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 38~39쪽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차혜원 옮김, <옹정제>, 이산. '옮긴이의 말', 223~226쪽


18질 112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주비유지>는 옹정제와 232명의 관료가 주고 받은 서간문을 모아 출간한 자료로 당시 사회의 심층부를 그대로 보존해 놓은 일종의 타임캡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실록 등의 공식기록이 사실의 표면적인 부분을 스치고 지나간 정도라면 이 자료는 그 핵심부분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살아 있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

<옹정제>를 세상에 나오게 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미야자키 자신의 역사학자로서의 소명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시야에 사라져 있었으나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을 소개하고 기억시킴으로써 역사를 제자리에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이 이 전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으며, 이것이 옹정제의 삶에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

<옹정제>는 일반인을 위하여 쓴 비전문서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이후 40여 년간에 걸쳐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는 이른바 '옹정학'의 출범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하다. 미야자키는 1949년부터 교토 대학 내에 옹정주비유지 연구반을 만들어 <주비유지>의 윤독을 시작하였고 수업교재로도 활용한다. 이때부터 구어체와 속어가 섞여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비유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반에 의해 완전히 독해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단순히 읽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와 법제상의 술어, 지방풍속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어휘를 카드에 채록하는 색인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40여 년간 매주 거의 빠짐없이 윤독회가 이루어졌는데, 모두 99명의 인원이 참가하였던 대사업이었다.

<주비유지>의 윤독회가 수백회 거듭되면서 연구원들 사이에는 이렇게 반복되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빠른 결론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하여 연구반의 또 다른 기둥이었던 아베 다케오라는 학자는 이렇게 일축하였다고 한다. "이런 것을 해나가는 일, 그게 바로 학문이라는 겁니다"라고.

(...)

1986년 그 총결산이 <옹정시대의 연구>라는 방대한 단행본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또한 1990년대에는 그동안 정리한 카드 12만 매 분량의 색인작업을 완성하였다. 이 색인은 단순히 어휘의 소재를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후의 문장을 몇 구절씩 함께 채록한 일종의 난해어 사전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청대사 연구자들이 <주비유지>라는 망망한 사료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데 있어 가장 든든한 등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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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6 1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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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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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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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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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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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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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반론과 항변이 많긴 하지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전쟁이 그때 시작되지 않았다면, 김일성 역시 좀더 이른 시점에서라면 몰라도 그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우리는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다는 진리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내전은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나며, 모든 이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먼저 한국을 아무 생각 없이 갈라놓고 식민지 정부기구를 재건한 미국과 그 기구에 봉직한 한국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중략) 한국이 고대부터 지녀온 통합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인들이 그런 체제를 원하든 않든 간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소련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 P333

미국도 소련도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한, 증오의 대상이 된 38도선을 제거하는 군사행동을 지지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열띤‘ 내전의 시발점을 소련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이 철수중이던 1949년초 이후로 잡을 수 있다. - P333

독자는 북한이 왜 1949년 여름 남한의 도발에 침략으로 응수하지 않았는지 질문할지 모른다. 만약 그때 침략했다면 그것을 도발에 의하지 않은 침략으로 해석하기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 대답은 간단하다. 나중에 6월 침공의 주된 타격력이 된 병사들, 즉 정예군이 아직도 중국에서 전투중이었던 것이다. - P340

1950년 6월에 발발한 전쟁은 1949년의 유격전과 9개월에 걸친 38도선 부근 전투에 뒤이은 것이다. - P346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기본개념이 이승만의 개념과 아주 비슷했으며 1949년 8월의 전투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즉, 막다른 지역인 옹진을 공략하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개성을 장악하고 나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 작전은 옹진과 개성에서 공격받기 쉬운 평양을 훨씬 더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게 된다. 최대한으로 잘 풀리면, 북한군이 서울을 며칠 만에 점령한다는 것이다. - P350

