ~.

그렇지 않아도 헤어지는 사이에서 소금이나 물을 끼얹는 것도 아니고 꽃을 뿌려준다는 거, 그거 참 이해가 안 됐었다.

애이불비(哀而不悲)가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다'로 해석되어도 그렇고, '슬프기는 하나 비참하지는 아니함'으로 해석되어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애도와 관련하여 제일 생각에 남는 건 '유령과의 사랑(원제 truly,madly, deeply)'이란 영화이다.

내가 좋아하는 '안소니 밍겔라' 감독이 만든 작품인데,

애도와 관련하여(아니, 참된 사랑과 이별과 관련하여)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유령과의 사랑(원제 truly,madly, deeply)>영화의 예고편(한글 자막 첨부)

 

 

'Truly, madly, deeply'

 

'진짜, 미치게,깊이' - 번역하면 이쯤 될까?

하지만 영화의우리말 제목은, '유령과의 사랑'이라는 줄거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좀 촌스러운 것이었다.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하는지'의 수식어를 대보라고 한다면,

저 'Truly, madly, deeply'에서 크게 비껴 갈 것도 없을 뿐더러 저 'Truly,madly, deeply'이면 부러울 것도 없지 않을까?

딱 하나 남아있는 표현이 있기는 하다, '죽도록, 죽을 만큼'

하지만 사랑은 살아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살아있어야만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있다.

 

내가 쓰는 안 좋은 말버릇이 하나 있는데...동사나 형용사 뒤에 '죽겠어'를 붙여 극단의 상황, 최상급을 만들어 버리는 거다.

이를테면 '보고싶어 죽겠어.' 또는 '졸리워 죽겠어.'

죽은 사람을 위한 사랑을 우리는 '애도'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니,

결국 내가 만들어 쓰는 최상급은 안 좋은 극단의 최상급이니 사용하지 말아야 되겠다.

 

 

 

 

 

 

 

 

 

wishing you to be so near to me
finding only my loneliness
waiting for the sun to shine again
finding that it's gone to far away
to die
to sleep
may be to dream
to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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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6-11 08:04   좋아요 0 | URL
애절한 영화대사로 시작하셔서 저도 박신양 목소리가 절절히 환청으로 다가오네요
유령과의 사랑이란 영화는 못 보았는데~
요즘은 사랑 타령이 허무한 것만 같아서리
그냥 신사의 품격이란 드라마의 김하늘로 빙의되어 장동건 짝사랑을 받아보며(상상에서만)
사네요.
 

               늙은 산벚나무

                                    - 송 찬 호 -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 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 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 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 지는 기라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 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 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 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툭하게 남아 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슬며시 내미는 기라

 

친구가 저 시를 보내줄 무렵의 난, 이러저러한 일들로 꿀꿀함의 연속이었다.

외부는 차치하고라도 알라딘 이 동네에서도 그러하였는데,

명쾌하게 금을 그을 수는 없지만,

이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난 피해 의식과 가해 의식- 일종의 '양가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날 눈치챘는지, 고맙게도 친구가 재밌는 시라면서 저 시를 보내주었는데,

문제는 저 시가 좀 난해해서였는지, 내 마음이 폭폭해 시를 이해할 마음의 여력이 없었는지,

도무지 어느 대목에서 재밌어 해줘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서 난감했었다.

 

속깊은 친구는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저 시를 멋들어지게 해석해 줬는데...

 

 

화자가 산을 가는데 말이야.

틀어지고 휘어진 산벚나무 고목이 늘어져 있었겠지,

특이하게 산벚나무 둥치에서 툭 튀어나온 부분이 꼭 곰 발바닥처럼 뭉툭하게 생긴 거야.

그래서 그 고목의 둥치에서도 톡톡 피어나오는 산벚나무 꽃을 바라보면서,

눈부신 상상을 하는 거지.

 

살다 보면, 그런 일을 겪을 때가 있는 법인 모양이야.

이제 다시 사랑따윈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나이에도 말이지.

그게 늙은 산벚나무와 늙은 곰의 그것이지만, 얼마나 풋풋하게 꽃피우는 장면이 아름답냐구~ ㅋ

그들의 사랑은 우정이라고 말해도 좋고, 소통이라고 불러도 좋을 거잖아.

 

이 시를 읽는데, 이런 생각이 났어.

벚나무는 가로로 숨구멍이 나 있어서

똑 살이 튼 것 같은 무늬가 있거든.

그리고 나무 껍질이 짙은 고동이어서 검정에 가깝잖아. ^^

그게 늙었으니 얼마나 굵고, 얼마나 숨구멍이 많이 터져 있겠냐구.

 

그 나무에 등허리를 문지르며 비비고 놀던 늙은 곰과 벚나무의 우정.

남들은 바라보지 못할 그 우정이 재미있더라고... ^^

 

그리하여 '송찬호'의 '늙은 산벚나무'는 내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한편의 시가 되었다.

 

 

 

 

 

 

 

 

 

 

 

 북항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그런 심사였을때 또 다른 시집 '안도현'의 <북항>을 펼쳐 들었다.

그랬다.

안도현은 잘 알려진 시인이지만, '황현산'이 쓴 발문 격인 '해설'의 한 구절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겐 너무 평범하다 못해 밍밍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안도현은 문단 안팎으로 가장 잘 알려진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적잖은 성공을 거둬온 그의 시가 진지하고 적절한 비평의 대상이 된 적은 드물다. 시인의 명성이 평가를 대신하고 시의 호소력이 설명을 대신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스스로 자족하는 한 세계가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그 밑바닥을 뒤집어 제 말을 덧붙이려는 것처럼 보이는 비평의 인위적 체계를 암암리에 거부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고, 비평이 먼저 거기에는 더 말할 것이 없다고 물러섰을 수도 있다. 결국은 같은 말이다.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것이 모범생의 그것을 보는 듯 했지만,

인생의 밑바닥을 쳐본 자만이 얘기할 수 있는 어떤 치열함, 삶의 호소력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말해, 그가 구사하는 '은유'라는 것이 내게는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졌던 지라,

황현산이 쓴 시집의 발문 격인 '해설'을 읽다가...나도 모르게 '꺼이 꺼이~' 울고 말았었다.

어떻게보면 '안도현'에게 무서우리 만치 매정했지만, 진짜 매정한 사람은 무관심한 사람이 아닐까?

글의 마디 마디, 구비 구비 마다에서 숨은 애정이 느껴져 그게 내 일인듯 느껴져 고맙고 눈물 났다.

 

같은 의미로, 알라딘 이 동네에서 진짜 매정했던 사람은,

나처럼 입 다물고 함구했던, 함구했었어야만 했던 비겁한 사람인데...

그 비겁함이 때론 그들에게 무관심으로 보이기도 했을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다가 떠나갔거나 떠나갈' 누군가와 의견이 같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들의 알라딘 이 동네에 대한 애정이, 삶에 대한 정열이 눈물나게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 '황현산'이 발문을 쓴 '안도현'의 시집 '북항'은 당근 설렁설렁 넘길 수밖에 없는 기라.

설렁설렁 넘기는데, '송찬호 형네 풀밭에서'란 시가 딱, 걸렸는 기라.

