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나름 제 독서 원칙이 있다면

입문서나 해설서 대신에 고전을 원전 그대로 직접 읽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되든 안 되든 일단 직접 고전 원전에 들이박습니다. 

그렇지만 '되든 안 되든'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기 마련이죠.

특히, 기껏 어려운 책 읽었지만 머리에 남는 것이 없으면 속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는 역시 해설서가 도움이 되긴 합니다. 


여기서는 저도 고전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아직 한참 부족한 독서 내공이지만, 고전과 그 고전을 읽으며 매우 도움을 받았던 해설서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해설서들은, 정말 딱 한 책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그 내용과 구조를 상세히 다룹니다. 그래서 저 혼자만으로는 몰랐던 정보도 알 수 있어 매우 유용합니다.


그렇지만 해설서부터 읽기보다는 직접 원전을 읽을 것, 읽으면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갈 때 참고자료처럼 이용해 주었으면 합니다. 1차적으로는 원전을, 그리고 부가적으로 이 책들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남의 눈을 통해서 읽는 것보다는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더 낫기 때문이죠


1. 강유원 <고전강의> 시리즈

고전 강독 강의로 매우 유명한 강유원 박사님의 강의록을 책으로 엮은 <고전강의> 시리즈입니다. 


강의니 만큼, 여러 책을 다룹니다만, 원전을 직접 인용하고, 또 책의 주제의식과 당시 시대적 배경, 구조 등을 매우 충실하고 밀도 있게 분석하여 강독하셔 어떤 책을 읽을 때, 강유원 박사의 <고전 강의> 시리즈가 기둥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2.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서양고전하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고전입니다.


강대진 선생님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읽기>는 제목처럼,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한 권 한 권 충실하게 설명하고, 해설해줍니다. 본인이 직접 밝히듯, 여러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호메로스의 원전을 동시에 읽으며, 강대진 선생의 책을 참고로 하면 산만한 글도 별 단점이 되지 않습니다. e-book도 있는데, e-book의 표지와 제목은 구판의 것입니다.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와 <문학고전강의>에서 호메로스 서사시를 읽습니다. 



3.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과 <신국론>








<고백록>도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신앙에 관계없이. 국내에 여러 번역본이 있는데, 제가 추천하는 번역본은 위 4종입니다. 그중에 권위 있는 것은 성염 역본이나 선한용 역본입니다. 개신교인이시라면 선한용 역을, 가톨릭 분이시라면 성염 역을 추천합니다(가장 권위 있는 건 성염 역이지만)

<고백록> 해설서로는, 가토 신로 선생이 쓴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가 좋습니다. 저도 도움을 많이 받았던 책입니다.

선한용 선생이 쓴 <고백록 해설>은 안 읽었지만, 같이 리스트에 올려놓습니다. 다만 둘다 고백록 전체가 아니라 가토 선생은 10권까지만, 선한용 선생은 9권까지만 다룬 것이 아쉽습니다. 


<신국론> 혹은 <하나님의 도성>은 최초의 역사철학서 혹은 역사신학서입니다. 


그만큼 서양철학사와 서양신학사에서 중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읽어도 매우 적확한 통찰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유명한 김회권 선생의 <하나님의 도성, 그 빛과 그림자>는 <신국론>을 읽을 때 큰 도움이 됩니다. 김종흡 역본을 저본으로 전체 내용을 충실히 요약하고, 각 권마다 소결론을 붙여 한계와 의의를 덧붙입니다. 배경 정보도 잘 정리하여 <신국론>과 동시에 읽으면 좋을 것입니다.



4. 공자 <논어>

 <논어>는 정말 번역본이 많죠. 어디까지나 제 주관으로 읽어볼만한 번역을 추려보았습니다. 


