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했던 대로 건강이 안 좋으셨군요.
십 수년 전에도 고생을 한 적이 있으신데,

비슷한 상황의 반복이라면, 혼나셔야 해요.

관리 소홀의 책임이 커요, ㅋ~.

 

전 요즘 김영민의 '공부론'을 다시 보고 있어요.

 

 

 

 

 

 

 

 

 

 김영민의 공부론
 김영민 지음 / 샘터사 /

 2010년 1월

 

 

인이불발(引而不發)이라고 하여, 활을 당기되 쏘지 않는 일,

즉 '알면서 모른 체하기'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것,

가려운 곳을 긁는 것,

기침을 하는 것 등은 결코 숨길 수 없다죠.

여기에 한가지 더 추가하자면,

아프면서 아프지 않은 척 하는 것이요.

왜 그러셨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心身으로다가 잘 조절하셔서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불교의 '자'와 '비'의 의미와 '내려 놓음'을 약간은 깨달은 바 있어
그동안의 님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셨다고 하셨는데,

한가지 우려되는 바가 있어서 치마폭 자랑을 해보려구요.

'내려놓음'은 님을 반성하는 의미가 아니라 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의미로 챙겨가지셔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내려 놓을려고 해서가 아니라 내려놓지 않으면 연명하기 어렵다는 말이 가슴에 '콕~!'하고 와서 박혀 버려서말이지요.

 

그래서 반야심경보다는 태허의 개념으로 접근하는게 좀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욕심의 반대 개념이라도고 볼 수 있는, 자기애는 챙겨가져야 한다는 것일테니까요.


시간은 쏜살 같이 흐른다고 하셔서 생각난건데요,

활을 당기는 것과,

잠시 숨조차 멈추는 그 '사이'와,

화살을 쏘는 것, 이 하나의 연결 동작 같지만...

잘게 나누다보면 경계가 있는 일이지요.

 

활 시위를 힘껏 당긴 후,

화살을 더 멀리 보내기 위한 잠깐의 쉼, 멈춤(止)이라고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냥 내려놓는다고 하기엔,

님의 그간 이곳에 들인 공과 애정을 부정해 버리는 꼴이 되잖아요.

또 한가지,

갑자기 생기게 된 여유라고 하여,

너무 생각에 연연해 하지 마시라는 거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생각에 연연하다가 공상으로 사상누각을 쌓지 마시고,

그저 말끄러미 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책들도 읽으시되,

그냥 본다는 느낌으로 하시구요,

컴퓨터나 텔레비젼이나 그 밖의 것들도 그냥 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맑은 날엔 해님의 고마움을 모르게 마련이지요.

가끔 해님을 향하여 땡큐도 날려주시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광합성도 한번씩 해주시구요.

 

이런 말이 님을 이곳 알라딘 서재에 마냥 잡아두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님이 계셔서 이곳이 조금 더 환하고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제겐.


소식 남겨 주셔서 반가운 마음에 몇 자 적는다는 게 길어졌습니다.

생각날때마다 한번씩  염력을 날려드릴테니,

어서 쾌차하셔서 이곳에서 웃으며 뵐 수 있기 고대하겠습니다.

요즘 제가 아껴 읽는 시 한편은 덤으로요.

               산등성이를 건너다보며

 

                                 - 이  건 청 -

 


 

지난 겨울 나는 어느 절간 요사채에

방 하나를 빌려 빈둥빈둥 놀면서

절간 건너편 산등성이를 바라보곤 하였다.

어떤 땐 하루 종일 산등성이만 건너다보기도 하였다.

산등성이 위로 구름이 흐르고,

황조롱이 같은 놈이

자작나무 가지에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별안간 긴한 볼일이라도 생긴 듯 펄쩍 날아

옆 골짝으로 사라지곤 하였다.

밤이 되면 산비탈 모두가

깜장이 되어 초롱초롱한 별을 띄워 올리곤 하였는데

어느 날 나는 산등성이 풀덤불에 무덤 하나가

버려져 있는 걸 창자내었다.

죽은 자를 거기 묻었던 사람들도

모두 늙어 죽었는지, 무덤은 잊혀지고

지워지면서 낮은 흙더미만 남아 있었다.

조그만 흙더미가 삭은 뼈를 보듬고 있는 거기서

절간 요사채에 빈둥거리는 나 사이는

영겁인 것도 같고 지척인 것도 같았는데

창 너머로 산등성이를 자세히 보면서

그 무덤이 그냥 버려진 것이 아닌 걸 알게 되었다.

가끔은 이 산에 사는 고라니가 와서 쉬다 가고

숱하게 많은 새들도 들렀다 가곤 하였는데

한낮의 고라니도, 흰 구름도 황조롱이도,

한밤 초롱초롱한 별떨기까지도 사람들이 잊어버린 삭은 뼈와 막역해져서

각각의 몸짓으로 적멸 속을 넘나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냥 산등성이처럼 건너다보이는 거기가

피안이고 화엄인 걸 알게 되었다.

 

 


왠지 이 책도 觀하는 데는 좋을 것 같아서 골라봤어요.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필 지음 / 김영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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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9-20 10:35   좋아요 0 | URL
누구에게 보내시는 글인지 알겠어요 언니의 마음이 그분께 닿길
더불어 저도 참 좋네요
제게도 와닿는 구절이 참 많아서
이건청 시인의 시를 읽다 26살의 저를 만났어요
그 때 이건청 교수님 시창작 수업에 시를 내고 칭찬에 한껏 으쓱해했거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지만 오래오래 곱씹어 즐기게도 하네요
덕분에 좋은 시 덩달아 감상합니다

양철나무꾼 2012-09-20 15:28   좋아요 0 | URL
이건청 시인은 되게 로멘티스트일 것 같아요, ㅋ~.
이제 정년퇴직하셔서 다작이시라는데...
무색케할 정도로 깊이가 느껴지더라구여~^^

우린 카카오 스토리에서 종종 만나 오랫만 아니죠? ㅋ~.
그래도 이렇게 보는 것도 반갑당~!

