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이례적으로 매우 많은 책을 읽었던 해였네요. 

서평 이벤트로 읽은 책도 있고, 구매하고 먼지만 쌓였던 책도 있고,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직접 구매해서 7월부터는 대략 다달이 10권 정도 읽은 엄청난 독서광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전에도 독서를 좋아하긴 했는데, 그래도 한 달에 2~3권이 고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동안 얼마나 제가 게을렀는지 반성하게 되네요. 


올해 가장 큰 행운은 강유원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책은 <역사고전강의>만 읽은 정도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함과 정독법, 무엇보다 서평가로서의 모습이 저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서평 작성에 대한 동기 부여는 확실히 준 책입니다. 물론, 아직 글쓰기/책 읽기 능력은 한참 모자르지만. 

어쨋든, 작년까지는 읽은 권 수가 몇 권 되지 않아 뽑기 어려웠던 TOP 10을, 한해의 독서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이전에 한 번 읽었던 것을 다시 읽은 책은 제외하였고, 당연한 거지만 발췌독한 책도 제외하였습니다. 순서는 그냥 저자 이름순으로 나열한 것입니다. 






3.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얼마전에 서평도 썼는데, 참 공동체성과 신앙생활에 대해 구체적이고 유익한 조언이 많이 담겨져 있는 책입니다. 

성경 읽기, 찬송, 기도, 중보 기도, QT 등에 실제로 적용해도 될 만합니다. 기독교 신자분들에게는 주저하지 않고 추천하는 책입니다. 


*구름책방이라는 유투브 채널에, 이 책을 한 챕터씩 뜯어 읽고 감상을 얘기하는 영상들이 있으니 그곳도 같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4.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제 기준, 올해 베스트 오브 베스트. 

정체성, 차별과 배제, 폭력의 문제에 대해 깊은 기독교적 통찰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동안 답답했던 문제였는데, 이 책을 통해 저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읽진 않았지만, <베풂과 용서>(복있는사람)와 <기억의 종말>(IVP)은 이 책의 주제를 좀 더 대중적으로 쓴 책이라 하니, 이 책들을 먼저 읽고 <배제와 포용>을 읽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5.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대의민주주의, 선거만이 민주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18세기 이전까지 선거는 귀족정/엘리트주의적 정치와 연결되었고, 오히려 우리가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추첨제가 민주주의와 연결된 방식이었습니다. 

이 책은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부터 고대 로마의 공화정, 미국 독립 이후로 시작된 대의정의 기원과 그 특징을 상세히 밝힙니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의 정치를 이해할 때 유용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읽었던 고병권 선생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도 추천합니다. 남을 배제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 괜찮은 책입니다. 

유재원 선생의 <데모크라티아>(한겨레출판사)는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정 발전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볼 수 있는 책이니, 이쪽도 같이 보면 더욱 풍부한 독서가 될 것입니다. 


<선거는 민주적인가>를 읽고 같이 보며 좋은 정치사상 고전 텍스트들









6. 스티븐 툴민, <코스모폴리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이기도 한 스티븐 툴민이 근대 서양 철학과 사상의 역사를 돌아보며 쓴 책입니다. 근대 철학에 대해 가지는 어떤 장밋빛 이미지와 달리 툴민은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근대의 시작점은 전쟁과 재해 등으로 굉장히 불확실성의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서양의 철학은 더욱더 확실성을 추구했고, 이것이 근대 서양 철학을 관통하는 흐름이라고 지적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본은 절판되었습니다. 저는 운좋게 중고로 싸게 구할 수 있었지만, 원서로는 아직 구할 수 있는 듯합니다.


7.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 새물결플러스, 2020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유투브와 블로그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옥성득 선생이 미국에서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한 것은 다시 한국어로 번역/보완하여 출간한 책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과정이, '기독교를 강제로 주입하는 미국 선교사와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조선인 신도'의 패러다임이 아님을 이 책은 여러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며 밝힙니다. 비단 한국 개신교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며, 기독교의 토착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동저자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나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내용도 중복된 것들이 좀 있는데, 이 책들이 조금 더 평이하게 서술된 것 같습니다. 



