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한 작품의 번역본을 여러 종 구매한다. 여러 번역본을 구매하는 이유는 다른 역자의 번역이 궁금하다기보다는(그것도 없지는 않지만), 평균 20쪽가량의 역자 해설이 궁금해서이다.

 

역자는 자신이 옮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으로 규정하며, 이 작품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고려사항으로 무엇을 꼽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현대에 어떠한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는지. 그래서 이를 통해서 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시야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새로운 번역본을 산다.

 

이렇게 보면, 역자의 해설에는 대략 다음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작품에 대한 일반적 의미 규정, 작품의 구조와 형식, 시대적 정황, 현대적 의의 등이 그것이다. 대다수의 고전 번역은 시대적 배경이나 저자의 생애를 길게 서술하는데, 정작 나는 저자 생애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시대적 배경도 최소한의 수준만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3개월 전에 민음사에서 출간한 <오만과 편견>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이번에 조선정이 번역한 을유문화사 <오만과 편견>을 구매했다. 역자 조선정은 영국소설과 여성 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로, 민음사 서울대 인문 강의시리즈로 <제인 오스틴의 여성적 글쓰기: <오만과 편견> 새롭게 읽기>라는 고전 해설서이자 교양서적을 낸 적이 있는 인물이다. 제인 오스틴 역자로서는 매우 안성맞춤이고, 다른 번역자들이 놓쳤을 중요한 발견이나 사실이 있지 않을까 하여 조선정 역을 구매했다. 여기서는 역자의 해설만을 요약 정리하겠다.

 

역자 해설의 제목은 일상의 발견, 그 미학과 윤리이다. 여기에는 역자가 생각하는 제인 오스틴의 문학적 성취와 역자가 내리는 <오만과 편견>에 대한 의미 규정이 들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일상의 발견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에도 나름의 치열한 생존 투쟁이 있고 그에 따른 희로애락의 진실이 녹아 있음을 빼어난 소설 언어로 보여준다는 데에 오스틴의 성취가 있다. 그것을 일상의 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392p)

 

(참고로 민음사판 윤지관/전승희 역 <오만과 편견> 해설의 제목은 제인 오스틴의 삶과 문학, 그리고 <오만과 편견>”이다. 해설의 상당 부분은 제인 오스틴의 삶을 설명했다. 제목만 봐도 차이점이 느껴진다)

 

일상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는 풍속 소설의 본령이라고 재규정한다. ‘풍속이란 영어 단어로는 매너(mannars)’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지켜야 하는 적절한 예법과 규범의 체계를 의미한다.”(393p) 매너에는 식사 예법 등의 예절도 포함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태도, 그리고 그 태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까지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매너가 좋다라고 할 때는, 예의범절은 물론이며 사람의 품성, 그가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력까지 끼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매너가 적절하다라고도 표현하는데, 제인 오스틴은 바로 적절한 매너에 대해 묻는 작품이며, 그런 의미에서 풍속 소설의 본령이라는 것이다.

 

오스틴이 그린 풍속 세계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오늘날 중산층과 의미가 어느 정도 통하는 중상류 신사 계층인 젠트리(gentry)이다.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다아시, 빙리, 베넷 가, 위컴 등은 사회적 지위나 재산, 교양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젠트리 계층에 속한다. 오스틴은 같은 젠트리 계층이지만 매우 상이한 배경을 가진 남녀를 내세워, 이들이 어떻게 적절하게어울리며, 그것이 적절한지는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요 개념이 제목에 쓰인 오만’(pride)편견’(prejudice)이다. “제목에 쓰인 오만편견이라는 두 단어는 젠트리의 정체성에 직결된 개념이자 좋은 매너의 핵심적인 기준이다.” (398p)

 

