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유가 윤리 중심의 정치사상

제4절 맹자의 인정 사상

제5절 순자의 예치사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사상가들은 고유의 인성론을 전개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로부터 그에 맞는 정치체제를 구상하고 정책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경우, 정치사상은 인성론 - 정치체제론 - 정책론으로 나뉘는데, 이들을 다시 범주화하면 형이상학적 인성론과 실천학(정체, 정책)이 될 것이다. 인성론은 정치체제의 형이상학적 근거이다.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루소, 마르크스 등이 그러하다. 플라톤의 <정체>politeia는 좋은 정치체제를 논하기 위해 좋은 정치 지도자란 누구이며 좋은 시민은 무엇인지를 논한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자연적 인간의 타락을 논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체제 구상을 담은 책이 <사회계약론>이고, 그 사회에서의 인간의 교육방법을 논한 책이 <에밀>이다. 루소 역시 인성론 - 정치체제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간주하며 공동체 속에서의 조화를 붕괴시키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체제를 비판하며 다시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구상했다.






중국 정치사상사에서 인성론을 논한 유명한 논자들은 바로 맹자, 고자, 순자이다. 맹자의 사상은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로 알려져 있으며 고자는 인간의 품성은 후천적으로 형성되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현대에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론은 아마 고자일 것이다. 하지만 고자의 사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고 이 책에서도 거의 논하지 않는다. 그래서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정치 실천을 류쩌화의 논의를 따라 집중적으로 보고자 한다. 맹자에서 순자 순으로 정리하겠다. (원전 번역은 모두 류쩌화의 책에서 인용)


맹자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선한 마음을 타고난다고 말한다. "사람의 본성이 선함은 물이 낮은 데로 임하는 것과 같다." 그는 사람이라면 "차마 참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갖고 있다며, 이 마음을 다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사심'으로 개괄한다. 맹자는 공자의 인의예지 관념을 돌출시켜 4대 윤리의 범주가 이 사심이라고 주장한다.(사단) 이는 맹자의 중요한 공헌인데, "인륜관계가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맹자의 이 한 가지 주장은 유가 윤리 관념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윤리의 위반을 하늘의 뜻이 아니라] 맹자는 인성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맹자는 성선으로부터 인간동류설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인에서 민에 이르기까지 성선이라는 공통점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같은 부류이다. 인간동류설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첫째, 인간은 자연세계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사람을 내재적으로 통일시켜주는 요소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요임금의 옷을 입고, 요임금의 말을 읊조리며 요임금의 행동을 하면 요일 따름이니" "사람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 수양을 통해 선한 본성을 지키는 사람이 군자요, 선한 본성을 잃은 사람이 '소인'이다. 맹자에게 있어 성인의 기준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아니라 인의의 준수이다.

맹자는 정치적으로 인정설을 주장했다. 이것은 그의 성선론을 정치현실과 결합해서 발전시킨 이론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차마 참지 못하는 정치'가 있다. 이 마음이 정치로 발현되면, '차마 참지 못하는 정치'가 이루어진다. 인정仁政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능히 생활하도록 하고, 능히 삶을 충분히 누리고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위로 족히 부모를 섬길 수 있어야 하고, 아래로 족히 처자를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한다'."(양혜왕 상)는 것이다. 이 같은 목표는 춥고 굶주리고 삶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며 효를 행하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의 암담한 현실에서 나온 것이리라.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참지 못하고 인정을 펼치려면, 다음과 같은 구체적 정책들을 시행해야 한다고 맹자는 주장했다. 1) 백성의 항산 보장, 2) 정해진 제도에 따른 부세와 요역, 3) 가벼운 형벌, 4) 빈민 구제, 5) 공상업 보호 등. 이렇게 인정을 펼치면, 그 정치는 왕도이다. "왕도는 맹자의 인정론이자 정책이었는데, 그 요점은 보민, 덕의 실행, 민심에의 복종이다."


