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론 개략 후쿠자와 선집 1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성희엽 옮김 / 소명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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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론 개략』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의 불평등과 권위주의를 공격하고 일본의 문명화 방향을 제시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외교(“외국교제”)라는 일본에 전에 없었던 새로운 위기 상황과

메이지 유신 이후 8년에 국가 진로를 두고 매우 유동적이었던 상황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독립을 지키는 일을 우선이라고 보았고,

“나라의 독립은 목적이고 문명은 수단”임을 논증하면서 자신의 문명화 비전을 전개한다.

후쿠자와는 서양 문명의 핵심을 “다사쟁론”에서 비롯되는 ‘자유의 기풍’으로 보았다. 그런데

일본에는 “권력의 편중” 즉 전제(專制)가 오랫동안 만연하여 사회 구조적으로 자유의 기풍이 나올 수 없으니,

일본 사회의 불평등한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여 근대적 평등한 개인을 일본 사회에 세우려 했다.

그는 천황가의 혈통이 국체(國體)라는 의견에 맞서

천황가가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진정 국체를 지키는 일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위해서는 인민의 지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명의 본지는 인민의 지덕(知德)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은 국체를 지키는 수단이다.

여기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급진적인 평등주의·자유주의·개인주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의 사상은 당대 동아시아의 근대 사상가들, 특히 유길준과 량치차오, 그리고 후대에 마루야마 마사오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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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 원전 번역) - 톨스토이 단편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8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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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작품은, 우화의 형식을 빌린 이야기 속에서 그 자신의 신념과 이상, 사랑과 선, 진실한 노동을 다루기에 더욱 감동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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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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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비딕은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주인공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가령, 모비 딕, 이슈메일, 에이해브), 무엇에 주목하여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질 만큼 풍부하고 모호한 상징들로 가득 찬 작품이다. 솔직히 읽기는 읽었지만, 아직 이 소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전체를 이해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고래 설명하는 부분은, 넘기거나 대충 읽거나 했다. 정확히는 발췌독으로 다 읽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내가 주목한 부분만 간략히 기록해두고자 한다. 나는 에이해브 선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모비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2.

모비딕은 주요 등장인물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성경에서 다양한 메타포를 따왔다. 이슈메일은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을 영어식으로 읽은 이름이다. 에이해브는 구약 <열왕기> <역대기>에서 나오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이름을 영어 발음으로 읽은 이름이다. 그리고 피쿼드호가 출항하기 전에 에이해브의 파멸을 예언한, 어딘가 똘끼 있는 남자의 이름은 일라이저, 즉 아합과 대립했던 예언자 엘리야이다.

 

이렇게 기독교적 상징을 곳곳에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작품에서 당연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제9장 매플 목사의 설교일 것이다. 자각적 정신을 가진 행위자로서 작가가 아무 이유 없이 매플 목사의 설교를 소설에 넣었을 리는 없다.

 

매플 목사의 설교 본문은 요나서이다. 그 설교의 주제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죄인에게 내려지는 멸망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요나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멜빌이 요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다. 내 생각에, 요나는 에이해브와 상동(相同)하지만, 정반대되는 인물이며, 모비딕에서 이 설교는 작품 전체의 결말과 에이해브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요나를 이해하면, 자동적으로 에이해브의 캐릭터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매플 목사의 설교에서 요나는 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자로 그려진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타르시스(오늘날의 스페인)로 가려 한다. ,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함과 동시에 그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인 요나에게 하나님은 고래의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나 살아 있는 파멸의 심연으로 그를삼켰다.

 

요나는 신을 거역한 자였지만, 그 대가는 고래에 삼켜지는 벌이었다. 고래의 배 안에서 요나는 3일 동안 회개하고, 3일이 지나고 뭍으로 나온다. 이제 그는 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에 가서 예언의 말씀을 전한다. 결국 불복종으로 인해 요나에게 내려진 벌은, 요나의 진실하고 성실한 회개를 통하여 거두어졌다. 요나는 순종과 회개하여 다시 삶을 얻었고, 그 보상으로 최고의 기쁨을 얻는다. 왜냐하면 최고의 기쁨은 어떤 법률이나 주인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신을 주님으로 받들며 천국에만 충성을 바치는 애국자에게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하면, 요나는 처음에는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으나 결국 신에게로 회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반면에 에이해브는,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에게 대적하는 자이다. “신앙심은 없지만 신 같은 사람(god-like man, 122p)”이라는 표현은 그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에이해브는 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신앙심이 없다. 대신 그 자신이 신과 같은 인물이다. 다른 곳에서는 기독교 세계의 이방인이라고 그를 묘사하여(204p), 그가 기독교 세계에서 떠났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하나님과 대적하는 존재임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에이해브가 신실한 기독교도 스타벅과 죽기 직전까지 대립했던 것은 필연이었다.