이기동의 <논어강설>은 주희의 해석에만 매달리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90년대 세계적인 중국사 연구가였죠. 리링은 고문헌학, 고고학, 고문자학에 정통한 학자라고 합니다. 배병삼의 논어 해석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각각 동양철학 연구자, 역사학자, 고문헌학자, 유교 정치사상 연구자의 번역입니다. 각자 특색이 있으니 어떤 것을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토 진사이는 오규 소라이와 함께 에도 시대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仁'(사랑)을 바탕으로 공자 사상의 진의를 재해석하며, 주자학을 비판합니다. 참고할만한 해석이라 생각하여 같이 소개합니다.



5. 노자 <도덕경>

노자 역시 번역본이 셀 수 없이 많이 나와있습니다. 


그중에서 읽어볼만한 번역은,

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왕필 주가 수록된 김학목 역과 임헌규 역, 이강수 역, 리링입니다. 


임현규 역은 왕필 주는 없지만, 죽간본 번역되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해제까지 충실하여 다른 해설서 대신에 이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리링의 <노자>도 참고하면 좋은 해설서라고 생각합니다. 



6.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론 개략>은 메이지유신으로 국가 체제에 큰 변혁이 생기고, 문명화를 위해 나아가는 그 시점에 어떤 담론이 오갔는지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19세기 후반이라는 전환의 시대에서 한 지식인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고,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는지를 염두에 두며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뿐만 아니라 이런 책도 읽어야 합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는 가장 유명한 문명론 개략 해설서입니다. 고야스 노부쿠니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는 마루야마와는 다른 관점에서 문명론 개략을 읽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둘 다 절판으로 구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대신 <학문의 권장>이라는 후쿠자와의 또다른 텍스트를 비교해서 읽으며, 그의 문명국 구상을 구체화할 수 있겠습니다.



7. 유길준 <서유견문>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개략>과 대응되는 한국의 텍스트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입니다. 강화도조약과 서세동점이라는 조선이 처한 위기 상황에서 유길준이 구상한 문명론이 책의 내용입니다. 후쿠자와와 비교해서 읽어볼 책입니다.


해제도 잘 되어 있고 유길준의 서유견문 한 단락 나오면, 역자 장인성이 상세한 해설을 덧붙여 다른 책 없이 이 책만 있어도 꼼꼼하게 읽어도 될 듯합니다. 다만, 완역은 아닙니다.







8.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공산당선언>도 많은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읽어볼만하다고 생각하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어본 펭귄클래식 <Communist Manifesto>는 본문 분량과 맞먹는 해설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같이 추천해봅니다. 강유원 박사의 강독 강의를 엮은 것이 있습니다. 품절이긴 하지만, 아직 중고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9.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서평도 썼습니다. 전쟁사, 정치사, 역사학 서술의 고전.


그러나 문체가 어렵기도 하고, 생소한 이름과 지명의 나열에 혼자서 읽기에는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국가 간에 서로 얽히고 설킨 그 복잡한 구도..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러한 어려운 점을 보완해 줍니다. 동저자의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는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투퀴디데스에 대한 의미 있는 정보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10. 존 밀턴 <실낙원>

 존 밀턴의 <실낙원>은 단언컨대 최고의 영미 서사시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1~3장은 시인만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신의 창조와 구원, 사탄의 유혹, 인간의 타락을 그린 서사시입니다. 조신권 역과 이창배 역이 평가가 좋습니다. 


C.S.루이스의 <실낙원 서문>은 매우 차근차근 실낙원을 읽을 때 필요한 요소들을 알려주고 해설합니다. 최재헌의 <다시 읽는 존 밀턴의 실낙원>도 좋은 참고자료입니다. 


참고로 이창배 역은 범우사판과 동서문화사판이 있는데, 범우사판이 동서문화사판의 오류 등을 바로잡고 낸 판본이라니, 범우사판을 읽을 것을 권합니다. 



11.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현대의 고전입니다. 


강유원 박사가 <장미의 이름>으로 강의한 책이 있는데, 그 책은 절판되었습니다. 대신 같은 글이 <책 읽기의 끝과 시작> 부록에 '아주 긴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쉽게 구하여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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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05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고전의 소개도 감사한데, 적절한 해설서른 더 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즐거운 저녁되십시요!