양쪽 모두 1950년 여름이 1949년 여름처럼 시작되리라고 예상했으며, 양쪽 다 상대방을 이번만큼은 영원히 요절내기를 원했다. 김일성은 모스끄바로부터 새 장비를 얻은 데다가 자신의 계획에 대한 스딸린의 외견상의 동의와 뻬이징의 마오쩌뚱에게서 직접적인 지원을 얻어냈으니, 분명히 그만큼 더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 P355

1950년 6월의 전쟁 발발 상황에 대한 설명들 대부분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적을 향해 북한이 새벽녘에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전쟁은 1949년에 많은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외진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몇 시간 후에 38도선을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개성, 춘천, 동해안에 이른 것이다. - P364

이데올로기적인 폭발성으로 충만한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은 분명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내전에 관한 질문이 아니며, 단지 동족상잔의 투쟁으로 직접 고통을 당한 세대들의 애간장을 쥐어짤 뿐이다. - P369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순전히 한국인들끼리의 내부충돌이라면 식민주의, 민족분단, 외국간섭 등으로 야기된 엄청난 긴장이 해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이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이전의 현상으로 복구되었을 뿐이며, 오직 휴전만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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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의 북한은 단순한 소련의 위성국가가 결코 아니었으니, 1945~46년에 광범위하게 결성된 ‘인민위원회’에 기반한 연립정권으로부터 1947~48년에는 비교적 소련의 지배를 받는 정권을 거쳐, 그 후 1949년에는 중국과 중요한 연계를 갖는 정권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전개 덕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두 공산주의 대국 사이에서 적절한 책략을 쓸 수 있었다. - P319

소련의 정책은 남한에 단독 정부 및 군대를 세우려는 계획을 밀어붙인 미국의 정책보다 임시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다. - P320

공산당 혹은 노동당은 사실 방대한 농민층에 사회적 토대를 갖고 있었다. 당 기구는 출신계급에 상관없이 거의 누구든지 당원이 될 수 있는 개방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김일성의 지배를 따르는 대중을 끌어모았다. 이로 말미암아 빈농 대중이 당 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 P320

해방 후 일년 동안은 민족주의자, 기독교도, 토착 천도교도 같은 비공산주의 정당과 단체가 많이 있었다. 김일성의 지도력은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의 ‘청우당’이라는 두 주요 정당에 대해 ‘통일전선’ 정책을 채택했다. (중략) 이 통일전선 정책은 이 정당들에게 어떤 실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 정책은 농민층에 뿌리내린 천도교와 도시, 특히 평양에서의 기독교 세력의 중요성을 고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권은 이런 정당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겪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명하달식 통제에 예속시켰다. - P322

북한은 곧 비좌익 정치적 반대파 모두를 가혹할 정도로 철저히 제거했다. 통일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두 비공산계 정당이 여전히 허용되었으나, 권력은 전혀 없었다. 그 의도는 남한 우익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대안적인 권력중심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 일을 훨씬 더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조직의 월등한 우세와 반대파의 전반적인 약세 때문이었다. - P325

