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과 민중반란> '저자 후기'에서 조경달은 자신이 어째서 동학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얘기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조선인의 피를 타고났음에도 일본에서 태어나야만 했던가. 생각해보면 이것은 나의 소년기부터의 의문이었으며, 나를 조선에 대한 연구로 이끈 원초적이고 소박한 문제의식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주제가 바로 갑오농민전쟁이었다."

이것은 저자가 왜 동학농민운동을 연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저자가 살아간 생활공간인 일본은 저자의 문제의식과 관심사를 규정하였다. 이것에 대한 고민에서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단과 민중반란>이라는 책까지 쓰게 되었다.

강유원의 서평집 <주제>는,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의식과 주제에 따라 장을 나눠, 해당 주제의 책에 대한 서평을 실었다. 그 주제들이란 "책과 교양" "역사" "근대" "파시즘" "전쟁" "한국과 동아시아"이다. 왜 이 주제들을 선택했는가. <주제> 서문을 옮겨보겠다. "궁극적으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이는 손에 책을 쥐는 순간이면 항상 답해야 할 물음이다. '책과 교양'에 담긴 게 그것이다. '역사'와 '근대'는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원리를 책에서 깨우쳐 보려는 시도이다. 근대의 가장 두드러지고 절망적인 모습은 '파시즘'과 '전쟁'이다. 나는 독재자 박정희의 유사-파시스트 권위주의 시대에 유아기와 청소년 시절을, 살인자 전두환 정권 시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파시즘은 그침 없이 찾아야 하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한국과 동아시아'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의 소산이다. 그곳을 떠나면 나의 책읽기와 글쓰기는 무의미할 것이다."

강유원의 문제의식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조경달처럼 그가 살아왔던 시대와 공간에서이다. 근대 이후 한국, 더 넓게는 동아시아에서 태어나 박정희와 전두환 시기를 살아왔다는 겪음이 그의 관심사를 일차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조경달은 근현대 한국사를 공부하였고, 강유원은 서양철학과 사상사를 공부하였다. 둘의 공부 영역은 다르지만, 왜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은 비슷하다. 그들에게 공부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바탕으로 나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보면, 둘의 전공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 둘의 공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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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17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마지막에 나온 공부의 정의를 아침에 보니까 책 읽고 글 쓰는 의욕이 생겨요. 이제 출근해야 해서 당장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ㅋㅋㅋㅋ 공부의 정의를 간직하면서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저녁을 기다려야겠어요.

Redman 2023-05-17 09: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 하루 되십쇼 cyrus님!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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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인터넷에 연재한 서평문을 엮은 서평집이다. 이 책의 다소 난삽한 서문을 통해 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책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보자. 정희진에게 책이란 "정치적으로 치열"하고 "자기 내부의 모순까지 껴안는 명확한 당파성의 소유자"이다. 한마디로, 책이란 명확한 정치적 입장연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책에 대한 정의는 저자가 책을 고르는 기준과 저자의 독서 방법을 짐작하게 한다. 저자는 책을 고를 때 "관점"을 중요시하고, 그중에서도 "'주류'의 관점 밖에서 쓰인,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는다. 그런 책은 "지적 자극"을 안겨다주어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주류'란,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대체 어느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가 하면, 정확하게 규정한 부분이 없어 알기 어렵다.(일단 이대 출신이므로 '학벌 좋은 사람'에 포함되기는 한다) 한국 사회의 주류를 벗어난 관점이라고 보면 좋을까? 이런 규정이 없다는 사실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상은 '어떤 책을 읽은 것인가'라는 교양 쌓기의 수단으로서의 공부의 기본적인 주제이다. 저자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서문에 이어지는 "좁은 편력"에 따르면, "책을 읽은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습득이고, 하나는 지도 그리기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책의 내용을 익히고 내용을 이해해서 필자의 주장을 취하는 것이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후자는 책 내용을 익히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는 읽고 있는 내용을 기존의 자기 지식에 배치하는 것이다." 저자는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인 습득보다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인 지도 그리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입장연관성을 가지는 책을 읽을 때 독자도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여 나의 입장과 저자의 입장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할 때 중요하다. 이때 주의할 것은 책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책이든 한계가 있음을 인지할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독서론을 이렇게 길게 정리한 내 서평은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습득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는, '지도 그리기'가 가능하려면 먼저 '습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독서는 먼저 최대한 객관적으로, 저자의 언어를 통해 저자의 입장에서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자기만의 프레임"을 갖게 된 것도 그 이전에 쌓였던 공부와 독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쌓고 유기적으로 지식 체계를 형성해 나가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만 그려서는 안 된다. 저자는 독서가 한 권의 책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습득이 없으면 책은 통과만 하고 나갈 수 있다. 저자는 책 내용 요약을 불필요하다고 보지만, 그런 요약에 사유를 발달시키는 힘이 있다.