설렁설렁 넘기던 걸 멈추고, 정색을 하고 앉아서 바라보았는 기라.

그러자 '송찬호'의 저 시 '늙은 산벚나무'가 생각나고,

'늙은 산벚나무'는 '늙은 산벚나무'의 해석을 불러오고,

그러자, '안도현'의 시집 '북항'도 다시 읽히는 기라.

 

결국 시는 거기 그렇게 그대로 있는데, 시를 읽는 나의 마음이 바뀐거다.

황현산이 발문 마지막에 쓴 한구절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시인이여, 늘 잘 쓰지 말라. 저 빛의 손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부분)

 

화자의 은유가 어떠했던지 간에,

독자가 감정이입을 하기 나름이라면, 이 시는 간절한 것이 내 마음 같다.

벌레 먹은 사과는 맛있다고 설레발이라도 칠 수 있지만,

멍들어 곪은 사과는 아파도 아프다 하지 못한다.

아프다고 하는 순간 제 살 무수히 잘리워 나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다시는 못 볼 이별일 수도 있다.

 

삶은 그리하여 기나긴 비명이 되는 것이오 저물 무렵 말발굽 소리가 서해에 닿을 것이니 나는 비명을 한 올 한 올 풀어 늘어뜨린 뒤에 뜨거운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주름을 지우고 수평선 위에 걸쳐놓을 것이오 그때 천지간에 북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기를 해도 좋소 나는 기꺼이 하늘에 걸어둔 하현달을 걸겠소

                                                                                                        ('직소폭포' 부분)

난 '직소'를 형상화 저 부분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생각났다.

'하늘의 하현달'을 내기에 건 배포를 부러워 하기엔,

직소폭포의 주름한점 없는 완전 무결은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린 때문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하늘의 하현달'을 내기에 건 배포로 봤을땐,달도 차면기울고...같은 의미에서 삶은 영원한 도돌이표다.

 

   폭

 

바다의 폭이 얼마나 되나 재보려고 수평선은 귀등에 등대 같은 연필을 꽂고 수십억 년 전부터 팽팽하다

 

사랑이여

나하고 너 사이 허공의 폭을

자로 재기만 할 것인가

 

'직소폭포'도 그렇지만, '폭'도 이미지의 형상화에 성공한 시 같다.

내가 보기엔,

자로 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잔잔할 때의 바다는 잔잔한 채로,

격정적일 때는 격정적인 입맞춤이 가능한 것이 바다의 폭, 다른 말로 수평선이 아닌가 싶다.

 

 

노숙(露宿)

 

양말 한 켤레를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양명한 날이다

발랫줄은 두말없이 양말을 반으로 접었다

쪽쪽 빨아 먹어도 좋을 것을

허기진 바람이 아, 하고 입을 벌려

양말 끝으로 똑똑 듣는 젖을 받아먹었다

양말 속 젖은 허공 한 켤레가

발름발름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바지랑대 끝에 앉아 있던 구름이

양말 속에 발목을 집어넣어보겠다고 했다

구름이 무슨 발목이 있느냐고 꾸짖었더니

원래 양말은 구름이 신던 것이라 했다

아아, 그동안 구름의 양말이나 빌려 신고 다니던 나는

차마 허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를 읽는데, 왜 차마고도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차마고도'가 '차와 말의 길'이라면,

'허공'은 '허기지 바람의 길' 또는 '허기진 영혼의 길'이라고 하면 되겠다.

 

쪽쪽 빨아 먹어도 좋은 날이거나,

발름거리며 호흡을 하고 싶은 날에는,

구름을 신고 허공으로 마중을 나가봐야 겠다.

누구를?

그 누군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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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0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이라는 시를 읽으니
<소금인형>이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그리고, 이 시에 가락을 붙인 안치환 님 노래도 생각나고요.

요사이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지만,
그동안 <소금인형>을 몇 천, 몇 만 번쯤 불렀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반딧불이 2012-06-0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삶이 함께하시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은 따듯합니다. 땡스투

하늘바람 2012-06-0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겁한 사람 중 하나예요
다 말리고 싶어요 제발 이제 그만하라고 자기 생각이 있을 수 있으니 서로 다 그냥 인정해주고 넘어가자고
타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그 사람을 바꾸고 메도하고 깨우쳐 주려하는 건 아니라고
것도 인터넷 세상에선 더더욱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가서 정말 뜯어말리고 파요
사람들이 떠나가서 너무 속상하고 슬픈데 오늘 또 논쟁의 씨앗들이 벌어졌더군요
제발 그만헀으면 하는데 그만하질 않네요.
마고님 떠난 거 넘 슬픈데 말이에요.
이러다 다 진저리치며 다 떠날까 넘 겁나는데 말이에요
 
사랑의 기초 세트 - 전2권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foundation Of Love'이다.

내가 영어 제목을 들먹이는 이유는 우리말 제목 '사랑의 기초'라고 했을때, 그 기초가 basic인지 foundation인지 명확하지 않은 감이 있어서이다. 

basic이라고 했을때는 시작, 초급이라는 느낌이라면, foundation이라고 했을때는 일의 바탕이 되는 토대라는 느낌이 강하다.

(나 혼자만의 주관적 느낌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고~--;)

 

두 권으로 이루어진,

각기 다른 설정의,

두 편의 소설을 통하여,

두 명의 작가 - 그들이 보여주려한 것은 '사랑의 기초;The foundation Of Love'의 제각각 다른 형태들(하지만, 어쩜 결국은 하나가 아닐까 싶은 그 어떤 것?)이다.

 

여기서 '기초'는 '시작'이 아니라 '근간'이고 '토대'다.

사실, 정이현이 쓴 <사랑의 기초, 연인들>편에서는 이 '기초'가 '시작'이어도 좋고 '근간'이나 '토대'여도 상관없는 듯 보이기도 했었다.

정이현은 <달콤한 나의 도시>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그 작품에서,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onthroad(온 더 로드)라는 메일 계정을 쓰던 익명의 남자에게 마음 쓰였었다.

이 작품, <사랑의 기초, 연인들>에서도 같은 이유로 준호에게 마음이 쓰였다.

 

이건 어쩜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어서,

또는 두 작품 사이에 세월이 얼마 흐르지 않아 작가의 가치관이나 개성이 크게 변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지만,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이라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민아와 준호를 보면서, 그들의 사랑의 과정을 보면서 마음 쓰였었다. 

우리가 사실과 진실을 놓고 함부로 가치 판단을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되듯이,

이들의 사랑을 놓고도 함부로 가치판단을 하거나 단정 지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건 '달콤한 나의 도시'의 그남자에게 익명 아니 불명이라는 이유 만으로 돌을 던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여기서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살짝 짚어보면,


내가 창밖을 보니 비가 오는것을 보았다.

(이때까지는, 사실이며 진실이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보니 옥상에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이때는, 비를 보았던것은 사실이며 

           옥상에서 물을 뿌린것은 진실.)

 

그래서 내가 비가 온다고 착각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는, 비를 본것은 거짓이며

           비라고 생각했다는것이 사실이며

           옥상에서 물을 뿌린것이 진실.)

