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의 서울연가
사석원 지음 / 샘터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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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드셨는데요?"

"아침엔 빵 먹고요, 점심엔 김치찌개 먹었는데요."

'에엥~?@@'  애써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내 허벅지를 꼬집어서 분명 보랏빛 멍이 들었을게다.

"아니, 뭘 먹었는지가 아니고요, 뭘 드셔서 허리가 아프시다면서요?"

"아하~? 네에..."

같은 한국어를 쓰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요즘은 어려운 의학용어를 사용하는게 아니라 일상용어를 사용하는데도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경험할 때가 있다.

 

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소위 서울 토박이.

부모님도 서울 분이시고, 친가 ㆍ외가 다 서울이어서 사투리가 섞일래야 섞일 새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쓰는 말이 표준어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하지는 못하는데 '서울 사투리'라는 것도 있다고 해서이다.

암튼 서울 사람이면서도 서울 말씨의 특징이랄까, 속성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사석원은 그걸 이렇게 정리해주는데 제법 명쾌하다.

 50년 전쯤의 한국영화를 보면 배경이 되는 풍경이나 사람들의 옷차림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고 말투도 확연히 달라 매우 생경한 느낌이 든다. 특히 여인들의 말씨가 그렇다.

  원래 서울 여인들은 수더분하기보다는 깔끔하고, 푸짐하기보다는 야무진 느낌이 풍겼다. 꼭 조여진 버선발의 사뿐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잘 씻어서 껍질을 깎아놓은 생밤알 같다고나 할까. 곱고 사근사근한 말씨에 깍듯한 예의범절을 갖춘 서울 여인들. 알뜰하면서도 부지런하고 때론 지나치게 경우가 밝아 다소 차가운 인상을 풍기기도 했던 서울 아낙네들. 그녀들의 말은 졸졸졸 물소리같이 맑고 명랑했다. 서울 여인들은 비교적 말이 많고 빨라 받아 적기가 힘들고 힘을 빼서 발음해 억양에 변화가 적어 타지인들은 구별하기 힘들다고 했다. 또한 도란거려 무슨 재미난 소설 읽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랬던 서울 여인들의 토박이 말투가 지금은 오래된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말투는 전국 팔도가 비슷비슷해졌다. 모두 같은 고향 출신인 듯 엇비슷한 음색으로 말을 한다(260쪽)

그의 이 글을 읽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었는데,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난 목소리가 엄청 컴플렉스이다.

이젠 아들이 제법 커 그런 일은 없지만, 환자를 앞에 두고 어린 아들과 응급 상황일지도 모르는 전화 통화라도 하려고 하면, 대부분의 남자 환자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애인'이랑 통화하냐며 관심을 보인다.

내 말씨가 곱고 사근사근하다 못해, 다정다감해서 애교가 뚝뚝 떨어진단다는 거다.

이런 목소리의 컴플렉스가 내게 주도적으로 나서서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습관을 만들어주어, 그나마 일을 하는데 있어서 플러스로 작용한다고 자위하곤 했었는데...사석원의 글을 읽고보니 나만 그런게 아니고 전반적인 서울 여인들 말씨의 특징인가 보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컴플렉스'로 여길 것까지는 없었을텐데 말이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사석원이 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겐 의의가 있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가 40년이 넘게 몸 담고 살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는 서울을 좀 자세히 알아보자는데에도 의의가 있다.

 

사석원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최북'과 마찬가지로 손철주를 통해서였다.

그 후 사석원의 그림과 글들을 꾸준히 접했다.

그림이야 내가 좋다고 설레발을 치던 그런 풍의 그림인 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글은 조각글로만 접했던게 고작이었기에 그의 문체나 작풍에 대해서 느낄 사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 글을 이렇게 맛깔나게 쓰는 줄 미처 몰랐다.

그림이 단정하고 깔끔하지만, 다정하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그런 여운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인데 반해,

글은 이렇게 저렇게 눙치고 엉너리 치며 수작을 부리는 품이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요번의 것은 그림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뭐랄까, 질펀한 느낌이 드는 것이,

그의 책에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화류계에서 '쫌' 놀아본 한량의 냄새가 풍긴다고 해야 할까, ㅋ~.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이제 옛말인가 보다.

이 책은 처음 맛집 소개로 시작하는 듯 하다가는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듯 패션감각을 자랑하는 듯 하다가, 그림이면 그림, 글이면 글, 음악이면 음악, 두루두루 출중하여 나같은 凡人의 입장에선 마냥 부러워만 하다가 날 새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낱말로 '인복'쯤을 들 수 있겠는데, 그 인복이란 건 이 밑의 글에도 나오지만 상호적인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많이 지어야 나도 복을 많이 받는 것이고, 같은 상황을 놓고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행복하다, 행복하다' 하면서 한번 더 미소 지으면 행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행복이나 불행은 쪼개진 사과처럼 확연히 나눌 수 있는 별개의 것도 아니지만, 혼자서 다니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행복한 순간, 또는 불행의 정점을 치는 순간 방심한 틈을 노린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아마도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나 봐요!" 내 인생이 남들에겐 부러울 정도로 얘깃거리가 많고 재밌게 비쳐진 것 같다.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감히 말하고 싶다. 삶이란 게 뚜렷한 경계가 있어 행복과 불행이 쪼개진 사과처럼 확연히 나누어져 다른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같은 상황이라도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될 수도 있고 추억이 될 수도 있고 회한이 될 수도 있다. 서울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겐 사랑의 도시고 누군가에겐 끔찍한 비정의 도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자의 몫이다.(9쪽, 서문 중에서)

그렇다면...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불행 대신 행복을, 회한 대신 추억을, 비정함 대신 사랑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불끈~! 