북극곰 2012-09-20 13:57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읽으시면 곧 쾌차하실테지요.
저까지 덩달아
(혼나는 듯도 하면서도,) 힘도 나고, 가슴도 따땃해지고, 애정도 담뿍 느끼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2-09-20 15:29   좋아요 0 | URL
잘 지내세요, 북극곰님?
오랫만이에요.
반갑다~~~~~
부비 부비*^^*

책읽는나무 2012-09-20 18:15   좋아요 0 | URL
모두 다 건강관리 잘해야 합니다.그죠?
님의 글을 읽으면서 연륜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끼고 가네요.^^
전 A형 성격 그대로 반응이 나오더라구요.ㅋ
암튼...그분도 어서 쾌차하시어 벌떡 일어나셨음 하구요.
또한 님도 건강하세요.
요즘은 건강이란 단어로 자꾸 인사를 하게 되네요.앞으로 점점 더 그러하겠죠.^^;;

hnine 2012-09-20 21:51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의 따뜻한 이 마음이 그분께 잘 전달되어 건강이 나아지셨으면 좋겠어요.

2012-10-05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낙서 - 박병철 단상집 우드앤북 단상집 2
박병철 지음 / 우드앤북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사람을 선택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눈에 반해서,

또는 얼굴이 예쁘거나 잘생겨서,

어찌하다보니 미운정ㆍ고운정 다 들어서,

등등등...각양각색의 이유가 있지만,

나처럼 남편을, 연습장에 흘려쓴 글씨가 넘 맘에 들어서라는 사람은 보질 못했다.

암튼 난 남편의 글씨체가 정말 맘에 든다.

누군가는 글씨를 뜯어먹고 살것도 아닌데,

왜 그리 글씨체에 환장하냐고 하지만...

글씨체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난 잘 알기 때문이다.

 

나랑 제법 많은 시간을 놀아주던 애인이...시험을 앞두고 공부에 용왕매진하겠단다.

어둠 속에서,

'너는 글씨를 쓰거라, 에민 떡을 썰테니...' 하는 석봉 모친을 닮아,

'시험에 붙을 때까지 절대 집에 드어올 생각 말아라~!'라고 할 재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고,

한가하고 심심한 내 시간들을 떼울 떡을 썰 기술을 전수 받아야겠다.

 

어둠 속에서 떡을 써는 기술은 옛 말이고,

요즘은 글씨 잘 쓰는 자식을 원하면, 서체 정도는 연구해 주시는게 기본이란다.

 

그래서 석봉이처럼 글씨를 써볼까,

공부에 용왕매진한다고 하니 나도 공부라는걸 해볼까,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내가 그동안 '캘리그라피'라는 용어를 몰라서 그랬지,

내가 엄청 흥미로워하는 분야이고,

또 조금만 노력하면 잘 할 자신도 있다.

 

한가하고 심심한 자투리 시간들을 떼울 떡 써는 기술로 이보다 더 딱 맞춤한게 없지 싶을 정도로...

내가 흥미로워 하는 분야다.

 

책 겉날개 앞쪽에,

마음 박병철

캘리그라피스트(Calligraphist, 글씨예술가)라고 되어있다.

 

이 책을 보면서 사석원이 생각났는데,

그림이나 글씨가 예술인건 공통점이지만,

한명은 그림을, 한명은 글씨를 주로 하는,

화풍이나 필체가 각자 다른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연상이 된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미친 색감이라고 표현하는 색감 때문인 것 같다.

색감은 내가 이들에 비해서 쫌(very much) 떨어진다~--;

 

암튼,

캘리그라피를 하든, 흉내를 내든...

내가 좋아하는 꼼지락거리는 걸 하게되는거여서...

심심한데 맞춤인...염전이나 소금밭은 공수받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내가 이 책에, 그리고 캘리그라피라는데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예술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심미안은 갖고 있지 않은고로,

마음이 이끄는대로 보고 즐기는게, 나의 감상법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 <마음낙서>이고,

이 사람 이름 앞에 붙는 호가 '마음'인가보다.

그리고 '마음을 글씨에 담은 작가'라는 수식어가 보이는데,

그 호와 수식어가 내 마음을 이끌었다.

 

일곱번째 낙서라는 마지막 꼭지는 '글씨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그의 캘리그라피에 관한 철학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글씨이야기7.

 

있는 그대로.

나의 글씨는 시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름다운 한글로 우리의 마음을 말했으면 좋겠어요.

글씨에 학문과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고 웃고 울리게 한다면

그것으로 예술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평범하지만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위대한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나의 글씨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친근하지만 가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분이 맘에 든 또 하나의 이유는 '돌맹이'를 가지고 논다는 건데,

나랑 닮아 친근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함부로 애틋하게>리뷰 ; '참을 수 없는 언어의 가벼움'

 

 

 

그의 단상들은 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굳이 차이점을 들라면,

시는 문장부호가 없는데,

그의 글들은 문장부호가 단정히 들어가 박혔다는 거다.

 

요즘은 만능엔터테이너라고 하여,

그림이나 글씨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자신의 전문분야 뿐 아니라, 넘나드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만의 서체를 갖고 있는 캘리그라피스트라는 사람이 그림과 색감도 수준급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글들도 하나같이 훌륭하였다.