다음으로 순자이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한 행위를 지향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인간 본성의 선악을 구분하지 않았다. 순자의 인간론은 인간의 자연성과 사회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자연 속 존재이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일정한 군체를 결성하고 일정한 조직을 갖추며 "집단생활"을 이룬다. '집단'이란 오늘날의 사회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집단을 공동체로 바꾸면 더 이해하기 쉬워질 것 같다. 순자는 인간이 사회 속의 인간임을 논의의 밑바탕에 둔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性)은 그 자체로 악하거나 선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의 성이 사회 속에서 표출되면, 정(情)과 욕(欲)이다. "성은 하늘이 이루어놓은 섯이다. 정은 성의 본질이다. 욕은 정이 감응한 것이다. 욕한 바를 얻고자 갈구하게 되면 정은 어쩔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성, 정, 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감각기관의 욕망: 이는 자연적 본성의 범위 안에 들어간다.

2) 이익을 좋아함: 이익은 감관의 욕망과 함께 자연스러운 요구를 넘어서는 주관적 욕망이기도 하다. (참조: 사람의 정이란 먹는 데 집짐승을 바라고, 입는 데 화려한 의상을 바라고, 행차하는 데 가마와 말이 있기를 바란다. 게다가 남은 재물을 축적하여 부유해지기를 바라는데, 세세연년 족함을 모른다. <영욕>편)

3) 배타성과 질투심

4) 영에를 좋아하고 치욕을 싫어함: 영예를 좋아함이란 기본적으로 권력욕이다.

여기서 감관의 욕망은 자연적 본능이지만, 나머지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사회성의 표현이다. 이들 각각은 선악을 논할 수 없지만 "이 본성 가운데 악의 기초적 인자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본능이 외부로 확장해갈 때 비로 악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주관적 욕망의 추구가 극에 달할 때, 사회 질서와 공동체 생활을 무너뜨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순자의 성악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즉, 이러한 성정욕에 순응하면 인간의 욕망이 정상적인 사회 질서와 충돌하여 이를 파괴하게 된다. 사람의 본성이 외부행위로 드러나면서 다른 사람이나 사회 질서와 충돌하는 자연성과 사회성의 모순을 순자는 지적한 것이다. "순자는 본성에 순응하면 '사양' '충신' '예의문리'와 대항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의미에서 보면 인성은 악한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파괴적 정욕이 수습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인성의 개조를 주장한다. 개조의 방법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이 성인의 "인위"이다. 이는 예와 법을 말한다. 예는 유가적 관념이지만, 법은 법가와도 이어진다. 순자는 도덕과 제도를 동시에 강조한 것이다. 개조의 두 번째 수단은 스승의 교육이며, 세 번째는 환경과 습속의 개조이다. 마지막은 수신이다.

맹자의 사상 속에서 정치체제는 도덕으로도 충분히 작동된다. 그가 본 인간은 성선을 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자가 봤을 때 진정한 문제는, 인간의 욕망 추구와 사회 질서 사이의 모순이었으므로, 단순히 도덕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덕(예치)에 제도(법치)를 거론한 것이다.

"예와 법은 인성을 교정하는 공구인데 성인이 만든 것이다. 또 성인의 예, 법, 제작은 사회적 모순에 기초한 것이다. 이들 모순은 사람의 본성, 욕망과 자연 및 사회 사이의 모순, 충돌을 바탕으로 전개된다...모순은 먼저 욕망의 무한성과 물질의 유한성 위에 드러난다...모순은 또 욕망의 평등성과 사회관계의 불평등성 위에서 드러난다." 예로서 이 모순을 다스려야 한다. 그것은 우선 사람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것이며, 또 사회적으로 구분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 예에 근거하여 제도(법)가 성립되어야 한다. (순자의 법 사상에 대하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정리하겠다)

