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은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탐구한 역작이다. 저자의 탐구 범위는 주요 행위자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의 결정과 의사소통 과정, 그리고 이로 인한 상호작용의 연쇄를 다루는 한편, 범위를 내면화하여 이들의 판단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들, 특히 심성구조의 영향, 더 나아가 이 구조가 어떻게 전쟁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이어졌는가에 닿아있다. 즉, 이 책은 풍부한 국제정치학적 통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7월위기와 유사한 역사적 사건을 공부할 때 유용한 분석 틀을 제공해준다.

  • 마크 마조워, 이순호 옮김, <발칸의 역사>, 을유문화사

발칸 지역의 발칸화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국제정세를 불안정하게 한 최대 요인이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는 오스만 제국 치하의 발칸 지역을 다루면서, 발칸에 민족국가가 성립되는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한 동방문제를 서술하였다. <몽유병자>와 관련된 부분만 읽고 싶다면 제3장 "동방문제"를 읽으면 된다.











  • A.J.P. 테일러,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전간기 유럽의 국제관계를 고찰한 책이다. "이 책은 영웅이 없는 이야기다. 어쩌면 악당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히틀러라는 한 사악한 개인에게 돌리지 않고 전후 유럽의 외교정책의 실책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클라크의 관점과 이어지는 부분이다.











  • 로버트 케네디, <Thirteen Days> [<13일>, 박수민 옮김, 열린책들]

쿠바 미사일 위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복잡하고 파국으로 갈 가능성이 컸던 국제정치 사건이다. 클라크도 이 사건을 몇 번 책에서 언급한다. 냉전이라는 구조 속에서 움직였던 행위자인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 각 국가의 의사결정 기구인 엑스콤과 소련 외무부. 이들의 행위는 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상황과 닮은 부분이 있다. 로버트 케네디의 책은 회고록이다. 비판적 가공을 거치지 않은 1차 문헌에 속한다. 이 사건을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보다 균형있게(저자의 태도가 중립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서술한 책으로는 셀던 스턴의 <존 F. 케네디의 13일>이 있다.(현재 절판) E-book으로 읽을 수 있다.(셀던 스턴의 이 책은 <Averting 'the Final Failure>의 축약본이다)










*셀던 스턴의 <존 F 케네디의 13일> 원서 제목은 <The Week the World Stood Still>이다. 이 제목은 1951년에 개봉한 고전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에서 따왔다. 이 영화는 클라투라는 우주경찰이 지구에 와 지구인들에게 분쟁을 중지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우주경찰이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 어떠한지를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 투퀴디데스, 천병희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는 현대 국제정치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는 국제정치학의 대가이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아테나이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그리고 다른 폴리스들 간의 복잡한 정세와 국제관계를 분석한 역작이다.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방송을 들으며 <몽유병자들>에서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서술과 분석틀이 투퀴디데스를 읽을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이 책까지 함께 거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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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24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유병자들 궁금해서 정보 봤더니 천페이지가 넘네요. 두꺼울 줄 알았지만 정말 두껍네요. 그래도 일단 담아갑니다.

Redman 2023-03-24 19:34   좋아요 0 | URL
아마 각주 빼면 800여쪽일 겁니다 ㅎ
 

신카이 마코토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영화는 <너의 이름은.>이다. 이 영화는 무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재난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점이 통했는지,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은 일본 영화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으며, 한국에서도 크게 흥행하여 그 해 당연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다. 성공적인 데뷔 이후 공개한 두 번째 장편 작품인 <날씨의 아이>에서는 기후 재난을 다루었지만 박평식 평론가의 말처럼 "황홀하게 뜬구름 잡"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감독의 개성은 강해졌으나 작품성은 약해졌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전작의 흔적과 단점들은 감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과 비슷하다. 감독의 색깔은 옅어졌지만 대중성이 올라갔고 작품적으로도 전보다는 나아졌다.