 

나의 경우,

그의 글들이 좋은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나 틀을 정해놓고 절대불변의 가치인양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어떻게 정하는지에 따라 입장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다보니,

변해야 할게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말은 쉽게 하고 있지만,

그 경계와 기준을 정하는 것은 나름 소신이 요구되는 일이고,

그걸 자신만의 색이나 스타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041 용서

 

 

 

ㆍㆍㆍㆍㆍㆍ

용서가 아닌 용서를 하는 것은

내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인하여 내가

쓰레기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감춰질 것이라는 착각은

그대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손바닥 뒤집기 차이입니다

그대가 피해자 될 수 있음을 기억하세요.

 

 

 

 

 

 

 

 

 

 

 

 

'044 이런 사람', '045 막걸리 같은 사람'은 자연 사석원의 '막걸리연가'를 연상시켰다.

사석원은 거의 술을 혼자 마신다는데,

그의 글을 읽다보면 술이 독이 아니라 약인듯 여겨지는 것이 주선(酒仙)이 따로 없지 싶은데,

이분도 만만치 않다.

'162 아무도 없는 날'이 그 절정이다.

아무도 없는 날

 

혼자 술마시지 않는 방법,

술병과 건배하기

 

 

 

 

'월하독작'을 읊은 이백이 울고 갈 것 같다.

 

글씨체를 가지고 논할 깜냥은 안되고,

그림과 글 들 다 맘에 들었는데,

유독 좋았던 그림은 이거다.

 

해님은 쨍쨍한데,

마음에 비가 와 우산을 받쳐든 그림.

 

 

 

'그 사람이 웃었어요'도 좋았다.

 

 

반면, 딴지를 걸고 싶었던 글과 그림도 있는데,

 

059 멍멍!

 

나의 힘든 이야기를

너와 나누고 싶은 건

해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어주고 맞장구쳐주는 위로일 뿐,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쥐꼬리만한 마음이 필요할 뿐.

 

 

 

제목과 글과 그림이 어째 어울리지 않는다...싶은건 나만의 생각일까?

 

제목은 '멍멍'이고,

마음을 '쥐꼬리'에 비유했다.

 

086 중이염

 

내 귀에 번개,

스르륵 스르륵 파도가 밀려온다.

불편하다. 괴롭다. 집중이 무너진다.

당연한 것들이 깨지고 저항을 한다.

생활에 파고들어 거추장스럽게 한다.

아. 모든 아픔은 당사자만 아는 것,

이 작은 고통도 당해봐야 아는 것이다.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모든 아픔들에게 미안하다.(140쪽)

 

 

095 환하게

 

겉으로만 웃지 마요.

진짜 웃음은 자기 안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것.

마음까지 마저 웃어요. 그러면 좋잖아요.

그대가 더 아름답잖아요.(152쪽)

 

 

097 오직 그대를

 

나는 그대의

질투를 알고

낭비를 알고

위선을 알아도

그래도 그대 곁에 있겠습니다.

 

사랑하니까.(154쪽)

 

106 하하하

 

오, 자네의 얼굴이

분홍빛이네.

사랑이 시작됐군.

아름다워.

 

 

 

183쪽의 '삐짐'은 문맥 상 맞춤법이 틀린 것 같다.

153 마음의 여백

 

여백이란 비움과 같아.

사람을 대할 때도

한 번에 많은 걸 원하기보다는

기회와 시간을 줘야 해.

기다릴 줄 알아야 해.

그것이 사람에 대한 비움이야.

사람에게 거는 큰 기대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

마음을 비우고 채우는 것 또한

자신을 위한 것이지.

믿고 기다리는 마음의 여백이 필요해.

그것이 곧 너를 풍요롭게 하는 거야.

여백과 비움이 이와 같다면,

적당한 여백과 비움은 필수불가결이다.

어쩜,

여백은 여유와 동의어인지도,

비움은 넉넉함이랑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라면에서 인생으로 발상전환도 신선하다.

생각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 짬뽕공 같다.

 

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라면 봉지에 적혀있는 끓이는 방법을 정확하게 잘 지켜서 끓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플 때 끓여 먹는 라면'이란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난 '자다가도 번쩍'이라고 할 정도로 과일이 좋다.

눈 감고 골라도 맛난 과일을 고를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었다.

오늘 아침 과일가게 앞을 지나다가 장만한 과일은,

물에서 건져낸 것 마냥 깨지고 상하고 멍들고

게다가 맛이 없었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이쁘기도 하지요'라는 노래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며 스스로 자위를 해야 할지,

아님, 배가 고프지 않을때 먹는 라면 같은 것이어서 그런거라며 '거봐라, 쌤통~!'해야 할지 모르겠다.

 

박병철은 글씨는 마음을 대변한다고 하는데,

난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글씨로 미루어 육신과 더불어 영혼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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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9-12 20:59   좋아요 0 | URL
글씨로 육신과 더불어 영혼까지 짐작할 수 있다는 믿음, 어느 정도 수긍돼요. 제 글씨체의 변천사도 그려지고요. 페이퍼로 쓸 거리가 하나 생긴 것 같아요. 나무꾼님의 글씨체가 오롯이 담겨 있는 메모는 제 책상 유리판 아래 자리하고 있지요.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순오기 2012-09-12 22:59   좋아요 0 | URL
아주아주 오랜만에 양철나무꾼님 리뷰를 꼼꼼하게 두 편 읽었어요.
그래서 장바구니에 담았다는 얘기고요.^^
벌써 가을이 코앞에 왔어요!!

2012-09-12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9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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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언어유희를 즐기지 않더라도,

'무봤나?'의 대답으로는 '봤다' 또는 '못 봤다'가 나와주는 게 일반적이지 않겠는가?

근데 대답으로 '맛나더라'가 나와주시면,

나처럼 오지랖 넓은 아줌은 정정 들어가고 싶어진다.

'맛나 보이더라'가 맞겠지~--;

 

근데, '무'는 '먹어'의 사투리였던 것이었다.