여기서 하나만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에 수록된 저자의 서평을 다 읽지는 않았고, 내가 읽어보았거나 관심 가는 책의 서평만 읽었다.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홉스의 <리바이어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니체 <선악을 넘어서>, <신약성서>, <극단의 시대>, <님의 침묵>, <이상 문학 전집>, <거짓의 사람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등등. 저자의 주 분야인 여성학과 문학 서평에서는 군데군데 인상적인 통찰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분야, 특히 고전 서평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개념과 용어를 엄밀하게 규정하고 최신의 논의를 수용하여 자신의 공부를 진척시키는 독서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최신의 논의가 무조건 낫다는 속물적 연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구가 계속되면서 이전의 논의와 이해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고전 번역과 관련해서도 더 나은 번역본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읽어야 한다. 홉스 <리바이어던>을 읽고 무엇인가 진지하게 말하려면 최소한 진석용 역을 읽어야 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무엇인가를 논의하려면 박상섭 역이나 곽차섭 역, 강정인/김경희 역이 기본이다. 저자는 1990년에 나온 중역본을 인용하며, 니체의 <선악의 저편>도 박찬국 역이나 김정현 역이 아니라 1983년에 출간된 중역본을 읽는다. 저자의 공부가 어디서 멈추었는지, 저자가 사상가들, 나아가 지식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치졸하게 번역본으로만 뭐라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논의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문장이 많았다. 가령, 홉스 <리바이어던> 사족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대영제국의 지식인 홉스에게 '식민지는 국가의 번식으로서 국가가 출산한 자녀'였다." '식민지'와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 '제국'을 거론한 듯한데, 홉스 당시의 잉글랜드는 '대영제국'이라 하기도 어렵거니와 홉스의 정치철학이 '제국'이라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의문이다. 홉스를 읽었지만, 홉스를 역사적으로 맥락화하여 이해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서평에서는 "마키아벨리는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던 청렴한 지식인이었다"라고 쓴다. 마키아벨리가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다는 서술은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마키아벨리가 청렴한지는 그 자신과 신만이 아실테고, 진짜 문제는 그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서술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유토피아론이 있던가? 그가 <군주론>, <로마사논고>, <피렌체사> 어디에서든 이상적인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한 적이 있던가? 회페의 <정치철학사>나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 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를 읽어도 처음 듣는 이야기이고, 그의 저술을 훑어라도 본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유토피아적인 논의는 발견하기 어려움을 알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평가에 어떠한 문헌적 근거를 댈 수 있을까?

그리고 저자는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요약하여 한국에 적용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다룬 글에서 정희진은 이렇게 쓴다. "벤야민은 탈식민을 외치고 있다." 이는 벤야민이 한 말이 아니라, 슈미트의 독재정론을 숭모하여 모조한 '비상사태 테제'를 저자가 확장하여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의 '비상사태론'으로 한국 정당들의 '비상'대책위원회를 비판하는 것은 벤야민 논의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여 적용했다기보다는 벤야민을 외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습득을 등한시한 지도 그리기의 폐해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이미 심드렁해진 나는 목차를 펴보고 관심 가는 책 제목을 따라 아무 글이나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님의 침묵> 서평에서 "모든 예술은 남겨진 자의 고통에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그마저도 대충 읽게 되었다. 이런 책임 없는 문장은 저자에 대한 신뢰도만 깎을 뿐이다.

