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중국과 정식 국교를 맺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설명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오히려 중국이 개별 책봉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책봉국 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 P122

청조가 책봉국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가경대청회전>이 편찬된 무렵에 반봉(頒封)한 조선, 월남, 류큐 세 나라에 가까스로 타이를 첨가하여 총 4개국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타이는 다른 3개 책봉국과는 위상이 다른 나라로 보고 있었다. - P127

동아시아 4개국의 국제관계는 전체 책봉국(조선, 월남, 류큐) 혹은 기껏해야 4개국(조선, 월남, 류큐, 타이) 중 2개국(조선, 류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동아시아에서는 극히 이례적이었던 것이다. - P127

명조의 류큐에 대한 외교정책은 같은 책봉관계에 있던 조선과는 확연히 다르게 냉담했다는 것이다. 류큐가 일본에게 침략당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명조 사람들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책봉국이 위기존망의 기로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조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 P135

1610년의 경우와 달리 1612년이 되자 명조 당국자들은 류큐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류큐가 2백 년에 걸친 공순한 조공국이자 책봉국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당국자들은 역설적으로 류큐가 ‘평상시의 공순한 뜻이 아닌 면’을 보였기 때문에, 즉 일본에 조정당해 거짓 입공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류큐와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41

왜 명이 류큐의 공물을 거절하지 못했는가 라고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배후에 있는 일본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예부의 제안 가운데, 공물을 거절하면 ‘저쪽에 구실을 주게 된다.’라는 말은 이를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P141

입공을 종래같이 회복하지 않으면 자신은 명조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일본에 완전히 붙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공순한 조공국/책봉국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비례이며, 명조 측으로부터 국교를 단절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조는 이때에도 이를 꾸짖은 일도, 사신을 돌려보내는 일도 없었고, 공물조차도 돌려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명조는 조공관계를 끊고 단교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국교조차 성립되어 있지 않은 일본의 움직임에 규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 P146

실제로는 일본의 입공임에도 류큐의 입공이라고 바꾸어 적고, 이를 거절할 수 없는 조공, 우리는 이를 ‘허구의 조공’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 P146

배후에 일본이 있기 때문이야말로 류큐와 조공관계/책봉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지금까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이탈해 있었기’ 때문이야말로 이들 논자들이 말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존속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 중국 측은 사실을 계속 모르는 척하든지, 그 사실을 잊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 P147

일본과 중국이 외교적으로 두절 관계에 있으면서 류큐를 매개로 구조상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조선-류큐 관계에도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양국의 외교가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류큐가 1609년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 조선과 류큐는 명조로부터 함께 책봉을 받는 나라로서 서로 자문을 교환하는 관계였다. - P147

조선 측은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놓인 것을 알았지만, 류큐와는 이전과 전혀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명조가 류큐와 절교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조선 측도 류큐가 일본에 합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면 되었던 것이다. - P148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기 조선이 류큐에 자문을 보낼 수 없었던 이유는 배후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명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1698년(강희 37)에 류큐가 조선 표류민을 복주-북경을 경유해 송환해주기 전까지, 류큐-사쓰마-나가사키-쓰시마-조선 동래부라는 일본 경로를 송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선은 류큐가 일본에 합병된 상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4

일본과 류큐가 같은 명조의 책봉국이었을 때에는 양국을 함께 교린국이라 규정하고 통신관계를 맺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609년 이후, 류큐는 일본에 합병되어버렸다. 더욱이 1636년까지는 일본과 정식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도 명과 마찬가지로 류큐의 실정을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1636년에 일본과 통신관계가 수립되었다. 이처럼 국제구조가 변해버렸을 때, 류큐가 일본에 합병된 상황을 모르는 척하면서 류큐와도 통신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 P157

청대에 들어 조선과 류큐가 북경에서 자문 교환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청조의 문제, 즉 만주족이 통치하는 국가였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이 당시 동아시아 4국의 국제구조에서, 그것을 성립시키는 데 불가결한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일본과 국교를 계속 두절했던 데 반해, 조선은 일본과 통신관계라고 하는 국교를 회복했다. 이에 양국의 대류큐 외교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고, 조선과 류큐와의 국교도 두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161

