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가 위대한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그는 우선 애니메이션 창작자로서 위대하다. 완벽주의는 창작자 미야자키 하야오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그는 캐릭터 디자인, 스토리, 원화, 연출, 컷씬 하나하나에까지 직접 개입하여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을 디즈니와 비교했을 때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하야오의 작품관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을 그저 아동만을 위한 매체에서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직품으로 변모시켰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야오가 작품에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과 가치관을 주입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반전', '생태주의', '여성주의'이다. 그는 자신이 관철해온 가치관을 애니메이션 속에 명확하게 담아놓으면서도, 치밀한 연출과 매력적인 캐릭터들, 탁월한 연출과 심리 묘사 등으로 영화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은 그 자체로 재미있지만, 특유의 깊이까지 더해질 수 있었다. 주제의식 면에서 절정에 이른 작품이 <모노노케 히메>라면, 오락성과 작품성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가히 최고라 칭할 수 있는 작품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에게 보내지는 그 어떤 찬사도 받을 자격이 있는 20세기 최고의 애니메이터이다.
하야오가 위대한 두 번째 이유는 일본제국이 저지른 과오들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직시한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 사회의 성찰자이다. 과거를 잊으려 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 하야오는 작품 내외적으로 쓴소리를 보냈다. 하야오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조차 하지 않는 행태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제국일본이 자행한 학살을 묵인하고 자신들을 피해자로만 인식하는 역사관을 소리 높여 비난한다. 반전이라는 주제도 자신이 오롯하게 살아낸 20세기 일본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것이다. 저무는 일본의 초라하고 사악한 역사•전쟁인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이때에, 하야오의 같은 청아한 도덕의 목소리는 참으로 귀중하다.
그리고 <바람이 분다>를 통해서 우리는 하야오가 위대한 세 번째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람이 분다>는 하야오를 오래토록 괴롭힌 문제에 대한 답변이자, 하야오의 삶과 현대 일본을 들여다볼 수 있는 허가증이다. 이 작품은 하야오의 은퇴작이다. 비록, 지금으로서는 그의 다른 만년작처럼 이 영화도 '하야오의 은퇴작이 될 뻔했던 작품'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하야오가 <바람이 분다>를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진지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그는 육체적으로 너무 늙었다. 1941년생인 그는 이 영화를 작업하던 때에 이미 70세를 넘긴 고령이었다. 그는 이전처럼 제작의 전 과정에 개입하기에는 체력적으로 무리가 많았다. 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녹아내리는 플롯에서 볼 수 있듯이, 창작 면에서도 하야오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최정점을 보여준 이후 그의 작품은 이제 치밀하지도 완성도가 높지도 않았다. 따라서 <벼랑 위의 포뇨>가 개봉되고 5년이 지난 뒤 제작한 <바람이 분다>를 자신의 진정한 은퇴작이라고 여겼음은 틀림없다.