순자의 예치는 경제적인 부분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일종의 이상국가론이 부국부민론인 것도 당연힌 것이겠다. "순자의 인식이 다른 유가들보다 깊이 있는 곳은 바로 그가 심각하게 경제 문제를 정치의 기초로 생각했고, 또 그것을 정치의 좋고 나쁨의 표식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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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동류의식을 느끼게 되는 원천은 바로 이것이다. 상상을 통해 고통을 받는 자와 입장을 바꿔봄으로써 우리는 고통을 받는 자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거나 또는 그가 느끼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 P5

다른 사람도 마음속으로 우리 마음속의 감정에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것은 없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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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성 어거스틴 지음, 선한용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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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제국의 변두리인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난 야심만만한 청년이었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말재주와 글쓰기 능력에도 뛰어난 인재였으며, 그의 중산층 부모는 공부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다. 수사학은 단순히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문이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수사학은 정치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고, 특히 고대 로마에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사회에서 태어나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수사학 교사직을 맡을 정도로 수사학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심지어 그는 당대 최상급의 교양인 변론술까지 통달했으니, 그는 매우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이것은 곧 그가 로마 사회에서 상당한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통해 로마에서 성공하고픈 세속적 야심으로 불타올랐었고, 지방 총독직에 오를 뻔했었다. 입신양명의 욕구로 부풀어 올랐던 야심찬 이 젊은이에게 공부란 출세의 발판이었다.

그러나 힌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던 구도자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 19살 때 읽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 불멸의 지혜(immortalitas sapientiae)를 향한 열정으로 고양되었다. 그가 맨 처음 진리를 찾았던 곳은 성경이었으나, 성경의 소박하고 단순한 문체는 수사학을 공부하고 여러 고전을 두루 섭렵한 그에게 하찮게 보였다. 성경을 덮은 그는 기독교를 멀리하고 마니교를 믿기 시작한다.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진리를 이해시키겠다는 마니교는 그에게 진리를 약속할 것만 같았다. 이로써 9년 동안 마니교는 그의 전 사유와 세계관을 지배하게 된다. 마니교는 단순히 사고방식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신념 체계였다.

마니교는 선악이원론과 유물론적 사고를 큰 특징으로 한다. 마니교는 선한 하나님의 존재와 그렇지 않은 악한 세상의 문제를(악의 문제)를 조화하기 위해서 악이 어디서 오느냐는 물음에 대해 '최고악의 본성'이라는 물질적 실체가 있다고 주장했다. 선악의 기원이 다르며, 선한 것은 모두 영원이고 악한 것은 모두 물질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무형의 정신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형체를 가진 덩어리라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조차도 물질적인 존재로 보았다. 마니교적 사유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영적, 정신적 실체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물질성을 가진 것만의 진리값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힌편으로 고매한 진리를 탐구하면서도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이런 마니교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마니교에 회의를 느끼고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인정하면서도 영적 실체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때 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외의 다른 실체를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7.1.1) 이것은 그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심취해 있던 마니교적 사유와 다르게 생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추측했던 것은 당신을 다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7.1.2) 하나의 사유 체계 내에서만 살았던 그에게는 하나님을 물질적 실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가 "영적 실체의 자존성"(가토 신로의 표현)을 받아들이려면, 우선 그 물질적 사고를 청산해야만 했다. 그것이 마니교를 정리하고 기독교로 귀의하는 첫 단계였다.