중국의 외교관이나 고증학자들이 류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것을 공언하거나 그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중국 청조 황제는 순치제 이후 지금까지 류큐는 일본에 신속해 있지 않은 것으로 조공을 받아왔고 책봉해왔으며, 건륭제는 류큐를 중국의 하나의 성으로 동일하게 간주하며 지방지까지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공언하는 것은 황제의 얼굴에 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둘째, 중국·일본·류큐·조선의 4개국은 각각 외교적으로 책봉, 통신, 그리고 두절이라는 다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안정된 국제질서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의 공언은 조금의 이익도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불경심을 드러내고 질서 파괴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 P167

조선 북학파 지식인들은 류큐의 국제적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모두 알고 있었다. 류큐는 1609년 일본에 의한 ‘합병’ 이후 일본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그럼에도 이를 중국과 조선에 숨겨오면서 공순한 조공국인 것처럼 행동하며 북경에 사절을 계속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 엄숙이 보인 류큐에 대한 철저한 멸시는 결코 그만의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 P195

그들의 멸시나 신랄함은 류큐가 일본의 속국이면서 이를 속이고 계속해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명료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닐까. - P196

이맹휴나 홍대용처럼 최고 수준의 조선 지식인들도 현재 조선과 류큐 사이에 국교가 없는 이유를 해석하지 못했다. 또는 일찍이 류큐 왕자를 제주도에서 살해했다는 전설을 유일한 해답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박지원뿐만 아니라 홍대용, 이맹휴도 이 전설을 의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들 모두 이것을 대신할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다. - P196

이 전설은 조선과 류큐 사이에 국교가 없어진 원인이 일본이라는 존재에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류큐 왕자 살해사건이라는 전설은 어떤 원한도 없는 양국이 어째서 국교를 단절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부풀려진 것은 아닐까. - P197

중국은 조선 그리고 일본에 대해, 일본은 중국에 대해 4개국이 각각 ‘모르는 일’이라고 암묵적으로 은폐함으로써 동아시아 4개국 사이의 국제질서는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199

청조는 조공을 기반으로 국제관계를 맺는 것을 여전히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중국에 입각해서 본다면, 확실히 거기에는 이른바 조공 시스템이라는 것이 이어지고 있었고, (중략) 중국과 국교를 맺지 않은 일본이라는 존재를 포함한 새로운 국제질서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조선과 류큐와의 사이에 국교가 없는 이유를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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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업은 일제 말기로 다가갈수록 군수공업화의 성격이 짙어지고, 1944년 단계까 되면 조선의 광공업은 완전히 군수공업화의 체제로 재편성된다. 생산이 전체적으로 괴멸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산역량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비군수품 생산부문은 노동력, 원료와 자재, 자금 등에서 심한 제한을 받았고, 평화산업 관련 기업은 통폐합되거나 강제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하여 획득된 생산역량은 군수회사에 집중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군수회사라는 것은 거의 완전히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 P108

시간체제에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담론뿐 아니라 장기적인 역사인식의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식민지 체제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국사 속에 식민지의 역사를 포함시켜 변형시킨다. 또한 국가권력에 의한 시간적 주기에 대한 특별한 의미부여로서의 기념일 제도가 포함된다. - P110

시간관념의 근대화에는 력의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다. 봉건시대에 력은 하늘이나 신을 대신하여 세속적인 최고권력이 사람들에게 우주의 운행원리를 알려주는 것, 조선시대에도 력은 왕실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지배질서의 정당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 P112

조선총독부는 력을 독점관리하고 통제했다. 이에 대응하여 상해 임정에서는 발족과 더불어 독자적인 민력을 작성하여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배부하였고, 일제 영사관이나 경찰은 이를 철저히 단속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상해임정은 ‘대한민국 4년중 음력세차 임술년 월표 급 절후표’를 단도에 배포하였고, 일본의 간도총영사는 이를 단속하여 외무성에 보고하였다. - P112

력의 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양력과 음력의 문제였다. - P112

설이 이중과세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추석은 민족의 명절로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민족을 지켜가는 의례적 장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략) 단오는 민속적인 행사를 했지만, 점차 각 지역에서 근대적 의미의 운동회를 개최함으로써 봄 운동회날로 그 의미가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어떤 경우에는 6월 10일 시의 기념일과 단오가 겹치기도 하였다. - P115