 

이처럼 사실은 과정으로는 명백한것 같으나 결과를 놓고 보니 그것이 아닐수도 있으며,

진실은 항상 명백한 사실이지만 사실은 명백한 진실이 아닐수도 있다.

 

그걸  <사랑의 기초, 연인들>의 처음과 끝에서, 미용사의 목소리로 강조하듯 짚어낸다. 

 

"아휴, 좋을때다. 근데 젊은 아가씨들은 잘 모르겠지만 착한 남자가 최고예요. 언뜻 봐서는 별 매력 없더라도 알수록 진국인 남자, 딱 한 여자밖에 모르는 남자. 요즘 아가씨들 겉으론 똑똑한 거 같아도 그 당연한 걸 잘 놓치더라고요."(19쪽)

 

"내가 겪어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자는 역시 자상하고 다정한 남자가 최고예요. 지 혼자 속으로 진국이면 뭐해. 표현 안 하면 그걸 누가 아나."

 미용사가 언젠가 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았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였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204쪽)

이건 사람이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라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내겐, 사람이 그러하듯 사랑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서...함부로 가치판단을 하거나 단정 지으면 안된다는 의미로 돌출되어 다가왔다.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다.

난  <사랑의 기초, 연인들>의 여주인공 민아처럼 "나는 그냥 착한 사람이면 돼"과는 아니어서, 좀 까칠하고 유별나게 고르는 편이다.

한때는 '글쎄, 남의 얘기 잘 들어주는 사람? 부드러운 성격에 나랑 취향이 비슷하면 더 좋겠지. 음악도 좋아하고 서점 가는 것도 좋아하고.(20쪽)'라고 말하는 민아처럼 나랑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 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에까지 빵빵하게 살이 쩌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그렇기때문에' 골라내는 OX문제나 사지선다형 문제 처럼  쉽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곤란한 상황에서 기꺼이 너그러워질 수 있는 지 마음의 평수를 시험하는 그런 문제로 바뀐 느낌이다.

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78쪽)

말은 언제나 흘러넘쳤다. 그들은 말하고 또 말했다. 사랑할 사람을 찾아 헤매었던 유일한 이유가 마치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였다는 듯.(113쪽)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에, 사람인 당사자와 상대방 말고 왜 다른 것들이 요구되는건지,

왜 '그 사람의 세계'라고 표현되는 '배경'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건지 모르겠다.

저렇게 얘기가 잘 통하는 이들이,

배경이 구차하거나 누추한게 뭐, 그리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어야 할 일이기까지 하며...

용기를 갖고 고백을 하거나 못한게 헤어짐의 원인까지 되어야 하나 싶지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않은지...

다시말해, 나의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에 문제가 있는지,

어제 어느 인터넷 자료를 보니, 배우자 선택시 가장 고려하는 게 '가정환경'이란다.

 

콩깎지가 씌웠을때 장점으로 보이던 것들이, 사랑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한단다.

 

그래서였을까, 이 구절이 더 가슴 아프게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준호의 가슴 속에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꿈이 한 톨 피어 올랐다. 이 사람에게라면, 곧 더 깊은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을지 몰랐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달콤한 케이크 위에 사뿐 올라앉은 체리뿐만 아니라 오븐에서 너무 늦게 꺼낸 식빵의 가장자리처럼 누추한 삶의 모서리까지도 사이좋게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행운아인지도 모른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했다.(117쪽)

 

이들에게 부족한 '사랑의 기초', 다시 말해 '사랑의 근간'은 믿음과 신뢰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사람을 통해 그런 얘기를 듣게 되었을때, 내가 민아였다면 '말못할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는 건 누구에게나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려하는 건 '그 사람이니까' 다시말해, '준호니까' 말못할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하고 믿고 보는거다.

 

하지만, 작가는 민아와 준호에게 아직까지 그런 믿음과 신뢰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그것을, 인연이나 운명으로 몰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그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게,

준호가 어렸을때, 준호 담임선생님의 딸이 점심시간마다 엄마와 점심을 먹으러 오면서,

준호는 민아와 같은 공간에서 '따로'이면서 '같이' 점심을 먹는다.

하지만, 그건 전지적 작가만 알뿐이지, 준호도 민아도 모른다.

그의 담임은 삼십대 후반으로 평소에 늘 기운 없는 눈빛과 웃음기 없는 표정을 하고 다니는 여자였다. 누구를 특히 차별하는 법 없이 반 애들에게 골고루 무심했기 때문에 그는 선생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혹시 내가 자기 반 학생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닐까 가끔 의심스럽기는 했지만.(50쪽)

 

그에 비하면,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한 남자>편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에 성공한 부부인 벤과 엘로이즈를 중심으로,

그들의 가정생활, 자녀양육, 사랑과 섹스 등에 관한 고민을 그린 작품이다.

이때의 '기초'는 '시작'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는 '근간'이나 '토대'정도가 되어야 된다.

 

그는 서양작가답게,

그리고 그동안 철학서인지 소설인지 불간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책을 쓰던 사람답게,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의 시도를 하고...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철학적 교훈을 주려한다.

솔직히 고백컨데, 난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가 쓴 <메이팅마인드>(=연애)라는 책을 읽지 못했다면 겉으론 쿨하게 이해하는 척하면서...속으론 툴툴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표리부동하게 그를 이해할 수도 있을 듯~!

 

우리는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결혼의 일상성과 그 허상을 날카롭게 탐구하는 걸 지켜볼 의사가 있으며,

인간 각자는 떼어놓고 봤을때 불완전한 존재라는걸 인정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연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만이 결혼한 부부로 잘 사는 길이라는 그의 충고도 귀담아 듣겠다.

(여기서도 사랑에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기서도 사랑에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글로 쓸 수 있다는 '알랭드 보통'의 글쓰기 경험 상, 그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인 듯 느껴져 살짝 꺼림칙하긴 하지만, 뭐~--;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긴 하지만, 인류 대다수에게, 특히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라면 가급적 그런 끔찍한 특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충고가 늘 따라 붙는다.(71쪽)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이긴 하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내 자신에게 편할 수 있는 모습이라면 그대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사랑받고자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오래'라는 기간이 중요할 것 같은데...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그 정도 노력도 못하냐고?

뭐, 그럼...할 말 없는 거고~--;

 

암튼, 정이현에 비하여 알랭 드 보통이 특별히 좋거나 하지는 않지만,

<사랑의 기초-한 남자>편이 내겐 더 개연성 있게 다가왔다.

그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닌,

모든 사랑의 근간에는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내 바램인데,

알랭 드 보통이 그려낸 소설 속의 그들은 어떤 겉모습을 보이더라도,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듯 느껴져서이다.

 

때론 내 자신이지만 왜 그러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왜 그러는지 모르는게 당연한 거다.

남의 마음이니까 내가 모르는게 당연한 거다.

그러니, '뭐 그럴만한...말못할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생각하기 쉬운 일인데,

왜 인색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오늘부터, 지금부터...라도 넉넉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되겠다.