인터넷에 연재된 짧은 글에 너무 많은 것을 지적하는 듯 싶지만, 잡글과 논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람의 글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정리해보자. 정희진은 신뢰할 만한 지식을 주는 사람인가? 아니다. 여성학이라면 몰라도 다른 분야에서 정희진은 체계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교양 독자다. 정희진의 독서방법은 지식에서 지식으로,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유기적 공부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다. 정희진의 방법을 따를시 문헌적 근거 없는 자의적 해석과 적용의 덩어리만 남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독서 방법은 학문적 공부는 물론이요 교양 쌓기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내가책을 더이상 읽거나 참조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책의 제목은 '정희진처럼 읽기'이나 이 책은 정희진처럼 읽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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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15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험상 한 번이 아닌 ‘두 번 이상 책이 내 몸과 머리를 통과할 때’ 전보다 책이 새롭게 보였어요. 그리고 이전에 책을 읽으면서 생긴 오독과 편견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

Redman 2023-05-15 09:39   좋아요 3 | URL
저는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을 보고 평가가 바뀌기도 합니다. 중요한 줄 몰랐던 책이 매우 중요하단 것, 반대로 좋았던 책이 별 거 없는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2023-05-15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풍오장원 2023-05-2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있는 이 책에 대한 글 중 유일하게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Redman 2023-05-27 20:02   좋아요 0 | URL
어우 과찬이십니다 ㅎㅎ
 


1. 빈약한 투퀴디데스 이해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만, 약자는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느라 고달프다"...강자와 약자의 처지에 관한 이 유명한 문구는 분명 히 아테네인들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며, 현대의 인기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느라 고달프다는 식으로 대구를 이룬 균형 잡힌 표현에 힘입은 바가 크가...그러나 이는 투키디데스가 썼던 표현이 아니다. 투키디데스의 <전쟁사> 전체를 자구대로 따라가며 해설한 기념비적인 해설서의 마지막 3권에서 사이먼 혼블로어가 올바르게 표현한 것처럼 정확한 번역은 이렇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고, 약자는 따라야 한다." 심지어 이것도 약자에 대한 강요라는 개념을 과장한 감이 있다. 투키디데스가 말한 내용은 그저 "약자는 따른다"로, 반드시 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

투키디데스 작품의 번역과 해설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런데도 혼블로어는 무려 20년 이상의 세월을 쏟아부어 <전쟁사> 전체를 상세히 다룬 역사적, 문학적 해설을 내놓았다. 새삼 그럴 필요가 있었냐고? 투키디데스의 그리스어가 워낙 모호하고 난해해서 이런 작업은 지금도 충분히 가치 있다. 오늘날에도 투키디데스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전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pp.84~87)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로마제국의 창작물

로마 작가들은 단순히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에 대해 논쟁만 한 것도 아니고, 그를 본보기로 여겨 칭송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알렉산드로스'를 거의 만들어냈다...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명칭이 쓰인 입증 가능한 최초의 사례는 로마 시대 플라우투스의 희극에 나오는데 알렉산드로스 사후 150여 년이 지난 기원전 2세기 초반의 것이다. 내가 보기에 플라우투스 자신이 그 단어를 고안해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아마도 로마인들 사이에 퍼진 신조어였을 것이다...어떤 의미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은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ty the Great'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의 창작물이다.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기록이 모두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가 기원전 1세기 말에 작성한 것이다. 현재 학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정보원인 아리아누스는 서기 80년대에 니코메디아라는 도시에서 태어났고, 로마 정계에서 경력을 쌓아 120년대에 집정관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카파도키아의 총독으로 복무했다.

(pp.124~125)











3. 엉터리 역사가 리비우스

정통적 관점에서 볼 때 리비우스는 고대 기준으로든 현대 기준으로든 아주 형편없는 역사가였다. 리비우스는 매우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고 전해오는 과거 이야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역사가였다. 물론 고대에는 이런 모습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리비우스는 대다수의 고대 역사가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리비우스는 입수한 정보를 스스로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일관성 있는 단일한 서사 구조로 집약시키지 못할 때도 많았다. 리비우스가 같은 사건을 두 번 서술한 악명 높은 사례들이 있는데, 다른 두 자료에서 살짝 달리 서술된 내용을 보고 같은 사건임을 모른 채 빚어진 실수가 아닌가 싶다.

(...)

'방패'라는 그리스어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로마 역사가에게서 과연 얼마나 똑똑한 폴리비오스 독해를 기대할 수 있을까?

(pp.175~180)









4. 클레오파트라의 현실

클레오파트라 "신화를 둘러싼 외피를 제거하면" 허구의 표면 아래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그럴듯한 인생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한 것은 전무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현존하는 최선의 자료라고는 세금 감면 허가 문서에 나오는 그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서명',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순간에 "나는 전리품으로 끌려가지는 않을 거야"라고 반복해서 말했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다.