국가의 근대적 시간체제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가 표준시의 문제이다. 조선에서 표준시의 문제는 한두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쳐 1912년 도쿄를 지나는 선을 표준으로 한 이래 일제 지배 기간 내내 그대로 관철되었고, 1950년대에 서울을 지나는 선으로 바뀌었다가, 1960년대에 다시 환원되었다. - P116

일제하에서 이루어진 시간관념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시의 기념일’ 제도가 존재한다. 일제하에서 매년 6월 10일은 ‘시의 기념일’로 조선총독부와 지방관청은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시간에 관한 계몽사업을 1921년부터 실시하였다. - P117

‘시의 기념일’은 시계의 기계적 원리에 대한 이해와 함께 시계를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시계는 점차 근대인의 중요한 필수품이 되었고, 장식된 시계는 의례의 중요한 예물이 되었다. 또한 시계는 자본주의적 시장개척의 현상 선물로 자주 이용되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일본의 시계산업이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 P118

시의 기념일의 핵심적인 구호는 ‘시간존중’과 ‘정시여행’이었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을 지키자’, ‘시계를 바르게 맞추어라’ 등이 시의 기념일의 세 가지 축을 나타내는 대중적 표어였다. 이는 곧 식민지 국가권력에 의한 근대적 시간 캠페인을 주도하고 시계산업에 종사한 상인들에 의해 뒷받침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계 상인들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 P119

근대적 시계가 들어오고 시간관념이 형성될 때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의 그림이나 상징이 12시간, 또는 24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의 공간적 도형에 접합되었다. 자정이나 정오, 오전과 오후라는 용어는 모두 쥐나 말과 같은 12간지의 동물로부터 연원하였는데, 이 용어의 기원이 언제 어디서부터 사용되었는지 불분명하다. - P122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38년부터는 시의 기념일에 경성부에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황궁요배 및 ‘무운장구’를 비는 1분간의 묵도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능률증진이 시의 기념일의 구호에 덧붙여지기 시작하였고, 근로봉사라는 이름의 동원이 강화되고 있었으며, 양력실행운동을 강화하였다. - P122

조선민족이나 구황실의 기념일이 아니라 일본의 천황제와 관련된 경축일이 조선에서 그대로 시행되었다. (중략) 1927년 3월, 조선총독부는 칙령 25호로 ‘제일 및 축일,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때부터 국가경축일과 공휴일이 명백히 연관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기념일의 의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명치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가 ‘절’로 전환되었다. 육군기념일, 해군기념일 등이 경축일에 추가되거나 기존의 경축일을 일부 대체하였다. 육군기념일에는 조선군이 용산 일대에서 퍼레이드를 대대적으로 펼침으로써 시간으로서의 기념일을 공간적으로 가시화하였다. - P124

일제 지배하에서 중요한 기념일은 기원절, 천장절, 명치절 등 일본의 왕실과 결부된 것이 많았다. (중략) 일제하 기념일에서 특이한 것은 군사 관련 기념일, 즉 육군기념일과 해군기념일이 매우 중요한 기념일로 지켜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일본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125

군사 관련 기념일 외에 조선총독부는 매 5년마다 ‘시정기념일’ 행사를 성대하게 하여 자신들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종종 공진회나 박람회를 동반하여 자신들의 지배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려고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작용하였다. 특히 30주년 기념행사는 동원체제와 맞물려 큰 규모로 행하였다. - P127

한편으로는 공식적 기념일과는 다른 대안적 기념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일종의 기억투쟁이 존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갖가지 형태의 습속적 저항이 존재하였다. - P127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사건 발발일은 일제의 명치절이었지만, 조선 학생들로 볼 때는 음력으로 개천절이었다. 양력과 음력, 일본 국가의 기념일과 조선 민족의 기념일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했던 것이다. - P128

식민지 권력이 부과하는 기념일에 대한 또 하나의 저항은 전통적 시간감각에 기초한 민중들의 습속이다. 습속적 저항은 주로 세시적 축일을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민족의 세시풍속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은 설과 단오, 추석이었는데, 단오와 추석이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진 반면 설은 끊임없이 식민지 권력 및 지식인 집단의 프로젝트가 민중적 습속에 부딪치는 장이었다. - P129