 

Pink Martini는 그걸 남자와 여자의 입장 차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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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6-04 10:39   좋아요 0 | URL
아침 기분이 환기 되는 음악이네요.
정이현은 젊은데도 참 많은 생각이 오고가는 글을 써요.
정이현이 젊은게 아니라 내가 늙었나 싶네요 문득

양철나무꾼 2012-06-04 11:16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좋은 소식 축하드려요.
뭐, 드시고 싶은거 없어요? 헤에~^______^

더 기분이 전환되는 음악, 필요하심 말씀만 하세요.
재깍 대령할게요, ㅋ~.

하늘바람 2012-06-04 12:51   좋아요 0 | URL
저 음악듣고 싶을 때 양철나무꾼님 서재와서 들었어요
좋은 음악이 넘 많아서요

2012-06-04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6-04 20:35   좋아요 0 | URL
사랑에도 연습이...이점 저는 약하게 동의하는 편,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 하므로...^^)
사랑에도 노력이...이건 매우 동감...^^

첫사랑의 실패는 경험이 부족한 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개인 적인 생각이랍니다.
깨달음은 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부분이기도하고
잘 생각해보면 가능한 부분이기도하고..

신뢰, 믿음, 이걸 얻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적극 동감이구요. 물론 그 노력의 일관성이 더 중요...일시적 신뢰는 쩜...^^

많은 생각의 기회를 주는 페이퍼~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2-06-04 21:13   좋아요 0 | URL
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그 정도 노력도 못하냐고?

뭐, 그럼...할 말 없는 거고~--;


에서 빵터졌어요.. ㅋㅋ
첫 음악은 .. 흥겹네요..
오늘 같은 월요일 밤 듣기 참 좋아요.. 양철나무꾼님..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왜 그러는지 모르는게 당연한 거다.

남의 마음이니까 내가 모르는게 당연한 거다.

그러니, '뭐 그럴만한...말못할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생각하기 쉬운 일인데,

왜 인색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네..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더 따져들고 싶고 그래져요..
사랑하는데 넌 왜이래.. ㅠㅠ
암튼 저도 그렇습니다..


blanca 2012-06-05 09:30   좋아요 0 | URL
이 책이 궁금했었는데 나무꾼님 리뷰가 좋아요. <냉정과 열정> 방식이랑은 다르게 그냥 아예 서로 다른 이야기인가요?
 
사랑 아닌 것이 없다 - 사물과 나눈 이야기
이현주 지음 / 샨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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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언젠가, 저녁 모임에서 꾸물거리다가 야.자.가 끝날 무렵 아들의 교문 앞으로 갔다.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은 세가지 코스가 있었다.

뭐, 낭만적인 데이트코스를 생각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자 간에 집 밖에서 만나는 건 실로 오랫만의 일이었던지라 두런두런 얘기라도 하며 귀가를 하게 될 줄 알았다.

웬걸~.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A길이 있었지만 산길이어서 밤에는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었고,

B길은 산을 삥 둘러서 있는 대로여서 대중교통편까지 있었지만, 차를 타고 한참을 움직여줘야 하는 길이었다.

C길은 A길과 B길의 중간 정도 거리였지만, 산길만 아니었다 뿐이지 한적하고 외진 정도가 A길에 못지 않았다.

B길을 생각하던 나는 C길을 향하여 앞장 서는 아들을 바쁘게 따라 걸으며 한마디했다.

"한밤중에 꼭 이렇게 위험한 길로 다녀야겠어?"

"엄마, 아님 나?"

"엄마 혼자 여기 올 일이 뭐가 있니? 행여 너 혼자 다닐때 말야."

"엄마, 이 한적한 길에서 누구랑 만나게 되면 내가 위험하다기보다 그에게 위협적이지 않을까?"

 

위험하다기보다, 위협적이지 않을까...에서 요즘 읽은 '사랑 아닌 것이 없다' 이 책이 생각났다.

요번 제목보다 먼젓번 제목 '物과 나눈 이야기(이레,2001)'가 이 책의 취지를 짐작하기 쉬웠는데 말이다.

그걸 '다시 책을 펴내며' 부분에서 '그래서 눈에 띄는 대로 사물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사물과의 대화'까지는 아니어도,

사물을 의인화하고, 사물에 감정 이입하길 좋아하는 나도...이현주 목사님-이분께는 명함을 못 내밀겠다.

 

"앞이 캄캄했고, 내가 길 위에 놓여 있었고, 자네 발이 나를 밟았고, 게다가 내 모양이 퉁겨나기 좋게 되어 있었고, 그래서 자네가 꽈당 하고 넘어졌지만, 그뿐일세. 사람이 밤길에 돌을 밟고 넘어진 것뿐이야.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사실은 자네가 넘어진 것도 아니네. 넘어진 것은 자네가 아니라 자네 몸이거든. 자네 몸이 곧 자네는 아니지 않은가?"

ㆍㆍㆍㆍㆍㆍ

"고맙구먼. 먼저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주시니

ㆍㆍㆍㆍㆍㆍ산다는 게 무엇인가? 나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사람 발에 밟혀도 보고ㆍㆍㆍㆍㆍㆍ그러는 게 사는 것 아니겠나? 자네가 넘어져 상처를 입는 것도 그게 다 자네가 살아있어서 겪는 일일세. 그러니, 그래도 굳이 '너 때문에'라는 말을 쓰고 싶거든 이렇게 한번 해보시게. '너 때문에 사는 맛 한번 봤다. 고마워.' 눈 한번 뜨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善을 이루는 세상이 바로 거기 있다네."(14~15쪽)

 

암튼, 참 독특하시다.

밤길 작은 에 걸려 넘어지고도, 그 속에서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라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내가 아는 이 중에도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있다.

처음엔 '때문에'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덕분에' 투성이인 그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때문에'가 내 기본적인 정서인걸 어쩌란 거야~'하고 툴툴거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긍정적인 마인드'라는 건 바퀴벌레보다 생명력과 전염성이 강한 것인지...

어느새 나도 옮았는지 '때문에' 대신에 '덕분에'라는 말을 되뇌고 있는 거다.

아직 범사에 감사할 정도로 초 긍정 마인드로 거듭나지는 못했지만, 

매사에 감사하고, 좋고, 행복한 마음이 퐁퐁 샘 솟기는 한다.

 

사실은 긍정적인마인드는 그에게 옮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배운 것이다.

영화 '이보다 좋을순 없다'의 대사를 슬쩍 차용하자면,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woman.'이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세상은 불을 피우면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먹기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되고 그런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나무젓가락과 관련하여서 내가 생각해본건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였다.

ㆍㆍㆍㆍㆍㆍ

"나는 나무젓가락이 아니오."

"그럼 무엇이냐?"

"나는 나무요. 당신이 '나무'를 부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런 불가능하지."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는 나무도 아니오."

"ㆍㆍㆍㆍㆍㆍ?"

"구태여 말한다면 나는 땅이오."

"네가 땅이라고?"

"숲의 모든 나무와 풀이 땅에서 나온 땅의 분신인 줄 모른단 말이오?"

"ㆍㆍㆍㆍㆍㆍ"

"그러니 나는 하늘이기도 하지요."

"ㆍㆍㆍㆍㆍㆍ"

"따라서 당신과 나는 본질상 하나인 것이오."

"동의한다. 이왕 입을 열었으니 도움이 될 말 한 마디 들려다오."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서 도움이 될 무엇을 얻어야 직성이 풀리나요?"

