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6
카스 무데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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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단일한 번역어로 정착시키기에는 그 뜻이 너무도 포괄적이고 모호하여 남발되기 쉬운 단어이다. 카스 무데와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포퓰리즘>은 이 모호한 단어에 대한 유익한 정의를 내린다. 저자들의 정의는 포퓰리즘이 가지는 다양한 양상을 포괄하면서도 명확하게 비포퓰리즘적인 현상들을 배제한다는 실용적 측면도 있다.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이 정의를 차근차근 정리해보자.

저자들의 정의에는 포퓰리즘의 세 가지 핵심 개념이 모두 들어가 있다. 바로 민중, 엘리트, 그리고 일반의지다. 포퓰리즘은 '민중'과 '엘리트'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데, 이때 기준은 도덕성이다. 민중과 엘리트는 도덕뿐 아니라 종족 면에서도 구분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포퓰리즘은 민족주의와 완전히 융합하며 민중의 적은 이제 외국인 자체로 간주된다. 그리고 엘리트들이 토착 민중보다 외국인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민중이 결속하여 세운 공동체가 공통의 이익을 강제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일반의지 관념은 포퓰리즘의 선악이원론적 심상지도를 더 강화한다.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인들이 민중의 이해관계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했다며 기득권층에 소외된 집단의 의지를 고려하여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기득권층을 싸잡아 부패한 무리로 비난하고 엘리트에 의해 소외를 받아온 민중의 의지대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가 바로 포퓰리스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포퓰리즘은 '중심이 얕은 이데올로기'인데, 포퓰리즘은 단독으로는 현대 세계를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분석하지도 못하고 그에 따른 구체적 실천 프로그램도 내놓지 못하여 "현대사회가 낳는 정치적 문제들에 복잡한 해답도, 포괄적인 해답도 내놓지 못"하는 까닭에 언제나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중심이 두꺼운 이데올로기에 기생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유심히 읽은 부분은 5장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이다. 익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소외된 민중의 일반의지를 강조하는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다. 오히려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한다. 자유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 같은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 특화된 독립 기관들까지 수립하는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순수한) 민중의 의지'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포퓰리즘과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핵심 원리인 이원론과 일반의지는 권위주의로 쉽게 흐를 수 있다. 동질적 민중의 일반의지는 선하고 절대적이기에, 이에 반하는 모든 것을 배제해버리기 때문이다. 다수의 순수한 민중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태도는 자칫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도 줄 수 있고 부정적인 영향도 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포퓰리즘은 "공적 경쟁의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정치 참여의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기존 정치권력이 주목하지 않은 집단의 이해관계를 의제화하여 민주화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이 이념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본권 보호 제도의 약화를 초래하고 도리어 권위주의로 추락하는 위험까지 내포하는 양날의 검인 것이다. '다수'라는 폭군이 군림하여 소수자의 인권을 탄압하고 배제할 때 민주주의 이념은 퇴색된다.

그렇다면 포퓰리스트와 포퓰리즘적 집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며 이런 대응방안을 단호히 거부한다. 저자들은 수요와 공급 측면으로 나누어 이 문제를 분석하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사회에 내재된 포퓰리즘적 태도가 포퓰리즘 정치를 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정책 실패, 정치권의 체계적 부패, 정치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은 포퓰리즘적 태도를 활성화하는 핵심 요인이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이러한 잠재되어 있던 반기득권 정서를 공공의 영역으로 끄집어내어 기득권층이 충분히 다루지 않았던 이들의 이해관계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는다. 그들이 설득력 있는 위기 서사를 만들어낸다면, 선거와 정책 모두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어떻게 하면 포퓰리즘적 태도를 막을 수 있을까인데, 저자들은 여러 방안을 제시하면서도 교육에 주목한다.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시민교육으로, 그 목표는 자유민주주의의 주된 가치를 가르치고 극단주의적 도전자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시민 사회화다...전반적으로 보아 시민교육은 민주적 신념을 강화하고 다원주의의 타당성을 설명함으로써 포퓰리즘적 태도를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교육은 민주주의 가치와 신념 보존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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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방법은 시민교육이네요.^^