오만은 지위나 재산, 교양에서 깨나 가진 사람이라야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오만을 상징하는 인물인 다아시 씨가 바로 오만함의 자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여기서 오만은 정확히 말해 자존심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수월하겠다. 그는 작위는 없지만 부유한 가문의 상속자로 연 수입 1만 파운드에 귀족적 지위를 누리는 독신 남성이다. 그는 젠트리 계층에서도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오만하게 구는 것은 젠트리 계층의 일반적 매너 기준에서 봤을 때는 당연한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이 다아시 정도의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그의 오만을 수긍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편견확고한 자기 믿음을 의미한다. 작중 유일하게 다아시를 거리낌 없이 대하거나, 캐서린 드 버그 여사와 기 싸움을 벌이는 등 엘리자베스가 유쾌한 장난기를 보여주는 것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장난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재기를 과시하려는 욕망에 크게 빚지고 있다.”(401p)

 

제인 오스틴은 두 개념에 모두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 오만에 대한 비판은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한 부분을 비롯하여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오만이 신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다아시가 충격을 받았을 부분은, 젠트리로서 한 번도 의심한 적도, 의심받은 적도 없는 오만이라는 정체성이 젠트리로서의 신사다움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엘리자베스의 편견은 극단적인 경우 젠트리 계층 전체와 자신의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리디아의 갑작스러운 사랑의 도피는 확고한 자기 믿음이 지나치게 발현되어 건방지고 경솔하고 까부는 태도”(401p)가 되어버린 사례이다. 이것 역시 적절한 매너는 아니다.

 

제인 오스틴은 이런 식으로 기존의 오만과 편견을 비판하는 동시에 재정의함으로써 그때까지의 적절한 매너의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의 가능성을 연다. 다아시는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편견을 반성한다. “오만할 만한 다아시는 자신의 풍부한 자원을 적극 활용하고 베푸는 방식으로 오만을 극복한다. 오만은 악덕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비로운 권력으로 환원된다.”(403p)

 

제인 오스틴이 탁월한 부분은 이런 주제를 전개하는 데 있어 시종일관 일상의 맥락을 놓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19세기 영국 시골의 풍속, 젠트리 남성들의 경제적 상황이나 가부장적 의식, 그 속에서 젠트리 여성의 열악하고 위태로운 지위 등이 오스틴은 소설에서 묘사한다. 이러한 일상성은 오스틴 소설의 큰 특징인 결혼 플롯과도 연결된다. “<오만과 편견>이 이전의 결혼 플롯 소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결혼과 일상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결혼이 보상이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일상과 밀착되어 그려진다.”(394p) 샬럿, 리디아, 제인, 엘리자베스 등의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는 로맨스와 결혼의 과정은 로맨틱하기보다는 현실적이며 치열하다. 이렇게 볼 때, ‘일상의 발견이라는 역자의 규정은 적절하다.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제인 오스틴을 혹은 소설로 오스틴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을 뽑았다는 소식을 가끔 듣는다.”(389p) 같은 굳이 쓰지 않아도 되었을 문장이 첫 문장으로 들어간 것 정도를 빼면, 좋은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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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특히 고전 번역에서 번역가가 우선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정확성? 혹은 가독성? 물론 원문의 뉘앙스와 의미를 그대로 살리면서 읽기도 어렵지 않은 문장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번역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양자택일을 하게 되는데, 정확성과 가독성 중에서 전자를 당연히 더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의미 전달부터 제대로 이루어질 때 읽기 좋게 다듬어진 문장들도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 번역서를 고를 때 문장이 '너무' 깔끔한 번역은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읽기 편하다는 것인데, 그말인즉슨 원전의 고유성이 훼손되고 지나치게 한국 독자 친화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고전이란 낯설고 불편한 책이다. 고전의 어휘, 문체, 책의 구조, 그리고 고전에 전제된 당시의 가치관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다. 고전을 쓴 저자는 우리와 역사적 맥락이 상이한 시공간에서 산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당연하고 보통의 것이 우리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음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을 때 어떤 식으로든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요소이며, 그 또한 고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다는 느낌이 들 때 위화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고전을 번역할 때는 그 낯설음과 불편한 느낌까지 살려야 고전을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고전 번역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 생각할 때, 하비 맨스필드가 번역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 University of Chicago Press)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하비 맨스필드는 고급 영어 문장을 구사하는 학자이고, 학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삼는 인물의 글쓰기는 어떠한지 알 수 있는 글을 쓰기에, 그가 쓴 <군주론> 서문(Introduction)과 번역에 관한 주석(A Note on the Translation)을 반복해서 읽어볼 만하다.