북한의 보안기구는 하나의 혁명적 사법기구이자 동시에 철저하고 종종 전체주의적인 통제·감시 체제였다. - P326

그들의 직무에는 기본적인 정치적 사유를 신봉하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할 만큼 전체주의적 사상통제 및 감시체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 정권은 대규모 비밀 조직망을 구축하여, 시민들의 충성심을 검사하는 한편 여론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지도부에게 제공할 수단으로서 풍문과 소문을 포함한 정치적 발언들을 보고하도록 했다. - P328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조국을 통일하려는 목표를 지녔다. 이승만과 달리 그는 1950년에 이르러서는 그 과업을 달성할 수단을 확보하였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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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0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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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0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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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9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가운데 케빈 패스모어의 <Fascism> 개정판을 완역한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전면적으로 다시 쓰기로 생각한 것은 초판에서 제시한 파시즘의 정의는 그릇된 가정에서 출발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여러 이론을 종합하여 파시즘에 대한 나은 정의를 내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파시즘의 다양한 양상을 하나의 정의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1‘A이면서 A가 아닌에서는 결국 파시즘을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편의적인 명칭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파시즘을 어떻게 논의하고 어떻게 이에 대항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시 활동가들에게 매우 실제적인 개념이었던 파시즘은 어떻게 해석했고, 그로부터 무엇을 차용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차용한 것들을 다른 사상 및 실천과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2파시즘 이전의 파시즘?’부터는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논의를 전개한다. 2장에서는 파시즘의 사상적 토양이 되는 19세기의 여러 사상과 정치적 맥락을 볼 수 있다. 그 사상들은, 첫째 보편적 법칙으로부터 도출된 설계도에 따라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계몽주의 사상”, 둘째 낭만주의와 그 뒤를 이은 다양한 관념론적 사조와 같은 반이성적 사유 전통, 셋째, 조르주 소렐과 귀스타브 르 봉 유형의 군중심리”, 넷째 프리드리히 니체, 다섯째, 사회다윈주의와 인종주의 등이 포함된다.

 

사회 정치적으로는 전문지식인에 대한 질시와 더불어 유대인과 여성의 전문직 진출에 대한 두려움을 거론할 수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맥락은 바로 대중의 약진이었다. 엘리트 지배 사회에서 대중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여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화두가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곧 새로운 정치와 사상이 대중 정치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이상의 경향들은 급진적 우파에게서 발견되지만, 이것이 곧장 파시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급진적 우파와 파시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3장과 제4장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예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파시즘의 양상을 살펴본다. 유럽에서 파시즘의 등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만연한 사회적 불안과 관련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전후 계속된 사회불안이 내셔널리스트들의 분노를 더욱 돋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은, 대중운동을 이용하는 한편 역설적으로 더욱 권위주의적인 구체제 국가를 구축하고자 했다. 권위주의적 국가의 건설은 보수주의자, 이탈리아 내셔널리스트, 그리고 급진주의자 모두 선호했던 것으로, 서로 다른 극단적 정치체들이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파시즘아래 모였던 것이다. 이는 무솔리니가 총리가 된 이후의 일로, 만약 파시스트당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파시즘이 흥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1차 대전의 참혹함은 이탈리아보다 독일에 더 치명적이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의 붕괴는 독일 사회의 민주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부터 많은 이들은 1920년대부터 이미 대중주의와 극단적 내셔널리즘을 옹호하고 있었다.” 감옥에 수감되었던 히틀러는 옥중에서 무솔리니의 선례를 연구하여 그의 성공 비결, 즉 선거와 협박의 결합을 간파했다.” 그와 나치는 보수정권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진정한 국민의 대변자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대중주의적 메시지는 한때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요, 더 폭넓은 대중에게 위력을 발휘하였다(히틀러가 탁월한 대중 연설가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나치가 집권하면서 그들은 독일의 모든 법치의 근간을 파괴했다. 이러면서 그들의 사상은 전체주의에 더 가까워져서 파시즘이라고 하기 힘들지만, 20년대부터 이어졌던 히틀러의 사상은 되짚어볼 만하다. 히틀러는 감옥에 갇히던 중 저술한 <나의 투쟁>에서 “‘유대-볼셰비키러시아로부터 동유럽의 생활권을 쟁취하는 것이 독일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핵심 사상은 반유대주의와 같은 인종주의는 물론, 내셔널리즘, 사회다윈주의, 제국주의 등 19세기의 사상적 지류들이 모두 발견된다. 반유대주의와 생활권 확보라는 히틀러의 망상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관철되었으며, “독일군이 괴멸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점령지 수용소에 인원을 남겨두어 학살이 중단되지 않게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부분을 자세히 다룬 책이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이다.