Redman 2022-08-15 15:58   좋아요 1 | URL
뻔한 말인 듯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는 결론입니다 ^^

mini74 2022-09-08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축하드립니다 ~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9-0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Redman 2022-09-08 15: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9-0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Redman 2022-09-08 15: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즐거운 추석연휴 되십쇼

서니데이 2022-09-0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애초 이 책을 읽은 내 관심사는 중국 고대사상의 사회적 맥락을 짚는 것이었으므로, "제8장 패자와 무사: 춘추시대의 사회 변모"부터 "제10장 정치인 사상가: 최근 발견된 문헌을 통한 조명"만 집중적으로 보면 될 터이지만 좋은 책이 늘 그렇듯 다른 주제와도 연결해서 읽을 부분이 상당히 많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한 단락을 뽑아보겠다.

"중국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나는 항상 중국 역사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비교론적 틀로 인류 보편적 경험의 일부로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농경 생활 방식의 시작, 지역에 기반을 둔 사회조직-수장사회의 형성, 도시 문화의 출현. 국가의 발생, 관료제와 행정기관의 출현, 그리고 제국의 형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구절은 즉각 <옥스퍼드 세계사> "Part.2 점토와 금속으로: 농업의 출현부터 '청동시 시대 위기'까지 발산하는 문화들-기원전 1만 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를 떠오르게 한다. Ch.4 "농민의 제국들"이란 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원전 제5천년기부터 제3천년기까지 서로 멀리 떨어진 세계 각지에서 우리는 공통 경험을 통해 발산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런 공통 경험으로는 정착지의 조밀화, 인구 밀도의 증가, 사회적 범주와 정부 기능의 증가, 국가의 출현과 제국으로의 변모, 그리고 갈수록 다변화되고 전문화되는 경제 활동 등이 있다."

리펑의 책은 양사오 이전 (BC 6500~)부터 시작하고, 서주시대가 1045~771BC이므로 <옥스퍼드 세계사> "Part 2 점토와 금속으로"의 시기와 겹친다. 그렇다면 리펑의 책 머리말에서 추릴 수 있는 주제는 '농경 사회에서 제국으로의 이행', '국가의 발생' '관료제와 행정기관의 발달' 등인데, 우리는 <옥스퍼드 세계사>를 통하여 같은 시기 다른 국가의 사례는 어떤지 정리할 수 있겠다.