 

인복이 상호적인 것이니까 복을 많이 받으려면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말로 시작했는데, 이 사람의 그림 재주야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어렸을때 고흐 도록을 보고 꾸준히 모사를 했을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글도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꾸준히 독서를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종묘'를 언급하면서 최근에 쓰인 소설인 '은교'를 언급하는 것은 단적인 예이다.

음악 또한 중학교때 클래식 연주회를 쫒아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런 모든 감성이 쌓이고 쌓여 오늘 날의 사석원이란 사람이 만들어 지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오감을 열고 열정적으로 공감하려 하는 노력, 물론 본인 나름대로는 치열했겠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충분히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삶은 제대로 즐기는 자의 것이다.

ㆍㆍㆍㆍㆍㆍ사춘기의 지적 욕구 때문인지 아니면 겉멋이 들어서인지 고전음악엔 문외한이었던 중학생의 나는 국립교향악단의 연주회를 6개월간이나 정기권을 끊어 빠짐없이 남산 국립극장에 가서 관람한 경험이 있다. 당시 지휘자는 홍연택이란 분이었고 작은 망원경을 준비해 열심히 연주와 지휘하는 모습을 관찰했었다. 그 덕인지 지금도 틈만 나면 고전음악의 향기에 푹 빠져 지내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222쪽)

('커피, 치명적 유혹'의 '홍연택 커피-블랙 앤 스위트 블랙'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참 재밌는 분이다.)

 

암튼, 사람을 기죽게 하는 그의 내공은 음식으로 시작해, 그림, 글씨, 음악에만 국한 되지 않고 급기야 건축에까지 팔을 뻗친다.

샘터는 본래 서울대 도서관 자리. 그 앞으론 개천도 흘렀고 일명 미라보다리도 있었다. 샘터 사옥은 고 김수근 선생의 작품. 선생의 명성답게 명작이다. 담쟁이가 건물 전체를 덮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현재는 선생의 제자인 승효상 선생이 부분적으로 개축을 하고 있다.(119쪽)

난, 불광동 성당을 보고 자랐다. '기도하는 손'모양의 건물은 김수근이 누군지 모르던 그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나에게 영감과 은총을 주었다. 그러고 보면 좋은 작품은 명성이나 이름으로 얘기하는게 아닌거다.

그가 하려는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의도하는 바가 충분히 나에게 전해졌다고 믿고 싶다.

난 '불광동 성당'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춘천 어린이 회관'을 사랑하여 날 따뜻한 날 걷기를 즐긴다.

 

나는 사석원의 그림들을 애정해 마지 않지만,

혹자들은 그의 그림을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라며...다시말해, 시류나 인기에 너무 편승한다고 폄하한단다.

그 혹자들을 향하여 축하카드가 됐건 땡큐카드가 됐건 마음이 담긴 카드를 보내거나 받고 감동 받아 본적이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마음이 담긴 카드를 보내거나 받고 느끼는 감동이야말로, 이 춥고 모진 세상을 건너갈 수 있는  따뜻한 힘과 위로라는 걸 말로 설명해서는 느끼지 못할테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의 그림에서 따뜻함과 위로를 읽고 two thumb up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그의 그림 자체가 얽매임 없이 자유로워 맘껏 상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광의 그림을 향하여 저속하다며 평가절하하는 이들로부터 그림을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가 제도권미술 같은데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만큼 기초가 탄탄하고 떳떳하며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론, 인연을 바라보는 중광의 시각을 나름 해석한 그의 시선도 재미있다.

ㆍㆍㆍㆍㆍㆍ그의 그림은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다. 경계를 태연하게 넘나드는 경이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무아지경에서 일사천리로 그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제도권 미술계에선 중광의 작품을 저속하다며 평가절하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는 의심이 들었다.

  중광은 2000년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괜히 왔다 간다'였다. 그리고 2년 후 입적했다.

  '인연이 있어 괴롭고, 인연이 없어 괴롭고, 만나도 괴롭고, 헤어져도 괴로우니 인연이란 괴로움이 얽힌 그물인가?'(137쪽)

인복과 노력과 실력과 더불어 그를 남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자유로운 상상력.

며칠전에 일본에 놀러갔다온 친구가 기념품이라며 젓가락을 보내줬길래,

내가 '머리에 비녀 대용으로 꽂고 다니다가, 국수나 라멘을 만나면 후루룩, 찝짭~먹으라고?'해서 웃었었는데,

사석원은 비녀를 이렇게 멋드러지게 해석한다. 비녀를 가지고 함부로 농담을 하면 안되겠다, ㅋ~.

  비녀는 순결과 절제의 상징이랄까, '나는 임자 있는 몸이니 넘보지 말라'는 듯 육체의 문에 빗장을 지른 것이다. 단호하고 애틋한 의미다.(149쪽)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글이 상상력 만으로 쓰여지진 않았다.

기본기 또한 탄탄하며, 시어를 잘 벼리는 여느 시인이 쓴 시보다 더 아름다운 언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더불어 웅숭깊다.

생각이 넓다는 건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 같은 것으로, 멍석을 넓게 깔아 상대가 그 멍석 안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의미하며,

생각이 깊다는 건 자기 안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속 깊음을 얘기하는 거란 얘기를 들었다.

 

그의 실물을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나도 사석원처럼 나이 먹을수록 사물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웅숭깊은 눈을 닮고 싶다.