8. 조경달, 박맹수 옮김, <이단의 민중반란>

 일본의 재일조선인 사학자 조경달 선생이 쓴 동학농민운동사 통사입니다. 배항섭 선생에 의하면, 이 책이 출간된 후에 한국에서 다시금 동학농민운동 연구가 활발해졌다고 합니다. 민중의 자율성 복권이라는 관점에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를 재구성한 이 책은 그 정도로 혁신적이었고 탁월한 책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올해 초에 이 책을 읽고 동학과 동학농민운동에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책도 품절되어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좋은 책은 어디서든 꼭 다시 출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9. 폴 콜리어, <엑소더스>, 21세기북스, 2014

 '전 지구적 상생을 위한 이주 경제학'이라는 부제를 달은 이 책은 이주 노동자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난민 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는데, 이 책이 포함하는 연구 대상은 난민 + 이주민 + 불법 이주 노동자 등을 다 포괄하고 있어서 100% 만족할 답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극단적 주장을 하지 않고 시종일관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하며,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던 책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저자의 책이 새로 얼마전에 새로 번역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책인데, 빠른 시일 내에 구매해서 읽어볼 계획입니다. 







10.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올해 제 독서는 '후쿠자와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내에 출판된 후쿠자와 유키치 관련 저서들은 거의 다 섭렵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문명론 개략>은 매우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봉건 사회에 대한 불만과 서양사사의 세례를 통하여 급진적 평등주의자로 거듭났는데, <문명론 개략>이 바로 이러한 후쿠자와가 생각한 문명 사회의 이상과 현 일본 사회에 제시하는 문명 사회의 비전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명저입니다. 특히 일본 사회에 만연한 권력의 편중, 다른 말로 불평등을 날카롭게 꼬집는 9장 '일본 문명의 유래'는 정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내에 출판된 <문명론의 개략> 중에서는 소명출판에서 나온 이 번역본이 가장 잘 된 번역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조선은 마치 필연적으로 근대화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설명한 역자 성희엽의 해제는 확실히 마이너스 요소였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개략>과 더불어 읽으면 좋은 책은, 우선 그의 또 다른 저서인 <학문의 권장>(소화)입니다. 심지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저술하여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말년에 쓴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산)도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텍스트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야스 노부쿠니가 쓴 <문명론의 개략> 해설서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됩니다. 









워낙 좋은 책을 많이 읽었어서 고르기 많이 힘들었네요 ㅎㅎ 김회권 선생의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무엘상.하>, 마크 마조워 <발칸의 역사>, 단테의 <신곡>,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 무라카미 하루키의 <약속된 장소에서> 등등. 다 꼽을 수 없을 지경이네요.


내년 독서 계획 주안점 중 하나는 '서사시 읽기(길가메시-일리아드-아이네이스-베오울프-니벨룽겐의 대서사시-동명왕편-실낙원-복낙원-모비딕까지)'와 '조선시대사 읽기(조선왕조의 기원-건국의 정치-한국의 유교화 과정-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정의의 감정들-사대부시대의 사회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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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2-10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많이 읽으셨네요 ^^ 함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Redman 2020-12-10 10:33   좋아요 0 | URL
저도 감사합니다 ~^^ ㅎㅎ

막시무스 2020-12-10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으로도 엄청난 포스의 리스트임이 느꺼지네요! 배제와 포용에 대해서 관심이 가서 담아 두었습니다! 혹시 성경의 욥기에 관해 읽으셨다면 괜찮은 책을 권해주실수 있을까요? 인문학적 관점의 욥기를 한번 보고 싶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

Redman 2020-12-10 10: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욥기를 다룬 책은 잘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문학 고전 강의>에서 욥기를 다루긴 합니다.

제가 읽었던 욥기 서적 중에서 추천할만한 건 권지성의 <특강 욥기>(IVP) 바르톨로뮤 크레이그의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이레서원)입니다. 틀에 박힌 욥기 해석은 하지 않아 도움이 될 것입니다! ㅎㅎ

막시무스 2020-12-10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문학고전강의에서 욥기편 읽고 관심이 생겨서 이리저리 책을 찾던 차였어요! 강박사님이 책에 기재한 도서가 절판이고 도서관에도 없어서 아쉬웠는데 추천 감사합니다!ㅎ