'제국으로의 이행'이라는 주제는 또 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제국>과 비교할 수 있는데, 뮌클러는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역사상 국가들이 어떻게 제국으로 불릴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국가의 발생'이라는 주제는 <옥스퍼드 세계사> Part 3. 제국들의 진동 중 "Ch.7 성장: 사회조직과 정치조직 - 기원전 1000~기원후 1350년"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이언 모리스는 "저가 국가"라는 개념을 통해 이집트, 주왕조 등을 분석한다. 저가 국가란, 수입을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국가 운영에 필요한 비용도 적었던 국가를 지칭한다.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이 적었다는 사실은 국가가 수행하는 일이 적었다는 것과 국가가 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언 모리스가 지적하듯 "국가가 약하다는 것은 농민들이 정부에 세금을 적게 내거나 전혀 안 낸다는 뜻이었다." 주가 이런 저가 국가에 속했다. 주의 "신임 제후들은 왕에게서 받은 영토를 직접 다스리며 각자 원하는 대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왕의 요구 사항은 자신이 전쟁을 벌일 때 '많은 제후들'이 각 제후국의 분견대를 거느리고 참전하는 것이 전부였다. 전쟁은 마친 뒤 왕은 제후들에게 약탈품을 분배했다." 국가의 역할이 적으므로 국가와 백성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춘추시대는 이러한 경향이 뒤바뀐 시대였다. 현(縣)이라는, 주의 봉건제와 같은 혈연적 네트워크망이 아니라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관리를 보내 직접 관리하는 행정 단위가 확산되면서 "국가는 이전 어느 때보다 농민에 가가이 갈 수 있었고 농민도 그러했다." 국가와 백성 사이의 가까워진 거리는 "개별 농민들이 직접 부담하는 일반적인 조세와 군사 복무"로 이어진다. 현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지역에 설치되었는데, 국가는 이런 지역들을 개척함으로써 조세 수입과 노동력의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춘추시대는 전쟁과 개발 등으로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이 주와 다르게 급격히 늘어난 반면 현 제도를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입도 그만큼 늘어난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춘추시대 이후 중국은 '고가 국가'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고가 국가의 특징은 군사적 승리로 취하는 전리품에 의존하는 약탈경제 대신 "관료제를 창안해 세금을 거두고 병력을 직접 고용함으로써 전리품을 모두 국가 소유로 거두"(옥스퍼드) 것이다. 이로써 고가 국가는 확장 가능성도 훨신 커졌는데, "가장 큰 저가 국가였던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와 9세기 아시리아는 각각 면적이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인구가 300~400만 명이었지만, 기원후 175년경 로마와 중국은 각각 면적이 500만 제곱킬러미터에 인구가 5000만 명이었다." 제국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춘추시대 고가 국가로의 변모가 제국으로 가는 기틀을 놓았자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국가의 발생'이라는 주제에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를 품고 있는데, 이는 국가가 무슨 역할을 수행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국가는 사회 내부 투쟁 조정의 수단으로 보는 것,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여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보는 것, 마지막으로 의례체계를 집중화하기 위해 사회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내적 지향의 최종 산물로 보는 것. 이는 필연적으로 국가론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국가론을 연구한 밥 제솝의 <국가 권력>이나 <전략관계적 국가 이론> 등이 국가론의 기본 서적으로 읽어볼 만하겠다. 이 분야에 완전히 문외한이라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로 기본 주제들을 다잡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유시민의 책은 기본 그 이상의 역할은 충족하지 못하므로 다른 책으로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 삼아야 하지만)



이렇게 연관된 독서로 주제가 점점 확장되는 것은 책을 읽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아닐까. 혹은 쓸모도 없는 지식 채우기라는 최악의 절망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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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 한강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5
리펑 지음, 이청규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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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Early China>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은 원서 출간 당시까지의 최신 고고학 성과를 반영한 중국고대사 개설서이다. 개설서답게 이 책은 서론에서 "중국의 지리"와 북미에서의 고대중국사 연구사를 다루고, 제2장부터 14장까지는 양사오 사회부터 한제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공자 혹은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연구사를 비롯하여 각 장 말미에 수록된 참고문헌 및 고대 문헌에 대한 설명, 주요 고고학 유적에 대한 설명을 꼼꼼하게 읽을 것이나 나처럼 제자백가 사상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제8장 "패자와 무사: 춘추시대의 사회 변모" 부터 "제10장 정치인 사상가"를 유심히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상은 특정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형성된다. 혹은 사상은 그 사상이 나오게 되는 시대적 상황이 있다. 물론 시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상도 있으므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사회적 맥락에 온전히 종속시키는 환원주의적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나, 사상사를 공부할 때는 반드시 그 사상이 나오게 된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동시에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유한 사회적 맥락 속에 사상체계를 위치시킬 때, 오독의 가능성을 줄이고, 더 나아가 현 시대 및 사회와 비교하여 재구성함으로써 현대적 관점에서도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쩌화의 <중국정치사상사>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상사 서적들은 사회사를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류쩌화의 책을 보자. 3권 분량의 방대함을 자랑하는 이 책은 풍부한 원전 인용이 장점이나 중국의 사상가들이 살았고 사상의 대상으로 삼던 사회에는 놀랍도록 무관심하다. <중국정치사상사> 1권은 선진 제자백가의 사상을 다룬다. 제자백가는 춘추전국시대 출현한 중국사상사에서 핵심 개념과 범주들을 개발하였지만, 왜 이런 지적 르네상스가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고 추상적 설명만 나열할 뿐이다. "중국 역사상 대변동의 시기"라고 하나,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구체적 정보에 대해서는 서술한 바가 매우 적다.