해석을 하자면 '무봤나?'는 '먹어봤나?'의 뜻이었고,

그 메뉴는 '안동 간고등어'였다.

 

같은 언어유희를 이 책에서 또 만나게 되었다.

'와락~' 반가운 마음이 들어 얼싸안고 뽀뽀라도 날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안동 간고등어'가 맛났다는 얘기가 되기도 하는데,

글쎄~, 메뉴까지 일치한다.

"고등어자반하고 문어 무봤나? 무봤다고? 맛있제?"

 

난 좀 독특한 체질이어서,

등푸른 생선을 먹으면 온 몸에 뻘겋게 두드러기가 나 주신다.

하지만, 안동 간고등어를 한번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 맛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고,

목숨을 걸고라도 먹어주시는 맛의 향연에 빠져 주시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들녀석은 다른 많은 장점들은 놔두고,

까칠한 나의 혀만 닮았는지 어찌되었는지,

갑자기 갑자기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크러스트 에그가 먹고싶다는 둥 어려운 주문을 하여 나를 곤란에 빠트린다.

(손목 부위의 세컨드 스킨은 크러스트 에그를 만들다가 팬 가장자리에 데인 자국,

 그 아래 두드러기는 안동 간고등어(소위, 고등어 자반)를 먹고 두드러기가 난데 약을 발라 좀 가라앉은 후~.)

 

 그때 볶음밥은 짜장 같은 건 곁들여주지 않았다. 불땀이 바싹바싹 입혀진 진짜 볶음밥이었다. 대충 부실하게 기름에 버무린 볶음밥을 짜장에 비벼 먹도록 하는 요즘 유행과는 달랐다. 주문을 하면 쇠 국자로 웍을 긁고 치면서 센불에 밥을 볶는 소리가 들렸다. 숙달된 요리사일수록 그 소리는 아름다운 박자를 가졌다. 다 볶은 밥을 국자로 긁어 그릇에 탁탁,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면 행복했다. 무엇보다, 높은 온도에 튀기듯 만든 계란 프라이가 올라갔다. 흰자는 바삭하게 튀겨지고, 노른자 속은 주르륵, 흐를 정도로 익힌 완벽한 계란. 서양에서는 이걸 '크러스트 에그'라고 부른다. 얌전하게 지진 '후라이'가 아니라 흰자가 기름에 튀겨져서 부정형으로 날카로운 각도를 만들며 익은 걸 뜻한다.(217쪽)

가스불을 약불로 해서 자반 한 토막을 석쇠에 얹으시라. 이왕이면 고등어에 석쇠 자국이 나도록 꾹 눌러서 구우시라. 배기 팬을 크게 틀고 인내심을 갖고 석쇠를 돌린다. 껍질이 바삭하고 갈색으로 부풀어 오를 때까지 구워야 한다. 자글자글한 기름이라도 떨어져 불꽃이 올라오면 더 맛있는 고등어구이가 된다. 이렇게 고등어를 구워 놓으면 뱃살 쪽은 기름기가 남아 있어 촉촉하고 등살은 살집이 넉넉하다. 뭐, 굳이 이런 설명이 필요한가?

ㆍㆍㆍㆍㆍㆍ

 내가 즐겨 가는 시장의 고등어 상인은 한자리에서 오직 고등어만 파신다. 고등어 전문답게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시는데, 간혹 바깥양반 되시는 분도 한마디씩 거든다. 이게 압권이다.

 "찬물 고등어랑 더운물 고등어랑 달라요. 찬물 것이 훨씬 좋습니다. 우리도 그렇잖수? 더운 데서 음식 잔뜩 먹고 배 늘어지게 있으면 좋지 않잖수? 또 먹이에 따라 달라지는데, 전갱이랑 오징어 먹은 녀석들이 맛이 좋아요. 새우랑 메루치 먹은 건 살이 푹푹 물러요. 사람도 그렇잖수. 멸치젓, 새우젖 먹고 늘어져 있는 모양을 상상해보슈."(142~143쪽)

이런 글을 읽고도 안동 간고등어(=고등어자반)를 탐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이 책의 저자 박찬일이 멸치손질을 하듯 고등어자반의포를 물리도록 뜬 사람이거나,

필시, 미각과 후각 내지는 공감각이라 불리우는 그 둘을 동시에 상실한 사람일게다.

 

 

 

암튼, 우리의 박 쉐프 님은 병어의 맛을 

"으음ㆍㆍㆍㆍㆍㆍ구름 맛이죠."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솜사탕 맛'이라고 한단다.(19쪽)"

음~, 나는 병어를 안 먹어봤기 때문에 함구하여야 하겠지만,

내가 먹어본 것 중 무엇을 구름에 비견할 수 있을지 알겠기 때문에,

내게 구름은 '구름의 맛' 이다.

솜사탕의 폭신함, 입에서 눈 녹듯 사라지는 그런 부드러움인줄은 알겠는데,

내 구름은 솜사탕처럼 단 맛이 아니라, 비 냄새를 닮아 약간 비릿하다.

 

감정이나 정서 상태도 맛이나 냄새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난 좀 까칠하다고 할 정도로 음식의 맛을 섬세하게 표현해 내는 사람이 좋다.

음식의 맛을 제대로 표현해 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정 또한 섬세하게 표현해 낼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의미의 연장선 상에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은 동시에,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타인의 감정을 존중해준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난, 감정이나 정서 상태를 맛이나 냄새로 표현하는 그런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늘 블루 스카이에 보송보송한 솜사탕같은 흰 구름이 배경이고,

배경 음악으론 '저기 보이는 노란 찻집, 오늘은 그녈 만나는 날~ ' 이러고 있걸랑.