"ㆍㆍㆍㆍㆍㆍ"

"그리고 왜 처음부터 나에게 반말입니까?"

"ㆍㆍㆍㆍㆍㆍ"

"내가 당신을 만나서 잠시 젓가락 구실 즐겼듯이, 당신도 좋은 주인 만나서 잠시 사람 구실 즐기시오."

"고맙네. 잘 가시게."

"가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나는 늘 여기 있다네."(34~35쪽)

아래 쓸쓸함과 외로움에 관한 얘기는 참 여러곳에서 여러 변형으로 접했었다.

여기서는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해서 축하한다'고 하는데,

어딘가에선 '내게온 손님이니 대접하라'고 한다.

 

아무래도 '손님이니 대접하라'보다는 '살아있음의 증거'가 잘 와닿는다.

 

외로움과 관련하여서도,

실재가 아닌 관념이고, 관념에서 오는 착각이라고 얘기한다.

이쯤되어야 세상 모든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것'이 되고,

긍정적 마인드를 옮기고 배우는 것이 설득력 있어 진다.

 

스스로 문을 닫아 걸고 나는 외롭다, 나는 어둡다...한 삶은 아니었는지 돌이키는데...뜨끔하다.

"쓸쓸한 자네 감정에 대하여 나는 책임도 없고 할 말도 없네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는 해주고 싶군."

"쓸쓸한 감정을 축하한다고?"

"아니,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그것을 축하한다는 말일세."

"ㆍㆍㆍㆍㆍㆍ?"

"자네가 쓸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금 자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축하받을 일이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

쓸쓸한 느낌은 그냥 거기 그렇게 두고, 나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나는 나의 비어 있음이요 나 아닌 것들의 차 있음(盈)이다. 이 쓸쓸한 감정도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면서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나그네로 가득한 주인이다. 세상은 얼마나 완벽한 조화인가? 가짜가 없으면 진짜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73~74쪽) 

 

 

"외로움이란 실재實在가 아니라 관념이다. 관념에서 오는 착각이다. 자네들이 말하는 '외로운 사람'이란 자기가 외롭다는 착각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외롭다는 것은 혼자 떨어져 있다는 말인데 神은 만물을 지을 때 아무리 작은 것도 그것만 따로 떼어내어 짓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신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라. '이웃'이 없는 존재가 세상에 있는가? 나무는 흙에 뿌리 내리고 새는 허공에 날개를 띄운다. 특히 인간에게는 여섯 개나 되는 문이 있고 거기에 맞추어 여섯 경계(六界)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눈-色, 귀-聲,코-香, 혀-味, 살갗-觸, 생각-法), 스스로 문을 닫아놓고서 나는 외롭다, 나는 어둡다고 말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연한 엄살이요, 무지에 뿌리 내린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93~194쪽)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날카롭지 않은 부분들은 내 몸의 지극히 작은 부분인 '날카로운 끝'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이 날카로운 끝 한 점에 수렴收斂될진대,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이라고 해도 잘못은 아니겠지."

"아무렴. 끝이 뭉툭한 송곳은 더 이상 송곳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자네의 '뾰족한 끝'은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그것 아니면 자네가 자네일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가?"

"ㆍㆍㆍㆍㆍㆍ?"

"그것 아닌 자네의 모든 부분이 오직 그것으로 수렴되는 그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ㆍㆍㆍㆍㆍㆍ?"

"참고삼아 말해주지. 바울로라는 사람은 일찍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했네."

송곳의 날카로운 끝에 가슴이 찔려 나는 지금 아무 말 못하겠다. 다만, 바라건대 나 또한 바울로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ㆍㆍㆍㆍㆍㆍ그리하여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 내가 곧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ㆍㆍㆍㆍㆍㆍ(78~79쪽)

 

 

"법광 모습의 내가, 부채 모습의 나를, 관옥觀玉 모습의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런즉 내가 나에게 나를 선물한 것이란 말인가?"

"정확한 표현!"

"불가에서 말하는 삼체개공三體皆空(주는 자도 공이요, 받는 자도 공이요, 주고받는 물건 또한 공이다)이 그것 아닌가?"

"맞다."

"그렇다면 내가 나에게 나를 선물하는 까닭이 무언가?"

"선물을 주고받음은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ㆍㆍㆍㆍㆍㆍ

"논리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신비가 여기 있다. 그림자가 그림자로 존재하려면 먼저 빛이 있어야 한다. 그림자는 빛의 다른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명심해 두어라. 이 세상에는 사랑의 표현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ㆍㆍㆍㆍㆍㆍ모든 것이 내가 나에게 드러내는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내 일찍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하지 않았느냐?"(83~85쪽)

위 부분을 읽으면서, 잠시 이현주 목사님의 종교를 의심했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종교나 철학을 막론하고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하나로 연결되고 통하여 넘나드는 경계없는 어떤 상태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현주 목사님이 바로 그 경지인 것 같다.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림자는 빛의 다른 표현'이라는 부분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겉으로 의연한 척하고 쿨한 척 하지만, 속으론 늘상 조바심내고 안달하고 그러면서 사는 일상이었다.

모든 걸 우아한 백조의 물속 발길질로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노력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열심히 하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하였다.

진인사( 盡人事)한 후엔 대천명(待天命)해야 하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조바심과 안달 속에 속이 시끄러웠다.

"누군가 나를 버려도 그가 한짓이지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네. 그의 '버림'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나는 버림받지 않는다네."(92쪽)

모든것이 마음먹기에 달린거란걸, 긍정적인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한 마디만 더 하지. 충고로 들어도 좋아. 누구한테 쓰임을 받으려고,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안달하지 말게. 창 밖에 내리는 비한테 물어보라고. 너는 지금 누구한테 무슨 쓸모가 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냐고. 부디 자네한테 지금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만 사시게. 지금 자네가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히 재미있게 살 수 있어. 그렇게 날마다 그날 하루만 살게나. 무엇보다도 자네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말일세.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네가 말하는 자연법, 그러니까 하느님의 命에 순종하는 삶 아니겠는가?"(101~102쪽)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구절이다.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만 살라...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히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모든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란 말의, '긍정적인 마인드'의 다른 표현이지 싶다.

 

내가 자주 느끼고 어쩌지 못했던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실재가 아니라 관념이었단다.

실체가 없기론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마음은 닦을 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쓸(用) 때 빛난다.

(실체가 없어 닦을 수 없으니까~--;)

제대로 쓸 궁리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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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4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4-06-03 08:3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주 무모했다는 ㅠ.ㅠ
하여 저를 아주 곱아쥐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그 불길한 예감...
빈틈이 보이면 전 융단폭격을 당할 운명에 처해있습니다요 ㅠ.ㅠ

그러나 양철나무꾼님 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는 한 달 전 스텔라님께 욕을 바가지로 먹고(안보이는 댓글로 ㅠ.ㅠ)
스텔라님과는 영영 결별한 상태랍니다.
스텔라님...제게는 안이쁜 분이에요^^
행여 관계의 회복?? 이건 불가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모한 짖을 왜했냐면요...
"한사람을 뺀 모든 인류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한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은,
그 한사람이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화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라는...어디에서 읽은 글 때문입니다 ㅠ.ㅠ

무모한 짖을 한 저를..
이쁘게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에게 이쁨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쿠더덩~^^

고맙습니다 양철 나무꾼님~


2012-05-30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6-04 11:27   좋아요 0 | URL
님의 글들을 다시 종종 볼 수 있게 되어 '정. 말.' 기뻐요.