고고학 자료를 통해 고대 중국의 물질문화와 사회상을 재구성한 리펑의 책은 류쩌화 책의 빈곳을 채워준다. 서주의 붕괴는 급격한 제도적 변화가 나타난 중요한 요인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춘추시대 사회적 변화의 핵심은 "현(縣)"이라는 새로운 행정 단위의 등장에 있다. 현은 국가간 전쟁의 결과로 탄생하였는데, 주로 인구와 조세 확보를 목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 지역에 설치되었다. 현은 서주와는 전혀 다른 매커니즘에 의해 운영된 행정단위였다. "현은 서주의 초기 왕실 행정 시스템과는 직접 연관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서주 시대에는 혈연구조를 통해 국가 통치자가 귀족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였지만 현은 국가 최고 통치자가 임명한 지사에 의해 직접 통제되고 관리되었다. 현의 출현은 중국 사회정치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현 제도가 창안되고 확산되면서 "종족 조직에 토대를 고대 중국 사회"가 파괴된 것이다. 서주에서는 왕실의 사무와 정무를 하급 귀족 가문이 맡았지만, 심각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은 뒤에는 종족과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국가나 권력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임무의 수행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전국시대에는 사회경제적으로 "현 제도가 이전 국가의 중심지에 멀리 떨어진 주변 지역에도 확산 적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영토 국가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그나마 남아있던 종족적 혈연망이 완전히 붕괴된 시대가 전국시대였다. 영토 국가는, 군대에 의해 보호되는 경계가 명백한 영토적 실체를 단순화되고 통일된 정치권력이 다스리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영토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새로운 영토의 획득이고 이는 전쟁으로만 달성되었다. 영토 국가는 이 목적을 무엇보다 우선시하였기에, 이 시대 중국은 대규모의 희생을 수반하는 군사적 승리를 중요한 발전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 영토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근간으로서 '소규모 농민' 가구를 재편성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종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독립적이고...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새로운 국가 시민"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제자백가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은 이 새로운 소농 가족을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중국 고대 사회에서의 급격한 변화란 종족적 질서의 해체이고, 전국시대는 그 사회적 전환의 영향이 확장된 시기였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역시 다른 사회적 맥락을 가지므로 관습적으로 춘추전국시대라 구분없이 지칭하는 것은 부적절하겠다. 다른 사회적 맥락은 곧 상이한 문제의식으로 나타난다. 이를 제례에 대한 공자와 맹자의 차이점에서 알 수 있다. 공자는 종족적 혈연망이 무너진지 얼마 안 된 시대에 살았다. 그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적절한 예의 실천을 통해서 바른 사회정치적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임금', '신하', '아버지', 그리고 '아들' 등 이미 결정된 사회적 위계 속에서 각 구성원이 자신들의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할 때 비로소 그 결과로서 바람직한 사회 질서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제사나 예가 실천되지 않는 현실에 분개했고 제례를 기반으로 정명이 실천되던 서주의 시스템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반면 "공자 이후 약 100년이 지난 뒤 제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시기에 살았기 때문에 맹자는 '제례'가 손상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주 왕실이 오래전부터 희망이 없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공자와 달리 서주 시스템을 복원하는 데에도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제례에 대한 이 같은 차이는 공자와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 맹자에게는 제례와 정명의 확립 대신 '인'과 '의'를 갖춘 어진 통치자를 찾아내 전쟁을 끝내고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사상가들의 문제의식이 그 시대 사회경제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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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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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전쟁사는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은 전쟁 국가 중 여성 전투원이 가장 많은 국가였다. 그런데 여자들의 전쟁 서사는 침묵당하고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압받았다. 저자는 이러한 여성들의 전쟁 체험과 증언을 기록하면서 일종의 대안적 서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여자의 전쟁". 거기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로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저자는 참전 여성들의 회상을 있는 그대로, 녹음 테이프에 녹음된 그대로 망설임 하나까지 살려서 서술하였다. 저자는 이런 서술방법을 택함으로써 영웅주의적 서사에 가려진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한 조각인 개별자들의 "감정"과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생생히 되살려내려 하였다. 회상은 문학도, 역사도 될 수 있다.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저자가 성취하려는 최종적 목표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복원된 "감정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저자는 개개인의 일상적 삶의 경험가지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것을 역사 서술의 완성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2.