(285p)



5. 타키투스의 <역사>

왜 타키투스는 69년 1월 1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결정적인 정치적 변화는 네로의 죽음으로 인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몰락과 함께 68년 6월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이 바로 타키쿠스가 말하려는 요점이다. 집정관 중심의 연도 표기라는 과거 공화정 시기의 구조를 보란 듯이 과시함으로써 타키투스는 로마의 전통과 제정기 정치 현실 사이의 긴장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황제의 통치와 공화제 관료 취임 양식이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

지금까지 나온 <연대기> 번역 중 첫 문장의 불온한 다중성을 제대로 포착한 판본을 보지 못했다. "도시 로마는 처음부터a principio 왕들의 소유였다." 라틴어 a principio는 '처음에는'과 '처음부터'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이런 이중성이 중요하다.

(pp.362~366)











6. 좋은 황제

'좋은' 황제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로마 사람들의 생각이다. 좋은 황제는 관대해야 하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똑똑해서 마냥 속고 이용당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어야 했다. 좋은 황제는 또한 대중과 직접 마주할 배짱을 지녀야 한다. 말하자면 상류층만 사용하는 외딴곳에 있는 사설 목욕 시설이 아니라 공중목욕탕에서 찾아노는 일반인 모두와 어울리고 고생도 함께 해야 한다. 로마 황제는 친구나 동료 같은 이미지여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한다.

(373p)



7. 로마 노예의 복잡한 사회사

로마처럼 많은 노예를 해방시킨 사회는 일찍이 없었다. 나아가 로마인은 해방노예에게 로마 시민이 누리는 거의 모든 권리와 혜택을 주었다. 고대 아테네에서 해방노예는 기껏해야 '거주 외국인' 정도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반면 로마에서 로마 시민에 의해, 특정 법률에 따라 해방된 노예는 누구든 몇몇 소소한 제약만 따르는 로마 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세대부터는 일부 제약마저 사라져 사실상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유명한 시인 호라티우스도 로마 사회 최상위층과 가까이 지냈던 해방노예의 아들인데 이처럼 눈길을 끄는 사례는 그뿐만이 아니다. 한 추정에 따르면, 로마 도시에서 가사 노동을 하던 노예 대부분은 자유민으로 생을 마감했다.

(...)

자유는 얻었지만 로마 시민권은 얻지 못한 범주다. 물론 이들이 나중에 아이를 갖는다든가 해서 추가 기준을 충족시킴으로써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도 있었으리라.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에 열거한 각각의 범주에 속했는지를 말하기란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거치게 되는 조각보처럼 복잡하게 이뤄진 계층 구조다. 노예, 혹은 노예의 노예부터 공식 절차에 따라 해방된 시민권을 가진 해방노예까지, 위로의 상승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로마 법조항 가운데 하나는 노예를 얻어, 노예와 불륜을 저지른 자유민 여성을 해방노예 지위로 '강등시킨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자유민 여성이 노예 주인의 동의 없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노예 주인의 노예가 되었다.




8. 로마 세계의 언어적 다양성

애덤스는 적어도 단순화시켜 보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라틴어가 군대의 '공식' 언어였다는 견해를 사실상 무너뜨린다. 그는 그리스어가 각종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히고, 속주민으로 구성된 부대의 하급 병사들은 장교가 쓰는 라틴어 구사 능력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각자의 모국어로만 편안한 의사소통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로마 군대의 실상은 그동안 영화, 소설, 교과서 등에 나왔던 비슷한 모습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병사들의 이미지보다는, 언어적 문화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구성원들이 한데 뒤섞인 현대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

속주나 변방에서 장기간 근무하는 관리들은 현지 언어 구사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출 수밖에 없었으리라.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현지인 아내, 여자친구, 매춘부 등을 취했다. 추정컨대 그들이 라틴어로만 성생활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정도의 이중 언어 사용이 애덤스가 강조하는 그날그날의 간단한 기록, 급히 휘갈겨 쓰는 낙서, 조잡하게 새겨진 묘비 등에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여기서 다루는 대상이 고대 세계에서 다수를 점하는 글 모르는 최하층에 속한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이들 현지 토착어들은 많은 경우 기록 가능한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아 문서 기록으로 남길 방법이 없었다.