그런데 마니교적 사유는 그의 신앙뿐만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가치있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진리를 추구했으나 현실은 밑바닥 시궁창에서 뒹굴고 있었다. 마니교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진리로 인정하는 이들에게 성공이란 물질적 성공만을 의미할 뿐이다. 마니교를 자신의 신념 체계로 받아들였던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명예와 부와 결혼을 열망하고"(6.6.9) 있었다. 선한용은 명예(honores), 부(lucra), 결혼(coniugium)을 현대 말로는 권력, 돈, 성이라고 말한다. 재능을 가졌고 치기어린 공명심에 움직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명예, 부, 결혼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징표였다. 그는 이런 것들을 성취하고자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했다. 공부의 이유는 물질적 풍요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주의적 추구는 "아주 쓰디쓴 곤경"(6.9.9)이었다. 6권에서 그 자신도 현세적 이익추구와 진리 탐구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으나, 그것을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버릴 때 우리가 꽉 붙들 수 있는 확실한 진리를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6.10.17)이다. 마니교적 사유에 물든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자신의 삶의 토대를 이루는 반석이요 진리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보이는 사고방식이다. 더 많은 재산, 더 좋은 차, 더 좋은 스마트폰, 더 넓은 아파트와 집, 번듯한 직장에서 일을 하는지, 얼마를 버는지, 부동산 시세, 주식, 매력적인 이성과의 사랑, 신도의 숫자 등. 이런 것들이 그의 삶을 이루고 있고, 그 토대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만큼 확고하게 그의 삶을 장악한다. 회심 이전 아우구스티누스를 끝까지 괴롭혔던 것들도 지성적인 요소들보다도 이런 물질적인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회심한 이후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먼저 한 공적인 일이 수사학 교사직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마니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을 새로운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였고 새로운 원리에 토대를 둔 새 삶을 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 여정은 공부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큰 시사점을 준다. <고백록>은 엄밀한 의미의 자서전이 아니다. 이 책을 저술할 당시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삶을 신학적 관점에서 회고적으로 비평하고 재구성한 일종의 신학 에세이이다. 이 책에는 실재했을 역사적 서술과 그에 대한 현재 자신의 평가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이다. <고백록>을 집필하던 당시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자신의 공부를 되돌아보면서 그것이 모두 헛되었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최상위의 교양인 변론술을 익혔으며 로마의 고전 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도 익힌 인물이었다. 그는 비상한 이해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한번에 읽고 이해한다. 그는 최고의 교양인(교양을 좁게 정의하면)이라 할 만하다. "나는 그 당시에 학예라고 부르는 방면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구입하여 모조리 읽고 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4.16.30) 그러나 이 득의양양한 학자의 발언은 다음 문장에서 빛을 바랜다. "나는 그 책들을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만 그 책 속에 있는 참되고 확실성 있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나의 삶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온갖 서적을 다 읽고, 지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읽고서도 인생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자조적 비판은, 역시 다방면의 책을 읽고 어려운 고전을 머리 싸매며 읽어나가는 나에게는 힘빠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한탄은 모든 공부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아니면 세속적 성공을 위해서?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중 하나일 수도 있고, 전부 다일 수도 있다.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그래보인다. 그가 자유학예를 익힌 것은 진리를 알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앎을 충족하기 위해서이고 무엇보다 성공을 위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의 공부는 그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도 변론술도 그의 삶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 권력욕을 단죄하지만, 그 못지않게 단지 앎을 위한 공부도 경계한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는 공부는 기만술이다. 그가 <고백록>에서 수사학과 변론술을 가리켜 남을 속이는 기술이라고 경멸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귀의하는 도정에는 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있었다. 플라톤주의는 그로 하여금 영적 실체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마니교의 유물론적 사유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이런 지적인 변화가 훗날 그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적 회심의 과정을 담은 7권 1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렇듯 나는 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우둔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7.1.2, nec mihimet ipsi vel ipse conspicuus) 공부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포함하며,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마니교적 물질적 사고 이외에 다른 방식의 사유 체계를 접함으로써 기존의 사고방식을 점검하고 그것의 잘못을 인식하고 새로운 길(영적 실체)로 자신이 함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증명해내어 생각을 바꾸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나에게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이 과정은 뼈를 깎는 듯한 실존의 고통스러운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신념 체계와 그에 기반한 삶의 방식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유동하는 것, 이것이 공부의 또 다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10권 23장 34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공부가, 교양이 내면을 바꾸고 삶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 '지식 쌓기'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이들의 공부에 통렬한 야유를 가한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진리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그 행복을 사랑한다 하면서 진리를 전파하는 당신의 사람은 적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속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속고 있음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의 자리에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가져다 놓고는 그것들을 위해 진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마니교도들을 생각하면, 이 지적이 과거의 것으로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비판은 사실 <고백록>에서 낯설지 않다. <고백록> 1권에서 자신의 학창시절을 회고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문법 교육은 중시하면서 사람을 경시하는 풍조를 지적한다. 문법학자, 학교 교사들은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hominem'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에는 주의하면서 정작 실제 사람을 대할 때는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 공부 깨나했다는 그들은 hominem을 틀리게 발음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잘못 발음한 사람을 깔보지만, 사람의 마음에 상처주는 일에는 전혀 서슴치 않는다. 이것은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공부의 폐해라고 하겠다.

