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북해도에서부터 조선까지 일본인화를 달성하기 위해 현실에서 동화를 작동시킬 때마다 항상 문명화 논리를 동반하며 이민족에게 다가갔다. 달리 말하면 동화, 곧 이민족의 일본인화를 현실에서 작동시키는 양 축이 기본적으로 일시동인과 문명화 논리였다...일본은 문명동화를 내세웠더라도 궁극에 가서는 일시동인의 세상으로 간다는 주장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지배자들이 언설로서는 단계적 지향을 이식하고 발언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현실에서는 단계적이지도 선택적이지도 않았다. - P218

이처럼 조선총독부는 대권을 위임받은 총독을 정점으로 조선특별통치주의 전략을 제도화하고 이를 헌병경찰제를 빌려 조선인의 일상에 침투시키는 한편, 언어동화교육을 통해 조선인의 내면에 지배의 정당성을 각인시키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조선은 한때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였고, 조선인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소유한 채 일본문화에 비해 상대적 우월심리도 품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이 군사력을 통해 조선인의 저항을 진압한 데서도 시사받을 수 있듯이 조선인의 내면 깊숙이 반일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립학교와 서당의 활발한 교육활동은 계몽적인 형태로 조선인의 반일감정이 표현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1910년대 동화정책과 조선인의 깊은 내면 사이에 거리감은 헌병경찰제와 상주 사단에 의해 메워지고 있었다. - P257

조선인과 일본인은 다른 민족이라는 현실과 천황제의 핵심논리인 가족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모순 때문에, 일본의 지배자들은 친일파의 일본인화 내지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결국에 가서는 신뢰할 수 없다. 여기에 점진적 내지연장주의에 의한 동화정책의 딜레마가 있었다. - P264

조선인과 일본인은 다른 민족이라는 현실과 천황제의 핵심논리인 가족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모순 때문에, 일본의 지배자들은 친일파의 일본인화 내지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결국에 가서는 신뢰할 수 없다. 여기에 점진적 내지연장주의에 의한 동화정책의 딜레마가 있었다...다른 하나는 조선인이 일본인화기 위해 국민, 곧 조선인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점이다. 그러면서도 미나미 총독의 훈시에서 국민의 일원으로서 조선인에게 주어져야 할 권리를 언급한 부분을 전혀 찾을 수 없다. - P273

학교 교육의 종착점은 교육 포기와 학교의 군대화였다. 달리 말하면, 조선총독부는 결전체제기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에게 황국신민의 자질을 내면화시키기 위한 황민화교육도 포기한 채 학생을 군인이자 노동자원으로서만 활용하였다. - P283

혈연관계에 기초한 가족주의적 세계관은 일본민족과 이민족간의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짓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동화가 강조될수록, 동화정책이 추진될수록, 지배민족인 일본인과 피지배민족인 사이에 차별화와 차이화의 간격만 커질 수밖에 없고, 권리평등이 없는 대신 의무평등만 강요하는 상황이 심화되는 것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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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한정한다면 모든 나라가 60년이 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전후‘를 60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아시아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 P12

전후 일본의 체제는 ‘평화헌법‘과 ‘미일 안보조약‘을 공존시켜 미군의 주둔으로 국방예싼을 억제하고 경제성장을 우선시했다. 오키나와에 주일 미군기지(전용시설)의 75%를 집중 배치, 즉 미일 안보체제의 부담과 모순을 오키나와에 떠넘김으로써 그들의 평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 P14

물론 법적으로는 전쟁도 점령도 끝났다. 현재 오키나와는 전투를 치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주민이 60년 전 수용소를 떠나 도착한 고향 마을은 미군기지가 되어 있고, 그 후에도 오키나와인은 총검과 불도저에 토지를 빼앗겼다. 미군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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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만주 국가 초창기에 몽골족은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들은 군사동맹, 말 그리고 칭기즈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당화의 전통을 제공했다. 원의 옥새와 함께 수많은 민족을 망라하는 세계 제국이라는 개념, 즉 만주족 조상들인 여진의 금이나 명을 광범위하게 초월하는이상적인 통치권 개념이 함께 들어왔다. 혈연을 통한 개인적 연계와 문자를 통한 문학적(글을 통한) 관계는 두 민족을 결속했다. 누르하치는 다른 때는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킬지라도, 동맹 관계를 촉진할 때는 종종만주와 몽골의 공통된 유산을 상기시킨다. 모든 몽골족이 신생 만주족국가의 우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단지 전쟁에서의 결정적 승리가 그들을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만주 국가의 통치자들은 처음부터 서북에있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동맹들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전쟁, 외교, 경제적 유인을 서로 결합한 전략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 P176