 

여기서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즘의 공통점을 잠깐 정리하자. 먼저 전 사회적 영역에 걸쳤던 불안을 양분 삼아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일은 경제적 불만이 매우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사상적으로 대중주의와 극단적 내셔널리즘을 옹호한 점이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 파시즘이란 대중연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셋째로 독재자의 등장이다. 이는 파시즘이 나오게 된 정치사적 맥락이 대중 정치의 제한임을 상기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이러한 파시즘의 양상을 가장 유사하게 보여주는 정치 집단이 바로 이범석과 족청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참조)

 

이렇게 전간기 파시즘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은 현대의 극우파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6재에서 되살아난 불사조?’에서 애국운동, 국민전선, 뉴라이트 등 현대의 네오-파시즘과 극우 운동을 분석한 결과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극단적 내셔널리즘과 소수 종족에 대한 차별, 반페미니즘, 반사회주의, 대중주의, 기성의 사회적정치적 엘리트 세력에 대한 반감, 반자본주의, 반의회주의등에서 현대의 극우 운동과 전간기 파시즘은 연속성을 가진다. 이러한 극우가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 원인에는 세계화와 그로 인한 남서 노동자 실업률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부유층과 전문직 여성에 대한 반감, 반이슬람주의, 자국민우선주의 등으로 나타나며, 이때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도 함께 수반된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점도 있다. 현대에는 준군사조직을 동원하여 민주주의를 전복하기보다는 민주주의에 잠재된 차별의 가능성을 활용하고자 한다.” (주류 정치의 장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점도 꼽았으나,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국민전선이 집권한 적이 있어 이는 빼겠다)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수결이나 인민주권쯤으로 좁게 정의하면, 민주주의는 배제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가들이 민주주의의 차별적 측면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바로 혐오이다. 이것이 경제적 불안과 극단적 내셔널리즘과 자국민우선주의와 결합하면 커다란 시너지를 발휘하여 그때부터는 인종주의적 배제의 정치가 시작된다. 이러한 배제의 정치가 저자가 말한 대로 과거의 파시즘보다 덜 위험한 것은 아니다.

 

여러 고민이 든다. 과연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정치를 위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정치적 주체가 혐오와 배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화의 흐름과 자국민의 이해는 상충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여기서 내 관심은 다시 외국인 노동자, 국제 이주민과 난민 문제로 이어진다. 이들이 실제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과연 이들과 자국민 사이에 조화를 이룰 부분은 없는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고병권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에서 이미 시도한 바 있다. 이 책의 한 단락을 인용해보겠다. “민주주의에서는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심지어 숫자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민주화 투쟁이란 그런 근거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폭로하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근거 없이, 자격이나 조건 없이, 우리와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그들과 공동의 삶을 위한 교섭을 벌여야만 한다.” 고대 그리스 원어로 민주주의는 근거 없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슨 근거인가? 바로 통치의 근거이다. , 민주주의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위에서 지배하고 군림할 합당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타인을 지배하거나 배제할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다스림을 정당화할 자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논의를 확장하면, 결국 국적도, 다수성도, 다른 무엇도 타자를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바로 이때 배제의 정치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세 번째 질문, '혐오와 배제의 문제''이주민 경제와 자국민우선주의 문제'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IVP), 폴 콜리어의 <엑소더스>(21세기북스)를 다시 읽으며,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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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29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유서가 시리즈 나란히 꽂힌 걸 흐뭇하게 보면서도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번역물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늘 치열하게 공부하시는 모습!!!

Redman 2021-04-30 05:16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ㅋㅋ 저도 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첫 단추 시리즈로 말고도 번역된 게 있는 것 같더군요
 


한국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민족분단과 남북대립이 형성된 시련의 시기는 1943~53년 사이였다. 한국의 현대정치는 다음 두 장에서 살펴볼 이 10년간의 사건들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두 개의 한국, 파멸적인 전쟁,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정치 재편은 여기서 생성되었다. 미국은 이런 사건들에서 주된 역할을, 여러 면에서 열강들 가운데서도 지배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나 그 시기의 많은 역사책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1950년에 일어난 전쟁 때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 P261