음... 맛으로 치자면,

달콤하고 고소한 감자전에 생무를 조금 곁들인 말랑한 포근함의 질감에,

새콤한 식초를 가미한 양념장하고 찍어먹는 달콤함을 곁들인 고소함... ^^

 

이런 거였다면,

어제는...

비가 올듯말듯 구름이 꾸무리~~(꾸무리는 구름낀 날씨의 일본어~ ㅋ)

바람도 제법 설렁설렁 풀들을 흔들고,

괜히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그게 걱정이 앞서서 그랬던 거 같아.

 

암튼, 박 쉐프 님의 책을 읽으면서도,

입으로만 맛을 느끼는게 아니라...

글에도 맛깔스러움이 배어있어서,

오감에 육감으로 맛을 느낄 수 있었으며,

공감각이나 복합적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아이스커피나 얼음을 쓰는 무엇을 할 때면 얼음에 신경을 집중한다. 마치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처럼 날카로운 예각의 얼음이, 비수 같은 날이 들어 있어야 제맛이 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른다고 다 떡이 아니고, 안친다고 다 밥이 아니다. 수정처럼 투명하고, 날카로운 얼음 비수를 가져야 진짜 얼음의 맛이 난다.(47쪽)

이쯤되면, 아이스커피의 얼음은 날카로운 예각에 신경을 쓰며 잘라줄 수밖에 없겠다.

남도의 한상 차림 밥상을 한정식으로 부르는 것이 맞느냐는 논란도 있다.한정식이란 여러 가지 요리가 차례로 나오는, 그러니까 시간 전개형 밥상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남도식으로 한상에 가득 차려 나오는 음식은 한정식으로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게 맞든 틀리든 나는 남도의 그 한상 차림 밥상에 주목한다. 아마도, 이 아름다운 공간의 배열이야말로 한식의 찬란한 창조성을 드러내는 매개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리가 순서대로 하나씩 나오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요리를 먹게 된다. 그러나 한상 차림은 먹는 이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요리를 먹게 된다.ㆍㆍㆍㆍㆍㆍ끝도 없는 순열 조합이 각자의 입안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01쪽)

이런 걸 두고 글의 맛이라고 하는 걸게다.

이런 말과 글의 성찬과 향연은 또 다시 맛보기 힘들지 싶다.

그렇다고 화려하고 강한 맛을 자랑하는 그런 글은 아니다.

적재적소에 적절한 표현을 사용하여 맛을 내는 품이,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나오는 남도의 한상 차림이나 한정식 같지 않고,

솜씨 좋은 아낙이 뜰에 정성껏 키운 재료를 갖고,

최소한의 가미를 하여 원형의 맛을 최대한 살려...

좋은 사람과 함께 담소를 나누면서 먹기 위한 것처럼

정갈하고 소박하고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이,

글의 벼리는 솜씨로 미루어,

아직 그의 요리는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요리솜씨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호남의 한식 기행은 수직적인 변화를 가진다. 저 남도의 끝이 더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맛이라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맛은 유순해지고 슴슴한 재료의 맛을 강조한다. 담양의 밥상에서는 그 온후하고 웅숭깊은 자연을 보여준다. 갯것과 들과 산의 물산이 고루 섞인 밥상은 천천히 당신의 혀를 어루만진다. 그 넉넉한 밥상을 받아 든 고가의 사랑채 바깥으로 바람이 건들 불어 대나무 잎새가 흔들리는 광경이라도 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102쪽)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이, 아슬아슬하여 묘한 쾌감을 불러온다.

 

부두에 매어둔 배들이 심상치 않은 밤바람에 쓸리며 우드득 삐걱, 관절 꺾는 소리를 냈다.(105쪽)

이런 문장은 유순하고 슴슴하고 온후하고 웅숭깊다.

"양양 사람들은 김치를 산에 묻어. 김치를 꺼내려면 아버지가 끄는 리어카를 타고 산에 가는 거야. 두어 해 이상 묵은 김치가 그 산에 있어. 산이 김치를 익혀. 여름을 여러번 넘겨도 김치는 짱짱해. 코가빨갛게 얼어서 꺼내온 김치를 썰어 먹는거야. 한 겨울에는 김치에 살얼음이 얼어서 엄마가 부엌칼을 대면 서걱서걱, 소리가 나. 아버진 김치도 나오기 전에 그 김치 써는 소리에 벌써 소주를 한병 마셨을 테고."(108쪽)

이런 문단은 또 어쩔 것인가 말이다.

이런 문단을 보고 있으면, 글 만큼 말도 맛깔나게 하리라 내가 보증할 수 있겠다.

귀신 같은 글맛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겠다.

기막힌 김치 맛을 아는귀신이 어쩌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듯,

난 꿈에서라도 양양 땅의 김치가 묻혔을 산들을 누벼보련다, ㅋ~.

 

날은 따스해서 바다에 군불이라도 지핀 양 가물가물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그야말로 술 욕심이 도도한 늦은 봄이었다.(127쪽)

그의 글이나 음식도 충분히 도도해도 좋을 것 같은데,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아슬아슬 하지만 경계 넘지 않는다.

 

말도 살찌는 계절이다.

나는 박쉐프 님처럼 맞춤할 재주는 없으니,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넘치는 것을 택할 것 같다.

넘치면 덜어내고 나누면 될테니까 말이다.

 

옛날에 부산국제영화제가 보고 싶어,

부산에 가고 싶다, 또는 버섯만두가 먹고 싶다~

이런 페이퍼를 썼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의 박 쉐프 님은,

그리하여, 부산에 조르지 않는 애인이나 묵은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 하고 빌게 되는 것이다. 우울할 때면 기차를 타고 훌쩍 들르고 싶도록ㆍㆍㆍㆍㆍㆍ.(148쪽)

이러고 제대로 염장을 질러주신다.

박 쉐프 님이 염장을 질러주신 음식 중 제일 혹하는 건 이것이다.