특히, 3 페이지 가량의 번역에 관한 주석을 통해 우리는 번역에 관한 하비 맨스필드의 견해를 알 수 있다. 그는 여타의 <군주론> 번역과는 차이가 나는 자신의 번역론의 우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Since I am convinced that Machiavelli was one of the greatest and sublest minds to whom we have access, I take very seriously the translator's obligation to present a writer's thought in his own words, insofar as possible. It did not seem to me my duty, therefore, to find a rough equivalent to Machiavelli's words in up-to-date, colloquial prose, and to avoid cognates at all costs.

<The Prince>, A Note on the Translation, xxv.


"해석: 마키아벨리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지성들 중 가장 위대하고 또 가장 미묘한 사상가이므로, 나는 저자의 사상을 그 저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다는 번역가로서의 의무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쓴 용어와 의미가 얼추 맞는 요즘 단어나 구어체를 쓴다거나, 어원이 같은 단어를 어떻게든 피하는 것은 나의 의무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길지 않지만 읽기 까다로운 작품이다. 비단 마키아벨리뿐 아니라 고전에 속하는 다른 작품들(성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플라톤의 대화편, 그리스 비극 등)도 현대 독자에게는 넘기 힘든 벽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 원인은 고전이 쓰인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의 간격이 크다. 이때 번역자는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정결하게 다듬거나 독자에게 친숙한 용어를 쓸 수 있다. 그러나 하비 맨스필드는 그러한 노력은 번역가의 의무가 아니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저자의 사상을 저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이 번여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에 따르면, 원문의 문장이 복잡하게 되어 있으면, 쉬운 문장으로 고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옮겨야 한다. 설령 현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원전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 단어를 써야 한다. 그는 이 원칙이야말로 원전의 의미를 가장 충실하면서 역자의 해석이 개입되지 않는 고전 번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번역과 달리 자신의 번역은 이 원칙을 지켰으므로, 결국 자신의 번역이 가장 우월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하비 맨스필드가 말하는 번역 원칙은 비단 단어와 문장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 읽은 한 기사(하단 링크 참조)에 따르면, 최근 출판계 동향 중에는 '젠더 개정'과 '성인지 감수성의 향상'이 있다고 한다. 과거 출간된 문학 작품 중에서 성차별적, 여성비하적, 가부장적 표현과 문장들을 대폭 개정하여 책을 다시 내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 등을 저술한 이금이가 이 기사에서 소개된 사례이다. 가령 이금이는 "소라는 세번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너무 쉬운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나."라는 <유진과 유진>의 한 구절을 "소라는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린 거라고 했다. 내가 잡고 싶으면 잡고 싫으면 말고."로 문장을 수정하였다.


이러한 젠더 개정의 흐름은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문학전집'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유명한 열린책들이 이 흐름을 주도하는 출판사이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비칭을 수정하는 한편, 남자는 반말을 쓰고 여자는 경어를 쓰는 가부장적 번역 등 성인지 감수성에 맞지 않는 번역을 수정하여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내고 있다. '열린책들'의 이사 김영준은 "책의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필요하다"고 '젠더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얼마 전 개정판이 나온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유)도 젠더 개정이 시도된 다른 사례이다. 역자 이정순은 보부아르의 유명한 경구 ""에서 '만들어지다'는 "여성의 수동성이 부각된 표현"이라며 "여성에게 자율성이 없으면 여성 해방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표현을 '되는 것이다'로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이금이처럼 저자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개정하는 것은 일개 독자로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번역의 경우는 다르다. 앞에서 언급한 열린책들이나 이정순의 경우, 번역의 기준은 사용된 번역어나 표현이 얼마나 가까운지가 아니라 성인지 감수성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이다. 특히나 <제2의 성>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헌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역자 이정순은 그리 신중치 못한 듯하다.


