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이자 영화에 대한 영화인 <파벨만스>를 보고 '감독은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마틴 스코세이지의 <휴고>, 데이미언 셔젤의 <바빌론> 등등.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도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감독인데, 이 영화를 보고 받은 감동은 위 거장들의 작품을 봤을 때와 유사했다. <지구 최후의 밤>은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꿈을 꾸는 듯한 감동을 준다.
이 2시간 짜리 영화는 1시간 10분까지는 완치원이라는 여인을 찾아나서는 뤄홍우의 이야기고, 후반 1시간은 뤄홍우이 영화관에 들어간 뒤 펼쳐지는 꿈 혹은 영화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편의상 이를 1부와 2부로 부르겠다. 1부에서는 뤄홍우의 현재 이야기와 과거 완치원과의 파편적인 기억이 교차되어 나온다. 2부가 '영화'를 상징한다면, 1부의 이야기는 '기억'으로 집약할 수 있다. 영화와 기억을 중요 키워드로 삼는다면, 1부에서 매우 중요한 대사가 두 개 있다. 플래쉬백 장면에서 이런 뤄홍우의 독백이 나온다. "영화는 거짓말이야.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가짜 세계. 하지만 기억은 진실과 거짓인 섞인 채 수시로 눈 앞에 떠오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독백에 묘사된 영화와 기억의 성격이 완치원과 카이젠(둘 다 탕웨이가 연기함)의 특징, 그리고 1부와 2부의 분위기와 형식과 정확히 상응한다는 것이다.
먼저 두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 살펴보자. 완치원은 1부, 카이젠은 2부에서 뤄홍우가 만나는 여인들이다. 완치원은 오로지 뤄홍우의 단편적인 회상에서만 등장한다. 그렇다면 완치원은 기억 속의 여인, 기억의 여인이다. 완치원의 전남편이 그에 대해 하는 말은 정확히 기억의 성격과 조응한다. "그녀는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므로 뤄홍우와의 사이에서도 완치원은 진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뤄홍우만의 거짓이 교묘하게 혼합된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카이젠은 영화의 여인이다. 우선 뤄홍우가 카이젠을 만난 것은 영화관에서 꿈 혹은 영화 속이다.그러니 카이젠은 실제 속 여인이 아니다. 완치원과 똑같이 생겼으나, 완치원은 아니다.
형식적 측면을 보면, 1부는 '기억'처럼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그리고 어디가 현재이고 과거인지 주의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처음보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고 몽롱하다. 반대로 2부는 약 1시간 가량이 하나의 쇼트(처럼 보이도록)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찍은 이유를 두 가지 추측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기억의 특징이다. 1부와는 달리 생생하고 또렷하다. 1부는 마치 인간의 기억 그 자체를 영화화했다는 인상을 준다. 대개 영화의 플래쉬백은 마치 과거에 찍어둔 영상마냥 연속적이며 선명하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개 사람의 기억은 단편적이고 불연속적이다. 심지어는 바로 몇 초 전 일도 왜곡해서 기억할 정도로 기억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는 나도 왜인지 모르게 과거의 순간이 불현듯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영화의 1부는 그러한 기억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불쑥 끼어드는 쇼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고려하면, 기억과 대비되는 꿈, 그리고 꿈을 표현한 2부가 선명한 이유가 이해가 된다. 꿈도 지나고나면 불확실해지기는 매한가지지만, 적어도 꿈을 꾸는 동안에는 선명하다. 감독은 파편적이고, 거짓이 진실과 섞어 있고, 불연속적인 기억과 대비되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오로지 거짓으로 구성된 꿈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두 번째는 꿈과 영화의 공통점이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여기서는 <영화당>에서 한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을 많이 참조했다) 꿈과 영화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억의 세계는 거짓에 진실이 섞여 있기에 과거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과거에 잃어버린 것,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것, 과거에 불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은 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뤄홍우의 아버지가 그러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도망간 아내를 잊지 못하고, 아내의 사진을 고장난 시계에 넣어두고는 평생 슬픔에 잠긴 채 살다가 죽었다. '고장난 시계'라는 소품 자체가 그가 과거에 멈춘 시간에만 살아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사진을 단서로, 4살 때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어머니와 닮은 과거의 연인 완치원을 추적하면서 계속 그를 떠오리는 뤄홍우 역시 과거에 매달리는 인물임을 추측할 수 있다.