한국에서 ‘일상생활’은 1920년대에 역사적으로 성립한 개념이다. 1920년대 ‘생활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생활이 ‘표준’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고가 자리잡았고, 이것은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을 형성시켰다. 여기에는 ‘표준’을 내세워 계급적 양극화를 절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 P129

각종 계몽의 담론이 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였다면, 시간체제는 보다 심층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포괄한다. 근대적 시간체제의 식민화는 한편으로는 1910년대 초반의 국가 경축일의 일본화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 1920~30년대의 시의 기념일 제도를 통한 시간사용의 합리화 캠페인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 P130

총동원 시간체제는 일주일 단위의 동원이 자주 발생하고 또한 의례의 정교화를 통한 행동적 정신적 동원을 강화한다. 이는 민중적 생활세계뿐 아니라 가장 자유가 널리 허용된 대학사회에서도 관철된다. 총동원체제는 노동을 늘리고 소비를 억제하면서 일상의 시간적 재조직화를 시도했지만, 동원에 필요한 각종 기념일과 의례의 강화를 낳으면서 인간다운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방 후의 식민지적 유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즉, 이 시기의 캠페인성 프로젝트들이 1960~70년대의 국가주도형 경제성장에서 재생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식민권력에 의해 조선민중에게 부과된 시간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민중들에게 의례를 통한 동원에의 익숙함과 반의례적 정서를 동시에 물려준 듯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생활양식이나 시간체제의 식민화 속에 대안적인 근대국민국가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시간적 관념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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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15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부분부분, 유용해서 원작 클릭하니 품절이네요^^ 늘 공부하시고 나눠주시는 모습 보기도 좋고 감사드립니다

Redman 2021-04-15 17: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네 품절 도서인데 내용이 좋은 것들은 같이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ㅎㅎ 그래도 이전에 올린 <개발 없는 개발>은 아직 판매중입니다 ㅋㅋ
 

근대적인 공장과 광산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가 급증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질적 발전도 상당히 이루어졌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일본인 노동자의 일부가 징용되어 나가고 그 공백을 조선인 노동자들이 메우게 되면서 직장 내에서 조선인들이 좀 더 상위 직급으로 승진해 올라가는 경우도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중략) 조선인 노동력이 질적으로 좀 더 성장하게 된 것은 명백하다. 단 이 성장은 식민지적 한계가 분명한 것이었다. - P165

1942년 초 조선 내 산업설비 투하자본 중 조선인에 의한 부분은 ‘조선 내 주요 산업자본 계통’ 중 ‘조선인계’에 속하는 것과 ‘기타의 일반 조선 내 재적회사’에 속하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전자의 1%와 후자의 4%를 합해 약 5%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반면 ‘일본 산업자본의 직접진출’ 74%를 포함하여 일본인 자산이 95%를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 말 조선에 투하된 공업회사자본은 모두 일본이 회사자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77

각종 거시적 통계에서 나타나는 일제시대 조선 광공업의 발달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분석결과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소수의 일본인 거대 자본 계통의 성장사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 성장한 일본인 자본이나 조선인 자본도 절대적으로 성장했지만, 성장의 나용은 근대적 공업의 발달이라기보다는 자급적 및 부업적 가내공업과 재래적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영세 중소공업, 그리고 정미업이나 정어리기름 제조업과 같은 1차 산품의 단순가공에 그치는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비중도 후기로 갈수록 저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발전이라고 하기 어렵다. - P182

농업과 공업의 생산수단인 토지와 자본이 민족별로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소유되고 있던 조선에서는 위에서 본 일본에서와 같은 이중구조 문제가 민족문제와 겹쳐서 한층 더 격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42년 초가 되면 조선의 광공업 회사자산의 대략 95%를 일본인이 소유하게 되는 그러한 소유구조 하에서는 분업구조의 고도화나 우회생산의 확대, 공업구조의 고도화나 무역구조의 고도화 등은 모두 이 일본인 자본의 성장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고, 또 주로 일본인 기업간의 분업과 우회생산의 증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 P184

일본인 대공업과 조선인 공업 사이에는 직접적 연관관계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포령적(enclave) 혹은 비지적인 존재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P190

