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새계에서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헬리어나 라틴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로도 ‘죽음 이후의 삶‘을 의미하는 단어로 쓴 적이 없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건 간에 그것이 있고 난 이후에 오는 새로운 육체적 삶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 P82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궁극적인 부활을 믿었다. 즉 사람이 죽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돌보시다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이 세상 전체를 심판하시고 재창조하실 때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몸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 P85

종말론은 대부분의 1세기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강력하게 믿었던 내용, 즉 하나님의 인도 하에 이 역사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가는 방향은 정의, 치유 그리고 희망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라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현재의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의 이동은 현재 시공간의 우주가 파괴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치유의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가 앞의 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신약성경의 저자들, 특히 바울은 그때를 기대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그 첫 열매로 보았다. - P202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육체성이 폐지된다는 것이 아니다. 혈과 육은 부패하는 것, 변화무쌍한 것,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일컫는 전문적인 용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대조가 되는 것은 우리가 육체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육체적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부패할 육체성과 부패하지 않을 육체성 사이의 대조다. - P248

폴킹혼은 내가 보기에 호소력있는 현대적 은유를 하나 제시한다....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프트웨어를 다시 운용할 수 있는 새로운 하드웨어를 주실 때까지 우리의 소프트웨어를 하나님의 하드웨어에 다운로드 해놓으실 것이다. - P258

예수님이 하신 일의 요점은, 자신이 장기적으로 미래에 대해 약속하신 것을 현재에 실제로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미래에 대해 약속하신 것과 그 당시에 하고 계셨던 일은, 육체 없이 영원히 살라고 영혼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 세상의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어 그들이 현재에서부터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인 창조계의 회복을 누리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도 이와 같은 더 큰 프로젝트의 동료이자 동역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 P297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계속 주장한 것처럼, 부활의 요점은 죽는다고 해서 현재의 육체적 삶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죽은 육체를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시키실 것이다. 현재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 육체를 위해 위대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그림이든 설교든 노래든 바느질이든 기도든 가르치는 일이든 병원을 짓는 일이든 우물을 파는 일이든 정의를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일이든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든 현재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미래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 P298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 P305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현 새대 안에서 하나님의 회복된 창조를 나타내는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징표들을 보여주라는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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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게, 그리고 경멸당한다고 알려지는 게 낫지
항상 경멸당하면서도 아첨당하는 것보다야. 최악인 것,
가장 비천하고 가장 낙담한 운명을 담지하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어, 겁날 게 없거든.
한탄스러운 변화는 최선으로부터야,
최악은 웃음으로 돌아가거든. 어서 오라, 그렇다면
내가 포옹하는 그대 실체 없는 허공이여!
그대가 최악으로 몰고 간 이 가련한 자는
그대의 일진광풍에 대가 지불할 돈 없도다. (4막 1장) - P124

누더기 옷 틈새로 작은 악행이 보이는 건 사실이야.
법복과 모피 가운은 모든 것을 숨긴다. 죄악에 금칠을 해 봐,
그러면 정의의 강건한 창도 맥없이 부서진다.
누더기를 씌우면, 난쟁이 지푸라기도 그것을 꿰뚫지.
아무도 죄가 되지 않아, 아무도, 내가 말한다, 아무도! 내가 모두 윤허하노니. (4막 6장)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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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서양 서사시 문학의 원형을 이루고, 서양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지만, 이 서사시를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너무 긴 분량, 낯선 형식, 생소한 인물과 단어들. 이런 것들이 <일리아스>의 진입장벽을 높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걸 듣고 어느 정도 기대했다. 잘만 만들어지면, 영화의 장점을 살려 원작의 전투씬을 실감나게 시각화해서 볼 수 있고, 호메로스의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표현들을 영화를 통해 접할 수 있어 원작으로 가는 부담감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았다.

그런데.......이 영화는 아무래도 추천하기 어렵다.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삼았다고는 하나, 원작을 원형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하도 난도질하고 각색해버려 원작의 감동을 재현하기는커녕 이 영화를 보고는 원작의 기본적인 내용 이해도 힘들다.

 

일단 좋았던 점 먼저

전투 장면은 정말 잘 스펙터클하게 만들었다.

특히 아킬레우스의 부대가 트로이에 도착하여 펼친 해변에서의 전투 장면이나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건곤일척 전투씬이나 모두 너무 멋있었다. 영화의 전투 장면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감독이 대규모 전투를 매우 리얼하고 실감나게 영상에 담아서, 덕분에 시각적 즐거움이 매우 컸던 영화다.