Redman 2020-12-10 11:43   좋아요 1 | URL
읽고 꼭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ㅎㅎ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b판고전 11
발터 벤야민 지음, 심철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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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서출판 b에서 출간한 심철민 역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1939년에 출판된 제3판을 저본으로 삼되, 1판과 2판과의 내용 변화 추이를 반영하여 번역하였다. 이를 위해 부록 ‘판별 내용 대조’에는 1판·2판과 비교하여 3판에 추가되거나 변경된 부분, 그리고 3판에서 삭제된 부분, 마지막으로 불어본까지 포함한 네 판본 간의 본문 및 원주 대조가 실려있다.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최성만 옮김, 길, 2007)에는 2판과 3판만이 수록되어 있고(목차만 확인한 것이다), 전기가오리 역간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신우승 옮김, 전기가오리, 2016)도 2판을 번역한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주요 판본의 내용을 비교해서 읽고 싶은 독자분들은 이 번역본이 적절하겠다.

총 15개의 절로 구성된 이 짧은 텍스트는 ‘머리말’과 ‘추기’를 제외하고 다섯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물론 이 구분은 내가 임의로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그닥 설득력은 없다.

2.

먼저 1~5절은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 가장 정독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1절에서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서 예술작품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우라의 붕괴’이다. 아우라란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작품이 갖는 ‘지금-여기’라는 특성, 즉 예술작품은 그것이 존재해 있는 곳에 유일무이하게 현존해 있다는 특성이다.” 그리고 이 ‘지금-여기’라는 “시공간적 유일무이성”이 예술작품의 “진본성”을 이룬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복제가능성은 예술작품을 대중 앞으로 당겨 놓으면서 진본성, 즉 예술작품이 갖는 ‘지금-여기’의 특성을 무색하게 한다. 물리적 제약을 초월하여 예술은 복제를 통하여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말해 유일무이한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진본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더 근원적으로 예술 “최초의 본원적 사용가치”인 제의적 가치와 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우라는 그 제의적 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고대부터 이미지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서 이용되어왔다. 맞는 사례인지는 모르겠으나, 대표적으로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의 입상’ 같은 작품은 프로파간다를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그 석상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듯 청년기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그의 ‘맨발’도 자신을 신격화시키기 위한 장치로써 이용되었다. 또한 가톨릭의 이콘은 종교적 목적을 위한 예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은 “세계사에서 최초로 제의에의 기생상태로부터 해방시킨다.” 벤야민은 5절에서 이를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적 가치’로 옮겨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전 내부의 신상과 이곳저곳 옮겨지는 흉상, 프레스코화/모자이크화와 패널화, 그리고 미사곡과 교향곡. 각각의 사례에서 후자의 전시가능성이 전자보다 더 크다. 이는 3절에서 설명한 “모든 것의 복제를 손에 넣음으로써 주어진 것의 유일무이성을 극복하려고 하는” 현대 대중의 경향과 맞물리면서 아우라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바야흐로 예술 향유의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아우라의 붕괴는 “평등성에의 감각”을 진척시키거니와, 이는 당시 대중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진본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사라지면서 예술은 제의적 기반으로부터 분리된 대신 “정치에 근거를” 두게 된다.

3.

두 번째 부분인 6절은 제의적 가치보다 전시적 가치가 더 중요해진 최초의 예술 분야인 ‘사진’과 그것의 예술적 가치를 다룬다. 초기 사진은 ‘얼굴 사진’을 통해서 아직 제의적 가치, 즉 아우라가 남아 있었지만, “앗제에 이르러 사진은 역사과정의 증거물이 되기 시작한다.” 즉, 사진에서 사람이 사라지게 되면서 드디어 예술의 전시적 가치는 예술적 가치를 추월하였다. 위키백과 ‘으젠 앗제’에 따르면, 앗젠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사라져가는 파리의 옛 모습을 기록하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이러한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뀐 사진의 성격, 곧 사진은 관찰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관조”가 아니라 “특정한 의미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영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세 번째 부분인 7절은 6절과 8절 사이에 교두보 역할을 하는 장으로, 사진의 예술적 가치보다도 사진의 발명으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변한 예술 자체의 성격이 더 중요하다며 영화의 의의를 여전히 초자연적인 것 속에서 구하는 반동적 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8절에서부터 드디어 기술적 복제 가능 시대 예술의 전형인 영화를 분석한다.

4.

