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 예찬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0년 11월
이 책을 읽는 내내 '재스퍼 포드'의 '제인에어 납치사건'이 떠올랐다.
형이상학, 신학,법학, 미학, 정치학을 종횡무진하는 아감벤에서 재스퍼포드를 떠올렸다는 게 아이러니 컬 하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란 인간의 삶이 장르소설을 떼어 놓고는 설명이 불가하니...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크게 벗어나질 못한다.
이 책은 저자 조르조 아감벤도 물론이지만, 김상운의 번역 또한 훌륭하다.
번역, 뒷 부분의 옮긴이 상세 주석, 간주곡Ⅱ가 어우러져 한권의 멋진 작품으로 태어나고 있다.
이 책은 좀 어렵다.
형이상학, 신학,법학, 미학, 정치학 등은 각각 떼어놓아도 호락호락한 분야가 아닌데,
그걸 두루 넘나들고 있기 때문에...각 분야를 두루 섭렵하지 않으면 이런 번역이 나와 줄 수가 없다.
내용 자체가 수사 만발, 극도로 응축시켜 놓은 것이 산문시 같은데,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았어야만 이 같은 재해석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풍속화(=세속적인 그림)예찬인 줄 알았다.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든 건 멋지구리한 책 표지가 한 몫했다.
"성스러운 것이나 종교적인 것은 모종의 방식으로 신들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봉헌하다'가 인간이 만든법의 영역에서 사물을 떼어낸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면, 거꾸로 '세속화하다'는 사물을 인간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돌려준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세속화한다는 것은 성스러운 예외상태에 종속되어 있는 사물(봉헌됐던 사물)을 그 원래의 맥락으로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184쪽)
이렇게 근대 세계의 형성·조직 원리로서의 세속화 개념을 해부함으로써 왜 자본주의가 근대적 종교 자체인지,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드는지 분석 했단다.
이책에서 꼭 알아야 할 개념이 '세속화'와 구별되는 '환속화' 라는 개념인데,
아감벤의 이론은 환속화의 역사에서 종교가 차지했던 그 자리에 '법'을 놓으려는 시도를 한다.
여기서 '호모 사케르'가 등장하고,
사회생활과 공동체의 법제화로부터 고립이란 용어가 나온다.
이쯤에서...내가 이 책을 읽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장치란 무엇인가'를 언급해 주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얄궂게도 장치가 만들어내는 주체는 어원 그대로의 주체가 아니다. 주체의 어원인 라틴어 ‘수비엑툼’(subjectum)은 그리스어 ‘휘포케이메논’(hypokeimenon)의 번역어로서 원래 ‘본질’(본래 사물을 그 사물로서 형성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뜻했다. 그러나 장치가 만들어내는 주체는 이런 본질로서의 주체라기보다는 장치가 뽑아내려고 겨냥한 어떤 ‘기능’을 구현한 ‘부품’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치가 부여한 이 기능을 거부할 때, 단순한 부품이기를 그만두려고 할 때 장치는 그 주체를 클리넥스 티슈처럼 버려버린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크나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장치가 만들어낸 주체의 가장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규직이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애초부터 대체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양창렬에 따르면 아감벤 역시 장치에 의한 주체화가 사실은 모든 주체성의 파괴로 이어지는 탈주체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세속화’라는 개념을 통해 탈주체화가 인간이 지닌 잠재성 회복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아감벤과 달리, 양창렬은 장치의 탈주체화 탓에 서로 분리된 존재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요컨대 법적으로 시민이지만 사회적으로 시민 취급을 못 받는 시민-비시민(쓰다 버릴 수 있는 인간, 비정규직)과 비시민으로 배제되면서도 시민의 역할을 강제받는 비시민-시민(외국인 노동자, 불법체류자 등)의 연대 말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까지는 게니우스, 즉 우리 안에 있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과 타협한다. 각자의 성격은 그 사람이 게니우스를 멀리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려는 방식에 달려 있다.[우리가 게니우스를]피하게 되고[게니우스가]표현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한, 게니우스는 자아의 얼굴에 우거지상을 새겨 넣는다. 그렇지만 어떤 저자의 문체는 (모든 피조물이 보여주는 기질[품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재능보다는 오히려 재능을 결여하고 있는 그의 일부에, 즉 그의 성격에 달려 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재능도, 성격도 (심지어 자아도) 아니며, 오히려 이 모두로부터 도망치는 그 사람의 특별한 비법, 재능과 성격 사이를 재빨리 오가는 방법이다.(23쪽)
내가 이 책을 훌륭하고 멋지다고 하는 것은 위 구절 때문이다.
좀 복잡하고 머리 뽀글거리게 쓰였지만, 사랑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뭐 사랑을 하는 데, 재능이나 성격, 자아 따위를 따진단 말인가?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다.
마음이 그냥 어쩌지 못하게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사진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한 인물들의 사진을 무슨 짓을 해서든 손에 넣으려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22살 무렵의 프루스트가 사랑했던 소년들 중 한 명인 에드가 오베르는 프루스트가 집요하게 요구한 결과 마침내 자신의 초상사진을 보내줬다.오베르는 사진 뒷면에 헌사를 대신해 이렇게 써놓았다. "제 얼굴을 보세요. 제 이름은 '한때는 그랬을 수도 있어'에요. '더 이상 아니야,' '너무 늦었어,' '그만 안녕' 이라고도 불리죠." (41쪽)
사진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건 '육신의 부활'같은 좀 어려운 내용이라서 내가 언급할 수 없고,
난 마르셀 프루스트가 사랑했던 '에드가 오베르'의 통통 튀는 헌사가 맘에 들어 옮겨본다.
'세속화 예찬' 끝부분에서 아감벤은,
"장난감을 갖고 노는 놀이가 끝났을 때 그 장난감이 얼마나 끔찍하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어린아이들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126쪽)
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이란 '장난감을 직접 가지고 논 주체'쯤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책에서 아감벤이 제시하는 대책을 옮겨보자면 세속화할 수 없는 것까지 세속화하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