전투 씬만으로도 볼 만한 영화.

대작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

 

 

나빴던 점은, 원작과는 너무 달라진 캐릭터 설정, 원작의 명대사들을 잘 구현하지 못한 것, 원작의 매력을 잘 살리지 못했단 것 등 많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언급하겠다.

 

흔들리는 주제의식

 

무엇보다 불만인 점은 이것이다.

<일리아스>의 이야기는 싸움만 잘하는 육체적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가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아스>는 전쟁에 참여하여 불멸의 명성을 얻는 대신 요절할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영웅으로서의 명예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얇고 긴 삶을 살 것인지를 두고 아킬레우스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가 백미인 작품이다. 아가멤논이 브뤼세이스를 뺏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투 참여를 거부한다. 전황이 어려워지자 그를 설득하기 위해 오뒷세우스가 나서는데, 아킬레우스는 처음에는 명예는 부질없다며 그의 제안을 거부한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의 손에 죽자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불멸의 명예를 얻는 영웅이 되기를 택한다. <일리아스>란 작품은, 아킬레우스의 두 번의 선택과, 그 과정에서 전투에 나서면 죽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무기를 잡고 헥토르와 싸우는 아킬레우스의 성숙해진 내면 변화에 이 작품의 모든 주제의식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초반에 테티스(아킬레우스의 어머니)와 아킬레우스의 대화를 통해 이런 주제를 어느 정도 다루는 듯했다. 테티스는 이 전쟁이 아들의 죽음임을 알지만, 불멸의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아킬레우스의 참전을 독려한다. 아킬레우스도 아주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같은 이유로 참전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런 주제의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반부터 갑자기 아킬레우스와 브뤼세이스의 치정극이 되어버렸다. 영웅적 행위란 무엇인지, 진정한 명예란 무엇인지에 대한 원작의 질문은 찾아볼 수 없고, 당연히 아킬레우스의 성숙도 볼 수 없다. 불필요한 곁가지를 너무 넘어 굳이 안해도 되었을 서사의 변형이 가해졌다. 아킬레우스의 선택을 다루는 제9권의 오뒷세우스와 아킬레우스의 대화가 영화에선 삭제되었으니 당연히 극의 흐름이나 주제가 길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일리아스>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24권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성숙한 아킬레우스의 격조 높으면서도 감동적인 대화도 영화에서는 감흥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프리아모스를 연기한 배우 피터 오톨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함락 작전 중 너무도 사랑하는 브뤼세이스를 구하려다가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는 결말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영웅의 전투도, 영웅의 슬픔이 가고 난 자리를 영웅의 사랑이 채웠다. <일리아스>의 주제나 기본의식은 사라지고, 그저 그런 할리우드 상업 러브 영화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냥 훌륭한 전투 장면을 위로 삼아야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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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을 며칠전에 보았는데, 여운이 상당히 길게 남았던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 정보를 찾아보다가 놀라운 정보를 알게 되었는데, 이 영화도 원작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리스 컨스 굿윈의 <권력의 조건>이 그것이다.

 







21세기북스에서 역간하기도 한 이 책은 국내 번역본상으로 800쪽이 넘는, 말 그대로 대작이다.

그간 소설 같은 문학작품만 영화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링컨의 생애와 정치행적을 다룬 대중역사서도 이렇게 훌륭하게 영화화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다시 생각해보니,

한국 영화 중에서도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이 김충식 작가의 동명의 논픽션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비단 역사소설이 아니더라도, 잘 쓰인 역사서도 충분히 영화로 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기류 등으로 범위는 제한적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영화로 제작되었으면 싶은 책이 배명식 선생의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이봉창의 생애를 다룬 이봉창 평전이다. 저자는 "독립운동 영웅의 기록이 아닌 식민지 청년 노동자의 기록으로서의 이봉창의 삶" "민족 차별을 근간으로 하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이봉창 같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청년의 삶을 황폐화하는 과정" 등에 입각하여 이봉창의 삶을 서술했다.

 

이봉창은 1901년생으로, 신흥 자본가 아버지를 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가세가 기울어 형편이 어려워진 이봉창은 취직을 했고, 그곳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봉창은 그 차별에 체념하면서도 그 차별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별적 체제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혜택이 주어지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국세조사위원회 활동이 그런 예이다.