조선의 공업은 일제 말기로 다가갈수록 군수공업화의 성격이 짙어지고, 1944년 단계까 되면 조선의 광공업은 완전히 군수공업화의 체제로 재편성된다. 생산이 전체적으로 괴멸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산역량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비군수품 생산부문은 노동력, 원료와 자재, 자금 등에서 심한 제한을 받았고, 평화산업 관련 기업은 통폐합되거나 강제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하여 획득된 생산역량은 군수회사에 집중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군수회사라는 것은 거의 완전히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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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니 그 대관은 말도 행동도 결코 식견 있는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인물이 사람을 경멸하는 것은 모든 관직을 세습하는 도쿠가와 정치 탓으로, 이제 폐정의 극치에 다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깊이 생각해보니 '나 자신도 앞으로 이 같은 햐쿠쇼 생활을 하게 되면, 저 벌레 같은 인간처럼 지혜나 분별도 없는 자에게 경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 정말 유감천만한 일이다. 정말 햐쿠쇼에서 벗아나고 싶다. 너무나 바보 같은 일이다'는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37~38쪽)




나카쓰는 봉건제도를 유지하면서 마치 물건을 상자 속에 가지런히 넣어둔 것처럼 질서가 잡혀 있어 몇 백 년이 지나도 전혀 변함이 없는 상태였다. 가로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가로가 되고, 아시가루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아시가루가 되고, 그 중간에 위치한 자들도 마찬가지다. 몇 년이 지나도 변화라곤 없다. (중략) 아버지가 45년 평생을 봉건제도에 속박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만을 참고 살다가 헛되이 세상을 떠난 것이 유감스럽다. 또한, 젖먹이의 장래를 걱정하여 중 노릇을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에 이름을 남기도록 하겠다고 결심한 그 괴로운 속마음, 그 깊은 애정. 나는 그것만 생각하면 봉건적 문벌제도에 분노하는 동시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어 혼자서 울곤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28쪽)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모두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이행되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직접 몸으로 체험했던 인물들이다. 시부사와는 메이지 정부에서 잠깐 관직 생활을 했다가 이후 민간에서 가장 저명한 경제/기업인이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치에 몸 담지 않고, 민간에서 활발한 저술 활동과 교육 활동을 하였던 문명개화 사상가이다. 위의 책들은 두 사람이 쓴 자서전이다(시부사와의 경우는 구술 자서전).


인용한 부분은 당시 일본의 엄격한 세습신분제에 강한 불만을 표현하고 있는 장면이다. 에도시대 일본은 신분뿐만 아니라 신분 내에서 구체적인 직분까지 세습되었던 매우 엄격한 세습신분제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당연히 의지와 능력이 있더라도 개인은 자신의 직분만을 수행할 수 있다. 문지기의 가문에서 태어나면 그 사람의 아들도, 그 손자도, 몇 대 손까지도 문지기이다.


이렇게 엄격한 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에서 유학이 보급된 것이었다. 무사가 다스리던 일본에서는 원래 유학의 비중이 매우 미미했으나, 무사에게도 점차 유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유학을 배우는 이들이 늘어났다. 여기에는 평화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더 이상 전투만을 무사의 정체성으로 내세우기 어렵게 된 사정이 있다. 결국 1790년, 주자학을 가르치는 기관이 설립되고, 빠르게 지방에서도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 무사 계급뿐만 아니라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평민층에서도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 많아졌다.


유학의 목표는 수기치인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궁극적으로는 통치에 임하는 것이다. 통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에 나가 천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것을 촉구한다. 그런데 일본의 세습신분제 하에서는 지배자는 정해졌고, 피지배민은 언제나 피지배자이다. 이러한 갈등 위에서 전통적인 지배 질서와 사회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위의 두 인용문은 그러한 유학적 이상과 현실적 제약으로 분노하였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급 무사 집안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능력이 있어도 신분제 때문에 변변찮은 인생을 살다가 죽은 것에 강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고, 자서전의 다른 곳에서는 '번벌은 나의 원수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의 분노는 유학적 이상과의 괴리된 현실 때문만이라고 단순히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유학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 사람은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한 요인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햐쿠쇼, 말하자면 평민 집안 출신이었다. 그중에서는 호농층이라고 꽤 재산을 축적한 계층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시부사와 역시 <논어> <맹자> 등을 공부하여 어느 정도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유학을 공부하게 되면, 농민이더라도 학문을 통해 천하를 다스리는 방향을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시부사와처럼 존왕양이 운동에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었다.