(pp.466~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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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극장에서만 4번 보고 코믹스, 소설도 구매했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다른 작품도 전부 찾아서 봤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필수적으로 기독교 수업을 하나 들어야 하는데, 내가 들은 수업은 영화 하나를 택해서 그것의 기독교적 의미를 분석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때 내가 고른 영화도 <너의 이름은.>이었다. 그 정도로 좋아했고 심취해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 하면 떠오르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세카이계 작품,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남녀의 복잡미묘한 사랑, 유려한 감정선, 뉴에이지풍의 피아노 연주곡, 빛의 마술사라 불릴 정도로 빛을 가장 아름답고 사실적으로 활용하는 연출, 감각적인 배경 작화 등. 특히 빛과 배경 작화가 가장 시너지를 내는 부분이 하늘 묘사이다. <너의 이름은.>도 첫 장면부터 숨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하늘 묘사로 시작한다. 하늘 묘사는 신카이 마코토의 최고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복잡미묘한 감정선과 이 감정을 더욱 증폭시켜주는 배경 작화 덕분에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넋이 나가게 되고 황홀한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날씨의 아이>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대놓고 하늘과 빛이 주요 소재임을 드러내기에 그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이 예상은 틀리지 않았으나, 그것이 독이 되었던 것 같다.

그의 하늘과 빛 작화는 역시나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제대로 작심하고 나온 듯, 이전 어느 작품보다도 힘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에서 하늘 작화가 정점에 달한 것 같다. 비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맑은 하늘로 바뀌는 것을 이 사람만큼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특히 이 영화의 내용상 하이라이트 장면인 구름 고래의 등장 씬은, 코딱지만한 핸드폰 화면으로 봤음에도 전율이 느껴졌다. 신카이 마코토식 작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이 영화가 아쉽다. 좋은 작화를 받쳐주지 못하는 스토리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특징들을 앞에서 열거했는데,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설정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참 비슷비슷하고 한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쁘게 말하면 감성과 비주얼만으로 스토리나 연출상의 단점을 상쇄한다는 인상도 받는다. 좋게 말하면 장단점이 극과 극을 달리는 감독.

이 영화는 그 정도가 심하다. 우선 전작인 <너의 이름은.>의 서사를 지나치게 답습하고 있다. 조연들의 사용이나 전반적인 연출이 전작과 너무 흡사하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활기차고 리드미컬한 씬인 모리시마 호다카, 아마노 히나, 아마노 나기의 '맑음 소녀' 활동은 <너의 이름은.>에서 미츠하와 타키가 서로 바뀐 몸에 적응하는 과정을 비교하며 보여주는 장면을 지나치게 오마주했다는 느낌이 든다. 음악이 들어가는 타이밍, 장면 구성, 플롯까지 너무 똑같다. <너의 이름은.>에서 가장 활기찬 장면이 나온 뒤에는 오노데라와 타키의 도쿄 데이트 씬이라는 앞의 씬과 대조되는 차분한 장면이 뒤따른다. <날씨의 아이>에서도 '맑음 소녀' 활동 뒤에 차분한 장면이 이어진다. 공통적으로, 둘 다 이 장면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작품의 문제가 심화된다. 그 외에도 영화의 클라이막스 씬도 잘 보면 <너의 이름은.>을 연상시키는 연출이 꽤 여럿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이해 가능하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동안 단편 애니메이션이나 광고처럼 짧은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가진 장편을 만든 것은 <너의 이름은.>이 처음이었고, <날씨의 아이>는 두 번째이다. 그런 그가 전작을 많이 차용한 것은 어찌 보면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렇다고 단점까지 그대로 복붙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더 문제 삼는 것은 영화의 주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전부터 세카이계 작품을 추구했다. 세카이계란 개인의 행위나 선택이 전 세계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는 작품을 말한다. <날씨의 아이>는 이런 세카이계의 형식을 따와서 다수를 위해 한 명을 희생할 것인가, 세상 누구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인 한 사람을 택할 것인가라는 공리주의적 딜레마를 주제로 삼고 있다.