계속 이곳의 사람들로 인하여 맘 상하고 상처 받고 하는데,
가만 돌이켜보면,
또 제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리하여 제게 살아갈 힘을 주고 하는 것도 이곳이더군요~^^

네, 우리 서로의 자리에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면...
'왕의 남자'의 그 버젼,
너 거기있고 나 여기있고~^^
그것만으로도 때론 위안이라는 거,
님이 제게 그런 존재라는 거,
알고 계실까요?^^

글샘 2012-06-01 10:24   좋아요 0 | URL
마음은 닦을 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쓸(用) 때 빛난다...
참 좋은 말이네요~ ^^
그래서 '인연'이 중요하다잖아요.
직접적 원인인 '인'과, 간접 환경인 '연'이 잘 맞으면... 크게 쓰이는 거고 초긍정 마인드도 생기는 거고...
그게 자꾸 꼬이는 인연을 만나면... 속이 상하고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그런 거...

양철나무꾼 2012-06-04 11:33   좋아요 0 | URL
샘은 '인연'따위보다는 노력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주의일 줄 알았는데, ㅋ~.

저기 자꾸 꼬이는 인연이란 '악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흐르는 대로...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하늘바람 2012-06-03 10:56   좋아요 0 | URL
오붓한 데이트를 꿈꾸기엔 아드님이 넘 커버렸나봐요
사실 큰게 아니라 큰 척 하고 픈게지요 빨리 어른이 속박을 벗어버리고 싶을 때일테니까요

양철나무꾼 2012-06-04 11:36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의 댓글은 길지 않아도...
은근 멋스러운 거 알까요?^______^
오늘 이 댓글 참 맘에 들어요.

'사실 큰게 아니라 큰 척 하고 픈게지요'
이걸 기억하면...이해 못 할것도 없을텐데,
맨날 툴툴거리는 야박한 엄마예요~--;

jeweleye7 2013-03-03 02:23   좋아요 0 | URL
이 책 읽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어떻게 이해 하셨는지 궁금해요.
p18 "여기 입원한 환자... , 저 사람들도 세상의 온갖 정신적 쓰레기를 자기 몸에 담아서 그만큼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제 생각은 정신병 걸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외부에 의해 복잡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사람이고 그 것을 풀어 줘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이 부분의 의미를 모르겠네요. 왜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있는지... 무슨 뜻 일까요?
 

나이 마흔의 언저리이다.

공자는 '불혹'이라고 하여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난 불혹의 나이에 한참 못 미쳤어야 하거나,

벌써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아야 하는데...이도 저도 아니니, 원~--;

그렇다고 공자도 터득하는데 40년이 걸린 그 불혹의 묘를 하루 아침에 터득할 수도 없는 일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몸소 체화하여 한걸음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싶다.

 

공자와 같은 훌륭한 학자도 40년 동안 전력을 다하여 공부하고 갈고 닦아서 도달한 경지인데,

나같은 범인이 마흔 언저리라고 하여 범접할 수 없음은 어쩜 당연지사인듯 하다.

다시 말해, 나이 마흔 언저리에서 '불혹'에 이르지 못했다고 부끄러워 하고 손 놓고 앉아 있을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내 삶에 적용 익히고 체화하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서랍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이 책 이정록 산문집 <시인의 서랍>은 그런 의미에서 펼쳐들게 되었다.

하긴 이 책 뿐만 아니라, 요즘 내가 펼쳐드는 모든 책은 다 그 연상선 상에 있었다.

 

이 시인은 '불주사'라는 시로 처음 만났다.

시가 수려하다기보다는, 꾸밈이 없고 수더분해서 좋았다.

그도 우리네 사람사는 세상의 일들을 고스란히 겪고있는 듯 느껴져...수선스럽거나 호들갑스럽지 않게,

다시말해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고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문턱이나 경계 따위가 없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번엔, 그런 그의 산문집이다.

산문집은 시보다 형식적인 면만 보더라도 더 자유스럽다.

하지만, '불혹'을 '자유'와 등가(等價)로 놓기에는 기준과 방향이라는 제재가 따른다.

 

암튼, 그의 글은 시면 시, 산문이면 산문...일단 글이 뛰어나다.

하지만, 뭇사람들이(아니, 쟁쟁한 소설가들이) 그에게 소설을 쓰라고 했을 정도로, 이야기는 더 감칠맛이 난다.

소설을 쓰라는 권고에 대한 그의 대답 또한 일품인데,

"시 속에 소설을 뭉뚱그려 품어보겠습니다."

였단다.

 

             불주사

                          - 이 정 록  

 


내 왼 어깨에 있는 절이다

낭떠러지에 지은 절이라서

탑도 불전도 사라지고 없다

눈코 문드러진 마애불뿐이다

귀하지 않은 아들 어디 있겠냐만

어머니는 줄 한 번 더 섰단다

공짜라기에 예방주사를 두 번이나 맞혔단다

그게 덧나서 요 모양 요 꼴이 됐다고

등목 해줄 때마다 혀를 차신다

보건소장이 아주 좋은 거라고 해서

한 번 더 맞히려했는데 세 번째는 들켰단다

부처님도 자라는 흉터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것 때문에 가방 끈도 군대 삼년 소총 멜빵도

흘러내리지 않아 좋았다 말씀 드려도

내가 네 몸 버려놨다고 무식한 어미를 용서하란다

인연이란 게 본래 끈이 아닌가

내 왼 어깨엔 끈이란 끈

잘 건사해주는 불주사라는 절터가 있다

어려서부터 난 누군가의 오른 쪽에서만 잔다

하면 내 인연들은 법당마당 탑신이 아니겠는가

내 왼 어깨엔 어머니가 지어주신

불주사가 있다 손들고 나서려고만 하면

물구나무 서버리는 마애불이 산다

'불주사'말고 내가 아끼는 시는 '더딘 사랑'이라는 시인데,

시인 스스로가 읽고 또 읽어 건진 다섯 문장 중에 들어가는 시라는 걸 알게 되자 더욱 더 애착이 간다.

 

               더딘 사랑
                          - 이 정 록 -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암튼,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여기저기서 어머니가 무게있게 등장한다.

'불주사'란 시에서도 그랬었고,

이 '시인의 서랍'이란 산문집의 첫머리에서도 그렇다.

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 책의 1/3까지는 시인과 어머니의 대화가 선문답 같은것이 너무 재밌어서 책속에 머리를 박고 헤어나지를 못했던 반면, 나머지 2/3는 책장을 설렁설렁 바람을 일으키며 넘겼다.

그러고 보면, 그의 불혹은, 다시 말해, 그가 쓰는 글의 원천은 아무래도 어머니인가 보다.

아니면, 어머니는 모든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의 원천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母語다'라는 부분에서부터 어머니는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간다.