 

일본에서는 차별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이봉창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부터 그는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지우고 더욱더 일본인이 되려 함으로써 차별을 없애려 하였다. 조선과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조선인 본명은 절대 밝히지 않았다. 그는 "신일본인"으로서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가 일본인이 되려 하면 할수록, 그가 느낀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기노시타 쇼조'가 아니라 '이봉창'으로서 살기로 결심한다. 이봉창은 31살에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났고 도쿄에서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영화 <링컨>, 수정헌법 13조를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때로는 비열한 수도 마다않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링컨을 그려내어 정치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면, <식민지 청년 이봉창>도 체제에서 소외된 식민지 백성의 내면을 통해 정치의 또 다른 한 측면을 드러낸다. 강유원의 서평을 옮겨보겠다.

 









"우리는 무엇이 이봉창을 분노케 하였고 자긍심을 돌아보게 하였는지를 알았다. 그것은 반드시 식민지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체제에서 소외되어 체제에서 떨려 나갈까 두려워 하면서 불안 속에서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해로 가기 전의 이봉창'처럼 체제에 순응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거짓 이름으로 살아간다면 체제에서 받아들여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들에게 격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정치'임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챌 수 있다. 수많은 기노시타 쇼조들에게 본래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 333~334)

 

영화로 진짜 제작된다면, 흥행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인상깊게 볼 것 같다. (물론 잘 만들어진다면 말이다)

근데 꽤 스케일이 크겠다. 배경이 조선, 도쿄, 오사카, 상하이를 오가니

내 멋대로 캐스팅을 상상해봤는데,

이봉창 역에 배우 류준열 씨가 갑자기 떠오르더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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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모티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과 역사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 유서 깊은 역사만큼 복수 모티프를 다루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햄릿>처럼 복수를 앞둔 개인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묘사한 작품도 있는 반면에

철저하게 복수가 성취되는 과정에만 집중하여 일종의 쾌락을 선사하는 작품도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시리즈는 후자에 속한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 제목만큼이나, 무척 단순하다.

킬러의 삶을 살던 블랙 맘바가 조직을 떠나 한 남자와 만나 새출발을 하려했지만

결혼식날 조직에서 온 킬러들이 자신의 남편과 친구들을 모두 죽이고, 그녀 자신도 죽을 뻔했다.

죽다 살아난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 한 인물들을 차례대로 찾아가 처치한다.

주인공의 복수의 달성이라는 목표가 이 영화의 유일한 지향점이며,

그 과정에서 영화는 액션영화로서 장르적 쾌감에 집중하며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복수의 딜레마나 주인공의 내적 갈등은 이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복수 액션 활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중 등장하는 액션 장면은 감독이 좋아하던 아시아 액션 영화에서 대부분 모티프를 따왔다.

영화를 좋아하는 비평가들이야 무슨 영화들이 차용되었는지 잘 알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아예 모르지만 (대충 이소룡이랑 성룡 영화 오마주는 보였다)

영화의 흐름이 너무나 재밌어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원래 감독은 킬 빌 시리즈를 한 편의 영화로 기획했지만,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 때문에 1/2부로 나누어서 개봉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편의 영화였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1부와 2부의 느낌이 매우 다르다.

액션의 종류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B급 액션 영화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졌다.

1부는 일본 액션 영화에 대한 오마주들이 느껴졌다.

블랙 맘바는 최고의 일본도 명인이자 검객이었으나 현재는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껴 오키나와에서 스시 장사를 하는 핫토리 한조를 찾아가 칼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설정 많이 익숙하다)

한조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자신의 제자였던 빌을 저지하겠다는 블랙 맘바의 요구에 심혈을 기울여 그녀만을 위한 칼을 제작해주었다.

(찾아보니 한조 역을 맡은 배우가 과거 야쿠자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배우라고 한다)


 

이 칼은, 1부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청엽정에서의 전투씬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블랙 맘바는 청엽정에서 자신의 죽이려 한 인물 중 한 명이자 도쿄 야쿠자계를 평정한 오렌 이시이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크레이지 88'88명을 혼자서 처치해 무쌍을 찍는다.

 

 

2부는 과거 홍콩 액션 무협 영화의 오마주가 주를 이룬다.

블랙 맘바는 무림의 고수 파이 메이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받는다.