앞서의 음식들은 정말 맛있다기보다 부산의 정취에 흠뻑 젖어보는 기본적인 성지순례에 가깝다. 진짜 맛은 복국이나 돼지국밥 같은 국물 요리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이 좀 든, 그래서 부산의 맛에 산전수전이 밴 어른들은 - 특히 남자들은 - 열에 일고여덟은 복국을 거론한다. 술 좋아하고 거친 부산 사내들의 호쾌한 음식이 복국이 아닐까 싶다. 해장으로 한 그릇, 그리고 다시 소주에 한 그릇. 그러고 보면 부산은 해장국이 유독 발달했는데, 해운대 시래기 해장국이나 대구탕은 이미 서울내기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147쪽)

그렇다고 박쉐프님이의 글과 음식을 '맛깔스럽다'라고만 표현하긴 약간 아쉽다.

왜냐하면 나름대로의 소신과 철학이 엿보이는 이런 글들 때문이다.

그들은 변변한 장비도 없이 오직 랍스터를 잡기 위해 수심 40미터의 심해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잠수병으로 장애를 얻는다. 그들이 랍스터 한 마리를 건져 올릴 때마다 받는 돈은 고작 3천원. 달의 뒤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궁금해하는 감상적인 이는 많아도 지구의 뒤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들 모른다. 제비집을 채취하기 위해 바닷가 벼랑을 기어오르는 중국 남부 해안가의 초라한 어부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의 하루 벌이가 랍스터 하나 값이 안 되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다. 지구 뒤편에서는 늘 그런 식이니까.ㆍㆍㆍㆍㆍㆍ

내가 아는 한, 랍스터를 처리하는 칼잡이들은 그 회를 먹지 않을 것 같다. 때로 요리사들도 그럴 때가 있다. 재료가 생명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달의 뒤편 대신 지구의 뒤편을 생각학도 하는 것이다.(181쪽)

그의 마을에서 팔리는 소박한 초콜릿은 모두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카카오와 설탕, 부재료를 쓰고 있다. 비록 전체 시장에서 매우 미미한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런 작은 움직임이 언젠가 소비자들을 각성시킬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그래, 낙관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긍정의 힘으로 믿는 것이다.(195쪽)

내가 삶은 실재라는 둥, 그만큼 가열찬 거라는 둥,

해도 맨날 '메리 베리 해피'해가며 긍정 마인드를 외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내게 이 문장을 돌출시켜 들이댈 것이 틀림없다.

그래, 낙관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긍정의 힘으로 믿는 것이다.

 

 

책의 편집, 교정 상태가 좋다.

그래서 흠 잡자면~,

 

290쪽 밑에서 다섯째 줄-

달콤한 향 내신 비린내가(X),

달콤한 향 대신 비린내가(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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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6 15:12   좋아요 1 | URL
훗 이렇게나 꼼꼼하게, 박셰프님 명문장 진열이라니, 이 글을 읽은 사람이 어찌 이 책을 안 사고 배기겠어요..ㅎㅎ
물론 저는 이미 읽고 있습니다만!
오랜만에 댓글 남겨요. 양철나무꾼님...^^

양철나무꾼 2012-09-11 11:18   좋아요 1 | URL
ㅎ,ㅎ...넘 꼼꼼해서 좀 지루하죠?

안 사도 배길 수는 있죠, 안 읽고는 배기기 힘들겠지만...ㅋ~.
선물 받는다던가,
도서관에서 빌려읽는다던가,
함 말이죠, ㅋ~.

섬님이 읽으시니까 어떻던가요?
제가 리뷰를 안 읽고 못 배기게 쓴게 아니라,
우리의 박쉐프 님이 안 읽을 수 없도록 맛깔스럽게 쓴거죠?^^

감은빛 2012-09-11 11:42   좋아요 1 | URL
무봤나? 지기제(죽여주게 맛있지)?

아, 갑자기 고향말을 들으니,
어린 시절 뛰놀던 산과 계곡이 떠오르네요.
어릴 때, 계곡에서 가재를 잡아 구워 먹었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맛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딱 그 맛이 떠오르네요.

양철나무꾼 2012-09-11 11:54   좋아요 1 | URL
언제 감은빛님 본토 발음으로 함 들려주세요, ㅋ~.
잘 지내시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재료를 가지고,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요리를 만든다.

 

 

이 말을 나의 음식에 관한 신조대로 바꾸면 이쯤되겠다.

최상의, 가장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원형에 가깝게 쓰되,

최소한의 가미를 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을'이기 때문이다.

요리의 고수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입이 짧아서 그런가 아무리 먹고싶어서 음식을 만들다가도,

음식 냄새를 너무 맡거나 하면 정작 먹을 수는 없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9월의 첫날 아침,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이 책을 읽는다.

아무리, 천고마비의 계절이라지만...

바디는 함부로 살찌울 수 없고,

우리 소울(=서울)이나 함께 살찌워 봅시다, 들~!

 

 

노래는 잔잔하니 청명한 가을날 아침에 듣기 좋지만,

가사는 곰곰 들어보면,

좀 청승 맞은 듯~!

반면 이곡은 경쾌한 것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 책을 몬~ 읽게한다.

곡에서는 9월 다 가거든 그때 깨워달라는데,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면서라도 이 책을 꼭 읽어주셔야겠다.

왜냐구?

이만한 서울 푸드(soul food)도 없으니까~.