표준어로 구사하여, 모든 사투리는 통역이 필요한 나의 경우에도,

'농사천재'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따옴표 처리가 되어 책에 글자로 들어가 박혀 있는게 아쉬웠다.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오디오 북 같은 것이나 보이스 레코더로 따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리얼버젼으로 듣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진다.

물론 글에서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히 글쓴이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거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 또는 산문 모두 소재의 일정 부분을 어머니가 담당하고 있고,

그런 그의 글들을 읽는 독자라면, 어머니를 향하여 새록새록 솟아나는 관심과 흥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어머니는 '농사천재'일뿐만 아니라, 어찌보면 인생에 도통한 '도사'이시다.

 

가로등에서 빛이란 걸 배웠다고 했다가는 이내,

"인생 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속 그늘! 그 그늘을 잘 경작혀야 풍성한 가을이 온다고 말이여."

라며 그늘 예찬론자로 말을 바꾸지만,

그런 당신을 향하여,

"왜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고 그러세요~?"

하며 툴툴거리게 되지는 않는다.

행여 이리 저리 늘어놓으시던 감칠맛 나던 얘기들이 쏙 들어가지나 않을까 그게 조심스럽다.

조용히 멍석을 내다 펴게 만드신다.

"그늘이 짙으면, 노을도 되고 단풍도 되는 거여. 사과도 홍시도 다 그늘이 고여서 여무는 거여. 뭣도 모르는 것들이 햇살에 익는다고 허지. ㆍㆍㆍㆍㆍㆍ."

이런게 제대로 된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이라고 하겠다.

 

그의 글에선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일정 역할을 담당해 균형(=불혹)을 잡아주고 있다.

아버지의 지팡이에 새겨진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글귀가 아버지의 유언이 되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지팡이를 떠받들고 있는 걸레를 보고,

'그려, 걸레가 돼야지. 걸레는 저렇게 숭엄하지.'하는 것도 그렇고,

그가 쓰는 시는

'지팡이, 걸레, 행주, 발수건이지. 내가 쓰는 시는 이 네가지에다 주소를 둬야지. 그러다보면 시보다도 어렵다는 삶이란 녀석도 지팡이 짚으며 따라오겠지.'

라며 마음을 다잡는것도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에 다름 아니다.

 

난 여기서 지팡이의 종류와 효용에 대해서 잠깐 생각을 했다.

'걸을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짚는 막대기'를 '지팡이'라고 한다.

크게 피켈(pikel)이라고 불리우는 등산용 지팡이와 노인용 지팡이로 나눌 수 있다.

등산용지팡이는 끝이 뾰족하게 되어 있어서, 짚는 용도 외에,

계곡의 물 깊이나 설산의 눈 깊이, 낙엽의 쌓임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고,

무엇보다 설산이나 빙벽을 오를 때 발판을 만들어주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노인용 지팡이는 짚는 게 가장 큰 역할이다.

 

때문에 등산용 지팡이와 노인용 지팡이를 효용에 맞게 골라 드는게 중요하다.

등산객들이 노인용 지팡이를 드는 경우는 흔치 않으나,

개중에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꺾어 짚는 용도로도 보조적 역할만 할뿐이고,

가늠하는 역할도, 작업용 삽 또는 곡괭이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지팡이의 종류와 효용을 들먹인 이유는, 후자때문이다.

노인용 지팡이는 짚는 역할만을 담당한다.

신선이 드는 이리저리 꼬인 지팡이라면 한번쯤 멋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으려나?

미적 기능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노인이 짚는 거니 우선 가벼워야 하겠고 그리고 체중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야 하겠다.

우리나라에선 '청려장'이라고 하여 명아주라는 한해살이 풀을 잘 말려 지팡이의 재료로 사용하곤 한다.

 

노인용 지팡이를 등산용 지팡이처럼 끝을 뾰족하게 하면 짚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보통은 고무캡을 씌워서 지지면을 넓히고 마찰을 최대화하여 잘 짚도록 하는데,

사용하면서 고무캡이 닳아 없어진 것을 방치하였다가 미끄러져 넘어져 다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하겠다.

 

책의 다음 부분에서 한참, 아주 오래 머물렀다.

요즘 내 서재대문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안전거리 확보'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억지스러운지 모르겠지만, '안전거리 확보' 또한 내겐 불혹(= 미혹되지 아니함)으로 작용한다.

 물끄러미, 마음속 하늘을 들여다본다.

 누구에게나 눈물 몇 모금의 웅덩이는 있는 것이어서, 언제고 세상의 미꾸라지와 개구리는 내 안에서만 흙탕물을 일으킨다. 가슴속 하늘에는 황사 구름이 사철 부옇게 서려서, 도대체 이놈의 마음에 언제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마친단 말인가.

 하지만, 누추한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대견하고 고즈넉한 일인가. 내 마음에 안치해놓은 풍경 위에 나를 덧대어, 새로운 풍경으로 감싸 읽는 것은 얼마나 위무적인 일인가. 풍경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자에게 부단한 치유의 능력을 보여준다.

 

 오래도록 마음속 왜가리의 목덜미와 진흙 묻은 부리를 어루만질라치면, 못자리에 뜬 하늘처럼 나도 우련히 깊어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부끄러운 지난날들의 흙탕물이 고요히 가라앉는다. 마음의 앙금 안쪽에 실뿌리가 뻗는다. 부유하는 삶은 흐리다. 정처가 없다. 정처가 없으면 뿌리가 내리질 않는다. 뿌리를 기르지 않는 풍경은 힘이 없다. 바닥이 없다.

 오늘 나는 작은 거울에 입김을 불어 넣고 이 말을 쓴다.

 '물끄러미!'

 아, 저녁 같은 이 말의 촉촉함에 나를 비빈다. 내치는 것도 아니고, 와락 껴안는 것도 아니다. '물끄러미'라는 말속에는 적정한 거리가 있다. 대상이 녹아서 나에게 스며들 때까지의 묽은 기다림이 있다. 째려보는 것도 아니고 쏘아보는 것도 아닌, '넌지시'가 있다.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안쓰러운 나를 보리밥에 열무김치처럼 비비는 것. 비빔밥 옆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슴에 들이는 것!

 물끄러미, 오래 젖을 것! 풍경에 나를 덧대고, 내 안에 서려온 그늘이나 설움을 오래 문대며 들여다볼 것!(163~165쪽)

책을 통한 간접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의 그것들이 내게 깨달음을 주는 이유는...앞에서도 얘기했었지만,

그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지지고 볶고 사람사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 사는 세상의 일들을 겪은 그대로 꾸밈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내가 책을 통해 하는건 간접경험이지만,

이 시인이 하고 책에 적어내려간 것은 생생한 날 것, 직접적인 체험이어서...내게 감동적으로 와닿았던 것 같다.

 

공자같은 훌륭한 학자도 불혹이라는 것을 터득하고 체화하는데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모든 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였을때에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결과를 낳더라도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구절은 내게 '불혹'이고 '지팡이'이고,

때문에 'insure safety distance'인 셈이다.