네 번째 부분인 8~14절은 기술적 복제 시대 예술작품의 전형을 보여주는 영화의 특징과 영화로 인한 변화들을 열거한다. 영화는 카메라와 조명 등의 기계장치를 매개하여 대중에게 선보여진다는 점에서 연극 무대하고 다르다. 기계장치를 매개한다는 사실이 영화의 특징을 규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데, 이로써 영화배우의 연기(9절)뿐만 아니라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10절)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어떤 예술작품의 ‘지금-여기’의 특성이다. 연극무대에서는 배우의 아우라를 관객이 느낄 수 있지만, “영화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 갖는 특이한 점은, 관객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기계장치가 놓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배우를 둘러싼 아우라는 탈락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누구든지 영화제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10절). 비근한 예를 들자면, 다큐멘터리 영화나 르포 영화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영화들은 굳이 배우가 아니더라도 스크린에 출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회가 되면 누구나 출연할 수 있다는 면에서 영화에서는 대중과 배우 사이의 차이는 상실된 것이다.

11~13절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가져온 예술작품의 기술 복제 가능 시대 일대의 변화들을 순차적으로 다룬다. 그중에서도 11~12절은 화가와 회화와의 비교를 통해 영화가 가지는 특징적인 면모를 더욱 부각시킨다. “화가는 작업할 때 대상과의 자연적인 거리를 관찰하는 데 반해, 촬영기사는 대상의 구조 속에까지 깊이 파고든다.” (11절) 또한 영화에서는 “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계”가 변한다. 항상 소수의 사람에 의한 감상을 요구했던 회화와는 달리 영화는 대중에 의한 “집단적 수용”을 요구한다. (12절) 영화는 카메라 렌즈와 같은 기계장치를 통하여 사물이나 운동을 느리게 보거나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으며,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까지 볼 수 있게 한다. 이는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필연성들에 대한 통찰을 증대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예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유희공간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13절) 14절은 “대중이 영화 속에서 구하고 있는 효과들을 회화라는 수단을 통해 만들어내려고 시도”한 다다이즘에 대해 설명한다. 다다이즘은 복제의 방식을 회화에 접목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인 15절은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대폭적인 증대”가 예술에의 참여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다룬다.

5.

벤야민은 추기에서 ‘파시즘’에 의한 ‘정치의 미화’를 경고한다. 그가 이 논문을 쓰고 있던 1935년은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시즘 세력이 집권하여 온 유럽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였다. 파시즘에서 보이는 정치적 표현의 특징은, 공공 연설이나 퍼레이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강력한 대중 동원력과 선동력이다. 히틀러는 연설을 통하여 대중 앞으로 자신을 가까이한다. 이것은 벤야민이 고찰한 영화의 특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영화 자본이 ‘스타숭배’를 만들어 다시 제의적 가치를 존속시켰듯이,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지도자(영도자) 숭배를 통하여 다시금 예술의 제의적 요소와 아우라적 요소를 부활시키고 있었다(강력한 일인 지도 체제라는 면에서 루즈벨트도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예술의 근거가 다시 제의적 가치로 옮겨가는 것은 기술 복제 시대가 가져온 한 특징, 곧 ‘대중의 등장’과 ‘예술 향유의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파시즘적 정치에도 대중은 존재하지만, “파시즘은 소유관계를 온존시킨 채 표현의 기회만을 그들에게 주려고 한다.”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은 채 대중을 지배하려는 그들이 택한 방법은 “매스컴 기구를 장악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파시즘의 정치를 ‘정치의 미화’라고 부른다.

“정치의 미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하나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 정점이란 전쟁이다. 전쟁은, 그리고 오직 전쟁만이 종래의 소유관계를 유지한 채로 최대 규모의 대중운동에 하나의 목표를 부여할 수 있게끔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정한 파시스트들이 종래의 소유관계를 유지하면서 “최대 규모의 대중운동에 하나의 목표”, 즉 전쟁으로 향하게 한다. ‘정치의 미화’의 궁극적 결과는 전쟁이라는 벤야민의 예언은 이후의 역사 전개를 아는 우리의 경각심을 울린다.