Redman 2021-02-05 2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밤 되십쇼!!

김세희 2021-02-14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읽으려고 알아보던 중 이렇게 소중한 정보 접하게되어 감사드립니다!!

Redman 2021-02-14 21:21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좋은 독서 되시기를

셀린느 2021-07-1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감사합니다
 
징비록 - 판본비교
류성룡 지음, 신태영 외 옮김 / 논형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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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는 잘 알려져 있듯이, 지난 일을 반성하여 후환을 조심하기 위해서이다. “전란의 시초임진왜란의 일을 기록하여 후대에는 두 번 다시 이러한 재난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실한 마음으로 징비록을 쓴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독자는 과연 무엇을 징비(懲毖)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저절로 따라온다.

 

전쟁을 막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우선 임진왜란이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전쟁이 일어난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에 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침략 의지가 만들어낸 전쟁이므로, 전쟁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비난의 대상은 일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여야지, 이를 조선으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혹자는 일본 사절단을 갔다 온 김성일과 황윤길의 서로 다른 내용의 보고를 근거로, 동인과 서인이 당쟁에 빠져 전쟁 방비를 소홀히 한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징비록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도, 오늘날의 선입견과는 달리 조선이 아예 무방비 상태로 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기록을 추려보자.

 

우리 조정에서는 왜국의 침입을 근심하여 변방의 일에 능통한 재상을 뽑아서 삼남 지방을 순찰하고 방비토록 하였다. 김수를 경상 감사로, 이광을 전라 감사로, 그리고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서 병장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수축케 하였다. 특히 경상도에 성을 많이 쌓게 하였으니, 이를테면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의 좌우 병영을 새로 쌓거나 고쳐 쌓았다.”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날로 급속하게 퍼지자, 임금님께서 비변사에 명하여 장수될 만한 재목을 각자 천거하도록 하였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하여 드디어 정읍 현감에서 등급을 뛰어넘어 수사(水使)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사람들 중에 더러 고속 승진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는 해자와 성을 새로 쌓거나 병영을 개선하여 적이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쟁에 대비한 인재 선발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인용문에 주목해보자. 전쟁의 가능성이 불거지면서 조정에서는 능력 있는 인재들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류성룡의 추천으로 이순신은 고속 승진이 의심될 정도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조선이 전쟁 준비를 소홀히 했다고는 보기 힘들겠다.

 

물론 나라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어 중앙과 지방이 모두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고, “군정의 근본인 장수를 뽑는 요령과 군사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백에 하나도 제대로 되지않았다는 류성룡의 비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조선이 침략에 대비한 어떤 노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시덕이 지적하듯이,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본 같은 해양 세력은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대규모 공격을 할 수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바다보다는 육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현명한 생존이었다.” (김시덕,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다 했을 때 왜구, 혹은 명종 대 을묘왜변 수준의 침공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조선군은 질이 매우 낮았던 반면에, 일본군은 100년간의 전국시대 동안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이었다. 게다가 그 수도 20여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전쟁 초반에 조선이 압도적으로 무너진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적의 수준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임진왜란을 통해서 무엇을 반성하고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징비록에서 류성룡이 진단한 원인 분석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 류성룡은 조선이 일본과 친교를 유지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일본의 정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비판한다.

 

그는 신숙주의 유언을 인용하면서원하옵건대, 우리나라는 일본과 화평을 잃어서는 아니 되옵니다.”성종 대 이후로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신숙주의 유언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반성한다. 성종은 신숙주의 말대로 사신을 보내 일본과 더 화목하게 지내려고했다. 그러나 대마도에 이르러 풍랑 때문에 사신들이 병이 생기자 원래 보낸 사신을 돌아오게 하고, “이로부터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매번 그 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예를 갖추어 접대만 하였다.” 조선이 일본의 정보를 얻을 수 있던 통로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이나 왜관뿐이었던 것이다.