<고백록>은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텍스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모든 공부하는 이들의 경전이다. 회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10.1.1.) 알기 위해 공부한다.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무한자에 비추인 유한자의 조건을 앎으로써 자신의 삶을 무엇에 근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반성적 성찰의 매개체로서의 공부이다. 누군가 나에게 왜 공부하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돈과 명예 때문일까? 한국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교수가 아닌 이상 공부로 먹고 사는 사람에 대한 대우가 어떤지 뻔히 아는 이상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교수가 꿈인 것도 아니므로 명예는 더더욱 아니다. 공부에 무언가 혁명적 힘이 있어서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마르크스처럼 세계를 이해하고 변혁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앎과 이해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과 인간을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사회 속의 개인을 문제삼지 않고 있다. 나는 인간, 하나님, 내가 사는 사회를 알고 싶다. 이를 퉁해서 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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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4-30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니교에서 회의주의로 신플라톤주의로 그리고 기독교로 그렇더라구요. 요즘에 신플라톤주의에 대해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Redman 2022-04-30 17:3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고대 서양 철학, 기독교 사상을 공부하려면 신플라톤주의도 필수죠.
 

맑스는 항상 자신을 자본주의의 적으로 여겼지만, 그의 적개심은 더욱 재미있어지고, 더욱 찬영의 기미를 띠게 되고, 더욱 변증법적으로 된다. 나는 맑스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전 과정을 하나의 웅장한 이야기로 보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주제를 ‘근대성MODERNITY‘으로 보았다. - P140

맑스는 비록 자신을 유물론자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의 최고 관심사는 부르주아가 창조한 물질적 대상들이 아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삶과 에너지의 작용, 힘,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노동, 이동, 경작, 통신, 조직, 자연과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 등으로,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그리고 끊임없이 갱신된 활동 양식인 것이다. - P150

그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역동 속에서 올바른 삶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있다. 그 새로운 모습이란 최종적으로 완성된 삶도 아니고, 일정하게 규정된 정적인 본질의 구현체도 아니며, 지속적이고, 불안정하고, 개방적이고, 무제한적인 성장의 과정이다. 그리하여 맑스는 점더 완전하고 좀더 심오한 근대성을 통하여 근대성의 상처들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 P157

맑스가 기대하는 것은, 노동계급이라는 갖지 못한 사람들이 일단 "자신들이 현실적인 생활 조건들과 자신들의 동료들과의 관계들을...대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그들이 한데 뭉쳐 그들 모두에게 스며드는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결사체는 새로운 공동체적 삶에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집단적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선언>의 주요한 목적의 하나는 그런 추위에서 탈출하는 길을 가리켜주는 것, 곧 공동체의 온기에 대한 공통의 열망을 키우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 P177