8월 8일에 한국에서 일본과 싸우기 시작한 소련이야말로 미국인들이 남에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했다. 미국은 1945년 9월에 한국민주당을 결성한 망명 민족주의자 집단과 국내의 일부 보수 정치인들을 정치적으로 선호했다. 1948년에 남과 북에 두 개의 공화국이 수립되기 훨씬 전에, 한국인들은 양쪽 편으로 갈렸고 워싱턴과 모스끄바가 그런 양자택일을 강화함으로써 한국은 해방 후 몇 개월만에 사실상 분단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인 정당성도 없었다. (중략) 우리가 냉전에서 연상하는 모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분단들이야말로 한국분단의 이유였다. 그런 분단들은 전지구적 냉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일찍 한국에 찾아왔으며, 다른 모든 곳에서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계속 남아있다. - P262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의 존 머클로이(John J. McCloy)는 딘 러스크와 찰즈 본스틸이라는 두 젊은 대령에게 옆방에 가서 한국을 분할할 지점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때는 이미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의 붉은 군대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으며,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전선의 전지역에 걸쳐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몰려오고 있던 8월 10일과 11일 사이의 자정 무렵이었다. 주어진 30분 안에 러스크와 본스틸은 지도를 보고 38도선을 선택했다. 그것은 38도선이 "수도를 미국의 영역 안에 둘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 P263

프랭클린 로우즈벨트 대통령은 적국 보유의 식민지 처리에 고심했으며 식민지의 독립 요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식민지로 하여금 자치와 독립을 준비토록 하는 점진적인 신탁통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한국이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이 전후 한국의 운명에 개입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다국적 통치에 참여시킴으로써 일방적인 해결책들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한국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조항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P264

이런 혼란의 많은 부분은 토지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었으니, 보수적인 지주들이 자신들의 관료제 권력을 이용해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물론 북한은 이 불만을 이용하려 했지만, 명백한 내부 증거를 보면 거의 모든 반대자들과 유격대들은 남쪽의 정책에 화가 난 남쪽 사람들이었다. - P270

1947년 말에 하지는 그 나름의 소박한 방식으로 미국이 처한 딜레마의 본질을 포착했다. 미국은 장점이라고는 반공주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토착좌익들을 반대하는, 불운한 두 극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한국 사회에 들어설 토대가 전혀 없는 자유주의적인 결과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 P272

발전하고 있는 남한체제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는 거의 전적으로 좌익의 몫이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일본의 정책들로 인해서 한국에는 중산층이 극소수였기 때문이었다. 1945~50년 사이 대규모 민중저항을 계기로 농민의 미숙한 항의는 조직된 노조활동과 마침내는 무장 유격대의 저항과 합쳐지게 되었다. - P285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Wedemeyer) 장군은 1947년 말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거의 똑같은 징후를 보고했다. 한민당은 "군정의 대다수 행정관리들의 적극적인 당원활동이나 암묵적인 협조"를 받았다고 그는 썼다. 그 당은 남서부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 중의 한 사람"인 김성수와 그의 뗄 수 없는 동료이자 한민당의 "주도적인 지식인"인 장덕수가 주도한 "지주집단"의 당이었다. (중략) 웨이드마이어는 한국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좌익으로 돌아선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일 협력자들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명한 문인인 정인보는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이북의 술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반일애국의 기억 때문에 사람들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 P287

애치슨은 국무장관 대행으로 행한 1947년 초 의회의 비밀중언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이미 분할선을 그었으며,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는 ‘트루먼 독트린’의 모델에 따라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주요한 프로그램을 위한 자금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봉쇄란 일차적으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 즉 소련의 주변에 자족적이고 생존가능한 정권을 배치하는 문제라고 이해했다. 그는 두 동강이 난 한국경제가-일본을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페르시아만의 석유와 연결하는-"거대한 초승달"의 일부로서 일본의 복구에 여전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회와 국방부는 한국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껴렸다. 그래서 애치슨과 그의 고문들은 한국을 집단안보체제를 통해 재배치하고 봉쇄하려고 그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워싱턴이 마침내 한국 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점령 정부로부터 환수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인 1947년 초였다. - P296

이런 반공체제가 형성된 이래 미국이 그것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거기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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