저자의 서술방법론을 판단하기 이전에 역사 서술에 관한 기본적인 논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역사서술은 사료를 소재로 삼아 이루어진다. 사료로 기록된 사실의 보고를 통해 역사가를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 사료 없는 역사서술은 허구의 창작에 가깝다. 이로부터 "인간의 행위와 고통에 대한 역사가의 보고가 진실에 입각해야 한다"(라인하르트 코젤렉, <지나간 미래>)라는 역사가의 첫 번째 의무가 부여된다. '사실에 입각한 보고'라는 소박한 사실주의적 역사 서술은 자신의 서술에 근거를 부여하여 신뢰성과 설득력을 높이려는 모든 역사가의 방법론적 자기약속이다. 이 입장에 서서 역사를 대하는 이들은 '사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즉, 코젤렉이 지적한 것처럼 "목격자의 보고는 18세기까지 아주 신빙성 있는 주요 문헌이었다. 이전 시대에 일어난 일을 전해주는 전래된 역사의 높은 사료가치가 여기에 있다." 사실은 생생하기 때문에 사료적으로 가치가 높다. 일어난 일을 꾸밈없이 역사적 사실이 그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는 소박한 사실주의자들, 이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랑케이거니와, 이들은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사료와 사실들에 근거하여 사실의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ie)를 다룰 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식한 역사가 바로 이러한 사실주의적 역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역사가 취급하는 것은...모든 사건이 것이며, 각 사건은 상호 간에 필연적인 연관이 없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알렉시예비치의 서술은 사실들의 생생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그런데 단순한 사실들의 집적으로 '역사'(Geschichte)를 구성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불가능하다. 지역, 성별, 인종, 사회적 위치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정도가 너무도 크며, 이것은 하나의 균질적 서사로 엮는다는 것은 애초에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이다. 저자가 남성들의 서사에 가려진 여성들의 서사를 강조한 것은 개인이 처했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체험 구술을 상기시키는 강점이 있으며, 저자가 비판하는 소련의 역사 서술보다 훨씬 역사적 서술에 가까운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이 책은 저자의 바람과 달리 역사(Geschichte)로 나아가지 못했다. 사실과 체험을 생생히 옮겨적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는 헤겔이 <역사철학강의> 서문에서 분류한 역사 고찰의 종류 중 최하위에 속하는 '근원적 역사', 즉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들은 사건, 행위, 상황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는 것으로서 역사가 자신이 사건의 정신에서 살고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헤겔 사전> 중 역사) 즉자적 서술이다. 위 인용문을 두 부분으로 정리해보자.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들은 사건...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는 것'. 이것이 사실의 객관적 기록으로서의 역사이며 사실주의자들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이다. 객관적 기록은 역사 서술의 소재가 되기는 하지만, 아직 사태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갖지 못한다. 이것이 '역사가 자신이 사건의 정신에서 살고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역사가는 사실을 충실히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재구성하여 대자적 서술을 쓸 수 있어야 한다.

4.