벤야민은 이 논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짓는다. “이 파시즘에 맞서,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대답한다.” ‘예술의 정치화’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파시즘적 ‘정치의 미화’에 대립되는 의미로 쓰였다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때 ‘예술의 정치화’란 불평등한 소유관계를 그대로 놔두고 영도자 숭배로 이어지는 ‘정치의 미화’가 아닌 소유관계의 평등과 대중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정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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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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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 후지이 다케시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책에는 머리말이 추가되고 결론은 본론 요약을 제외하면 거의 다 새로 썼다. 대충 훑어보긴 했지만, 본론에서는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과 큰 차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35천 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riss’라는 사이트에서 저자의 학위논문을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니(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0), 이쪽을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후지이 다케시는 서론에서 이렇게 묻는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건국되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후지이 다케시가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을 통하여 재구성한 한국의 해방 8의 정치 공간은 그들 생각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매끄럽게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책에서 족청계를 분석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사상적 특징 때문이다. 1945년 등장하여 1953년에 정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족청계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 위치한 존재였으며, 거시적으로 봤을 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가시화되는 가운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다양한 편차를 내포하면서 결합되는 양상의 주변부 수용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이 뒤섞인 족청계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이범석, 안호상, 양우정이었다. 이 3명의 공통점은 파시즘과 관계를 가지면서 형성된 민족주의였다는 점이다이범석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훈련위원회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으며, 장제스의 파시즘에 영향을 짙게 받았다. 이범석은 해방 이후 조직한 족청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에도 장제스의 방식과 훈련단의 모델을 많이 참조했다. 안호상은 독일 유학 시절 히틀러와 나치즘에 깊은 인상을 받고, 칸트와 헤겔을 연구하며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를 주장하는파시즘과 장제스식 역()행철학과도 친화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양우정은 1931년에 전향한 사회주의자인데, 그 전향 논리가 흥미롭다. 양우정은 유물론과 유물사관에 의문을 품고는 민족주의와 일본 파시즘과 그 논리를 공유하는 가족주의 사상으로 전향했다.

 

족청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이범석이다. 따라서 족청의 이념은 이범석이 영향을 받은 장제스식 파시즘과 유사할 수밖에 없었다. 족청의 이념은 파시즘과 상당한 친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범석은 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 전쟁으로 보는 공식적인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고, 오히려 패배한 독일·이탈리아·일본 측이 가졌던 전쟁 인식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동시에 이범석은 분명한 제3세계주의적 경향을 띤 민족주의자였으며, 반제국주의적 성격 역시 존재했다. 그리고 안호상 등을 통해 족청에 접목된 나치즘의 영향으로 족청은 반공주의면서도 반자본주의라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후 족청계가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뒤, 어떤 이는 족청계의 파시즘적 행태, 다른 이는 “‘공산당적수법을 비판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족청계는 좌익/우익’ ‘반공/자본주의라는 이분법 구도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층위와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이러한 족청과 족청의 이념이 구체화된 것이 일민주의이다.

 

일민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는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안보의 공백이 발생한 지점과 겹친다. 이승만은 공산당과의 싸움이 아직은 사상적 싸움이라고 규정하면서, 사상적 싸움의 수단으로 민주주의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일민주의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한 내 좌익들의 사상적 전향을 이끌어내는 매개체로써 일민주의가 사용된 것이다. 전향은 폭력적 강압과 유도한 세트로 구성되었는데, 일민주의가 유도를 맡았다. 그리고 이 일민주의를 통한 전향으로의 유도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가 양우정이었다. 양우정의 공산주의 비판의 핵심은 민족주의를 기축으로 한 반공주의였다. 그는 민족을 강조하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더 나아가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까지 비판한다(물론 비판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대한민국 헌법이기에 자본주의 비판은 다소 애매해진 부분은 있었지만). 일민주의를 통한 전향은 공산주의의 이항대립항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민족과 국가(대한민국)로의 전향이었다. , 일민주의는 좌익들을 포섭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물론 전향이 사상적 전향만이 아니라 지리산지구 토벌 작전과 같은 폭력적 강압에 의한 전향도 있었음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일민주의와 족청계는 미국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50, 일민주의보급회를 조직하는 등 이범석은 일민주의를 통해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려 했지만, 경제 원조를 두고 이범석과 안호상을 경계한 미국의 압력으로 이범석 당시 부총리와 안호상 당시 문교부 장관이 사퇴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1952년 발췌개헌을 둘러싼 국회와 이승만 정부 사이의 갈등 속에서 족청계와 일민주의는 다시 정치 무대의 중심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일민주의는 이전에 계급성과 배타적 민족주의 성격이 상당히 희석된 협동주의의 형태로 재등장했다. 족청계와 이승만이 속한 원외자유당이 농민을 위한 당임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양우정식의 논리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으며, 미 대사관이 안호상을 경계하는 마당에 일민주의의 인종적 성격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조되었으나, “미국을 따라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협동주의로 성격이 바뀌었다.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라는 사태에서 미국은 이범석을 예의주시했다. 미국은 당시 이미 고령이었던 이승만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 이범석이 권력자가 될 것을 우려해, 이승만과 이범석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 작전은 먹혀들었고, 그 결과가 이범석의 부통령 낙선이다. 1953년 초, 휴전 반대운동으로 잠시 족청계와 일민주의가 부활하는 듯했으나, 이범석이 이승만의 권유로 외유를 나간 사이 족청 출신 장관을 갑자기 해임하고, 자유당 중앙당부에서 이범석과 안호상, 양우정 등을 제명함으로써 권력의 중추부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족청계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이범석은 경찰의 엄중한 사찰 대상이 되었으며, 1956년에 공화당을 조직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지만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안호상은 19546월에 한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양우정은 19541월에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지만 정치계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족청계가 정치 세력으로 부활하는 일은 없었다.