 

에이해브가 그토록 죽이려는 모비 딕역시 여러 상징으로 점철된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에이해브는 이전 항해에서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어버렸지만, 모비 딕을 향한 그의 복수심은 단순히 다리를 잃어버린 데서 오지 않았다. 그는 이전부터 모비 딕에 대해 복수심을 품었던 것이다. 41모비 딕에는 그의 복수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은 앙금을 휘젓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진실, 체력을 떨어뜨리고 뇌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에게는 모비 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에이해브는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의 총량을 그 고래의 하얀 혹 위에 쌓아 올려, 마치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고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켰던 것이다.” (242p)

에이해브의 분노와 복수의 감정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가 담긴 감정이다. 이 복수는 일단 모비 딕을 향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을 향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왜냐하면 같은 곳에서 모비 딕을 욥의 고래”(리바이어던)라고 부르는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에이해브는 신이 창조한 작품을 죽이려고 드는 것이다. 신실한 기독교도 스타벅이 에이해브의 목적을 하늘을 모독하는 그의 목적이라고 탄식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223p). 이렇게 보면, 에이해브의 항해는 신 혹은 절대자로부터 벗어나려는 한 인간 실존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점에서는 요나와 같지만, 결국 그는 끝까지 신에게 회개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맑은 정령이여, (중략) 나는 그대의 불가사의한 위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힘이 나를 무조건 지배하려 들면, 나는 지진 같은 내 생명이 끝날 때까지 저항하겠다.” (602p)

그는 절대적인 힘의 지배를 극구 거부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681p)

 

유언과도 같은 이 에이헤브의 마지막 말에서는,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는 절대적 존재에 겁먹지 않고 오히려 죽어서까지도 그와 대결하려는 비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요나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에게는 요나와 같은 기쁨은 약속되지 않는다. 이를 알았음에도 에이해브 선장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불가사의한 존재와 대결하였고, 이때 삶의 절정에 이르렀다. 역설적이게도, 삶의 절정에서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4.

모비딕을 읽으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장벽이, 바로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서술되는 고래에 관한 묘사이다. 고래의 모습, 먹이, 생태 등등. 이것만 읽어도 고래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이다. 에이해브와 피쿼드호의 항해 이야기만 읽고 싶다면, 이 고래에 대한 박물지적 서술은 건너 뛰어도 읽는 데 별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왜 멜빌이 이렇게까지 고래를 자세하게 설명했는지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어쩌면, 이것이 허먼 멜빌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 것일 수 있다. 멜빌은 모비딕에서 진리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에만 있다는 주장을 피력한다(참고 제23장 바람이 불어가는 쪽 해안). 고래는 이 진리의 바다를 누비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래 종, 특히 향유고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고래를 연구한다는 것은, 바다의 비밀을 더 많이 더 잘 알고 있는 존재를 연구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진리에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멜빌의 생각이지 않았을까.



5.

개인적으로, 에이해브의 작살을 제작하는 장면은 꼭 <일리아스>에서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만드는 장면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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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2-16 0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성경을 읽기 시작한 계기가 소설을 읽을 때 배경지식을 늘리기 위함이었거든요. 김민우 님의 이 서평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네요. 성경을 알고 읽는다면 모비딕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깊어지고 또 달라질 것 같아요. 이 소설 좋다는 말 많이 들어서 이미 사두고 있긴한데 저는 아직 성경을 완독하지 못했으니 다음으로 미루는게 나을까요? 고민됩니다.

Redman 2021-02-16 10:38   좋아요 0 | URL
아 저는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비딕에서 나오는 성경 모티프는 역자 해설이나 각주에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성경을 먼저 읽고 싶다면, 열왕기는 읽는 게 좋을 듯합니다. 거기에 아합과 그 유명한 엘리야가 나오거든요

성경 완독운 정말 힘든데, 계속 도전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세요!! ㅎㅎ 다락방님의 완독을 응원합니다!

