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여러 사람을 거쳐 전달되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서술함으로써 그의 작품 속에 심사숙고하여 삽입한 애매성은 주의 깊은 독자의 마음속에 권위의 문제를 야기한다. 텍스트의 한계를 의식하게 되어, 독자는 그 또는 그녀가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재해석하도록 초대된다. 그것이 아폴로도로스가 광적으로 사로잡혀 서술하는 내용이든, 아리스토데모스의 기억의 한계에 대한 것이든 혹은 아가톤의 향연에 참석한 다양한 연설자들 사이의 불일치, 아이러니, 유머에 대한 것이든 간에, 『향연은 플라톤의 독자들에게 텍스트를 ‘언제나 똑같은것‘을 반복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고 능동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그것과 씨름하도록 요구한다. 이런 방식으로, 플라톤은 정해진 해석의 틀을 파괴한다. 페이지 위의 글자들은 고정될 수 있지만, 그것들에 대한 독해는 그렇지 않다. 결국, 『향연』의 텍스트 자체는 다이몬적인 것, 즉 신적인 것도 인간적인 것도 아니고 이들 사이의 전달자가 된다. 디오티마의 지혜에 대한 독자의 이해는 다섯 단계의 중개 즉 디오티마, 소크라테스, 아리스토데모스, 아폴로도로스, 그리고 최종적으로플라톤의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지혜 사랑은 아름다운 말과고귀한 행위들을 산출하는 독해 작용을 위한 불굴의 노력과 인내심을키울 수 있는 사랑의 열정이다. 아마도 최종적인 해결보다는 아무리 많이 실패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계속 시도하려는 우리의 마음이 핵심적인 것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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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알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데 노력을 쏟았다. 몇 해만 더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뜻을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내 나이 오십이 되도록 주역을 공부한다면 큰 허물이 없게 될 수 있으리라." 학문, 자기완성을 향한 욕구, 그리고 지금살고 있는 이 삶이 자신의 소망을 추구할 유일한 기회라는 인식에 그의 존재의 특성이 있었음을 이 말에서 알아볼 수 있다.
비슷한 소망과 인식을 가진 사람이 그 시대에도 더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나 공자처럼 소망이 강렬한 사람도 따로 없었고, 공자처럼 굳건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전해진 역사, 시, 예법, 음악 등 모든 지식을 알뜰하게 갈고닦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본질적이고 항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이해함으로써 큰 허물 없이 살고자 애쓴 사람도 따로 없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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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고 있다. - P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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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쟁과 기억 그리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전쟁은 두번 치러진다는 발상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은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두 번째로는 기억 속에서 싸운다. - P15

모든 국가와 민족은 내가 ‘자신만을 기억하는 윤리‘라고 이름 붙인 것만 받아들인다. 이러한 윤리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베트남인들은 미국인들보다 여성과 시민을 더 많이 기억하고, 반면에 미국인들은 비교적 자발적으로 적에 대해 더 많인 기억한다. 그리고 양쪽 다 상실, 우울, 쓰라리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베트남인들을 외면하려 한다. - P21

타자를 기억하는 윤리는 더 관습적인 윤리인 자신만 기억하는 윤리가 변화해야 가능하다. 자기편에서만 생각하는 것에서 더 많은 타자를 기억하는 것으로 범위를 확장한다. 그렇게 해서 가깝고 친한 사람과 멀고 두려운 사람의 경계를 허문다. 윤리적 스펙트럼의 양쪽 끝에서 끝까지, 즉 자신만을 기억하는 윤리에서부터 타인을 기억하는 윤리에 이르기까지를 탐구하면서, 나는 기억 속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병사와 시민, 다수자와 소수자 그리고 승자와 패자, 그리고 양극단과 범주들 사이에 속하는 많은 이들을 한 줄로 늘어세워 보았다. 전쟁은 많은 것을 포괄한다. 전쟁은 한 나라 안에 있는 다양한 지역의 삶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단순히 전투라고만 생각하고 그 주체를 기본적으로 남성 병사들로만 상상하면, 전쟁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전쟁기계의 장점을 활용하기 힘들다. - P22