 

후지이 타케시는 서론에서 “‘반공=친미라는 냉전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결론부에서는 냉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반증하는 것이 반공적이면서도 냉전적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적이었던 사상을 가진 족청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족청계의 몰락은 하나의 상징이다. 족청이 재기불능 상태가 된 것은 미국발 냉전 체제가 한국에 완전히 공고화되었음을 의미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진영 논리가 자리 잡으면서 족청계와 그들의 사상은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냉전적 이분법인 진영 논리가 강조됨으로써 첫째 전향 사회주의자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축소되었고, 둘째 경제적 민족주의는 쇠퇴하였다. 여기서는 조봉암 같이 제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마지막 셋째 설립부터 여성과 학생, 농민 등을 포섭할 정도로 막강한 대중적 동원력을 지닌 족청의 몰락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던 대중 동원의 정치 공간이 한국전쟁 휴전과 더불어사라졌다. 대중이 직접 정치의 주체로 나설 공간이 냉전과 함께 소멸된 것이다.

 

이러한 시사점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냉전적 이분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그리고 이러한 본격적인 냉전 질서의 시작점인 휴전 체제의 성립 이전과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은 해방 공간의 유동성을 앗아갔고, 그 결과는 아직도 '이것 아니면 저것' 식으로 진영을 가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냉전에서 벗어나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족청계는 1953년 말경에 권력 중추부에서 제거당하는데, 그에 이어 자유당이 의회정당으로 거듭나고 헌법에서 ‘국가사회주의적’ 조항이 약화된 사실로 상징되듯이, 그들의 몰락은 역사적 전환기였던 ‘해방8년’의 종언, 즉 냉전이 남한 체제 내부에까지 관철되면서 대중이 직접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소멸한 것과 궤를 같이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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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박승찬 지음 / 누멘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박승찬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누멘, 2010

박승찬의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는 학문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12~13세기에 일어난 스콜라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을 탐구한다. 라틴 세계에서는 보에티우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일부만 전해지다가, 12세기경부터 차츰 아랍권으로부터 그의 다른 저서들이 번역되어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수용은 12~13세기 중세의 학문 세계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바로 이러한 수용에 결과로 탄생한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대작 <신학대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I부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의 역사’와 제II부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앞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사상이 12~13세기에 어떤 과정을 거쳐 유입되고 어떤 반향을 냈는지를 탐구했다면, 제II부에서는 그 주요 사례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학문의 체계 정립’과 ‘신앙과 이성의 조화’ 탐구) 다룬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내용은 후자보다는 전자일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떠한 사상을 형성했는지보다도, 그가 그런 사상을 형성할 수 있었던 제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의 교류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탄생한다는 내용을 건축가의 시선에서 풀어낸 유현준의 <공간이 만든 공간>도 추천한다)