젠더 개정 같은 현재주의적 번역은 몇 가지 문제점이 곧바로 드러난다. 우선 젠더 개정은 성인지 감수성 같은 주먹구구식 개념을 기준으로 원전을 인위적으로 재단함으로써 원문의 의미를 제한시키고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고전을 좋아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이런 번역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앞에서 말했듯 고전 독서에서는 불편함까지 독서의 한 과정이 된다. 이 불편함에는 익숙치 않은 단어나 문체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현대와 다른 가치 체계에서 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과거 텍스트에서 현대적 페미니즘이나 성인지 감수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성차별적 단어이든 "유교 패치"이든,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원전의 의미와 뉘앙스를 살려 온전히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단어를 써야 한다(이 말을 내가 성차별에 찬성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구태여 다른 단어나 표현을 찾을 필요가 없다. 번역가는 고전 속 불편함도 전달할 의무가 있다. 다른 것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독자로서도 이 불편함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넘느냐가 고전을 읽을 때의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자의적 번역의 행태가 낣은 인식을 버리고 책을 새롭게 하여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명분에 의해 합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치관에 맞게 새롭게 번역을 한다는 것은, 고전의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전 텍스트를 우리 시대 속에서만 살게 하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김영준은 젠더 번역이 책을 현재의 가치와 부합하여 책의 생명을 늘리고 독자가 느낄 위화감을 줄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려는 번역 시도는 실제로는 원문의 풍부함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위화감이 적은 번역이 좋은 번역일까? 과연 젠더 감수성이라는 한 가지 기준에 맞춰 현대적으로 재단된 텍스트가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을까? 김영준의 천박한 발언은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출판사의 이사나 되는 인물이 할 말로는 적절치 않은 것이다. 반대로 출판사의 신뢰성까지 떨어트린다.


김영준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정으로 책의 생명력을 연장하여 영구적으로 남는 번역물을 만들고 싶다면, 하비 맨스필드의 다음 말을 가슴에 새기라고.


"마키아벨리의 글은 우리의 도움 없이도 살 것이다. 우리가 오직 우리 시대의 말 속에서만 살도록 만드는 호의로 그의 텍스트를 질식시킬 때, 그의 글은 죽을 것이다."

(Machiavelli's text will live without our help, and it will die if we suffocate it with the sort of hospitality that allows it to live with us only on our terms.) <The Prince>, 같은 곳


마키아벨리를 현대 친화적으로 만들 경우, 마키아벨리의 글은 생명력을 상실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책의 생명을 늘리는 방법이 과연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것일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인지 감수성이 향상된 번역이 아니라 원전의 불편함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번역이다.




기사 링크: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6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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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24 0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 개정판에서의 ‘되다‘ 보다는 ‘만들어지다‘ 가 보부아르 <제2의 성>의 맥락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에 좀 유감이거든요. 그런데 원문인 프랑스어에서도 그리고 영어 번역본에서도 ‘되다‘란 뜻의 동사(become)가 쓰였다고 친구가 알려주더라고요. 흠.

그레이스 2021-09-24 0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전은 시대를 반영하는 글인데...
비판적 독서를 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번역, 반대합니다.
젠더개정, 왜 이런 발상이?

하비 맨스필드의 번역에 대한 글! 완전 찬성입니다.

추풍오장원 2021-09-24 0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

미미 2021-09-24 10: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민우님 덕분에 또 배우고 갑니다.👍

초란공 2021-09-24 1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진 못했는데 생각거리를 던져주셨네요~ 서양 문학 번역에 우리 속담이나 ‘곤룡포‘ 같은 용어가 나오면 불편하고 생경한 느낌이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대로 번역하고 문화적인 특징이나 차이를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기억이 있네요. 정답은 정해져있진 않겠지만 특히 일반 독자로서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네요... 어쩌면 독자를 위한 과한 ‘우대‘가 게으른 독자를 낳고 있는 것일까요... 독자로서도 반성이 됩니다~^^;;

mini74 2021-09-24 16: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전의 불편함까지 받아들이는 것 가치관의 변화에 맞추는 것. ㅠㅠ 고전번역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글. 고맙습니다. ~ 저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
 