종로②

종묘

ㆍㆍㆍㆍㆍㆍ이곳은 노인들을 위한 욕망의 공간이다. 박범신이 소설 《은교》에서 말했지. "젊음이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늙음도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맞다! 노인의 욕망은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그냥 자연일 뿐이다. 종묘공원은 어쩌면 젊은이들보다도 더 뜨거운 노인들의 욕망이 몸부림치며 몸살을 앓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많지 않기에. 절망할 정도로 외롭기에.(196~197쪽)

마지막으로, 서울에 40년을 넘게 살았으면서도 서울의 지리를 몰라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할라치면 길을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이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나 해외에서 온 친구들에게 서울 안내를 하기 위해 내가 외운 레파토리는 한 곳이다.

인사동. 장소가 그리운건 그곳의 사람이 그립다는 그의 논리대로라면, 난 누군가 그리울때면 여러곳을 기웃거릴 것 없다. 무조건 인사동 한곳이면 충분하겠다.

  장소가 그리운 건 그곳의 사람이 그립다는 것.ㆍㆍㆍㆍㆍㆍ

ㆍㆍㆍㆍㆍㆍ지금 바람 부는 고은초등학교 담장엔 후배들이 그린 그림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ㆍㆍㆍㆍㆍㆍ학교 앞엔 벽화도 있다.《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타일로 만든 작품이다. 그래 맞다. 진실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지.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지. 지금 서대문도서관 자리는 얼룩 젖소가 풀을 뜯던 목장이었다. 여긴 우리의 영토였는데. 수풀 무성한 언덕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친구들은 없다. 여름이면 무악재에서 아카시아꽃 따 먹던 동무들, 그 순수한 눈망울들, 우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내 우산이 힘없이 젖혀졌다.(212~213쪽)

 

이제 봄이다.

태어나고 40여년을 자란 서울을, 이리저리 산책이라도 다니며 맘껏 즐겨야 겠다.

만끽하여야겠다.

MP3에 이런 음악 한곡 정도 담아서 귀에 꽂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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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3-14 04:32   좋아요 0 | URL
서울은 전국에서 재개발 아주 많이 하는 손꼽히는 곳이니
길이 늘 달라져서
길을 헤맬 때가 잦을밖에 없지 싶어요.
그래도 봄마실 즐거이 다니셔요~

mira 2013-03-14 15:37   좋아요 0 | URL
요즘 인사동은 너무 원색적이예요. 예전 인사동이 더 좋았었는데 말이죠 ㅎㅎ
 

내가 최북을 알게 된건 손철주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를 통해서였던것 같다.

 

최북과 반 고흐는 둘 다 '미치광이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반 고흐는 "새로운 화가를 세상은 광인 취급한다. 내가 돌아버릴수록 더욱 진정한ㆍㆍㆍㆍㆍㆍ"라고 했다. 칠칠이 치북도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돈 보따리 싸들고 와 거드름 피우는 고관에게는 엉터리 그림을 던져줘 희롱하고 득의작을 몰라주면 박박 찢었다. 두 화가는 자신의 미친 짓이 곧 "지독하도록 말짱한 세상 때문"이라 했다.

거기서 최북을 조선의 반 고흐라고 설명해 놓았었지만, 고흐에 대한 자료가 넘쳐나는 것에 반해 최북에 대해서는 너무 알려진게 없었고, 이런 저런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심지어 생몰연도 또한 '칠칠은 사십구'해서 사십구 세라고  알려진 곳도 있지만

이 또한 미스테리라고 하였다.

 

 

 <'최북'의 '풍설야귀인도'>

저 그림을 보고는 마음이 묘하게 움직여 그때부터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 이유가 그가 중인 출신이어서 일생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고,

다만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던 문인들의 문집 속에 조금씩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칠칠 최북
 민병삼 지음 / 도서출판 선 /

 2012년 8월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이 책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였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방점을 찍지 않았었다.

소설은 재미로 읽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듯 하기만 하면 그 진위 여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읽는 내내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던 나의 잘못이라면 잘못일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혹시~?'하다가 '흡~!'하고 허를 찔린 기분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내용의 '진위'가 아니라 '개연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시말해 내가 이전에 들춰본 우리나라의 고전 문학 몇 권의 내용이랑 묘하게 겹쳤기 때문 인지, 장르소설을 유난히 좋아하다보니 개연성이 무너진게 유독 내 눈에만 띄어서 인지는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동안 읽었던 이 시대를 배경으로한 작품들, 예를 들면 이옥, 김려, 심노숭, 이광사, 심지어는 연암 박지원을 배경으로 쓰여진 김탁환의 소설들에 나왔던 내용들이 짜깁기 되어 있었다.

개연성이 무너진 예는 아래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개연성이 무너지다 보니, 작가가 아무리 멋진 문체를 구사하고 있거나 중국의 한시, 우리나라의 옛시조들을 인용하는 등 박학다식함을 자랑해도, 내겐 진부하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졌다.

암튼, 난 이 소설의 주제를 모르겠다.

최북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쓰여졌는지 모호하다.

 

자기만의 뚜렷한 개성과 작품 세계를 가졌던 화가이니만큼, 그만의 두드러지고 독특한 무엇인가를 엿보고자 했었던 나로서는, 참 아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2012)에 개관된 '무주 최북 미술관'에서는 최북 탄생 300주년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었다.