이런 점 때문인지 <바람이 분다>는 자전적이며 고백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 영화는 실존했던 비행기 설계사 호리코시 지로, 호리 타츠오의 소설 <바람이 분다>(본작의 원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을 모티프로 삼아 새롭게 창작해낸 캐릭터 '호리코시 지로'라는 비행기 설계자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꿈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지로'는 부분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이지만, 하야오는 이 인물에 자신을 완전히 투영하지 않는다. 세 모티프는 마치 기독교의 삼위일체처럼 상호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상호독립적이다. 그러므로 지로를 보면서 특정 장면의 지로가 미야자키 하야오인지,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인지를 엄격히 분리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삼자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로와 비행기의 관계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애니메이션의 관계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기술과 재정 모든 면에서 열악한 일본의 환경에서 독일과 미국 같은 기술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자신의 비행기를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지로처럼, 하야오가 지로와 같은 열정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임했다. 지로는 결국 비행기 제작에 성공하는데, 이러한 지로의 인생역경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터로서 자신의 삶을 흡족하게 회고하면서 내린 결론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낭만적으로만은 해석될 수 없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 해석을 용인하지 않는다. 호시코리 지로는 '제로센'이라는 전투기를 개발한 인물이다. 제로센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의 자살특공대 '카미카제'가 사용하던 전투기로, 일본제국의 전쟁수행에 동원되어 동아시아 전역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왔고, 이 비행기에 탑승한 일본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도 앗아갔다.(이에 대해서는 오오누키 다카시의 <죽으라면 죽으리라>와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침조하라) 이런 끔찍한 역사를 가진 전투기와 그 전투기를 발명한 인물의 인생을 그저 꿈 많은 순수한 청년의 성공기로 해석하는 것은, 어둠의 심장과 같았던 20세기의 역사를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 영화 자체가 낭만적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하야오는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연 중으로 제국 일본의 전쟁수행을 비판한다. 이 영화는 지로의 전투기 개발 성공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뒤가 더 있다. 자신의 전투기가 시험 비행에 성공하는 그때, 지로는 놀란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 이 씬 뒤에 폭격으로 불타는 도쿄의 모습이 이어지고(아마 도쿄대공습을 묘사한 것이리라) 지로의 꿈 속으로 씬이 전환된다. 이 지로의 꿈 씬은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지로는 꿈 속에서 자신의 우상인 카프로니 백작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지로는 자신이 개발한 비행기가 전쟁에 이용되고 살상무기가 된 것에 회의를 느낀다. 무언가 체념한 듯한 표정의 지로는 지긋이 하늘을 응시하고, 그런 지로의 앞을 제로센 12대가 지나간다. 이들은 카미카제 특공대이다. 지로는 백작에게 말한다. "저 비행기를 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자 백작이 이렇게 말한다. "비행기는 저주받은 꿈이야" 지로는 순수하게 비행기만을 추구하던 꿈 많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이 지로의 꿈을 이용하고 짓밟아버렸다. 지로의 꿈과 노력이 저주받았다는 말은 순수한 열정과 별개로 어떻게든 전쟁에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그 비참한 운명에 있다. <바람이 분다>는 결코 전쟁을 미화하거나 그 시절의 향수에 빠져 과거를 낭만화하는 류의 작품이 아니다. 여기서도 반전이라는 주제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며, 하야오는 결코 이를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작품은 논쟁적이다. 전쟁 미화는 아니더라도 제로센의 개발자 지로를 미화하고 그의 전쟁책임을 면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영화의 본질과 맞닿아 있으므로, 이를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앞서 말했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이 분다>를 통해서 자신의 오랜 고민에 답하고자 했다.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하야오에게, 반전주의자면서 전쟁무기를 좋아하는 모순을 설명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고, 하야오도 그 필요성에 동의하였다. 전쟁은 싫어하지만 전쟁에 사용된 무기는 좋아하는 아이러니는 하야오를 오래동안 괴롭힌 고민이었다. 그는 대학 강의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고 자신이 모아둔 무기서적들을 다 버릴 정도로 전쟁을 반대했지만, 얼마 뒤 무기 관련 서적이 보이면 다시 모으기 시작하는 밀리터리 매니아였다. 이 두 모순된 자아 사이에서의 갈등은 반전을 말하면서도 정작 전쟁을 실존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하야오에게 있어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요소는 일본인이라는 특수성이었다. 전범국가 일본에서 태어나 전쟁무기를 탐닉하는 것은 단순한 기호의 문제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것도 전쟁을 비판하는 인물이.