 

잠시 한명기의 설명을 통해 당시 일본과 조선의 전사(前史)를 간략히 살펴보자. 조선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책, 삼포 왜관 등 경제적 반대급부를 주는 회유책을 구사하였다. 그런데 삼포 지역(현재의 부산, 창원, 울산)에서 일본인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조선 정부는 이들에 대한 통제와 억제 정책을 강화했고, 결국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을 겪으며 쇼군과 오우치씨, 쇼니씨 이외에는 접대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상업적 교류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조선과 일본의 사이는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전국시대 통일 이후 대마도를 주요 대상으로 무역 등을 통해 일본을 회유, 교린하려 했던 조선의 시도는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한명기, 국제 관계와 전쟁, 조선시대사 1 국가와 세계, 푸른역사 참조)

 

대일관계가 악화되어 갔던 사이에 일본은 거의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종적으로 일본을 통일하여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통일 직후부터 조선, 명을 경유하여 인도 정복을 구상하고 준비했던 듯한데, 문제는 조선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도요토미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 듯, “여러 섬의 왜인들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왕래하면서도 그 엄한 영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결국 일본이 착실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와중에도 조선은 가만히 있었고, 준비도 면에서 큰 차이가 난 채로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더해 앞서 언급한 압도적 무력의 군사들이 들어오면서 초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대비 실패는 궁극적으로 외교적 실패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의 정치인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무심하였고, 그로 인하여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 결과로, 조선은 7년 동안 혹독한 전란에 시달렸다. 류성룡의 징비(懲毖),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주변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외교적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못했음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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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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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전쟁 속에서도 인간적 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한 스무 살 여성의 생생한 체험적 기록이자 삶에 대한 치열한 집념과 투지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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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음 / 너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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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대동법>(역사비평사)을 저술하였는데, 누군가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라는 제목으로 그 책의 서평을 남겼다. 똑같은 제목을 사용한 이 책은, 그 서평의 질문에 대한 고민과 저자가 내린 결론이 담겨 있다. 책의 내용과 관련해 제목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덧붙이자면, 왜 선한 정치를 펴도록 교육받은 지식인이 기축옥사 같은 “거대한 파국”을 맞이했는가, 일 것이다.

이 책은 선조 8년~23년까지의 15년 동안에 벌어진 동서분당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는 더욱 조명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대단히 ‘조선다운’ 정치적 갈등의 양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조선 시대에서 가장 “정치에서 이상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였음에도 사림의 정치적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저자는 이 시기를 “권력현상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정치적 행위자들의 정확한 정치적 입장과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파헤친다. 저자의 이러한 방법론은 비단 조선시대 당쟁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림은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까지 약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4번의 사화를 받는 등 정치적 탄압을 견디어 왔다. 특히 기묘사화(1519)에서 선조가 즉위할 때까지(1567) 약 50년이라는 탄압의 시간과 기억은 선조 대 당쟁의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였고, 그것이 정치에도 반영되었다.

명종 대 정치는 외척과 훈구 세력이 기승을 부렸던 파행적 정치를 보여주었기에, 선조가 즉위하면서 떠오른 정치적 과제도 자연스레 “구체제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였다. 신진사림에게 구체제 청산이란, 훈척 세력과 외척 세력의 청산을 의미하였다.