줄리어스 씨저 나남 셰익스피어 선집 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성일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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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씨저>라는 텍스트는 정치의 정당성과 조건에 관해 묻고 따지는 작품이다. 줄리어스 씨저의 살해 동기와 브루터스의 몰락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치는 늘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정당한 근거 위에서만 정치는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다. 줄리어스 씨저는 왜 죽었는가? 그가 너무 오만했기 때문이다. 브루터스에게 씨저의 오만함은 로마공화정의 전통적 덕, 다른 말로 로마의 정신을 형성하였던 요소에 대한 부정으로 비춰졌고, 로마의 통치자로서 씨저가 가진 정치적 권한의 정당성을 넘어선 일이었다. 캐씨어스는 씨저가 신처럼 되려고 한다면 못마땅해한다.

 

나 자신 하나만 놓고 본다면,

나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자를 두려워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일세.

나 씨저 못잖은 자유인으로 태어났고, 자네도 그래.” (1293~96)

 

이 부분은 씨저의 오만에 대한 캐씨어스의 개인적 원한 감정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보다 넓게는 정치적으로 씨저의 비극을 만든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씨저의 오만함에 근저에는 그의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 씨저는 어느 순간 신과 같은 절대권력을 누리게 되었고, 아직 압제자로서의 횡포를 보인 적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2110~34행 참조). 이런 정치 형태는 전통적 공화정의 정신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도자로서 씨저가 킹십(kingship)을 상실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캐씨어스는 바로 이 점에 입각하여 브루터스가 암살 모의에 참여하도록 설득한다. 캐씨어스는 로마의 기백’, 즉 로마의 전통을 거론한다. 씨저로부터 로마의 공화정적 전통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이들의 대의명분이다.

 

암살의 동기가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이든(캐씨어스), 공공의 대의이든(브루터스)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씨저의 전제적 정치를 비판하며 그를 살해했고, 따라서 씨저 암살자들은 로마공화정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으로써 씨저 암살을 정당화해야 했다. 그리고 정당성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브루터스라는 도덕적 우월성과 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의 존재는 매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 텍스트는 초반에 정당한 정치에 대해서 물으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반()씨저 동맹이 기여한 부분은 딱 거기까지이다. 씨저를 죽인 다음, 그들은 분열하며 옥테이비어스와 안토니에게 패배하고 브루터스와 캐씨어스는 자결한다. 왜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여 자신들의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던 것일까?

 

씨저에 대한 적대감을 제외하면 반()씨저 동맹을 묶어주는 어떠한 이념적 지향이나 정치적 실천 프로그램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캐씨어스가 씨저 암살을 계획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신과 같은 인간이면서 꼭 신처럼 행세하는 씨저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공공의 대의를 위해 나선 브루터스와는 애초에 동기가 달랐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씨저 사후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43장에서의 브루터스와 캐씨어스의 논쟁은 단순히 속물적인캐씨어스와 영웅적 덕성의 브루터스 사이의 갈등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씨저의 질서를 대신할 통치 질서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해 생긴 혼란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너무 조급했다. 씨저라는 권력자를 죽인 뒤 필연적으로 생길 정치적 공백을 어떻게 해결할지, 씨저 사후 로마를 어떻게 이끌지에 대한 어떠한 고민이나 합의도 없이 그들은 그저 씨저를 죽이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불확실한 예언의 날짜에 맞추어 그를 암살했다. 사실 이 지점에서 그들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브루터스는? 브루터스는 로마공화정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 이미 작품 곳곳에서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브루터스의 이러한 의도는 외적으로도 공인받은 것이다.

