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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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기에 그런 사람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피지배 계층이기보다는 지배 계층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그렇게 기를 쓰고 직장에서 승진하려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고, 억척같이 돈을 벌려고 한다.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본성이 어느 날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낸다면?

 

작가의 상상력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정신을 조종해 자신의 말에 순종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조종할 능력도 있지만 그 부작용으로 충동사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진 능력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첫 장면부터 상당히 인상적이다.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실험. 인간이라면 선뜻 따를 수 없는 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에 주저하면서도 따르는 사형수의 모습. 권력을 가지고 남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이런 것일까?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인간의 기본적인 도의마저 저버리게 하는 것?

 

다른 사람을 조종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흰원숭이라 부르며 그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백원단, 그 백원단을 이끄는 류잉춘은 자신에게 충동사가 다가올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한국에서 온 안시현에게 테스트를 진행하여 금강승을 진행하고자 한다. 백원단 지도부를 쫓는 슈란과 명진은 류잉춘과 안시현을 쫓아 숨겨진 류잉춘의 안가를 급습하지만 죽어 있는 류잉춘만 발견한다. 한면 일본에 사는 스스미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죽인 머리띠를 한 남자가 누구인지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데...

 

다른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능력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능력을 앗아간다. 바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 교제이다. 올바른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스스미가 아닐까 싶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죽음, 그와 함께 생활했던 준코의 죽음. 결국 스스미에게 자신이 지닌 능력은 축복이 아니었을 것이다.

 

초능력을 가진 신인류 호모도미난스들에게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권력을 향한 욕심이다. 슈란과 명진의 관계, 백원단에 대항하는 4인 체체. 이들이 보이는 모습은 결국 신인류 가운데서도 주도권 다툼을 거쳐 상하관계가 생기는 인간의 본능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인간의 본성 때문에 시현은 마지막 순간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타인의 생각을 조종한다는 개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소설의 소재로 사용했지만 장강명 작가의 작품은 또 다른 즐거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환상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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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꿈결 클래식 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민수 옮김,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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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의 제목은 <젊은 베르터의 고뇌>이다. 책의 제목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베르테르보다는 베르터라는 발음이 더 원어에 가깝고, ‘Leiden’이라는 독일어의 의미는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이기에 단순한 슬픔보다는 고뇌에 가깝기 때문이다.

 

올 해 들어 이 책을 두 번째 읽는다. 책을 읽으면서 고전을 고전이라고 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고전은 책을 읽을 때마다(그 시간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선 읽기에서 느낀 감흥이 여전히 남아있는 순간임에도) 또 다른 여운과 생각을 던져준다는 것이다.

 

베르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랑의 아픔에 빠져 결국 자살에 이른 너무나 낭만적인(어찌 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베르터를 모방해 자살한 사람들이 많아 그 후 유명인의 자살이 다른 이들의 모방적 자살을 부추기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처럼 이 책에서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은 자살에 이를 정도의 너무나도 열정적인 사랑이다. 특히 그 사랑의 대상이 금단의 열매처럼 약혼자가 있는 이였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다가온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인간의 존재적 가치에 대한 생각에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도대체 너는 이 집에서 어떤 존재인가! [중략] 너의 상실로 인해 운명에 파인 상처를 그들이 과연 얼마 동안이나 느낄까? 과연 얼마 동안이나? 아아, 인간이란 이처럼 허망한 존재라네.(p.163)

 

살다보니 내가 잊어버린 사람들도 많고 나를 잊어버린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한때 내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던 이들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를 잊은 채 그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꿈결 클래식으로 나온 작품들을 모두 읽었다. 본문 이외의 일러스트, 주석, 해제로 구성된 꿈결 클래식은 상당히 깔끔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일러스트가 있어서 상상력이 반감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일러스트를 보며 더 깊이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고, 작품과 작품 속 인물들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진 베르터에 동화된 내 모습을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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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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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충격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세대 차이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유교적 관념에 사로잡힌 사대주의적 사고의 경직성 때문인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많이 당황스러웠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여자 형제 없이 삼형제로 자랐기에 여자 아이들이 어떤 사춘기 과정을 거치는지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다. 남자인 나하고는 다르겠지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사춘기 여자 아이(어떤 의미에서 그보다도 더 빠른 시기부터이지만)의 성적 관심을 표현한 글이 낯설기만 하다. 아니 여자 아이들은 성적 관심이 남자 아이들보다 당연히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라고 왜 성적인 관심이 없겠는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인데.