페넬로페 2021-02-16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헤브의 광기를 민우님의 글로 잘 이해했습니다. 모비딕이라는 소설에 워낙 많은 의미가 담겨있어 꼭 재독하고 싶은 책입니다. 고래에 대한 서술도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싶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Redman 2021-02-16 10:3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정말 다시 읽어서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작품이었습니다

scott 2021-02-16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성경도 읽고 모비딕도 읽었는데 민우님 글 읽고나니
모든게 새롭게 느껴짐 ^ㅎ^

Redman 2021-02-16 10:39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읽으먼 또 새로울 것 같아요 ㅋㅋ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한일관계 연구총서 15
기타지마 만지 지음, 김유성 옮김 / 경인문화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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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지마 만지, 김유성·이민웅 옮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 2008

다카기 히로시 저, 정두희·이경순 엮음, 근대 일본의 히데요시 영웅 만들기,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07


 

이 책은 임진왜란사 연구의 권위자인 기타지마 만지가 쓴 임진왜란 통사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임진왜란 전 과정을 상세하게 잘 정리하였다. 일본 측 사정도 서술된 것이 장점이다. 임진왜란 통사 책을 원한다면, 이 책을 권한다. (, 전쟁 발발 전 조선은 동서분당으로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각주에도 나오듯이 식민사관 당파성론으로 보이니, 이 부분은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이 전쟁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임진왜란은 논란의 여지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그는 1585년 간파쿠에 취임한 직후부터 명 정복의 구상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앞서 태양의 아들신화를 창조해낸다. 그는 전국시대 당시 천하통일은 천명이라는 논리를 통해 자신의 전국 통일 행위를 정당화했다. ‘천명에 의해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고 난 뒤, 그는 조선과 류큐를 포함하여 명나라와 루손(필리핀), 천축까지 복속시키는 계획을 구상한다. 이렇게 동아시아를 정복하여 중국에 새로운 정복왕조를 수립하고자 했던 그에게는 천명논리를 강화한 태양의 아들이라는 신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태양의 아들에 의한 동아시아 정복 구상은, 전쟁이 진행될수록 심화되어 임진강 전투 이후로 일본군 속에서 신국의식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임진강 전투를 묘사한 기록에서, 이 전투는 과거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진구 황후의 전설과 오버랩되었던 것이다. 진구 황후의 정벌과 임진왜란을 겹쳐보는 인식은 무사와 승려는 물론이고,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안에까지 침투해있었다. 히데요시 역시도 진구 황후 전설을 의식한 듯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에 진구 황후의 사당에 참배했었다. 과거의 전설이 현재의 태양의 아들신화와 절묘하게 결합됨으로써, 전쟁의 명분은 이제 토착 신앙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되고 히데요시의 정복 전쟁은 종교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더욱 확대된 전쟁 양상은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과 일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말로, 애매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에 조선과 일본의 상이한 전쟁 기억을 낳은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사후 그가 묻힌 곳에 도요쿠니샤(豊国社)가 창건되고, 에도 시대 동안 그에 대한 숭경(崇敬)이 계속되었다. 이와 동시에 에도 시대에 진구 황후 전설과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국학자들에 의해 일본주의적으로 추앙되었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야마가 소코아라는 유학자는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이래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라며,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은 일본의 무위를 이역 땅에 드러낸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는 진구 황후와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을 바탕으로 국가의식을 고양시켰다. 막말 대표적인 존왕양이 지사 요시다 쇼인도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해, 히데요시를 높이 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전쟁 인식은 조선 멸시관으로 표출되는데, 여기서 조선은 다시 정벌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토착 신앙과 결합한 진구 황후의 전설과 히데요시의 정벌에 대한 기억이 이들의 정벌 논리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이 메이지 유신 이후까지 이어져, 에도시대 일본의 도요토미 인식은 근대의 정한론을 합리화하도록 했고, 조선 식민지화의 이데올로기적인 지주가 되어갔다.


 

다카기 히로시에 따르면, 제국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20세기 제국시대의 해외웅비(海外雄飛)’ 이미지와 오버랩되어, 그 자신은 외정의 군대를 일으켜 국위를 해외에 떨친 호걸로 묘사되기에 이르렀고, 이 역사관을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이 배우게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과 관련한 문화유산은 식민지 조선의 통치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며 정비되었다.”


 

20세기에 히데요시가 남긴 망령은 다시금 침략의 논리로 부활하였다. 그의 구상은 조선부터 천축까지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때 천축은 동남아시아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므로, 히데요시는 조선, 중국과 함께 동남아시아를 정복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 구상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역사의 반복이다.