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 책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미술관에서는 그의 생몰 연대를 1712년에서 1786년으로 통일하여 적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교집합이 되는 숙종 46년인 1720년부터 1786년까지는 적어도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개연성과 관련해 크게 문제가 되는 곳 몇 군데만 짚어 보겠다.

 

먼저,

여러 해 계속되고 있는 가믐이(132쪽, 밑에서 8th줄)

오랜 가믐과, 가믐(133쪽, 2nd줄)

등 이 소설에 나오는 '가뭄'은 모두 '가믐'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건 '원순모음화' 라는 음운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양순음 ‘ㅂ·ㅃ·ㅍ·ㅁ’ 다음에서 비원순모음 ‘ㅡ(丶)’가 원순모음 ‘ㅜ(ㅗ)’로 바뀌는 음운현상을 뜻한다. 중세국어 ‘믈

[水]·블[火]·플[草]’이 근대국어 특히 17세기 말엽 이후 ‘물·불·풀’로 원순모음화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혼란스럽던 음운현상이 17세기 말엽이후에는 원순모음화가 이루어졌다는 거다.

시대상을 반영하고 싶고, 고어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면 적어도 17세기 이전이 무대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설에서나 가능하겠다.

따라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최북의 일대기 동안은 '가믐'은 모두 '가뭄'으로 적혀야 맞겠다 .

 

또 한군데,

 

 

ㆍㆍㆍㆍㆍㆍ, 전혀 본 적이 없는 중늙은이 둘이 앉아 있었다.

ㆍㆍㆍㆍㆍㆍ

어이 달관이 한진사에게 물었다.

"이 치가 대체 누구요?"

"대감. 이자가 바로 최칠칠이라는 망나니 환쟁이 올습니다."(255쪽)

 

'올습니다'는 '올시다'가 잘못 쓰인 예이다.

'올시다'는

('이다', '아니다'의 어간 뒤에 붙어) 합쇼할 자리에 쓰여, 어떠한 사실을 평범하게 서술하는 종결 어미.

화자가 나이가 꽤 들어야 쓴다.

‘-올시다’의 의미로 ‘-올습니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올시다’만 표준어로 삼는다.

관련조항 : 한글 맞춤법 6장 1절 53항, 표준어규정 2장 4절 17항, 표준어규정 3장 4절 25항

 

 

또 한군데,

이 책에는 금주령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데 금주령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

혜원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같은 그림을 미루어 알 수 있지만, 이 시대에는 우리가 텔레비젼에서 보는 것 같은 주막은 없었다고 한다.

더불어 영조가 워낙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예외도 있었는데,

이 책에 언급된 초상이나 제사때 말고도, 농부나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마저도, 정조는 워낙 술을 좋아하다 보니까 영조 사후 왕이 되자마자 없앴다고 한다.

(조선 왕조 실록 참조)

원교 이광사는 1777년인, 정조 1년에 사망하였는데,

이 책에는 원교 이광사가 죽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금주령 얘기가 또 나온다.

 

거기다가 책의 말미에 이르면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화서 출신의 화공들이 최북 같은 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찾아뵙고 하였을까. 그건 모르겠다.

따라서, 한번 개연성이 무너져 버리면 줄줄이 도미노가 무너져 버리듯이 신뢰를 잃게 되어 소설에서 최북이 이야기와 인물들 속으로 엮여 들어가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지사이다.

 

작가가 아무리 멋진 문체를 구사하고 있거나 중국의 한시, 우리나라의 옛시조들을 인용하는 등 박학다식함을 자랑해도,

작가는 작중 화자나 주인공에게 애정을 갖고 감정이입을 해야 하나 보다.

이 소설에선 그 조절이 제대로 안되다 보니, 생명력이 아예 없거나 괴력이 넘쳐나는 괴물일 수밖에 없다.

 

"신분이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제 편하자고 만든 것 아니겠소. 한비자가 말하기를, 예의가 많은 자는 속마음이 쇠(衰)한다 하였소.예의도 지나치면 아첨이 된다는 말이오. ㆍㆍㆍㆍㆍㆍ"(54쪽)

사실 작가가 작중화자를 통해서라도 이런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작가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얘기지만, 위에서 애기했듯이 개연성이 무너지니 모두가 다 시큰둥이다~--;

어제부터 내린 비가 오늘도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고 있어 성기 마음이 매우 심란했다. 나뭇가지가 마치 춤을 추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가지와 가지, 잎과 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꼭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무도 생명이 있는 것이니 정말 교태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도 남녀가 통정을 하면 잉태를 하듯이, 그래서 나무도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 것일 수도 잇다. 그렇지 않고는 마치 애무하듯이 저토록 부드럽게 비벼댈 수가 없는 것이다.

한낱 나무도 고적할 새가 없구나!

ㆍㆍㆍㆍㆍㆍ"일찍이 고애자가 된데다가 스승마저 타계하신 탓에, 성기가 형영상조에 빠진 것이오. 그러나 학문과 예술을 하는 사람 치고,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특히 예술은 영감(靈感)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 영감이란 것이 고독하지 않을 때 얻어지는 게 아니지 않소."(80~81쪽)

위 문장도 인간의 고독한 심사를 나무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수려하기 그지없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교 이광사야 집안 대대로 양명학을 공부한 유서깊은 집안이니까 한자와 사자성어를 남발했다손 쳐도 최북 또한 아무 개성 없이 저런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독이 꼭 나쁜 것이 아니란 것을, 예술가에게 고독은 필수라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고 해야 할까?