 

이 소설에서는 조그마한 마을 클레브에 사는 솔랑주와 그 일당들이 성에 보이는 관심과 몽상을 그리고 있다. 솔랑주가 생리를 시작하는 시기부터 어설픈 성적 유희를 거치면서 섹스에 이르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그 과정이 너무 적나라해 때로는 민망하기도 하다. 성적인 묘사도 상당히 거칠다. 성기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정말 당황스러웠던 것은 솔랑주와 이웃집 아저씨 비오츠와의 관계이다. 픽션이기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픽션>을 대하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할 행동은 아니라고 옮긴이는 말하지만 픽션이 있을 법한 이야기, 혹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본다면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은 우리나라 정서랑은 너무나 동떨어진 관계를 맺는다.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범죄라고 여겨질 정도다. 솔랑주와 아르노의 관계는 또 어떤가? 그들도 그렇게 바람직한 사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 놀라웠던 것은 아르노의 엄마가 말하는 내용이다. 아르노와 솔랑주가 무엇을 할지 뻔히 알면서 솔랑주에게 던지는 질문이 가관이다.

 

너 아무것도 필요 없니? 괜찮아?”(p. 207)

 

고리타분한 어른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이런 일이 내 딸에게 일어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교과서적인 말일지는 몰라도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또한 정도가 있다. 그렇기에 적합한 시기에 적합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가시내 솔랑주는 내 믿음의 범주 밖에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든 픽션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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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입 더 - 철학자 편
데이비드 에드먼즈 & 나이절 워버턴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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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어쩜 그렇게 책 내용과 잘 어울리는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철학자들을 추려 그들의 사상을 맛보기로 그려낸 작품이다. 책에 실린 대담은 팟캐스트에서 구두로 진행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각 대담의 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다. 오히려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분량이다. 그렇기에 27가지 맛난 음식을 차려놓은 한정식 집에서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든 맛깔난 음식을 한 입 베어 물고 그 깊은 맛을 음미하듯이 이들의 깊은 사상을 잠시나마 맛볼 수 있다.

 

특이할만한 사항은 철학자들이 뽑은 철학자들이 우리의 예상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뽑은 인물들 중에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인물들도 많았고,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철학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가 가장 많은 표를 얻기도 하였다.

 

27장으로 이루어진 각 대담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각 대담이 다루는 내용이 각 철학자나 사상의 핵심 사유를 설명한 것이기에 서로 간의 연결 고리는 그렇게 높지 않다. 그렇기에 나 역시 순서대로 읽지 않고 가장 많은 철학자들이 좋아한다고 뽑은 데이비드 흄에 관한 대담부터 읽어나갔다.

 

선택이 좋았던 걸까? 아무리 짧은 분량이라도 위대한 철학자의 핵심적 사고를 설명한 것이기에 어느 정도는 어려움을 예상하고 읽었는데 당구공이 부딪치는 사례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하였기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 미래를 판단하는 인간을 동물계의 일원으로 본 데이브드 흄의 생각이 18세기에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각 철학자와 그의 생각을 대담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다른 무엇보다 책을 읽은 후에 이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책에 실린 모든 이들은 아니지만 어떤 이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보고 싶어졌다. 고맙게도 나와 같은 독자를 예상하고 책 말미에서 더 읽으면 좋은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짧고 굵게를 외치는 사람들을 철학의 향연으로 이끌만한 단단한 구성의 책, 바로 <철학 한입 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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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학 수업 - 우리가 다시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에리카 하야사키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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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많았다.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음 뒤에도 나를, 가족을 , 친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상태, 나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는 걸까?

아주 어린 나이에도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너무나 무섭고 두렵다는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바쁘게 살다보니 죽음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얼마 전에 예전에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분이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보다도 몇 년 아래였던 분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스럽고 착착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죽음학 수업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책 제목으로 수업이란 표현을 쓴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보니 진짜 죽음학 수업이란 과목이 있고 이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가 노마 보위 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수업은 3년 치 수강분이 마감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수업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수업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녀의 수업을 참관한 전직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자이자 현재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문학 저널리즘 프로그램 조교수인 에리카 하야사키가 쓴 글이다. 그녀는 노마 교수의 수업을 참관한 내용을 이야기식으로 풀어쓴다. 그녀의 수업을 들었던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또한 죽음에 대비한 삶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케이틀린, 조나단, 이스라엘, 아이시스 등이 겪은 죽음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지는 않다고 할지 모르지만 또한 아주 멀리 동떨어진 일도 아니다. 노마 교수는 다양한 수업 방식으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세상을 떠난 누군가에게 쓰는 작별 편지, 검시소에서 죽음을 보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언제인지,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를 써보는 되감기 버튼,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쓰는 편지,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 표현 등 그녀의 수업은 현장과 작문 등으로 학생들이 깊은 사고를 하도록 유도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여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예수님을 믿기에 영생, 부활을 믿는다.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죽음과 비교해 우리의 현재 삶도 역시 사랑해야 한다.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분명한 선물이다.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할지, 어디에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문제이다.


만약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자신도 남에게도 모두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는 불운한 삶을 살지 선택하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당연히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죽음학 수업은 삶의 사랑학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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