기억 윤리는 전쟁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2진법 부호이다. 쉽게 세상을 우리 편과 반대편 그리고 선과 악으로 나누어 동맹을 구축하고 적을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 P24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와는 다른 윤리로 타자를 기억한다. 적과 피해자들, 약자와 소외된 이들, 주변인들과 소수자들, 여성과 어린이들, 환경과 동물들, 멀리 있는 이들과 악마로 낙인찍힌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이 책에서 탐색하고 논의하는 것은 복합적인 기억 윤리이며, 자신과 타자를 둘 다 기억하고자 애쓰는 공정한 기억이다. - P25

공정한 기억은 약자와 정복당한 자, 소수자, 적 그리고 잊힌 자들을 회상하는 것으로 부정적 정체성 정치에 반대한다. 공정한 기억에서 단지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과거에 대한 성찰로 부족하다. 동시에 타자도 윤리적으로 떠올려야만 한다. 양쪽 모두에게 윤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 P31

기억과 망각의 기본적인 변증법은 우리의 인간성을 기억하고 비인간성을 잊는 것이다. 역으로 상대의 비인간성을 기억하고 인간성을 잊는 것이기도 하다. 그 대신 공정한 기억은 윤리적 기억에서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를 요구한다. 자신의 기억을 상대방의 기억으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비인간성이 어떻게 서식하는지 보고 기억하는 윤리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성을 연구하는 일은 동시에 비인간성을 연구하는 일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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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1-08-13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법 괜찮게 읽은 책입니다.

Redman 2021-08-15 21:07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이죠
 

<탈아론>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

우리 일본의 사인(士人)은 국가라는 것을 중히 여기며, 정부란 국가보다 가볍다는 대의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황실의 신성존엄에 의지하여 도쿠가와 구(舊)정부를 타도하고 신정부를 세워, 나라 안의 관민이 따로 없이 합심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취하며, 단지 일본의 구습을 벗어버릴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 가운데서도 새로이 하나의 축을 세워, 주의주장으로 정할 것은 그저 '탈아' 두 글자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에서도 동쪽에 있지만 그 국민의 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한 태도를 벗고 서양 문명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웃에 중국이란 나라와 조선이란 나라가 있다. 이 두 나라의 인민은 옛날부터 아시아적인 정교풍속에 의해 길러진 점에서는 우리 일본 국민과 다르지 않지만은, 인종적으로 달라서 그런지, 같은 정교풍속 가운데 있으면서도, 유전 및 교육 방식이 달라서 그런지, 일본 중국 한국 세 나라를 비교해보면, 닮기는 중국과 한국이 서로 닮았으되, 두 나라가 일본과 닮기는 그보다 훨씬 덜하여서, 이 두나라는 나라의 백성들이나 나라 전체로서나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르고, 사람과 사물의 교통이 편리한 세상 가운데 살면서 문명 사물을 보고 들음이 없지 않건만, 그 보고 들음으로써 마음을 움직이지를 못하고, 그저 고풍스런 구습에 연연해하는 마음은, 수천 년 전과 달라진 바없이,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세계의 활약상 앞에서도, 교육이라 하면 그저 유교와 인의예지만을 칭할 뿐, 하나에서 열까지 겉보기에 그럴 듯한 텅 빈 장식만을 둘렀을 뿐, 진리원칙의 식견이 부재한가 하면, 그들이 자랑으로 아는 도덕조차 땅에 떨어지고, 파렴치가 궁극에 달해, 그마저도 오만한 태도로서 일관하며, 자성(自省)의 염(念)이랄 것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하겠다.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 보기>, 38~39쪽


실은 19세기 전반까지 ‘아시아‘라는 말에 그와 같은 통합성을 시사하는 의미는 없었다. 유럽에서 생긴 이 말이 동아시아에 들어올 당시에는 유럽에서 바라본 동방 전역을 가리키는 잔여 개념으로 쓰였고, 한자 문화권 사람들은 그것이 공허한 개념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 P189

명말기인 1607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곤여만국전도>를 간행함으로써 중국문명권 사람들은 ‘아시아‘라고 하는 말을 접하게 되었다. 이 세계지도는 당시의 유럽인이 알고 있었던 지구지리를 유럽과 대서양이 아닌, 중국과 태평양을 중심으로 재배치하여 지명을 한자로 써넣은 것이다. - P201