최북의 경우 고독을 즐기며 시서화와 술로 위안을 삼았고,

마찬가지로, 고흐도 고독과 벗하며 그림과 동생에게 쓰는 편지와 커피에서 위안을 삼았다.

참, 가난은 이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렇게 외로운 신세라도 자유가 없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고 못 박고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하고 혼자 사는 것이라고도 했다. 최북이 거기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이다.(319쪽)

암튼, 내가 작가를 향하여 이러쿵 저러쿵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작가를 향한 분홍분홍한 애정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작가의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의 따뜻함, 다시말해 비록 작품 속에서일지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였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고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원동력이니까 말이다.

원교는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고 멀리 산등성에다 눈길을 걸었다. 그윽하게 들어앉은 그의 눈에서 햇살이 무수히 부서져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나이 어느덧 이순(耳順)이 되었다. 눈에서 부서지는 햇살의 양만큼, 그의 인생도 그렇게 부서지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유배생활을 학문에 전념하는 기회로 삼을 각오가 있을지는 몰라도, 유형지의 생활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생활이 이십여 년이나 더 계속된다면, 학문은커녕 심신이 먼저 피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걸 생각하면 최북의 마음이 벌써부터 내려앉는 것이었다.(241쪽)

 

최북이나 고흐 등 예술가를 놓고 볼때 고독이 꼭 고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화가로 만든 바로 그것이 '고독'일지도 모르고, 거기에 최북에게는 술이, 고흐에게는 커피가 옵션으로 더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떤 감정이 다가왔을때, 그감정을 마냥 비껴갈 궁리만 할 것이 아니라...한번쯤 그 감정에 흠뻑 빠져 누려보는 것도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차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술감상 초보자가 가장 알고 싶은 67가지
  김소영 지음 / 소울메이트 / 2013년 2월

 

2013년부터 MBC 주말 뉴스데스크 부장을 맡고 있는 '김소영'김소영 기자가 쓴 이 책이 그런 의미에서 도움이 될 것 같다. '정치는 생활을 바꾸고, 예술은 삶을 바꾼다.'가 취재 신조란다. 너무 멋지구리하다, 이를 어쩔 것인가 말이다, 아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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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3-10 02:36   좋아요 0 | URL
'가뭄'을 그즈음에 '가믐'으로 적었으니 문학에서 그렇게 적을 수도 있을 테지만, '가뭄'을 '가믐'으로 적으려면, 그무렵에 쓰던 다른 말투도 고스란히 살려서 적어야 옳겠지요. 게다가, 옛날 사람들 말투에는 '-에게'가 나올 수 없고, '-고 있다' 꼴이 나올 수도 없으며, 옛날 사람들은 '감히'라는 일본 외마디 한자말을 쓸 턱도 없어요.

문학을 읽을 때에는 문학자가 쓴 말투를 따지는 일은 거의 부질없으리라 느껴요. 그 옛날 시대를 살지 않고서 그 옛날 시대 말투를 되살릴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그저 좋은 이야기, 좋은 줄거리, 좋은 삶을 문학에서 읽으면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양철나무꾼 2013-03-10 03:09   좋아요 0 | URL
최북의 생몰 연대를 1712년에서 1786년으로 통일했으니, 18세기를 살았던 사람이죠.
원순모음화는 17세기 말엽에 이미 정착되었구요, ㅋ~.

뭐, 저도 문학, 아니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외적인 것으로 딴지를 걸 생각 따위는 없는데 말이죠.
저렇게 되면 개연성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얘기가 넘 재미없어져 버리거든요~--;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꾸벅(__)

2013-03-10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10 0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3-03-11 10:49   좋아요 0 | URL
원순 모음화에 종결어미까지
와우 님의 국어 내공이 장난아니네요
깨갱 언제나 깨갱
그나저나 최북이란 인물이 무지 땡겨서 저도 저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갑자기 저 새로운 인물이 저를 두드리게 하는 힘을 가지셨네요
그림속에 작은 인물 둘이 가는 길 스토리가 있는 그림이에요
 

그녀는 너무 예뻤다.

자신이 맡은 일에 열심이었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부러웠고, 닮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넉넉하게 웃다가 간, 무한 긍정 에너지 한자락이라도 좋으니...

내가 주워다가 옵션으로 장착하고 '준비 완료' 하고 있고 싶었다.

 

얼마전에 커피메이커에 딸린 컵을 해먹고, 새로 포트를 장만하였었다.

 

그런 내게 그녀는 한가해진 기념이라며 이런 선물을 보내주었다.

갓 로스팅한 '케냐 AA'를 세련된 투명용기에 넣어보내주었는데, 내가 새로 장만한 유리 포트를 보고 갔나 싶게 맞춤이다, ㅋ~.

게다가 김훈이 가장 좋아한다는 '케냐 AA'는 발설한 적은 없지만, 나도 가장 좋아하는 커피 종류 중의 하나다.

완전 센스쟁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예쁜 것은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무한긍정 에너지를 마구 발산하는 사람은 가만 있어도 자체 발광일테니 당연 군계일학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는 것과 실천으로 옮기는것과는...또 다른 얘기인가 보다.

미소 한번 짓고, 웃음 한번 웃는걸 배운겠다는건데 왜 그리 힘든지, 원~--;

 

암튼, 요즘 내가 읽고 있던 책은 '한귀은'의 '이별 리뷰'였고,

 

 

 

 

 

 

 

 

 

 

 

 이별 리뷰
 한귀은 지음 / 이봄 /

 2011년 1월

 

마침, 거기에 '김훈'의 글들이 여러 편 나와 주었는데,

내가 한 번쯤은 읽었던 것인 듯 싶은 것도 있었고 했는데...유독 내 마음을 붙잡은건 '공무도하'라는 소설의 인용부분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새벽안개 냄새'를 느낀다. 그 냄새가 조바심을 불러온다. 여자의 몸 깊은 곳에는 흐린 등불 하나 켜진 것 같다.ㆍㆍㆍㆍㆍㆍ그런데 남자는 여자의 그 느낌을 안다. 두사람, 똑같았다고 말한다.