 

브루터스는 등장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다. 역자 이성일이 말하는 대로 브루터스는 이상주의자였다. 브루터스의 덕성에 대해서는 그의 정적인 안토니의 대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이분은 저들 중에서 가장 고매한 로마인이었소. 사해 모의자들 모두가 이분만을 제외하고- 위대한 씨저를 시기하였기에 그 짓을 하였소. 오직 이분만은, 사심 없는 명예로운 명분과 모두를 위한 공공의 선 때문에, 저들의 일원이 된 거요. 이분의 생애는 고결한 것이었고, 인성의 기질들이 이분 안에 조화를 이루었기에, 대자연마저도 일어서서, 온 세상을 향해 말하리오: ‘이 사람 사나이였다!’라고.” (5568~75)

 

브루터스는 로마의 전통적 공화주의 덕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로마의 공화정을 신앙처럼 여긴다. 그가 씨저 암살 모의에 참여한 것도 씨저를 죽이고 로마공화정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의 의도나 순수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브루터스 자신도 자신의 올바름에 대한 자각을 확신한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로마 인민의 지지도 확보하지 못했다. 연설에서 왜 씨저를 죽였는지 설명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그를 새로운 씨저로 받들자는 것뿐이었다. 반면에 안토니는 탁월한 정치적 혜안과 수완으로 로마인의 지지를 받는다. 브루터스는 이상만 앞섰지,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이상의 실현을 위해 절대 권력자를 살해했지만, 그것이 가져올 파장과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로마인의 지지 확보 실패이다. 공화정의 회복이라는 브루터스의 대의명분은 현실에서 실효적 힘을 가지지 못했다. 다른 하나가 씨저에게 충성을 보였던 안토니를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씨저 암살은 결과적으로 브루터스의 정적 안토니와 옥테이비어스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할 뿐이었다.

 

정치 정당화에 대해, 플라톤처럼 초월적 근거를 통해서 정치 정당화 근거를 마련할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실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를 찾으라는 마키아벨리도 있다. 또 막스 베버처럼 정치 권력을 소명(beruf)으로 여기고 그 소명에 합리적인 정당화 근거를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할 수도 있다. 정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다른 말로 덕스러운 목적과 이기적인 목적 사이에서 작동한다. 한쪽의 독트린만을 교조적으로 따를 경우 정치 사회는 치명적 결과를 맞는다.

 

이 작품을 다시 정의하자면, 정치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조급한 이상주의자의 파멸로 끝맺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터스가 보여주는 것은, 이상주의적이기만 한 정치가 가져올 파멸적 결과이다.

 

 

여담으로, 개인적으로 느꼈던 감상은 <줄리어스 씨저><맥베스> 사이에 유사성이 꽤 많은 것 같다는 것이다. 줄리어스 씨저를 <맥베스>의 덩컨 왕에, 브루터스를 맥베스에 대입해보자. 그러면 우선 부하가 왕(씨저는 왕이 아니긴 하지만)을 죽인다는 플롯이 유사하며, 그 이후 맥베스의 파멸도 브루터스의 몰락과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씨저> 21장에서 브루터스가 씨저에 대한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와 공공의 대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부분은, 맥베스가 덩컨 왕을 살해할지 말지 망설인 부분과 겹친다. <씨저>의 예언자와 <맥베스>의 마녀 등 <맥베스>가 연상되는 부분은 이 외에도 많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로는,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씨저>의 플롯과 주제 의식을 한층 더 농축하여 발전시킨 작품이 <맥베스>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정치와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 <맥베스>를 다시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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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0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우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주말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ㅅ^

Redman 2021-10-08 20:5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scott님도 이번달 당선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1-10-08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잘 읽고있습니다 축하드려요 *^^*

Redman 2021-10-08 20:5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mini74님도 이달의 리뷰 축하드려요~~

그레이스 2021-10-08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꼼꼼히 읽게 되는 페이퍼!
축하드려요 ~^^

Redman 2021-10-08 20:57   좋아요 2 | URL
매번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ㅎㅎ 늘 나츠메 소세키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서니데이 2021-10-08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Redman 2021-10-08 20:5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1-10-19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1860년대 뉴욕시 최하층민이 거주하는 파이브 포인츠를 배경으로 '토착파'(Natives) 갱단의 알력 싸움, 미국 최하층의 삶, 그리고 암스테르담 발론(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복수극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토착파와 아일랜드 이주민 계열의 '데드래빗'(Dead Rabbits)파의 패권 싸움으로 시작한다.