중세 이전 라틴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발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한계점이 많지만,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일단 전집이 편집된 이후에는, 수사학 수업의 교재로 사용된 논리학 저술들을 중심으로 초기 그리스에서 관심을 가졌고, 오리게네스 등 초기 교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어느 정도 수용적이었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거부한다. 라틴 교부에서 주목할 사례는 아우구스티누스인데, 그에게 아리스토텔레스란 “자신의 사고를 드러내기 위한 입문적인 성격만을 지니는 것이었다.” 13세기 이전 서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거의 유일한 원천”인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확신하에 여러 주해서를 저술하였고, 현실태-가능태나 우유, 보편 등의 용어가 정립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의 사후 더 이상 그만한 “중개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12세기까지 “잊혀져 버렸다”. 다만 이러한 와중에도 그의 논리학 작품은 보에티우스를 거쳐 성 안셀무스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기에 ‘완전히 잊혔다’라는 표현을 쓸 때는, 유의해야 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12세기 서양과 아랍의 접경지역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로부터 들어온 필사본을 번역하고, 이를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에 불타던”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보러 오면서 본격적으로 재발견되었다. 비록 위작까지 번역했다는 점, 번역자의 대부분이 아마추어 수준의 학실을 갖춘 인물들이었다는 점, 번역 자체의 오류, 그리고 널리 유포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이미 12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작품을 라틴어로 읽을 수 있었다. 13세기에는 모에르베케의 윌리엄(1215~1286) 같은 번역가의 영웅적 헌신으로 기존 번역 전체의 수정 작업과 이전에는 번역되지 않은 <정치학>, <시학>, <수사학> 등의 작품이 라틴어로 옮겨졌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핵심 주해서들을 정력적으로 번역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더불어 아베로에스와 그 이전 그리스의 주해서들까지 상당수 번역되어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이 극히 초보적인 단계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리한 텍스트 비판 능력을 통해 텍스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꽃을 핀 13세기의 탐구 경향을 더 자세히 알아보자. 13세기 전반기에는 세 차례 걸쳐 아리스토텔레스 강의금지령(1215년, 1231년, 1245년)이 내려졌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확산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1255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수업에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는 학사 규정이 파리대학에서 발표되었고, 그때부터 더욱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다. 그리고 이는 중세 학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오캄 이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의 개념과 이상을 학자들은 수용하였고, 예비적 학문의 성격을 지닌 인문학부는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갖춘 “철학부”로 발전했으며, 자연과학 탐구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중세가 아무런 발전이 없던 암흑 시대였다는 소리는 정말 아무 근거가 없는 소리이다.

13세기, 새로운 사상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과 대립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신학적인 기획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과 해석들을” 받아들였던 혼합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이다. 둘째는, 파리대학의 인문학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주해자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혹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이다. 마지막 셋째는, 심정적 적대와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양극단을 피하고 그리스도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종합하려던 비판적 수용의 태도이다. 이 세 번째 유형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스승 대 알베르투스가 있다. 여기서 잠시 알베르투스의 사상을 간단히 추려보자. 그는 ‘의역 주해’라는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해석해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인용하면서도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알베르투스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자리 잡은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학문방법론을 통해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난하거나 수용하는 대신, 그의 철학을 “전체적인 면에서 진실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일치하는 의미에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토마스의 노력이 바로 <신학대전>이라는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직접적 배경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앞에서 말한 이상적인 종합을 이룰 수 있던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주요 원전과 주해서들이 충분한 정도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지 못했음에도 라틴어 번역을 통해서 그러한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번역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박승찬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자. “ 문화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때, 단지 외부적인 조건들이 있다고 곧바로 그런 수용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수용과정에서는 단순히 어떤 내용들이 들어오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수용자가 이 내용들을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12세기 이전부터, 신학자들은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한 문제의식이 밑바탕을 이루는 상태에서 새로이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열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전부터 이어지던 신플라톤주의의 역할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