신카이 마코토가 신작에서 택한 주제는 재난, 특히 지진이다. 이는 그리 놀랄 만한 선택은 아니다. 운석 재해를 등장시킨 <너의 이름은.>의 정신적 밑바탕에도 지진, 더 정확히 말하면 동일본 대지진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은 가상의 재해와 환상적 장치를 통해 동일본 대지진을 은유적으로 암시하며, 그때 이후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집단 치료를 시도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거대한 재난을 경험한 인간에 대해 예술은,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중요한 미학적 질문을 던진 <너의 이름은.>의 정신은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이어지며, 감독은 주제의식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스즈메는 우연히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을 열게 된다. 이 문을 열면 미미즈라는 재앙의 신이 나오는데, 미미즈가 땅에 떨어지면 큰 지진이 발생한다. 스즈메는 이 재앙의 문을 닫기 위해 소타와 여행을 떠난다.(여기서 영화는 로드무비의 성격을 띤다) 먼저 이 여행의 성격을 규정해보자. 스즈메와 소타의 여행은 거대한 힘에 맞서는 모험 서사이며, 일본 전통 설화에서 유래한 듯한 모티프가 섞여 제의의 성격도 동시에 띤다. 재앙의 문은 규슈, 고베, 에히메, 도쿄 등 일본 전역에 걸쳐 있으며, 문이 있는 장소는 과거 온천으로 유명했던 마을이거나, 산사태로 무너진 학교, 폐쇄된 놀이공원 등 재해로 인하여 더 이상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이곳으로 가는 것조차 만만치 않지만, 미미즈라는 위험한 존재를 막기 위해 그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있어도 불가능하다. 문을 닫기 위해서는 어떤 주문을 외우며 열쇠로 문을 잠가야 한다. 소타의 가문은 대대로 이 문을 관리하고 닫는 역할을 담당한 '토지사' 집안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여정은 스즈메의 귀향 서사이다. 여행의 최종 종착지는 이와테현으로, 이곳은 스즈메가 어린 시절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곳이자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일본 동복부 연안에 위치한 지역이다. 스즈메는 어머니가 재해로 사망한 곳에 어머니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감독은 이 시점부터 동일본 대지진의 기억을 선명하게 상기시킨다. 당시 너무나 어린 아이였던 스즈메는 사건 당시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스즈메는 현재 일본의 10대, 20대 초반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은 2023년을 기준으로 12년이 지났다. 현 중고등학생은 이 사건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그보다 어린 이들은 아예 이런 사건이 있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폐허가 된 장소들을 반복해서 비춰주면서 재해로 인해 파괴된 일상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비추며 이들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이를 생각하면, 왜 감독이 문이라는 소재를 택했는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재난의 문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이 문을 열면 저승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는 '다녀왔습니다'가 되지 못했다. 재난은 생과 사를 너무나 철저하게 갈라놓는다. 스즈메가 문을 닫기 전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소리는 그 일상을 파괴하는 재앙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너의 이름은.>이 재난을 막고 다시 연결되려는 타키와 미츠하의 간절함에서 영화의 에너지를 형성한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안점은 재난을 막는 것 자체에 있기보다는 재난이 갈라놓은 일상 세계의 회복에 있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스즈메의 여정의 제의적 성격은 내면화되어 스즈메 개인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제의가 되며, 이는 영화 밖으로도 확장되어 커다란 재난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려는 하나의 거대한 의례가 된다. 마지막에는 이런 주문을 외운다. "목숨이 덧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기원합니다. 앞으로 1년, 앞으로 하루, 아니 아주 잠시라도 저희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용맹하신 큰 신이여. 부디 부탁드리옵니다." 이 대사를 통해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의례가 된 것만 같다.(실제 이동진도 이렇게 평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모든 역경을 뚫고 여정을 마무리하는 한 소녀의 이 말이 참 아름답다.

어떤 상처로부터 치유된다는 것은 그것을 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그것이 집단적 차원으로 발생하였다면 더욱 그렇다. <너의 이름은.>이 개별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을 지적한 데 이어, 현실의 사건을 직접 호명하여 어느 작품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하는<스즈메의 문단속>은 장소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함을 지적한다. 단순한 기억을 넘어 성장 서사로서의 희망까지 보여준다. 그것이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유난히 서사에 취약한 신카이의 약점이 고스란히 노출되며, 그래서 후반부로 가면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제대로 따라가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전작보다 서사로 승부를 보려는 의도는 확실히 좋게 느껴졌으며, 감독의 진정성은 보는 이의 정서를 자극하여 공감을 이끌어낸다. 어느 모로 보나 관객이 신카이 마코토의 이름에 기대하는 바를 확실히 충족시켜준 작품이다. 한때 신카이 마코토에게는 호소다 마모루와 함께 '포스트 미야자키'로 촉망 받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누구도 포스트 미야자키가 아니며 그렇게 되지 못함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신카이 마코토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고 주목할 만한 감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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