이 에세이에서 내가 깅조하는 것들은 맑스의 사상 안에 존재하는 회의적이고 자기비판적인 저변의 흐름들이다. 어떤 독자들은 오직 비판과 자기비판만을 생각하고, 희망들은 유토피아적이고 순진하다며 내팽개치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맑스가 비판적 사고의 본질적 요체라고 본 것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그가 이해한 바의 비판은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변증법적 과정의 일부였다. 그것은 본래 역동적이며, 비판자가 그를 비판하는 사람과 그 자신 모두를 비판하도록 밀어주고 고무하는 것이며, 양쪽을 새로운 종합을 향햐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월에 대한 엉터리 요구들을 폭로하는 것은 참된 초월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초월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은 정체와 체념에 후광을 씌워주는 것이며, 맑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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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덕목 - 개정판
하비 맨스필드 지음, 이태영 외 옮김 / 말글빛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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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마키아벨리에 관한 논문과 평론들의 묶음이다. 여러 논문을 집대성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 책은 하나의 대주제 아래 묶여 일관성을 띠고 있다. 그 대주제란 "자기 자신의 사상 속에 중심적 인물로 존재하는 마키아벨리", 곧 "마키아벨리의 '자기 자신이 군주라는 기묘한 암시'"이다. 이 '기묘한 암시'는 저자의 고유한 발견은 아니다. 저자는 미키아벨리를 연구하면서 "스트라우스가 전반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수많은 구체적인 논점들 중 일부를 철저하게 뒤따랐다." 저자 하비 맨스필드는 레오 스트라우스를 사숙한 학자로서, 맨스필드의 정치철학은 스트라우스에게서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이 사실은 이 책의 논지나 마키아벨리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레오 스트라우스를 비롯한 스트라우시언들은 근대의 정치학을 경멸하고 고대의 정치철학을 지향한다. 이들이 보는 정치철학은 덕이 있는 가치판단의 학이라 정의할 수 있는데,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정치철학은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대한 의견을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이다"(<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이런 관점에서 가들은 고대의 정치철학을 덕의 정치철학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크세노폰 등을 덕의 정치철학자로 규정한다. 가치를 중시하는 정치철학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근대 정치학을 최초로 정초한 정치사상가가 바로 마키아벨리이며, 홉스와 로크가 이를 계승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마키아벨리) 혁명은 우리 시대의 언어로 대강이나마 표현하자면, 종교의 보호를 받은 덕목으로부터, 세속주의로 인해 정당화되는 사리사욕으로의 변화로 정의될 수 있다. 그 혁명은 또 다시 우리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근대성'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2.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고대 정치철학과 비교했을 때 그 전모가 드러난다.

(1) 인간론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인간을 요약하자면 공화주의 시민이 아니라 군주이며, 군주의 최고 정점은 '혼자가 되는 것essere solo'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인간은 무엇보다 폴리스라는 공동체 속의 인간이었다. 이들은 정체(politeia, regime)를 우선적으로 얘기하면서 정체의 목적은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조화로운 목적을 지향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정치철학은 최고의 이상적인 정체에 대해 논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은 폴리스에 대한 목적론적 정의로 시작한다. "우리는 모든 폴리스가 어떤 종류의 공동체이고, 모든 공동체는 어떤 좋음을 위해서 구성된다는 것을 관찰한다...모든 공동체들을 포괄하는 이 '공동체'는 가장 으뜸가는, 다시 말해 모든 좋음들 중에서 최고의 좋음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폴리스라고 불리는, 즉 폴리스적 삶을 형성하는 공동체이다."(1252a1~6)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관점을 뒤집는다. 그에게 인간은 '시민'이 아니라 군주이며, 더이상 공동체 속 시민이 아니라 '혼자가 되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랑으로 삼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공동체의 지향점인 이상향을 얘기하는데, 이는 개개 시민의 도덕적 분별을 중시한 입장이다. 마키아벨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교활성(astuzia)"이다. 그가 보는 인간은 이해타산적 필요에 따라 움직이며 "획득에 대한 필요성"이야말로 인간 무엇보다 군주의 결정적인 행위동기이다.