두 제국(청과 러시아)의 통치자 누구도 주권국가 사이의 평등한 협상을 믿지 않았다. 쌍방은 모두 조공, 충성, 복종 등 (상대방이 아래에 있다는) 위계적 가정 아래 행동했다. 이런 모순적인 생각 아래에서 어떻게 조약(네르친스크조약)을 협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협상이 성공한 것은 오로지 나머지 두 당사자가 결정적인 중재자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준가르 몽골국이라는 숨겨진 존재 때문에 두 제국은 전통적 외교 의례를 조정했다. - P221

황제는 의도적으로 유능한 젊은이들을 목표로 삼았는데, 준가르라는 하나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체부뎅자부가 한 무리의 호이트 몽골인을 사로잡아 충성스러운 할하 몽골에 포상으로 주려 했을 때, 황제는 "강한 장정들은 선별해서 죽이고" 단지 여자들만 종복으로 주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지도자들이 패배한 후 항복한 일부 준가르 젊은이들도 살려둘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들이 ‘한때 족장이었기’ 때문이다. - P357

황제는 "식량이 떨어졌으므로 그들을 없애기는 쉬울 것"이라고 하여, 암묵적으로 고사 작전을 지시했다.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은 남겨 다른 몽골 부족들과 만주족 기인들에게 노예로 주었지만, 그들 부족의 정체성도 잃게 되었다. - P357

목표는 단순한 반란 진압이 아니라 준가르의 저항을 "뿌리째 자르는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러시아 지사들은 만주족 군대가 장정,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학살해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 P357

학살 정책은 청이 몽골족과의 관계를 관리하던 과거의 방식과 명백히 결별한 것이었다. 이때까지 청의 통치자들은 주로 유목민 분파들을 선별적으로 지지하는, 유구한 전통을 지닌 ‘이이제이’의 외교술을 쓰거나 반란의 주모자만 처형했다. 그들은 이전에 한 번도 종족 학살을 기도하지 않았다. 이 정책으로 청은 중국의 서북 변경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는데, 이는 한 세기가량 지속되었다. 준가르 국가와 민족은 함께 사라졌고, 준가르 초원은 거의 완전한 인구 희박 지역으로 바뀌었다. - P357

최후의 학살에서 건륭제는 이빨을 드러냈다. 그는 스스로를 다양한 민족을 조화로운 영역에서 포괄하고자 하는, 모두에게 공평한 군주라고 칭했다. 그러나 황제의 포용에 저항하는 자들은 멸망을 맞았다. 이 시기부터 황제의 조서들에는 청 중기의 관대함이라는 이상과 압제라는 현실 사이의 긴장이 드러난다. - P360

투르키스탄 원정은 한 세기에 걸친 준가르 원정을 압축한 닮은꼴이다. 호자들은 그렇게 먼 거리를 발판으로 청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는 통일 독립국가를 세우려 했지만, 오아시스 공동체들이 서로 분열한 데다 청의 병참 장교들이 경악스러울 정도로 보급상의 성취를 거둔 결과 파멸하고 말았다. - P367

토구트의 귀환은, 러시아인들이 말했듯이, 모든 것을 포섭하는 청의 포용 아래에서 ‘민족들 끌어모으기’의 최종판이었다. 그것은 정주 제국과 초원의 천년 투쟁의 두 번째 종결이었다. 한 민족은 말살되었고, 다른 한 민족은 소생하여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말살 후에 재생이 왔고, 이는 제국의 기획으로서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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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형’은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고 ‘간접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식민지의 행정관리는 대부분 피지배 토착인을 고용하면서, 이들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구조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분할과 통치(divinde and rule)’의 분열정책을 끊임없이 채택하여 집행하였다. 또한 식민지 행정관리 충원을 위하여 피지배 토착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고등교육 실시가 필요했으며, 직접적 독립운동이 아닌 한 민족보존운동이나 민족문화운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방관적 정책을 취하였다. - P1

‘프랑스형’은 역시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했으나 영국형과는 달리 ‘직접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행정관리는 대부분 프랑스인을 고용하고, 말단 행정직 일부에만 토착인을 채용하였다. 식민지 토착인의 민족보존운동에는 방관적이었으나, 민족종교에 관련된 민족문화운동에 대해서는 교육을 통하여 이를 통제하고, 카톨릭교와 프랑스식 문화체계를 이식시키려고 하였다. - P2

‘네덜란드형’ 역시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했으나 프랑스형과는 달리 ‘간접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영국형 간접지배와는 약간 달리 식민지 토착인의 민족구성이나 민족전통, 민족관습, 민족문화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이를 침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시켜 이전과 다름없이 생활하게 해서 독립운동의 저항을 극소화하면서 사회 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 P2