‘아시아‘는 "남은 수마트라와 루손, 북은 스바르발과 북해, 동은 일본과 대명해, 서는 타나이스강/아조프해/서홍해/소서양으로 이어져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설명은 일체 없다. ‘아시아‘라는 말은, 기독교 유럽의 외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동방에 있는 광대한 지역이라는, 오히려 자연 지리적인 세계 분절로서 중국문명권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 세계지도에 있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의 사용법이다. 여기에는 후세와 같은 ‘동양‘(=orient or The East), ‘서양‘(=Occident or The West)이라는 등식은 없다. 지도를 보면, 일본의 앞 바다에 ‘소동양‘, 멕시코 앞 바다에 ‘대동양‘, 포르투갈의 앞 바다에 ‘대서양‘, 지금의 아라비아해에 ‘소서양‘이라는 문자가 기재되어 있다. 즉 리치는 중국어의 용법에 충실해 동에 있는 대양이라든가, 서에 있는 대양이라는 의미로 동양이나 서양을 쓴 것이다. - P202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에서는 ‘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서 파악하기 시작했는데, 그에 앞서 세계 인식의 틀에 큰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 각국이나 인구 집단을 명확한 기준에 따라 계층적으로 차별하여 인식하는 지적 습관이 도입된 일이다. 그중에 먼저 생긴 것은 각각의 나라가 ‘독립‘되어 있는가 아닌가라는 기준이며, 그 다음이 동시대 유럽을 기준으로 한 ‘문명‘화의 정도였다. 양자 모두 거대한 정치 환경의 변화, 즉 전자는 아편전쟁에 의한 대청의 패배, 후자는 메이지유신의 충격하에 일어난 것이었다. - P209

메이지 신정권이 도쿠가와 막부의 ‘개국‘정책을 계승했을 때, 당초의 관심은 오로지 서양 각국과의 관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 대청이란 주변 각국과 관계가 생겨났다. 우선 조선과의 사이에서 국내 개혁의 수단으로서 정한론이 일어났고, 국교 갱신의 실패를 계기로 그것은 외교정책상에서도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됐다. 그와 더불어 한편에서는, 이 분쟁의 해결을 위해 조선의 종주국인 대청과의 국교수립이 시도됐다. 메이지 정권은 서양에 이어, 처음으로 근린과의 외교관계를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적인 질서를 상정한 것이 아니었다. - P214

일본인이 얼마나 서양의 눈을 의식하며, 좋은 평판을 받기에 급급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때 그들은 서양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스스로를 높이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다른 ‘아시아‘ 각국과의 차이를 이야기한 것이다. - P216

일본인은 세계 정치와 아시아 전역의 여러 나라 지역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갖기 시작했지만, 메이지 10년쯤이 되면, 아시아 내부의 상호연관에 대한 인식에 부가하여, 서양의 지배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제휴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 P221

일본 내부에서 생긴 ‘아시아‘의 정치적 상호의존성이란 인식은, 류큐 처분을 둘러싼 청일 충돌 위기를 계기로 중일관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진흥이란 주장으로 고양됐고, 1880년에는 흥아회라는 운동단체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는 정부와 저널리즘이라는 두 차원에서 중일 간에 강한 상호작용이 생겼고, 1880년대 초기에는 러시아를 공통의 가상적으로 하여, 조선의 개혁을 대청이 지도한다고 하는 정책이 한중일 삼국간에 공유되었다. 이데올로기 차원과 외교정책의 두 차원에서 동아시아에 최초로 정합적인 지역적 틀이 설정된 것이다. - P237

여론의 다수 의견은 연합하여 구미와 겨루기 위해서는 중국과 조선도 일본처럼 ‘개화‘하지 않으면 유효치 않다 하여, ‘아시아‘를 ‘개화‘로 유도하는 것이 일본의 사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개화‘의 가망성이 있다면 아시아 연대는 가치가 있으니, 현지의 지식인들을 적극 원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람에 따라서는 혹은 현지에 깊이 관여한 경우에는 현지인에 의한 개혁의 장래성이 희박해 보이면, 일본인이 현지인을 대신하여 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개입하기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거꾸로 현지의 개혁이 절망적이면, ‘아시아‘라는 지역적인 틀을 버리고, 메이지 초기와 같이 일본 단독으로 개화의 길을 돌진해 나아가면 된다고 하는 논리도 세워진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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