 

 

근데,

암만 생각해도,

난 말도 아닌 것이,

어쩔려고 이런 책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맛깔나면 여기서 멈출 수도 없고,

어쩌란 말야~--;

 

 그렇지만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조연의 존재가 좋은 영화를 만들곤 한다. 모든 배우가 송강호이기는 어렵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이문식이나 유해진도 나오고, 김수미도 있어야 영화의 소소한 맛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그런 캐릭터의 맛이 바로 신맛이고 쓴맛이다. 신맛은 혼자서 맛의 캐릭터를 드러내지 않는다. 순수한 신맛은 매우 고통스러운 화학적 돌출이다. 신맛은 단맛이나 짠맛과 어울려 놀라운 맛의 두께를 마련해낸다. 생각만 해도 혀끝에 침이 고이는 묵은 김치나 냉면의 시원한 동치미 육수도 딱 그런 맛이다. 신맛의 예각적 맛을 짠맛이 든든히 잡아준다. 우리 혀는 매우 둔감하고 이기적이며 감정적이어서 몇가지 맛의 복합성을 화학적 배합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매우 주관적으로 반응하는데, 똑같은 신맛이라고 해도 짠맛의 배려가 없으면 어떤 경우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 맛있는 군만두를 식초에만 찍어 먹는다고 해 보시라.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간장과 배합해서 쓰면 신맛의 아슬아슬한 각도가 슬쩍 눌리면서 입맛을 돋워주는 신비한 미각으로 변화한다. 물론, 맛이란 게 혀로만 설명할 수도 없다. 혀도 정신의 지배를 받아 감각의 층위가 달라진다. 기분이 좋을 때, 화가 났을 때 혀의 반응이 모두 달라진다. 아버지에게 화풀이하느라고 일부러 짜게 한 것이 아니라, 혀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기능 이상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랑하면 디저트가 유독 맛있는 것은 혀에서 단맛을 느끼는 미각돌기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8~9쪽)

 

"인생이란 한 번 사는 것, 즐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 인생의 쓴맛도 때로는 단맛과 만나면 기막힌 맛이 된다구. 초콜릿처럼 말이야."(10쪽)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그의 글 맛이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보조멈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그의 전작들을 슬금슬금 장바구니에 담는다.

 

글이 어찌 그리 맛깔스러운가 했더니,

'기자로 일하던 중 이탈리아 영화에 매혹되어 무작정 이탈리아 요리학교로 떠났다'라고 책 날개 안쪽에 적혀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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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9-01 12:37   좋아요 0 | URL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는 것에 정말 동의해요 입맛을 자극하는 맛들 거기에 더해지는 추억은 오래가지요.
멋진 추억을 선물을 입맛에 손맛을 가졌다면 그리고 선물할 수 있다면
요즘들어 늘 제 음식이 맛없다는 가족들때무ㅡㄴ에 골머리 중이라 흑흑

양철나무꾼 2012-09-11 11:22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 님, 요즘은 어떠세요?
모쪼록 뱃 속의 꼬물이를 생각하여 암거나 자알~ 드세요. ㅋ~.
나도 참~, 먹을 걸 주지도 않음서 잘 드시란다~~~^^

이쁜 수제 비누의 솜씨로 미루어 보건데...
님의 음식솜씨도 좀 짱일듯~!

mira 2012-09-02 19:45   좋아요 0 | URL
저도 주말에 이책 금방끝내고 리뷰를 어떻게 맛깔스럽게 적나 이작가의 책을 읽었을때 느꼈던 맛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지 고민하고 있어요

양철나무꾼 2012-09-11 11:23   좋아요 0 | URL
mira-da님, 반갑습니다여~^^

지금쯤 리뷰 올리셨으려나?
님은 어떻게 맛깔스럽게 표현했을지 보러가려구여, ㅋ~.
 
받아들임 -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
타라 브랙 지음, 김선주.김정호 옮김 / 불광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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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바로 전에 읽은 '화담집'의  연장선 상에서 읽게 되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모든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의 '공(空)'도,

자연과 하나됨을 강조하는 무위자연의 '도'도 집착을 버리고 비워내라고만 하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얘기해 주지 않았었다.

 

우연히 읽게된 화담집에서,

'공(空)'도 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고 보는 '태허'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고,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책이 마음챙김(mindfulness)에 관한 이 책 '받아들임'이다.

 

원제 'Radical Acceptance'는 '받아들임'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책 표지의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소제목이 더 나를 사로잡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용어를 명확하게 짚고 갈게 하나 있다.

ㆍㆍㆍㆍㆍㆍ,고통(pain)이 반드시 괴로움(suffering)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 붓다는 우리가 경험에 연연해하거나 저항할 때,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원할 때 괴롭다고 가르쳤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159쪽)

이 부분은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모호하다.

'마음챙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pain과 suffering에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통이나 괴로움 등 뜻이 모호한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pain과 suffering이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게,

pain이 육체적 내지, 정신적 고통이라면 suffering은 마음의 고통 정도로 해석되는게 낫지 않을까 말이다.

 

한동안 이 서재의 제목을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나서다'라고 했을만큼 'mindfulness=마음챙김'이 내겐 화두 같은 것이었다.

우연히 '화담집'의 '태허'를 만났고,

'태허'의 '멈출 지(止)'의 연장선 상에서 이 책 '받아들임'을 읽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마음을 어쩌지 못해 힘들어 할때면,

어떻게 해주지 못해서 안쓰럽다고 하시면서...그냥 바라보라고 하셨던 분이 계셨다.

그땐 그말 뜻을 이 책의 그것들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그냥 서운해 하기만 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말뜻을 어렴풋이 깨닫겠고,

그러고 나니까,

그동안의 서운함이 다 소급되어, 위안이 되는 것이다.

 

암튼 서화담의 멈출 지(止)에서 받아들임의 멈춤으로까지,

'받아들임'의 그 고통과 괴로움을 넘나드는 선문답과 깨달음이 아슴아슴 눈물겹다.

 

이 책에서처럼 '받아들임'의 전제 조건으로 일단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걸 이렇게 적고 있다.