"사료는 우리가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지만,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코젤렉) 서술된 역사는 절대로 이 역사의 재료가 되어 역사를 증명하는 사실들과 동일하지 않다. 내재적 사료 해석만으로는 한 사건이 가지는 장기구조, 과정, 인과를 알 수 없으며 사료가 말하는 사건이 가지는 의의 또한 알 수 없다. 아주 간단한 예로 사실은 '혁명'과 '쿠데타', '민족해방전쟁'인지 '침략전쟁'인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를 판단하는 것은 사실을 재구성하는 역사가의 사회적 올바름과 이론, 즉 당파성에 달려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제2차 세계대전, 그중에서도 독소전쟁 기간의 여성들의 전쟁 체험을 다루고 있다. 앞서 논한 역사 이론을 이 책에 대입해보자. 그녀들의 수많은 증언과 회상을 집적하면 과연 저자가 원하는 대로 여성의 '감정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책은 전쟁 당시 소련 사회사적, 사상사적, 구조적 연관의 충족이라는 요구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저자가 끄집어내는 '생생한 원초적 감정'은 시각적, 청각적 증인에 의존하고 "역사의 진리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코젤렉)는 사실주의적 역사 서술의 생각을 현대적으로 다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알렉시예비치의 글이 "창조적 혼종"을 보여줬다는 정희진의 추천사의 찬사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녀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슬퍼하고 분노하고 동감할 수 있지만, 그 모든 체험을 조망하여 보다 넓은 범위에서 여성의 전쟁 체험을 해명하는 설명은 접할 수 없다. 그것을 쓰려면 저자가 간과한 전술, 무기, 전장의 영웅들에 대한 지식도 요구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생생함, 영웅주의적 전쟁 서사에 대한 통렬한 비판, 전쟁으로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저자의 동정적 시선, 참혹한 전쟁에 대한 비판,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화에 대한 강렬한 지향이라는 매력적인 강점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본격적인 경험 단위를 넘어서는 역사적 서술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녀들의 증언을 진심으로 의미 있는 역사로 만들고자 한다면, 단순한 증언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된다. 사료가 생생히 말하게 하려면 역사의 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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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7-28 18: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민우님의 역사적 서술에 관한 관점에 공감하지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애초에 기존 방식의 역사를 쓰려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 부분에서 목적을 충분히 완수했고, 차별화되었고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Redman 2022-07-28 19:15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이렇게 비판적으로 평가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저작인 것 같아요

다락방 2022-07-28 18: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다 읽으면서 좋은 책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은 아니다, 라고 친구에게 말했는데 친구는 어느 지점에서 그랬냐고 제게 물었어요. 저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 ‘일어난 일들의 나열만 있고 더 나아가지 못함’ 이라고 애매하게 얘기했는데, 제가 느낀게 민우님의 지적과 같은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다만, 저는 이 책이 이 책 그 자체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참전했던 여성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만으로도 이미 큰일을, 세상에 없던 일을 했다고요.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단 시작을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주 큰, 높은 시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Redman 2022-07-28 19:13   좋아요 3 | URL
다락방님의 생각에 저도 적극 동의하고,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라 생각합니다. 이 책이 나온 1983년이라면 저도 저자의 시도 자체만으로도 큰 찬사를 보냈을 테지만 벌써 출간된지 40년이 되었고 여성사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발전이 이루어진 현재에 와서는 비판적 평가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이란 논지의 서평을 써보았습니다 ㅎㅎ 그럼에도 읽어볼 책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지만요
 


불침번 근무 중에 독서할 때는 한손으로도 들기 쉽고 아무곳이나 펴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적당하다. 그래서 <고백록> <십이야> <이 시대의 사랑>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에 고민하다가 한동안 읽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집었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하기에 역자의 각주까지 꼼꼼히 읽어가는데, 한 단어에 시선이 꽂혔다.

Nomizein

'믿는다'라는 말로 옮겨진 이 단어는 '숭배하다' '인정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관습' '규범' 등을 뜻하는 '노모스'nomos와는 동근어 관계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 고대 아테나이 사회에서 신을 믿는다(nomizein)는 행위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 우리가 종교를 믿는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주관적 내적 확신과 수양으로서의 믿음이다. 둘째, 제사나 기도 등의 수행을 통해 신을 숭배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외적 예배의 수행이다. 즉, 소크라테스 시대 아테나이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이란 내면적 수양과 함께 사회적 관습의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 재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장의 내용을 보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망치고,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24c)

같은 고발장이 크세노폰의 <회상>에서는 미묘하게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끌어들임으로 해서 불의를 행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젊은이들을 망침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1.1.1)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보고한 고발장에 따르면, 소크라테스 재판의 주요 쟁점은 소크라테스가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멜레토스 등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전통과 사회적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에 그를 고발했다. 아테나이 사람이라면 신에게 외적으로라도 경건을 표할 의무가 있건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의 신을 믿지 않는 소크라테스는 위험한 존재이며 사형에 처해야 한다.