토착파는 개신교 계열에 (지들도 이주민의 후손이면서) 자신들이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에 젖어 산다. 아일랜드계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데드래빗파는 이들의 텃세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 잔인하게 죽고 죽이는 가운데 데드래빗파의 수장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은 토착파의 두목 윌리엄 커팅(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죽으면서 전투는 끝난다.

프리스트 발론의 아들인 암스테르담 발론은 도망치고 16년이 지나 성년이 되었다. 다시 파이브 포인츠로 되돌아온 그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커팅의 밑에서 생활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커팅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발론은 수적으로 더 압도적인 아일랜드계를 규합하여 데드래빗파를 재건하고 토착파에 대항할 방법을 찾는다. 우선은, 자신들을 위한 정치인을 세우겠다는 작전을 짠다. 약간은(?) 지저분한 선거였지만, 선거 결과 과거 프리스트 발론의 동료기도 했던 월터 맥긴을 당선시킨다. 하지만 아일랜드계 후보가 승리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커팅이 대낮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맥긴을 살해한다. "친구들, 이걸 소수표라고 하지"라는 말과 함께.

발론은 맥긴의 장례식에서 커팅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이 말은 영화 첫 장면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쪽이 끝장날 때까지 싸우자는 의미이다. 그 다음날 데드래빗파와 토착파는 16년 전 그때처럼 다시 피터지는 전투를 앞두고 마주서게 된다.

한편, 이 시기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 충원을 위해 징병법을 제정하여 징병대상자를 발표했는데,이것이 뉴욕 빈민층, 특히 아일랜드계 빈민층을 자극하였다. 불공평한 징병대상자 선정 때문이었다. 징집을 피하고 싶으면 300달러를 내야했는데, 문제는 가난한 이주민들에게 300달러는 너무 큰 액수였다는 것이다. 부자들만 따로 병역을 피해갈 여지를 준 이 법에 하층민을 불만이 높았고 이 불만이 터져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경찰 인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병력을 출동시켰고, 군대의 압도적 화력 앞에서 폭동은 진압되었다.

그런데 데드래빗파와 토착파의 결투날이 바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한 날과 겹쳤다. 싸움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이들 앞에 갑자기 대형 함포가 떨어져 결투 장소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전투다운 전투는 시작도 못해본 것이다. 포탄 세례와 흙먼지 속에서 발론은 커팅을 죽이고 승리하지만 이 전투는 이미 미국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순간이었다.

16년 전만 하더라도 국가 권력이 아니라 지역 내 갱단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전통적인 방식의 폭력적 수단은 국가의 힘 앞에 가로막히게 된 것이다. 갱단의 폭력적 질서는 국가라는 더 상위의 조직의 폭력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통치는 갱이 아니라 국가가 하며, 폭력적 수단도 국가가 독점한다. 이제 아일랜드계, 토착파 할 것 없이 어느 갱 소속이기 이전에 미국의 국민이며, 갱단 보스의 명령과 규율이 아니라 국가의 법과 질서하에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야흐로 갱단의 질서는 갔고 국가의 질서가 사회 구석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의 강력한 질서 속에서 과거의 역사는 잊혀진다. 결말에서 영화는 커팅과 프리스트 발론의 묘비를 원거리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묘비의 뒤에는 뉴욕시의 전경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뉴욕은 번창하여 고층빌딩이 늘어선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만, 전통적 미국을 상징하는 발론과 커팅의 묘비는 흔적도 사라진다.