어째서인지 비가 끊이지 않고 내리는 도쿄. 가출 청소년인 호다카는 도쿄로 도망쳐 와 똑같은 가출 청소년인 히나와 만나게 된다. 아마노 히나는 이 비를 멈추게 하고 다시 날씨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히나는 제물로 희생되어야 한다. 히나는 결심을 하고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호다카를 떠나지만, 호다카는 그런 히나를 구하기 위해 비가 그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히나와 다시 만나고자 하고, 둘은 끝내 재회한다. 결국 비로 인하여 일본의 많은 지역이 물에 잠기고 만다.

사실 호다카가 여기서 무슨 선택을 했든, 누구도 그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공리주의적 딜레마는 애초에 정해진 답이 없으니까. 도쿄가 물에 잠겼더라도 그 무엇보다 귀중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면, 박수칠 일이다. 반대로 히나가 희생되고 재해를 막았다면, 이것도 납득할 만하다. 문제는 감독이 호다카와 히나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장면에서 인물의 내면 묘사와 납득할 만한 설명이 결여한 채 앞서 말한 황홀한 배경음악과 하늘 묘사만으로 영화를 채워, 나로서는 호다카의 선택에 의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스가 케이스케의 일견 혼란스러운 행동도 관람에 방해가 되었다. 이런 낮은 개연성, 부족한 스토리 연출과 내면 묘사는 신카이 마코토가 개선해야 될 점이다.

게다가 영화 결말에서라도 호다카의 선택과 그로 인한 영향을 나름 타당게 정당화하는 내용이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았겠건만, 영화는 그러지 못했다. 영화 말미에서 한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도쿄는 원래부터 물에 잠겼던 곳인데 개발을 통해 육지가 된 것이니 다시 침수된 것은 원래 자연대로 돌아간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절대 멈추지 않는 비로 인하여 발생했을 수많은 수재민과 인명피해를 '그냥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설명인가? 이런 대사는 오히려 영화의 주제의식을 손상시킬 뿐이다.

중요한 장면마다 전작을 그대로 오마주하여 맥이 빠지는 연출, 낮은 개연성과 부족한 심리 묘사, 부족한 스토리를 비주얼로 극복하려는 듯한 연출, 미숙한 주제의식 등 기대보다는 실망이 컸던 작품이었다. 신카이 감독의 팬으로서 그가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개발하여, 이전의 단점을 또 답습하지 말고, 올해 말에 개봉한다는 새 작품에선 더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22년 4월에 <날씨의 아이>를 보고 썼던 글을 늦게나마 올림)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이 개봉되어 지난 토요일 티브이 영화채널에서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를 재방해주었더라.

<날씨의 아이>는 전에 한 번 보고 리뷰도 남겼는데, 난 썩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색깔이 강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는 유독 단점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도 비교적 큰 화면에서 <날씨의 아이>를 보고 싶어 시청하여 얻은 수확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이이었다. 히나는 아직 초등학생인 남동생 나기와 둘이서만 살며 나기의 보호자 역할까지 한다. 자신이 실질적인 가장이니 온갖 아르바이트에 심지어 밤일까지 하려는 등 도와주는 이 없이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간다. 이제 막 중학생인 호다카는 (이유는 끝내 나오지 않으나) 가출을 하여 도쿄로 무작정 상경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도시의 차가움과 삭막함에 이리저리 치이기만 한다.

둘은 도시라는 공간에서 가장 힘이 없고 연약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사회의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한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더 못살게 군다. 호다카가 처음에 머물던 스가의 사무실도 유쾌하게 연출되어서 그렇지 사실 청소년 노동 착취나 거의 다름없는 짓을 행했다. 이런 세상에서 달리 의지할 곳 없는 호다카와 히나, 나기가 의기투합하여 '맑음 소녀' 사업을 시작한다. 이 모습은 일종의 소외된 자들의 연대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히나와 호다카가 친해지게 된 계기도 호다카가 유흥업소 사람과 같이 있는 히나를 도와주면서부터이다. 둘의 관계는 10대들의 풋풋한 첫사랑이면서 서로를 의지하며 도와주는 연대의 측면도 있다. 그래서 맑음 소녀 사업 쇼트는 히나의 기도로 떠오르는 햇살처럼 다른 쇼트에서는 볼 수 없던 따뜻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날씨의 아이>의 사회비판적 측면을 보니, 이 영화에 대한 내 평가도 별점 반 점 정도 상승했다.(2점에서 2.5) 물론 후반부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다.


*23년 3월에 <날씨의 아이>를 다시 보고 썼던 글을 늦게나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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