미아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일본인성까지 문제 삼았으니, 하야오 개인의 고민은 일본인 전체로 확대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원인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초국가주의적 심성 때문이든(마루야마 마사오), GHQ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제로 이어지는 역사적 기억 때문이든, 제국 일본의 기술 관료들이 전후 일본의 정계를 장악한 탓이었든(제니스 미무라), 그 무엇 때문이든 일본 전쟁인식과 역사의식은 엉클어져 있다. 일본의 책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음에도 이 문제는 빠르게 망각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밀리터리 '덕후'들을 강도높게 비난한다. 밀덕들은 전쟁사와 무기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전쟁이나 자신들의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운거나 성찰하고 반성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야오가 봤을 때 이는 형용모순이며, 잘못된 현상이다. 물론 전쟁무기를 좋아한다고 모든 이가 호전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그들도 전쟁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전범국가로서의 역사를 간직하는 공동체에 실존을 두는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전쟁과 분리시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이런 삶은 올바른 삶일까? 자신의 삶이 전쟁과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적 성찰 없이는, 반전의 외침은 원론적 차원에서 그치고 윤리적 성찰로 이어지지 못한다.
방해없이 휴식을 취하는 반전운동의 역사는 이미 일본의 역사에서 증명된 적 있다.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이하 베헤렌)의 역사가 그러하다. 1960년대 베헤렌은 프랑스 68의 동시대적 반응으로 일어난 일본의 전국적인 반전 시민운동으로, 이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의 주도도 없이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만으로 운동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학생, 회사원, 가정주부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을 반대했다. 베헤렌의 활동은 일본 시민사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소중한 유산이다. 하지만 베헤렌의 한계는 명백했다. 한국 다음으로 베트남전쟁으로 가장 많은 전쟁특수를 누린 국가가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고, 이 양심적 시민들이 10년 전 한국전쟁 때는 침묵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평자는 베트남전쟁을 가리켜 일본의 지갑과 양심을 채워준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로 옆 나라 한국의 전쟁은 모른 척하고 거리상으로 훨씬 먼 베트남의 전쟁에 반응한 이 양가적인 윤리적 괴리는 베헤렌의 가장 큰 한계이자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무시하는 반전주의자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베트남전쟁이 일본인의 양심과 지갑을 만족시켜주었듯, 제국일본의 전쟁은 일본인의 기호와 양심을 만족시켜줄 것인가? 양심적 반전주의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만년에 들어서 비로소 이 문제를 깊게 건드렸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바람이 분다>는 반전이 주제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보다 더 심오한, 전쟁 일반의 성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호리코시 지로라는 논쟁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택해 자신의 삶을 포갠 이유도 이로써 알 수 있다. 그는 지로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신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나아가 일본 사회가 잃어버린 전쟁 인식을 꼬집으려던 것이다. 지로는 제로센이라는 전쟁무기를 개발했지만, 그 자신이 전쟁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그도 전쟁에 반대한다. 아마도 지로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에 억울하게 항변할 것이다. 그는 그저 꿈 많은 소년이었고, 소년시절의 자아를 간직해 최선을 다해 비행기 설계자가 되고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저 최선을 다했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어찌됐든 그는 전쟁에 이용될 여지가 큰 무기를 개발하는 기술지였고, 스스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로의 대사에서 이러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도덕적 성찰은 부재하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지만, 실제 전쟁에 가까워지는 위태로운 국제정세에는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하다. 지로는 시종 무미건조한 톤을 유지하는데, 그가 유일하게 감정적으로 격해질 때는 비행기와 관련된 일을 할 때와 약혼자 나오코가 폐결핵으로 건강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뿐이다. 그 외에 일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무관심하다. 비행기 개발에만 열심이다. 