‘일본형’은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면서 프랑스형을 모방하여 ‘간접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소위 ‘동화정책’이란 이름으로 식민지 민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한 데 있었다. - P2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의 특징 가운데 ‘사회 경제적 수탈정책’으로서는 한국을 1) 일본 사회 경제 발전을 위한 식량공급지로, 2) 일본의 공업발전에 소요되는 원료공급지로, 3) 일본제품의 판매를 위한 독점적 상품시장으로, 4) 일본의 자본수출에 따른 식민지 초과이윤 수탈지로, 5) 일본산업의 생산비를 절하시키는 저렴한 노동력 공급지로, 6)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는 것이 대표적인 주요 정책이었다. 이 위에 1930년대 이후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7) 백주에 식량과 물자를 지정해서 강제 약탈하는 ‘공출제도’, 8) 노동력의 강제징발 동원인 ‘징용’, 9) 한국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소모품으로 투입한 ‘징병’, 10) 12~40세의 한국여성을 전쟁 군수노동과 성노예로 여자정신대/종군위안부 강제 징발 등의 식민지 정책을 자행하였다. - P3

일제는 원래 1906년 구한말에 한국 침탈 강점의 무력으로 일본 정규군으로서 2개 사단의 ‘한국주차군’과 ‘헌병사령부’를 설치했었는데, 1915년에 이를 제19사단과 제20사단으로 편제하여 식민지 조선에 상주시켰다. 제19사단은 사령부와 그 제38여단을 함경북도 나남에, 제37여단을 함경북도 함흥에 두었다. 제20사단은 사령부와 제40여단을 서울 용산에, 제39여단을 평양에 두었다. - P7

첫째, 일제는 조선총독에게 입법 사법 행정의 3권과 조선 내의 군통수권 등 모든 권한을 주어 한국인의 저항운동이나 독립운동을 자의적으로 탄압할 수 있게 하였다. 둘째, 조선총독은 일본의 관제상 최고의 친임관으로서 소위 천황에 직속하게 하였다. 그 지위는 내각총리 대신에 버금가는 것으로 하였다. 셋째, 조선총독은 반드시 일본의 육해군 대장으로 임명토록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조서늘 일본 군부의 지배하에 두고 군사방식에 의한 무단통치를 자행하도록 하였다. 넷째, 조선총독에게는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권도 부여되었다. 일제는 조선통치에 있어서 일본 ‘헌법’은 적용하지 않으며 ‘법률’이 필요한 부문은 총독의 ‘명령’으로 시행하도록 했고, 이것은 동서고금에 없는 특별 권한이므로 별도로 ‘제령(制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P13

다섯째, 조선총독은 또한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중략) 조선총독에게는 이 같은 제령으로 식민지 조선에서의 재판소의 설립과 폐지, 관할구역과 그에 관한 변경 등을 결정하며, 판사의 전임, 전관, 정직, 면직, 감봉 등에 대한 권한이 주어졌다. - P14

여섯째, 조선총독은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통수권을 갖고 있었다. 조선총독은 조선주둔의 육해군부대를 통솔 사용할 수 있었으며, 필요할 때에는 군대를 만주, 북중국, 연해주에까지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 P14

일곱째, 조선총독은 당시 ‘이왕직’이라 부르던 왕실과, 소위 ‘조선귀족’에 대한 감독권을 갖고 있었다. - P14

일제는 1910년 한국을 완전식민지로 강점하자 구한국의 13도 11부 317군의 체계와 일제통감부의 이사청, 재무서 체제를 통합해서, 총독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식민지 체제로 개편하였다. - P17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의 실시 도중인 1914년에 한국민족의 공동체적 단결에 의한 저항의 기반을 파괴하려고 종래의 ‘마을’ 단위 지방행정조직을 전면적으로 통폐합하였다. (중략) 이러한 통폐합이 종래의 단위의 기계적 기능적 통폐합이 아니라 ㄱ군의 ㄴ면 ㄷ마을을 인접 ㄴ군의 ㄹ면에 통폐합시키는 대교란이었다. 그러므로, 종래의 농촌공동체가 급속한 해체의 타격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군청과 면사무소 유치 경쟁을 촉발시켜 농촌사회에 혼란과 갈등이 크게 야기되었다. - P18

헌병경찰제도는 헌병으로 하여금 군사경찰뿐만 아니라 소위 일반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행정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에 의하여 일제 헌병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간인에 대한 사찰을 동시에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일반 경찰도 헌병제도와 결합되어 한국의 민간인을 군사적 방식으로 경찰하게 되었다. - P19

일제는 한국인들이 일제의 극악한 식민지 무단통치에 조금이라도 저항할 기색이 보이면 사전에 이를 철저히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즉결심판권’을 부여해서, 일제 헌병경찰이 한국인을 영장 없이 체포 연행하여 법원의 재판 없이 3개월까지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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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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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나치 참여 문제와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력, 그리고 현대 독일의 지성사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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