교과서에서는 동서분당에 대해 이조 전랑 자리를 놓고 벌인 심의겸을 비롯한 서인과 김효원을 필두로 하는 동인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어 발생한 것으로 배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지 않은 매우 피상적인 설명이다. 심의겸은 선조 초기 수렴청정을 하였던 인순왕후의 남동생, 다시 말해 외척 세력이었다. 따라서 동인에게는 심의겸과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 서인 그룹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사실 선배사류였던 서인은 “사화를 미연에 막고 신진사류의 대표적 인물들을 보호한 공이” 있는 심의겸과의 관계를 쉽사리 끊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후배사류는 이를 이해할만한 여유나 식견이 없었던 듯하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갈등은 동서분열의 원인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림분열의 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갈등이 개인적 수준을 넘어 사림 간 집단주의적 갈등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분열의 기저에는 역사적 경험에서 누적된 구세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그에 대비되는 자신들에 대한 도덕적 확신이 존재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언관직을 차지하면서 오랫동안 부패한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을 해왔던 신진사림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주도권을 확신하였다. 언관은 오늘날로 따지면, 비판적 민간 언론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그 본질적 기능은 “비관료적 기능으로 관료조직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언관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국정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아니라 비관료성과 부패 방지였다. 국정 현안 해결은 대신에게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러나 신진 사림이 목격해왔던 대신은 부패만 일삼는 훈척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대신의 권한과 역할을 부정하고 공론을 자신들만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을 것이다. 이는 선도 대 대신의 권위와 권한 약화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동서분당을 이해할 때 핵심적 사안은 사림을 제어할만한 합리적이고 권위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였다. 이 시기는 언관의 권한이 강한 대신 대신들의 권한은 매우 취약하였던 시기였다. 선조 대 사림들은 부도덕한 이전 시대 조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존경을 받는 대신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대신을 배제하고 정치적 주도권과 공론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치적 욕망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역사적 경험이 바탕이 된 도덕적 확신에서 나온 행위였다.

이이가 주장한 개혁의 핵심도 동서 사림을 통합하는 한편 약해진 대신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나, 대신권의 강화는, 공론을 유일하게 주도할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진심으로 믿었던 삼사에게는 이전 시대로의 회귀와 이이 당파의 조정 진출을 의미했기에 이이는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당쟁이 더욱 격화되면서, 동인은 서인과의 갈등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라보았고, 이는 곧 이들이 한 세력은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했다. 이것이 그들의 프레임이었고, 그들이 인식한 조정의 현실이었다. 대표적인 동인이었던 김우옹은 “당시 조정의 정치세력을 선과 악의 구도로 구획했다.” 다른 동인들도 “당시를 심의겸이 주도하는 외척의 전횡이 계속된 시기로 보았다.” 류성룡마저도 “개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서인이라고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선조 8년부터 이어진 사림 세력의 분열 양상이 더 극단적으로 반복된 사건이었다. 기축옥사 심문 과정에서 서인 정철은 동인에게 노골적인 적의감을 드러냈고, 피해자였던 동인 측도 정철을 포함하여 이미 한참 전에 사망한 이이에 대해서도 대단한 적대감을 보였다.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기축옥사를 통제할 수 있던 인물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던 선조뿐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사림의 갈등은 역사적 요인과 당시 정치 구조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정치 현상이었다. 과거의 경험에서 이들은 도덕적 정당성에 갇히어 분열했고 “그것보다 더 강력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의 자장으로 빨려들고 마침내 함몰되었다.” 자신의 정치를 하려던 선조는 이들의 분열을 자신의 왕권 강화에 이용하였고, 그로써 독재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사림 그 누구도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시기 정치 행위자들에게 공통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 즉 정치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었다. 그나마 이이를 제외한 모든 사림은 개인적 혹은 당파적 신념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을 뿐, 실제 사회적 결과에 책임을 지는 데에는 실패했으며, 선조는 정치적 책임을 지는 대신 그것을 사림들에게 떠맡기고 자신의 왕권 강화에만 집중하였다. 명종 대에서 선조 대로의 이동은 사림의 역할 변화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도덕적 비판자가 아니라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를 알았던 인물은 이이밖에 없었다. 정치가 “민생개혁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정치세력 간의 시비”로 격화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 책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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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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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여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소되면서 끝이 난다. 그 과정에서 아킬레우스는 철없는 소시민에서 성숙한 영웅으로 성장한다.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전우 파트로클로스와의 우정, 공동체에의 헌신, 무엇보다 자신의 운명, 즉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2.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서사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직접적인 주제임을 드러낸다. 아가멤논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취한 크뤼세이스 대신 아킬레우스가 얻은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감으로써 그의 분노가 촉발되었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첫째 “자기보다 훨씬 못한” 아가멤논이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는(강대진, <일리아스, 영웅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자신의 “명예의 선물”을 가져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차적으로 명예의 문제가 개입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 트로이아군 헥토르에 의해 자신과 가장 친밀한 우정을 나눴던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헥토르에게 복수해야 하며, 침해된 그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헥토르를 죽이는 것은 22권에 가서 이루어지고, 명예의 회복은 24권에서 이루어진다.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본래 전장에서 많은 적을 쓰러뜨려서 획득한 것이었다. 명예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받는 전리품이라면, 브리세이스를 돌려받고 거기에 추가로 더 좋은 것을 받아야지 아킬레우스는 명예롭게 될 수 있다. 특히나, 전황을 한번에 뒤집고 헥토르를 쓰러뜨렸던 아킬레우스가 아닌가! 그는 더 좋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되돌려줌으로써 새롭게 명예를 부여받는다.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뺏어서 훼손된 명예가, 헥토르의 시신을 되돌려주면서 회복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프리아모스를 위로하며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 온유함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3.

