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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과 제이드
오윤희 지음 / 리프 / 2024년 11월
평점 :
💡"기억되지 못한 삶에 존엄을 돌려주는 아름답고 아픈 이야기."
오윤희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그늘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조명하며, 역사적 상흔과 여성의 삶을 탐구하는 작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영숙과 제이드"는 그의 대표작으로, 실재하는 역사적 비극을 배경으로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 소설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이민 2세대의 정체성 혼란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합니다. 기지촌 여성들은 경제적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아야 했지만, 사회적 낙인과 인권 유린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이민 2세대의 이야기 또한 그들의 삶이 한국의 비극적 역사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여줍니다.
작가는 책을 통해 역사의 그늘 속에서 침묵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고, 그들의 삶과 고통을 진지하게 조명합니다. 제이드와 영숙의 시점을 교차시키며 세대 간 단절과 이해를 탐구하는 동시에, 과거의 비극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게 만듭니다.
"영숙과 제이드"는 이민 2세대 딸 제이드가 엄마 영숙의 숨겨진 삶을 추적하며, 기지촌 여성들의 기구한 생애와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역사적 고통과 여성으로서의 삶, 그리고 세대 간의 단절과 화해를 다룬 이 소설은 고통을 마주하지만 그 안에서 생존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이 작품은 과거를 복원하고 여성들의 이름 없는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소설이 가진 치유의 힘을 보여줍니다.
딸 제이드와 그녀의 어머니 영숙, 두 여성의 교차된 시선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한 개인의 삶에 내재된 역사적 폭력과 그로 인해 형성된 세대 간 단절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이는 과거를 회상하거나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외면한 문제를 생생히 되살려냅니다.
📌“엄마는 타인과 자신 사이에 얇은 벽을 쳐놓고, 그 벽 너머의 자신을 결코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제이드의 엄마 영숙은 제이드에게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딸에게조차 벽을 치고 살아간 영숙의 모습은 딸에게 소외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제이드는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을 단서로 엄마의 숨겨진 삶에 접근합니다. 사진 속에서 엿보이는 영숙의 과거는 딸에게 충격과 질문을 남겼습니다.
📌“어디선가 진주는 조개 속에 난 무수한 상처로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 인생을 할퀴고 간 수많은 상처도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면, 그건 바로 내 딸 제이드다.”
제이드가 엄마의 삶을 되짚어보는 과정은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과거가 만들어낸 단절의 원인을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어머니의 삶을 알아갈수록 그녀가 고통받고 유령처럼 살아간 피해자가 아니라, 📌“누군가는 타락한 여자라 불렀고, 또다른 누군가는 피해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이름은 불친절한 운명과 용감히 싸운 ‘생존자' " 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한 문장은, 이 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줍니다. 역사가 지우고, 우리가 외면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진정한 메시지라 생각됩니다.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역사'입니다. 영숙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과거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 기지촌에서 시작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잃고 기지촌으로 밀려나게 된 여성들의 삶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편함과 통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의 고통은 경제적 문제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외면과 차별은 그들의 삶을 더 잔인하게 짓밟았습니다.
📌“우린 버려진 사람들이에요. 가족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이 말은 당시 여성들의 처절한 현실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을 감당하며, 피해자로서도 온전한 공감과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삶을 버텨내야 했습니다.
작가는 여성 개인사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가 감추고, 외면했던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 여성들의 삶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그들은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애국자로 포장되었지만 멸칭 속에서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배척당했습니다.
책 속에서 기지촌 여성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애국과 수치라는 이중적인 서사로 바라보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를 부자로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애국자, 애국자들입니다!”라는 연설은 그들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 경제를 위한 도구로만 여겨졌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겨졌습니다.
이처럼 작가는 자료 조사를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섬세하게 재현했습니다. 페니실린 주사의 부작용, 국가의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착취된 여성들, 가족의 외면과 사회적 낙인 등은 철저히 연구된 기록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이를 통해 소설은 르포르타주적 성격을 띠면서도,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실제 사건과 인물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그 목소리를 전달했습니다.
"영숙과 제이드"는 딸 제이드를 통해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국가적, 사회적 맥락과 얽히는지 보여줍니다. 제이드는 이민자로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미국에서 살아가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이민자 서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제이드가 영숙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한국전쟁 이후 역사와 직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세대 간 단절과 재연결은 가족사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와 오늘날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를 치유하는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책 속에서 특히 돋보이는 점은 묘사의 섬세함과 감정의 깊이입니다. 영숙의 내면 세계는 그녀의 절망과 희망, 사랑과 상처를 생생하게 드러내며, 제이드의 시선은 현대 독자들이 그녀의 삶에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의 독자들에게 역사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임을 환기시킵니다. 이들은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을 받지 못했고,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채로 잊히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가 외면한 삶을 되새기고, 잊혀진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문학은 종종 역사가 놓친 진실을 담는 그릇이 되곤 합니다. 이 작품 역시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 여성들의 목소리를 문학으로 복원하고, 그들의 고통과 생존의 가치를 다시금 비춥니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살아간 한 인간의 존엄과 생존을 그려낸 이 소설은 모든 독자에게 '우리는 그들의 삶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책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시도이자, 독자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는 거울이었습니다.
역사를 잊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일임을 이 소설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