사실 이 고발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사회적 관습으로서의 종교 행위는 양립할 수 없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처럼 소크라테스는 사회 속의 자아보다는 내면적 자아의 성찰을 주장했다.<변명>에서는 이것이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나 자신까지도 캐물음으로써 올바름을 추구하는 윤리적 개인을 만드는 것. 이것에 소크라테스가 일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였다. 반면 사회적 관습으로서 외적으로 수행되는 믿음 행위는 윤리적 성찰이나 내면의 검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면의 경건함만 유지되면, 다시 말해 외적으로 부여된 사회적 의무와 관습만 열심히 수행하면 내면의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의미의 믿음을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고발은 (적어도 적들의 입장에서) 타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고발은 틀렸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신을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형 판결만은 피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다고 믿지 않는 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신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재판의 두 번째 논점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에 대해 논의해야만 한다. '믿음'(플라톤)과 '끌어들이다'(크세노폰)의 차이에 대하서는 상세히 논할 수 없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고발장에 쓰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인, 시인, 장인들과 만나며 그들과 논박을 벌였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이 일을 "신의 일" "신에 대한 봉사"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가 믿는 신은 어떠한 신인가? '새로운'이라는 고발장의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그의 신은 낯선 존재처럼 보인다.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이나 제우스 같은 신은 아님은 명백해 보인다. 다시 Nomizein으로 되돌아가보자. nomizein의 첫 번째 의미는 주관적 믿음이다.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첫 번째 의미의 믿음과 유사하다. 그 믿음은 단순한 외적 수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을 믿음으로써 삶의 문제를 반성하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신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가 개인의 내면의 성찰을 촉구했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이를 nomizein의 의미와 결합하면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었다는 고발의 내용이 이해된다. 아테나이인의 신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신은 내 삶에 의미를 주고 나를 더 나은 자신으로 살기를,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라고 요구하는 신이다. 이는 아테나이인들이 관습적으로 믿던 신앙과는 매우 다른 성질의 신이었다. 제우스는 윤리적으로 살라는 정언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신은 정반대이다. 이를 내면적 확신으로서의 신이라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이 내면의 확신을 따르며 살았다. 그 내면에는 올바름에 대한 확신이 중심을 차지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고 쾌락에만 빠져든 아테나이 및 그들의 종교와 논박을 했다. 곧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나이인 전체를 자신의 대화 상대자로 삼고, 그들이 믿는 신이란 얼마나 하찮은지 그리고 그 신에 기대어 사는 아테나이인의 탐욕과 삶이란 것도 얼마나 하찮은지 증명하고자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에 자신을 돌보라고 말하는 새로운 신을 소개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라는 그의 명령과 다르지 않다. "묻고 검토하고 논박"(29e)하는 일은 그 명령에 따른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는 신을 존중하지 않고 새로운 종류의 신을 믿었다.

이 모순적 말은 이렇게 이해할 때 성립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예 국가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 맹목적으로 자신의 확신만을 따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고, <크리톤>에서 보여주듯 합법적 절차에 따른 결정을 자의적으로 뒤집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소크라테스가 최종적으로 주장하고자 한 바는 정치체제, 구체적으로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체제의 구성원들이 올바름을 지향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강유원,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참조) 이를 제대로 파악하면 두 번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올바름, 덕, 좋음(선한 목적)을 중심이 놓고 사유했기 때문이다.

멜레토스 등 소크라테스의 적들은 그가 들여온 믿음이 아테나이에 유해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체제의 전통을 거부하는 그의 믿음을 위험분자로 분류했다. 그런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반문한다. "가장 훌륭한 양반, 당신은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국가인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이 당신에게 최대한 많아지게 하는 일은, 그리고 명성과 명예는 돌보면서도 현명함과 진실은,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않는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29e)

영혼을 돌보는 삶.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이 삶을 살았으며, 그런 삶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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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9o8p7h6i5s4t 2022-07-2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8-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dman 2022-08-11 17: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초란공 2022-08-14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죄는 주류 세력을 거슬리게 한 ‘괘씸죄‘였던 건가봅니다.

Redman 2022-08-15 15: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렇죠..괘씸죄.. 그래서 흑백선전으로 소크라테스를 몰아붙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