반면에 9권에서의 아킬레우스는 이와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9권에서 아킬레우스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아킬레우스의 선택’이다. 아킬레우스는, 전장에 나와 다시 싸우라고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온 사절단을 이렇게 거부한다. “내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죽음의 종말이 나를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다시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공동체를 구하고 전공을 세워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 길을 택하면, 그는 불멸의 명성을 얻지만 필시 죽는다. 다른 하나는 명예를 버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 얇고 긴 인생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아킬레우스는 사절단의 권유를 뿌리치고 후자를 택한 것이다. 강유원에 따르면, 이때의 명예란 “위험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는 것”이다. 아직 아가멤논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은, 속된 말로 아가멤논 때문에 삐진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나가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왜냐하면 “싸워봤자 고맙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 뻔하고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심경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는 파트로클로스의 전사다. 주요 장수들이 계속해서 부상을 입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파트로클로스는 전투에 나선다. 하지만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전사하고, 그 소식을 듣게 된 아킬레우스는, 죽을 줄 알면서도, 드디어 전투에 임하기로 작정했다. 전우의 죽음을 통해서 정신적 성장을 이룩할 것이다. 아가멤논과 화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하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필요에 따라 가슴속 마음을 억제하도록 합시다!

이제 나는 분노를 거둘 것이오. 화해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화를 낸다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오.” (19.65~68)

“가장 영광스런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여!

선물들은 마음이 내키시면 적당히 주시든지 아니면 간직하시든지

그대가 알아서 할 일이오. 지금은 서둘러

전의를 가다듬읍시다.” (19.146~149)

절정은 앞에서도 언급한 프리아모스와의 대화 장면이다. 프리아모스가 홀로 자신을 찾아오자,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프리아모스의 처지에 공감해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며 그의 장례식을 완수할 때까지 전투를 그치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특히, 24권 518~551행까지 이어지는 행복, 길흉화복, 죽음를 얘기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에서는 9권에서 사절단을 거절했던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이전에는 싸움만 잘하는 육체적 영웅에 불과했던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의 갈등-파트로클로스의 죽음-헥토르와의 전투를 거치면서 영웅에 걸맞은 인격까지 얻게 된 것이다.

4.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리아스>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트로이아와의 전쟁에서 죽는다. 원래 아킬레우스가 살고자 했던 삶은 명예를 포기하는 대신 죽음의 운명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전장에 돌아왔다는 것은 죽을 운명을 각오했음을 말해준다. 작중에서 아킬레우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수용한 결과, 그는 시인의 노래를 통해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되고, 제우스가 새로운 명예를 수여하였다. 그것은 강대진이 말했듯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 적에게 관용한 데서 생겨난 새로운 명예이다.”

누가 영웅으로 불리고,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영웅적 가치란 무엇인지. <일리아스>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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