조선 후기, 서양의 사상을 수용할 때는 주로 청과 일본의 번역본을 통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아카넷, 분도출판사, 도서출판 길, 도서출판 숲, 책세상, 이제이북스 등. 해외의 고전과 원전을 원어 직역으로 출판하려는 출판사들이 많아졌다. 최초의 철학서적 번역이 1954년에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당시 제목은 <참회록>)이고, 그마저도 중역에 발췌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플라톤 전집이 번역되고(천병희/정암학당/박종현) <고백록> 라틴어 원전 번역만 5종이 넘으며(박문재, 성염, 선한용, 김기찬, 최민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원전 완역(이병창 역, 먼빛으로)이 이루어진 것은,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의 번역 수준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물론 미진한 부분은 아직 많지만).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단순히 번역만 많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수용자인 우리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텍스트를 받아들일지다. 이제는 읽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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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대표작 1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정현숙 옮김 / 복있는사람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평소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상 깊은 구절에 밑줄을 긋거나 따로 독서 노트에 메모하여 독서의 감상을 보존하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농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들을 문장들로 가득 찬 책이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들을 음미하며 읽느라 분량에 비해 읽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나 그만큼 깊은 책이었다.

기독교는 공동체의 종교이다. 공동체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아래 하나가 된다. 이 책은 그러한 기독교의 공동체 생활이란 무엇인지 탐구할 수 있는 책으로, 목회자 본회퍼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개인의 경건 생활은 물론 공동체 영성 함양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성 수양이라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나 사막교부의 금언집도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 >과 같은 유익을 준다. 그러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경우, 중세 수도사적 한계가 뚜렷한 편이고, 사막 교부들로부터는 신독의 가치를 배울 수는 있지만, 공동체의 가치와 생활과는 맞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회퍼의 이 책은 이들의 한계를 보완하여 개인의 영성 생활과 더불어 공동체 영성도 계발할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1장은 성도의 교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을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몸과 몸을 부대끼며 함께하는 것은 신자들에게는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됩니다.” 성도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큰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제”임을, 따라서 공동체 안에 개개인이 아니라 그에게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기 교회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뇌리에 깊게 박혔다.

2장 '함께하는 날'은 아침 경건 시간의 중요성과 그때의 공동 말씀 읽기, 공동 기도, 공동 찬송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본회퍼는 특히 시편 기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사람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편의 진정한 화자는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다. 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시편의 기도를 드리면, 그 기도는 인간적 소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근거”한 기도가 되고, 응답의 약속도 받는다. 이외에도 공동 성경 읽기는 연독의 방식으로 읽을 것, 각 구성원이 교대로 읽을 것, 찬송을 부를 때는 단성 찬송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는 등의 구체적인 조언들이 뒤따른다.

3장은 홀로 있음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공동체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고, 오히려 공동체에 해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도의 교제 안에 있어야 하지만, 침묵하며 홀로 있을 수도 있어야 한다. 침묵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이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복을 받은 후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매일의 성경 묵상과 중보기도와 개인적 기도를 위해서도 이 침묵은 꼭 필요하다.

4장은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섬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스리는 원리는 자기 정당화에서 나오는 폭력 행사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에 기초한 섬김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 누구도 서로를 판단하며 정죄할 수 없고, 낮은 자리에서 지체를 섬기려는 모습만 남는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 남을 도와주는 것, 서로의 짐을 지어주는 섬김이 열거된다.

5장은 공동체에서 죄 고백의 중요성과 성만찬의 의미를 다룬다. 죄인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경건한 공동체”와 달리, 성도의 공동체는 죄인의 공동체다. 죄 고백과 용서 속에서 진정한 교제로 나아갈 수 있는 공동체다. 죄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화해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기를” 원하고, 이것이 성찬이다. “거룩한 성찬의 교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완성 그 자체”이다. 성찬을 통해 성도들은 영원히 서로 함께 거하게 된다.


이처럼 이 책은 성도의 공동체란 하나님의 은혜임을 상기시키며, 성찬의 종말론적 의미를 강조하며 마무리된다. 코로나로 인하여 2020년 대한민국의 성도들은 얼굴을 볼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은 모일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리고 나아가 코로나 이외에도 여러 이유로 숨어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지체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코로나는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장차 다시 올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새번역). 지금 다른 지체들은 떨어져 있어 볼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이 전염병이 수그라들 그날에는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신앙생활과 내가 속한 교회 생활을 돌아보았고 남의 티눈은 보면서 내 눈에 들보는 못 보았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이 걸렸던 또 다른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도 있다. 결론만 말하면,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 교회의 성도분들께 더 감사한 마음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불만 가득한 교만한 마음도 내려놓으며 더 겸손해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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