ㆍㆍㆍㆍㆍㆍ

  '공무도하'의 작가 김훈은 자신의 세설에서 섹스 행위에서 상대가 느끼는 바를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섹스에서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정수는 "둘이 똑같았구나"라고 말했다. 문정수는 노목희가 느끼는 바를 느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노목희가 느끼는 바를 알 수는 있었는지 몰라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정수가 둘이 똑같았다고 말할때, 그것은 노목희의 말을 통해 추정한 것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둘이 똑같았다고 문정수가 생각한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노목희에게 전한데에 있다. 느낌 자체의 전달이 아니라, 느낌에 대한 전달이다. 소통은 아니지만, 소통에 대한 소통이다. 그리고 그 소통에 대한 소통은 모호하지만, 이 모호를 둘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모호함을 이해한다.(231~232쪽)

해석 불가능한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부분을 이해하느라 애를 좀 먹었다.

뭐, 이렇게 어렵게 살거 있나?

내 경우는 이렇게 어려울때는 두눈 질끈 감고 마음이 시키는대로 따르면 오해는 할 수 있을지언정, 뒤늦은 후회는 비껴가던데 말이다. 끙~(,.)

 

그리하여 당장 김훈의 '공무도하'를 장만해 주셨고,

'커피, 치명적인 검은 유혹'이라는 책도 책탑에서 살짝 집어내렸다.

 

'이영광'의 시집에서도 소개된 일이 있는 '오규원'의 '프란츠 카프카'를 발견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무엇보다 '이상'의 '산촌여정'에 나왔던 MJB커피를 보게 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거기에는 MJB알라딘 커피라는 것도 있다, ㅋ~.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커피, 치명적인 검은 유혹
 김용범 지음, 김윤아 그림 /

 채륜서 / 2012년 10월

 

아, 그러고보니...

그녀도,

내가 요즘 읽은 책들의 문체도,

이곳 알라딘 서재도,

커피의 그것을 닮았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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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3-08 10:22   좋아요 1 | URL
커피가 마시고 싶어지는 감미로운 음악도 좋고, 오늘이 주말 전날 이라는 것도 좋아요.
왠지 휴일이 시작되는 느낌? ㅎ
케냐AA는 진한 느낌이라, 커피 매니아들이 좋아하죠~~~

2013-03-08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3-03-08 13:51   좋아요 1 | URL
[커피, 치명적인 검은 유혹]을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주변에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 있어요.
개인적으로 커피를 즐겨 마시지는 않지만,
그들과 소통하려면 커피에 대해 최소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어야겠다 싶네요.
통 관심없던 분야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져보는 일도 재밌을거라 생각됩니다.

금요일 오후, 저는 커피가 아니라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해지네요. ^^

2013-03-08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8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3-03-11 10:52   좋아요 1 | URL
와 저도 커피 생각이 간절 게다가 넘 이쁜 커피포스팅이네요
아 커피 마시고파라
당장 달려가고 싶은~
 
홀림 떨림 울림 - 이영광의 시가 있는 아침 나남시선 83
이영광 엮음 / 나남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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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번 필이 꽂히면 그의 전작을 두루 섭렵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러 사람의 시나 수필을 모아 놓고 해설을 하는 모음집이나 가이드 안내서 같은 건 또 별로다.

다양한 이들의 시 67편을 책 한권에 모아 놓았으니, 각자 다양한 개성이 두드러져서 통일된 일관성 따위는 느낄 수도 없는 것이 겉도는 느낌일까 우려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이영광' 시인의 그것이었기에 혹시나 했었는데, 기대는 날 저버리지 않았다.

이영광 시인이 선별한 시를 '홀림-떨림-울림'의 과정으로 수용ㆍ 해석해 내는데, 그것이 너무 좋다.

시와 비껴 겉도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 것이, 한데 어우러져 이영광표 시집이나 수필집 한권을 읽는 느낌이다.

그의 까탈스러운 시 편력을 엿보는 건데도 슬쩍 눈 흘기게 되기보다는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 책은 그가 신문에 소개했던 시들을 한권으로 묶은 것이다.

그가 신문에 시를 소개하려고 시집들을 모아 읽으면서 느꼈다는건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시가 유난히 많이 나온단다.

큰 난리도 없고 배고픔도 덜한 이 시절이 외려 더 살기 어려운 시절인 탓은 아닌가 싶다며 눙을 친다.

그러면서,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이기도 하니까'라고 하는데 이 말이 왜 이리 멋진거냐, 아흑~--;

 

까탈스러운 시 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냥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시의 자리에 사람이나 사랑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로 통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말해, 까탈스럽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편력을 한꺼풀 들추고 봐야만, 시종일관 무심한듯 하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뚝심같은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겠다.