덧붙여서, 하급 무사의 불만 역시 유학 이외에 당시 경제적 요소도 있다. 직분이 고정된 사회에서 하급 무사의 봉급 역시 시간이 지나도 고정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일본은 이미 상업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쌀 같은 물건의 가격이 하급 무사의 봉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사가 죠닌(상인 계층)에게서 돈을 빌리기도 하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무사가 죠닌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근대 일본에서 존왕양이 운동이나 메이지유신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거 엄격했던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이는 당시 일본의 유학화 흐름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유학화 경향에 대해서는 박훈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도쿠가와 체제 말기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앤드류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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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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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우슈비츠는 20세기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며,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이 강조될 경우, 아우슈비츠 이전에 많은 학살과 죽음이 은폐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아우슈비츠가 전체 희생자의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학살에서는 구덩이에 사람을 단체로 줄지어 눕게 하여 죽게 하거나, 자동차 엔진 배기가스로 질식사시키는 등 그 수법도 더 잔혹했다. 무엇보다 아우슈비츠가 이렇게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역설적으로 생존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생존자가 거의 없던, 그리고 자신의 기록을 남길 수조차 없던 죽음의 장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게 된다. 실로 아우슈비츠의 역설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아우슈비츠 폄하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1930년대 초 최소 330만 명(저자 추정)이 사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1937~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 1939~1941년 소련과 독일의 폴란드 학살, 독소전쟁 중 나치에 의한 계획적인 소련인·유대인 대학살, 전후 스탈린의 인종 청소 작업. 이 모든 일이 블러드랜드,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체제하에서 일어났다. 이 책은 이때 죽어간 1400만 명의 이야기다.


 

2.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


 

저자가 결론에서 던지는 이 질문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전제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질문인 듯하다. 어떻게 그러한 대학살이 가능했을까? 이를 스탈린과 히틀러라는 피에 굶주린 광기에 찬 악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해석은 역사의 진실과도 맞지 않거니와, 별다른 시사점을 주지 않는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런 싹이 보이는 인물을 배제해버리는 것 말고는 없다. 대학살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살의 원인을 묻는 일은 오늘날에도 매우 긴요하고 절실한 작업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스탈린과 히틀러가 블러드랜드에서 저지른 학살의 전개와 결과를 아주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히틀러와 스탈린, 독일과 소련,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학살을 살펴보고 비교하여 수많은 사람의 폭력적인 최후의 원인을 밝히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스탈린은 즉각적으로 이 사태를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공격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역 지도자와 외세의 체제 전복 행위에 전가하였다. 대숙청 과정에서는 안보적 우려 때문에 수많은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는 그 실체가 너무도 모호하고 불확실한 허구적 조직과 관련시켜 죽였다. “폴란드의 음모 따위는 실체가 없었기에, 내무인민위원회 장교들은 폴란드계 및 폴란드와 관련된 다른 소련인들, 폴란드 문화나 로마 가톨릭교를 박해해야 했다.” 대숙청에서는 정적들과 집단화에 저항하던 때를 상징하는 부농도 살육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부농의 저항이 많았던 우크라이나가 살육의 중심지였는데, 이곳은 폴란드계 소련인의 대다수가 살던 곳이기도 하였다.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 출신이라면, 당연히 부농이다.” 여기서 폴란드인은 개인이 실제로 했을지도 모르는 일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규정된 그 존재 자체때문에 처형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나치와 히틀러는 스탈린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폴란드에 대한 파괴적 열망을 공통으로 가졌다는 점에서 두 체제는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들의 주 학살 대상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못지않게 나치는 폴란드인들에 대해서도 대량학살을 벌였다. 1939,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나온 전쟁포로를 독일의 지휘관들은 빨치산, 즉 전시 국제법의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는 비정규 집단으로 규정했다.” 독일군은 폴란드라는 나라는 없으며, 따라서 폴란드군도 존재하지 않는 군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또한 폴란드 유대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 미개한 폴란드 땅을 더욱 오염시키는 병균이나 해충쯤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폴란드 지역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하려 하였고, 하인리히 힘러가 이 일을 전담했다. 이 원대한 이상을 이루기 위해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은 사라져야만 했다. 그 자리는 독일인으로 채워 넣을 계획이었다.