물양동이를 지고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주먹으로 나무판을 때린다거나 모두 무림 영화에서 흔하게 나오던 전형적인 수련법들이다.

이것도 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다만 주인공이 성룡이 아니라 금발의 백인으로 바뀌었을 뿐. 

2부에서 사용되는 플롯도 과거 무림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것인데,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인물이 사실 자신의 스승까지 죽인 것을 알게 되자 스승의 복수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참고로 파이 메이 역을 맡은 배우 '유가휘'도 홍콩 무술 영화로 명성을 떨친 배우라고 한다.

이쯤되면 그냥 감독이 자기 좋아하던 배우들 만나고 싶어서 만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액션 영화이니만큼, 이 영화에서는 어딘가 웃기면서도 수려한 액션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앞서 말한 청엽정 전투는 1, 2부 통틀어서도 최고의 액선씬인데,

고고 유바리와의 전투도 액션 합이나 안무가 너무나 잘 만들어져 멋있었지만,

당연 최고는 오렌 이시이와의 전투였다.

눈이 내려서 눈이 소복이 쌓인 일본식 정원 위에서 두 인물이 일본도로 건곤일척을 벌인다.

이런 요소들이 합해져 감독은 매우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쉬한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액션 장면 못지 않게 영화의 OST를 적절하게 활용한 것도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특히나 한국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하면 바로 생각나는 노래인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의 박자에 맞춰

칼을 맞대는 오렌 이시이와 블랙 맘바의 전투 장면은 그중에서도 내 원픽.

 

영화 OST를 르자(RZA)가 담당한 것도 웃긴 부분이었다.

르자는 힙합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힙합 크루 우탱 클랜(Wu-tang Clan)의 리더이다.

우탱 클랜의 멤버들은 모두 홍콩 무협 영화의 팬인데(우탱이라는 이름도 무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들의 1'Enter the Wu-Tang (36 chambers)'90년대 뉴욕 붐뱁 감성을 대표하면서

또 수록곡 곳곳에 무협 영화를 오마주한 부분이 인상적인 앨범이다. 앨범 제목 자체도 '소림 36'의 영어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 인물이 아시아 액션 영화의 오마주로 가득 찬 영화의 OST를 담당했다는 것에서 감독의 진심(?)이 느껴졌다.

 

 

음악, 액션 등을 통해 감독은 액션 오락 영화로서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 같다.

복잡한 설정이나, 무거운 주제의식과 복수의 딜레마 같은 것은 없다.

감독은 액션 영화로서 장르적 쾌감에 집중할 뿐이다.

따라서 <햄릿>과 달리 복잡하지 않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영화의 맛은 좀 떨어졌을 것 같다.

 


간혹 교복을 입고 모닝스타를 들고 싸우는 17세 여고생 고고 유바리처럼

말도 안되는 설정이 등장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설정의 존재가 도리어

이 영화의 픽션성과 오락성을 강화하여 장르적 재미는 도리어 배가 된다.

그래서 유혈이 낭자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기 예사인 잔인함 속에서도

이 영화는 특유의 유쾌함과 리드미컬함을 잃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뒤에는

복수를 달성한 뒤 차를 타고 돌아가는 블랙 맘바의 얼굴이 흑백에 클로즈업된 채 보여준다.

아무 대사 없이 그녀의 얼굴만이 나오는데,

여러번 죽을 위험을 넘기고 목표를 이룬 인물의 표정을 잘 보여준 것 같아

인상적인 마무리였다.

 

액션, 음악, 코믹 등 오락영화로서 갖출 것은 모두 갖추었고

거기에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쉬한 연출까지 가미되었으니, 

매우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머리 뜨거운 여름철에, 머리 식힐겸 가볍게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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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9-26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트맨 <다크나이트>처럼 약간의 철학도 담겨 있어서 더 여운이 남았던 영화였어요! OST도 너무 좋고요.

Redman 2021-09-26 21:09   좋아요 3 | URL
여러가지로 좋은 영화였습니다

mini74 2021-09-26 2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독이 본인이 좋아하는 모든 걸 넣은 느낌 ㅎㅎ 그런데 영화도 재미있었던 ㅎㅎ 이소룡옷이 그렇게 멋져보인데는 우마서먼이라서 그렇겠지요. 저는 ㅠㅠ ㅎㅎ

Redman 2021-09-26 21:09   좋아요 3 | URL
저도...ㅋㅋㅋ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