 

좋은 시는 우선 그저 좋다. 왜 좋은가는 그 다음이다. 좋은 시는 먼저 읽는 이에게서 생각이란 걸 빼앗아갔다가는, 천천히 되돌려주는 것 같다. 잃었던 정신을 차리고 느낌과 뜻을 골똘히 되짚어 수습하도록 만드는 그 찌릿찌릿한 수용과정을 '홀림-떨림-울림'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좋은 시가 많다고 했으나 마음껏 거두어 담지를 못했다. 어떤 것은 좋아서 겨우 좋다고 말해볼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은 참 좋은데도 어째서 그러한지 잘 말할 수가 없어 내려놓고 말았다. 그래서 즐거운 비명과 괴로운 신음이 이 책의 겉살과 속살을 이루고 있다는 변명을, 꼭 드리고 싶다.('머리말' 중에서)

 

좋은 시는 저렇다고 하지만, 좋은 사람은 그저 좋다.

왜 좋은가 따위는 없다.

좋은 사람을 보면 그저 닮고 싶다.

번지고 스며 물들 듯이 그렇게 그렇게 닮고 싶다.

좋은 시와는 다르게, 좋은 사람을 두고선 그런 생각을 되돌려 한다는 것은 상황이 종료됐다는 얘기이다.

시를 놓고는 상황 종료가 되어도 그만이지만,

사람을 놓고는 상황 종료가 됐다는 것은 과거형이란 거고,

사람을 놓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왠지 서글프다.

 

내가 왜 시도 아닌, 시 해석을 놓고 멋지다고 설레발을 치느냐 하면,

시가 없이 그의 해석만으로도 하나의 시나 수필 같은 것이 작품으로 내어놔도 손색이 없다. 

불가능한 것은 이렇게 어떤 영혼에게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순결한 것들은 다 아름답게 미친 것들이다.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만다.(19쪽)

사랑은 때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자기를 발설하지조차 못한다.(23쪽)

 

         호 구 糊口

                 - 권혁웅 -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호구糊口"는 아무래도 전서의 비유겠지요. 봉투에 침을 발라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호구는 또 입맞춤이기도 합니다.  통째 봉해 보내는 입술은 그리움 전부를 간절하게 대표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전령이겠지요.

  호구는 원래 간신히 먹고 산다는 뜻이니,  이 시는 결국 사랑의 가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홀몸으로만 불탈때 사랑은 조바심치다 목숨을 잇기 어려운 극빈에 떨어지지요. 그러니 마음은 마음에게 전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 아래"는 정말 추신에 불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목매단 사람의 버둥대는 사지처럼 이 절박한 사랑의 몸체는 입술에 특명을 준 채 물러나 있거나 가라앉아 있을 뿐입니다. 몸 전체가 아니라 입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이치지요. 추신은 그러니까, 연서의 본문이자 입술의 배후조종자이며 사랑의 무의식이라 해야겠군요. 무의식은 원래 추신을 닮았습니다. 짧은 석 줄, 결코 짧지 않군요.(43쪽)

개인적으로 처음보는 시였지만, 시와 시 해석 모두 다 넋을 놓았었다.

조바심에 달뜬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본 기억,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배달한다는 건 어쩜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일지도 모르겠다.

할말이 너무 많지만, 채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목이 매어 눈물을 꼴깍 눌러 삼킬 뿐이다.

마음을 마음에게 전할 수 있는 길은,

할말이 너무 많을 땐 그저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가 제격인 셈이다.

 

옛날의 행운 -김성윤 군의 회상   

                    - 정현종(1939~ ) -


젊은 시절에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걱정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어요.

친구들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있었어요.

그걸 내놓고

먹으라고

먹으라고 했어요.

참 행운이었어요.


 

정말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없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도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날을 무탈하진 않았어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던 거다. 이 시는 그 무언가를 "마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의 젊음은 모질게 노력해 갖추어도 한발 내디딜 곳이 마땅찮고, 우리 모두는 무엇이 죽이러 오는지 모르면서도 공포에 질린 짐승처럼 쫒기며 살고 있지 않은가. 안 보이는데도 한 잔 술처럼, 두툼한 파전처럼 나누어 먹을 수 있던 것. 먹다보면 또 어떻게든 힘내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던,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이 보이지 않는다.

  늘 제멋대로인 체제를 문제 삼지 않고 친구와 동료들과 겨루기 바쁜 우리가 저 "마음"이라는 것에 다시 도달할 수 있을까.

'마음'은 '젊음' 또는 '희망'의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수조 앞에서

             - 송경동(1967~ ) -


아이 성화에 못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강한 생각과 끓는 감정을 품고도 버티어내는 담담한 말은 더 강한 말이다. 이 시의 말들은 화장을 벗겨낸 우리 삶의 민낯이 킬링필드라는 난감한 진실을, 그걸 그저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의지를 담고도 흐트러짐이 없다.

  싸움을 사랑과 평화라 굳게 믿는 그는 감옥을 나와 또 '현장'에 있다. 목발을 짚고 걷는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들려올 때, 나는 내가 성한 다리로 절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과격하지 않다. 과격한 건 저 투명한 "관계"다. 저것은 관계가 아니다.

또 '송경동'의 저 시를 보면 '싸움'과 '사랑'과 '평화'는 모두 같은 근원의 말들인가 싶기도 하다.

 

또는,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이기도 하다니까 모든 시는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중독'이 다른 말로는 '경배'이고 다른 말로는 영광'이고 또다른 말로는 '홀릭'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막막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쉬운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것일 테니까 시를 읽으면서 살면 되는 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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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3-06 06:54   좋아요 1 | URL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 담은 시는
이웃들한테도 좋은 이야기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2013-03-0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8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녀, '쿨女'가 별명이지만,

삐쩍 말라 날카로워 보였으며, '나는 신경질적입니다' 하고 양미간에 내천(川) 자를 그린걸로 미루어, 그렇게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말투라는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위, 아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여느 때처럼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말투에 묻혀버렸다.