 


독소전쟁은 더 크고 더 잔혹한 학살이 자행된 사건이었다. 독일 군인은 레닌그라드를 포위 점령하여 인위적으로 500만 명 이상을 굶주리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점령지에 수용소라는 이름의 살인 공장을 지었다.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등지에서 학살 시설이 세워져 약 13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이 사망하였다. 이 학살 작전은 라인하르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 작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이다. 이 시설에서는, 총살, 구덩이 파기, 엔진 배기가스로 질식시키기, 독가스 살포 등 유대인을 죽이는 데 여러 방식이 동원되었고, 경찰들은 열차로 보낼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까지 끌고 갔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이들이 유럽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앙의 원흉으로 묘사하며, 이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였다. 이들은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독소전쟁에서 패배가 거의 확실해지자,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복수에 가까운 살육전을 펼쳤고, 수용소는 폐쇄, 매우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그와 함께 아우슈비츠가 마지막 해결책의 마지막 장소로 지정되었다.



 

4.

사람을 죽이는 체제, 수사, 방식에서 양자는 소름 돋도록 유사하다. 저자가 밝혀낸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일정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사람으로 여겨질 권리를 빼앗는 그들의 능력에 있었다.” , 희생되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듦으로써 살해 행위에 도덕적 부담을 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체제 모두 무오류의 존재라고 내세워진 지도자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여기에는 두 지도자(스탈린과 히틀러)가 내세운 애초에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유토피아적 비전이 공격받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다. 도덕적 딜레마를 제거하는 데 있어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모두 조직을 앞세워 집단학살을 덜 나쁜 일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데 선수였다.” 마지막으로 소련과 나치 독일은 이라는 규칙 자체를 정하는 유일한 집단이 지배하는 일당독재체제 국가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최소한의 민주적 질서의 부재, 특정 집단의 인간에 대한 비하와 악마화, ‘막연하지만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에의 맹목적인 헌신 강요, 개인 숭배. 그 수많은 사람들을 참혹한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자,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 죽음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5.

이 책을 읽을 때,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또 다른 부분은, 저자가 최대한 복원하고 담아내고자 노력한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죽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죽은 이의 숫자를 셀 뿐 아니라 죽은 이 한 명 한 명을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살은 기본적으로 개인에 대한 것이며, 그러므로 희생자 개개인의 죽음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책 곳곳에서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죽은 자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가족관계, 그들이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주 상세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아마 여건만 되었다면, 학살당한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를 저자는 옮겼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저자는 대학살의 희생자들이 단순히 몇백만’ ‘몇십만이라는 추상적인 숫자로 기억되는 것에 반대하며, 나치와 소련의 체제하에서 죽은 개개인에 관심을 가진다. 그 일환으로, 책 전체에 걸쳐서 저자는 어림수를 쓰는 것을 되도록 자제하며, 반드시 죽은 이의 숫자를 일의 자리까지 적는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은 그 수가 어림수가 아닐 때, 다시 말해서 마지막 단위가 0이 아닐 때 쉬워진다.” 저자는 단순한 수치로 죽은 이들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며, ‘하나의 ~로 표현할 것을 힘주어 강조한다.

 


‘1400이라는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죽은 이는 이름도 없이 그저 ‘1400속에 한 명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 압도적인 숫자에 개인성이 묻혀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개인성을 제거하고 사람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나치와 스탈린의 정신에 가까운 것이며, 인간성을 가진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은 그 숫자들 속에서 개인의 목소리와 삶에 주목한 책이기도 하다. 역사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홀로코스트와 대학살의 희생자들을 숫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되찾아주어 고유한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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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4-0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우님 완독 하셨군요! 부럽습니다. 저도 내일부터 더 열심히^^*

Redman 2021-04-05 09:3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미미님도 꼭 완독하십쇼!! 이 책은 결론이 진국이에요!

han22598 2021-04-1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역사 속에 하나의 숫자로만 기억되는 그들을 되살려 기억해야하는 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거.... 저도 이 책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Redman 2021-04-15 11:38   좋아요 0 | URL
네 여러 함의가 담긴 책이죠 길지만, 저도 꼭 추천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