 그러나 손길은 바로 곁에 있을 때만 유효하다. 손길이 닿아야 할 곳이 멀다면 그곳까지 손을 옮길 수 있는 것은 발길이다. 가닿아야 할 손길이 사랑의 편지이거나 책과 옷을 묶은 소포라면, 그 발길은 우표와 우체부가 대신할 것이다. 빨리 뛰어가야 할 손길이 돈이라면, 금융기관의 온라인과 체신부의 우편환이 발길이 되어줄 것이다. 빈손으로 가는 가난한 손길이라면 그 손길의 따뜻함은 다리품만이 온전히 가지고 갈 수 있다.(167쪽)

그런 후에야 '파파로티와 친구들'이나 'live like horses'따위를 들먹이지 않고도, '불혹'과 '지팡이'를 맘껏 얘기할 수 있겠다.

 

 

 

 

 

 

 

 

 

 

 

  4집 For War Child - 1996년 실황 /ABCD006
  유니버설뮤직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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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2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5-23 14:32   좋아요 0 | URL
등을 등짝이라고 표현하신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인가요?
좌우대칭의 개념으로 짝이란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부위를 구체적으로 집어주시구요.
아프신 시간대가 있는지요.
또는 그동안 안 드시던 음식을 드시는 건요.

위 내용만으론 집작하기 어려운데, 부자나 초오 쪽으로 과한 약을 드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건 우리나라 동해 해풍을 받아 말린 황태로 끊인 황태국이요~^^

2012-05-23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3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5-23 14:35   좋아요 0 | URL
위 댓글로 궁금증을 일갈 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고명, 박후...저도 덤으로 새기겠습니다.고맙습니다~^^

글샘 2012-05-23 08:54   좋아요 0 | URL
공자가 살던 당시에... 인간 수명이 40세쯤 됐을 거예요.
그러니 50이면 벌써 하느님 맙소사~(지천명)가 나오죠. ^^
지금은 100세쯤 됐으니 말입니다. 80세쯤 불혹으로 하죠~
아직 마흔이시면 '물혹'이나 조심하시고~ ㅋ

손길의 따뜻함...을 읽다 보니, 길손,이란 단어가 생각나네요~
물끄러미 보니깐 왠지...
우리가 걷는 길~ 누구나 길손이잖아요. 따뜻한 손길은 길손에게 참 큰 위안이 되겠다는...

2012-05-23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5-23 14:3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도, 약(오름)도, 손길의 따뜻함도~
'뭇'과 '최대화' 수정했습니다, 꾸벅(__)

설렘나라 2012-05-23 10:36   좋아요 0 | URL
지은이 이정록입니다.
감지덕지한 찬사와 후춧가루같은 꾸짖음 감사합니다.
이리도 유연하고 멋진 독후감이 있군요.
자신의 이야기와 책의 내용을 잘 비벼서
참기름만 치면,맛난 비빔밥이 되겠네요.
메주에 구슬끈이군요.
저는 님의 독서에 비하면, 쇠꼬리에 마른 소똥, 소똥 위에 쇠파리 정도랄까?

이정록 두손

양철나무꾼 2012-05-23 14:52   좋아요 0 | URL
시인이 직접 왕림하여 주시고, 제가 오히려 설레이는걸요~^^
비빔밥이 될 것을 짐작했었는지,
아무리 되짚어 봐도 후춧가루를 사용한 예는 발견 못했는 걸요.
맛난 비빔밥의 관건은 참기름이 좌우하는건데,
참기름만 치면 이라 하시면...한참을 더 비벼야 할 것 같고,
'막걸리에 마늘꽁에 고추장 척'이 더 가까울 것 같은데...
(마늘꽁이 뭔지 몰라 국어사전을 찾아봤습니다여.)
죄송합니다,마늘꽁을 못 먹는다는~--;

암튼, 무한 영광입니다. 꾸벅(__)

감은빛 2012-05-23 15:30   좋아요 0 | URL
우와! 정말 멋진 시인에, 정말 멋진 글이로군요!
"시 속에 소설을 뭉뚱그려 품어보겠습니다."
저 한마디에 저도 이 책을 꼭 읽고 싶어졌습니다.
바빠서 시도 소설도 못 읽고 사는 요즘.
어디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졸다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인이 직접 칭찬의 댓글까지!
역시 양철님 대단하셔요~! ^^

oren 2012-05-23 23:20   좋아요 0 | URL
지팡이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를 쭈욱 읽다보니 도산서원에서 보았던 퇴계선생님께서 생전에 쓰셨던 (신선 할아버지가 던져준 게 아닌가 싶을만큼 멋진) 명아주 지팡이도 떠오르고, '왼 어깨에 있는' 불주사와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는 돌부처에 관한 시를 읽어보니 어느새『월든』 속의 '쿠우루의 지팡이'에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든든한 지팡이 하나만 있어도 불혹 이전에 이립(而立)이라도 제대로 한번 해볼 수 있을텐데 말이지요...
* * *
쿠우루에 완전을 갈구하던 한 장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지팡이를 만들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한 요소가 되겠으나 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비록 한평생 딴 일은 아무것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완벽한 지팡이를 만들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부적당한 재료를 써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으므로 그는 재목을 구하러 즉시 숲으로 떠났다. 그가 쓸 만한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다가 퇴짜를 놓는 사이에 그의 친구들은 점차로 그의 옆을 떠났으니,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다 늙어서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늙지 않았다.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그의 결심과 숭고한 믿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영원한 젊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은 그의 길에서 비켜나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멀리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그가 모든 점에서 알맞은 재목을 찾아냈을 때는 쿠우루는 폐허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그 폐허의 어느 흙 둔덕에 앉아 지팡이를 깍기 시작했다.

지팡이의 모양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칸다하르 왕조가 망했다. 그는 지팡이의 끝으로 모래 위에 그 왕조 마지막 왕의 이름을 쓰고는 다시 일을 계속했다. 그가 지팡이를 매끄럽게 다듬어놓았을 때 칼파는 이미 북극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지팡이 끝에 쇠붙이를 달고 보석으로 장식된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을 달았을 때는 브라마 신은 수없이 잠이 들었다 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의 작품에 마지막 손길이 가해지자 지팡이는 깜짝 놀라는 장인의 눈앞에서 브라마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되어갔다. 그는 지팡이를 만드는 가운데 새로운 체계, 충실하고도 균형 잡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옛 도시들과 왕조들은 사라졌지만 그보다도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도시와 왕조들이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발밑에 수북이 샇여 있는 나무 깎은 부스러기를 내려다보았는데, 그것들이 아직도 생생한 것을 보고 이제까지의 시간의 경과는 단지 하나의 환각에 지나지 않았으며, 브라마 신의 두뇌에서 나온 한 섬광이 인간 두뇌의 부싯깃에 떨여져서 불붙은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재료가 순수했고 그의 기술도 순수했으니 그 결과가 경이로운 것 외에 무엇일 수 있겠는가?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월든』 중에서

하늘바람 2012-05-27 11:53   좋아요 0 | URL
범인이라 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어떤 범인이신가 하니 너무 비범한 범인이시잖아요.
시인의 서랍이란 말 자체가 참 이븐 거 같아요

차트랑 2012-05-29 09:32   좋아요 0 | URL
하늘 바람님 놀라시면 안되는데~^^

하늘바람 2012-06-03 10:56   좋아요 0 | URL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