 

20세기 제국 일본이 조선 침략 정당화 논리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현대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떠올리게 한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A급 전범들과 전쟁 중 사망한 황군들을 위령하고 있다. 미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미야자와 기이치, 하시모토 이치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자민당 의원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었고,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아베 신조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합헌이라고 판정했다. 일본의 극우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전범들에 대해 그들은 전범이 아니다’, ‘그들에게 참배하지 않은 일본 내각은 일본인이 아니다등의 막말을 내뱉는다.


 

극우파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전후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던 일본의 전쟁 책임에서 발생했을 것이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의 법조계에 의해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합헌으로 승인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최종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셔널리즘의 세례를 받아 제국주의 침략의 정당화 논리로 이용되었듯이, 전범들을 추앙하고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가리는 논리와 역사 인식이 훗날 긍정적인 유산으로 남거나 긍정적으로 이용되지 않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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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11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즐겁고 행복한 설명절되십시요!ㅎ

Redman 2021-02-11 09:57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님도 즐거운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1-02-11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1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1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1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千년의 우리소설 3
박희병.정길수 편역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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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소용돌이>'최척전', '김영철전', '강로전', '정생기우기' 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문학을 수록하였다. 한국 고전 문학을 전문으로 연구한 분의 신뢰할만한 번역본으로 이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프랑스 문화사 연구자 로버트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 1'농부들은 이야기한다'에서 설화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 설화란 자체적으로 기록을 남길 수 없던 일반인들이 남긴 사료라는 것이다. 빨간 망토, 푸른 수염, 헨젤과 그레텔 같은 이야기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마다 조금씩 버전이 다르고, 시대마다 또 내용이 달라진다. 단턴은 이를 통해 당대 사람들의 의식 구조와 설화 속에 담긴 일반 민중들의 욕구를 추적한다. 설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다.

 

나는 한국의 고전 소설이 서양에서 설화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란기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줄 수 있는 전쟁 문학을 수록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를 읽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집중하고픈 작품은 첫 번째 수록작인 <최척전>이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최척과 옥영은 부부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옥영은 일본 상인에 의해 끌려가고, 최척은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아내가 끌려간 것을 알고 명나라 장수를 따라 상인이 된다. 그러다 둘은 베트남에서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다. 하지만 최척은 다시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전쟁 중에 죽은 줄 알았던 첫째 아들 몽석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둘은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본가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고, 중국에 남아있던 옥영도 아들 내외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중간에 해적을 만나 위험에 처했지만, 조선인 배의 도움으로 무사히 조선까지 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온 가족이 몇 십 년만에 하나로 다시 뭉치게 되었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척전>은 중요한 장면은 모두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쟁 중 생이별을 겪었던 옥영과 최척이 상인이 되어 베트남에서 만나게 된 것도, 몽석과 최척이 다시 만나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 것, 옥영이 배를 타고 조선으로 오다가 조선인 배를 만난 것도, 모두 우연의 연속이다.

 

길지도 않은 이야기에 이렇게 우연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 것은 한국 고전 소설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척전>의 경우, 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이야기는 우연이 아니면 성립될 수가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최척전>1621년에 조위한 지은 것으로 나온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20년이 지난 뒤였다. <최척전>은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였던 것이고, 그만큼 이 작품의 이야기는 호소력을 지녔을 것이다.

 

박양자 수녀의 <일본 키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순교의맥) 같은 책을 읽으면,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납치되어 노예가 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이 가톨릭을 많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승려 케이넨의 기록에서도, 조선인 노예 매매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옥영처럼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이 많았고, 그만큼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채 살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베트남, 일본, 류큐를 종횡무진하는 공간적 배경도 당대 사람들에게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 소설을 읽었거나, 귀로 들었을 사람들에게 <최척전>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 혹은 자신들 주변 사람의 이야기였을 수 있다.

 

최척과 옥영 가족의 헤어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지만, 재회는 지극히 우연적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래서 더욱 이 이야기는 비극적이다. 운이라도 없었으면 이들 가족은 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최척전>의 결말과 달리, 당대 많은 가족이 전쟁 중에 헤어져 영영 생이별하게 되었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척전>의 비현실적일 정도로 우연에 의존하는 전개와 결말은, 역사적 진실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나마 헤어진 가족들과 다시 만나고픈 간절한 심정 말이다.

 

그 뒤로 최척과 옥영은 위로 부모님을 봉양하고 아래로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며 남원 서문 밖의 옛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최척전>의 결말은 당시 조선에서 생각하던 이상적인 가족의 회복을 묘사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에서 당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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