으레 하던 데로 하려는데, 그녀가 "상담 요청이요"하고 가로막는다.

자세히 보니, 입술은 부르트고 눈은 떼꾼한 것이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해서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안되는 거네요...하다보니, 또 다른 그녀도 똑같은 증상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다.

원래 그녀의 체질은 외모가 드러내는 그대로...가 맞았는데,

교회 성가대에서 '솔로이스트'로 활동하면서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말투를 익혔던 거다.

한동안 허리가 심하게 아파서 성가대를 서지 못했었고, 그러면서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열이 위로 몰린거였다.

 

또 다른 그녀는 '집파녀'로 불렸었다.

수도꼭지에 버금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하나, 둘, 셋...큐~!'하면 핑그르르가 아니고 '눈물 뚝 콧물 뚝' 떨구며 울어대는 통에,

일을 할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도 울어서 우는 걸 직장 동료에게 들키면 벌금을 만원씩 내기로 했었는데, 벌금을 내기 위해 '집을 팔아야 할 정도'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어찌어찌하여 눈물을 흘리는 횟수는 줄었는데, 대신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중이 제머리 못 깎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제 자신은 돌아보지 못했었다.

 

ㆍㆍㆍㆍㆍㆍ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피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운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번은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140~141쪽)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솔직히 이 책에서 저런 의도를 읽어낸다는 무척 소극적인 독서법이다.

빅터프랭클이 누구인가 말이다.

인간존엄성의 승리이며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이고...이런 어려운 얘기들을 해야 겠지만,

그건 이 책을 이미 읽었거나 앞으로 읽게 될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읽고 깨달은 것은, 이 한마디로 함축할 수 있다.

Love will find a way.

사랑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길은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ㆍㆍㆍㆍㆍㆍ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ㆍㆍㆍㆍㆍㆍ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 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ㆍㆍㆍㆍㆍㆍ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120~122쪽)

 

난, 빅터 프랭클의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먼저 읽었던 터라, 이런 자전적인 이야기가 주는 교훈적이어야 한다는데서 오는 일종의 거부감이 덜했다.

게다가 '자신의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감정과 무감각의 복잡한 흐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수용소'라는 상황과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익명을 사용한다던가 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가까이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종교에 의지하거나 농담을 하는 것으로, 나무나 황혼 같이 마음을 치유해 주는 아름다운 자연을 단지 한번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은 굶주림과 수모, 공포 그리고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의 감정들을 삭인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런 깨달음과 교훈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의 '로고테라피'의 이론을 내가 얼마나 그럴 듯하게 생각하느냐, 나라면 임상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가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내가 깨달은 것이었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ㆍㆍㆍㆍㆍㆍ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79~80쪽)

 

그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견뎌내는 방법으로, 그는 '아내'라는 방법을 택했다고 했는데...

그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고 했는데...

사실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읽으면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는 수용소에 들어가 얼마 안되어, 아내가 죽었다는걸 이미 알게 된다.

그러니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아내와의 대화가 아니라, 그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내는 가공의 인물이 되는 것인데..., 뭐~--;

 

난 그의 로고테라피를 임상에 적용해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지만,

위의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내와 대화를 하는 상상으로 지옥 같은 수용소를 견뎌낸 그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현실적이고 논리정연한 이론을 정립한게 잘 이해가 되진 않지만...

내가 평소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예쁜 말로 잘 정리해 놓은 것 같아서 옮겨본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사랑을 소위 승화라는 의미에서의 성적 충동이나 본능의 단순한 부수현상(일차적 현상의 결과로 발생하는현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섹스는 그 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 아니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랑을 섹스의 부산물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84~185쪽)

흔히들...

육체적인 사랑만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안된다고 하고, 그건 탐닉이라고도 하곤 한다.

반대로 머릿속으로만 하는 사랑도 사랑이라고 하면 안된다, 그건 상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고로,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라고 하는 말은, 말뿐인 '공허한 위로'인 것이다.

 

적어도 보고 만지고 냄새맡고 느낄 수 있어야 상처가 잘 아무는 곪아 터지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고로,

Love will find a way.

옆에 내가 붙여넣고 싶은 말은,

Love is physical...이다.

 

 

 

 

 

 

 

 

 

 

 

 

 

 

 

 

 

 

Winterplay - You're in my heart

I didn't know what day it was
when you walked into the room
I said hello unnoticed
you said goodbye too soon
breezing through the clientele
spinning yarns that were so lyrical
I really must confess right here
the attraction was purely physical
you're in my heart, you're in my soul
you'll be my breath , should i grow old
you are my lover, you're my best friend
you're in my soul
my love for you is immeasurable
my respect for you immense
you're ageless ,timeless, lace and fineness
you're beauty and elegance
you're rhapsody, a comedy
you're a symphony and a play
you're every love song ever written
but honey what do you see in me
you're in my heart , you're in my soul
you'll be my breath , should i grow old
you are my lover, you're my best friend
you're in my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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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3-0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좋네요.^^

2013-03-03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 그리고 사랑에 대한 서술 좋네요. 'Love will find a way.' 도 좋구요. 어쨌거나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죠..^^

하늘바람 2013-03-03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음악들으러 양철나무꾼님 서재에 온답니다

순오기 2013-03-04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철나무꾼님 안녕~~~ 햇살 좋은 3월에도 즐거운 일상 누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