반면 꿈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2부에서 뤄홍우와 시간을 보내고 얘기를 나누는 인물들은 모두 1부 시점에선 뤄홍우가 만날 수 없었던, 혹은 만나지도 못했던 인물들이다. 카이젠은 현재 만날 수 없는 연인 완치원을, 처음에 등장해 같이 탁구를 치는 꼬마는 뤄홍우의 아들 혹은 죽은 친구 백묘를, 중간에 다른 남자와 도망치려는 늙은 여성은 뤄홍우의 어머니를 변주한 인물들이다. 그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니 기억에도 없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꿈이자 영화이다. 가짜로만 이루어져 있는 이 공간은, 가짜이기에 만난 적도 없는 이들을 만나게 해주어 과거의 응어리를 풀어준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운 환상들을 보여준다. 뤄홍우는 카이젠과 함께 하늘을 날며, 어느 주문을 외워서 방을 회전시킨다. 더욱이 아주 찰나의 순간만 타오르는 '폭죽'을 영원토록 터뜨리게도 한다.
폭죽은 카이젠이 축제 노점에서 산 물건으로, 싸구려에 1분밖에 타지 않는다. 카이젠은 이 폭죽을 뤄홍우에게 선물해준다. 뤄홍우는 꿈 속 어머니로부터 받은 '고장난 시계'를 카이젠에게 선물해준다. 폭죽과 시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두 인물의 대사에 따르면, 폭죽과 시계는 순간과 영원을 의미한다. 1분 동안만 터진다는 폭죽을 키고 카이젠은 뤄홍우를 데리고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이동한다. 뤄홍우는 방을 회전하고 그다지 밝지 않은 달빛 아래서 둘은 키스를 나눈다. 그동안 8분의 시간이 지났는데, 놀랍게도 그 폭죽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원쇼트 구성 때문에 8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더 실감나게 느껴져 이 '마법'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만날 수 없는 이들과의 만남, 비행, 회전하는 방, 꺼지지 않는 폭죽. 이런 것들은 영화가 '가짜들'로써 부리는 매력적인 마법들이다. 특히 꺼지지 않는 폭죽에서 드러나듯이, 영화는 순간을 영원으로, 또 영원을 순간으로 만든다. 아주 찰나의 프레임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영화가 영원하다는 것이 아니다(<바빌론>에서는 이와 비슷한 의미의 대사가 나오기는 한다). 비간이 말하는 영화의 영원은 영화 속에서의 영원이다. 고장난 시계와 싸구려 폭죽처럼, 영화는 거짓이고 한계가 뚜렷하고 찰나의 예술이지만, 찰나의 시간 안에서 영원을, 놀라운 기적을 만든다.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서 '종말'이 딱 두 번 언급된다. 첫 번째로 뤄홍우가 완취원을 위로하면서, 그리고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하기 직전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타이틀 화면으로 두 번째 등장한다. 1부에서 뤄홍우는 말한다. "사람들은 1999년이 지나면 종말이 올 거라고 했지. 하지만 지금은 2000년이고 우린 여전히 엿같은 삶을 살고 있어."
이 말을 둘의 관계에 대입해보자. 뤄홍우와 완취원의 사랑은 위태롭다. 뤄홍우는 그 위기를 극복하고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완취원을 위로한다. 하지만 그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약속은 꿈 속에서, 영화 속에서 다른 형태로 이루어진다. 카이젠과의 사랑은 영화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사랑이고 한시적이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서만큼 진실한 이 사랑을, 영화는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마법이다.
<파벨만스>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영화는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마법의 공간이야."(정확한 대사가 아닐 수는 있다) 스필버그도 느꼈던, 그리고 비간 감독이 말하는, 그런 거짓으로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주는 영화의 마법은 너무나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