여기까지가 대략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무엇이 있는지보다 무엇이 없는지를 더 주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토착파 미국인과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이의 갈등을 그리며, 양자는 서로의 이권을 위해서 싸운다. 우습게도 토착파는 지들이 진정한 미국인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그들의 인식 속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아일랜드계도 아메리칸 원주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다. 실상 권리 투쟁의 자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목소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은, 제니 에버딘이 발론에게 샌프란시스코로 도망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커팅에게 발론의 정체가 탄로나자 뉴욕에서 기회의 땅인 샌프란시스코로 가자고 한다. 제니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으며, 사람들은 강가에서 황금을 건진다고 얘기한다. 당시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발 골드 러쉬로 촉발된 서부 개척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사금이 발견되자 너나 할 것 없이 금을 캐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동했으며, 이를 계기로 샌프란시스코는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서부 개척이니, 기회의 땅이니 하는 것은 미국인의 입장일 뿐 원래 이 지역에서 살던 원주민에게 이들은 자신들의 땅을 멋대로 하페치고 유린하는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착취당했고 자신이 살던 땅에서 쫓아났다. 그들에게 서부 개척은 기회가 아니라 재앙 그 자체였다. (이런 역사를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를 참조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로 자신과 같이 떠나자는 제니 에버딘의 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인식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그곳이 그저 과거를 잊고 발론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재는 다분히 감독의 의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일부러 대상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대상을 드러낸 것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이라는 땅의 동쪽 끝에서는 자칭 토착파가 이주민들을 차별하고 지역질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진정한 토착 원주민이 이주민 백인 세력들에 의해 삶의 터전을 위협받고 있었다. 토착파를 이끄는 윌리엄 커팅은 열렬한 애국주의자였다. 그는 "진정한 미국인"으로 죽을 수 있음에 안도한다. 하지만 그의 애국과 그의 조국에 토착 원주민은 없었다. 감독은 한쪽만 보여주어 무엇이 없는지를 은연중에 드러내어 토착파와 데드래빗의 이권쟁투를 비판한다.

궁극적으로 감독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현대 미국인이다. 위에서 얘기한 결말 장면에 더해 엔딩 크레딧도 현대인을 간접적으로 지목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동안에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이 걷는 등 일상적인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마치 그때까지 있었던 격동의 사건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일상을 살아간다. 감독은 결말과 엔딩 크레딧을 통해 지적하고 싶었던 것도 현대 미국인이 무엇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였을 것이다.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어떤 낭만화나 미화도 없이 건조하게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이 건조함이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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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 (1disc) - 할인행사
데이비드 핀처 감독,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는 1969년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었다.

'조디악'이라는 연쇄 살인마의 정체를 밝히고 붙잡기 위한 경찰과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기가 주된 내용이다.

이 영화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끈질김'이다.

우선 영화는 갈피도 안 잡히는 조디악의 정체를 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알아내려는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건 담당 형사 데이브 토스키(마크 러팔로우),

신문사 삽화가이지만 누구보다 조디악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는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

이 둘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이들은 작은 단서 하나 놓치지 않고, 관련 기사나 자료를 끊임없이 되짚어가며 조디악을 추적한다.

무려 20년이 넘도록.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에 나온 조디악 피해자가 데이브와 로버트가 특정한 조디악 유력 용의자의 얼굴을 지목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자막으로 후일담이 나오는데, 다소 충격적인(?) 수사 결과와 함께

여전히 조디악 사건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범인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가 개봉된 것이 2007년이니, 조디악 사건이 발생하고 거의 40년이 지난 뒤이다.

범인을 잡기 위한 이들의 끈질긴 노력을 담고 있는 영화에게는 가장 알맞은 결말이다.

2시간 30여분 정도되는 러닝 타임에서 극적인 갈등이나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는 거의 없다.

흥미로운 플롯이나 구조도 발견하기 어렵다.

감독은 그저 다큐멘터리처럼 범인을 찾기 위한 과정만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정말 끈질긴 인물들과 끈질긴 영화이다.

그런 장면이 계속 이어지니 피로감이 쌓이고 지루할 법도 한데,

배우들(마크 러팔로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제이크 질렌할)의 열연과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하는 감독의 연출이 이 끈질긴 영화를 계속 보게 한다.

오히려 불필요한 내용들이 거의 없어

긴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매우 깔끔한 뒷맛을 느낄 수 있다.

미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살인의 추억>과는 또 색다른 느낌의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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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9-17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오늘부터 추석연휴 시작입니다.
즐거운 명절과 좋은 주말 보내세요.^^

Redman 2021-09-17 21:1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연휴되시길 바랍니다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