(2) 실천학과 이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학과 실천학의 목적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며, 실천학은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만들기 위한 학문이고 이론학은 사고하고 정의하고 알기 위한 학문으로 분류하였다. 그가 '도덕적 덕'과 '지적 덕'을 구분한 것은 이런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철학자의 덕목은 행위와 동떨어진 사상이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좀 더 완벽하고 자족적이다. 그의 진리는 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진리, 실효적 진리인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론학과 실천학의 구분을 폐기한다. 그의 사상 안에서 양자는 하나로 통일되어있으며, 이제 무엇인가를 알고 사고하능 것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집약한 표현이, <군주론> 15장에서 나오는 '실효적 진리, Verita Effettuale'이다.

(3) 덕(virtù)
마키아벨리의 정치학 이해는 '비르투'라는 개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덕'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아레테 등으로 쓰였던 오래된 개념이지만, 마키아벨리는 이 개념을 뒤바꾸어 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덕 자체를 위해, 덕스러움을 위해 덕스러운 행위가 행해진다고 봤다면,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덕이란 결코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고, 그 최종목표는 획득이다." 획득을 목표로 하는 덕은 '필요'에 기반한다. '필요에 의한 획득'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억지로라도 악을 행하게 이끈다. 덕의 정치적인 측면은 군주로 하여금 물려받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무장을 획득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덕은 인상적이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외양과 결과만을 보기에 군주는 덕스러워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상적인 것으로서의 덕은 "지속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악덕을 필요로 한다." 덕과 악덕의 대조를 통해 덕은 실효적으로 효과를 드러내며, 이 대조를 이루게 하려면 이 둘 모두를 실천해야 한다.

(4) 신군주
"마키아벨리에게는 단 하나의 시작이 있다. 즉, 필요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신이나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이 시작된다...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보호받지 못한 채로, 불안한 채로, 그저 두려워하며 시닥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로서의 인간을 강조했기에, 그의 논의는 군주로 응집된다. 마키아벨리와 그의 신군주들은 새로워야 한다. 이 새로운 군주의 덕은 타고난 품성이 아니며, 유가에서 말하듯 내면의 수양을 통해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획득에 의한 필요'에 따라 성립된다. 군주는 필요에 직면하여 자신의 덕을 보여야 한다. 그 덕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덕목은 군주가 '신하와 친구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그들은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것이다." 덕의 발휘에서 중요한 것은 '인상'이다. 신군주는 외양의 결과로써 미움이나 경멸을 피하면서 실효적 진리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아니모animo, 즉 살아 숨쉬는 정신을 가져야만 한다...이는 역설적이게도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자기 방어의 정신이다. 냉정한 이성은 단독으로 신중한 행동을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아서 붙같은 기질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마키아벨리의 덕 개념은 고대 로마에서 기인한다. "로마의 덕목은 정치와 전쟁에 존재한다. 이는 철학이나 종교에 대한 지적 또는 명상적 덕목이 아니다." 플라톤의 철인 군주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명상적 관조로써 획득한 지혜로 통치한다. 아니모를 가진 군주는 사색하지 않으며 획득의 필요에 따라 행동한다. 여기서는 더이상 인간성의 완성을 지향하는 고대 정치철학의 자취는 볼 수 없다. 근대의 정치은 이렇게 고대의 덕을 폐기하며 이를 획득과 필요로 대체한다.


3.
이 책의 원제는 <Machiavelli's Virtue>로, Virtue는 마키아벨리의 핵심 술어인 비르투의 역어이며, 한국어판 역자들은 이를 다시 '덕목'으로 옮겼다. 그러나 '덕목'보다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역어인 '덕'이나 '역량'과 같은 단어가 더 적절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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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5-0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Redman 2022-05-08 11: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2-05-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Redman 2022-05-08 11: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님! 예상하지 못했네요 ㅋㅋ