그렇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자신의 행위가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한 성찰 없이 열심히만 살았다. 지로는 병기를 만들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이 전쟁무기로 이용된 데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로는, 핵무기를 개발하였으나 그것의 위험성을 깨닫고는 최초의 반핵운동을 주도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되지 않았다. 최선-그것이 그의 죄이다. 그리고 일본의 수많은 '지로들'의 죄악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심히 봐야할 캐릭터가 바로 사토미 나오코이다. 관동대지진 때 운명적으로 처음 만난 지로와 나오코는 몇 년 뒤 우연한 기회로 재회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나오코는 폐결핵을 앓고 있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로가 신전투기 개발에 몰두하는 동안, 나오코는 병원에서 치료에 전념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결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나오코가 너무 그립다는 지로의 편지를 받고 나오코는 병원을 나와 지로의 곁을 머물고, 둘은 그것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건강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남기로 한 대가로 나오코는 병세가 악화되고 사망한다. 나오코의 사망은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지로의 꿈에 나타난 나오코의 대사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지로의 꿈 씬에서 나오코가 등장하는 장면의 구성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지로의 눈 앞을 제로센기가 지나가고, 지로는 '저 비행기를 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컷 바로 뒤에 나오코의 환영이 등장하고 '당신은 살아'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며 사라진다. 제로센-지로의 대사-나오코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쇄는 A-B-A의 샌드위치 대칭 구조를 이루어, 마치 제로센과 나오코가 동일한 상징이라는 연상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만약 나오코=제로센이라는 도식을 받아들인다면, 양자의 유사성을 곧장 찾을 수 있다. 우선 지로의 꿈 속에서 양자는 모두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며 퇴장한다. 특히 제로센이 구름 너머로 비행하는 컷과 나오코가 마치 구름이 된 것처럼 사라지는 컷이 대칭을 이룬다. 또, 지로와의 관계에서도 유사함을 지적할 수 있다. 둘은 지로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비행기는 지로의 삶에 열심히 살 동기를 부여해준 활력이었던 한편, 나오코는 소중한 연인이자 가족이었다. 지로가 추구하던 목적은 비행기와 나오코 안에 이미 있었다. 하지만 지로는 이 둘 모두를 잃어버린다. 비행기는 전쟁으로 파괴되고 나오코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치밀하며 미묘한 연출로 그 원인이 지로에게 있음을 알린다. 제로센의 시험 비행 씬은 나오코가 남편이 살던 집을 떠나 병원으로 돌아가는 장면과 교차편집하여 대조된다. 제로센의 시험 비행은 성공하여 모두가 기쁨에 가득 차 있으나, 나오코는 그 순간에 집을 떠나며 죽음을 은유한다. 역설적이게도 지로의 꿈이 실현된 순간에 그의 사랑이 좌절된 것이다. 이러한 장면 구성은 제로센이 나오코를 죽인 것이라는 암시로도 보인다. 즉, 이 씬을 확대해석하면, 지로가 개발한 전투기가 나오코를 죽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꿈을 향한 열정과 노력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다시 나오코와 지로의 관계를 되밟아보자. 나오코는 원래 병원에 계속 입원해야 했지만, 지로의 편지 때문에 무리해서 지로를 만나러 왔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았음에도 나오코를 계속 곁에 붙잡아둔 것은, 한 등장인물의 말대로 지로의 욕심이다. 여기서도 지로는 억울해할 수 있다. 자신은 그녀를 최선을 다해 사랑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도 지로의 열심이 문제였다. 열심은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지로의 맹목적인 노력과 목적 추구 행위는 주변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과 사랑마저 파괴해버렸다.
<바람이 분다>는 호리코시 지로라는 기술자의 삶을 전유하여 그릇된 전쟁인식을 가진 인물과 사회가 불러올 파국을 경고하는 한편, 그 시대를 살아간, 그 땅에서 사는 누구도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 경고는 일본 사회 전체에게도 해당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실존을 전쟁과 연결짓지 못하고, 전쟁과 밀접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참회의 고백(confessio peccatorum)이다. 여기에 하야오가 위대한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고령에 나이에 들어서도 그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를 그치지 않고,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밀리터리 매니아인 과거의 자아와 타협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하야오는 자신의 개인적 고백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의 양심을 불편하게 만든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반성하고, 관조하며, 도덕적 권위를 세우는 참된 지식인의 전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