진실에 의해 불타는 것보다 도망가는 것이 더 나았다. 자신이 나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것보다 도망가는 것이 더 나았다. ㆍㆍㆍㆍㆍㆍ우리도 로라처럼 대체로 그것을 피하는 방법을 안다. 반면 멈추는 일은 두려울 수 있다. ㆍㆍㆍㆍㆍㆍ

  다음 치료회기 때 나는 로라에게 멈춤의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내면적 힘의 자리에서 용과 대면하는 걸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두려움과 분노가 북받칠 때, 그녀는 밖으로 향하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내면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고통을 만났을 때 소리치거나 뛰쳐나가는 대신에 멈출 수 있다면, 현명하게 대응하도록 이끌어줄 내적 힘을 발견할 것이라고 그녀에게 일러줬다. (101쪽)

 

멈추는 게 힘든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니...내가 간과한 것은,

단지 멈추는데는 '좋고 나쁘고'의 판단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판단이 개입될 필요가 없으니, 감정 또한 개입될 필요가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멈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투우에는 피신과 회복의 장소로서 멈춤과 아주 유사한 것이 있다. 사람들과 황소가 싸움 중에 경기장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안전구역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황소는 거기서 기운과 힘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장소와 내면의 상태는 케렌시아(querencia)라고 불린다. 황소가 흥분하여 대응하는 한, 칼자루는 투우사가 쥐고 있다. 그러나 황소가 케렌시아를 발견하면 기운을 되찾고 두려움을 잊는다. 왜냐하면 황소가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멈추어 받아들인 다음, 마주하게 되는 것이 '조건없는 친절'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까지만 받아들이고 '예스'라고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노'를 날려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닌 것이다.

내가 예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두렵기 전'까지인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조건없는 친절로 경험을 마주하는 특정 순간에 균형감각이나 회복 탄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는데, 이때 예스를 시도하게 되면 두려움에 함몰될 수도 있다. 이때는 친구의 위안을 구하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처방된 약을 복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당분간은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것에는 "노"라고 말하고, 우리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만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자비로운 대처법이다. (128쪽)

 

여기서 '예스와 노'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뭐가 어려울까 싶지만,

이를테면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것에 '노'라고 말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우리가 하려는 작업이, 그렇게 자학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라는 걸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욕구하는 자신에 대한 보상을 음식으로 하려고 탐식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위로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하는 자기를 벌주려고 자신의 몸이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사람, 도 있다.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애당초 우리를 중독으로 몰고 간 사랑에 대한 갈망과도 단절되고 만다.

 

그녀는 강한 열망을 느꼈을 때 냉장고로 직접 가는 대신 자신의 스폰서에게 전화를 했다. 이 방법은 내가 '보조 멈춤'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을 함께 살펴보고,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선택지들을 탐색할 수 있었다.(210쪽)

  갈망과 과식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사라는 자신을 중독으로 치닫게 했던 고통스러운 자동반응의 연쇄를 차단했다.OA에서처럼 그녀가 음식을 대체물로 삼아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틀을 깨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욕구하는 자기의 존재를 용서하고 수용하는 것이 사라의 변신을 이끈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비록 갈망이 일어날 때 의식적으로 용서하고 내려놓기를 게속해야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책망하기를 멈췄을 때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그녀의 능력은 더 이상 엄청난 수치심 앞에 무릎 꿇지 않게 되었다.(213쪽) 

'보조멈춤'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긍정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알라디너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갔을지도 모르는,

중증의 질환으로 나도 한동안 고민했었다.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이 쌓여 책을 이고 살게 생겼는데도,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사들였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 분야는 수명이 짧다는 구실이 있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종의 병이었다.

그때 그 분은 자처해서 '보조멈춤'이 되어주마고 하셨다.

 

나의 책에 대한 탐닉 또한,

정서적 결핍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라...

지독한 중독행독, 적어도 신간을 보면 마음이 동하는 것까지는 여전히 지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과 이 과정이 의미가 있는 것은 ,

그런 욕구가 계속 일어난다고 해도,

그리하여 설사 책의 구매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고통이 반드시 마음의 괴로움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욕구나 갈망을  제한할 때 우리는 괴로워 하게 되지,

그저, 멈춰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어떤 제약이나 제한을 느낄 것도 없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찌하면,

'보조멈춤'을 자처한 분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난 그걸 이 한 구절로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안는 자이며 안기는 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욕구라는 것 자체가 선악의 판단 대상도 아니거니와,

지금 이 순간 보조멈춤을 자처했다고 하여,

내내 '보조멈춤'으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라는 법도 없다.

우리의 욕구가 복잡다단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욕구나 갈망에 있어서는 내가 '보조멈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안는 자와 안기는 자 모두 사랑의 의식으로 녹아든다.(302쪽)

 

이 책 전체를 통하여, 내게 가장 큰 용기를 준 건 아무래도 이 구절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원죄를 타고나는 것과 달리, 불교에는 원죄를 타고난 인간이라거나 본래 사악한 인간이라는 관점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남에게 해를 끼칠 때 그것은 우리가 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다.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의 삶과 이어져 있고, 집착과 미움이 더 많이 소외와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진실을 모른다는 뜻이다. 무지하다는 것은 의식의 순수성과, 우리의 근본적 선을 표현하는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 안에 근본적 선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347~348쪽)

사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다...이러면 아무래도 세상을 좀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무지하다고 해서 모두 다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배워고 깨쳐야 한다는 중압감이 뒤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으로 난 '학습'을 꼽고 싶다.

답습만 하게 된다면 그건 모방이지만,

학습을 통하여 분명히 좀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암튼, 나의 이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엘리엇(T.S. Eliot)의 극본『칵테일파티』를 인용하는 것으로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알고 있던 순간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후로 변했다ㆍㆍㆍㆍㆍㆍ.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매번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을.(370~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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